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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메이션 #10 엔트로피와 그 도깨비들

 

제 9 장 엔트로피와 그 도깨비들

섞인 것들을 휘저어 나눌 수 없어요

 

생각은 사건의 확률에 개입하며,
따라서 결국엔 엔트로피에 개입한다. 
데이비드 왓슨(1930)

 

 

아무도 '엔트로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고 말하면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는 그런 단어 중 하나였다. 벨연구소에서는 섀넌이 폰 노이만에게서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가져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폰 노이만은 섀넌에게 엔트로피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논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조언한 바 있었다.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럴듯했다. 처음에 엔트로피는 그 본래 의미의 반대로 이해되었다. 엔트로피는 여전히 정의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두루뭉술하게 정의했다.

 

1. 물질의 열역학적 상태를 결정하는 정량적 요소 중 하나를 가리키는 명칭

 

엔트로피라는 말은 1865년 열역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클라우지우스가 만든 것이었다. 클라우지우스는 자신이 발견한 특정한 양에 이름을 붙여야 했다. 에너지는 아니지만 에너지와 관련된 양이었다.

 

증기엔진과 함께 부상한 열역학은 처음에는 "증기엔진에 대한 이론적 연구"에 불과했다. 열 혹은 에너지를 일로 전환하는 문제만 다뤘던 것이다. 클라우지우스는 열이 엔진을 움직일 때 실제로는 열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열은 단지 뜨거운 대상에서 차가운 대상으로 옮겨갈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열은 일을 했다. 

 

이는 사디 카르노가 계속 언급했듯이 물레방아와 비슷했다. 물은 위에서 내려와 아래로 떨어졌고, 늘거나 줄지 않지만 내려가는 동안 일을 했다. 카르노에게 열은 바로 그런 물질이었다. 일을 산출하는 열역학계의 능력은 열 자체가 아니라 온도 차이에 달려 있었다. 뜨거운 돌을 찬물에 넣으면 일을 할 수 있지만, (돌과 물을 합친) 계 안의 전체 열은 일정하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돌과 물은 온도가 같아진다. 닫힌계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든 간에 모든 것이 같은 온도에 이르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클라우지우스가 측정학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에너지의 무효성이었다. 맥스웰은 처음에 엔트로피를 에너지의 아류라고 보았다. 일에 쓸수 있는 에너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하면서 열역학에 완전히 다른 척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한 종류나 에너지의 양이 아니었다. 엔트로피는 클라우지우스가 말한 대로 에너지의 '무효성'이었다. 개념이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온도, 부피, 압력처럼 측정 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엔트로피는 토템처럼 신성한 개념이 되었다. 열역학의 "법칙들"은 엔트로피로 깔끔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제1법칙 :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다.

제2법칙 : 우주의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한다.

 

열역학 법칙은 우주적이고 운명적인 법칙이었다. 우주는 쇠약해지고 있다. 이는 퇴행성 일방통행로이다. 엔트로피가 최대인 최후의 상태는 우리의 운명이다. 대중들에게 제2법칙을 각인시킨 사람은 윌리엄 톰슨이었다. "비록 기계적 에너지는 '파괴할 수 없지만' 에너지의 소산은 우주적 측면에서 볼 때 열의 점진적 증가아 확산, 운동의 정지, 물질세계에서 잠재적 에너지의 소진을 낳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우주는 정지와 죽음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 열적 죽음은 차갑지 않다. 열적 죽음은 미지근하고 음산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톰슨은 '소산'이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에너지는 소실되는 것이 아니라 소산된다. 소산 에너지는 존재하지만 쓸모가 없다. 하지만 엔트로피의 본질적 속성으로 혼란 그 자체(무질서)에 주목한 것은 맥스웰이었다. 무질서는 이상하게도 반물리학적으로 보였다. 

