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희귀한 비율 - 임계 상태와 직선의 위력
세상의 상당한 부분은 평균만이 아니라 분포의 "끝 부분"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평균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에 의해서, 일정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앙에 의해서, "중산층"이 아니라 최고 부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평균"의 사고방식에서 스스로 벗어나야만 한다. - 필립 앤더슨(1997)
사실 요즘은 지진, 진화, 산불, 심지어 병원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명단과 세계대전을 비롯한 모든 문제에서 임계점을 찾아내는 일이 유행이다. 그런 주장의 설득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만 요동에 대한 극단적인 민감도, "무규모" 사건들, 특히 확률 분포의 특별한 형태를 비롯한 임계 현상의 특징들 중 많은 부분이 자연과 인간 세계에서 폭넓게 발견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생활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불예측성과 규칙성의 이상한 조합에 대해서 임계점은 적어도 훌륭한 은유이고 때로는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칼날 위의 물리학
반 데르 발스의 이론은 물질의 액체와 기체 상태의 구분이 사라지는 임계점의 존재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임계점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우선 임계점에 가까운 유체는 뿌옇게 보인다. 임계 유백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한 가지 실험적 특징은 임계점에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민감성이다. 임계 상태에 가까이 있는 시스템은 작은 교란에 극단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물질을 압축하면 부피가 줄어든다. 기체는 일반적으로 액체보다 훨씬 더 쉽게 압축된다. 액체와 기체의 임계점에서는 유체가 놀라울 정도로 쉽게 압축된다. 사실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압축된다.
그런 사실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실험적으로는 물질을 임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일은 절대 관찰할 수가 없다. 임계 상태가 너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계점에 다가가면서 압축도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물질의 열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시스템의 온도를 높이려면 에너지를 투입해야만 한다. 온도를 1도 높이기 위해서 투입해야 하는 열 에너지의 양을 "열용량"이라고 부른다. 물은 비정상적인 큰 열용량을 가지고 있다. 물을 끓이려면 많은 열을 투입해야 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임계점에서는 물질의 열용량이 무한대가 된다. 물질이 일종의 무한 열흡수기가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가열해도 온도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임계점은 극도로 차가운 액체 헬륨과 초유체라고 알려진 이상하면서 점성이 없는 상태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절대 온도 0도보다 2도 정도 높은 온도에서 액체의 열용량이 갑자기 증가하는 것은 초유체로 상전이가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확실한 흔적이다.
이런 이상한 거동을 "발산"이라고 한다. 물질의 어떤 성질이 임계점에서는 무한대로 발산한다는 뜻이다. 반 데르 발스의 이론은 임계점에서 유체의 압축도와 열용량이 발산한다는 사실을 예측한다. 그곳에서 모든 것이 통제를 벗어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런 발산의 속도를 나타내는 "임계 지수"라는 편리한 양이 있다.
과학자들은 온도가 임계 온도에 가까워지면서 열용량과 같은 양이 얼마나 빠르게 증가하는지를 측정함으로써 임계 지수를 쉽게 계산할 수도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 임계 지수가 "모든" 유체에서 똑같다는 것이다. 압축도의 발산을 나타내는 임계 지수는 열용량의 임계 지수와 다르지만, 역시 모든 유체에서 같은 값을 얻었다. 액체-기체의 임계 지수는 "보편적"이다.
임계 지수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수학이 필요하다. 지수는 두 가지 양 사이의 멱법칙이라는 수학적인 관계를 정의해준다. 어떤 양 y의 값과 다른 양 x의 값이 멱법칙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x의 값을 두 배로 늘릴 때마다 y의 값이 일정한 배수로 늘어난다는 뜻이다. 멱법칙의 지수는 그런 배수가 얼마인지를 알려주는 숫자이다. 예를 들면, 지수의 값이 2이면, x의 값을 두 배로 할 때마다 y의 값은 네 배가 된다. 지수가 3이면, y의 값은 여덟 배가 된다.
이런 관계는 예상했던 것보다 간단하다. 예를 들면, 육면체의 모서리 길이와 부피 사이에는 멱법칙 관계가 있고, 그 지수는 3이다. 모서리의 길이를 두 배로 하면, 육면체의 부피는 여덟 배로 늘어난다.
임계점에서 발산하는 유체의 성질은 모든 유체에서 같은 값을 가진 임계 지수에 의해서 정해진 속도로 발산한다. 어떤 성질은 임계점에서 무한대로 커지는 대신 0으로 줄어든다. 액체와 기체 사이의 밀도 차이가 그런 경우이다. 퀴리 점에서 자석의 자화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역시 그런 성질들이 0으로 줄어드는 독특한 속도가 있다. 그런 속도에 대한 임계 지수도 정의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지수가 음의 값을 가지게 된다.
반 데르 발스의 이론에 따르면, 그 값은 -0.5가 되어야 했다. 실제 값은 -0.343이다. 이런 차이를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임계 지수가 모든 유체에 "보편적"이라면, 그 속에는 물질의 본질에 대한 지극히 근본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반 데르 발스의 이론에 무엇이 빠져 있기 때문에 임계점에서의 진실을 정확하게 밝혀주지 못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흔들리는 균형
반 데르 발스 이론이 밝혀내지 못했던 것은 임계점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거동의 핵심이 요동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임계점은 선택을 해야 하는 갈라진 길을 나타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이 바로 얼거나 녹는 것과 같은 1차 상전이와 임계 상전이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액체가 어는 점 근처에 도달하면, 액체의 모든 부분이 고체가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러나 유체를 임계 온도를 통해서 냉각시키면, 유체는 갑자기 액체나 기체의 두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게 되고, 그 확률도 똑같아진다. 자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임계 온도(퀴리 온도) 이하에서는 이징 모형의 원자들이 자석 바늘(스핀)을 두 가지 반대되는 방향 중에서 어느 쪽으로도 향할 수 있다. 두 가지 이외에는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 결국 임계점은 공이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계곡을 가진 언덕 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공은 두 계곡 중의 하나로 굴러내려가야만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런 선택은 요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론적으로는 초임계 상태의 유체는 전체적으로 같은 밀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원자들의 무작위적인 움직임에 의한 우연한 요동 때문에 어느 곳은 순간적으로 밀도가 더 커지고, 다른 곳은 밀도가 더 작아지기도 한다. 유체를 임계 상전이 상태를 지나서 냉각시키면 밀도가 더 높은 곳은 이미 액체에 더 가까워졌기 때문에 액체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밀도가 더 작은 곳은 기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무작위인 선택은 어느 쪽이나 영원히 지속된다. 그런 사실은 자석의 경우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스핀이 같은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 영역에서는 경계 부근의 스핀도 이웃한 스핀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에 같은 방향으로 배열될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시스템은 무작위적인 요동에 놀라울 정도로 민감해진다. 아주 작은 우연에 의한 선호가 균형을 깨뜨린다. 그런 불안정성은 임계 상태를 언제나 이쪽 아니면 저쪽 계곡으로 굴러내려갈 위험이 있는 매우 불확실한 상태로 만든다. 물질을 임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모든 방향에서 한꺼번에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바늘을 세우려는 것과 같다.
기본적인 특이성은 요동에 대한 극단적인 민감성 때문에 나타난다. 시스템의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 거의 순간적으로 다른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 스핀의 방향이 직접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스핀의 상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통계 물리학의 표현을 사용하면, 시스템에 장거리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임계점에서는 한 입자가 다른 입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표적인 거리에 해당하는 상관 범위도 역시 무한대로 발산한다.
그런 극도의 민감성은 집단적인 효과이다. 시스템의 두 입자나 스핀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미치는 영역이 임계점에서 갑자기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이징 모델에서는 가장 가까운 이웃까지가 그 한계이다. 그러나 그런 상호 작용이 열운동의 무작위화 효과에 의해서 압도당하지 않고 먼 거리까지 전달된다. 임계점에서는 입자들이 함께 행동한다.
문제는 각각의 입자가 다른 모든 입자들이 자신의 선택을 따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계 상태에서는 영역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고, 각각의 조각은 우연에 의해서 생기는 국부화된 불균형에 따라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 영역은 하나의 입자에서부터 전체 시스템을 포함할 정도로 큰 집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영역에는 어떤 특징적인 규모도 없다. 모든 가능한 길이 규모가 다 나타나고, 끊임없이 형성되었다가 풀어지며, 자랐다가 줄어들기도 한다. 따라서 임계 상태는 열잡음에서 생기는 독특한 요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어떤 가능한 규모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이런 거동이 임계점에서 유체가 우유처럼 변하는 임계 유백의 원인이다. 그런 영역은 우유에서 떠 있는 미시적인 지방 입자와 마찬가지로 빛을 심하게 산란시킨다. 그래서 유체가 진주 빛의 불투명한 모습으로 보인다.
반 데르 발스 이론에서는 임계 상태의 요동에 대한 미시적인 구조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임계 지수가 틀릴 수밖에 없었다. 반 데르 발스 이론에서는 임계 상태를 평균적으로 어느 곳이나 똑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런 경우에는 입자가 불연속적인 이웃의 "흰" 성질이나 "검은" 성질을 보지 못하고 다른 모든 입자들에 의한 평균적인 "회색" 성질만 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평균장 그사이다. 반 데르 발스의 평균장 이론은 자세한 부분에서는 실패했지만, 임계 상태를 설명하는 데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실제 유체의 경우 이론적으로 그 값을 예측하려면 온사거의 분석을 3차원으로 확장해야만 한다. 지금까지는 그런 시도가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론물리학자들에게는 3차원 이징 모델과 같은 모델에서 임계 지수의 "진짜" 값을 짐작할 수 있는 묘수가 있다. 재규격화라는 방법으로, 임계점에서 규모에 상관없는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실제 재규격화는 임계 상태를 곁눈질로 들여다보는 수학적인 방법으로 작은 구조는 회색으로 처리하고, 큰 구조만을 남겨 두는 "선택적" 제거 방법에 해당한다. 그런 재규격화 과정을 점진적으로 큰 규모에 적용함으로써 임계 지수의 진짜 값을 계산할 수 있다. 이 방법을 3차원 이징 모델에 적용하면 실제 유체에서 실험적으로 얻은 것과 거의 같은 값을 얻는다.
격자에서 채워지거나 비어 있는 상자로 이루어진 유체의 이징 모델은 실제 유체에 대해서는 매우 엉성한 근사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3차원에서 임계 지수는 액체나 기체에서 실험적으로 측정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런 결과도 역시 보편성의 개념을 확인시켜준다. 임계 거동에 관한 한 자세한 정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스템의 광범위한 성질만이 임계 거동에 영향을 미친다.
유체가 질소이거나 아이소펜테인이거나, 자성 금속이거나, 또는 다른 것의 엉성한 모델이거나는 상관이 없다. 입자가 2차원 또는 3차원에 존재하느냐와 장거리 또는 단거리 힘을 통해서 상호작용을 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이런 종류의 차이는 두 가지 시스템을 서로 다른 "보편적 집단"으로 분류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집단에 속한 시스템들은 모두 같은 임계 지수를 가진다. 겉으로 서로 다르게 보이는 시스템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차이가 없으면 임계 상태에서는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임계 붕괴
아길라가 1999년에 발표한 논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금융 붕괴를 시스템의 모든 부분이 협동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작은 외부의 동요가 무한히 증폭되는 통계역학의 임계점과 비슷한 현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다."
아길라가 1995년에 빠졌던 유혹이 바로 그것이었다. 금융 붕괴가 소위 로그 주기적 거동을 보이는 특별한 종류의 임계 전이에 해당한다는 제안은 있었다. 그런 임계점은 통계물리학의 일부 모델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 종류의 시스템은 주기적으로 변동하는 진동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적 의미에서는 주기적인 경기 순환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로그 주기적 변동은 빛이나 소리굽쇠의 규칙적인 진동과는 다르다. 오히려 파동의 최고점과 최저점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임계점에서는 두점이 완전히 겹쳐져버린다. 따라서 최고점과 최저점이 점점 더 짧은 간격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런 임계 전이의 신호가 될 수 있다. 점점 더 빨라지는 진동이 재앙을 예고하는 것이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그런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임계점의 징조 때문에 금융 붕괴가 정말 로그 주기적 임계점이라면 경제지표의 독특한 진동을 확인해서 서로 겹쳐지는 점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대규모 붕괴가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1998년 벨기에의 물리학자 아우스로스 붕괴 직전의 변동을 분석한 그들은 변동을 근거로 붕괴가 일어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이라면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진동은 붕괴 직전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시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다. 붕괴에서 멀리 떨어진 기간에는 가격이 몇 분 내에 과거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투자회사에는 그런 정보가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임박한 붕괴에 대한 징조는 시장의 거동에서 몇 주가 아니라 몇 달 또는 몇 년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경제물리학자들도 있다. 그런 방법이 다른 붕괴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붕괴가 일어나기 몇 년 전의 시장 상황이 붕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로그 주기적 임계점 이론과 실제 자료가 잘 들어맞는 것은 단순히 우연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숨겨진 요인"은 어떤 경우에도 의심스럽다. 이미 알려져 있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예측"이 정말 객관적일 수 있을까? 소르네트는 아쉽지만 미래의 붕괴를 확실하게 예측하려는 노력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아무도 예측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이 붕괴한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2. 예측을 믿은 투자자들이 공포 속에서 사고파는 과정에서 붕괴를 일으킨다. 즉 예측이 스스로 현실이 되어버린다.
3. 예측을 믿은 투자자들이 조심스럽게 행동함으로써 붕괴를 예방한다. 즉 예측이 스스로를 부정해버린다.
자기 조직적 시장
붕괴에 대한 로그 주기적 모델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있기는 하지만, 시장 동력학이 임계 상태와 같은 거동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주장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앞에서 우리는 경기 변동의 통계학이 가우스 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히려 변동은 규모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모든 규모의 변동이 발견된다. 통계적으로 확률 분포의 "살찐 꼬리"에 담겨진 경제 자료는 임계 거동의 특징인 멱법칙 분포와 일치한다.
멱법칙은 주어진 규모의 변동 확률을 알려준다.가장 가능성이 높은 수익은 0이고, 큰 수익이나 손실이 일어날 가능성도 비교적 작다. 점차 규모를 늘려나가면서 변동의 상대적인 빈도를 측정하면 확률이 멱법칙에 따라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임계점에 있는 시스템이 외부의 간섭에 대해서 모든 규모의 요동으로 반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시장에서의 변동 확률의 분포도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임계 상태와 비슷하고, 확률 분포에 영향을 미치는 무작위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예측 불가능한 충격이 발생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임계 상태는 극도로 불안정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어느 쪽으로든지 무너져버린다. 1987년 브룩헤븐 국립연구소에서 일하는 물리학자들은 우연히 이상하고, 기적과도 같은 방법으로 끊임없이 임계 상태로 재조직화하는 시스템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런 현상을 자기 조직적 임계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임계점을 연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결정형 고체에서 전자들이 가끔씩 전하밀도 파동이라는 형태로 이동하는 난해한 문제를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상관된" 움직임으로 밝혀졌다. 이 경우의 전자들은 전류가 흘러가는 보통의 금속 도선에서처럼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대신 한 전자의 움직임은 다른 전자들에게 심한 영향을 주어서 서로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여러 개의 상호작용하는 입자들이 짝을 짓고 있는 시스템을 광범위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개의 흔들리는 진동자가 스프링으로 연결된 경우를 전하밀도 파동의 엉성한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두 시스템은 전혀 닮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진동자가 단순한 주기적 운동이 관련된 모든 과정에 대한 훌륭한 모델이 되는 것처럼 두 시스템 사이에도 닮은 점이 있다.
뉴턴 운동 방정식을 만들어서 컴퓨터로 풀어본 연구자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짝지은 진동자들 중에서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스프링을 통해서 에너지가 전달되면서 다른 진동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영향은 어떤 범위로도 확장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진동자가 바로 인접한 진동자들만을 진동하게 만든다.
그러나 전체 시스템에 "사태"가 일어나서 수천 개의 진동자가 움직이기도 한다. 그런 사태가 얼마나 큰 규모가 될 것인지는 짐작할 수가 없다. 그런 사태가 일어날 확률과 규모를 그래프로 그려본 퍼 백 연구진은 멱법칙을 발견했다.
브룩헤븐 연구진은 그런 짝지은 거동에 대한 더욱 직관적인 새로운 모델을 개발했다. 그들은 진동자와 스프링을 한 더미의 모래로 대체했다. 테이블 위에 모래를 한 알씩 떨어뜨린다고 생각해보자. 서서히 무더기가 만들어져서 작은 모래 산이 된다. 경사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꼭대기에 떨어뜨린 모래 한 알이 사태를 일으킨다.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모래알들이 서로 간의 마찰에 의해서 경사면에서 흘러내리지 않고 정지해 있다. 어떤 각도가 되면 마찰이 더 이상 움직임을 막아내지 못하면서 사태가 시작된다. 한 알의 모래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른 모래알과 충돌하면서 사태가 시작된다. 한 알의 모래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른 모래알과 충돌하면서 일종의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모래알의 움직임이 충돌에 의해서 짝을 짓는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십여 개의 모래알이 굴러내리고 나면 곧 힘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거의 모든 경사면이 사라질 정도로 계속되는 재앙적인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모래알을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의 더미에 떨어뜨릴 때 그것이 몇 알의 모래알만을 움직이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모래 더미가 완전히 사라질 정도의 사태를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이 될 것인지를 알려주는 징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모래 더미 실험에 대한 간단한 수학적 모델을 만들어서 컴퓨터로 연구했을 때도 역시 사태 규모의 분포가 멱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큰 사태는 작은 사태만큼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모든 규모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래 더미의 요동은 규모에 상관이 없다. 모래 더미는 임계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사태는 모래 더미의 "긴장"을 해소시켜서 경사각을 줄이고 안정성을 되찾아준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사태는 단순히 모래 더미를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의 상태로 되돌려놓기 때문에 바로 다음 모래알이 더해지면 다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결국 모래 더미는 불안정한 안정성의 상태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상태의 모래 더미가 아니라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임계 상태가 끊임없이 복원된다. 그것이 바로 임계 상태가 자기 조직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와는 달리 액체나 기체의 임계 상태는 조금만 방해를 하면 전혀 다른 안정한 상태로 변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파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래 더미 모델은 비평형 상황을 설명해준다. 여기서 임계 상태는 시스템이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류 상태"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모래알이 계속 더해지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는 평형 상태는 아니다. 모래 더미 위에 모래알을 떨어뜨리는 것은 평형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원동력이다. 자기 조직적 임계성은 비평형 상태의 특징이다.
자기 조직적 임계성은 지난 20년 동안 통계물리학에서 이루어진 몇 안 되는 진정한 발견들 중의 하나이고, 놀라울 정도로 유용한 개념으로 밝혀졌다. 퍼 백은 자기 조직적 임계성이나 그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 멱법칙 요동을 경험하는 광범위한 자연현상들을 발견했다. 오래 전부터 지진도 멱법칙 확률 분포를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즉 지진의 확률은 규모가 커지면서 멱법칙에 따라 줄어든다.
백과 그의 동료들은 지진의 발생이 지질학적 단층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자기 조직적 임계성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지각의 움직임이 계속해서 암석 형성에 스트레스를 주면 결국에는 미끄러짐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통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어 다시 안정성을 되찾는다. 그리고 다시 압력이 쌓이기 시작한다. 스트레스는 조금씩 방출되어서 작은 지진을 일으킨다. 그러나 가끔씩은 재앙적으로 방출되어서 로스앤젤레스나 고베 같은 도시에 심각한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백은 산불에서도 자기 조직적 임계성을 발견했다. 넓은 산림지역은 산불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만 대부분 그 규모가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때로는 산불이 산림 전체로 퍼져나가기도 한다. 백에 따르면, 화산 활동, 태양 플레어, 중성자 별이라고 부르는 특이한 천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성진", 화석에서 멸종의 형태 등이 모두 자기 조직적 임계성의 멱법칙 지문을 보여준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모래 더미 자체는 전혀 자기 조직적 임계 상태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베젠펠트가 처음 만들었던 수학적 모델에서는 흘러내리는 모래알의 에너지가 충돌 과정에서 소진되는 방법을 비롯해서 실제 모래 더미의 중요한 특징을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자기 조직적 임계성(SOC)은 알갱이 더미에서는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은 듯하다. 쌀알의 경우에는 SOC가 나타나지만, 모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알갱이의 모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결과는 SOC가 "자연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핵심이라는 백의 주장을 약화시킨다. 그런 정도의 보편성을 주장하기에는 충분히 일반적이고 확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요동의 멱법칙 확률 분포와 "긴장을 해소시켜주면서" 시스템을 다시 불안정한 상태로 되돌려놓는 재앙적 사건과 같은 SOC의 기본적인 특징은 광범위한 현상을 이해하는 강력한 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어떤 면이 그런 현상에 포함된다는 것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강성 경제학
마이클 우드퍼드와 호세 샤인크만은 자기 조직적 임계성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경제도 그렇게 움직이는지를 연구하고 싶어했다. 일부 괴팍한 경제학자들은 이미 카오스 이론의 개념을 경제학에 적용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샤인크만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주류에서 확실히 멀리 떨어진 것이었다.
