"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사상이 내 마음의 지평선에서 떠올랐네."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즐거운 학문>
"존재를 최대한 풍요롭게 실현하고 최대한 만끽하기 위한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대양으로 너의 배를 띄워라!
너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자들과의 대립 속에서,
그리고 특히 너 자신과의 대립 속에서 살아라!" <즐거운 학문>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지금까지 인간이 쓴 것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깊이 있는 책을 한 권 썼다"고 <아침놀>에 대한 한없는 자부심을 알린 곳이 바로 이 실스마리아였다.
하지만 바로 두 달이 채 안 돼 최근작에 대한 니체 자신의 평가가 급변했다.
"올해에 나는 다른 책을 한 권 또 써야 될 것 같네. 이 새 책의 내용과 구성을 생각해야만 나는 저 형편없이 조각난 철학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네." '가장 깊이 있는 책'이 '형편없이 조각난 책'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아침놀>의 내용이 허술하다고 느꼈던 것인데, 그렇다면 그 두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881년 8월 6일을 기점으로 하여 니체 사상의 삶이 그 전과 그 후로 나뉜다.
"그날 나는 실바플라나 호수의 숲을 걷고 있었다. 수를레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옆에 나는 멈추어 섰다. 그때 이 생각이 떠올랐다." <이 사람을 보라>
이 생각은 '동일한 것(동일자)의 영원회귀' 사상이다.
19세기 말의 이 시점에서 생동하던 시대의 시인들이 '영감'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 뚜렷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을까? 없다면 내가 그것을 말하리라. 조금이라도 미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실제로 자기가 압도적으로 강력한 힘의 단순한 화신, 단순한 입, 단순한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념을 거의 물리치지 못할 것이다. 돌연 입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확실함과 정묘함으로, 깊은 내면에서부터 뒤흔들리고 뒤엎는 어떤 것이 눈에 보이게 되고 귀에 들리게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계시라는 개념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을 서술하고 있을 따름이다.
사상은 듣는 것이지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받는 것이어서 누가 주는지 묻지 않는다. 번개처럼 필연성을 지닌 하나의 사상이 갑자기 번득인다. 나는 한 번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엄청난 긴장이 눈물의 강으로 터져 버리며, 발걸음이 자기도 모르게 격렬해졌다가 늦추어졌다가도 하는 황홀경, 대단하고도 미묘한 한기를 가장 명료하게 의식하면서도 그 한기에 의해 발가락마저 오싹해지는 무아지경. ... 모든 것이 정말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지만, 마치 자유로운 느낌, 무조건성, 힘, 그리고 신성함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형상과 비유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이다. 형상이 무엇이고 비유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은 이제 없어진다. 일체는 가장 친근한, 가장 올바른,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서 나온다. ... 마치 사물이 자기 발로 다가와 비유로써 몸을 의탁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 이것이 나의 영감의 체험이다. <이 사람을 보라>
니체는 이 압도적인 사상 체험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만감과 고양감을 느꼈다. 동시에 이 사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적잖이 당혹스러워했고, 이런 영감이 자신을 습격했다는 사실 자체에 두려움을 느꼈다.
