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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서는 그대의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니체,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등 푸른 고등어 같던 스무 살 때

시와 철학은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다. 시는 '상상력'을, 철학은 '사유'를 방법론적 매개로 삼는다. 철학은 자명함을 배제함으로써 자명함에 닿고, 시는 의미를 배재함으로써 의미에 닿는다.

 

시인은 생각이라는 섬광에 기대어 세계와 존재를 직관한다. 철학자는 머리를 짜내서 '정리'를 세우고, '명제'를 제시하고, '정리'와 '명제'를 통해 대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철학은 서로 마주칠 수 없는 것들을 접목하고, 그 내부로 삼투하며, 상호적으로 융합하는 사유의 방식! 철학은 대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철학자는 사건과 현상의 발견자가 되어야 한다 철학은 사유의 내용이 아니라 사유 그 자체에서 바글거리며 발현되는 것이다.

 

철학은 사유의 약동이자, 도약이다. 이때 사유의 내용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유의 내용이란 늘 사유의 형식 자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오로지 생각함에서 치르는 사유의 유격전이고 야전술 교본이어야 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권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전투다. 내가 너희들에게 권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승리다. 너희들이 하는 노동이 전투가 되고 너희들이 누리는 평화가 승리가 되기를 바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에게서 나는 웃는 법, 춤추는 법, 운명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고향을 떠나 사는 법, 고독을 견디는 법, 병이라는 불안과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고,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되지 않는 법, 낙타처럼 순응하는 길은 거부하고 사자처럼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 내면에 혼돈을 품고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놀이 속에서 삶을 긍정하고 기쁨을 얻는 법을 배웠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돈다."

 

무지와 어리석음이 우리를 가장 높은 사유로 솟아오르게 하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니체 철학이 우리 내면의 삶과 의지를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점이다. 

이 혼돈의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 거울이 아닌가?

"결코 만족하지 않고 싫증 내지 않고 지치지 않는 생성". 세계는 바로 권력에의 의지이고, 우리 자신은 바로 그것에서 탄생한다.

 

떳떳하고 늠름하게 하는 데 무엇보다도 자기 극복과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 전에 먼저 '자신을 잃고 몰락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몰락할 용기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용기, 그 무엇보다 먼저 재가 될 수 있는 내부의 결단과 의지다. 어제의 낡은 '내'가 죽지 않는다면 새로운 '나'는 태어날 수 없다. 새로운 '나'는 무수한 잉여 속에서 나온다.

 

우리가 누리는 건강이 바로 잉여의 한 부분이다. 건강하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건강이 부재한 삶은 남루하고 너절하다. 그다음 잉여는 철학과 예술이다. 그것 없이도 삶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철학과 예술은 잉여다. 그것들은 생성과 창조를 낳는 인식이고, 존재를 움직이는 힘이며, 욕망이 아니라 열린 의지를 통한 도약이다. 예술은 밥 먹고 잠자며 가족과 사회를 이루며 사는 쩨쩨하고 비루한 삶과는 다른 차원의 삶이다. 

 

철학은 존재의 심연에 이르게 하고, 비극적 삶의 감정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기쁨과 위안을 준다. 예술과 철학이 부재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얕은 삶, 숭고함을 머금지 못한 피상성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제1부

에케 호모 : 이 사람을 보라!

-니체 철학의 이해를 위하여

 

철학자 중의 철학자

니체는 철학자를 넘어선 철학자다.

 

학대당하는 말을 안고 울부짖는 철학자

 

운명애 : 생을 향한 무한 긍정

니체 철학에서 신은 죽어야 하고, 신의 죽음은 인간에 의한 살해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신의 죽음과 함께 신적인 것을 중심축으로 구축된 유럽의 가치 체계는 무너진다.

 

"삶이란 긴 죽음에 불과하다."

"모든 순간은 바로 앞서 지나간 순간을 삼켜 버리며, 모든 탄생은 헤아릴 수 없는 존재들의 죽음이다." 니체는 생명이 앞선 존재들의 죽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것은 바로 이 영원 회귀의 철학을 알리기 위함이다.

 

루 살로메와의 사랑

 

철학자, 정신 병원에 가다

 

1888년, 니체의 위대한 해

"내가 왜  <이 사람을 보라>로 시작하는 내 삶의 비극적 파국을 서둘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지금 나는 알 수가 없다."락 니체가 발광하기 직전에 쓴 편지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의 함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가치의 영도를 선언하는 것이다. 신을 죽인 것은 인간들의 공모에 의한 사건이다. "이 교회가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라는 결정적인 말을 한 다음에 곧바로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라고 묻게 하였다.

 

세계는 낡고, 공중에 떠 있던 태양이 지자 세계는 핏빛 황혼에 물든다. 오래된 것들에 대한 믿음은 의심으로 바뀌고, 세계는 더 믿을 수 없고 더 낡아 간다. 이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세계에 닥친 붕괴, 파괴, 몰락, 전복을 받아들인다. 신의 죽음은 등불이 꺼진 것에 견줄 수 있다. 등불이던 기독교와 그 계율들은 무너지고 세상은 어둠으로 덮인다. 아직 새로운 진리, 전망, 가치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제 앞의 어둠을 스스로 밝혀야 하는데, 이 어둠이 니힐리즘이다. 니힐은 존재의 가치가 탕진된 상태, 빛이 사라진 상태, 즉 아무것도 아님에 이른 것을 뜻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의 빛에 이르지 못한다.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나타남에서 존재 자체는 밖에-머무르게된다. 존재의 진리는 빠져나가고, 그것은 망각된 상태로 머물게 된다."고 말한다.

 

웃음과 춤을 아는 자, 위버멘쉬

이 공포와 어둠, 세계에 달라붙어 증식하는 환영들과 거짓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자들은 생명을 경멸하는 자들이요, 소멸해 가고 있는 자들이며 이미 독에 중독된 자들인 바 이 대지는 그런 자들에게 지쳐 있다. 그러니 아예 저 하늘나라로 떠나도록 저들을 버려 두어라!"

보라,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이 위버멘쉬가 바로 너희들의 크나큰 경멸이 그 속에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다.  위버멘쉬는 어둠에 빠진 무리에서 주는 등불이요 구원의 복음이다.

 

영혼을 넘어 신체에로

"지난날에는 영혼이 신체를 경멸하여 깔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경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영혼은 신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니기를, 그리고 허기져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체와 이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체는 이성이나 영혼에 부속된 도구가 아니라 대지와 인간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그러나 깨어난 자, 깨우친 자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떼이자 목자이다. 형젱,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성의 부속물로 전락한 신체를 복권시키며, 그 위상을 수정한다. 신체가 이성의 도구가 아니라 이성이 신체의 도구라고!

 

우리의 자아는 실상 잡다한 작용들의 집합일 뿐이다.

 

생명들은 예외 없이 힘에의 의지를 갖는다. 신체는 힘들의 의지라는 위계의 복합성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유정신'이 발현하고 작동하는 원점도 바로 신체다. 이 자유정신은 무엇에 예속됨 없이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그것을 획득한다는 의미를 포괄한다. 새로운 것의 창조는 새로운 가치 평가요, 아울러 낡은 것의 몰락과 파괴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자유정신을 가진 자는 "가치의 변천, 곧 창조하는 자들의 변천"을 타고 넘어간다.

 

차라투스트라-위버멘쉬-니체

어떤 사람은 일찍 죽고, 또 어떤 사람은 늦게 죽는다. 어느 시기에 죽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미완성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이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하나다. 무엇보다도 자유정신을 갖고 살 것, 사는 동안 웃음과 춤을 배울 것! 삶을 긍정한다면 죽음이라는 아름다운 축제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것!

 

 

제2부

그대는 들개로 울부짖으며 살겠는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제 영혼을 누르는 무거운 돌을 내려놓으려는 싸움이다. 철학은  어둠의 심연에서 기어나와 태양처럼 고요함에 이르는 과정이다. 철학은 생명과 자기 극복을 위한 소요이고, 진리에의 의지다, 아니 진리로부터의 하염없는 탈주선이다.

 

스스로 고귀해지지 않으면 천민으로 전락한다. 천민은 군중이다. 군중은 죽음을 향하여 흘러가는 강물이구나!

 

"인간은 천 개의 다리아 계단을 지나 미래로 돌진해야 한다. 그릭 언제나 인간들 사이의 더 많은 전쟁과 불평등이 있어야 한다." 천 개의 다리와 계단을 지나는 자는 상상력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철학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불행의 자각이 없던 시절이다. 하마터면 무지몽매를 행복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무한 자산으로 착각하며 살 뻔했다. 

 

오,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밧줄이 아니던가! 너는 너의 밧줄을 건너라! 그렇게 인간에게는 자기 극복이란 숙제가 주어진다. 나는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였지만 용케도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뛰어 넘어갔다.

 

현대 사회는 무수한 욕망의 천민을 낳는다. 눈의 이웃, 태양의 이웃이 될 수 없는 자들. 알에서 부화하듯이 깨어난 천민은 도덕을 잃고도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차가운 샘과 축복받은 고요가 없는 생을 유산으로 받는다. 천민은 도덕의 죽음이란 토대 위에서 탄생하는 무리를 가리킨다. 

 

모든 도덕은 강제가 선행하는 힘을 갖는다. 그 힘을 도덕의 중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지만 도덕은 결국 사라지는 별과 같다. 도덕의 죽음. 천민의 영혼은 무엇을 갈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죽어가는 별에서 살면서 "수많은 별"을 갈망한다.

 

"그대는 자유로운 산꼭대기에 올라가려 한다. 그대의 영혼은 수많은 별을 갈망한다. 동시에 그대의 사악한 충동도 자유를 갈망한다. 그대의 들개들은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대의 정신이 모든 감옥을 해방시키려 할 때, 그 들개들은 자신의 굴속에서 욕망에 사로잡혀 울부짖는다."

 

천민은 들개 무리와 닮았다. 동굴에서 욕망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들개들. 들개는 야생과 주인에게 길들여진 축생 사이에 있다. 들개는 저를 속박하는 감옥(주인)에서 놓여난 탓에 자기가 자유를 얻었다고 착각하지만, 들개는 자유를 얻은 게 아니라 버림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약한 존재를 괴롭히고 굶주림에 지쳐서 닥치는 대로 먹잇감을 사냥한다. 들개의 무리와 천민은 닮았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먹잇감에 달려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부류는 염치가 없고, 항상 무리로써 움직인다.