우드퍼드와 샤인크만은 전통적인 경제학 모델에서는 무시되었던 "사태"와 같은 극단적인 사건들을 허용한다는 이유 때문에 백의 이론에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우리의 결론은, 경제학에서 관찰되는 대규모 변동은 경제가 지진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은 충격이 모든 규모의 사태(붕괴)를 일으킬 수 있는 자기 조직적 임계 상태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변동은 피할 수가 없다. 이자율이나 다른 방법의 규제를 통해서 경제를 안정시키고 변동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기 조직적 임계 경제학의 개념은 흥미롭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대 더미 모델과 마찬가지로 방향은 맞지만 세부적인 사실은 틀린 것처럼 보인다. SOC의 핵심은 멱법칙에 의해서 설명되는 규모에 상관없는 거동이다.
자기 조직적 임계성이 시스템의 변동에서 드물더라도 극단적인 사건들의 자연적인 면을 잘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법칙의 정신
(가우스 형 변동과는 달리) 극단적인 사건들을 차별하지 않는 멱법칙 확률 분포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조직화하는 방법에 포함된 특징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물리학자 시드니 레드너는 1998년 통계학이 멱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레드너는 1981년에 발표된 거의 80만 편의 논문을 살펴본 결과, 인용 통계가 멱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대부분의 논문들은 겨우 몇 번만 인용되지만, 소수의 논문들은 많은 수의 인용문 목록에 등장한다. "과학은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기어간다"는 테니슨의 주장은 옳다.
그런 멱법칙 관계는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큰 지진은 작은 지진보다 드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멱법칙은 더 많은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사건이 커지거나 더욱 극단적이 될 때 그런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감소하는 특별한 방법을 보여준다. 네 번 인용될 확률이 두 번 인용될 확률의 1/8이 되어야 하고, 여덟 번 인용될 확률도 역시 네 번 인용될 확률의 1/8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사건의 규모를 두 배로 하면 확률이 일정한 비율로 줄어들어야 한다는 선험적 이유는 없다. 멱법칙의 일반적인 의미는 사실 직관적으로 분명하다.
마크 뷰캐넌은 저서 <유비쿼터>에서 역사도 역시 자기 조직적 임계 상태에서 작동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분쟁과 전쟁이 바로 국제 관계를 재앙 직전의 상태로 유지시키는 긴장의 결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결국 단순한 다툼에서 세계대전에 이르는 모든 규모의 전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전쟁과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세계대전은 모두 하나의 멱법칙을 만족시킨다.
뷰캐넌의 소박한 결론에 따르면, 작은 요동에서 얼마나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알아낼 수 없다. 뷰캐넌이 주장하는 것은 그런 경우처럼 복잡한 시스템에 "긴장"이 생기면 작은 사건이 어울리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일
미국의 사회과학자 조지 킹즐리 지프는 1949년에 발간된 <인간 행동과 최소 노력 원리>를 통해서 사회의 자연법칙에 대한 계몽적 믿음과 진정한 과학적 사회학의 가능성을 되살리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지프의 핵심적인 주장은, 사람들은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한 방법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지프는 그것을 19세기 수학자 해밀턴이 주장했던 물리학 원리와 대등한 사회학적 원리로 여겼다. 해밀턴은, 어떤 물체가 힘을 받아 움직이는 방법은 "최소 작용 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뉴턴이 밝혀낸 역학 법칙에는 물체가 움직이는 경로에 따라 결정되는 역학적인 양인 "작용"이 최소가 되는 경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테이블 위에 정지해 있는 공이 바닥에 정지한 상태로부터 움직일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만이 움직임의 작용이 최소가 되고, 바로 그것이 공이 모서리를 따라 움직이는 경로가 된다.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물체의 작용을 계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에 필요한 "노력"을 정량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마다 에너지, 시간, 불편함, 돈 등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주어진 일을 하는 방법이 다르다.
"노력"에 대한 평가가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최소 노력의 법칙은 매우 불안한 원리임에 틀림없다. 개념은 그럴듯하지만 핵심적인 파라미터는 전혀 정량화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과학자들은 가우스 형 분포의 통계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프가 확인한 자료의 중요성은 통계물리학의 핵심에서 멱법칙 거동이 밝혀진 최근에 와서야 관심을 끌게 되었다. 2002년에 사망한 퍼 백은 자기 조직적 임계성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의 작동 방식"이라고 믿었고, 지프는 자신의 멱법칙 그래프가 "사회의 작동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사회과학은 가우스 형 통계가 아니라 멱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믿었다. 잉제 우리는 멱법칙이 자연세계에서도 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프는 오늘날 자기 조직적 임계성의 증거로 여겨지는 기울기가 -1인 특별한 멱법칙을 사람들이 개인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하는 집단으로 행동하는 현상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대체로 사회현상에서 상호작용의 역할을 이해한 수준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상호작용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회현상에서 멱법칙 분포는 "평균" 거동, 즉 케틀레의 "평균 인간"의 개념을 무너뜨렸다. 결국 멱법칙은 가우스 형 분포에서는 무시할 수 있는 변이로만 여겨지던 극단적인 사건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파레토가 물리학에서 그런 법칙이 알려지기 전에 사회과학에서 멱법칙을 처음 도입했다. 그는 1897년에 부유한 사람들의 수입 분포가 멱법칙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인구의 1퍼센트가 부의 40퍼센트를 가지고 있고, 인구의 5퍼센트가 부의 절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파레토는 그런 불균형을 80퍼센트의 부를 20퍼센트의 인구가 가지고 있다는 소위 80:20 규칙으로 표현했다. 그는 그런 수입 분포가 정치구조나 세금 체제에 상관없이 여러 나라에서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80:20 귳ㄱ은 경영 판단의 경험 법칙이 되었다. 수익의 80퍼센트가 지출의 20퍼센트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성과의 80퍼센트가 직원의 20퍼센트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숫자에 집착하는 것은 핵심을 흐리게 만든다. 예를 들면, 노력과 보상 사이의 불균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분포"가 멱법칙을 따른다는 것이 핵심이다.
직선 멱법칙 그래프의 기울기와 같은 숫자는 바뀔 수 있다. 언제나 80:20 규칙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직선 모양이다. 폐허가 된 도시 아케타텐의 주택 규모 분포를 분석해보면, 그런 종류의 분포가 기원전 14세기의 고대 이집트에서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훗날 파레토의 수입 분포는 19세기 초에 가우스 형 분포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의 기본적인 면을 담고 있는 것으로 신봉되는 형편이었다. 1940년에 경제학자 칼 스나이더는 "파레토의 곡선은 인간 지식의 위대한 일반화 중의 하나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그 "법칙" 이 얼마나 잘 맞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우선, 수입 분포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일은 놀라울 정도로 어렵다.
어느 사회에서나 적어도 고수입자들에게는 멱법칙 분포가 성립한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 같다. 그런 멱법칙 직선의 "기울기"는 수입의 양극화 정도를 반영한다. 기울기가 클수록 부의 분포가 양극화되고, 더 많은 극빈자가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사회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부를 누리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평균 통계는 그 바탕이 되는 통계를 알기 전에는 절대 믿지 말아야 한다.
솔로몬은 쾰른 대학교의 즈펑 황과 함께 규제가 없는 시장에서의 거래는 파레토 직선의 기울기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빈부의 격차를 끊임없이 확대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들 중의 하나가 시장 변동이 증가해서 불안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빈자들의 부를 늘려주려는 목적의 사회정책은 "단순히 인도적인 의무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의 필수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보편적 질서
마르크스 이후 시대에 "체계적인 사회과학이 객관적인 사회공학을 가능하게 만들 것" 이라는 조지 지프의 꿈은 조금 겁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공학"을 정보를 근거로 한 기획 이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그 이상이었다.
진정한 계몽주의 정신에서 지프는 인간 사회의 핵심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멱법칙과 같은) 질서의 발견은 인간 의지를 넘어서 작동하는 자연적 설계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지프는 그것이 합리적 사회과학의 등장을 촉진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생활의 일상적인 현상에서 통일성과 질서와 균형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궁극적인 합리성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한다."
그런 생각은 피타고라서의 신비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원자의 성질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여러 가지 면을 조직화하는 보편성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흐르는 강물의 소용돌이를 성스러운 설계의 증거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그런 주장을 "종교과학" 이라고 외면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큰 수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런 법칙 덕분에 두려울 정도로 다양한 세상에서 질서와 규칙성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반가워해야 할 일이다.
11. 여러 사람들의 일 - 기업의 성장
어떤 규모가 적절할까?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규모의 문제는 오늘날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 사회, 경제 문제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 슈마커(1973)
푸줏간을 하는 브라이언 키록에 따르면, "세이프웨이는 브레콘 사람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이미 아홉 곳의 푸줏간이 있다. 소비자들은 아홉 곳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모두 사라지면, 소비자들에게는 선택의 가능성이 없어진다. 어물전은 이미 문을 닫았다. 의류점도 문을 닫았다. .... 리오민스터로 가보라. 그 고약한 것이 들어오고 나서 그 도시는 죽어버렸다.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려고 한다.
소규모 상점들이 사라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단순히 슈퍼마켓과 연쇄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곳을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점점 더 선택의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액스민스터의 솜머세트를 자전거로 둘러보면, 일요일 오후에 차 한 잔을 사마실 수 있는 곳은 도시 바깥에 있는 세인스버리 슈퍼마켓뿐이다. 소규모 찻집들은 경쟁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문제이다. 큰 기업은 소규모 기업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세이프웨이가 1999년에 했던 것처럼 빵을 8펜스(대략 14센트)에 팔 수 있는 지역 빵집이 몇 곳이나 있겠는가? 그런 가격은 원가에 훨씬 못 미치지만 슈퍼마켓은 주요 상품을 위해서 모험을 한다. 엄청나게 싸다는 인상을 심어주어서 끌어들인 고객들이 더 비싼 상품도 살 것이라고 기대한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그것이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한다. 1978년 영국 정부의 녹색 보고서(정책 문서)는 "아무런 규제가 없는 상태에서 경쟁자들의 상호작용은 경제적 자원의 배분, 가격, 품질, 물질적 발전에 도움이 되면서, 동시에 우리의 민주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의 유지에 도움이 되는 환경을 제공한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유시장을 큰 고기가 작은 고기를 삼켜서 몇 사람의 주요 선수들이 지배하는 균일한 거래시장을 만들어버린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몬비오트는 거대 기업의 성장이 지역사회의 결속은 물론이고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만으로도 기업의 확장과 쇠퇴를 결정하는 요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법칙이 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만약 그런 법칙이 존재 하더라도, 그런 법칙이 어떤 형식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업에 대한 일종의 "보편적" 원리가 등장한다는 징조가 있다. 제철, 출판, 제빵 등의 분야에 상관없이 기업의 성장은 소기업, 중기업, 대기업의 분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철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한 사실이다. 경제계가 소수에 의해서 지배되는 형태로 바뀐다는 많은 징조가 있지만, 세계화에 의한 분명한 불평등의 확산이 전부는 아니다. 대기업이 제품의 선택과 과고에서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여전히 대기업보다는 소기업의 수가 훨씬 더 많다.
소기업들은 기회가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많은 개별 기업들이 요동치는 행운 속에서 기업의 성장을 지배하는 확실한 법칙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우리가 원하는 모양으로 경제계를 재단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법칙들을 확인하고 이해하기 전에는 꿈을 꿀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우리가 대기업의 규모를 제한하거나, 소기업의 규모를 확대하려는 압력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면, 우리가 적용하는 법이나 상거래 규제의 결과를 예측해줄 수 있는 기업 성장의 모델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자유 거래를 허용하는 시장에서는 소수의 대기업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기업 지키기
고대 세계의 놀라운 무역망은 장인들이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상인들에게 파는 것으로 유지되었다. 상인들은 머나먼 이국에서 수입된 그런 상품을 이국적인 수입품을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윤을 붙여서 팔았다.
그렇다면 기업은 무엇에 필요한가? 중세의 장인들이 집단 조직의 혜택을 발견했다. 무역조합은 회원들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었고, 회원들이 체결하는 계약에서 임금 수준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집단 노동의 가장 큰 장점이 드러나게 된 것은 산업혁명 덕분이었다. 기계화에 의해서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이익은 주로 소수에게만 돌아갔다. 산업화는 노동자보다는 자본주의적 지배자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큰 기업에서 생존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대체로 산업화된 경쟁자들과 경쟁할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전통적인 장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 노동자들은 빵을 구하기 위해서 줄을 서야 했지만, 노동자로 변신하지 않은 전통적인 장인들은 굶주려야 했다.
규모의 경제는 몇 가지 방법으로 이룩된다. 대기업들은 개인이 부담할 수 없는 값비싼 기계를 구입할 수 있다. 분업화함으로써 효율을 향상시키기도 한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분업은 모든 분야에서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다." 그리고 대기업은 수없이 많은 소규모 거래 대신 몇 건의 대규모 거래로 업무 비용도 줄일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강압적인 고용시장이 적절한 환경으로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완화되었다. 온정적인 대기업들은 직업 안정성과 함께 건강보험, 교통이나 주거와 같은 혜택은 물론 동료들 사이의 따뜻한 분위기와 때로는 연금도 제공했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것에 대한 장밋빛 그림을 믿거나 말거나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개별적인 노동보다는 집단적인 노동력의 일부가 되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업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에서는 행위자와 노동자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개발된 이 이론은 행위자들이 규율에 익숙해진 계산된 관계를 추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문제를 단순화시켰다.
이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의 문제는 19세기 경제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금보다 더 오랜 시간을 일해줌으로써 고용주에게 제공하는 "잉여 가치"가 곧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고용주는 일부의 노동을 "대가 없이" 착취하고,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만들어낸다. 그런 주장은 착취당하는 노동자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미지와 들어맞는다. 더 오랜 시간을 일하는 노동력이 줄어드는 현재의 환경에서는 마르크스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유시장의 힘이 작동하는데도 회사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내기는 어렵지 않다. 회사는 반드시 가장 값싼 제품을 찾으려고 하는 대신, 그들이 "최선"이거나 가장 훌륭하다고 믿는 것을 추구할 것이다. 사람들은 최신 유행의 상표 이름에 특별한 값을 지불할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완벽한 경쟁에 대한 가정은 한 기업의 결정이 다른 기업의 상품가격 책정이나 수익성에 영향을 받는다는 고약한 사실을 피해가는 방법이다.
통상적인 신고전적 기업 이론은 두 가지 극단적인 시나리오에만 들어맞는다. 완벽한 경쟁의 조건에서 개별 기업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정해진 특성을 가진 시장 안에서 운영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산원가, 판매가격, 제품의 품질들 사이의 관계는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기업들의 평균 거동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말 그대로 서로 상호작용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상호작용 자체를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독점은 시장의 작동 방법을 규제하는 구체적인 법률이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히 특별한 경우가 된다.
진실은 대체로 대등한 많은 수의 기업들이 완전경쟁의 조건에서 작동하는 자유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서로 겹치더라도 반드시 대등하지는 않은 제품들을 가진 다양한 규모의 많은 회사들이 존재한다. 통상적인 이론이 무너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의 선수들이 경기를 지배하는 좀 더 제한된 경우인 과점을 설명하는 데는 비교적 성공적이다.
과점 상태에서는 기업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가격 결정과 수익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가격 인하는 완전경쟁 시장과 마찬가지 효과를 가져오지만 선수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기업들 사이의 피드백이 훨씬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물리학에서 강한 상호작용의 징조로 여겨지는 일종의 불안정성과 갑작스러운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가격 전쟁이 심화되면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가격이 갑자기 심하게 떨어진다. 그런 다툼은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소비자들은 원가보다 훨씬 낮은 값을 지불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선수들이 제거되므로 선택이 줄어들고, 결국 시장은 독점을 향해 무너져버린다.
경제학자들은 과점의 모형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호작용을 포함시키려고 노력해왔다.
과점이라고 반드시 경쟁적인 것은 아니다. 높은 가격으로 담합하는 것은 기업에게 이익이 된다. 그런 상황은 카르텔을 만들어낸다. 카르텔은 불법으로 규정한 국가도 있지만 소비자의 부담으로 담합을 막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일부 큰 체인점들이 실질적으로 지역 내에서 독점권을 행사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
카르텔은 가격 인하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지 않는 회원들의 게임에 의해서 유지된다. 협동적인 이익과 변절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은 제17장에서 설명하는 게임 이론의 분석적 방법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런 방법은 경제학에서 담합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과점을 분석하는 경우에도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방법들 중 어느 것도 시장이 정말 어떻게 구조화되는지, 다시 말해서 기업들의 규모가 어떤 분포를 가지게 되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완전경쟁, 독점, 과점이 모두 예외적인 경우가 된다. 실제 시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양한 규모의 기업들이 존재한다. 소기업들이 과점의 거동을 변화시킬 수도 있고, 대기업들이 소기업의 경쟁력을 제한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기업은 거의 확실히 이익 극대화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개별 기업은 자신의 목표를 추구한다.
장기적으로는 시장 점유율이 수익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이익이 아니라 수입을 극대화하려는 기업도 있다. 노동력의 확대를 목표로 하는 기업도 있다. 주주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 기업도 있다.
단순히 사람들이 주어진 한경에서 다양한 동기로 행동한다고 해서 사람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에 아무런 패턴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기업도 역시 개별적인 특성을 바탕으로 통계적인 규칙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사업의 법칙
지브라는 기업은 무작위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주어진 순간의 성장 속도는 당시 기업의 규모에 의해서 증폭된다고 제안했다. 그것이 바로 이제는 유명해진 지브라의 비례적 성장 법칙이다. 그는 그것을 기업의 세계에 적용되는 일종의 뉴턴 법칙이라고 믿었다. 기업이 클수록 우연히 부닥치는 기회에서 수익을 남길 능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지브라의 "법칙"은 로그 정규라는 수학적 형식의 규모 분포를 만들어낸다. 1940년대에 이르러 지브라의 모델은 높이 평가되었고, 지금까지도 기업 성장에 대한 이론적, 경험적 연구의 벤치마크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모델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고, 누구나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시장 구조의 진화는 복잡한 현상이고, 하나의 모델로 관찰된 통계적 불규칙성을 모두 포용하겠다는 것은 적절한 목표가 아닐 수 있다."
확실한 원리들
물리학자들은 멱법칙을 상호 의존의 보편적인 증거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멱법칙은 개체들 사이의 집단적인 거동에서 창발되고, 그런 과정에서 지역적인 상호작용이 서로에게 장거리 영향을 미치도록 발전한다.
그런 사실은 1990년대 후반 미시경제적 기업 성장 이론에 의해서 다시 확인되었다. 그의 모델에 의하면, 기업들은 서로 상호 작용하는 많은 노동자("행위자")의 집단화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노동자들은 각자의 목표를 추구한다. 집단화는 집단 노동을 유리하게 하는 규칙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액스텔의 모델은 다른 "기업 이론"과는 달리 기업의 목표나 거동에 대해서 아무런 전제조건도 없이 시작하낟. 실제로 행위자들이 억지로 집단화해서 기업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 행위자들은 최선의 이익을 고려해서 행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들은 "합리적 극대화자"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탐욕스러운 "이익 극대화자"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무엇이 이 행위자들을 행복하게 만들까? 그것은 행위자에 따라 다르다. 그들은 각각 돈과 여가라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한다. 돈과 여가에 대한 상대적 선호는 행위자 집단 안에서도 크게 다르다.
결국 각각의 행위자들은 노동과 여가에 대해서 자신이 원하는 균형을 뜻하는 행복의 척도인 "효용성"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이 모델에서 행위자들이 도대체 왜 기업에 합류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학자 로널드 코스는 서로 독립적으로 거래를 하는 개인들만으로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 이유를 연구했다.
코스의 결론은 거래의 비용 때문이었다. 거래가 이루어지려면 어쩔 수 없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흥정을 하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그 내용을 집행하는 재정적 부담을 포함한 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셜은 1920년에 조직화된 노동의 핵심은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것보다 집단적으로 노력하면 같은 양의 노력으로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집단으로 일하는 과정에서의 분업, 재정 비용의 공동 부담, 전문화가 부분의 합보다 더 많은 것을 달성하도록 해준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규모가 더 클수록 더 생산적이라는 뜻에서 수익체증 효과라고 부른다.
표준 기업 이론에서는 수익체증 효과 때문에 기업이 성장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액스텔의 모델에서는 그렇지 않다. 개별적인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자원을 공동으로 활용하면 같은 노력에서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주장할 뿐이다.
이런 모델에 대한 심각한 의문들 중 하나는 모든 행위자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행복할 수 있는 안정한 상태가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상태를 내시 균형이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자들은 모델에서 내시 균형을 찾고 싶어한다. 그런 상태가 실제 세계의 거동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액스텔의 모델에는 안정한 내시 균형이 없다. 다시 말해서, 변화하지 않는 상태가 존재할 수 없다. 액스텔의 모델은 비평형이고, 그래서 기업 성장에 대한 대부분의 미시경제학 모델과 분명히 다르다.