어떤 사람이 사물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어떻게 계시로 느낄 수 있는가? 종교의 기원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생각을 계시로 느낄 수 있는 인간이 항상 있었다. 그 전제는 그가 이전에 이미 계시를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획득한다. 그의 의식 속에 세계와 존재를 포괄하는 독자적인 위대한 가설을 갖게 되면서 느끼는 환희가 벅찰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는 감히 자신을 그러한 환희의 창조자라고 느끼지 못하며, 그것이 원인과, 나아가 저 새로운 사상의 원인을 신의 계시로 여겨 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위해한 행복의 창시자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의 비관주의적인 회의의 내용이다. <아침놀>
니체는 세상의 비밀을 알았다는 기쁨에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동시에 그는 사진을 엄습한 사상에 정신을 집중하고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이 사상을 따져보고, 시험하고, 그리고 답을 찾아내려고 했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라는 영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힘들의 세계는 감소하는 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무력해졌을 것이고 사라졌을 것이다. 힘들의 세계는 정지하는 법도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 성취되었을 것이며, 존재자의 시계는 멈추어서 있을 것이다. 따라서 힘들의 세계는 결코 균형에 이르는 법이 없고, 한시도 휴식하는 법이 없으며, 그 힘과 운동은 매시마다 똑같이 크다. 이 세계가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 있든지 간에, 거기에 이미 도달했음에 틀림없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무수히 그랬을 것이다.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이미 한 번 있었고, 여러 번 있었으며, 그렇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모든 힘들은 지금과 똑같이 분배돼 있다. 이 순간을 낳은 순간도, 그리고 현재 이 순간의 아이로 태어난 그 순간도. 오, 사람아!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우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끝날 것이다. 네가 생겨난 모든 조건들이 세계의 순환속에서 서로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사이의 위대한 순간의 시간, 그다음에 너는 모든 고통과 모든 쾌감과 모든 기쁨과 모든 적과 모든 희망과 모든 오류와 모든 풀줄기와 모든 태양빛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모든 사물이 연관 전체를 되찾을 것이다.
너게 하나의 낟알로 들어 잇는 이 고리(원한)는 항상 다시 빛난다. 그리고 인간 존재 전체의 모든 고리 속에는 항상 어떤 순간이 있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단 한 사람에게, 그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생각, 즉 모든 것의 영원회귀라는 사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인류에게 이때는 매번 정오의 순간이 된다. <유고>
"그러나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면, 나의 행동에 대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정말로 그 일을 몇 번이고 수없이 계속하고 싶은 것인가?" 라는 물음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유고>
아득하고 낯선 천상의 행복과 은총과 은혜를 꿈꾸며 학수고대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어 하며,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살 것! 우리의 사명은 매순간 우리 가까이 다가온다. <유고>
이 두 인용문은 앞의 인용문과 다른 종류의 진술을 담고 있다. " '내가 정말로 그 일을 몇 번이고 수없이 계속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물음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라고 단언하고,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어하며,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살 것!"이라고 요구하는 이 문장은 "모든 것이 똑같이 영원회귀한다"라는 우주론적 진술이 아니라, "그렇게 영원히 똑같이 되풀이되더라도 절대로,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의욕과 의지의 명령문이다. 이걸 '실존적 영원회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말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윤리적 명령이다.
'우주적 영원회귀'와 '실존적 영원회귀'는 분명히 의미의 편차가 있으며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 두 개의 명제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 둘을 하나로 통일해 이해해 보려 했지만, 그런 결론에 좀처럼 도달할 수 없었다.
영원회귀 체험은 그 자신을 삶의 질곡에서 구제해주고 몇 년 더 살아도 될 삶의 이유를 제시해주었다. 영원회귀는 환희와 희열의 체험이었다. 동시에 니체는 이 압도적인 체험을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해시켜야 한다는 강박적 의무감을 느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체험을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한다면? 니체는 이제 새 책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영원회귀 체험 이전에 출간된 <아침놀>이 불완전한 책으로 느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과업을 떠맡게 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고, 니체는 그보다 먼저 다른 책을 써 <즐거운 학문>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한다. 영원회귀 사상을 이해시키기 어려우니 그 사상이 마음속에서 완전히 무르익어 해명될 때까지 기다리며 준비하고, 대신 이 사상 체험 위에서 얻게 된 생각들을 정리해 먼저 펴내자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즐거운 학문>은 아포리즘을 배열하는 형식에서나 자유정신의 모험과 해방을 이야기하는 내용에서나 <아침놀>의 연장선상에 있는 저작이자 니체 사상의 중기를 마무리하는 저작이다. 동시에 <즐거운 학문>은 후기 니체 사상의 핵심 주제인 '영원회귀', '신의 죽음',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중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다리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혹은 어느 밤, 한 악마가 가장 깊은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당신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너는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을 다시 한 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 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네 생애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다시 되풀이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동일한 순서로 말이다.