 

이것은 방정식에 지식이나 지성 혹은 판단 같은 것들이 반드시 있다는 뜻이었다. 맥스웰의 말을 들어보자. "에너지의 소산이라는 개념은 지식의 범위에 좌우된다. 유효 에너지는 우리가 열이라고 부르는 분자의 혼란스러운 요동에서 나오는 에너지처럼 원하는 대로 이용하고 유도할 수 없는 에너지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혹은 아는 것이 정의의 일부가 된다. 매개체나 관찰자를 빼놓고는, 즉 지성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질서와 무질서에 대해 논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혼란은 (상관 개념인 질서와 마찬가지로) 원래 물질적인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갈겨쓴 비망록은 문맹이나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글쓴이에게는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이를 읽을 수 있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불가분하게 혼란스러워 보인다. 마찬가지로 소산 에너지라는 개념은 자연의 에너지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돌릴 수 있거나 모든 분자의 운동을 추적하고 적시에 포착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질서는 관찰자의 눈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것이다. 질서와 혼란은 수학자가 정의하거나 측정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그럴까? 무질서가 엔트로피에 해당한다면 결국 과학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열역학의 선구자들은 이상적인 사례로 기체 상자를 생각했다. 원자로 구성된 기체는 절대로 단순하거나 고요하지 않다. 기체는 동요하는 입자들의 거대한 앙상블이다.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았고 가설로 존재했지만, 클라우지우스, 켈빈, 맥스웰, 볼츠만, 깁스 같은 이론가들은 유체가 원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혼합, 격렬함, 지속적 운동 같은 결과들을 계산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이런 운동이 열이 된다고 생각했다. 열은 물질이나 유체 혹은 "열소"가 아니라 분자의 운동일 뿐이라는 얘기였다.

 

분자는 개별적으로 뉴턴 법칙을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이론상 분자의 모든 행동과 충돌을 측정하고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측정하고 계산하기에는 너무 수가 많았다. 여기서 확률이 개입한다. 통계역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은 미시적 세부사항과 거시적 행동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기체 상자가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쪽 기체가 다른 쪽 기체보다 온도가 높다. 말하자면 분자가 더 빠르게 움직이면서 더 큰 에너지를 낸다. 칸막이가 제거되자마자 분자들이 섞이기 시작한다. 빠른 분자가 느린 분자와 충돌하고 에너지가 교환되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기체가 균일한 온도에 이른다. 수수께끼는 여기에 있다. 왜 이 과정을 되돌릴 수 없을까? 뉴턴의 운동방정식에서 시간은 플러스 부호나 마이너스 부호를 가질 수 있다. 수학은 양방향으로 유효하게 작용한다. 현실에서 과거와 미래는 그렇게 쉽게 교환될 수 없다.

 

레옹 브릴루앙(1949)은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흘러갈뿐,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물리학자는 이런 사실에 맞닥뜨리면 크게 동요한다." 맥스웰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이 순전히 역학계이고, 모든 입자의 운동을 동시에 정확하게 되돌릴 수 있다면 모든 것들이 처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 빗방울들은 모여 구름으로 올라가고 ... 사람은 우리가 탄생의 순간으로 되돌려질 때까지 자신의 친구들이 무덤에서 요람으로 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요점은 미시적 측면에서 개별 분자의 운동을 관찰하면 운동의 행태는 시간을 앞으로 돌리든 뒤로 돌리든 같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필름을 거꾸로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기체 상자를 하나의 총체로 보면 혼합 과정은 통계적으로 일방통행로가 된다. 영원히 유체를 관찰한다 해도 저절로 한쪽에는 뜨거운 분자, 다른 쪽에는 차가운 분자로 나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갈 뿐,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과정은 한 방향으로만 이뤄진다. 확률이 그 이유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모든 비가역적 과정을 똑같은 방식으로 설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물리학자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 자체가 , 혹은 리처드 파이만이 곧잘 이야기했듯 "삶의 우연들"에 좌우된다. "비가역성은 삶의 보편적 우연들에서 기인한다." 상자 안의 기체가 분리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단지 극히 확률이 낮을 뿐이다. 따라서 제2법칙은 단지 확률적이다. 통계적으로 모든 것은 최대 엔트로피를 향해 가는 경향을 지닌다.

 

그럼에도 맥스웰이 썼듯 제2법칙을 과학의 기둥으로 세우기에는 확률만으로 충분하다.

교훈 : 열역학 제2법칙은 큰 컵에 든 물을 바다에 쏟으면 다시는 같은 물을 회수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정도의 진실을 갖는다.