그렇다고 시스템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통계적인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성장과 쇠퇴
기업은 왜 망할까? 액스텔의 모델에는 어느 순간에 갑작스럽거나 재앙적인 붕괴가 일어난다. 그런 붕괴는 기업의 성공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충분히 성장한 기업은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익을 챙기는 불로소득자의 천국이 된다. 결국 기업은 점진적으로 게으름쟁이들의 차지가 된다. 노동자들이 더 나은 직장을 위해서 떠나기 때문에 망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잘 운영되는 기업은 이익을 가장 많이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업의 수명은 생산적인 노동자를 영입해서 지키는 능력에서 결정된다. 기업은 이익 마진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게으름쟁이들이 파고들기 때문에 망하게 된다.
액스텔의 모델은 행위자들에게 일종의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범위에서는 노동자의 선택이 직접적으로 기업의 성공이나 실패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기업 이론은 미래가 절대 확실하지 않은 비평형 이론일 수밖에 없다.
12. 클럽에 합류하기
전쟁과 혁명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법칙이라고 말한다. - 톨스토이
표준 만들기
AT&T는 유닉스라고 알려진 운영체계를 만들었다. 당시에 AT&T는 미국의 법에 의해서 컴퓨터 사업에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익을 챙기지는 못했다. 결국 그들은 유닉스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공짜로 주어버렸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략 250종류의 서로 호환되지 않는 유닉스가 사용되었다. 마치 자연에서 일어나는 종의 분화와도 같았다. 한 집단에서 작은 돌연변이가 축적되면 결국에는 유전적으로 호환이 되지 않아서 더 이상 (유전) 정보를 교환할 수 없게 된다.
유닉스를 사용하는 컴퓨터 워크스테이션 시장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서로 다른 회사들은 유닉스 운영체계를 표준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의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움직임은 1987년에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AT&T가 유닉스 시스템 V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AT&T의 노예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전망 때문에 DEC와 IBM을 포함한 일곱개의 경쟁사들은 서로 제휴해서 새롭게 표준화된 유닉스 운영체계를 개발할 목적으로 공개 소프트웨어 재단을 만들었다. 산업은 이제 두 캠프로 양극화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다. 유닉스 국제사는 1993년에 해체되었고, OSF도 잠시 승리하는 듯했지만 회원들이 서로의 경쟁적인 이해관계를 해결하지 못해서 분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1994년에 제조사들의 공동체가 단일 유닉스 설계에 동의하면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산업계에서의 그런 제휴 형성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까?
계곡을 향한 걸음
로버트 액설로드는 그렇다고 말한다.
입자들이 불연속적인 덩어리로 응축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빗방울이나 화려한 눈송이로 뭉쳐진다.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액체를 갑자기 "급속 냉각" 시키는 경우에도 역시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두 종류의 액체를 더 이상 섞이지 않는 온도로 급속 냉각시키면 두 액체가 서로 분리된다. 그런 현상은 야금에서 흔히 나타난다. 합금을 식히면 두 금속 성분이 서로 분리되어 두 가지 순수한 금속으로 도니 작은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샐러드 드레싱을 충분히 오래 놓아두면 식초 층이 위쪽의 기름 층과 부니되는 것처럼 금속의 경우에도 두 성분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가장 낮은 에너지의 이상적인 최종 상태일 수 있다. 그러나 개별 금속의 작은 덩어리들이 하나의 층으로 합쳐지기 전에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리면 두 금속이 서로 인접한 상태에서 흩어질 수 있다.
이런 덩어리들의 성장은 자기 증폭적이다. 덩어리의 크기가 커질수록 덩어리에 다른 입자들이 축적될 표면의 면적이 늘어나기 때문에 더 빨리 성장한다. 작은 덩어리들은 사라지거나 다른 덩어리에 의해서 삼켜져버린다. 물리학에서는 그런 현상을 오스트발트 성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부익부 빈익빈과 같은 경우이다.
그런 그림은 기업의 제휴에서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앨설로드 연구진이 개발한 연합 형성에 대한 지형 모델에서는 각 기업이 다른 모든 입자들과 개별적으로 맞춤형 상호작용을 하는 입자가 된다. A가 B에 미치는 인력은 A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반발력은 B가 A의 경쟁자로부터 얼마나 가깝거나 먼가에 따라 달라진다. 각각의 입자가 독특하고, 그런 입자가 적은 수만 존재한다는 점을 빼면, 모델은 반 데르 발스의 유체를 닮았다. 최종적인 상태를 지배하는 원칙은 전통적인 통계역학에 적용되는 원칙과 마찬가지로 그런 입자들을 가장 안정하게 배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평형 상태를 찾는 것이다.
액설로드 연구진은 그런 상태를 찾기 위해서 기업 집단에 대한 일종의 "총 에너지"를 정의했다. 그 값은 기업이 여러 연합을 구성할 때 각각의 짝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과 반발력을 합쳐서 계산한다. 가까운 경쟁자들이 같은 연합으로 뭉쳐 있으면 상호 반발력 때문에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증가한다. 더 안정한 배열에서는 그런 경쟁자들이 서로 다른 캠프에 속하게 된다. 에너지가 가장 낮은 평형 상태에서는 어느 기업이 캠프를 바꾸더라도 에너지가 안정화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내시 균형이고, 우리가 실제로 발견하게 될 결과이다.
그렇다고 에너지가 가장 낮은 상태에서는 모두가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두 개의 대형 연합이 존재한다. 결국 기업들은 경쟁자들과 빵을 나눠야만 한다. 심지어 가까운 경쟁자들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연합에 참여하지 않고 홀로 가는 분명히 현명하지 않은 길을 제외하면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 "서로에 대한 두려움은 연합의 튼튼한 근거가 된다" 고 했던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에 이미 멸망의 위협 때문에 싫어하는 동료와 함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가장 안정한 상태에는 각 기업의 욕망에 대한 어느 정도의 "욕구불만"이 포함되어 있다. 철과 같은 강자성 물질에서는 모든 스핀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 가장 안정한 상태이다. 그러나 일부 자기성 물질에서는 상호작용 때문에 인접한 원자들의 스핀이 같은 방향이 아니라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그것을 반강자성이라고 한다.
스핀이 삼각형 격자에 배열되면 셋 중의 둘은 스핀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지만, 세 번째 스핀은 둘 중의 어느 하나와 같은 방향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욕구불만" 이라고 부른다. 서로 상반되는 요구를 한꺼번에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다. 삼각형 격자에서 이징 반강자성 물질의 경우에는 유일하고 분명하게 정의되는 가장 안정한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핀을 어떻게 배열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스핀 방향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불완정성이나 무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시스템을 "스핀 유리"라고 부른다.
스핀 유리는 하나의 평형 상태 대신 아주 비슷한 에너지를 가진 여러 개의 서로 다른 배열을 가지게 된다. 모든 가능한 배열과 그에 대한 에너지의 지도를 그리는 "에너지 지형"의 개념을 이용하는 것이 그런 상태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모델에서 "입자"들은 서로 "싫어하기" 때문에 생기는 어느 정도의 욕구불만을 참을 수밖에 없는 덩어리 상태로 모이게 된다.
힘의 균형
액설로드 연구진은 행위자들이 연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배열을 찾기 위해서 에너지 지형이 움푹 파인 곳을 찾아보았다. 물리학자들도 컴퓨터 모델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는 많은 입자들의 가장 안정한 배열을 찾기 위해서 비슷한 작업을 한다.
행위자의 수가 적을 경우에는 모든 가능한 배열의 "에너지"를 계산해서 가장 낮은 에너지에 해당하는 배열을 찾아내는 완벽한 검색 방법을 쓸 수 있다.
지형 모델에서 나타나는 욕구불만 때문에 에너지 지형이 스핀 유리처럼 울퉁불퉁할 것으로 예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핀 유리의 경우와 달리 행위자들이 모두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그림이 단순화된다. 그런 불균형은 어떤 연합의 배열이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안정하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두 대기업이 특별히 심하게 경쟁하는 경우에는 작은 기업들 모두가 이 두 기업 중 하나와 연합하는 것이 다른 어떤 배열보다도 더 안정하게 된다. 따라서 직관적으로 예상되는 것과는 달리 소수의 대형 경쟁자들이 안정한 연합의 패턴을 만들어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서로 경쟁하는 중간 규모의 기업들을 나누는 것은 그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작은 변화에 매우 민감해서 시스템이 울퉁불퉁한 지형에서 옮겨다닐 때마다 연합이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중요한 질문은, 그런 모델이 실제로 작동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지형 모델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예측할 수 있는가?
연구진들은 유닉스 표준화의 경우를 검토해 보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두 가지 안정한 배열에서 두 연합의 규모는 비슷했다.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실제 결과와 비슷해질 가능성은 1/5이기 때문에 지형 모델이 훌륭한 일을 해낸 것처럼 보였다.
기업의 결정은 모든 가능한 장기 전망과 비용 대 이익 분석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형 모델은 그런 종류의 자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기업은 지극히 근시안적인 입장에서 움직인다. 실제로 기업은 다른 경쟁자들을 둘러보면서 "이 기업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물어볼 뿐이다.
실제로 기업들은 경쟁사에 대한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희생될 위기에 놓이낟.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 더욱 극적이고 중요한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유럽의 분리
만약 두 사람 이상이 체스를 둔다면 아무도 게임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 팀 이상이 참여하는 축구 경기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조율의 한계 때문이 아니다. 세 선수 사이의 경쟁에서 일어나게 될 결과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세 순수 중 둘이 연합을 해서 나머지 한 선수를 제거해버릴 것이다. 둘 이상의 선수 사이에서 진행되는 경쟁에는 근원적인 불안정성이 있다.
문제는 체스나 축구가 아니라 전쟁의 경우에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중요하다. 크롬웰의 군대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의 복잡한 혼합체였지만, 그들 모두에게 공동의 적이었던 왕당파의 위협이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와해되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권력의 정치 게임이 심화되면 선수들은 경쟁하는 두 캠프로 갈라진다. 연합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은 아주 복잡하지만 게임이 정말 심해지면 전쟁의 상황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각각의 연합이 독립적이고 완전히 우발적인 협상에 의해서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어떤 광범위한 힘이 작용했을까?
액설로드와 베네트는 지형 모델을 이용해서 그 문제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서로 다른 국가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정량화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핵심이었다. 국가들이 둘 중 어느 캠프에 합류하도록 만드는 힘을 찾아야만 했다. 전통적으로 정치과학자들은 모든 국가가 다른 국가를 잠재적인 적국으로 여기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밀어낸다"는 소위 "사실주의적" 입장이었다. 국가들이 경제적 경쟁이나 민족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같은 특별한 위협에 반응하거나 그런 위협을 예상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이유가 국가들을 서로 협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뒤섞인 "갈등과 동질성" 속에서 연합이 만들어진다.
갈등과 동질성을 물리학 언어로 표현하면 반발력과 인력이다. 액설로드와 베네트는 두 국가 사이의 상호작용을 1936년의 정치적, 경제적, 인구학적 상황에서 파악한 인종, 종교, 영토 분쟁, 이데올로기, 경제, 역사 등의 여섯 가지 요인을 근거로 분류했다. 국경 분쟁이 두 국가 사이의 반발력에 기여한다.
동질성이 있으면 +1점을 주고, 차이나 적대감이 있으면 -1점을 주었다. 전쟁의 상관성이라는 과제에서 각 나라에 부여했던 "국가 능력지수"를 사용했다. 이 지수는 국가의 인구학적, 군사적, 산업적 능력에 대한 여섯 가지 척도를 근거로 "힘"의 정도를 표현한 것이다.
지형 모델에서 얻은 결과는 놀라웠다. 단지 두 개의 큰 계곡이 있었다. 둘 중 더 깊은 곳은 위에서 설명한 연합과 거의 일치하는 배열에 해당한다. 유일한 차이는 포르투갈과 폴란드가 "동맹국"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두 번째 계곡은 전혀 다른 전쟁에 해당한다.
1939년 소련이 핀란드를 침략했을 때 서방의 두 국가는 모두 간섭을 요구했다. 독일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한 영국이 소련에 전쟁을 선포하지 못했던 것은 군사력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처칠과 스탈린이 연합했을 때 두 나라의 긴장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연합국의 탄생은 정반대의 놀라운 결합이었다.
국제 관계의 균형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영국은 히틀러가 아니라 스탈린을 위험한 적으로 여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폴란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력한 독일과 소련을 거의 같은 정도로 싫어했다.
역사 다시 쓰기
지형 모델이 지나간 역사를 정확하게 예측해주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지형 모델이 가능성의 지도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지형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이다.
현대 결정론자들은 흔히 인간사에 필연을 도입하는 경향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에 집착한다.
역사학자 로퍼에 따르면, "역사는 단순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의 범위 중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단순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가장 높은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역사의 가장자리
지형 모델에 따르면, 1930년대에 전쟁이 가까워지면서 유럽의 정치적인 지형은 강력한 민주국가들이 독일에 대항하는 것과 소련에 대항하는 것의 두 가지 가능성으로 분리되었다. 그중 한 가지 시나리오만 실현된 것은 역사가 "언덕을 지나 걷기 시작했던" 조건 때문이었다.
강자성이나 다입자 유체에 대한 이징 모델도 역시 스핀이 "위" 또는 "아래"를 향하거나 액체나 기체에 해당하는 쌍둥이 계곡을 가진 지형을 가지고 있다. 어떤 상태가 지배적이 되는지는 주어진 조건에서 어느 쪽의 에너지가 더 낮은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유체의 끓는점이나 어는점에서는 액체와 기체를 나타내는 계곡의 깊이가 똑같아지기 때문에 둘 사이에 전이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반 데르 발스가 설명한 내용이다. 상전이를 에너지 지형으로 설명하는 것도 현상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따라서 상전이와 비슷한 일이 "연합 에너지" 계곡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두 계곡의 깊이가 같아지면 한 계곡에서 다른 계곡으로, 즉 한 연합의 배열에서 다른 연합의 배열로 변할 수가 있다. 액체-기체 전이에 가까워질 때와 마찬가지로 압력이나 온도의 작은 변화가 전체 시스템의 상태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듯이 정치적인 입장이나 환경의 작은 차이가 대안적인 "에너지" 계곡이 거의 같은 깊이가 되면 선수들의 배열을 크게 바꾸어놓을 수가 있다.
따라서 어느 계곡이 가장 깊은지(연합 형성 결과의 예측을 결정)뿐만 아니라, 근처에 거의 같은 깊이를 가진 계곡이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경우에는 연합이 전혀 다른 배열로 갑작스럽게 변할 수도 있다.
서로 상호작용하는 입자로 구성된 유체에서는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 상태에서 압력을 변화시키면 에너지 지형이 변해서 "액체"와 "기체"에 해당하는 계곡의 깊이가 달라진다. 전이가 일어나는 압력에서는 그 깊이가 같아진다. 압력이 조금 높아지면 액체가 기체보다 더 안정해져서 기체는 "준안정"한 배열이 된다.
같은 의미에서, 1936년에는 반소련 연합이 준안정 상태였다. 그러나 압력을 계속 증가시키면 준안정 상태는 액체보다 점점 더 불안정하게 된다. 준안정성의 한계를 나타내는 그런 상태를 스피노달 점이라고 부른다.
액설로드의 지형 모델에서, "압력"의 변화는 여러 행위자의 태도나 "규모"의 변화, 즉 국가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과 반발력의 변화에 해당한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역사적 지형이 두 개의 계곡이 존재하는 지형에서 하나의 안정한 상태를 가진 지형으로 바뀌게 된 것은 그런 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덜 안정한 연합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 해당하는 일종의 역사적 스피노달 점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어쨋든 동맹국과 연합국 사이의 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연구진은 1989년에 힘의 균형과 국제 관계를 근거로 할 때 소련이 동유럽에서 물러나는 것은 이미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돌이켜서 "예측"했다. 그들은 불가리아만이 구바르샤바 조약에 남고, 나머지 국가들은 나토와 가까워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소련이 붕괴되기 시작할 때에는 실제로 루마니아만이 그런 예측에서 벗어났다.
이 모델은 미래를 예측하는 경우에도 쓸모가 있다.
하나의 간단한 모델을 근거로 국제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지역의 일반적인 사정을 예측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믿을 이유는 충분하다. 유리한 연합을 구성하고, 갈등을 피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국제연합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준비 단계나 전쟁의 와중에 이루어진다.
사회의 영역에서 그룹, 제휴 조직의 출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연구할 기회는 무한히 많다. 인종, 계급, 종교, 이데올로기와 같은 특징들이 사회적 그룹의 형성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해주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그런 특징 중에서 어느 것이 뭉치는 과정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는가? 조직에서는 종업원들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지를 알아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은 것은 확실하다. 예를 들면, 어느 학과를 어느 단과대학에 소속시켜야 하는지가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 만약 "자연적" 인 분류를 결정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런 딜레마는 더 확실하게 해결될 것이다.
국가의 운명과 함께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작동 원리가 있다는 힌트가 된다. 하나의 모델이 컴퓨터 회사의 연합과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연합을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화되고 경우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사회과학이나 정치과학의 시각을 극복하고 질서의 더욱 깊은 봉합선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13. 결정의 계곡에서 나타나는 다중성 - 집단적 영향과 사회 변화
한 개인이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와 사고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지극히 한정된 범위에서만 가능하다. 개인은 그가 속한 집단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집단의 사고방식에 따라 생각한다. - 칼 만하임(1936)
투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우선 개인주의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선택이 정말 독립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대량 광고의 홍수에 묻혀 있는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결정을 내린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투표 예측을 실패하는 것은 선거학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이 가장 애매한 경우를 상대해야 할 뿐이다. 사람들이 여론조사에서 하는 말과 실제 선거에서 하는 행동은 정반대일 수 있다. 유권자의 의견은 마지막 순간에 당 대표의 연설에 의해서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 하나가 상당한 비율의 여론을 움직이기도 한다.
그런 심리적 변덕스러움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행동에 대한 모델이 다양한 수준의 민주주의가 허용되는 사회의 특징인 정치적인 의사결정에 대해서 중요한 사실을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상인들은 위험을 감수하지만, 쉽게 결정하지는 않는다. 유권자들 중에는 단순히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과학이 그런 경우까지 고려할 수 있을까?
물리학이 의사결정에 대한 사회과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완벽하고 정확한 이론 때문이 아니라 과거에 무시되었거나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요소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요소에 대해서 잘 알아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즉 상호작용의 영향이다. 제한된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집단적 행동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구성 요소의 특징만으로는 시스템의 전체적인 상태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심리학으로부터 집단의 행동을 알아내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 물리학이 사회과학에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20세기를 통틀어서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대한 것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집단의 행동을 기존의 문화적 기준의 범위 안에서 선험적으로 가정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기준이 개인적인 선택과 개인 간 거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고 변하는지를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의존하는 결정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사회의 지도자, 관습, 유행, 문제가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투표하기
만약 투표가 완벽하게 무작위적인 과정이라면, 즉 투표자의 선택이 주사위 던지기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가우스 형 분포를 기대할 것이다.
물론 유권자들이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이 어떻게 투표하는지를 결정하는 요인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많은 수의 유권자로부터 얻어지는 결과는 모두가 무작위적으로 선택한 결과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가우스 형의 분포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투표의 통계는 멱법칙을 따랐다. 더욱이 이 멱법칙의 지수는 자기 조직화 임계성의 경우에서 보았던 -1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다. 다시 말해서, 득표율 P인 후보자의 수가 P에 반비례한다는 뜻이다. 똑같은 멱법칙 관계는 주별 투표에서도 나타났다. 전체 유권자의 소집단에서도 언제나 똑같은 결과가 얻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결과는 투표 과정에서 독립된 유권자 수백만 명이 근본적으로 무작위적인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멱법칙은 일반적으로 어떤 과정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의사결정" 행위자들 사이의 강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징조이다. 자석의 임계점에서는, 각각의 스핀이 이웃한 스핀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원자의 스핀들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섬의 규모가 멱법칙 분포로 나타난다. 가상적인 모래 더미에서도
그렇다면 선거 통계에서 나타나는 멱법칙도 역시 유권자들이 서로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식에 대한 이징 모델의 경우처럼 유권자들을 격자를 구성하는 "스핀"으로 보았다. 각각의 격자점은 유권자이고, 그 "스핀"은 후보자 수에 해당하는 만큼의 방향을 향할 수 있다. 자석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배열시키는 힘이 있는 것처럼 사회적 영향력이 이웃 유권자들의 의견을 배열 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여론이 충분히 모아졌을 때, 즉 부분적인 의견에 대한 "임계 질량"에 이른 경우에만 일어난다. 한 사람의 독립된 이웃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없지만,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집단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컴퓨터로 그런 선거 모델을 검토해본 연구진은 여러 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포가 실제 선거 결과에서 나타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멱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심지어 멱법칙 그래프의 기울기도 같았다. 선거는 집단의 결정인 듯 보인다.
물론 우리가 친구나 동료나 이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조금도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사람들 하고만 영향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다. ... 우리의 정치적 선택이 그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민주주의와 선택의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유권자의 결정이 서로 의존한다는 사실은 특별한 사건에 대한 여론의 반응을 예측하기가 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후보자 인지도의 작은 불균형이 언제나 유권자의 선택에서도 작은 차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단순히 그런 분위기를 느끼거나에 상관없이 여론조사와 실제 결과가 큰 차이를 보였던 것은 수많은 독립적이고 무작위적인 결정의 결과였다고 보기 어렵다.