이 거미도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지금의 이순간까지도 그리고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그것과 함께 미세한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 또한 같이 회전할 것이다." 당신은 땅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서 그렇게 말한 그 악마를 저주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그 악마에게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그런 엄청난 순간을 체험한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사상이 당신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은 현재의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고 아마 분쇄해버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일 하나하나에 대해서 가해지는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그 이상의 어느 것도 원하지 않기 위해서 너는 너 자신과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가야만 하는가? <즐거운 학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니체가 아니라 '악마'다. '악마가 말한다면'이라는 가정법 아래서, 그럴 경우에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 구성은 니체가 확신이 없거나 독자를 설득할 자신이 없을 때 사용하는 가면 쓰기 방식이다.
이 악마의 속삭임은 니체 자신의 속삭임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니체는 이 속삭임의 내용을 논증하거나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악마를 대신 등장시켜 제3자의 주장을 전하는 듯이 이야기한 것이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그것과 함께 미세한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 또한 같이 회전할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 세계, 이 우주가 영원히 똑같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이야기며,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그렇게 되풀이되더라도 그 반복을 흔쾌히 긍정할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그러나 이 두 명제는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영원히 회귀한다면,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을 포함해 세계의 존재가 그렇게 되어 먹었다면, 그런 반복을 의욕할 필요가 없다. 그냥 살면 될 뿐이다. 반대로 그렇게 영원한 반복을 의욕한다면, 그것은 세계가 그렇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욕은 없는 것을 구하는 마음이다. 존재와 의지의 이 모순, 이 어긋남, 이 상호 충돌을 이 아포리즘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게 해결되지 않은 채, 사실상 두 종류의 영원회귀가 나열되고 있기 때문에, 니체는 악마의 가면을 빌려 실험적으로, 가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사상에 관해서 새롭게 얻은 것은 없네. 하지만 이 사상을 버리려고 하면 왜 그렇게 힘든지!"
'신의 죽음'을 알리는 아포리즘도 있다.
밝은 오전에 등불을 켜 들고 광장에 달려 나와 "나는 신을 찾는다! 나는 신을 찾는다!" 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저 광인에 대해서 그대들은 들은 적이 없는가? 마침 광장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어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신이 없어졌나 보지?"라고 어떤 사람은 말했고, "신이 어린아이처럼 길을 잃었나 보지?"라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니면 신이 숨어 있나 보지?"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나 보지?" "신이 항해를 떠났나?" "아니면 신이 이민을 갔나?"라고 그들은 떠들썩하게 소리치며 비웃었다.
광인은 그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을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신이 어디로 갔냐고?" 그는 소리쳤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해주마!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신의 살해자다! 하지만 우리가 어떠헥 그렇게 엄청난 일을 했을까? ... 이 지구를 태양의 사슬로부터 풀어 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 무한한 무를 통과하는 것처럼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밤과 밤이 연이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낮에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신을 파묻은 자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들도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해자 중의 살해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이싿.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 여기서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들을 둘러보았다. .... 마침내 그는 자신의 등불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등불은 산산조각이 나고 불은 꺼져버렸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그는 계속 말한다.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 도상에 있고 방황 중에 있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번개와 천둥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미 행해진 행위라도 보이고 들리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 행위가 인간들에게는 아직도 가장 멀리 있는 별보다도 더욱 멀리 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이 이 짓을 저지른 것이다!" <즐거운 학문>
니체가 신의 죽음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것은 니힐리즘(허무주의)의 도래다. 신이 사라지면 신을 근거로 삼아 성립됐던 가치들이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삶의 의미를 지탱하는 토대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니체의 진단이다. 신의 죽음이라는 사태는 이렇게 인간의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살아갈 힘을 부여했던 것의 사멸을 의미한다.
신의 죽음은 플라톤 이래의 형이상학적 세계의 붕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신은 야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론과 목적론에 근거하고 있는 모든 형이상학적 세계 또는 가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세상, 곧 감각적인 세계와 신의 세상, 곧 초감각적인 세계가 나뉘어 있고 신의 세상이 인간의 세상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 이원론이라면,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의 나라의 도래에 있으며 역사의 끝에는 신의 인간 구원이 있다는 것이 목적론이다.