 

외부의 도움 없이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열이 이동하는 것이 통계적으로 불가능하듯, (외부의 도움 없이) 무질서에서 질서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통계적으로 불가능하다. 근본적으로 둘 다 오직 통계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계가 배열되는 모든 방식을 세어보면 무질서한 형태가 질서 정연한 형태보다 훨씬 많다. 분자가 모두 뒤엉킨 배열 혹은 "상태"는 많으며, 깔끔하게 정돈된 배열이나 상태는 드물다. 질서 정연한 상태는 확률도 낮고 엔트로피도 낮다. 앨런 튜링은 엉뚱하게도 "분필을 날려서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오는 대사 한 줄을 칠판에 쓰는 확률"을 가리키는 수로 정의되는 N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물리학자들은 미시상태와 거시상태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거시상태에서 기체는 전부 상자의 위쪽 절반에 몰려 있을 수도 있다. 이에 해당하는 미시상태들은 거시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개별 분자들 각각의 위치와 속도의 구성 전체이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확률의 물리적 등가물이 된다. 특정한 거시상태의 엔트로피는 가능한 미시상태의 수의 로그이다. 따라서 제2법칙은 확률이 낮은(질서 정연한) 거시상태에서 높은(무질서한) 거시상태로 이동하려는 우주의 경향이다.

 

그럼에도 단순한 확률의 문제에 물리학의 너무 많은 것들을 건다는 것은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물리학에는 기체가 스스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으로 나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이는 오직 우연과 통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까?

 

맥스웰은 사고실험을 통해 이 수수께끼를 설명했다. 맥스웰은 기체 상자를 나누는 칸막이에 난 작은 구멍으로 감시하는 "유한한 존재"를 상상해보라고 제안한다. 이 존재는 다가오는 분자를 볼 수 있고, 빠른지 혹은 느린지 구분할 수 있으며, 통과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즉, 확률을 바꿀 수 있다. 빠른 것과 느린 것을 나눔으로써 한쪽을 뜨겁게, 다른 쪽을 차갑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행해진 것은 아니며 오직 매우 눈매가 좋고 솜씨가 좋은 지성이 활용되었을 뿐이다." 이 존재는 일반적인 확률을 거스른다. 대개의 경우 사물들은 서로 뒤섞인다. 사물들을 분류하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이 사고실험은 "맥스웰의 도깨비"라고 불린다. 톰슨은 이 작은 친구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이 도깨비는 오직 대단히 작고 민첩하다는 점만 빼곤 실제 살아 있는 동물들과 같다." 이 도깨비는 밀폐된 항아리 혹은 쇠막대기의 한쪽을 점점 뜨겁게, 다른 쪽을 아주 차갑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세면기에서 이동하는 분자의 에너지를 유도하여 물을 높은 곳으로 역류시키고 비교적 차가운 상태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소금용액에서 물의 일부분에만 소금을 농축하여 나머지 공간에 깨끗한 물을 남기거나, 두 가지 기체가 섞인 혼합체 속 분자들을 "분류"해 자연스러운 확산 과정을 되돌림으로써 두 가지 기체를 용기 안에서 분리할 수 있습니다.

 

<월간 대중과학>의 한 기자는 톰슨의 말이 터무니 없다고 보고는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온 세상이 이 말도 안 되는 극소 도깨비들의 무한한 무리들로 가득하다고 가정해야 한다. 케임브리지의 맥스웰과 그래스고의 톰슨 같은 사람들이 작은 도깨비들이 원자를 이리저리 치고 찬다는 식의 조잡한 가설적인 공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렇게 묻게 된다. '다음은 뭘까?'" 허나 이는 요점을 빗나간 얘기였다. 맥스웰은 자신의 도깨비를 설명의 도구로 쓸때를 제외하고는 실재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크고 느리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 즉 제2법칙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통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도깨비는 본다. 분자 수준에서 제2법칙은 어딘가에서는 순전한 우연에 의해 항상 위배되고 있다. 도깨비는 우연을 목적으로 대체하고, 정보를 이용하여 엔트로피를 줄인다. 맥스웰로서는 자신의 도깨비가 그토록 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인기를 얻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엔트로피 법칙의 일부를 역사이론에 접목하려던 헨리 애덤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작동시키는 클러크 맥스웰의 도깨비는 대통령이 되어야 마땅해." 이 도깨비는 물리학의 세계에서 정보의 세계로 가는 입구를(처음에는 마법의 관문이었다) 지켰다.