유권자들이 몇 개의 정당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로버트 액설로드 연구진의 지형 모델과 같다. 지형의 모양은 여러 가지 의제에 대한 유권자들의 선호도에 의해서 정의되고, 정당들은 그런 지형 중에서 여러 가지 의제에 대한 자신들의 "강령"을 나타내는 깃발을 세울 적당히 매력적인 언덕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정당들은 거의 벌거숭이로 가능하면 많은 수의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정책을 수정한다. 물론 정당들은 여론의 스펙트럼에서 자신들이 출발하는 위치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투표의 공간 모델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이해하려는 정치학의 핵심 도구가 되었다. 예를 들면, 공간 모델은 정치적 입장의 대립과 수렴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분석하고, 양당제와 다당제의 차이를 비교하고, 단일 의제 정치의 결과를 연구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가장 놀라운 결과 중의 하나는, 민주적 선거에서 반드시 "최선"의 승리자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적인 선거제도에서는 다수가 좋아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정책을 가진 정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여론의 공간에서 그런 점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결정할 수가 없다.
어떤 선거 메커니즘도 모든 논리적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결과는 조금 놀랍지만,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로 증명된다.
애로 역설의 의미는 "독재에 대한 완벽한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다수의 지배가 (불안정성을 포함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단순 다수 지배에 대한 대안을 찾아야만 한다. 투명하게 공정하고 조작될 수 없는 방법은 찾기가 정말 어렵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는 매우 불안정한 개념이다.
"가장 공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부패의 가능성이 가장 낮은 시스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모든 결론은 유권자들이 각각 "독립적" 인 선택을 한다는 모델에서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할까?
우리는 사회적 규범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매일 우리의 용모, 행동, 활동의 모든면에 대해서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법률은 대체로 자발적으로 진화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사회의 규범을 존중한다.
엡스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생각할 필요를 최소화하도록 사회를 구조화했다. 사회적 관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에만 생각하면 된다. 규범이 강화될수록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줄어든다. 규범을 지키라는 요구는 사회 전체만이 아니라 특별한 집단 안에서도 존재한다. 외부인에게는 아무리 이상해 보이더라도 집단의 구성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규범을 따른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규칙은 거의 없다. 모두가 학습을 통해서 익혀야 한다. 어린아이들이나 관광객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 자주 부딪히게 된다.
엡스타인은 그런 학습 과정에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확인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 사람들의 행동이 다양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살펴보아야만 무엇이 "정상" 인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집단은 제한되어 있다.
엡스타인은 그런 시스템에서 어떻게 규범이 등장하게 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 행위자(개인)들이 한 줄로 서서 원을 만들고 있는 경우를 생각했다. 각각의 행위자들은 이웃의 동의를 근거로 이것 또는 저것의 이중 선택을 하게 된다.
이 모형에서 개인적인 결정은 단순한 규칙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행위자들은 가능하면 생각을 적게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철학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는 과정에서 가장 적은 수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싶어한다. 한 샘플에서 얻은 합의가 다음 순서의 더 큰 샘플에서의 합의와 같아질 때까지 그런 일을 반복한다.
이 행위자들은 게으르기 때문에 샘플의 규모를 작게 만드는 방법도 찾아낸다. 이번에는 일단 합의된 입장을 발견하면 샘플의 규모를 조금 줄인 후에 여전히 같은 합의가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한다. 그렇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샘플의 규모를 줄인다. 샘플의 규모는 최소이면서도 "더 넓은 세상" 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을 때까지 그런 과정을 반복한다.
어떤 특별한 규범이 원의 넓은 범위에서 자리를 잡으면, 행위자들은 마음이 좁아져서 바로 옆에 있는 사람 이외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게 된다.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원형으로 배열된 많은 행위자들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무작위적으로 배열하면, 원은 곧바로 어느 하나의 가능성이 지배하는 구역으로 갈라진다.
이런 시스템에 무작위적인 요소(잡음)를 도입하는 일시적인 "충격"을 주어서 모든 행위자들이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완전히 무작위적으로 선택을 하도록 만들면, 원은 새로운 배열을 가지게 된다. 새로운 발견이나 사건이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선입견을 혼란시켜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결과는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지만 인간 본성의 변덕스러움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충격이 가해지기 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흰색"을 선택했던 사람들이 역시 아무 생각 없이 "회색"을 선택하게 된다. 엡스타인은 많은 사회적 규범과 믿음이 그런 식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엡스타인은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이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것은 자신들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에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었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델에 약간의 무작위적인 잡음(약간의 "혼란"이나 행위자들의 선택에 대한 임의성)을 넣어주어도 여전히 영역은 분리가 되지만 영역들 사이의 경계는 이동성이 커진다. 원의 어떤 영역에서 다수의 의견은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순간에는 많은 수의 "최소한으로 생각하는" 순응자들로 구성된 넓은 영역과 경계 부근에서 다른 선택의 가능성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게 된다. 이 모델은 사회적 의사결정에 대한 은유로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지만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전혀 다른
<미시적 동기와 거시적 행동>이라는 셸링의 책은 사회물리학의 주춧돌 중 하나이다
물리학에서는 흔히 무의식적 시스템이 의도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래서 비눗방울이 표면적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거나 빛이 가장 빠른 경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한다. 물리학자들은 그런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어떤 양을 최대화하거나 최소화하려는 세상의 경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런 표현에 목적론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감춰진 손"이 상품을 효율적으로 공급하고 운반시킴으로써 시장을 최적화해준다고 본다. 셸링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어쨌든 모든 행동이 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을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택시가 있다. 비행기에서 점심 식사로 먹을 버터와 치즈도 있다. 비행기에 사용할 연료를 생산하는 정유공장도 있고, 그것을 운반할 트럭도 있고, 활주로를 만들 시멘트도 있고, 에스컬레이터를 작동시킬 전기도 있고, 무엇보다도 비행기가 가는 곳으로 여행하고 싶은 승객이 있다.
만약 경제가 그런 방법으로 작동한다면, 다른 인간 행동에는 왜 비슷한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까? 사회의 모든 일이 법칙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조직화 능력에 의해서 추진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경제학자들이 이 문제를 200년 동안 연구해서 비교적 제한을 받지 않는 자유시장이 개인들을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하는 유리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얻었다면, 경제학의 범위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른 사회적 행동에서도 똑같은 결론이 적용된다고 생각해야 할까?
여기서 셸링은 모든 것에 대한 결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행동의 핵심적인 면은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불완전한 지식을 근거로 자신의 결정을 해야만 한다. 그런 상호 의존 때문에 집단의 행동을 개인의 행동으로부터 단순하게 유추할 수 없게 된다.
셸링의 접근은 통계물리학의 방법과 통찰력을 요구한다. 그는 서로 다른 행동양식 사이의 상전이를 보여주는 모델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셸링이 훗날 "미시적 동기" 모델 연구자들에게 전해준 중요한 시나리오는 인종 분리 현상이다.
한때는 서방 국가의 "다문화주의"가 환영을 받았지만, 그런 낙관적인 표현속에는 통합이 아니라 분리가 숨겨져 있었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런 종류의 분리가 "현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인종에 따라 분리되기 전의 영국에서는 계급이나 심지어 종교에 따른 구분이 있었다. 폴 오메로드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섞이고 싶어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라고 했다.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인종적 또는 문화적 소수가 되는 지역에 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상호작용-행우자 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 셸링의 모델에 따르면, 정반대로 인종 분리에 대한 예상 밖의 강한 집단적 경향이 존재한다. 모델에는 인종, 민족, 또는 다른 차이를 나타내는 두 개의 "색깔"로 표현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행위자가 포함되어 있다.
셸링은 혼합지역에서 이웃의 3분의 1이상이 자신과 다른 "색깔"에 속하면 이사를 가게 된다는 규칙을 도입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처음에는 두 가지 행위자들을 균일하게 섞어두더라도 곧바로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물리학에서도 점진적으로 두 개의 층으로 "상분리"가 일어난다.
문화적 분리는 다른 생활방식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떨어뜨려서 결국에는 두려움과 적대감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주 작은 선호도의 차이가 골 깊은 편견으로 변환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용 자원을 이용해서 분리를 막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분리의 결과로 나타나는 멀리 떨어진 사회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문화적 혼합을 강요하던 (학교와 같은) 사회적 환경에 선택권과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면 분리가 급속하고 극단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제한의 선택권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또는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분리를 일으킨다.
이런 종류의 모델 연구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허용하는 자유방임 자세를 옹호하는 데에 쓰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 더욱 신중히 생각하게 하고,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제로 가능한 방법을 알아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심한 분리가 반드시 극심한 편협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셸링의 연구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일반적 교훈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성향이 반드시 집단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학을 더욱 과학적으로 만들려는 과학자에게는 특별히 강조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단순히 개인적 행동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을 너머 자연선택에 의해서 우리의 뇌에 새겨진 근본적인 경향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요한 목표이다. 이 책에 소개한 것을 포함한 많은 모델에서 인간 행동에 대한 상식적이지만 결국에는 무작위적일 수밖에 없는 가정(또는 선입견)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셰링 모델에서 어느 정도 너그러운 행위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적절하게 혼합된 이웃이 아니라 고도로 분리된 사회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분포만을 근거로 판단한다면 사람들의 본성을 오해할 수도 있다.
범죄와 형벌
사람들은 범죄 때문에 이사를 가기도 한다. 범죄는 사회적 상실감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추락의 원인이 된다.
많은 범죄학자들은 그런 "합리적 결정"을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익과 불이익을 냉정하게 평가한 후에 저질러지는 범죄는 거의 없다.
범죄자의 입장에서 범죄를 예방하거나 줄일 수 있는 요인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사회적 압력은 아직까지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던 문제이다. 일본도 범죄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범죄자들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사회적 외면이 일본의 거리와 공원을 놀라울 정도로 안전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경제학자 마이클 캠벨과 폴 오메로드는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까지 고려한 범죄 행위에 대한 모델을 개발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범죄에는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비용"이 있다고 가정했다. 거리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둑이라면 자신이 도둑이 되더라도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위험이 없다. 실제로는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소수의 패배자가 되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나 모두가 사회의 기둥이라면 범을 따라야 한다는 압력이 더 클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상실감이 늘어나면 실제 범죄자의 비율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 압력으로 작용하는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에 사회적 어려움과 실제 범죄 발생 사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모델에서는 다양한 수준의 상실감에 대해서 높은 범죄율과 낮은 범죄율의 두 가지 경우가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광범위한 조건에서 나타나는 유일한 안정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스템의 상태는 "역사"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회정책이 초기 조건에 따라서 범죄에 대해서 전혀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액체와 기체가 서로 변환되는 조건을 연구하고 있었다. 유체의 압력을 바꾸어주면 똑같은 종류의 이중성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유체는 압력에 따라 액체나 기체로 존재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상전이는 원동력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갑자기 일어난다.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범죄 모델에도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저범죄와 고범죄 상태 사이의 "평형" 전환점은 두 가지가 겹치는 영역의 중간 근처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전환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전환점을 지나가면 언젠가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준안정 상태를 깨지게 만드는 것은 "핵 생성" 이라는 현상이다. 준안정 상태에서 더 안정한 상태의 영역이 우연히 만들어지면, 그것이 전체 시스템을 삼켜버릴 수 있다. 따라서 어는점 이하로 냉각시킨(과냉각) 액체에서 아주 작은 고체 결정이 액체 전체를 얼게 만드는 핵이 될 수 있다. 비유적으로 저범죄 가지의 끝 쪽에서 범죄율이 높은 집단이 범죄를 전체 시스템으로 확산시키는 핵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거동은 범죄 정책에서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상전이와의 비유를 인식하고 나면 그런 관계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래드웰의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상전이도 작은 효과에 의해서 일어나는 큰 변화이다. "뉴욕의 범죄율을 떨어지게 만든 모든 가능한 이유들은 아주 작은 규모의 것이었다."
연결 줄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이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멀리 갈 수가 없다. 게리 베커는 경제학자의 눈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결혼한 부부는 미혼 가정보다 전문화를 통해서 더 높은 효율을 달성한다고 주장했다. 결혼은 그런 방법을 통해서 충실한 합리적 시장 행위자와 마찬가지로 "효용성을 극대화"시켜준다.
베커의 주장에 따르면 "결혼 시장의 참여자들은 가능한 상대에게 기대할 수 있는 효용성에 대해서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택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가정에서의 모든 결정이 비용편익 분석을 설명하는 복잡한 미분방정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베커의 분석을 너무 지나친 합리주의라고 비웃기는 쉽다.
베커는 이렇게 무의미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서 가족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슈의 핵심을 확인했다. 어쨌든 관습과 사회적 규범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런 것들이 때로는 공정하지 않거나, 낡거나, 억압적일 수도 있지만, 처음에는 사회에서 필요했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베커의 분석 자체는 합리적인 행위자가 독립적으로 효용성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신고전주의적"이다. 신고전주의적 접근은 상호작용이라는 핵심적인 요인을 무시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진실만 알려줄 수 있을 뿐이다.
부부 간의 선택
우리는 결혼 모델에서도 범죄 모델에서와 똑같은 특징을 기대할 수 있다. 위쪽과 아래쪽 곡선 사이에서는 평형 전이가 일어나고, 준안정 상태에서 더 안정한 상태의 핵 형성이 전환을 유도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 의존성도 나타난다.
다른 사람의 선택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행위자들은 상호 인력이나 반발력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유체의 입자들이 나타내는 모든 거동을 그대로 보여준다.
결혼이나 범죄와 같은 인간의 행동이 처음으로 통계적 법칙과 규칙성에 의해서 지배되는 사회현상의 범주에 포함되었을 때 사람들은 감탄과 기븜과 실망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소수의 지배
유권자들은 자신이 다수에 속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하다. 범죄나 결혼과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했던 사회적 상호작용도 역시 규범적인 행동양식을 이끌어내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래서 결혼을 "규범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사회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결혼한다.
경제학자 브라이언 아서는 "소수의 문제"를 발견했다. 그가 엘파롤 문제라고 이름 지은 그 문제는 저녁 시간을 어떻게 즐기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좋은 밤"이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엘파롤에 가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집에 머무를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거나 상관없이 소수가 승리자이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이 문제에는 "정답" 이나 "연역적으로 합리적인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예감이나 직관을 근거로 추측하는 것뿐이다. 선택은 다른 사람들이 선택할 것으로 생각하는 행동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만들어진다.
아서와 같은 경제학자들에게 그런 상황은 익숙하다. 시장의 행위자들은 시장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상품을 사고 판다. 지배적인 느낌이 낙관적인지(다른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니면 비관적인지(모두가 팔고 싶은)에 따라 선택을 한다. 그러나 실제 가격의 변화는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려지는 결정에 따라 정해진다.
아서는 행위자들이 잘 정의된 문제의 답을 근거로 결정하는 연역적 합리주의를 따른다는 경제학자들의 전통적 믿음과는 달리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별로 쓸모가 없는 소급적 정답 이외에는 정답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주관적인 판단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귀납적인 논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아서는 "경제학자로서 우리는 귀납적 논리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위자들은 다양한 경험 법칙을 이용해서 술집의 손님 수를 예측하고, 그것을 근거로 술집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그런 법칙들은 과거의 손님수를 이용해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행위자들은 손님의 수가 "지난 주와 같을 것" 이라거나 "지난 4주 동안의 평균과 같을 것" 이라고 믿을 수 있다. 각 행위자들은 그런 몇 가지의 규칙 중에서 자신의 경험상 가장 정확하다고 믿는 것을 근거로 선택한다.
아서는 그런 모델에서 얻은 손님의 수는 끊임없이 변화해서 어떤 패턴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행위자들 중에서 30퍼센트만 술집에 간 날도 있고, 90퍼센트가 간 날도 있었다. 그러나 손님의 평균 수는 대략 60퍼센트였고, 20퍼센트 이상 벗어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시 말해서, 손님의 수가 어떤 특정한 값으로 수렴되지도 않고, 늘어나고 줄어드는 규칙성도 볼 수 없었지만, 평균값은 일정했다. 아서는 그런 현상을 나무가 자라고 죽으면서도 가장자리는 일정하게 유지되는 숲에 비유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60퍼센트인가? 이유는 단순했다. 그것이 바로 아서가 선택한 허용 한계였기 때문이다. 손님의 수가 60퍼센트를 넘어서면, 술집이 너무 붐비기 때문에 집에 머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따라서 행위자들은 그것을 보장하는 규칙은 없지만 평균적으로 적정한 손님의 수를 자동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1997년 물리학자 다미앵 샬레와 이쳉 장은 엘파롤 문제를 더 연구해서, 행위자가 소수 집단에 속하면 "이기는" 소수 게임을 만들었다. 아서의 모델에서는 각 행위자들이 어느 정도 임의적인 전략을 이용해서 결정했다.
각 행위자는 과거의 선택에서 (집에 머물거나 술집에 가는)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떤 선택이 다수 집단으로 끝났는지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과거 세 차례의 선택에서 손님의 수가 소수였다면 다음 선택에서도 엘파롤에 가야 한다는 것이 전략이다. 이 경우에도 역시 각 행위자는 몇 가지 전략을 사용할 수 있고, 선택을 할 때마다 과거에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증명된 전략을 사용한다.
샬레와 장은 평균 손님의 수가 50퍼센트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간단히 말하면 행위자들은 절반 이하의 행위자들로 구성된 소수 집단에 속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처음에는 행위자들이 스스로 상당히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어떤 "집단적"인 계획을 찾아내지는 못하지만, 평균적으로 "소수 집단"은 최대한 커진다. 다시 말해서, "소수 집단"의 수는 "다수 집단"의 수와 같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게임이 정말 얼마나 "효율적"인가? 역시 손님의 수는 평균의 양쪽에서 끊임없이 변동한다. 변동이 클수록 게임은 더 "비효율적"이 된다.
연구자들은 과거의 선택을 더 많이 기억할수록, 다시 말해서 행위자들의 기억력이 더 좋아지거나 더 똑똑해지면 변동이 적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욱이 행위자들이 가장 성공한 사람은 남고, 최악의 선수는 빠지는 다윈의 방식으로 "진화하면" 변동의 폭이 줄어들어서 게임의 효율이 개선된다. 이 경우에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게임을 더 잘하는 방법을 "학습할" 수 있다.
소수 게임과 경제시장의 닮은 점은 무의미하고, 은유적일 뿐이다. 실제로 무리 짓기 경향에서 보았듯이, 행위자들은 다수 집단에 속하려고 노력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수 게임은 경쟁과 "이기적" 행동, 경험적 시험과 다양한 전략의 사용, 한정된 정보를 근거로 선택해야 하는 필요성을 비롯한 실제 시장의 특징들을 충분히 담고 있어서 경제현상에 적용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샬레와 장은 자신들이 모델을 시장에 더 잘 맞도록 개량해서 "잡음 거래"와 내부 거래 등의 효과를 연구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내부" 정보와 같은)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제공되는 경우에는 선택되는 전략의 범위가 좁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모두가 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는 불가능한 "최선"의 게임 방법이 등장하게 된다.
로봇과 같은 자동장치에 불과한 행위자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으로 보이는 행동이 창발된다는것이 사회의 물리학에서 발견한 정말 놀라운 발견들 중의 하나이다.
보통의 게임에서는 그런 절차가 매우 결정적인 행동을 낳게 만든다. 행위자들은 변함없이 역사를 따르거나 무시하는 극단적인 두 집단으로 나뉜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계산이 추천하는 것을 따른다" 또는 "반대로 선택한다"가 전략이 된다. 그러나 호드와 나카르는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에 대한 보상이 다를 경우, 다시 말해서 이긴 사람에 대한 보상이 진 사람에 대한 손실보다 더 클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출근에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교통 혼잡에 갇혀서 지각을 하게 만드는 나쁜 선택은 중유한 회의를 놓치거나, 심하면 파면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선택은 하루가 평상과 같아진다는 뜻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부진한 시장에서의 행위자들은 좋은 선택으로 얻는 것보다 나쁜 선택으로 더 많은 것을 잃어 버리게 된다
결과가 불평등해서 더 많은 손실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에는 극단적인 선택보다는 조심스럽고 안전한 선택이 최성의 전략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는 소수 게임의 행위자들이 우유부단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언제나 특정한 전략을 선택하는 대신 둘 중의 하나를 같은 확률로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반적으로 보상은 줄어들지만, 그와 함께 위험도 줄어든다. 그러나 극단적인 거동에 직찹하는 행위자는 평균적으로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잃게 된다.
우유부단하고 제한적인 행동이 개인에게는 최선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비효율적이다. 소수 집단에 속하는 크기가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예를 들면, 엘파롤 술집에 가는 손님의 평균 수가 이상적인 규모보다 훨씬 적어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전체적으로는 각 행위자가 순전히 무작위적으로 결정할 때보다 평균적으로 더 나쁜 성과를 기록하게 된다. 귀납적 추론에 의해서 결정하는 시도는 집단 전체의 효율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사실 소수 게임에서는 행위자들이 경험을 근거로 결정한다는 능력 이외에는 개별적인 심리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모델에서 나타나는 집단행동의 범위는 놀랍고, 미묘하고, 때로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소수게임 모델은 집단의 결정에 미치는 복잡한 심리학적 동기를 연구하기 전에 결정의 과정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설명에서 어느 정도의 복잡성이 창발될 수 있는지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는지에 대해서 "확실한 것" 은 아무것도 없다.