이와 관련해 하이데거는 "신은 이념이나 이상들의 영역을 지칭하기 위한 이름"이라고 말하면서 이 신이 죽었다는 것은 "초감성적인 세계가 영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초감성적 세계는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형이상학은, 다시 말해 니체가 플라톤주의라고 이해하였던 서양 철학은 그 종말에 이른 것이다."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고 방향을 잡아주던 신의 세계, 초감각적 세계, 본질적 세계, 목적의 왕국이 신의 죽음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인간 자신이 스스로 목적을 찾고 왕국을 세우는 일뿐이다.
광인은 신이 죽었다고만 선언하지 않고, "너희들과 내가 신을 죽였다. 우리 모두가 신의 살해자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신이 죽으면 허무주의가 밀려들 것이 뻔한데도, 그 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광인은 그렇다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니체는 니힐리즘 너머를 보고 있는 것이다. 신을 죽이고 그래서 닥쳐올 니힐리즘을 넘어서려면 인간이 이제 신의 위치에 서야 한다. "인간 자신이 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자신이 모든 의미와 척도를 부여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 인간을 넘어선 존재, '초인'의 등장이 예비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지혜를 나누어주려고 사람들 사이로 내려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의 철학적 물음은 그대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이어진다.
<즐거운 학문>에서 공표하는 또 하나의 사상이 '운명애 Amor fati'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아직 생각한다. 나는 아직 살아야만 한다. 아직 생각해야만 하니까.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신의 소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말한다. 그래서 나도 지금 내가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 올해 처음으로 내 마음을 스쳐가는 생각, 앞으로의 삶에서 내게 근거와 보증과 달콤함이 될 생각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사물 안에 있는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그리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즐거운 학문>
이 아포리즘의 제목은 '새해에'다. 니체는 새해 소망 겸 새해 결심을 밝히고 있다. 먼저 니체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스스로 확인한다. 그런데 그의 존재 의미는 '생각하는 것'에 있다. 사유하고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에게는 삶의 의미요 가치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고마운 것도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는 인식 작업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앎의 전사' 니체에게 삶과 인식은 둘이 아니다.
그런 니체가 새해 결심으로 운명애를 이야기한다. 운명애란 니체에게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명령문이다. 그렇다면 운명을 사랑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니체는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것, 그리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피해갈 수 없이 닥쳐오는 것, 겪어야 하는 것이라면 부정하고 거부하지 말고 흔쾌하게 받아들여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자는 것이다.
과거에 진리로서 ... 그대가 사랑했던 것이 이제 오류로 나타나면 그대는 그것을 배척하고는 그대의 이성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대가 다른 사람이었을 그 당시에 저 오류는 아마도 그대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진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대에게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당시까지 보아서는 안 되었던 많은 것들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피부와 같은 것이었다. 그대의 이성이 아니라, 그대의 새로운 삶이 과거의 견해를 죽여버린 것이다. <즐거운 학문>
이 구절은 오류에 대한 대단한 긍정이다. 틀린 것, 잘못된 것도 한 때는 진리의 가치가 있었고, 그렇게 진리로서 삶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 따라서 오류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젊은 시절 내내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는 니체에게 진리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류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했고 진리로 받아들였던 그 시절의 기억을 모두 부정하고 버려야 하는가. 그 오류가 한 시기의 필연적 경험이었다면 그 필연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운명을 사랑하는 법, 곧 운명애다.