 

"오늘날 세상은 천민의 것이 아니가? 그러나 천민은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은지, 무엇이 올곧고 정직한지 모른다. 천민은 죄책감 없이 굽어져 있고,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모리배와 사기꾼들의 달콤한 꾐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의 계절마다 빠지지 않고 추악한 얼굴을 내미는 정치가들. 그들이 내거는 구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천민들은 자신을 기만하는 정치가의 구호에 열광한다. 정치가들은 천민들을 치켜세우며 "우리 권력은 당신들에게서 나온다!"라고 말한다. 그건 정치가들이 늘 하는 아첨의 말일뿐인데, 그들은 그 말에 열광한다. 그대는 언제까지 들개처럼 울부짖으며 살려는가?

 

 

모든 것은 가고 되돌아온다

철학은 왜 중요할까? 우리는 철학 없이도 탈없이 잘 산다. 하지만 철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생각하는 존재, 의미의 존재, 오성의 존재로 다시 살게 한다. 삶이 생각, 의미, 오성에 의해 매개될 때 무지와 소외와 광기에 매몰된 존재에서 벗어나는 계기와 마주친다.

 

삶의 무의미와 밋밋함에서 벗어나면서 돌연 생생해진다. 철학은 삶이라는 테두리에 의미의 광휘를 두르게 한다.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 속에서 의미의 존재로 거듭나게한다는 것이 철학의 위대함이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함의 계기적 찰나를 무의미한 행위로 대체한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소비하는 패턴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만 물질주의에 머리를 처박을 때 생각함이 개입할 여지는 사라진다. 생각함을 폐기하고 배제하는 물질주의를 좇는 태도는 곧 의미의 탕진, 삶의 탕진에 이르고 만다. 물질주의는 인간을 무지와 소외와 광기로 내몬다. 사람들이 공허와 뜻 없음에서 허덕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 어리석음에서 해방되려면 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철학이 마음의 평화를 준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소요와 전쟁의 딸" 이다. 진짜 철학자들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 좋은 철학자들은 이성의 빛으로 미망의 어둠을 밝혀내며 이 세상을 더 살 만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저마다 마음속에 자기 세상이 있는 법이지. 우리가 보는 세상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느끼고 생각하는 대로의 세상 아닌가. 이 동네에서 불행한 사람은 세상 어느 동네를 가도 불행한 법이네." 이슬람 수피파에게 전해지는 이야기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우리의 지식, 실수, 우리의 습관, 다가오는 모든 것에 대한 삶의 지혜, 이러한 것들의 무한한 중요성, 남은 생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가르침을 가르친다. 그것은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키는 최상의 수단이다."(니체, '유고')

 

"끊임없는 변신-너는 짧은 기간 내에 다양한 개체들 모두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끊임없는 투쟁이다."

 

니체 철학의 목표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높이, 높이, 높이다! 니체는 "가장 높은 것은 가장 깊은 것으로부터 자신의 높이에 도달한다." 라고 천명한다.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이란 심연에 자신을 던진다. 돌고 돌아서 제 자리에 오는 것, 그 수단이 영원회귀다! 영원회귀를 이해서는 신성한 우연 속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극복하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작은 덕, 작은 현명함, 모래알-배려, 개미떼 같은 자질구레함, '최대 다수의 행복'을!"

 

들뢰즈는 니체 철학이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이자 차이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영원회귀의 사상은 궁극적으로 생명을 긍정하는 철학이고, 언제라도 "오, 삶이여.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는 철학이다.

 

그대는 왜 짐깨나 지는 짐승이 되었나?

노동은 어떤 현상의 변화를 가져오려고 자기 시간과 신체 에너지를 투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노동은 숙련된 기술과 자기 시간을 임금과 맞교환하는 일이다. 이때 노동자는 고용주와 계약을 하고 자기를 맡긴 '복종적 주체'다. 후기 근대 사회에 나타난 노동자는 '성과 주체'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라고 부른다. 이들은 누구의 강요 없이 일하며, 성과를 내려고 자기를 다그친다. 이런 맥락에서 성과 주체는 자신을 향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오늘날 '피로 사회'는 모든 이들이 성과 주체로 나서서 자기 착취를 한 결과다.

 

피로에서 죽음의 기미를 눈치챈 철학자가 바로 니체다. "단 한 번의 도약, 죽음의 도약으로 끝을 내려는 피로감, 그 어떤 것도 더는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그와 같은 피로감이 온갖 신을 만들어 내고 저편의 또 다른 세계라는 것을 꾸며 내는 것이다."

 

노동으로 제 생계를 해결하고, 사회와 결속하며 제 실존의 뿌리를 사회에 내리는 건 중요하다. 노동의 숭고함은 제 생계 수단을 넘어서서 제 삶의 의미를 생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창조가 아닌 노동, 시장의 요구에 따른 노동,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복하는 노동은 인간을 짙은 피로감과 함께 퇴영적 존재로 전락시킨다. 생각 따위는 집어치워라, 오직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라! 그런 주체에게서 자율성을 빼앗는 강제된 노동은 인간의 기본적인 내면의 충동들을 억누른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은 신경의 힘을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많이 소모시켜 성찰, 명상, 몽상, 심려, 사랑과 증오를 갖지 못하게 가로막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잘것없는 목표만을 보여 주고 안이하고 규정된 만족만을 보장한다." (니체, '아침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참고 견뎌내야 할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거운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너희 영웅들이여, 내가 그것을 등에 짐으로서 나의 강인함을 확인하고, 그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저 더없이 무거운 것, 그것은 무엇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묻는다. (중략)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마다하지 않고 짋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낙타에게 세계를 창조하는 시작은 없고, 오직 똑같은 노동의 되풀이만이 있다. 나체는 낙타를 향해 '영웅들'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경멸의 뜻을 담은 조롱이다. 물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가장들은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낙타는 차별이나 부당한 경우에도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 규범들에 항상 '예!'라고 대답하며 복종한다. 어떤 악조건조차 말없이 긍정하는 것, 그게 과연 좋은 삶의 방식일까? 그 긍정주의가 자기 주체의 삶을 세우는 데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롭지 않다. 그 긍정은 비굴하고 누추해 보인다.

 

낙타에게 가장 낮은 자리를 내준 것은 그가 강인하고 성실하지만 자기 의지에 의한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자기 삶을 빚는데 자기 의지와 주체적 기율을 쓰지 못하는 까닭이다. 권력의 명령들에 포박된 존재들, 가치의 창조라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부류들, 자기 바깥에서 오는 명령들에 대해 주체 도덕을 갖고 단 한 번도 '아니오!'라며 저항하지 못하고 늘 '예!' 하고 굴종하는 낙타라니! 니체의 잣대에 따르면, 낙타는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노예에 속한다. 

 

우리 주변엔 얼마나 많은 낙타가 있는가?

낙타의 긍정주의는 그것이 타락한 현실과의 타협이고, 퇴락한 정신의 징표이기에 누추하다. 낙타의 노동에 견줘지는 것은 어린아이의 초월적 놀이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늘 새로운 놀이를 발명하며 그 안에서 제 기쁨을 찾는 어린아이에겐 복수심도 원한도 없다. 어린아이는 "새로운 시작,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와 자기만의 삶에 열중한다.

 

니체가 "짐깨나 지는 짐승"으로 사는 것을 경멸한 것은 반복하는 노동이 죽음으로의 전락이고, 창조하는 삶을 등지고 거꾸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 주체의 삶을 살아라!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낡아진 나'에서 탈피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라!'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줄타기 광대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갖게 될 최후의 의지가 되기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실로, 사람은 더러운 강물과도 같아. 몸을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하리라. 보라,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이 위버멘쉬가 바로 너희들의 크나큰 경멸이 그 속에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더러운 것은 정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정화할 수가 없다. 더러운 강물을 정화시키기 위해 '더 큰 바다'가 필요하다. 위버멘쉬는 바로 그런 바다다. 

 

신이 죽은 것은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꺼진 것과 마찬가지다. 한 세계에 들이닥친 파국 이전까지 등불 역할을 하던 기독교적,도덕적 전망은 파국을 맞고 세상은 불안과 어둠에 휩싸인다. 아직 새로운 진리,전망,가치 체계가 만들어지기 전이기 때문이다.

 

줄타기의 위험을 잘 알면서도 "춤추면서 건너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줄타기 광대는 위버멘쉬를 닮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넘어 춤추면서 건너가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고 건너가는 행위에는 반드시 자기 극복의 의지와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줄타기는 매 순간 피로와 무기력에 대한 저항이고, 존재를 위한 투쟁이다.

 

인간은 줄타기 광대이고, 그가 건너는 밧줄이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고, 위버멘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건너야 할 밧줄이다.

 

줄타기 광대는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다. 그의 고독과 불안은 위험한 외줄을 타는 동안 그 누구의 조력도 받을 수 없다는 데서 온다. 줄타기 광대는 제안의 의지로 두려움을 물리치고 외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 우리 안의 두려움은 바로 줄타기 광대의 두려움과 같은 성질을 가졌다. 

 

개별자의 윤리와 도덕, 정치와 종교의 신념을 압도하는 두려움은 우리 실존의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오지 않는다.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두려움이란 다가오는 두려움에 존재를 개방한 자의 감정이고, 그것은 하나의 양상으로 '세계-내-존재'에서 파생한다.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세계에 퍼진 두려움이 우리를 수시로 찌른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두려움은 이미 두려운 무언가가 다가올 수 있도록 세계를 발견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두려움을 견디며 밧줄을 건너는 중이다.

 

밧줄에서 추락하면 우리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두려움 안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이때 두려움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것, 즉 경악이고 전율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인간은 두려움에 빠지면 일시적으로 얼어붙는다. 그것은 벌거벗은 현실과의 마주침이고, 얼어붙음은 정신과 의지의 마비 현상이다. 

 

줄타기 광대여,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밧줄이 없다면 어떻게 위버멘쉬를 향해 건너갈 수 있을까? 분명 외줄을 타고 건너가는 일은 위험하다. 하지만 그 위험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더 큰 자아를 위한 도약이고, 미래로 날아가기 위한 현재의 준비인 것이다.