14 문화의 식민지화 - 세계화, 다양성, 합성 사회
과거에 문화적 믿음과 가치의 확산은 제국의 꿈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업적인 요구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고, 숭배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 "원시" 문화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생각은 죽었다고 믿고 싶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코카콜라와 햄버거의 혜택을 배워야 한다는 다국가적 생각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문화적 가치가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전파되는 것이 언제나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스페인 남부의 무어 식 건축물은 이슬람 세계로부터 초기 중세의 서양으로 지식이 흘러간 사시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기념비이다. 아메리카 문화를 살찌우는 멋진 재즈 음악은 신세계의 노예제도라는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반 고흐와 마티스의 그림은 일본 목판인쇄의 영향을 드러낸다. 현대 유럽의 모도장에서는 인도와 라틴 아메리카의 리듬이 울려퍼지고 있다.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녹아들거나, 두 문화가 하나로 합쳐지면 다양성과 풍부한 경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믿음과 전통을 공유하게 되면, 갈드으이 가능성은 줄어든다. 공통의 언어는 소통을 원할하게 해준다. 그러나 문화 전파에서 선택과 강요의 상대적인 역할을 구별하기는 어렵다.
두 문화가 언제 어떻게 합쳐지는지에 상관없이 가치, 예술, 과학, 기술, 관심, 믿음, 언어의 교환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트로이 함락에서 유럽 연합의 동진에 이르는 인류의 역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역사는 위대한 사람들의 영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집단의 상호작용에 대한 것이다.
무엇이 문화의 다양성을 결정하는가? 소수 문화나 특성중에서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살아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두 문화가 서로 만나면 왜 완전히 합쳐지지 않는가?
발칸 지역에서 일어난 최근의 갈등은 가치와 믿음이 결합되지 않으면 유고슬라비아처럼 임시로 만들어진 국가가 치명적으로 분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가는 정체성을 상실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런 정체성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문화적 균일성이 없으면 생겨날 수가 없다.
이런 현대적 시민전쟁은 근본적으로 홉스에서 사회질서의 계산법을 추구하도록 만든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전쟁은 수십 년 또는 몇 세대에 걸친 치유의 노력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깊은 골이 생긴 미해결의 갈등에서 터져나온다. 17세기 당시 영국의 갈등은 표면적으로 왕이 궁극적인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사람들과, 왕을 국민과 의회의 종으로 여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갈등 속에는 오래 전부터 곪아왔던 종교적 분열이 숨겨져 있었다. 한 세기 동안 유럽을 혼란에 빠뜨렸던 것과 같은 상처였다.
문화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가치의 수렴에서 엉쩔 수 없는 것은 없다. 국제 연합의 결집력은 코소보와 이라크의 전쟁에 대한 회원국들의 서로 다른 입장 때문에 심한 시련을 겪고 있다.
세계지도가 조각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새롱운 연합이 만들어지는 것도 보인다. 유럽 연합은 서로의 사회적,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고 유지하면서 경제적, 기술적 가치를 공유하려는 톡특하게 야심찬 실험이다.
연합의 안정성은 장기적으로 회원들의 견해와 목표를 일치시킬 수 있는 정도, 즉 상호작용을 통해서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 결과는 서로 밀고 당기며 다양성을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드레게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ㅜㅇ리는 대부분 너무 지나친 균일성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끼지만, 인권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다른 나라들이 "진보적 제국주의"라고 이름 붙여진 행동 강령을 따를 것을 기대한다. 우리는 문화적 다양성을 찬양하면서도 일부 소수 민족들이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분리 정책 요구를 안타까워한다. 문화 사이의 너무 분명한 구분은 소수 집단에 대한 박해, 소외, 불안정의 원인이 된다. 그런 문제들이 뜨거운 의문을 제기한다. 분명하게 구별되는 문화와 믿음이 안정적으로 공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것에 의해서 삼켜져버려야 할까?
문화 충격
사회과학자들은 어떤 문화적 차이는 지속되고, 어떤 차이는 곧바로 사라지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을 찾아왔다. "외부"와의 차이를 강조하고, 때로는 극단적인 입장을 부추기기도 하는 집단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인듯 보인다. 그러나 일시적인 유행이나 패션이 확산되는 현상은 사람들이 순응하려는 욕망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언어는 부분적으로 다윈의 무작위적 돌연변이에 해당하는 작은 변화들이 축적되어 나타나는 무작위적인 변화를 통해서 진화하고 차별화된다. 지역적 고립과는 달리 언어적, 기술적 공존 가능성은 아이디어의 교류를 크게 향상시켜준다.
문화적 아이디어의 전파는 공동의 기반이 얼마나 존재하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언어를 공유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문화의 수렴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의 교류를 크게 촉진시키는 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로버트 액설로드는 문화와 관습이 어떻게 확산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윤곽을 찾아내기 위해서 상호작용을 근거로 하는 모델을 개발했다. 동질성이 더 높은 수준의 동질성을 부추긴다는 것이 핵심적인 가정이다. 액설로드는 문화적 교류가 일어나는 구체적이고 기계적인 세부 사항은 무시하고 단순히 많은 교류가 일어나면 교류가 더욱 촉진된다는 사실만 주장하다. 다시 말해서, 상호작용하는 행위자들의 문화적 수렴에는 긍정적인 피드백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액설로드는 지도를 규칙적인 격자로 나누고, 각 격자점에 "행위자"가 자리잡고 있는 모델을 고안했다. 이 행위자들은 개인이 아니라 마을이나 지역 같은 지리적인 영역에 살고 있는 소집단이다. 각 행위자들은 도자기의 형식이나 농업 기술, 또는 사투리와 같은 다수의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특성의 수에는 제한이 없다.
액설로드는 각각의 문화적 특성에 대해서 일정한 수의 변종을 정의했다. 예를 들면 다섯 가지의 언어가 있다면 "언어적 특성"이 다섯 가지의 서로 다른 "값"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는 그렇게 한 특성의 다른 변종을 특징이라고 부른다. 액설로드는 동일한 특성으이 두 가지 특징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반복 계산이 진행이 되면 결과적으로는 두 격자점이 점점 더 비슷해진다. 앞에서 얻은 결론과 같은 결과이다. 즉, 차이가 점진적으로 사라지고, 단일 문화가 확산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문화적으로 다른 지역이 더 이상의 변화가 불가능한 단계까지 계속되면 모델은 안정한 상태에 이른다. 예를 들면, 어떤 특징도 공유하지 않는 다른 문화의 중심에 한 문화의 영역이 자리를 잡으면 두 문화는 더 이상 상호작용을 할 수 없게 된다. 주변의 문화가 나머지 격자점을 지배하더라도 "섬" 문화는 변하지 않고 남게 된다.
검은색이나 회색의 선으로 구분된 희색 영역은 서로 다른 문화를 나타낸다. 한 단계씩 "시간"이 흘러가면, 성장하는 문화도 있고, 쇠퇴하는 문화도 생기게 된다. 결국에는 하나의 문화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격자를 덮게 된다.
이런 실험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규칙이 만들어진 방법만으로 우리는 더욱 높은 균일성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규칙이 반드시 문화적 다양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더욱이 그런 모델을 통해서 초기의 다양성에 따라 궁극적인 다양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N 값이 어떤 임계 값이 되면, 가장 큰 영역의 크기가 놀랍게 줄어들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변해서 다른 영역들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는 균일한 상태와 분할된 상태의 사이의 진정한 상전이의 특징이다. 상전이에 가까워지면 영역의 문화적 다양성(N)에 존재하는 작은 차이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서로 다른 문화의 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N 값이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는 전이 영역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안정한 영역의 크기 분포가 멱법칙을 따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더욱 놀라운 사실도 있다. 서로 다른 문화적 "특성"의 수를 증가시켜서 더욱 심한 다양성을 도입한다고 생각해보자. 이제는 격자점이 다섯 개의 숫자가 아니라, 예를 들면 열 개의 숫자로 표현된다. 그렇게 되면 최종 상태에서의 문화적 다양성이 증가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각각의 특성이 열 개의 특징을 가질 수 있는 경우에 안정한 상태 수는 평균 1이 된다. 특징이 다섯 개 일 경우에는 그 값이 3.2였다. 한 가지 특성에 대해서 다섯 개의 특징이 있는 경우에 다섯 가지의 특성을 가진 모델은 평균 스무 개의 영역이 나타나지만, 열 가지의 특성을 가진 모델은 평균 1.4가 되고, 열다섯 가지의 특성을 가진 모델은 평균 1.2가 된다. 그런 방법으로 다양성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면 직관과는 반대로 단일 문화에 대한 저항력이 "감소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 답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인접한 격자점들은 하나 이상의 특징을 공유하는 경우에만 상호작용할 수 있다. 그런 상호작용은 균일화를 촉진시킨다. "특성"의 수가 많아지면, 그중의 하나가 이웃과 같아질 가능성이 높아져서 상호작용의 가능성도 증가한다. 반대로 각각의 특성에 대해서 허용되는 "특징"의 수가 증가하면, 일치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두 사람이 1에서 15 사이에서 같은 숫자를 선택할 가능성은 1에서 5 사이에서 같은 숫자를 선택할 가능성보다 작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문화적 특성에 속하는 특징의 수가 늘어나면 상호작용의 가능성이 줄어든다. 예를 들면, 사투리가 많은 인도에서는 사투리가 거의 없는 미국에서보다 대화를 통해서 소통하기가 더 어렵다.
이 모델에서 사용한 실제 숫자들은 현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모델은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일반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 첫째, 문화의 "복잡성"이 정확하게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징의 수를 생각하면, 기술적으로 복잡한 서양의 문화가 개발도상국의 문화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액설로드의 모델에 따르면 직관만으로는 문화가 얼마나 쉽게 확산되는지를 알 수 업다는 것이다.
모델을 이용하면 전체 영역의 크기가 미치는 영향도 연구할 수 있다. 10 X 10 격자를 100 x 100으로 확장하거나, 5 x 5로 축소하면 어떻게 될까? 직관에 따르면, 격자의 크기가 늘어나면 안정한 영역의 수도 증가할 것처럼 보인다. 10 x 10 격에서 3.2개의 영역이 들어간다면, 100 x 100 격자에서는 그 수가 100배는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역시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실제로 격자가 커지면 안정한 영역의 수가 줄어든다. 12 x 12 격자에 다섯 가지의 특성과 열다섯 개의 특징을 가진 경우에는 평균 스물세 개의 안정한 영역이 나타난다. 50 x 50 격자에서는 그 수가 약 6으로 줄어들고, 100 x 100 격자에서는 2가 된다. 이런 결과는 생물학적 다양성에 미치는 크기 효과와 반대이다. 섬에서는 진화의 범위가 작기 때문에 대륙에서보다 적은 수의 생물종이 살게 된다.
그림 14.2에서는 안정한 영역들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석출"되는지를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끝까지 남게 되는 두 개의 작은 문화는 경계 너머에 있는 이웃들과 상호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그러나 격자 바로 너머에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얼어붙지 않은 다른 영역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 영역이 10 x 10 격자에도 영향을 주어서 격자들을 재배열시키고, "섬" 영역과의 상호작용 가능성도 열어주게 된다. 그것이 바로 큰 격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상호작용이 더 먼 곳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도가 얼어붙을 가능성도 줄어든다. 그러나 작은 격자의 경우에는 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양성을 수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단일 문화에 먹혀버린다. 마치 대륙이 수용할 수 있는 이상적인 국가의 수가 있는 것처럼 많은 수의 안정한 영역을 지탱할 만한 적정한 영역의 크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지도는 이상하고, 평탄하지 않은 조각 천 모음이다. 아프리카에 있는 대 부분의 나라는 유럽 국가들보다 크다. 그중에서 가장 작은 르완다와 부룬디가 최근 심각한 혼란에 빠진 것은 우연일까? (마찬가지로 서유럽의 큰 국가는 작은 동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더 안정하다.) 아프리카 서부의 국가들이 동부나 남부으이 국가들보다 작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우연에 의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액설로드의 모델이 지리학적으로 구별되는 지역이나 대륙들이 어떻게 국경을 만들고, 그 결과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일반적인 정보를 제공해줄 것으로 보인다.
설탕과 양념의 땅
이 모델이 실제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다고 반대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무시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지리학적 영향, 기술 변화의 영향, 매스미디어, 조직이나 지배 시스템의 차이 등이다. 그러나 더 광범위한 문제가 남는다. 모델에서 사용하는 가정에 언제나 임의성이 있기 마련이라면 도대체 그런 모델에서 얻은 결론을 믿을 근거가 무엇일까?
액설로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델에서 얻은 일반적인 결론이 전혀 다른 가정을 근거로 하는 문화적 모델에서도 성립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 목적으로 그는 슈거스케이프의 세계를 검토했다.
심시티라는 컴퓨터 게임은 1990년대 초에 발표된 이후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도시 전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목표이다. 전력 시스템을 만들고, 주민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수리와 관리도 해야 한다. 신의 역할을 하면서, 엄청나게 세속적이고, 미칠 정도로 뒤얽혀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슈거스케이프는 18세기 심시티와 같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회학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서 고안했다. 만약 누군가 사회에 적용되는 법이나 구속 조건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슈거스케이프로 그런 과정에 대한 모의실험을 하여 그 예측이 맞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두 연구자에 따르면, "우리가 떨어질 낭떠러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다. 슈거스케이프 같은 컴퓨터 시스템은 비록 엉성하지만 규칙들의 진화적 결과를 예측해줌으로써 '전조등'과 같은 역할을 한다.
슈거스케이프도 역시 격자 세상이다. 다만 이번에는 격자가 도넛 모양의 원환체에 새겨진다.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을 선택한 것은 경계가 없어서 계산이 쉽고, "가장자리"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슈거스케이프에서는 "행위자"가 격자점을 차지하지만, 대부분의 격자점은 비어 있다. 행위자들은 오로지 설탕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사탕수수가 정해진 방법으로 분포된 격자 위에서 행위자들은 눈에 보이는 격자점들 중 사탕수수가 가장 많은 곳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사탕수수를 잘라먹음으로써 더 많은 사탕수수가 자라게 된다.
물론 행위자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서로 싸우거나, 거래를 하거나, 협력을 하거나, 문화적 특징을 교환하거나, 섹스를 한다. 문화적 상호작용은 액설로드의 모델에서와 비슷하다. 행위자들은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상호작용 과정에서 무작위적인 선택을 통하여 균등화가 이루어진다. 행위자들이 모두가 받아들이는 규칙에 따라 공통된 문화적 특징을 공유하는 종족적 연합("국가")을 형성하기도 한다.
극도로 복잡한 모델이지만, 모든 시나리오에 대한 모의계산을 할 수 있다. 설탕 부족이 전쟁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국제적" 협력으로 끝날 것인지도 관찰할 수 있다. 엡스타인에 따르면, "우리 모델은 사회과학의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다. ... 인구 증가와 이동, 굶주림, 전염병 확산, 경제개발, 무역, 분쟁을 비롯한 사회 문제를 연구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진화는 물론이고 사회적 영향력이 배우자를 결정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연구할 수 있다. 슈거스케이프는 고도의 체스 게임으로 말들이 스스로의 움직임을 결정하기도 하고, 스스로 욕망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개발과 무역에 대한 시나리오도 연구할 수 있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향료를 두 번째 자원으로 도입했다. 행위자들이 설탕과 향료에 대해서 가지는 관심이 다르기 때문에 설탕을 거래하는 행위자도 있고, 향로를 거래하는 행위자도 있다. 그들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에 따라 가격을 결정해주는 흥정과 거래에 대한 일정한 규칙을 지키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행위자들에게 한정된 수명과 진화에 대한 선호도를 주어서 "인간화" 시키면, 시장은 절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동한다.
거래는 문화적 지형에 흥미로운 영향을 미친다. 개인들이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으면, 더 많은 행위자들이 생존할 수 있다. 거래가 없는 경우에는 굶어 죽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행위자들은 가난하고, 소수의 행위자들만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만들어서 부의 분배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파레토가 제안했던 부의 법칙이 컴퓨터 게임에서 실현되는 셈이다. 그렇게 창발된 멱법칙 분포가 거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불변의 특성이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도 있다. 부를 더 평등하게 배분하는 방법을 시험하는 목적으로 그런 모델을 사용할 수 있다.
토머스 홉스가 상상하던 가장 야만적인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상태를 슈거스케이프로 근사할 수도 있다. 액스텔과 엡스타인은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가 차지한 곳을 점령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모의계산을 시도했다. 기본적으로 적을 죽이고 전리품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그런 일은 승리한 행위자가 어떤 이유에서 패배한 행위자보다 더 "크거나" 더 강력할 경우에 생긴다.
슈거스케이프에서 그런 우수성은 설탕 재고량으로 나타난다. 더 강력한 행위자는 더 많은 식량을 공급받게 된다. 홉스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이웃의 모두를 상대로 싸워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돌보아야만 한다. 슈거스케이프를 고안한 사람들은 모든 행위자들이 싸움에 참여해야 하는 경쟁 집단 사이의 전쟁을 모사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숫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전쟁은 집단적 협력에 의해서 진행된다. 연구자들은 전쟁의 규칙에 따라서 빠르게 영토를 점령하는 "속전"과 소모적인 "지구전"을 모두 모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액스텔과 엡스타인은 오늘날의 산업화된 사회에 대한 모델이 아니라, 사회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고 주장한다. 슈거스케이프에서는 행위자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규칙이 매우 단순하더라도 전체적인 거동은 지극히 복잡할 수가 있다. 그들은 현실 세계에서도 사정이 비슷할 것이라고 주장하낟. 사회과학이 연구하고 싶어하는 사회적 현상의 엄청난 다양성의 바탕이 아주 단순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무리의 행위자들이 설탕 무더기를 "파헤치고" 있는 모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행위자들이 모두 단순한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가 그럴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주식시장이나 정치계처럼 복잡한 시스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도 무엇인가 비교적 간단하지 않을까?
1996년 액설로드 연구진은 자신들의 문화 확산 모델을 슈거스케이프로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들은 만약 전혀 다른 두 모델을 가능한 한 비슷하게 만들면 같은 결과가 얻어질 것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두 모델에서 문화적 특성과 특징의 수를 같도록 만들고, 같은 크기와 모양의 격자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모델이 살펴보게 되는 범위는 비슷해진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규칙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 모델이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다. 그런데도 결과는 만조스러웠다. (문화적 특성과 특징의 수에 해당하는) 문화적 다양성과 격자의 크기를 변화시켰을 때, 슈거스케이프와 액설로드의 모델이 예측하는 안정한 영역의 수가 같았다.
슈거스케이프로 야심찬 시도가 이루어졌다. 슈거스케이프를 이용해서 인구성장에 대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프로젝트 2050을 추진했다. 자원, 이동, 경제성장을 비롯한 사회의 의제를 이용해서 지속 가능한 개발 방법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복잡한 문제에는 여러 요인을 고려하는 복잡한 모델이 필요하다. 그런 수준에 이르면, 서로 상호작용하는 입자들에 대한 물리학적 모델과의 직접적인 비교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액설로드의 비교 연구에서 확인되었던 것처럼 극도로 밀집된 인공 사회에서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물리학이라고 여길 만한 핵심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다양한 조건에서 나타나는 상전이나 멱법칙 같은 확실한 집단적 거동 양식이 바로 그런 것이다. 간단한 모델에서는 그런 것들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그것이 사실로 확인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슈거스케이프는 사회구조, 제도, 거동, 전통이 개인이 인접한 다른 사람드로가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와 같은 근본적이 것으로부터 나타나게 되는 과정을 밝혀내려는 다양한 컴퓨터 기반 모델 시스템의 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적 거래, 기업의 성장, 보행자의 움직임 등에 적용되는 행위자 기반 모델이다.
사이먼은 이것이 더욱 본격적인 사회과학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원칙적으로 행위자 기반 모델은 경제의 세계화가 문화적 화합이나 갈등을 강화시켜줄 것인지와 같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실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사회현상에 대한 특정한 행위자 기반 모델은 모두 기본적인 가정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회과학자들도 있다.
어떤 규칙이나 가정이 실제 상황에 대한 지나치게 엉성한 묘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대표적인 거동을 보여줄 것인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그런 모델은 확실한 것과 일시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기 전에는 정책에 대한 건전한 근거를 제공해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어느 특정한 모델에서만 얻어지는 것과, 좋은 모델 모두에서 얻어지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하낟. 물리학은 그런 문제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섭씨 0도에서 입자들의 움직임이 멈추어지면서 어는 것에 대한 모델과 물질의 액체와 고체 상태가 상전이에 의해서 구별된다는 지식 사이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것이다. 사회의 모델과 사회의 물리학 사이의 차이가 그것이다.
15. 작은 세상 - 우리를 결합시켜주는 네트워크
사회생활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만든 개념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훨씬 더 근원적인 원인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극히 유익한 것이고, 그런 원인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집단을 이루는 방법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에밀 뒤르켕
케빈 베이컨 게임은 주어진 영화배우가 케빈 베이컨과 연결된 가장 짧은 경로인 최소의 케빈 수를 찾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베이컨일까? 그는 수많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여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는 영화를 통한 관계의 네트워크에서 유명 배우와 무명 배우를 연결시켜주는 적임자가 된다.