바그너의 제자인 우리는 바그너에게 있는 '진실하고' 근원적인 것에 충실히 머물러 있기로 하자. ... 그가 사상가로서 너무나도 자주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 그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사나이가 되어라! 그리하여 나를 따르지 말고 너 자신을 따르라! 너 자신을!" 우리의 삶도 우리 스스로에 대해 권리를 지녀야 마땅하다! 우리도 또한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순진무구한 자기애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성장하고 꽃을 피워야 한다. <즐거운 학문>
니체의 운명애는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움과 결합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자유는 필연의 인식임을 논증한다. 필연적인 것들을 수용하고 그 필연성을 따름으로써 자유를 누린다는 발상은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을 아름다움이라는 적극적 느낌으로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니체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운명애를 더 절실하게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스피노자의 철학은 영원회귀의 영감을 얻는데 어떤 계기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스피노자에 관한 편지를 쓰고 일주일 뒤 니체는 그 '영원회귀 체험'을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병고와 회복의 원환이 그때까지 니체의 삶이었다. 질병과 고통의 끊임없는 되풀이 속에서도 다시 새 날이 밝아오면 니체는 삶의 의욕과 희열을 느꼈다. 이 고통의 영원회귀 속에서 그 순환을 필연으로 인식함으로써 자유를 느끼고 삶의 의욕을 다시 일으키는 것, 니체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운명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즐거운 학문>까지 관통하는 주어는 자유정신이다. 자유정신은 모든 관습적,도덕적 편견에서 해방된 정신이고, 그 편견을 벗겨내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정신이며, 인식의 기쁨을 삶의 에너지로 삼은 정신이다.
아니다! 삶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나는 삶이 더 참되고, 더 열망할 가치가 있고, 더 비밀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위대한 해방자가 내게 찾아온 그날 이우로! 삶이 의무나 저주받은 숙명이나 기만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의 실험이 될 수 있다는 저 사상이 나를 찾아온 그날 이후로! 인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것일지 몰라도, ... 내게 그것은 영웅적 감정이 춤추고 뛰어노는 위험과 승리의 세계다. '삶은 인식의 수단'이다. 이 원칙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인간은 용감해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즐겁게 살고 즐겁게 웃게 된다. 전쟁과 승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자가 어찌 멋지게 웃고 멋지게 사는 것을 알겠는가? <즐거운 학문>
이 시기에 들어 니체는 삶이 '인식의 수단'이라는 확고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으로부터 위험을 가리지 않는 인식의 전쟁으로 뛰어들려는 전사의 에너지를 끌어냈다.
우리는 대지를 떠나 출항했다! 우리는 건너온 다리를 태워버렸다. 게다가 우리는 뒤에 남아 있는 대지까지 불살라버렸다! 자, 작은 배여, 조심하라. 대양이 너를 도처에서 둘러싸고 있다. 사실, 대양은 언제나 사납게 울부짖지만은 않는다. 때로 그것은 마치 비단과 황금처럼, 그리고 부드럽고 기분 좋은 꿈처럼 펼쳐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너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대양이 무한하다는 것을, 그리고 무한하다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는 것을. ... 오, 마치 대지에 더 많은 자유가 있기라도 하는 양 대지를 향한 향수병이 너를 사로잡는다면! 그러나 더는 어떤 '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즐거운 학문>
니체 자신은 그 무서운 대양을 가로질러 건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아포리즘은 인식을 향한 거대한 충동과 중도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함께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식 욕구는 결국 두려움도 이겨낼 것이다. 이것이 인식하는 전사의 영웅적인 모습이다.
나는 더욱 남자답고 전투적인 시대, 용맹이 다시 존경받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모든 징조를 환영한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더 고귀한 시대를 위한 길을 준비하고, 고귀한 시대가 언젠가는 필요로 하게 될 힘을 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귀한 시대는 영웅주의를 인식하고, 사상과 그 결과물들을 위해 '전쟁을 벌일'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수많은 용맹스러운 개척자들이 필요하다. ... 다시 말하면 침묵할 줄 아는자, 고독해질 줄 아는 자, 결단을 내릴 줄 아는자, ....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 안에서 극복되어야 할 것을 찾아내는 성향을 타고난 자, 승리에 임해서 관용을 베풀고 패배한 자의 작은 허영심에 너그러울 뿐 아니라 쾌할하며, 인내심이 있고, 소박하며, 거대한 허영심을 경멸하는 자 ... 명령할 때는 능숙하고 확신에 차 있지만 필요하다면 기꺼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 명령할 때나 명령받을 때나 그 자신의 명분을 위해 종사하며 그래서 긍지를 지닌 자, 더 많은 위험에 부딪히고, 더 많이 생산적이며 더 많이 행복한 자! <즐거운 학문>
그러므로 나를 믿어라! 존재를 최대한 풍요롭게 실현하고 최대한 만끽하기 위한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대양으로 너의 배를 띄워라! 너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자들과의 대립 속에서, 그리고 특히 너 자신과의 대립 속에서 살아라! 너 앎(인식)을 찾는 자여! 지배자나 소유자가 될 수 없다면, 약탈자, 정복자가 되어라. 겁 많은 사슴처럼 숲 속에서 숨어서 살아가야 하는 지겨운 시대는 곧 지나갈 것이다! ... 인식은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한다. 인식과 더불어 너도 그것을 원한다. <즐거운 학문>
이 글들은 분명히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획득하라고 촉구하는 글이다.