 

 

삶이라는 주사위 놀이

만물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똑같은 것으로 되돌아온다. 영원한 반복, 그게 숨결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 떠안은 불가피한 운명이다.

"'이제 나는 죽어 사라진다.'라고 당신은 말하리라, 그리고 한순간에 무로 돌아가리라, 영혼이란 육체와 마찬가지로 죽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얽어매고 있는 원인들의 매듭은 영원히 회귀하고-그것이 나를 다시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되돌아오리라, 이 태양과 이 독수리와 이 뱀과 더불어-새 삶이나 혹은 보다 나은 삶이나 혹은 비슷한 삶으로가 아니라, 가장 큰 것이나 가장 작은 것에서 동일한 바로 이 삶으로 나는 영원히 되돌아오리라, 다시금 모든 사물에게 영원 회귀를 가르치기 이해서." (니체, '회복기의 환자에 관하여')

 

니체는 불교에서 서구 세계가 빠져 있는 수동적 허무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능동적 허무주의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았다.

불교에서 윤회는 벗어나야 할 업이고 고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될 때 비로소 해탈에 이른다. 니체의 영원 회귀는 해탈을 배제한다.

 

영원 회귀는 그 자체로 만물의 운명이고 목적이다.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일자의 회귀가 아니다. 

"되돌아옴 그 자체는 그것이 자신을 생성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긍정하는 한에서 존재를 구성"하고 "영원 회귀 속의 동일성은 되돌아오는 것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차이 나는 것을 위해 되돌아오는 상태" (들뢰즈, '니체아 철학')를 가리킨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긍정하는 게 아모르 파티(운명애)다.

 

삶은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주사위 놀이가 그렇듯이. "영원 회귀는 우연을 강요하는 필연의 숨결이며 신들의 창조적 능력이 발휘되는 주사위 놀이다. 주사위 놀이의 비유를 통해서 먼저 영원 회귀는 차이의 반본 운동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니체, 영원 회귀와 차이의 철학)

 

주사위 놀이에서 차이는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다. 삶 역시 주사위 놀이와 마찬가지로 차이의 반복 운동을 하는데, 이는 삶이 우연에 작동한다는 증거다. 들뢰즈는 던져지는 주사위들이 우연의 긍정이라면 '판' 위에 떨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숫자의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한번 던지는 주사위들은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들뢰즈, 앞의 책)

 

"언젠가 내가 신들과 더불어 대지라는 신성한 탁자 위에서 주사위 놀이를 했을 때, 대지가 요동하고 갈라지고, 화염의 강을 뱉어냈다면, 그 이유는 대지가 창조적인 새로운 말들과 신성한 주사위 소리에 의해서 흔들리는 신성한 탁자라는 점에서이다." (니체, 일곱 봉인)

 

주사위가 던져질 때마다 탁자가 요동하고 갈라지는 일이 되풀이되는데, 이것은 주사위가 만든 변동이 아니다. 주사위에 의해 만들어진 우연의 힘들이 만든 변동이다. 주사위 놀이는 우연의 반복인데, 이 우연은 늘 새로운 생성을 낳는다. 우연이라는 방식을 빌어 새로운 생성을 허여한다는 점에서 우연은 신성하고 순결하다. "내 말은 내게 우연이 오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며, 그것은 어린애처럼 순결하다." (올리브 동산에서)

 

"나는 나의 솥 안에서 우연적인 모든 것을 끓인다. 그릭 그것은 바로 내가 그것(우연)으로 내 양식을 삼기 위해 그것에게 환영사를 할 정도까지 우연히 익을 때뿐이다. 그리고 정말, 여러 우연이 솥 안에서 내게 다가왔다." (작아지는 덕에 관해서)

 

"오, 내 위에 있는 하늘, 순수하고 고귀한 하늘! 지금 내게는 바로 너의 순수성은 영원한 거미도, 이성의 거미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는 신성한 우연들이 춤추는 마룻바닥이며, 너는 주사위들과 놀이하는 신들을 위한 신성한 탁자이다." ('해뜨기 전에')

 

주사위 놀이는 계속해서 반복하는 놀이다. 한 번 던져지는 주사위들이 우연의 긍정이고, 떨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들뢰즈의 부연설명

사람들이 한 번 던지는 주사위들은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존재가 생성에 의해서 긍정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로, 필연은 우연에 의해서 긍정되며, 하나는 다수에 의해서 긍정된다. 

 

하나가 다수를 제거하지도 부인하지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이 우연을 제거하지도 부인하지도 파괴하지도 못한다. 니체는 우연을 다수, 단편들, 부분들, 혼돈-즉 사람들이 부딪치도록 만들면서 던지는 주사위들의 혼돈-과 동일시한다. 니체는 우연으로 긍정을 만든다. 하늘 그 자체는 '우연한 하늘'로 '결백한 하늘'로 불린다. (니체와 철학)

 

카오스에서 단순한 것들이 모여 창발성을 이루어 복잡성이 나타나는 현상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이해 한다. 생명의 탄생 또한 단순한 것들이 연결을 통해 복잡한 생명체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연의 주사위들이 모이면 필연이 되는(정규 분포의 확률로 모습들이 나타나는 필연)

 

주사위를 던져서 떨어졌을 때 나오는 숫자는 아무 필연성도 없는 단 한 번 우연에 의한 결과물이다. 우연이 쌓이면 확률이 나오고, 이 확률은 우연을 뚫고 필연에 가 닿는다. 실은 필연이란 우연 그 자체의 조합이다. 우연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주사위 놀이는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주사위를 던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연을 긍정해야 한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아!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태어난 것은 우연이지만, 우연이라는 주사위 놀이를 위해서 하늘로 던지는 것은 "필연성의 손"이다. "우연의 주사위 통을 흔드는 필연성의 점철로 된 손이 무한한 시간에 걸쳐 주사위 놀이를 한다." ('아침놀')

 

단 한 번에 모든 우연을 긍정하라! "그때만이 우연은 자신의 친구를 만나서 오고 그 친구가 다시 오도록 하는 친구이고 운명 자체가 영원 회귀 그 자체에게 보장하는 운명의 친구이다." (니체와 철학)

 

주사위를 던졌을 때 나오는 숫자는 어떤 인과성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 숫자는 발랄한 우연에 따를 뿐이다. 그것은 우연의 원리에 의해서 비롯되지만 불에 데워지고 익으면서 필연으로 긍정된다. 차이를 나타내는 우연성의 출현자체와 그것의 영원한 회귀가 존재 생성의 원리이기 때문에 우연은 불가피하게 필연으로 긍정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살아 있고 미래를 끌어당기며 살아나갈 것이다. 삶은 다시 한번, 그것이 아무리 치욕과 권태로 물들어 있다 하더라도 수없이 여러 번 살아야 하는 그 무엇이다.

 

"대지 위에 떨어진 당신의 주사위 숫자는 무엇인가? 우연을 환영하고 우연을 긍정하라! 왜냐하면 당신은 신성한 우연들이 춤추는 마룻바닥이며, 신들을 위한 신성한 탁자이기 때문이다." 

 

 

아모르 파티 : 운명을 사랑하라

봉오리는 모든 만물에 있다. 

봉오리는 빛과 우연 속에서 탄생하는 별의 순간이다. 그 봉오리를 한 철학자는 아모르 파티라고 명명한다. 우리가 운명애를 품고 있는 한 삶이 아무리 곤핍한 것일지라도 "이상들이 제조되는 공장들" (니체 '도덕의 계보')일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에 왔다는 것, 그것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가 도착한 이 세계는 낡았고, 우리는 항상 늦게 도착한다. 니체는 이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는 한낱 꿈으로, 어떤 신이 꾸며 낸 허구로 보였다. 불만에 찬 신의 눈앞에 피어오르는 오색 연기로 보였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를 한낱 꿈, 신이 꾸며 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세계는 "영원히 불완전한 세계, 영원한 모순의 그림자, 그것도 불완전한 그림자인 세계." 일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 살면서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를 꿈꾼다. 

 

봉오리는 저주받은 이 세상에 와서 우리가 꿈꾼 모든 것들의 표상이다. 봉오리는 모든 곤핍에 빠진 것들을 구원하는 힘, 어둠을 가르는 번갯불을 잉태하낟. 그 번갯불이 품은 찰나의 행복, 사랑, 평화와 안녕들! 그 봉오리가 운명이라면, 삶을 꽃으로 피워 내는 일은 운명애다. 우리는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게 삶의 거의 유일한 의미다.

 

"진실로 나는 백 개나 되는 영혼을 가로질러 나의 길을 걸어왔으며 백 개나 되는 요람과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나의 길을 걸어 왔다."

 

삶의 기쁨과 약동 속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일도 쉽지 않다. 약동하는 삶은 죽음을 삼키고 피어나는 꽃이다. 불가능의 가능,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실존 사건, 죽음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살아서는 겪을 수 없는 사건이다. "주체가 그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 죽음이 여기에 있을 때 당신은 여기 없다.

 

우리는 죽음이 불러오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죽음이 존재의 파괴여서가 아니라 죽음은 알수 없음, 미지 그 자체이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수동적인 존재인 까닭이다.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서는 그대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제 안에 일정량의 혼돈을 품고 살며, 이걸 재료로 단 하나의 운명을 빚는다. 춤추는 별은 혼돈 속에서 태어난다.

 

춤추는 별을 빚는 필요 성분은 피와 땀과 눈물일 것이다. 피와 땀가 눈물은 '중력의 영'과 싸우기 위해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다. 중력의 영은 우리를 한사코 나락으로 밀어낸다. 이것은 "강제, 율법, 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지", 즉 창조의 자유를 제약하는 사회의 편견과 통념들, 우리의 의지에 강제적으로 작동하는 제도와 관습들이다. 대지를 박차고 도약하는 자는 먼저 몸을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당신은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삶이더냐?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을 외치며 생을 기꺼이 끌어안아야 한다. 그게 아모르 파티, 운명애를 품은 자가 길러야 할 덕이다.

 

신은 죽었지만, 삶은 되돌아온다. 이것이 진실이다! 존재는 유한한 시간을 사는데, 그 찰나가 곧 영원이다.

철학자는 우리에게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말한다.

 

"그대들은 아직 본 적이 없는가. 돛이 둥글게 부풀어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면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그 돛처럼 정신의 거센 바람에 펄럭이면서, 나의 지혜는 바다를 건너간다."