 

 

과학자들은 이 도깨비의 힘을 동경했다. 이 도깨비는 물리학 잡지에 흥미를 돋우며 만화들에 친숙한 캐릭터로 등장했다. 확실히 도깨비는 상상의 산물이었지만, 원자 자체도 허깨비처럼 보였으며, 따라서 도깨비는 원자를 길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도깨비는 이제는 확고해 보이는 자연법칙들을 거슬렀다. 그것은 한 번에 하나씩 분자라는 열쇠를 따는 도둑이었다. 앙리 푸앵카레는 이 도깨비가 "극도로 민감한 감각을 지녔으며" "우주의 경로를 되돌릴 수 있다"라고 썼다. 이는 인간이 꿈꾸던 바로 그 일이 아니었던가?

 

20세기 초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개선되는 현미경을 통해 세포막의 활발한 분류 과정을 관찰했다. 이런 관찰을 통해 살아 있는 세포가 펌프, 필터, 공장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포는 아주 작은 규모에서 목적을 가진 과정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혹은 무엇이 제어하는 것일까? 생명 자체가 조직하는 힘으로 여겨졌다.

 

영국의 생물학자 제임스 존스톤은 이렇게 썼다. "이제 우리는 과학에 도깨비론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물리학에서 개별 분자들은 우리의 통제권 밖에 남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개별 분자들의 운동과 경로는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난장판'이다. 물리학은 통계적 '평균' 속도만을 고려한다." 물리학의 현상들이 비가역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으며, "따라서 최근 과학에서 맥스웰의 도깨비가 있을 자리는 없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떨까? 생리학은 어떨까? 존스톤은 생명의 과정들이 '가역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유기체가 본디 비조직적인 개별 분자의 운동을 '제어할 수 있다는'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인간의 활동 대부분이 자연적 행위자들과 에너지가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경로로 이 자연력과 에너지를 '유도'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아직 원시 유기체 혹은 심지어 고등 유기체의 몸에 있는 조직 요소들이 생리-화학적 과정을 유도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생명이 그토록 신비한 것이라면, 어쩌면 맥스웰의 도깨비 역시 단순히 만화 같은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레오 실라르드가 맥스웰의 도깨비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아주 젊은 헝가리 물리학자였던 실라르드는 나중에 전자현미경을 구상하고 우연찮게 핵 연쇄 반응을 고안한 사람이었다. 유명한 스승 중 한 명이었던 아인슈타인이 삼촌 같은 마음에서 특허청에서 유급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1920년대에 실라르드는 분자의 지속적인 요동을 열역학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원래 요동은 잠깐 동안 상류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평균에서 어긋났다. 사람들은 자연히 이렇게 질문했다. 요동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떨까?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이런 생각은 일종의 영구 운동기관, 즉 괴짜와 행상인들의 성배인 '영구기관'으로 이어졌다. 달리 표현하면 이런 질문이었다. "왜 우리는 모든 열을 이용할 수 없을까?"

 