이 게임의 결과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네트워크가 지극히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많은 수의 수학자들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자의 사회과학자들에 대한 거대한 연결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 과학계에서는 공저자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네트워크가 고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과학자라도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몇 발자국만 떨어져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친구와 아는 사람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우리에게 세상이 좁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사회과학자들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고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껴왔다. 지난 몇 년 동안에 그런 "작은 세상" 거동을 보여주는 네트워크에 대해서 연구하던 물리학자들이 몇 가지 기본적인 특성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런 연구는 사회동력학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서 뇌의 신경망, 몸에서 일어나는 서로 연결된 대사 과정의 생화학적 반응, 전력 공급망처럼 광범위한 시스템의 네트워크에서 똑같은 특징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형식의 네트워크에는 일종의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아주 간단한 모델을 사용하더라도 그런 네트워크 중의 하나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겉보기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시스템과 과정들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육촌
1970년대에 존스홉킨스 대학교의 사회과학자 마크 그래노베터는 친구 관계의 "세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정말 친한 관계는 확인하고 기억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네트워크의 전체적인 구조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의 "친한 관계" 네트워크는 서로 비슷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네트워크는 사람들의 집단을 서로 뭉치게 만든다. 그러나 그래노베터에 따르면, 전체적인 네트워크를 서로 결합시키는 것은 그런 집단들을 연결해주는 훨씬 약한 "아는" 정도의 관계이다. 그는 그런 특징을 "약한 결합의 힘"이라고 불렀다. 더 중요한 링크가 바로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훨씬 전부터 사회적 관계와 네트워크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정치학자 풀과 수학자 코헨은 사회에서 정치권력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개인이 어떻게 권력을 확보하는지를 파악하려고 했다. 대통령의 친구들은 대통령에게 몰래 다가가서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러나 친구의 친구들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까? 실제로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일까?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권력에 얼마나 가까워야 할까?
풀과 코헨은 사회적 네트워크의 이론을 정립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깝게 연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측하려고 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임의의 사람이 무작위적으로 선택된 다른 사람과 평균 5단계의 아는 사람을 통해서 링크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심오한 생각일까? 세상에는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놀라운 이유는 이상하거나 당혹스러워서가 아니라 우리의 통찰력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대대적인 광고 활동이 아니라 입소문 때문에 엄청난 성공을 거둔 영화, 책, 연극, 음악들이 있다. 똑같은 입소문이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크게 기대했던 영화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문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과 전 지구적 정보 시스템의 시대에서 문화 상품과 아이디어의 전파 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사회적 네트워크가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고나계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세계화의 동력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람들 사이의 만남과 정보교환의 네트워크가 핵심적인 주제임에 틀림없다.
질서와 혼돈 사이
파울 에르되시는 무작위적 그래프라고 부르는 네트워크의 성질을 밝혀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듯이, 그래프는 수직축과 수평축, 그리고 흩어진 점들을 연결하는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에르되시와 레니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그래프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래프는 단순히 선으로 연결된 점이 뿐이다. 점은 "꼭짓점"이라고 부르고, 선은 "모서리"라고 불렀다. 그런 추상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꼭짓점은 도시이고, 모서리는 도시들을 연결하는 도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그래프는 수송도로 네트워크가 된다. 꼭짓점이 영화배우이고, 모서리는 함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관계를 나타낼 수도 있다.
꼭짓점이 도시이고, 모서리가 도로일 경우에는 그래프의 규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그래프는 지도가 된다. 도시를 나타내는 꼭짓점들 사이의 거리와 방향은 일반적으로 지리학적인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영화-배우의 그래프에서는 규칙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를 들면, 모든 모서리를 같은 길이로 만들고, 방향에는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규칙은 사용할 수가 없다. 함께 출연한 두 배우를 일정한 길이의 모서리로 연결하면 그래프의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렇게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꼭짓점 사이의 연결이 영화에 함께 출연한 배우들을 제대로 연결해주기만 한다면 영화-배우 그래프를 어떻게 그리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트워크의 중요한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수학자들이 "위상 구조"라고 부르는 연결 시스템이다. 종이에 그렸을 때 다르게 보이는 그래프들도 위상학적으로는 똑같을 수가 있다. 거리와 방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종류의 그래프는 꼭짓점들 사이의 관계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관계" 그래프라고 부를 수 있다. 그와는 달리, 도시 네트워크는 거리와 위치가 실제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간" 그래프가 된다. 물론 도시 그래프를 반드시 공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래프는 그리기 쉽게 만들고, 사람들이 그 의미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공간적 그래프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꼭짓점들이 서로 연결된 그래프는 완전히 연결된 것이라고 부른다. 완전히 연결된 그래프에서는 연결선을 통해서 언제나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일 수 있다. 런던 지하철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사회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그런 네트워크가 위상학적으로 무작위적 그래프로 표현될 것이라고 가정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러지는 않을 것이 확실하지만, 그런 가정은 근거가 되는 구조에 대한 중립적 가정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구의 출발점으로 적정할 것으로 보인다. 연결은 순수하게 우연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성질은 모두 통계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꼭지점이 100개를 넘어서는 경우에는 꼭짓점을 무작위적으로 연결해서 똑같은 그래프가 두 번 이상 만들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기체에서 각각의 입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보다는 평균과 분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작위적 그래프에서도 꼭짓점당 평균 연결 수나 그런 수의 확률 분포와 같은 성질만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에르되시와 레니는 그런 확률 분포가 이미 익숙한 종 모양의 가우스 형 곡선임을 밝혀냈다.
네트워크 연구에 사용되는 또다른 종류의 그래프는 무작위적 그래프의 반대쪽 극단에 해당한다. 똑같은 꼭짓점들이 똑같은 모서리에 의해서 연결된 규칙적인 격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절서정연한" 그래프는 수학적으로 설명하기가 매우 쉽다. 무작위적 그래프와 질서정연한 그래프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질서정연한 격자의 한 꼭짓점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꼭짓점으로 가려면 이웃한 격자들을 조금씩 지나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지나간 꼭짓점의 수로 표현되는 경로의 길이는 매우 길다. 그러나 무작위적 그래프의 경우에는 출발점 근처의 어느 꼭짓점이 목표 꼭짓점 근처에 있는 점까지 "장거리"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서, 지름길이 많이 존재한다. 겉으로는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꼭짓점 사이의 경로가 매우 짧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무작위적으로 선택한 두 꼭짓점 사이의 평균 경로 길이가 얼마인지를 물어보는 것이 바로 그런 차이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고유 경로 길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스탠리 밀그램의 소포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필요한 우송의 평균 수에 해당하는 통계적 성질이다. 질서정연한 그래프에서는 고유 경로 길이가 길며, 그 길이는 꼭짓점의 수가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서 길어진다. 무작위적인 그래프에서는 고유 경로 길이가 짧다.
그런 사실을 근거로 하면, 영화-배우 그래프와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는 무작위적 그래프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무작위적으로 선택한 사람들과의 사회적 거리가 생각보다 짧다는 작은 세상의 핵심ㅇ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러나 1988년에 코넬 대학교의 두 과학자들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무작위적 그래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회적 네트워크는 무작위적 그래프의 완전한 무질서와 규칙적 격자의 완전한 질서 사이에 위치하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 네트워크를 작은 세상 네트워크라고 부른다. (허브가 발생하는 이유로 볼 수 있을듯)
동굴인과 전자 담화실
친구 관계는 대체로 상호적이다. 내가 앤디와 베티를 알고 있으면, 앤디와 베티도 서로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서, 내 친구와 나는 일종의 사회적 집단을 만든다. 물론 그런 집단은 다른 집단과 상당히 많은 링크를 가지게 된다. 무작위적 네트워크에는 그런 집단의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위상학적으로 무작위적인 네트워크에서는 내가 앤딩와 베티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질서정연한 격자에서는 각각의 꼭짓점이 바로 인접한 이웃과만 연결되어 있고 멀리까지 연결된 경우는 없기 때문에 집단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잘서정연한 격자로 연결된 친한 친구들은 서로에게 친한 친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던컨 와츠는 1990년대 말에 그런 집단 만들기 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이 처음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사회구조가 아니라, 귀뚜라미들이 함께 우는 것처러 동물들이 함께 행동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과학자들이 연구하던 뒤엉킨 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두 가지 극단적인 사회를 상상했다. 첫째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나누어져서 집단 내의 사람들과는 사귀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사귀지 않는 경우이다. 서로 떨어져 살면서 동굴에 함께 사는 사람들과 거의 모든 일을 함께 하고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는 동굴인들의 세계가 좋은 예가 된다.
홉스의 시대에는 마을의 농부들이 대부분 그런 종류의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런 경우는 내부적으로는 고도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외부와는 전혀 연결이 없거나, 드물게 연결된 작은 그래프들로 표현된다. 그런 그래프는 질서정연한 것은 아니지만, 집단 만들기의 수준이 높고 고유 경로 길이가 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시모프의 1957년 소설 <벌거벗은 태양>은 사람들이 로봇과 컴퓨터와 상호작용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렸다. 솔라리아에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이웃과 관계를 맺는 것만큼이나 쉽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가상적인 우정은 너무나도 약하고 피상적이어서 새로운 우정이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사회의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친구로 사귈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집단이 전혀 없는 무작위적 그래프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이미 어느 정도 그런 특성을 가진 사회적 네트워크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인터넷 대화방에서는 사람들이 링크를 만들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투자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무작위적으로 드나들게 된다.
스토로가츠와 와츠는 동굴인의 세계와 솔라리아 세계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두 사람이 서로 사귀게 될 가능성을 그들이 얼마나 많은 공동의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동굴인 세상에서는 서로 공동의 친구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같은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솔라리아에서는 많은 공동의 친구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될 가능성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마도 이런 두 극단 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할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 해당할까?
이들은 완전히 연결된 질서정연한 그래프를 단계적으로 변환시켜서 (솔라리아와 같은) 완전히 연결된 무자위적 그래프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을 무작위적인 재연결이라고 부른다. 질서정연한 격자에서 시작하여 무작위적으로 꼭짓점을 선택한다. 그것과 연결된 모서리를 무작위적으로 선택해서 단절시킨 후에 그래프에서 무작위적으로 선택한 다른 꼭짓점과 다시 연결(재연결)시킨다. 재연결을 계속하면, 그래프에서 멀리 떨어진 부분들을 단번에 연결시키는 지름길이 점점 더 많이 생기면서 그래프는 점점 더 무작위적으로 된다.
기대할 수 있듯이, 질서정연한 격자에서 재연결이 늘어나서 집단화가 줄어들고 지름길이 생기면 L과 C는 모두 감소한다. 그러나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첫째, 거의 모든 움직임은 처음 몇 번의 재연결에서 나타난다. 꼭짓점의 10퍼센트가 재연결되면, 그래프는 무작위적 그래프와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둘째, 질서정연한 그래프에서 무작위적인 그래프로의 변화가 매우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와츠는 그런 변화를 통계물리학에서의 상전이에 비교했다. 마치 질서정연한 "고체형" 그래프가 무질서한 "액체형" 그래프로 녹아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연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L과 C가 한꺼번에 바뀌지 않고, 서로 다른 단계에서 변한다.
마지막 과정은 정말 이상해 보인다. 아직도 상당한 수준의 집단화(C가 큰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데도 고유 경로 길이는 무작위적 그래프의 값으로 떨어져버린다. 그런 후에 재연결을 조금 더 진행하면 C도 역시 작아진다. 따라서 비록 재연결의 정도가 좁은 범위이기는 하지만 L의 값은 작고, C의 값은 큰 상태가 존재하게 된다.
이런 두 가지 특징이 공존하는 것이 바로 네트워크를 작은 세상으로 만들어준다. 예를 들면, 친구 관계의 작은 세상에서는 집단화의 정도는 높지만, 집단들 사이에 수많은 지름길이 있기 때문에 평균경로 길이가 짧아져서 "육촌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스토로가츠와 와츠는 이런 잠정적인 그래프를 "작은 세상 그래프"라고 이름지었다.
내가 당신을 아나요?
실제 세상에서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무작위적 재연결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은 세상 그래프와 같은 모양일까?
케빈 케이컨 게임에서 특징적 경로 길이 L이 짧고(평균 베이컨 수가 작다), 집단화의 수준도 높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같은 국적을 가진 배우들은 집단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집단은 리야오룽(홍콩), 제라르 드파르듀(프랑스), 궁리(중국)와 같은 문화 간 연결 고리에 의해서 서로 연결된다.
영화-배우 네트워크는 그런 수준에서 작은 세상에 버금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위상 구조는 어떨까? 네트워크에서 멀리 떨어진 꼭지섬 사이에 몇 개의 지름길이 있는지를 나타내는 꼭짓점 수축 파라미터라는 것을 정의하면 어느 정도 비교할 수는 있다. 이 숫자는 모든 네트워크에 대해서 계산할 수 있고, 원형 그래프에서는 재연결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커진다. 스토로가츠와 와츠는 꼭짓점 수축 파라미터를 이용해서 영화-배우 네트워크와 같은 작은 세상 재연결 네트워크의 두 그래프가 위상학적으로 어느 정도 비슷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두 네트워크 특징적 경로 길이 L과 집단화 계수 C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것이다.
비교 결과는 상당히 좋았다. 재연결 모델이 동굴인 네트워크나 솔라리아 네트워크보다 영화-배우 네트워크의 계수를 더 잘 흉내낼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가장 뜨거운 문제는 게빈 베이컨이 정말 영화계의 중심일까 하는 것이다. 만약 케빈 베이컨이 네트워크의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라면, 다른 모든 배우들은 평균적으로 다른 누구보다도 그와 가까워야만 한다.
케빈 베이컨이 네트워크의 가장 중요한 허브가 아닐뿐더러, 최고 1,000명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 게임에서 케빈 베이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에는 작은 세상에 대한 핵심이 담겨 있다. 그런 네트워크에서는 "모두"가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보다 "중심"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우리 사회의 중심으로 보이는 몇 사람에 대해서 샘을 내거나 친구가 없다고 한탄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네트워크에 대한 인식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사회 네트워크의 구조가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작은 세상 특성을 연결 고리 형성에 이용할 것인지의 여부는 그런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 개인의 심리학을 무시하고는 사회물리학이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6. 웹 짜기 - 사이버 공간의 모양
"우리가 전혀 경험한 적도 없고, 기대한 적도 없는 수준으로 의존하게 된 전혀 새로운 사회 기반시설이 등장했다."
생물학적 바이러스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자 바이러스도 인터넷을 완전히 못쓰게 만들 수 있다. 인터넷은 과부하, 전달 오류, 병목 현상을 일으키는 국부적 고장, 외부로부터의 악성 공격 등에 의해서 희생될 수 있다. 홉스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육체"를 건강하게 돌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리바이어던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인터넷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터넷은 이미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네트워크는 그런 특성 때문에 튼튼해지기도 하지만, 어떤 종류의 공격에 대해서는 취약한 아킬레스의 약점을 노출시키게 된다.
인터넷은 우리 사회의 구조와 조직이 앞에서 살펴보았던 네트워크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일 뿐이다. 그런 네트워크에서는 수많은 개별적인 단위와 행위자들이 상호작용에 의해서 연결되어 놀라울 정도로 작은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런 네트워크가 실제로 어떤 모양이고, 전체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에만 열중하는 수많은 행위자들이 어떻게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발적으로 그런 네트워크를 만드는지에 대한 그림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그런 "네트워크 사회"를 이해해야할 절실한 필요성이 있다.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으로 구성된 세계적인 통신, 정보 네트워크가 새로운 문화적, 조직적 구조를 갖추어가고 있다.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스는 웹을 인터넷 은하라고 불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네트워크의 분산되고 위계질서가 없는 "지리"가 그런 활동의 근본적인 성격을 변화시킬 것이다. "에너지 생산과 분배의 새로운 기술 덕분에 공장과 대기업이 산업사회의 조직 기반이 되었던 것처럼 인터넷은 정보화 시대의 조직 형태인 네트워크의 기술적 기반이 된다."
그런 네트워크는 어느 누구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성장했다. 너무나도 빠르게 성장해서 그 효과나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신중하게 검토해볼 여유도 없었다.
네트워크에 대한 새로운 물리학 덕분에 이제 우리는 인터넷의 구조가 그것을 만들어낸 시대적 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카스테르가 말했듯이, "생산자의 문화가 매체의 모양을 만든다." 다시 말해서, 종합적인 계획을 따르지 않고, 자유로운 접근과 (가장 좋거나 유용한 웹사이트만 접속한다는) 장점을 근거로 하는 선택의 원리를 따라 "유기적"으로 성장한 네트워크만이 인터네이나 웹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가진 구조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나 그런 "정보의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가 네트워크 사회를 낙원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단일 문화의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부문들 사이에 "정보 격차"를 만들어냈다. 한편 범죄자들과 기업가들까지도 인터넷의 놀라운 가능성을 열심히 활용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정보기계의 가상 해부학을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카스텔스가 예언했듯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영향력이 우리 모두에게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네트워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네트워크가 당신에게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 당신이 바로 이 순간에 이곳에서 사회와 함께 살고 싶다면 당신은 네트워크 사회와 직면해야만 할 것이다."
넷은 던져진다
넷은 본래 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편리함을 위해서 만들었던 짧은 메시지를 보내는 기능이 가장 매력적인 특징이 되어버린 것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성장 과정을 지켜보았던 학자와 산업계의 과학자들도 곧 자신들의 넷을 원하게 되었다. 전용 서버를 이용한 작은 네트워크들이 번성하면서 등장한 메가네트워크가 바로 인터넷이다.
넷과 웹이라고 부르는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은 동의어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이다. 넷은 통신 네트워크이고, 웹은 정보은행이다.
"브라우저", 검색 엔진 으로 발전
1960년대 컴퓨터 네트워크의 "뻔한" 위상 구조는 모든 메시지가 중앙의 메인프레임으로 보내진 후에 적당한 노드로 전달되는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것이었다. 중앙집중화된 시스템은 중앙의 허브 하나만을 망가뜨리면 전체 네트워크가 마비되기 때문에 공격에 취약하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핵공격을 견뎌낼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바란은 꼭짓점당 세 개의 모서리만 있으면 네트워크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ARPA의 지원을 받는 대학 사이트들을 서로 연결해서 컴퓨터 자원의 횽율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각 사이트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다른 모든 컴퓨터와 직접 연결하는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1967년에 컴퓨터 과학자 웨슬리 클라크는 "최대로 연결된" 네트워크는 작동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 개의 꼭짓점만 있더라도 마은다섯 개의 모서리가 필요하다. 모서리의 수는 꼭짓점의 수보다 훨씬 더 빠르게 늘어난다. 그러면 각 꼭짓점에 있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엄청난 부하가 걸려서 정보의 흐름이 "얼어붙어버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
클라크는 메인프레임을 작은 컴퓨터들로 구성된 하부 네트워크에만 연결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하부 네트워크의 컴퓨터들은 모두 똑같은 언어를 사용해서 정보를 전달해주는 일만 전담하게 된다. 클라크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바란의 연구를 바탕으로 그런 네트워크가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
인터넷의 위상학적인 계획은 그 정도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어떤 규제기관이나 구조적 디자인의 간섭도 없는 상황에서 초기 개발자들이 꿈꾸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확장되었다. 도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의 성장도 유기적이고 서로 간의 협조 없이 이루어졌다.
실제로 이제 인터넷은 모든 면에서 자연 생태계와 같은 수준의 복잡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제는 연결 패턴에 대한 완벽한 지도를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구조를 파악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은 바란이 처음 제안했던 고도로 중복된 분배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인터넷이 한꺼번에 엄청나게 많은 유통량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인터넷의 지도가 그림 16.1c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분포된 시스템) 인터넷의 지도는 규칙적인 격자에 더 가깝다. 물론 꼭짓점당 링크의 수는 일정하지 않고 4에서 6 사이에 변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런 네트워크에는 지름길이 없다. A에서 짧은 걸음으로 B까지 갈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터넷은 정확하게 어떤 모양일까? 그것은 우편물을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경로를 어떻게 찾는가, 부분적인 파괴가 일어나는 경우의 시스템이 얼마나 안정한가, 어느 한 지역의 사용자가 다른 곳의 사용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인터넷이 무한히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네트워크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인가와 같은 문제와 관련된 핵심적인 문제이다. 네트워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이런 문제들은 더욱 심각하게 인식되고 있다.
인터넷 네트워크도 런던 지하철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웹 자체는 그런 통신 선로가 아니다. 원칙적으로 하나의 통신 선로는 URL 링크의 미로 속에서 수백만 개의 웹 페이지를 수백만 개의 다른 페이지로 연결시켜줄 수 있다.
인터넷이나 웹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무작위적 그래프일까? 앞 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작은 세상 네트워크일까? 아니면 강물의 네트워크나 우리 폐의 기도와 같은 가지가 달린 계층 구조의 나무와 같은 것일까? 인터넷은 전혀 다른 종류처럼 보인다는 것이 답이다.