 

돛을 올리고 저 바다를 건너라! 힘들다고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는 없다. 이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이자. '네 운명을 사랑하라!' 제 운명을 사랑하는 자는 혼돈이나 불안에 주눅 들지 않는다. 성난 파고를 헤치고 전진하는 배처럼 돛을 펄럭거리며 주저함 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환자이자 의사였던 철학자

사람은 몸 그 자체다. 몸은 정신이나 자아를 담는 그릇이 아니다. 몸은 정신의 육화이고, 자아의 연장이다. 몸은 고정불변의 사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그 무엇이고, 다양한 힘들의 각축장이며, 의지의 구현체이다.

 

니체는 서구의 이성 중심의 세계관을 무너뜨린 최초의 철학자다. "신체란 무엇인가?" 들뢰즈는 니체의 신체론을 이렇게 정의한다. "신체를 정의하는 것은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 간의 관계이다. 힘의 모든 관계가 하나의 신체를 구성한다. 모든 불균등한 두 힘은 그것들이 관계 속에 들어가자마자 하나의 신체를 구성한다. 그래서 신체는 항상 니체적 의미에서 우연의 산물이고, 가장 '놀라운' 것, 사실상 의식과 정신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으로 보인다."

 

"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고,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다양성이다. 육체는 또한 평화이며 가축의 무리이자 양치기와 같다.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은 몸의 도구이며,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장난감이다. 이제 세계는 거대한 이성으로서의 육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복권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을 고통의 질곡으로 빠뜨리는 질병을 통해 삶을 바라보고, 삶에 대해 사유했던 니체는 질병이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건강에 대한 의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날카롭께 일깨운다고 믿었다. 더 나아가 질병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사유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 했다.

 

니체는 병들어 있는 것이 "삶을 위한, 더 풍부한 삶을 위한 효과적인 자극제" (이 사람을 보라)라는 것을 깨닫고 "병은 내 모습 습속을 바꿀 권리를 나에게 부여했다. 병은 나에게 망각을 허용했고 또 그것을 명령했다. 병은 나에게 조용히 누워 있을 것을, 여가를 가질 것과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이 사람을 보라)라고 질병의 유용론을 펼쳤다.

 

니체는 "내 건강에의 의지와 삶에의 의지를 나는 나의 철학으로 만들었다." (이 사람을 보라)

 

질병은 우리를 휴식으로 이끌고, 온갖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의 분별을 음미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갖고 있으나 평소에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생명의 기쁨과 의미를 일깨운다.

 

"질병은 촉발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 활기를 위해서는 충분히 건강해야 한다." (니체 유고)

 

 

니체는 왜 불교도가 아닌가?

우주 만물이 생성된 원리와 그것이 움직이는 이치에 궁극적 물음을 던지며, 수행에 열중하는 이들을 '출가사문'이라고 했다.

 

부처의 깨달음은 인생이 고라는 성찰, 고의 원인에 대한 성찰, 고를 소멸시키는 수단에 대한 성찰에 바탕을 둔다.

이 고를 유발하는게 갈애(욕구)다. 부처는 말한다. 고가 생기는 원인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욕망이 시들어서 소멸해 버린 곳에는 어디나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은 이 세계를 떠받치던 영원한 진리와 형이상학, 가치 체계가 뒤집어지는, 그리하여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기의 도래에 대한 선언이다. 그럼에도 죽은 신을 계속 숭배하고 따르는 것은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종식되어야 한다. 신을 대신하는 "보다 높은 인간들"이 왔기 때문이다.

 

위버멘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인가? "창조하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은 친구다. 무리나 추종자가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판에 써넣을 친구를 찾는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철학자에게 행복을 묻다

당신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판단을 하려면 먼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욕망하는 것, 갈망하는 것을 다 손에 쥐는 게 행복인가? 일상의 안녕들이 지속하는 것, 가족과 화목하게 사는 것, 건강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안락한 삶의 조건이 될 수는 있을 테지만 행복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개체적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우리의 자아는 실상 잡다한 작용들의 집합일 뿐이다. 열렬히 애써서 얻어진 모방의 결과일 뿐이란 말이다." 삶의 생성적 주체는 자아가 아니라 신체다!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인간 안에서 힘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모든것." 그리고 이어서 쓴다. "나쁜 것은 무엇인가?-약함에서 유래하는 모든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갈라지는 것은 힘의 느낌과 증대, 그 차이에서 비롯한다. 자기 안의 힘이 증대한다는 느낌은 좋은 삶의 근거다. 반면 약함, 기력의 쇠진은 나쁜 삶에 빨려 들어가는 조건이다. 

 

니체는 자기 안에 힘이 증가한다는 느낌 속에서 행복을 실감한다고 고백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힘이 증가된다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시와 철학이 행복에 이르는 길을 내놓지는 않지만, 행복에 대한 감각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만난 행복한 이들은 한결같이 고요하고, 타인을 향한 감사아 경외감으로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불행한 이들은 늘 딱딱하고 화를 내며 타인의 보람에 대해 냉소적인 모습이었다.

 

"좋은 삶은 대단한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고, 멍청함이나 어리석음, 유행 따르기를 피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지않는 것, 절제하는 것'이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 (롤프 도벨리 '불행 피하기 기술')

 

우리가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해지려면 행복 강박증에 눌리지 않고, 어리석음과 유행을 좇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인생에 무엇을 더하는 대신 덜어내려고 애쓰며 내재적 가치를 좇는다. 내재적 가치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우정과 사랑, 자아의 충만함, 영혼의 성장, 가족과의 친밀함,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의 좋은 관계와 밀접한 그 무엇이다.

 

정치가들은 상품, 소비, 부가 행복의 척도인 걸로 오도하면서 국내총생산의 수치를 행복의 지표로 내놓는다. 정치가들은 행복을 단 하나의 실체, 단 하나의 형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행복한 사람은 기쁨이 넘쳐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해서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행복은 다양한 찰나와 경험 속에서 번쩍이며 나타난다. 행복은 유한한 삶에서 겪는 무한의 경험이다. 행복은 정서적 충만의 순환이고, 기쁨과 지복의 믿음에서 가능해진다. 찰나에서 영원을 보는 것, 그 불가능의 가능성을 엿보는게 행복이다. 

 

행복한 과거란 시간의 작용으로 역경과 불행의 직접성이 닳으면서 생기는 망각의 달콤함에 취한 결과일 것이다.

행복이 대상의 소유가 아니라 경험의 향유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라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꽉 잡으시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행복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인생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찰리 채플린이 남긴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나는 스무 살 때 갈망하던 것을 거머쥐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삭막하고 삶은 팍팍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는 여전히 불행했다.

 

심리학자 에릭 클링거의 "인간의 뇌는 목적 없는 삶을 견딜 수 없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의미 없는 행동으로 이루어진 시간들, 의미가 배제된 행위로 이루어진 삶이란 이미 죽은 삶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담보된다면 고통도 견디고, 심지어 제 생명마저 바치는 게 인간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물질이 아니라 의밀 풍부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의미로 가득한 삶만이 인생의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의미의 실체는 이런 설렘과 기대, 낙관과 긍정의 기분을 성분들로 이루어진 만족감이다. 다만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의미의 존재가 되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자 한다.

 

생은 평등하지 않다. 어디에나 불평등이 편재한다는 게 이 세계가 품은 진실이다. 니체는 간명하게 "사람들은 평등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천 개나 되는 교량과 작은 판자 다리를 건너 미래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더 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더 많은 불평등이 조성되어야 한다. 나의 위대한 사랑이 내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적의 속에서 형상과 유령을 만들어 내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형상과 유령을 동원하여 서로에 대항하여 최선의 전투를 벌여야 한다! 선과 악, 풍요와 빈곤, 숭고함과 치열함, 그리고 가치의 모든 명칭들. 이것들은 무기가 되어야 하며, 생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주는 표지, 달그락거리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 생 자체는 기둥과 계단의 도움으로 자신을 높이 세우려 한다. 생은 먼 곳을, 행복을 머금은 아름다움을 내다보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 생은 높이 오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높이 오를 필요가 있기에, 생은 계단을, 계단가 오르는 자들이 범하는 모순을 필요로 한다. 생은 오르기를 원하며 오르면서 자신을 극복하기를 원한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제대로 살기 위해, 그리고 더 높이 상승하기 위해, 그리고 더 높이 상승하기 위해 "최선의 전투를 벌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내 안의 사유가 깊이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사유의 유격전이 필요한 법이다.

 

"생은 높이 오를 필요가 있다." 높이는 존재의 향상과 자기 극복의 선물이다. 높이는 정신의 상승을 가리키는 것이고, 무한 긍정에 이르는 푯대이며, 미래의 다른 이름이긷 할 것이다.

 

 

남녘의 바다에서

바다 앞에 서면 그 숭고함과 더불어 바다가 환기하는 무한함으로 나도 모르게 겸손해진다. 

"끝없이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바다 앞에서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이 무한한 세계에서 우리를 확실하게 떠받들어 줄 버팀목은 무엇일까? 아니, 도대체 무한함이라는 게 무엇이며 과연 세계는 무한한가?" 바다의 무한함에 견줄 때 우리 자신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다. 그 바다 앞에서 궁극의 물음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재난 앞에서 무력한 자는 절망한다. 절망은 저를 압도하는 것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다. 압도적 재난이나 실패 앞에서 그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투항한다. 그 투항이 곧 절망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서 실패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머문다. 진짜로 절망한 자는 신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모든 것을 부정한 자만이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다리를 폭파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온전한 자기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그것은 자기의 척도로 세상을 재고, 자기의 의지로 제 삶을 세우는 일이다. 그걸 위해서는 세상과 투쟁해야 한다. 그것은 힘든 길이다. 

 

니체는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에 대해 사유한 사람이다. "'너 자신이 되어라!'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언제나 소수만이 깨닫는다. 더구나 이들 깨달은 소수 중에서도 더욱 한정된, 극히 일부만이 모든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는 공포와 세계의 부조리에 짓눌려 의기소침해 있던 청년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우연히 구해서 읽고 난 뒤 불에 덴 듯 놀랐다. 그때 나는 변변히 이룬 것도 없이, 막연히 작가를 꿈꾸는 문학도였다. 가진 것이라곤 새벽의 슬픔, 몇 권의 책, 습작 노트, 지독한 가난, 바흐의 음악, 무지, 정신의 나약함.. 뿐이었던 시절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무진장이었지만 그 대부분을 무위도식하며 흘려보냈다.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 시간은 자유가 아니라 형벌이었다. 나는 수형자처럼 내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증오와 반항심에 기댄 생이란 조악할 수밖에 없음을 그때는 몰랐다.