이런 의문은 맥스웰의 도깨비가 낳은 또 다른 역설이기도 했다. 닫힌계에서 빠른 분자만 모으고 느린 분자를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도깨비는 끊임없이 재생되는 유용한 에너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상상속의 도깨비가 아니라 다른 어떤 "지적 존재"라면 어떨까? 이를테면 실험물리학자라면? 실라르드는 "실험물리학자를 자연의 기존 상태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얻는 일종의 신적 존재로 본다면" 영구 운동 기관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라르드는 자신의 사고실험에 대해 살아 있는 도깨비 같은 것, 이를테면 뇌 같은 것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고 못 박았다. 생물학은 그 자체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신경계의 존재 자체가 지속적인 에너지의 소산에 달려 있다."(이 말을 간략하게 재구성하면 "사고는 엔트로피를 생성한다.") 대신 유체 실린더 안에서 피스톤을 가동하고, 모델 열역학계에 개입하는 "무생물 기구"를 제안했다. 실라르드는 이 기구가 사실상 "일종의 기억력"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라르드는 이런 영구 운동기관조차 실패할 것임을 증명했다. 무엇이 함정이었을까? 간단하게 말해서 정보는 공짜가 아니다. 맥스웰과 톰슨 그리고 다른 학자들은 도깨비의 눈앞에서 오가는 분자들의 속도와 궤도에 대한 지식이 거저 주어지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말했다. 이런 정보의 비용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고려할 수 없었다. 더 단순한 시대에 살았던 이들 과학자들은 정보가 마치 평행우주 혹은 아스트랄계에 속한 것처럼 여겼다. 자신들이 계산하고자 했던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힘의 우주에 정보의 행태가 연결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보는 물리적이다. 맥스웰의 도깨비가 그 연결고리를 만든다. 이 도깨비는 한 번에 한 입자씩 정보와 에너지 사이의 변환을 실행한다. 아직 '정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던 실라르드는 각각의 측정과 기억을 정확히 이해하면 변환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국 계산해낸다. 계산 결과 각 정보 단위는 구체적으로 klog2 단위에 해당하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져왔다. 도깨비가 한 입자와 다른 입자 사이에서 선택을 할 때마다 1비트의 정보가 소요딘다.

 

한 번의 주기가 끝나서 기억을 지워야 할 때 정보가 회수된다. 이 사실을 적절하게 이해하는 것이 영구 운동의 역설을 제거하고, 우주를 조화롭게 되돌리고, "제2법칙과의 조화를 복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듯 실라르드는 엔트로피를 정보로 보는 섀넌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섀넌 이야기를 해보자. 한참 후 섀넌은 이렇게 밝혔다. "제 생각에 실제로 실라르드는 이런 생각을 했고, 이에 대해 폰 노이만에게 이야기했으며, 폰 노이만이 다시 위너에게 이야기햇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섀넌은 엔트로피에 대한 수학을 재발명했다.

 

물리학자에게 엔트로피는 물리계의 상태, 즉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상태 중 하나의 상태에 대한 불확실성의 척도이다. 이 미시상태들의 확률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S = - Σpi log p1로 쓴다.

 

정보이론가에게 엔트로피는 메시지, 즉 통신원이 생성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메시지 중 하나의 메시지에 대한 불확실성의 척도이다. 가능한 메시지들이 확률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섀넌은 H = - Σpi log p1로 쓴다.

 

이는 단지 형식의 일치, 다시 말해 자연은 비슷한 문제에 비슷한 해답을 제시한다는 형식의 일치는 아니었다. 모두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기체 상자의 엔트로피를 줄이고, 효율적인 일을 하려면 정보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메시지는 가능한 메시지이 총체에서 엔트로피를 줄인다. 역학계로 말하자면 위상공간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것이 섀넌의 생각이었다. 위너는 조금 달랐다. 처음에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던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놓고 보면 동료와 경쟁자들이 엔트로피 공식에 반대 부호를 넣은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섀넌은 정보를 엔트로피와 동일시했지만 위너는 정보를 '네거티브 엔트로피'라고 말했다. 위너에 따르면 정보는 질서를 의미하지만 질서 정연한 것이 반드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다. 손수 그 차이에 대해 지적한 섀넌은 차이라는 게 일종의 "수학적 말장난"이라며 과소평가했다. 두 사람이 수치적 결론은 동일하다는 얘기였다. 섀넌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집합에서 선택이 이루어질 때 얼마나 많은 정보가 '생성'되는지를 생각합니다. 집합이 클수록 '더 많은' 정보가 생성됩니다. 반면 선생님은 집합이 더 큰 경우 불확실성이 더 높다는 것은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더 적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더 적은' 정보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H는 의외성의 척도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H는 미지의 메시지를 추측하는 데 필요한 예-아니요 질문의 평균 횟수이다. 섀넌이 옳았지만(섀넌의 접근법만큼은 후대의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에 의해 꽃을 피웠다) 한동안 혼란이 지속되었다. 질서와 무질서는 여전히 약간의 정리가 필요했다.