규모의 결여
알버트 연구진은 이 그래프의 들어오고 나가는 링크의 확률 분포가 며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대학의 웹사이트에서 무작위적으로 선택한 페이지에서 주어진 수의 링크를 발견할 확률은 링크 수의 멱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페이지는 링크가 거의 없고, 많은 수의 링크를 가진 페이지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링크의 수가 두 배가 되면, 그런 수의 링크를 가진 페이지의 수는 일정한 비율로 줄어든다.
네트워크 연결에는 "규모"가 없다. 멱법칙은 시스템의 "규모와 상관이 없다"는 표시이다.
네트워크는 스스로 그런 멱법칙 상태로 조직화된다. 자기 조직화된 임계성에 대한 모래 더미 모델이 사태에 대한 멱법칙 분포를 가진 임계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멱법칙은 웹이 스티븐 스트로가츠와 던컨 와츠가 가정했던 작은 세상 네트워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들의 "재연결" 그래프는 선호하는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꼭짓점당 모서리 수의 확률 분포함수는 특정한 값에서 최대가 된후에 다시 줄어든다. 웹 네트워크는 또다른 확률 분포를 보여주는 무작위적 그래프와도 다르다. 멱법칙 분포에서 많은 수의 연결을 가진 꼭짓점을 발견할 확률은 무작위적 그래프나 스트로가츠-와츠의 작은 세상 그래프의 경우보다 훨씬 더 크다. 경제시장 변화에 대한 모델에서 멱법칙이 대형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웹은 작은 세상이 아니라는 뜻일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웹은 스트로가츠와 와츠가 고안했던 것과 같은 작은 세상은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알버트 연구진은 자신들의 자료가 작은 세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학인해보았다.
무작위적으로 선택한 두 개의 꼭짓점 사이의 평균(고유) 경로 길이가 짧고, 꼭짓점의 집단화 정도가 높은지를 확인했다. 이런 두 가지 특성이 결합되면 작은 세상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네트워크에 들어 있는 꼭짓점의 수가 늘어나면, 평균 경로 길이는 아주 느리게 증가한다. 연구자들은 연결성의 멱법칙 분포가 자신들이 웹에서 관찰한 것과 같도록 만든 그래프에서 그런 거동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월드와이드웹은 작은 세상이지만 무규모 연결성을 가진 멱법칙의 특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위상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보를 찾아내기가 왜 그렇게 어려울까? 원하는 정보에 도달하기 전에 엄청나게 많으 양의 쓸모없는 정보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라다 아다믹은 웹의 작은 세상 특징을 이용하면 더 나은 검색 엔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관련된 주제만을 다루는 웹 페이지들이 고도로 집단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웹은 무작위적 네트워크와 다른 위상학적 특징을 가지게 된다. 지능적인 검색 엔진은 검색을 시작할 최선의 "허브" 사이트를 찾아낸 후에 그런 집단화 특성을 이용해서 검색 범위를 제한한다. 그런 "똑똑한" 전략은 웹의 미로를 무작위적으로 걷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멱법칙은 웹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중심 테마이다.
대부분의 이용자들은 페이지 대신 사이트를 서핑한다. 그러나 휴버먼과 아다믹의 동료들은 사용자들이 한 사이트에서 따라다니는 서핑 경로만을 연구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깊이" 들어가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여러 자료로부터 사이트에서 클릭 수의 확률 분포 함수가 멱법칙이나 또는 그것에 매우 가까운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 정보는 웹 디자이너가 페이지를 찾는 사용자의 수를 예측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터넷도 역시 노드들 사이의 연결성이 멱법칙을 따르는 무규모 위상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힘이 나온다. (그림 16.4)
무규모 네트워크는 노드의 고장 등과 같은 무작위적 오류에 대해서 무작위적 네트워크나 스트로가츠와 와츠가 찾아냈던 작은 세상이지만 규모에 의해서 지배되는 네트워크보다 훨씬 더 안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알버트 연구진은 무규모 네트워크가 스무 개의 노드들 중에서 하나에 문제가 생겨도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수함수적 네트워크들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노드가 28퍼센트를 넘어서면 여러 개의 고립된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네트워크는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무규모 네트워크에서는 노드에 고장이 생기면 네트워크가 "부서지는" 대신 서서히 "꺼져버린다." 절반의 노드가 작동하지 않더라도 비교적 높은 수준으로 연결된 집단은 계속 작동한다. 무규모 네트워크에서 대부분의 노드들은 한두 개의 링크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작위적으로 링크를 끊어버리면 하나의 노드만이 고립된다.
따라서 인터넷은 일부의 노드들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통신 네트워크의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위상학적 특성을 유지하는 셈이다. 그런 국부적인 문제는 컴퓨터의 오작동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떤 노드는 정보 유통량이 너무 많아서 일시적으로 쓸모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규모에 상관이 없는 네트워크에서는 상당수의 노드들이 동시에 고장이 나더라도 효율적인 대체 경로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인터넷이 아무런 계획도 없었으면서 상상할 수 있는 네트워크 중에서 가장 안정한 상태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이런 식으로 디자인하지는 않았다. 사실 누군가가 인터넷의 위상학적 특징을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훨씬 덜 안정한 구조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메시지는 명백하다. 때로는 기술이 스스로 조직화되도록 놓아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뜻이다.
사이버 공격
정보를 확보한 공격의 경우에는 인터넷과 같은 무규모 네트워크에 심각한 피해가 생길 수 있다. 그런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노드에는 가장 안전한 안전망이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런 위성학적인 구조 때문에 인터넷은 어느 누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자연적인 생명"에 가까워졌다. 정보기술을 바탕으로 탄생한 이런 웹은 흔히 뇌에 비교된다. 스트로가츠와 와츠는 기생하는 선충인 카에노르하브디티스 엘레간스의 신경 네트워크 연결 패턴이 작은 세상 네트워크의 독특한 특징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집단화의 수준이 높고 각각의 신경세포 사이의 고유 경로 길이가 짧다. 그러나 바라바시 연구진은 다양한 유기체의 세포에서 무규모 인터넷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훨씬 더 중요한 네트워크를 발견했다.
생명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아마도 환경으로부터 흡수한 원료물질을 세포가 존재하는 동안 항상 필요로 하는 에너지와 분자로 변환시키는 대사일 것이다. 세포는 다양한 종류의 구성 요소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의 세포는 음식으로부터 아미노산, 당, 지질과 함께 비타민과 미네랄 영양분, 그리고 물과 산소를 비롯한 다양한 물질을 공급받아야 한다. 세포는 그런 분자의 원자들을 재배열하는 효소를 이용해서 새로운 효소, 핵산, 호르몬, 고 에너지 분자 등을 만든다. 원료물질을 유용한 분자로 변환시키는 순서를 대사 경로라고 부른다.
그런 경로는 거의 예외 없이 선형이 아니라 가지가 많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포도당과 같은 하나의 원료물질이 여러 방법으로 재배열되거나 잘라진다. 당이 부서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고에너지 분자들은 다른 대사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데에 이용된다. 결국 대사는 화학반응의 대규모 네트워크로 특정한 분자물질은 노드이고, (흔히 효소에 의해서 촉매화되는) 반응은 한 노드를 다른 노드와 연결시켜주는 모서리로 생각할 수 있다.
바라바시 연구진은 박테리아에서 식물, 그리고 선충류와 같은 "고등" 생물에 이르는 유기체 43종의 대사 네트워크를 연구했다. 그들은 모든 경우에 연결성 분포함수가 규모에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주어진 링크를 가진 노드의 확률이 멱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네트워크에서 웹을 유지시켜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고도로 연결된 소수의 "허브"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모든 유기체에서 허브에 해당하는 분자들의 대부분과, 네트워크에서 그런 분자들의 중요성이 똑같다는 것은 생명의 진화적 기원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사 네트워크의 무규모 구조는 대사를 작은 규모의 무작위적인 오류에 대해서 비교적 민감하지 않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진화적 의미에서 바람직하다. 유전적인 이유 때문에 한두 종류의 효소에 문제가 생기면, 그래프에서 해당하는 모서리가 약해지거나 끊어져버린다. 그것이 일부 생물학적인 기능에 해로운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무규모 네트워크에서는 반드시 전체 웹이 부서져서 생명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무규모 네트워크가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한 시행착오적인 탐색에 해당하는 자연선택에 의해서 훌륭하게 "만들어진" 걸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무규모 네트워크는 계획된 공격에는 취약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허브에 해당하는 노드를 제거하면, 네트워크는 빠르게 무너져버린다. 그 사실은 박테리아 감염을 물리칠 의약품의 지능적 설계의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가장 높은 수준으로 연결된 분자의 작용을 방해하는 의약품은 공격을 받은 세포의 생명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 네트워크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적당한 목표를 선택하는 첫 단계일 수 있다.
2003년에 미국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전 사고가 네트워크 위상학적 취약성과 관계가 있을까? 바라바시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에 따르면 "정전은 장비의 문제나 부주의나 잘못된 설계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정전의 규모는 연결성에 의한 취약성이라는 세계화된 세상에 대해서 지금까지 무시되어왔던 특성과 관계가 있다."
바라바시는 송전 선로와 같은 시스템에서 한 지점에서의 오작동이 부하를 다른 선로로 이동시켜서 과부하가 확산되는지를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복잡한 네트워크에서는 폭포처럼 연속적으로 확산되는 오작동이 흔히 일어난다.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로부터 육촌 관계에 있다고 좋아하면서도 그런 문제와 취약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주변으로 확산시키기
바이러스는 네트워크를 파괴하는 대신 극단적인 연결성을 이용해서 네트워크를 식민지화하고, 노드를 혼란에 빠뜨린다. 여기서도 역시 인터넷 위상 구조의 장점을 거꾸로 이용하는 셈이다. 컴퓨터 사이의 정보전달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것은 호흡이나 체액을 통해서 개인 사이에 생물학적인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것과 같다. 네트워크의 두 노드 사이에 링크가 되면 서로 감염시킬 가능성이 생긴다.
전염병학자들은 모델을 이용해서 감염 문턱값을 예측한다. 질병의 확산 속도가 문턱값보다 크면 질병은 지속적으로 일정한 비율의 사람들을 감염시키면서 퍼져나간다. 그렇지 않으면, 질병은 빠르게 사라져버린다. 문턱값의 개념은 백신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사회적 네트워크가 그런 웹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면 질병학의 표준 개념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스토로가츠-와츠의 작은 세상이 아니라 무규모 작은 세상이다. 보른홀트 연구진은 킬 대학교의 서비를 통한 전자우편 연결이 무규모 네트워크임을 증명했다. 인터넷은 물리적으로 (즉 사용자 노드와 그들 사이의 링크의 면에서) 규모에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자 웹에서 정의된 "친구 네트워크"도 똑같은 위상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자 로무알도는 그런 차이 때문에 컴퓨터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컴퓨터 모의계산을 통해서 무규모 네트워크에서 SIS 모델을 검토해보았더니 문턱값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확산 속도가 아무리 느리더라도 컴퓨터 시스템을 돌아다니면서 노드 중 어느 비율을 감염시켜버린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일생에서 처음 몇 달 동안에는 생존 확률이 크게 줄어들지만, 그 후에도 낮은 수준의 감염은 오랫동안 계속된다.
그런 거동은 대부분의 질병학자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표준 모델에 따르면, 바이러스 감염은 전염성이 되거나 빠르게 사라져야만 한다. 그러나 전염 문턱값이 없이 오랫동안 느리게 줄어드는 것은 무규모 네트워크의 이상한 특징이다. 그런 결과는 네트워크의 위상학적 특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컴퓨터 바이러스와 대항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표준 질병학의 지식이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진짜 사회적 접촉 네트워크도 역시 규모에 상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실제 질병이 확산되는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완전히 달라져야 할 것이다.
성관계 파트너 수의 분포가 멱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서, 접촉 네트워크는 규모에 상관이 없었다.
만약 이 조사 결과가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라면 AIDS와 같은 성병을 퇴치하는 전략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무규모 네트워크에서는 질병의 확산 속도에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퍼져나갈 것이기 때문에 질병을 완전히 퇴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백신을 개발해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무작위적으로 접종하더라도 질병을 통제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반드시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무규모 네트워크에서는 고도로 연결된 노드인 "허브" 몇 개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아킬레스 건이다. 그런 허브에 연결된 노드를 끊어버리면 웹은 빠르게 무너진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장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백신을 접종하면 성병 전염의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전자우편 네트워크의 분석에 따르면, 연결 수가 많은 것을 근거로 선택한 꼭짓점의 10퍼센트를 "면역시키면" 컴퓨터 바이러스의 창궐을 완전히 막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몇 사람의 허브 노드만을 고립시켜도 질병을 몰아낼 가능성이 생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원이 한정된 현실에서는 무작위적이고 맹목적인 방역 정책으로 최선을 바라는 것보다는 적어도 "허브"에 해당하는 사람을 통제하는 전략에 어느 정도는 투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웹 세상
무규모 네트워크는 스트로가츠와 와츠의 재연결 네트워크보다 훨씬 더 흔한 작은 세상 형태일 수도 있다. 영화-배우 네트워크와 미국의 송전 선로 네트워크를 재검토해보았다. 스트로가츠와 와츠에게는 노드의 집단화 수준이 높고, 고유 경로 길이가 짧다는 것이 작은 세상 거동의 증거였다. 그러나 그런 기준은 연결의 위상학적 특징을 확실하게 밝혀주지는 못한다. 재연결 네트워크와 무규모 네트워크가 모두 그런 특징을 나타낸다. 바라바시와 알버트는 두 경우 모두에서 무규모 네트워크의 특징을 발견했다. 따라서 영화배우들 사이의 "평균" 관계도는 의미가 없다. 링크의 수는 (멱법칙에 따라) 완만하게 감소한다.
마블 네트워크도 영화-배우 네트워크의 경우처럼 실제 세상의 웹이 가지고 있는 위상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 다시 말해서, 어떤 책에 어떤 수의 인물이 등장할 확률은 멱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결론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네트워크의 집단화가 무규모 네트워크나 작은 세상 네트워크보다 훨씬 낮았고, 무작위적 그래프보다 아주 조금 컸다. 집단화는 인물들이 "사교 서클"을 형성하는 정도를 뜻한다. 집단화 수준이 높은 경우에는 공통의 친구를 가진 두 사람은 순전히 무작위적으로 선택한 두 사람보다 서로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마블 우주에서 집단화 수준이 낮은 것은 특별하게 만들어진 기능적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우주를 만들어내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사실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어쨌든 마블 작가들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의도적으로 "현실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 이상을 함께 등장시키는 것이 재미있을 듯하면 그렇게 했을 뿐이다. 물론 실제 사회적 네트워크도 기획도지 않은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사회적 네트워크나 당신이나 나의 네트워크는 모두 서로 다른 원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 이유를 밝혀낼 수만 있다면, 실제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무규모 네트워크는 인류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연결되면 초기 사회통계학자들을 매혹시켰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우스 형 분포가 사라지고, 그 대신 무규모 분포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부자는 언제나 더 부유하게 될까?
겉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여러 시스템에서 같은 패턴이 나타나면, 특정한 경우와 상관없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표현되는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여러 "입자"로 구성된 시스템에서 질서를 지향하는 힘과 잡음에 의한 영향처럼 경쟁적인 힘이 작용하면 갑작스러운 상전이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무규모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고유한 원리는 무엇일까?
에르되시와 레니의 무작위적 그래프와 스트로가츠와 와츠의 재연결된 작은 세상은 순전히 무작위적인 과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프에서 무작위적으로 선택한 꼭짓점들을 모서리로 연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네트워크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새로운 노드가 이미 잘 연결된 노드에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신인 배우는 무명 배우들만 출연하는 영화보다는 이미 알려진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에서 조연 역할을 할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명성이 높을수록 새로운 링크를 만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마찬가지로, 웹이나 과학적 인용으로 만들어지는 네트워크(역시 무규모 네트워크)의 진화에서도 일종의 "명성의 자기력"이 작용한다. 사람들이 유명한 논문을 인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인용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런 논문을 인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인용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런 논문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명성은 명성을 낳는다.
명성은 좋은 것이나 나쁜 것 모두에게 더 많은 보상을 가져다준다. 누구나 그런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장하는 그래프에서 새로 더해지는 모든 꼭짓점이 가장 높은 수준의 연결을 가진 꼭짓점에 연결된다면 네트워크는 무규모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허브로 집중된 상태가 된다. 그런 일은 일반적으로 미리 기획되지 않은 상태로 성장하는 네트워크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프가 너무 크면, 새로 추가되는 꼭짓점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연결된 꼭짓점을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이 아닌 꼭짓점들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영화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선택이 이루어진다. 가장 유명하고 잘 연결된 배우가 새 영화에 모두 출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높은 수준으로 연결된 꼭짓점에 새로운 링크가 만들어지는 것은 가능성이 높을 뿐이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바라바시와 알버트는 그런 경향이 무규모 네트워크의 성장에 필요한 한 가지 요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들은 새로 추가되는 꼭짓점에 연결시킬 꼭짓점을 무작위로 선택하더라도 높은 수준의 링크를 가진 꼭짓점에 연결될 확률이 조금 더 높은 경우를 분석해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네트워크는 규모에 상관이 없었다.
사람들의 조직 네트워크들 중에는 그런 "부익부" 원리에 따라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큰 기업일수록 새로운 고객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 더 좋은 광고를 더 많이 할 수 있는 것이 부분적인 이유이다.
꼭짓점의 연결성을 "자산"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경우에는, 선택의 자유가 지배하고 "시장 점유율"에 의해서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불평등의 멱법칙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무론 우리는 어떤 자유시장에서나 자원에 대한 접근이나 권리의 차이가 있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무규모 성장 과정에서는 자산의 무작위적인 분포보다 더 심한 양극화가 나타난다. 아주 부유한 사람이나 거대 기업처럼 극단적인 "사건"의 수가 늘어난다. 자유시장에서 멱법칙에 의한 양극화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양극화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면, 시장에서의 자유 중 일부를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네트워크 성장이 반드시 극심한 양극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규모 네트워크를 자세히 분석해본 결과, 그런 네트워크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좋은 연결을 가진 몇 사람의 특권층에게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는 영화-배우 네트워크의 멱법칙도 극단적인 경우에 이르면 깨어지기 시작한다. 가장 잘 연결된 배우들도 멱법칙의 예측보다는 적은 수의 연결을 가지게 된다.
무엇이 멱법칙을 방해하는 것일까? 실제 세상에서는 반드시 어떤 요인에 의해서 어느 노드가 만들 수 있는 링크의 수에 상한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배우에게는 시간과 연령의 한계가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1,000편의 영화에 출연할 수는 없다. 아무리 훌륭한 논문이라고 하더라도 오래된 논문은 무시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오래된 문헌 대신 더 최근의 논문이나 단행본을 인용한다. 공항이 무한히 많은 교통량을 처리할 수도 없다. 비용이나 인구학적 특성이 공항의 확장 범위를 제한하게 된다. 꼭짓점에 수용 한계가 있거나 (일종의 노화에 의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연결을 만들지 못하면, 가장 잘 연결된 노드에서는 규모에 상관이 없는 네트워크의 구조가 사라지게 된다.
사회적 네트워크 중에는 처음부터 멱법칙이 자리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서던 캘리포니아 송전 시스템과 세계 공항을 연결하는 항공편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그런 경우이다. 그런 네트워크들은 가우스 형 확률 분포를 가지고 있고, 연결성의 평균 "규모"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모두 꼭짓점의 수가 늘어나더라도 고유 경로 길이가 아주 느린 속도로 늘어나는 작은 세상 네트워크이다.
여러 형태의 작은 세상이 있다. 스트로가츠와 와츠에 의해서 정의되는 재연결 네트워크는 선호되는 평균 연결성과 잘 연결된 꼭짓점의 수가 갑자기 줄어드는 "단일 규모"의 작은 세상의 예이다. 바라바시 연구진이 찾아낸 네트워크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탐욕이나 난잡함에는 한계가 없고, 아주 잘 연결된 꼭짓점도 드물지 않다. 바라바시의 표현에 따르면, 그런 두 극단의 사이에는 "네트워크의 거대한 동물원"이 있다.
계획적으로 만들더라도 정확한 위상학적 특징에 상관없이 작은 세상 네트워크는 드물다. 그런 네트워크는 새로운 꼭짓점의 연결을 지배하는 법칙에서 창발된다. 그러나 니시 마티아스와 벤카테시 고팔에 따르면, 그런 네트워크는 꼭짓점의 연결성을 극대화하고 "연결"의 길이를 극소화하려는 서로 상반되는 욕구를 이상적으로 조화시켜주기 때문에 공학적인 면에서도 매우 매력적이다. 일반적으로, 네트워크에서 두 노드를 연결하려면 두 노드 사이의 거리에 비례한 재정적 비용이 필요하다.
모든 노드들이 직접 연결되어 있으면 네트워크 사이의 가장 효율적인 통신이 가능해지지만, 엄청나게 많은 연결이 필요하다.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사람은 소수의 짧은 연결을 원하고, 네트워크 사용자는 많은 수의 긴 연결(그리고 많은 수의 지름길)을 원한다. 전자는 규칙적인 격자에 해당하고, 후자는 무작위적 네트워크에 해당한다. 작은 세상 네트워크는 "국부적" 인 연결만을 필요로 하는 격자의 경우보다 조금 더 많은 연결을 이용해서 장거리 연결을 향상시키는 방법이다.