바그너가 예술 창조를 통해 권력의지를 실현했듯이, 니체는 사상 창조를 통해 권력의지를 실현하려 했다. 바그너에게 주어진 것이 음악이라는 수단뿐이었듯이 니체에게도 주어진 것이 사상이라는 수단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글과 단어와 문장을, 자신의 생각을, 사유를 병사처럼 사용했다.
니체는 전쟁을 회피해서는 안 되며 악해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했다.
앎의 의지가 도달한 악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근시안적 안목에서 그들의 이웃 사람들을 유익한 사람과 해로운 사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간단하게 구분하곤 한다. 그러나 넓은 안목에서 인간 전체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하면 이처럼 간단한 구분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되고 결국 그것을 포기하게 된다. 심지어 가장 해로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종족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가장 유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없었다면 인류가 이미 오래 전에 쇠약해지거나 타락했을 충동들이 자기 자신에게 혹은 그의 영향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존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증오, 악의적인 기쁨, 약탈욕과 지배욕, 그리고 악이라고 불리는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종족 보존의 경이로운 경제학의 일부이다. <즐거운 학문>
강력하고 극악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지금까지 인류를 가장 많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들이 잠들어 있는 정열에 거듭 불을 붙이고 비교와 모순에 대한 감각, 새로운 것, 모험적인 것, 시도되지 않은 것을 향한 욕구를 거듭 일깨움으로써, 인간들로 하여금 의견에 의견을 대립시키고 모범에 모범을 대립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왔다. .... 정복하고, 낡은 경계석을 무너뜨리고, 낡은 신성함을 전복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은 어떤 경우이건 악한 것이다. ... 진실은 악한 충동도 선한 충동만큼이나 합목적적이고 종족을 보존하는 데 유익하며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
악. 최고의 생산적인 인간과 민족들의 삶을 조사하면서 이렇게 자문해보라. 나무가 악천후나 폭풍을 겪지 않고 자랑스럽게 하늘 높이 자라날 수 있겠는가? 외부에서 가해지는 불운이나 역경, 증오, 질투, 고집, 불신, 냉혹, 탐욕, 폭력 등은 이것들이 아니라면 덕의 위대한 성장이 불가능한, 그러므로 유익한 환경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나약한 천성을 지닌 자를 멸망케 하는 독은 강한자를 강화시킨다. 이때 강한 자는 이것을 독이라 부르지 않는다. <즐거운 학문>
커다란 고통을 가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자신 안에서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 위대한 것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고통을 견디는 것은 최소한의 것이다. 연약한 아녀자나 노예들도 그런 일에 숙달될 수 있다. 하지만 커다란 고통을 가하고, 고통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내심의 곤혹과 불안에 빠져들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며, 위대함에 속하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
니체는 이렇게 악을 회피하지 않는다. 악의 유용성을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위대함에 속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결핍에서 철학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풍요로움과 활력에서 철학을 한다면서 "병의 압박에서 생겨난 사상이 어떤 모습일까?"하고 묻는다. 평화보다 전쟁을 사랑해야 한다고....
인식과 실천의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그리고 실천으로 나타나지 않는 인식이라면, 그렇게 고통스런 노력을 다해 획득할 이유도 없다.