 

돌이켜보면, 내가 구한 것은 자유이고, 진리이며, 길이었다. 니체는 내게 길을 제시했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니체는 길을 묻는 자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두려움을 가진 자들만이 길을 묻는다. 나는 두려웠다. 니체는 왜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니체에게는 니체의 길이,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길이 있다. 산 자에게 산 자의 길이, 죽은 자에겐 죽은자의 길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인식은 정신의 몰락을 딛고 도약으로 이끄는 계기를 만든다. 나는 도약대를 발판 삼아 저 높은 미래로 날아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척도로 스스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를 만든 것은 내가 먹은 음식들, 타인에게서 받은 사랑, 그리고 니체의 가르침들이다.

 

궁극의 물음

지금 이 찰나, 언젠가 생명 없는 원소로 해체되어 사라질 그 순간까지 우리 안에서 들끓는 생에 대한 의지는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위대한 업적을 근거로 동물보다 우월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철학자 존 그레이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동물들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고 죽음을 맞는, 전적으로 우연에 지배당하는 무리다. 반면 인간은 자유로우며 이성을 가진 인격체라고 믿고, 우리 삶과 행동이 의식적 선택의 결과라고 확신한다. 

 

이게 진실일까? 존 그레이는 우리 삶이 이성적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 아무 의미도 없이 쪼개진 꿈과 욕망의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근거해 인간이 추구(풀로 엮은 개)같이 하찮은 존재, 즉 "변화하는 환경과 무작위로 상호작용을 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다."라고 단정 짓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궁극의 물음이다. 궁극의 물음 앞에 서는 것이 바로 철학 함이다. 나는 먹고 자고 사랑하는 자, 언제나 생각의 바깥에 있는 자, 내 신체 안에서 여행하는 자다. 아, 지금 나와 당신은 잘살고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왜 고향을 떠났을까?

노스탤지어는 "두려움과 불안, 방향 상실이 지배하는 시대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욕구 불만의 누적이 낳은 달콤하고 쓰라린 이 마음의 병은 상실의 징후이자 과거 기억을 아름답게 윤색해서 삶의 고달픔을 견디게 하는 정신의 한 치유책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군중 앞에서 외친다. "나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우매한 군중에게 '초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하산한 것이다. "너희들은 벌레에서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벌레다. 너희들은 한때 원숭이였다. 그리고 인간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보다도 더 철저한 원숭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란 벌레이고,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벗지 못한다. 그들이 누리는 한 줌의 행복이란 그저 "궁핍함이요, 추함이며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기에 무엇보다도 자기 극복에의 의지가 필요하다.

 

 

사는 게 왜 이래?

니체는 일곱 겹의 고독이라는 고치에 칩거하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 차라투스트라는 '만인'의 책이자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책이 아닌 까닭이다. 니체는 제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영혼이 도래하는데 50년, 혹은 100년이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왜 니체 철학이 대중에게 가 닿는 데 그만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일까? 그가 정말 완벽한 책을 썼기 때문이다. 니체는 자기의 완벽한 독자가 되려면 정신에 아주 작은 결함이 있어도 안 되고, 소화 불량을 겪어서도 안 되며, 신경이 약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자기 독자의 조건으로 "비겁이나 불결, 내장 속에 들어 있는 비밀스런 복수심" 따위가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상상한 위대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이고,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또한 조심스러운" 존재였다. 

 

니체는 그런 위대한 독자를 기다리는 데 충분한 세월이 소요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소한 300년을 기다리지 못한다면 내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이 오만함이라니!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 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너는 지난 십 년 동안 여기 내 동굴을 찾아 올라와 비추어 주었다. 내가, 그리고 나의 독수리와 뱀이 없었더라면 너는 필경 너의 빛과 그 빛의 여장에 지쳤으리라.

 

우리는 아침마다 너를 기다렸고, 너의 그 넘치는 풍요를 받아들이고는 그에 감사하여 너를 축복해 왔다. 보라! 나는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이 그러하듯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나 있다. 이제는 그 지혜를 갈구하여 내민 손들이 있어야겠다. 나는 베풀어 주고 나누어 주고 싶다.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롭다는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기뻐하고, 가난한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넉넉함을 기뻐할 때까지."(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원 회귀의 철학과 아모르 파티-운명애의 사상을 세상에 퍼뜨리기 위하여. "가장 불행한 오류인 도덕을 창조"했다는 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이고, 이제까지의 가치 체계를 뒤집는 지혜를 깨달은 자다.

 

"책벌레가 되지 말라. 책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 그는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독서가에 불과하다. 책벌레는 박학다식하지만 자기 고유의 사상은 만들지 못한다. 위대하고 위험한 사상은 도서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결정하고 느끼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게 '차라투스트라'가 준 선물은 갈망과 용기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어느 때고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행하라. 그러나 너희들은 그에 앞서 원할 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무언가를 '원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혼자 글을 끼적이었는데, 그게 제대로 된 글인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시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나는 차디찬 영혼, 당나귀, 눈먼 자, 술 취한 자를 두고 담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을 아는 자,  그러면서도 그 두려움을 제어하는 자, 긍지를 갖고 심연을 바라보는 자가 용기 있는 자였다."

 

내게도 나를 극복할 용기가 있었던가?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적나라한 생존 경쟁에 나서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나는 선량하지도 사악하지도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게 있던 건 한 줌의 자기 연민과 무력감뿐이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날카로운 자각이 내 안에 잠든 용기를 일깨웠다. 가자, 세상으로 가서 부딪쳐 보자. 저 알 수 없는 나의 미래를 향해 날아가자.

 

 

야생 늑대로 살아라

우리 내면에는 숱한 동물이 우글거린다. 니체는 인간 내부에 숨어 있는 동물에 이끌려 동물 은유라는 틀 속에서 사람의 본성을 통찰한다. 

 

"맹수들에 대한 공포는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왔다. 그 맹수에는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 숨긴 채 두려워하고 있는 동물의 종류들까지도 포함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동물을 '내부에 있는 짐승'이라고 부른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노동'에서도 드러난다. 인간은 살기 위해 노동을 하고, 노동을 자기실현의 방법적 수단으로 삼는다. 인간은 노동으로 사물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생존의 필요에 부응하도록 인간화시킨다. 동물에게는 그런 뜻에서의 노동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의 경우 오로지 본성에서 나오는 욕구를 채우려는 관습적 행동이 노동을 대체한다. 

 

인간의 노동은 자연물의 탈취가 아니라 잉여의 교환이고, 잉여의 교환을 통해 사회와 교섭하고 관계를 맺는 행위다. 동물에게 노동이 없는 것은 생존의 잉여, 힘의 잉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정체는 동물의 정의를 상당히 넘어서는 동물성의 특성을 통해서 대부분 결정된다."

사람은 모든 동물을 다 합해 놓은 것보다 더 동물적이다. 하지만 그 동물성을 도약대 삼아 더 높은 존재의 위상을 획득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어느 다른 동물보다 더 병들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럽고, 불완전하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틀림없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이 합쳐진 것보다 더 대담하고, 더 새로운 것들을 행하고, 더 과감하고, 더 운명에 도전해 왔다. 그 자신에 대한 커다란 실험 기구인 인간은 최후의 지배권을 위해서 동물, 자연, 신들과 투쟁하는 자, 불만을 터뜨리는 자,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자이다." (니체 '선악을 넘어서')

 

사람은 예속이 아니라 자유를, 노예의 도덕이 아니라 주인의 도덕을, 그리고 자신에 대한 최후의 지배권을 찾기 이해 동물, 자연, 신들과 투쟁한다. 그 투쟁의 동력은 기꺼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즉 제 운명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늑대가 개의 증오에 시달리듯 자유로운 정신과 쇠사슬에 묶인 자, 숭배하지 않는 자, 숲속에 사는 자들은 대중의 증오에 시달린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개가 아니라 늑대-되기를 하라. 개들은 사육되지만, 늑대들은 야생에서 방목된 채로 살아간다. "개들에게 미움받는 늑대처럼 민중에게 미움받는 자, 그런 자야말로 자유로운 정신이며 속박을 거부하는 자, 그 누구도 경배하지 않는 자, 숲속에 사는 자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는 왜 독수리를 반겼을까?

니체가 "내적 세계의 탐험자이자 항해하는 자, 즉 인간"이라는 철학적 자각에 이르렀을 즈음, 자신의 대리인인 차라투스트라를 거리로 내보낸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양한 눈과 양심으로 높은 곳으로부터 모든 먼 곳을, 깊은 곳으로부터 모든 높은 것을, 구석으로부터 모든 드넓은 곳을 조망"하는 철학자다. (니체, '선악의 저편')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며 입법자다.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선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할지를 규정하며, 그러한 작업을 하면서 그들은 과거를 정리해 온 모든 사람과 모든 철학적 노동자들의 준비 작업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한다. 그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그리고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또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을 위한 수단, 도구, 망치가 된다. 그들의 '지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며, 그들의 진리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다. 오늘날 그러한 철학자들이 존재하는가? 일찍이 이러한 철학자들이 존재했던가? 이러한 철학자들이 존재해야만 하지 않을까?" (니체, '선악의 저편')

 

니체는 자신을 돌아보는 눈을 다른 인간을 본다. 그리고 무리 지어 있는 인간들의 혐오스러운 모습에 욕지기를 느낀다. 많은 인간들은 아직 원숭이이자 벌레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원숭이는 난쟁이이고 광대다. 거리에는 차라투스트라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는 인간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를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라고 불렀다.

 

너희들은 벌레에서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너희 안의 많은 것들이 아직도 벌레다. (중략)

나는 너희들에게 다시 유령이나 식물로 되돌아가도록 분부하고 있는 것인가? 보라, 나는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초인이 이 대지의 뜻이다. 너희들의 의질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초인이 대지의 뜻이 디어야 한다고!

 

원숭이는 스스로 자유 의지도, 생의 약동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린 사육 동물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원숭이는 백 년 후의 미래도 볼 수 없고, 영원 회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고작해야 인간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고 그 대가로 끼니와 잠자리를 보장받을 뿐이다.