네트워크 물리학은 우리의 사회적 패턴이나 조직에 적용되는 심오한 규칙을 보여주었다. 질병의 전염이나 문화적 기준의 확산과 같은 변화의 과정에 대한 네트워크 위상학의 결과는 이제 막 드러나고 있는 수준이다. 경제학에서는 거래 네트워크의 구조가 시장의 동력학이 얼마나 복잡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의문들 중의 하나로 확인되었다.
"시장은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움직이고,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런 네트워크의 구조를 반영하며, 네트워크의 구조는 다시 네트워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 네트워크 이론은 통계물리학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 사이의 접촉을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영원한 탄성적 링크를 만들어내는 다입자 시스템의 "끈적끈적한"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으로써 네트워크는 시스템의 역사를 담은 일종의 지도가 된다. 시간에 따라 인터넷이 확장되면서 성장하는 웹에 기록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네트워크에서는 과거가 중요하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위치와 모양에 들어 있다. 그런 네트워크는 우리의 삶이 겨우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수의 방법으로 뒤엉키게 만드는 정도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17. 에덴의 질서 - 협력의 학습
문명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계몽운동 이후로 수많은 비평가들은 문명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해소되어야 할 긴장에 관심을 가져왔다.
개인의 자유는 문명의 선물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는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이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자유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구속은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런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 개인의 권력이 집단의 권력으로 대체된 것이 문명을 향한 결정적인 단계였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렇지만 어떻게 그런 권력과 구속의 한계를 정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 타협을 이룰 수 있을까?
홉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독재의 멍에를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권리 이외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에만 야만적인 자연 국가에서 문명이 등장할 수 있다.
존 로크의 사회적 계약은 전체적으로 훨씬 더 상호협조적이었다. 시진들은 국가가 시민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권리의 일부를 국가에 맡긴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홉스가 인정하는 거의 무한의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 어떤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는가에 상관없이 문명사회의 평화와 질서는 스스로 포기하거나 받아들이는 개인 권리의 구속에 대한 대가라는 해석이 있다.
절대적인 자유는 무의미한 것이다. .... 우리에게는 각자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비슷한 사회가 필요하다. 내 자유와 당신의 자유가 비슷해지려면 모두가 서로에 대한 폭력을 포기해야만 한다. 내가 당신을 쓰러뜨리지 않을 것이니, 당신도 나를 쓰러뜨리지 말아야 한다. - 카를포퍼
프로이트도 홉스가 주장했듯이 그것이 우리의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충동, 즉 "죽음의 본능"과 어긋나는 것임을 인정했다. 결국 인간의 공격성은 "무의식적으로 내재화된 것으로, 사실 그것이 처음 발현되었던 스스로의 자아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가 끊임없는 죄의식이고, 그것은 다시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는 종교와 원죄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유, 정부, 권력에 대한 이런 논의들이 모두 심각하고 놀라울 정도로 근시안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치철학에서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강요할 권위가 필요하다고 보거나, 아니면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를 대부분 문명적으로 유지하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실내 게임의 천박함에서 비롯된 한 이론이 도덕적인 고려가 전혀 없는 적들 사이에서도 선한 행동이 생겨나서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게임 이론은 일반적으로 물리학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경험적인 특성을 가진) 수학의 한 분야로 인식된다. 그러나 게임 이론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사회물리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개인의 구성된 집단의 행동은 개인 사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직관적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방법으로 생겨난다. 여기서 우리는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무관심, 행동양식이나 통계적 집단의 갑작스러운 변화, 변화에 대한 민감성, 일반화시킬 수 있는 "법칙"과 같은 익숙한 현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게임 이론의 결론 중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도 있다. 우리의 근본적인 믿음의 체계를 부정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결론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론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유추할 수 있거나 유추할 수 없는지와, 그런 결론이 어느 정도까지 진짜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련이 있는지를 가능하면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게임 이론은 수학적인 사회과학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우리가 도덕적 지혜를 가지고 객관적인 결과를 해석해야 하며, 기술적인 결론을 인류학적인 용어로 설명할 때에는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자칫하면 정치적인 기폭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필요할까?
플라톤은 국민 중에는 사악하고 비도덕적인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국민에 의한 지배"인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비난했다.
정부가 국민의 생활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은 인간의 선함에 대한 로크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가장 진보적인 정치철학의 시금석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문명화된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권력이 정당하게 집행되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밀은 개인이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권리마저도 그것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된다고 믿었다. 그런 진보적 철학의 뿌리에는 밀에 의해서 정의된 공리주의의 온화한 사회적 수학이 자리잡고 있다.
루소는 문명은 퇴화한 것이고 오로지 원시적인 "야만성"만이 고귀하고 선한 것이라는 믿음을 근거로 한 낭만적 무정부주의를 주장했다.
중세의 마을에는 모든 사람들이 가축에게 풀을 뜯게 하는 공동구역이 있었다. 그런 체제는 자제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가축을 기르게 되면 공동구역의 풀을 조금 더 소비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곧 따라하게 된다. 결과는 공동구역의 풀이 말라 버리는 "공동의 비극"이다. 어족 자원이 사라질 정도로 지나치게 고기를 잡고, 강물이 오염되고, 하늘이 온실 기체로 채워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런 사정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자발적 협력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런체제는 공동체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사람들에 의해서 착취될 가능성이 높다. 무임승차를 막으려면 가혹한 법률이 꼭 필요한 것일까?
누가 세상을 운영해야 할까?
핵심 권력이 없더라도 국가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을까? 강한 국가가 작은 국가들을 착취해서 이익을 챙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침략적인 "매"나 평화적인 "비둘기" 중 어느 쪽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좋을까? 국가들이 상당한 군사력과 핵무기를 축적해서 매처럼 보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침략을 당할 경우에 무엇이 "옳은" (로크의 표현에 따르면 "자연적인") 반응일까? 전쟁만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게임 이론만으로는 그런 의문을 해결할 수 없지만,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고 나면 적어도 문제를 더 명확하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
참호 속에서의 전쟁
수많은 영국 군인들은 "독일군"을 경멸하는 심정으로 전선에 나갔고, 독일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이 적을 그냥 두면 적도 자신을 그냥 둔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그런 환상은 깨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서부 전선에서 서로 대치하던 부대중에는 공식적으로 휴전한 경우도 있었다. 지휘자들은 그런 행동을 반역으로 여겨서 주동자를 엄벌에 처했다. 그러나 참호 속에서 번지던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수단은 공개적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은 서로 대치하던 군인들의 공모에 의해서 은밀하게 이루어졌고, 양측의 장군들을 분노하고 절망하게 만들었다.
왜 모든 전쟁이 그렇게 끝나지 않을까? 서로가 오랫동안 대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대치보다는 협력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도 앞으로 똑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규칙적으로 거래를 하는 관계에서는 상대를 속이거나 부도를 내기가 어렵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똑같은 일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번 있는 거래에서는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상대를 속일 수 있다.
엉터리 공격은 장군을 속이기 위한 속임수일뿐만 아니라 "적군"에게 선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적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생존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협동은 이기심에서 생겨났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정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과학적인 문제로 만들려면, 역설적이지만 미국의 군사 두뇌 집단에서도 도구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화려한 토너먼트
유혹은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유혹은 선하고, 친절하고, 신중한 시민이 아니라 반항하고, 속이고, 싸우고, 더러운 일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유혹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고, 때로는 범죄를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선하지 않다는 것이 모든 유토피아의 문제가 된다.
체스 게임을 연구하는 일이 수학자에게 간단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복잡성 때문이다. 그러나 포커에는 속임수라는 심리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훨씬 어려운 도전이다. 문제는 체스에서처럼 다음 움직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움직임을 예상하거나, 속이거나, 혼란스럽게 만드느냐가 문제이다. 폰노이만은 포커와 같은 게임에서 위험과 불확실성의 요소로부터 경제학과의 관계를 보았고, 1944년에 경제학자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쓴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세하게 설명했따.
죄수 딜레마의 핵심은 "협력"과 "변절"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같은 게임을 여러 번 반복하면 한 번의 죄수 딜레마 게임에서 두 선수 모두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어려움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상황이다. 내가 이웃을 속이면, 이웃도 나에게 복수할 기회가 많아진다. 따라서 반복적인 죄수 딜레마 게임에서 선수들은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면서 상호 신뢰 관계를 만들어갈 기회를 가지게 된다. 진화를 통해서 협력이 등장할 수 있다.
맞대응(TFT) 전략. 처음에 협력을 한 후에는 언제나 상대방이 앞의 게임에서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협력의 비밀
게임 이론의 수학적인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 그런 상호 호혜적인 협력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연에서도 맞대응 전략이 관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바이러스의 이타주의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행동은 순전히 유전적 선택의 결과이다.
우리는 게임 이론의 다른 함축도 역시 인간의 경험에 깊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종족 집단을 형성하려는 경향 때문에 집단의 다른 구성원과의 반복적인 상호작용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협력의 기회도 생겨나게 된다.
미래의 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해주면 두 집단이 상호 신뢰의 혜택을 누리도록 변화할 수 있다. 그것은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는 뜻일 수도 있다. 상호작용의 빈도를 높이는 것도 방법이다. 작은 집단에서는 같은 사람들이 서로 매일같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만나기 때문에 냉담한 만남이 더 흔한 대도시의 경우보다 더 쉽게 신뢰가 쌓이게 된다. 인구의 이동성이 늘어나면 상호작용의 지속성이 줄어들고, 따라서 협력의 동기도 줄어든다. 일시적인 이웃은 응지벽이 약하고 정말 "이웃 같은" 경우도 드물다.
상호작용의 지속성은 정부의 운영에도 관계가 있다. 카를 포퍼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정권이 책임과 권리를 존중하지 않거나, 심지어 정부의 정책이 좋지 않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때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제거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권을 종료시키려면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떠나는 정권은 뻔뻔하게 자기 이익을 챙기더라도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당은 장기적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정당의 존재가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상황을 막아줄 수 있다.
그러므로 안정적인 정당 구조를 가진 정치 시스템은 불안정한 정치 조직으로 구성된 경우보다 쉽게 부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카를 포퍼는 의회 의원들이 유권자들보다 정당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만든다는 이유로 정당 시스템을 "끔찍한" 것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에 의해서 정치 시스템이 남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신뢰성을 제거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스위스 행동학적 경제학자 에른스트 페어는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서로 만나지 않는 집단에서도 협동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을 실시했다.
투자를 하고 이익을 돌려줄 때마다 학생들을 섞어서 학생들이 상호 신뢰를 쌓을 기회를 없애버렸다. 그렇지만 (투자를 하지 않는) 변절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규칙을 만들면 협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할 때마다 수수료를 부과할 경우에도 선수들은 처벌을 받게 된다. 처벌의 위험이 없으면 협력의 수준은 낮았지만, 처벌 규정을 도입하면 협력은 급격하게 늘어난다.
모든 게임에서 장기적으로는 상호 협력이 가장 좋은 전략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화할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정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크로포트킨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세상은 에덴 동산과 거리가 멀다. 인간 본성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덕스럽다. 그리고 1대1 상호작용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복잡한 사회의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훨씬 더 정교한 게임 이론이 필요하다.
18. 파블로프의 승리 - 상호성이 우리에게 좋을까?
맞대응 규칙의 타협할 수 없는 상호성이 모세의 자식들에게는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문명사회의 기반이 될 수 있을까? 게임 이론은 홉스가 야만적이라고 두려워했고, 로크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연 상태를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처럼 보인다. 그것은 야만적인 것으로부터 선이 등장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러나 모든 공격에 대해서 타협할 수 없는 보복이라는 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게임 이론의 의미를 초보적 수준 이상으로 이해하려면 맞대응을 엄격하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장의 목적이다. 그것이 바로 이 장의 목적이다. 이 전략의 장점을 분명히 하고, 단점을 확인해볼 것이다. 게임 이론을 사회에 적용해서 그 결과를 살펴볼 것이다. 사회물리학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단순히 모델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두 가지를 중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똑같은 질문으로 돌아간다.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사고는 일어난다
맞대응 전략을 이겨낼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 세상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맞대응의 경우에 실수의 문제는 단순히 한 번의 잘못된 변절이 같은 것을 되돌려주도록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맞대응의 단순성은 똑같은 전략을 사용하는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양측 모두 서로 되받아치는 사이클에 빠지게 만든다.
그런 종류의 거동은 많은 문화와 사회에서 발생한다. 맞대응이 반드시 조화로운 세상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혼란과 혼동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그것이 최선의 전략도 아니다. 그런 사실은 액설로드의 토너먼트에서 선수들이 실수할 가능성이 있도록 해주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선수들은 가끔씩 자신들의 전략 대신 무작위적으로 반응을 선택한다. 오류의 가능성이 10퍼센트만 되더라도 맞대응 전략으로는 승자가 될 수 없다. 사실 맞대응 전략을 사용하는 선수는 두 가지 전략을 모두 쓰는 경우보다 똑같이 맞대응 전략을 사용하는 선수에게는 더 나쁜 결과를 얻게 된다. 가끔씩 저지르는 실수만으로도 아무런 이익이 없는 보복의 사이클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려면 맞대응 전략을 수정해야만 한다. 너그러운 맞대응 전략이라는 대안에서는 어느 정도 비율의 변절은 그냥 넘어간다. 회개하는 맞대응의 경우에는 자신의 변절에 뒤이은 상대방의 변절에 대해서는 보복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 하는 셈이다.
액설로드의 두 번째 토너먼트에서는 "잡음"이 1퍼센트일 경우, 너그러운 맞대응 전략은 다른 어떤것보다 뛰어나고, 회개 맞대응은 6위가 된다. 잡음의 수준이 높아지면 회개하는 맞대응이 너그러운 맞대응보다 나아진다.
이중 맞대응 전략은 두 번의 연속적인 변절에 대해서만 보복을 하는 전략이다. 한 번의 변절이 상대방의 단순한 실수(잡음)가 아니라 정말 나쁜 의도 때문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 전략은 두 번째 토너먼트에서는 24위를 했다. 첫 번째 토너먼트에 참가 했더라면 우승했을 것이다. 그 토너먼트에서 1위를 차지한 혼합 전략에는 (실수가 없더라도) 상호 보복에 묶여서 맞대응 전략을 못쓰게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게임에서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다윈의 알고리즘
완전히 한 바퀴를 돌고 나서는 선수들에게 전략의 성공률에 따라 새로운 전략을 사용하도록 한다. 그러면 더 성공적인 전략은 번성하고, 그렇지 못한 전략은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다윈적인 "적자생존" 시나리오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유전정보가 확산되는 것을 흉내낸 것이다. 번식에서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돌연변이는 더 많은 후손을 남겨서 "적응적" 돌연변이가 더 번성하게 만든다.
칼 지그문트는 1992년에 게임 이론에서 그런 실험을 함으로써 획기적인 결과를 얻었다.
초기에는 진화적 모델은 가장 성공적이었던 맞대응 전략에 압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초기에는 정말 그런 것처럼 보였다. 게임의 초기에는 변절자들이 우세하고, 협력적인 전략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전체의 평균적인 성과는 상호 변절에 의한 낮은 성과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적은 수의 맞대응 선수들이 빠르게 자라나서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와 함께 협력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평균 성과도 상승했다.
TFT가 늘어나는 것은 선수들 사이의 수많은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집단적 효과이다. 상호 변절은 결국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부 TFT 선수들은 상호 협력을 통해서 변절자들이 처음에 협력하려는 TFT 선수들을 착취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그러면 사정이 달라져서 과감한 TFT 집단과 협력하게 된다. 그런 집단은 협력이 전체로 확산시키는 씨앗이 된다.
그러나 TFT의 승리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협력의 문화가 형성되면, TFT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아킬레스 건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모의 계산에는 반드시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잡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TFT는 점차 더욱 관용적인 너그러운 맞대응으로 대체된다. 결국 GTFT만이 살아남게 된다.
노왁과 지그문트의 결론에 따르면, "맞대응은 협력을 향한 진화의 목표가 아니라 축이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집단에서 협력의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그런 목적이 달성되면 "더 부드러운" 협력 전략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실 GTFT까짇 가끔씩 실수에 의한 비생산적인 보복에 밀려나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협력적인 환겨ㅇ에서는 무조건적인 관용, 즉 완벽한 관용이 더 나은 전략이 된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협력하는 사회에서는 순진한 사람들을 악랄하게 착취하는 무조건적인 변절이 최선의 전략이다. 협력하는 사람은 변절하는 사람보다 더 잘하지만, 악랄한 변절자에게는 지극히 위험하다. 소수의 변절자들이 협력적인 문화를 파괴시킬 수도 있다. 맞대응 전략에서는 협력자에게 보상을 하고, 변절자는 심하게 대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준다.
게임 이론에서 TFT는 강력하게 협력을 요구하는 경찰력과도 같다. 언제나 변절에 대해서는 처벌하고 협력에 대한 착취를 절대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경찰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느 수준의 변절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일반적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적어도 어느 정도의 TFT 선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공정한 사회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1993년에 노왁과 지그문트는 TFT의 극단적인 "정의감"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초기의 진화적 게임에서는 선수들이 상대방의 직전 움직임에 따라 다음 움직임을 결정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나 기회주의적인 입장에서 이기면 남고, 지면 바꾸는 파블로프 전략은 구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직전 움직임까지도 고려한다.
초기의 전략을 파블로프와 비교해본 연구자들은 파블로프의 기회주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블로프는 변절자에게는 성적이 좋지 않고, TFT처럼 변절하는 사람들에게 "침투해서" 협력을 확산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협력의 정신에 젖어 있는 (약간의 잡음이 있는) 사회에서는 파블로프가 번성한다. 노왁과 지그문트는 그런 환경에서는 파블로프가 GTFT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블로프와 GTFT는 모두 TFT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오류를 수용한다. 그러나 파블로프에게는 다른 장점이 있다. 모델에서 무작위적으로 새로운 형태로 돌연변이를 허용하는 전략을 허용하면, GTFT는 TFT에서 일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더욱 무조건적으로 협력하는 전략 쪽으로 점진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파블로프는 완고하다. 우연히 일방적인 변절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계속해서 그렇게 한다. 양의 가죽을 쓴 늑대와 같은 셈이다. TFT의 확실한 권위 아래서 협동이 규범으로 된 경우에는 잘 행동하지만, TFT 경찰이 무조건적 협력자로 변환되면 협력하는 사람들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파블로프적 사회는 더 이상 "당신처럼 한다"가 아니라 "절대 기회를 주지 않는다"를 추구하게 된다.
파블로프가 승리하는 모의계산에서는 놀라운 역사가 드러난다. 양쪽 선수 모두의 직전 움직임을 근거로 다음 움직임을 선택하는 전략을 사용하기 때문에 초기의 모의계산에서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이 나타난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시간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에서 필연성이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개한 역사에서는 초기에는 협력을 하려고 시도하지만, 한동안의 혼란을 거치면서 그런 노력은 실패하고, 무조건적 변절자가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한다. 대략 9만2,000번 정도가 지나면 협력자가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승리는 오래가지 못하고 변절자에게 무너져버린다. 노왁과 지그문트는 전략이 TFT에서 GTFT로 전환되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 쉽게 용서하는 전략이 "부드러운" 국가를 만들지만 그런 국가는 악한 변절자에 의해서 무너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변절자들이 그렇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절을 경험할 때까지는 협력에 대해서 협력으로 대응하는 냉혹한 방아쇠라고 부르는 것이 지배적인 전략이 된다. 냉혹한 방아쇠는 무조건적으로 변절한다.
약 22만 회가 지나면 다시 협력하는 과정이 나타난다. 초기의 조정 기간이 지나면 이번의 협력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런 변화도 역시 TFT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GTFT 선수들이 활약하다가 결국에는 파블로프 선수들이나 파블로프와 가까운 선수들이 지배하게 된다. 그런 집단은 협력적이지만 기회주의적일 가능성이 높고, 변절자들의 공격에 대해서 훨씬 더 잘 견딘다. 그렇게 살기 나쁜 곳은 아니지만, 순진한 사람들이 겉으로만 "점잖은" 파블로프들에게 착취 당할 위험에서 완전히 안전한 곳은 아니다.
이런 모든 것에서 인류 역사의 비유를 쉽게 찾을 수가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은 필연이라고 믿었다. 게임 이론은 아무것도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특별한 방법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현재 진화의 경로 중에서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마법의 카펫
세계사는 경계선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일이 반복되면서 만들어진 조각보와 같다.
죄수 딜레마가 국가나 국제적 경계가 움직이는 방법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계속 게임 이론 관련된 내용인데 이건 책을 직접 봐야할듯 정리 불가>
19. 낙원을 향하여 - 천국, 지옥, 사회 계획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낙원은 무엇일까? 어떤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인가?
마지막 정리를 하는 장이며 이런 내용이 들어 있고 마무리를 하는 장이라 요약은 패스합니다.
앞의 내용을 이해하면 아직은 부족한 사회물리학이지만 우리가 어떤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마무리인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