자신을 깊이 있게 아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신을 깊이 있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모호함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대중은 바닥을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깊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겁이 많아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 <즐거운 학문>
니체가 최종적으로 이런 인식의 모험을 통해, 그리고 사유의 실험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니체는 "너의 양심은 무엇이라 말하는가?"라고 스스로 묻고 이렇게 답한다.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좀 더 부연해서 "우리는 본래의 우리 자신이 되기를 원한다. 새로운 자, 고유한 자, 비교할 수 없는 자, 자신만의 법칙을 만드는 자,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자!"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를 창조하여 본래의 자기 자신 되기. 니체는 이제 이렇게 자기를 초월해 자기 자신이 되는 자를 기리켜 '초인(위버멘슈)'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08 간주곡 루 살로메
"고독,
이것이 니체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초의 강한 인상이었다."
"어느 별에서 떨어졌기에 우리는 이곳에서 만난 걸까요?"
'운명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첫인사를 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운명의 여성은 니체의 실존을 뒤흔들어 위기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 실존을 뒤흔든 꼭 그만큼의 강도로 니체 내면의 창조성을 들쑤셨다. 이 만남이 남긴 삶의 폐허 속에서 니체는 뒷날 자신의 이름과 거의 하나가 될 작품을 쓴다.
소유욕과 사랑, 이 두 단어에서 우리가 각각 느끼는 것은 얼마나 상이한가! 하지만 이것은 동일한 충동이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일 수 있다. ... 소유에 대한 갈망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이성간의 사랑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과 육체에 대한 무조건적 권력을 원한다. 그는 홀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 안에서 최고의 대상, 가장 갈망할 만한 대상으로 머물러 상대방을 지배하려 한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다른 모든 연적들을 영락하게 하고 배제하여 세상의 모든 '정복자'와 착취자 중에서 가장 가차 없고 이기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보물 창고를 지키는 용이 되려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 이성애의 이 거친 소유욕과 불의가 모든 시대에 걸쳐 찬양 되고 신격화되어 왔다는 것에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바로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이기주의의 반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경이가 아닐 수 없다.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고 갈망하는 자가 이러한 언어 용법을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즐거운 학문>
루는 일기에 이렇게 쓴다.
우리 둘은 종교적인 특질을 갖고 있었다. 우리 둘 다 과격할 정도의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했기 때문에 우리는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정신 속에서 종교적 감수성은 신성이라든지 내세의 천국을 상상할 수 없다. 자유정신을 지닌 사람의 종교 감정은 연약함, 두려움, 탐욕 같은 종교 생성의 원인이 되는 것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유정신을 지닌 사람은 종교를 통하여 형성된 종교적 욕구를 자기 자신에게 되던져서 자기 본질의 영웅적인 힘을 창조하거나 어떤 위대한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친다. 니체에게는 영웅적인 성격이 있으며 이것이 자신의 성격과 원동력에 특징과 통일성을 주는 그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조만간 니체가 새로운 종교의 선포자로 등장하는 것을 볼 것이며, 이 종교는 젊은이들에게 영웅을 선사할 것이다.
이 연애 체험이 주는 고통을 한계 상황까지 밀어붙였고, 그 심리적 극한 상황에서 고통과 분노와 절망뿐인 진창 같은 현실을 황금으로 바꾸어냈다.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술이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루는 니체의 정신에 잊을 수 없는 깊은 자극을 주었고, 그 자극의 환희와 고통이 공동으로 작용해 차라투스트라를 창조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인에 대한 웅대한 비전을, 병들고 외로운 니체의 삶, 고독과 기만에 반쯤 미쳐버린 니체 자신의 삶과 비교해보면, 초인의 이상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한 니체의 빛나는 정신의 힘찬 투영이며 운명에 대한 반항적 발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루는 남자들을 유혹하고 정복하는 일에서 어떤 무의식적 원형을 반복하는 강박 증상을 드러냈다.
루는 릴케에게도 엄청난 창조성의 불을 지폈다.
그녀가 수많은 창조적 인간들의 내면에 불을 지른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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