 

인간은 동물이 되려고 애쓰는 이상한 동물이다. "인간은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고 교육받았고, 그 결과 동물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공포를 통해 우리는 가축이 되었고, 군중이 되었고, 인간이 되었고, 병든 짐승이 되었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니체, '안티크리스트')

 

종일 꽃을 다니며 부지런히 꿀을 모아 집으로 돌아가는 꿀벌은 하찮은 노동과 그 보람을 즐거워하는 인간에 대한 은유다. 인간은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꿀벌 이상의 존재가 아니다. 꿀벌과 독수리는 다르다. 독수리는 강하고, 높이를 사랑하는 지혜로운 동물이다. 독수리는 높이의 현격한 차이로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들과 비교되는 고결한 존재의 표상이다.

 

 

비둘기 떼와 웃는 사자

우매한 군중이 죽은 신을 떠납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처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은 탓이다.

어리석음에 빠져 죽은 신을 섬기는 군중은 차라투스트라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차라투스트라는 무엇을 기다렸던 것일까? "나는 지금 기다린다. 나의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징조가 가장 먼저 나에게로 반드시 올 것이므로,-그것은 비둘기 떼와 함께 오는 웃는 사자"다. 포효하고 분노하는 사자가 아니라 웃는 사자라니! 

 

처음 낙타가 되고, 낙타에서 사자, 마침내 사자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정신의 변신 이야기. 낙타는 모든 명령에 잘 순응한다. 명령을 거스르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낙타는 세상의 온갖 규범과 도덕적 구속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낙타는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시민이다. 노예 도덕에 굴종하느라 끝내 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까닭에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주인을 기다리는 존재, 가장 무거운 것을 열망하는 존재! 니체가 낙타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그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 자유를 쟁취하고 스스로 사막의 주인이 되려는 의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낙타는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사자가 된 낙타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자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 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 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 라고 말한다."

 

사자가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누구로부터 규정되지 않는 자, 오직 자유를 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굶주리고, 난폭하고, 고독하고, 신을 부정하는" 사자! "나를 내버려 두라. 나는 누구의 명령도 받고 싶지 않고, 나는 자유를 원한다."라고 사자는 외친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얻으려면, 그리고 의무에 대해서도 신성한 '아니오'를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자는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 앞에서 신성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자이고, 자기 안의 증오와 분노를 승화시켜 창조의 동력으로 쓰는 자다. 사자는 낙타보다 한 단계가 더 도약을 이루고, 정신 변화의 마지막 단계인 어린아이에 한층 더 가까이 간다. 

 

약자의 선량함은 위선이다. 칸트는 "나쁜 짓을 하려 해도 할 수조차 없게 된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다."라고 했다. 나약한 자는 쉽게 허무주의, 그리고 낙담과 고통에 무릎을 꿇는다. 그들은 나쁜 짓을 하려 해도 차마 용기를 낼 수 없어서 포기한다. 이런 나약한 자의 착함이란 위선이고, 비굴이며, 나약함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착한 사람들은 약하다.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착한 사람인 것이다." (니체, '권력에의 의지') 절대로 자신의 나약함을 무기 삼지 말라. 나약하다는 것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뜻이다. 니체에 따르면 타인의 동정과 연민을 구하는 약함은 퇴락이고 타락이다. 사자처럼 강해져라. 그것은 노예 도덕에 굴종하기보다는 노예 도덕을 극복하는 존재가 되고자 함이다.

 

사자는 거대한 용에서 발화되는 "너는 해야만 한다."라는 도덕과 의무의 강령들, 그 사슬들을 끊고 자유를 갈망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사자는 "너는 해야만 한다."라고 명령하는 용에게 "나를 내버려 두라. 나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자 한다."라고 맞선다. 

 

용은 세계를 지배하는 법이고 도덕, 유일한 가치 척도이다. 용의 명령은 완강하다. "모든 가치는 창조되었고, 이 창조된 일체의 가치, 그것이 바로 나다. 따라서 '나는 하고자 한다.' 따위의 말은 용납될 수 없다." 우리가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면 용과 맞서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과 싸워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가들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표효하며, 그 표효는 '아니요'라는 부정 정신의 외침이다.

 

니체의 철학은 잔혹할 만큼 강렬하다. 허약한 자들과 패배한 자들에 대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한다. "허약한 자들과 패배자들은 사라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닌 인류애의 첫 번째 원칙이다." (니체, '반그리스도')

 

니체는 왜 약자와 패배자에게 그토록 단호한가? 그것은 약자들이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맞서기보다는 타협하고 안주하기 때문이다. 약한자들은 자신만의 안녕, 자신만의 행복, 자신의 안전에 집착한다. 일견 착하게 보이지만 그들은 나약함 때문에 가해자로 둔갑한다.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부류는 선량함으로 위장한 약자들이다. '착한 사람'으로 위장한 약자들은 아무 자각도 없이 세상에 해악을 끼친다. "나쁜 사람들이 어떤 해악을 끼치든, 착한 사람들이 끼치는 해악이 가장 해롭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사자처럼 용맹하고 더 강해질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무엇을 잘하는지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사람들이 자기 내면에 숨은 힘과 용기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자기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성찰의 능력이 없는 자들은 자기다운 삶을 발명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관습적인 것들에 매인 채 피동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내면에 숨겨진 정원과 농장을 가지고 있다." (니체, '즐거운 학문')

 

국가는 어느 경우에 우상이 되는가?

하찮은 존재이면서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듯이 연기를 피우고 불을 뿜는 개들. 국가는 "위선에 찬 개"다. 왜 개들은 요란하게 울부짖기를 좋아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함이다. 니체는 "사물의 배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라고 말한다. 

 

"너와 마찬가지로 국가도 위선에 찬 개의 일종이다. 국가 또한 너처럼 연기와 울부짖어 가며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 또한 너처럼 사물의 배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 (중략) 이 말에 불개는 더 이상 내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수치심에서 꼬리를 내리고는 기어드는 소리로 멍! 멍! 짖어 댔다. 그러고는 자기의 동굴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를 위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위선에 차 있다. 그들은 대중을 속이기 위해 늘 가짜 연기를 피우고, 불을 내뿜는다.

니체는 국가를 "냉혹한 괴물 가운데서도 가장 냉혹한 괴물"이라고 말한다. 국가가 냉혹할뿐만 아니라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괴물임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지만, 국가가 우선하는 것은 국가 자체의 생존과 지속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독배를 들어 죽어 가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신의 목숨을 끊어 가면서 '생'은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토, 국민, 주권을 토대로 이루어진 상상의 동맹체에서 국민은 노동과 납세와 병역의 중요한 자원이다. 국민을 포획하고, 그 자원을 부당한 방식으로 전유하는 국가는 니체의 명명대로 '우상'이고, 성경 묵시록에서 말하는 '짐승'이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전쟁-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이 당신과 함께 웃을 때

누구나 태어나면 일곱 겹의 삶을 살아야 한다 희망은 멀리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서 숨 쉬는 것, 그게 희망이다. 우리의 삶이 시와 음악을 잉태한다면, 희망은 우리를 미래로 데려다줄 것이다.

 

우리가 이를 악물고 모질게 마음을 다지며 혼돈의 세월을 견딘 것은 지켜야 할 사랑이 있고, 보듬어야 할 마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아, 이 고통의 날들 또한 지나가리니, 부디 살아 있으라.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 있으라. 가장 무서운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다. 그때 기다림은 우리 인생을 낭비하는 헛된 광대놀음에 지나지 않지만, 인생의 태반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기다림이 내 마음대로 연장하거나 단축할 수 없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간다고 하지만, 정작 가는 것은 사람들이다 다만 시간은 한 공간에 균질한 빛처럼 뿌려질 따름이다. 지혜로운 이들은 기다림의 시간을 내적 성장의 계기로 바꾼다. 빠른 성과와 결과를 요구하는 시대에는 기다림이 아무 쓸모 없는 지체에 불과하게 보인다. 모든 게 빛의 속도로 처리되는 오늘날 기다림은 지루함과 불편을 낳는 원인이 될 뿐이다. 

 

사람들은 참고 기다릴 줄 모른다. 그러나 우정과 포도주가 그렇듯이, 가장 좋은 것들은 항상 기다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슬품이 기쁨으로 변하고, 그리움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고요한 시절을 기다려야 한다.

 

저무는 한 해를 회고하며 허망함에 진저리를 치는 까닭은 내가 정말 뜨겁게 살지 못한 까닭이다. 

우리의 작은 즐거움들이 불가능해졌을 때 비로소 그게 귀하고 아름다운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내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펴라. 활짝, 더 활짝! 그리고 다리도 잊지 마라! 너희들의 다리도 올리려무나. 그대들 훌륭한 무용가요. 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리라! 웃는 자의 이 왕관, 장미꽃으로 엮은 이 왕관, 나는 스스로 이 왕관을 머리에 썼노라. 그리고 나 자신이 내 웃음을 신성한 것으로 말하노라... 무용가 차라투스트라, 날갯짓으로 하는 체하는 경쾌한 차라투스트라, 온갖 새들에게 눈짓하며 날 준비를 마치고 각오하는 자, 행복하고 마음이 가벼운 자,  웃고 있는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 높이뛰기와 넓이뛰기를 좋아하는 자, 나 자신이 이 왕관을 내 머리에 얹었노라! 웃는 자의 이 왕관, 장미꽃으로 엮은 이 왕관, 형제들이여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져 주노라! 나는 웃음을 신성하다고 말하노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내게 배울지어다. - 웃음을."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가슴을 펴라 우리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희망을 노래해야 할 까닭이 있다. 버티고 살아온 날의 힘이 앞으로 남은 날을 살아갈 동력이 될 것이니, 자, 발꿈치를 들고 고개를 쳐들어 저 먼 곳을 바라보자. 비록 발이 시궁창을 딛고 있어도 저 높은 창공에서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자. 언젠가 만날 가슴 벅찬 희망의 날들을 기다리자. 겨울 새벽마다 마당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있고, 아침마다 자식들의 옷을 다리미질하는 어머니가 있다. 저 먼 곳에서 봄은 오고 있다. 씨앗과 둥근 뿌리들이 땅 밑에서 움틀 준비를 하고, 한겨울에도 나무들은 새로운 잎눈을 키운다. 겨울이 제 안쪽에 봄을 기를 때 누군가 귓가에 속삭인다. 봄은 우리에게 심장이 쿵쿵 뛰듯 열심히 살라고 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가 시련에 쉬이 꺾이지 않는 존재, 웃음과 기쁨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배우기 위함이다. 자, 두려움을 떨쳐 내자! 그리고 웃어라! 일찍이 웃음의 신성함을 발견한 철학자는 "웃는 자의 이 왕관, 장미꽃으로 엮은 이 왕관, 형제들이여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져 주노라!"라고 말한다. 웃음을 떨쳐내는 생명의 날갯짓이다. 웃어라, 더 많이, 활짝! 웃을 때 존재의 봉오리는 활짝 피어난다. 당신이 웃는다면 세상이 당신과 함께 웃으리라!

 

 

제4부

철학자는 왜 산책을 좋아할까?

최단 경로는 이동에 따른 시간과 경비를 절약하고 효율성을 드높이려는 목적이 뚜렷하다. 산책은 그럴 필요가 없다. 산책은 보상을 바라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무목적에 가까운 산책을 통해 얻는 것은 기분 전환, 무상의 기쁨을 낚는 게 전부다. 무보상의 행위라는 데서 오는 숭고함 속에서 산책의 즐거움은 오롯해진다.

 

골반, 몸통, 팔을 흔들며 걸을 때 몸은 깨어난다. 우리는 주위의 소리와 냄새와 빛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직관은 더 날카롭게 벼려진다. 우리는 발을 통해 울퉁불퉁한 지형과 세계를 지각하며 땅의 식물과 같은 종족이 된다. 우리가 걸을 때 실은 풍경과 함께 움직이며 우리 몸은 풍경이 품은 빛과 소리에 공명한다.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그렇게 자기를 잃고 사라짐으로써 사실은 풍경 그 자체를 그러쥐고 자기화한다. 걷는 자는 어제의 나, 과거의 나와 결별하고 전혀 다른 내면 형질을 갖고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걸을 때 불안과 공허를 떨치고, 제 삶을 덮친 비열함과 악덕과 탐욕에서 벗어난다. 몸의 필요와 날숨과 들숨에 집중하며 걸으면서 우리는 제 육체와 세계를 새롭게 빚는다. 걸으면 홀연 지각이 열리고 세계와 나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깨달음의 찰나다. 풍경속을 걷는 자는 풍경을 밀고 앞으로 나아간다. 더 활기차고 즐거운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가? 그걸 정말 원한다면 니체가 그랬듯이 바깥으로 나가서 힘차게 걸어 보자.

 

 

우리는 두려움의 탐색자

"사람은 나이를 먹고, 꿈은 사라진다. 이윽고 때가 되면 그들은 이마를 문지른다. 그 습관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여전히 사람들은 이마를 문지른다." (니체, '선악의 저편')

 

"철학이란, 스스로 얼음 구덩이와 높은 산을 찾아 헤매는 것을 말한다. 생존에 포함된 모든 의문을 탐구하는 것,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구속된 모든 영역을 살펴보는 것을 뜻한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누구에게나 두려움은 있다. 네 살 난 아기에게는 네 살의 두려움이, 스무 살 청년에게는 스무 살의 두려움이, 일흔이 넘은 노인에게는 일흔의 두려움이 있다. 사람은 세상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남과 동시에 두려움이란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리고 평생 포괄적 두려움 속에서 제 생존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의 실체란 무엇인가?

 

두려움은 우리 안의 자기 보존 욕구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때 방어적으로 형성되는 감정이다. 두려움과 불안은 한 짝으로 불안의 이면이다. 두려움은 살아 있음의 반증이다. 

 

죽음은 긴 삶이 낳은 짧은 의례일 뿐이다. 당신이 없다면 나도 없다. 내 존재 증명의 유일한 수단인 당신은 내 눈동자 속에 있다. 

 

니체가 쓴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서는 그대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구절을 잊을 수가 없다. 혼돈은 질서의 무한 증식속에서 튀어나온다. 혼돈은 질서의 혼외 자식이고, 질서의 아종이다. 혼돈은 춤추는 별이 태어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우연과 별들을 품고, 나뭇잎과 천둥을 견디며 산다 당신은 잘 살았는가? 우리는 사랑하고, 후회한다. 사랑하지 않고도, 후회한다. 우리는 후회해도 죽고, 후회하지 않아도 죽는다. 

 

 

사랑은 비처럼 내린다

사랑만큼 놀라운 생명의 현상이 또 있을까! 사랑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일종의 야만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사람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사랑할 땐 사랑을 모르고, 이별할 땐 이별을 몰랐다. 하늘엔 태양이 작열하고, 땅엔 붉은 토마토가 익어간다. 먼 산에 뻐꾹새 울 때 우리는 바다를 그리워한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게 기적이듯이 첫사랑은 운명이 만든 기적이다. 

 

사랑은 대상의 유일무이함을 인정하고, 그의 매력 자본을 이상화하는 행위다. 그 대상에게 자기 환상을 투사하고, 그 대상이 아니라 자기 환상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광기는 사랑의 속성 중 하나다. 사랑은 누군가를 미칠 만큼 좋아하는 것이다. '사랑에 미쳤다'라고 하지 않는가?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마음에서 점점 커져서 주체마저 삼켜 버린다. 그 삼킴의 자리에 남는 것은 잡초같이 무성해지는 대상을 향한 병든 환상이다.

 

사랑이 더없이 위험한 행위인 것은 사랑이 본질에서 권력 의지이고, 생명 의지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 위험에 대해 무엇이라고 경고했던가?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너희들의 위험은 강에 있는 것도 선과 악의 종말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위험은 의지 자체에, 곧 권력 의지, 끝없이 생산해 내려는 생명 의지에 있는 것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타인을 빌어 기쁨과 의미를 빚는 행위이고, 사랑은 미지를 향한 모험이며, 생명 의지이자, 불투명한 미래에 제 상징 자본을 거는 위험한 투자다. 인류는 그런 모험과 투자에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지구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허물을 벗지 못하면 뱀은 죽는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반드시 죽는다. 인간도 낡은 사고의 허물에 갇히면 성장은 커녕 안에서 썩기 시작해서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생각의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 '아침놀')

 

성장하라! 껍질을 벗고 탈피한다는 것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로 나아가는 신진대사의 한 과정이다. 자기 세계를 깨고 나오지 못한다면 성장은 불가능하다. 성장이란 낡은 자아를 벗어 버리고 새로운 자아와 만나는 것이다. 진정한 성장이란 "쾌할해진 감각과 기쁨 안에서" 더 예민해지고 영리해지는 것이다. 껍질을 벗지 못하면 뱀은 죽는다. 허물은 쓸모를 다한 낡은 자아를 벗어 버리는 것이다. 허물 벗기는 자기 한계에서의 해방이고, 자유다.

 

허물을 벗어라! 그런 태도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낡은 틀에 꽁꽁 옭아매게 하지도 마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지금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을 항상 존귀한 인간으로 사랑하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다.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곧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작은 덕, 작은 현명함, 자질구레함, 안락함" 따위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가는 것이다. 성장을 위해, 혹은 미래의 도약을 위해 먼저 준비할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 운명의 도약대로 삼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에겐 어떤 미래도 없다.

 

 

조용한 말이 폭풍을 일으킨다

소통은 사람이 무리 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덕목이다. 상호 간에 깊은 이해와 호감을 배가시키는 소통을 잘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소통이 창조와 증식의 동력인데 반해서 불통은 실패와 죽음의 조건이라는 얘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 으뜸가는 수단은 말이다. 소통은 상생과 환대의 필요조건이다. 

당신과 나 사이의 소통은 관계의 창조이고, 생성을 위한 토대다. 

 

니체는 그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을 이렇게 전한다.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조용한 말이다. 비둘기의 걸음으로 오는 사고만이 세계를 이끈다."

 

대중은 미디어에 얼굴을 내밀고 논쟁을 하는 사람들이 사실 제 천박함을 교양으로 분칠한 속물이거나 천민인지도 모른 채 그들을 오해해왔다.

 

"사실 대중들은 오랫동안 철학자들을 잘못 봐 왔거나 오해해왔다. 즉 학문적인 인간이나 이상적인 학자로, 아니면 종교적으로 고양된 탈 감각적이고 '탈 세속적인' 몽상가나 신에 도취한 사람으로 잘못 보아왔거나 오해해왔다." (니체, '선악의 저편')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니체는 그들이 "얼굴과 사지에 오십 가지 색채를 칠한" 인간이라고 한 점의 자비심도 없이 까발린다.  척을 잘하는 그들의 교양이란 일종의 위장술이다.

 

"볼품없는 사람이 거울 앞에 서서 수탉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찬탄의 눈길을 주고받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민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니체, '반시대적 고찰')

 

주체적 사유를 할 능력이 결여된 그들은 오점 없는 인식을 내세우며 뻔뻔하게 안전한 말만을 한다. 그들의 번지르르한 말과 논리에 속지 않도록 주의하라! 세상에 폭풍을 일으키는 말은 나지막한 말, 이기심을 배제한 순수한 말, 달이 대지를 쓰다듬듯 한없이 부드러운 말이다.

 

 

철학자가 나무에서 배우는 것들

"하늘은 찌를 듯이 높이 자란 나무. 그 나무들이 성장하는 데 거센 바람과 거친 날씨가 없었다면 그 같은 성장이 가능했을까? 벼가 익는 데 호우와 강한 햇살, 태풍과 천둥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었을까?" (니체, '즐거운 지식')

 

나무는 자연이라는 생명 공동체에서 중요한 연결망이다. 인간과 대지, 인간과 동물들은 나무를 매개로 연결된다. 인간은 그 연결망의 작은 일부에 속한다. 

 

"식물의 기억은 세대를 이어 계승"되고, "뿌리와 잔가지는 빛, 중력, 열, 무기물"을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나무에게 배우라.'고 말한다. "소나무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어떠한가. 마치 귀를 기울이고 무엇인가를 들으려는 듯하다. 전나무는 어떠한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이 나무들은 조금도 초조해하지 않는다. 당황하지 않고, 조바심내지 않으며, 아우성치지 않고, 고요함 속에서 가만히 인내할 뿐이다. 우리도 소나무와 전나무의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다." (니체, '방랑자와 그 그림자')

 

"봄바람은 밭이나 갈도록 길들여진 얌전한 황소가 아니라 성난 뿔로 얼음을 깨부수는 난폭한 황소이며 파괴자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너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인간은 늘 지금 이 순간을 살면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간다. 미래란 지금 이 순간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순간은 영원히 순환하고 되풀이한다. 니체는 "만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미 일어났고, 행해졌고, 과거사가 되어 버렸을 것이 아닌가?"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묻는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젠가 지나간 과거의 순간과 중첩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영원 회귀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지속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되풀이라는 것"이다. 만물은 영원 회귀의 운동을 지속한다. 올해의 봄은 작년의 봄과 닮았지만 똑같은 봄이 아니다. 봄은 늘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반복한다. 모든 봄은 항상 우리가 겪지 못한 새로운 봄이다. 영원한 생성의 형식으로 우리 앞에 오는 봄! 삶은 늘 반복하며 새롭게 다가온다. 

 

산다는 것은 영원 회귀하는 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차이의 반복, 삶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영원한 무로 떠돌며 우리의 시간을 겪어 내는 것이다.

 

 

당신의 이기주의가 오류임을 인식하라

가족이란 무엇인가? 부부와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족은 사회의 최소 단위다. 가족은 어린아이들이 자아 성장을 겪는 사적 영역이고, 그들의 자아의 성장 스토리가 펼쳐지는 무대다.

 

에바 일루즈는 "감정은 온전한 의미의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내적인 에너지다. 행동에 특별한 '기분' 또는 '색조'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다." 감정에는 어떻게 내적 에너지가 살릴 수 있을까? "그것은 감정이 언제나 자아의 감정이요, 자아와 타자들(문화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타자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자아의 영역에 속하면서 행동의 내적 에너지인 감정은 사회생활에서 항상 중요한 기제로 작동한다. 그런데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인지, 정서, 판단, 욕구, 육체 등등이 얽힌 복잡적인 그 무엇이다.

 

"차라리 그 안에 있는 네 이기주의를 찬미하라! 네 이기주의의 맹목성, 비열함, 소심함을 찬미하라. 그 판단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느끼는 것은 결국 이기심, 맹목적이고 비열하고 소심한 이기심 때문이다. 이것은 네가 아직 진정한 네가 되지 못했고, 너 자신의 고유한 이상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이상은 결코 네 고유한 이상이 될 수 없고 만인의 것은 더더욱 될 수 없다. '이 경우에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계속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에 대한 이해에서 아직 다섯 걸음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이기주의자란 자기의 "맹목성, 비열함, 소심함"에 발목 잡혀 타락한 관습에 따르는 자들이다. 대의나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고 자기 욕망에 투항하는 자들은 자기만의 삶과 도덕을 정립하지 못한 채 표류한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이기주의자란 "자신의 고유한 이상"을 창조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에 대한 이해에서 아직 다섯 걸음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우매함 때문에 제 인생을 망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자아의 오류를 발견할 것. 이기주의가 오류임을 인식하라. 이타주의에서 그 반대를 보려 하지 말라. 이타주의가 자칭 개인이라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듯이 이해하지 말라. 아니다, 나아 너를 넘어서라. 우주의 방식으로 느껴라!" (니체, '유고')

 

세상의 관습에 굴복한 사람은 증오와 속박 속에서 방황하느라 아직 자유정신, 즉 성숙한 정신에 도달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삶을 살려면 이기주의라는 오류에서 벗어나라. 어떻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새로운 삶에의 의지를 찾으며 거기서 미지의 전율을 느껴야 한다. 

 

니체는 이기주의도, 이타주의도 넘어서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착함은 이웃의 입에 회자될 때 더이상 착함이 아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조차 '자기 자신에 대한 나쁜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이기주의나 이타주의는 다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미래다. 그러기 위해서 "우주의 방식으로 느껴라!"

 

 

인생이란 대단한 게 아니다

살아 보면, 인생이란 게 대단치 않다는 생각이 분명해질 때가 있다. 발을 땅에 딛고, 하늘을 머리에 두고 걷는 게 인생이다. 

강가에서 운모 박힌 돌을 주워 들고 환호하거나 풀숲에서 하얀 새알이 담긴 새집을 탐색하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인생이 풍성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보다 더 나은 인생이란 "우연이란 발로 춤을 추는 것"이자 신의 탁자 위에서 하는 "신성한 주사위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란 우연이라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주사위 놀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억의 동일성이라는 토대 위에 제 생을 세운다. 과거 기억은 우리의 기초적 감정 자본이자 그 토대다. 그 토대를 떠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중첩이 현재를 빚는다는 점에서 그 말은 맞다. 우리는 현재를 산다고 믿지만 그것은 과거에서 발현된 현재일 뿐이다. 

 

'들뢰즈, 유동의 철학'에서 "하나의 과거는 이미 무수한 과거를 포함하고, 그 후에 도래하는 무수한 현재에 뒤덮인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깊이 속에서 분리와 결합 운동을 하며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드러낸다. 그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차이를 만든다. 과거는 반복되고, 현재의 중첩 속에서 차이를 반복하는 가운데, 과거라는 껍데기를 벗고 현재에 도래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이 삶을, 늘 실패하고 비루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인생을 놀라운 긍정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일 것이다. 니체의 위대함은 죽음 직전에 이른 환자를 치유해 소생시키는 명의처럼 우리를 비관주의에서 "새로운 양식, 새로운 태양, 새로운 미래를 향해 뻗을 수 있도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를 끄집어내 "가슴을 펴라. 활짝, 더 활짝!"이라고 격려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인생을 무겁게 하는 모든 게 불행의 처음이나 마지막이다 이 철학자는 이 불행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어리석음과 의무와 추억의 고통이라는 허물을 벗고 '변화하라!'라고 속삭인다. 내면의 형질을 바꾸고 그다음은? 크게 웃는 법을 배워라! 멋진 무용수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르라! "그대들 자신을 뛰어넘어 크게 웃는 법을 배워라. 멋진 무용수답게 큰 웃음소리도 잊지 마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나의 덕이 춤추는 자의 덕이었다면, 그리하여 내가 때때로 두 발로 황금 빛과 에메랄드빛의 환희 속으로 뛰어든다면, 만약 나의 악의가 들어 있지만, 그 악의들은 자신의 행복으로 인해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니체, '일곱가지 봉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의무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우리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영에 저항한다. 

 

자, 준비가 되었는가? "이 왕관, 장미꽃으로 엮은 이 왕관"을 쓰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무용수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

 

 

춤추고 웃어라!

쇼펜하우어는 "웃음은 갑작스럽게 지각된 어떤 개념과 어떠한 관계로든 그 개념으로 인해 생각된 실제 대상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웃음 그 자체는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누구나 웃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자나 죽어 가는 자들은 웃지 못한다. 오직 담대한 자, 약함을 넘어서서 용기를 내는 자, 즉 강하고 지혜로운 자만이 웃는다. 대체로 인간은 약하다. 그러므로 웃는 자는 드물다. "나는 차디찬 영혼, 당나귀, 눈먼 자, 술 치한 자를 두고 담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을 아는 자, 그러면서도 그 두려움을 제어하는 자, 긍지를 갖고 심연을 바라보는 자가 용기 있는 자렷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용기 있는자가 웃는 게 아니라 웃는 자가 용기 있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웃는다. 거만함과 비열함이 아니라 제 안의 벅찬 환희를, 존재를 법열감을 분출하는 것, 이게 진짜 웃음이다. 우리는 어떻게 놀이에 빠져 몰입의 기쁨을 누리는 어린아이로 살 수 있을까?

 

무덤이 있는 곳에만 부활이 있다

목표한 것에 못 미친 결과를 실패라고 말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길이 어긋나고 엉뚱한 곳으로 들어서기도 한다. 살다 보면 실패를 겪는 게 드문 일이 아닌데, 나 역시 인생에서 숱한 실패를 겪었다. 실패한 자는 '도약에서 실패한 호랑이'같이 절망을 겪는다. 그 절망은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고갈과 탈진의 느낌, 그리고 '모든 노고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낙담에서 비롯한다. 니체는 이렇게 쓴다. "모든 노고는 부질 없는 것이 되고 말았구나. 포도주는 독이 되고, 사악한 눈길이 있어 우리들의 들녘과 심장을 노랗게 태워 버렸으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실패가 곧 위기는 아니다. 실패에 대한 성찰은 새로운 삶을 빚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말고 항상 성실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습성을 갖고 있으며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랑을 사랑으로 느낄 수가 없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정확히 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자신조차 모르면서 상대를 알기란 불가능하다." (니체, '아침놀')

 

실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의 정당성과 도덕적 올바름이다. 실패가 곧 끝은 아니다. 실패는 또 다른 시작점이고, 국면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나를 만든 것은 성공한 경험들이 아니다. 실패에서 습득한 지혜가 '나'라는 인간을 빚는 데 기여한 바가 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에게 실패의 경험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도약하는 핵심 역량이 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큰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모든 유의미한 성취들은 실패에 대한 보상들이다.

먼저 죽음이 있어야만 부활이 뒤따르는 법이다. 우리는 실패를 딛고 일어선다. 기억하라, 니체는 이렇게 썼다. "무덤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다."라고!

 

 

정오는 왜 위대한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의 시작이다.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위대한 정오는 신이라는 인간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위버맨쉬의 시간이기도 하다. 모든 오류가 사라지는 시간, 그리고 태양이 가장 많은 에너지를 베푸는 시간, 그것이 정오다. 그러나 그 시간은 위버맨쉬가 되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사긴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던 불행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별들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그러자 저들은 탄식했다. '다른 존재와 행복 속으로 기어들어 갈 수 있는 천상의 길이라도 있다면! 하고. 바로 이런 소망에서 저들은 도망갈 샛길과 피의 잔이란 것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빛의 상승이 정점에 도달하는 정오는 니체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그들은 정오에 도달하기 전 지쳐서 정오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한다. 

 

"가장 작은 바로 그것, 가장 조용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숨결 하나, 한순간, 눈빛 하나 -작은 것이 최고의 행복을 만든다. 조용!"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정오를 영접하지 못한 자만이 소란스럽다. 정오를 맞을 준비를 하라! 정오란 나약한 저신을 단숨에 삼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심연이다. 정오를 영접하려면 더욱 단련된 정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