 

 

우리는 모두 맥스웰의 도깨비처럼 행동한다. 유기체는 조직한다. 진지한 물리학자들이 이 이상한 상상의 산물을 살려둔 이유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상에 있다. 우리는 우편물을 분류하고, 모래성을 쌓고, 낱말풀이를 하고, 밀과 겨를 분리하고, 체스 말을 재배열하고, 우표를 수집하고, 책을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하고, 대칭을 만들고, 소네트와 소나타를 쓰고, 방을 정돈한다.

 

지능을 활용하는 한 이 모든 일들을 하는 데는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살아있는 존재)는 구조를 퍼트린다. 우리는 평형상태로 가는 흐름을 방해한다. 이런 과정을 열역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불합리하지만 우리가 조금씩, 점차로 엔트로피를 줄인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한 번에 하나씩 분자를 분별하고, 빠른 것과 느린 것을 구분하며, 자신의 작은 관문을 지키는 원래의 도깨비는 때로 "초지능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 유기체와 비교하면 백치천재에 불과하다. 생물은 주위 환경의 무질서를 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뼈와 살, 소포와 막, 껍질과 갑각, 잎과 꽃, 순환계와 대사 경로에서 보듯) 경이로운 패턴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로 엔트로피를 줄이는 것이 이 우주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비현실적인 존재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슈뢰딩거는 쉽게 답할 수 없는 거대한 물음 중 하나에 답할 시간이 왔다고 판단하여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강연했다. 강연은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일부 사실과 이론에 대한 지식이 간접적이고 불완전하여 자신을 바보로 만들 위험이 있더라도 사실과 이론의 종합에 나서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연 내용을 토대로 만든 작은 책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새로운 발견도 새로운 이야기도 없었지만, 책은 유전학과 생화학을 결합한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신생 학문을 위한 토대를 놓았다. 이 학문의 창시자 중 한 명은 나중에 이렇게 썼다. "사태가 진정되면서 슈뢰딩거의 책은 분자생물학이라는 유산을 남긴 생물학 혁명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같은 책이 되었다." 생물학자들로서는 이제껏 읽어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생물학이 풀어야 할 거대한 문제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슈뢰딩거는 자신이 생물학적 안정성의 수수께끼라고 부른 문제에서 출발했다. 생명체의 구조는 확률과 요동이라는 변덕스러움이 내재된 기체 상자와는 현격하게 상반되고,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을 완전히 무시하며, 놀랄 만큼 영속적이다. 이 구조는 유기체의 삶 속에서 그리고 유전을 통해 세대를 거쳐 지속된다. 슈뢰딩거는 이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하나의 물질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요?" 슈뢰딩거는 이렇게 질문하고는 (성장, 섭식, 번식 같은) 통상적인 의견들을 건너뛰고 가능한 한 단순하게 대답했다. "비슷한 환경에서 무생물이 '계속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움직이거나 환경과 물질을 교환하는 등 '어떤 일'을 계속할 때 우리는 살아 있다고 합니다." 

 

대개 물질은 멈추게 된다. 기체 상자는 균일한 온도에 이른다. 화학적 시스템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활기 없는 불활성의 물질 덩어리로 쇠퇴하고" 최대 엔트로피에 이르면서 제2법칙을 따른다. 반면 생물은 어떻게든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노버트 위너가 <인공두뇌학>에서 다룬 게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위너는 효소가 "준안정적인", 다시 말해서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거나 불안정하게 안정된 맥스웰의 도깨비일지 모른다고 썼다. "효소의 안정적 상태는 저하된 것이며, 유기체의 안정적 상태는 죽은 것이다."

 

슈뢰딩거는 제2법칙을 잠시 거르기 때문에 혹은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생명체가 "그토록 불가사의하게 보인다"라고 생각했다. 영구 운동을 하는 척하는 유기체의 능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초자연적 '생명력'을 믿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슈뢰딩거는 '활력'이나 생명력 같은 개념들과 유기체가 "에너지를 먹고 산다"라는 대중적인 인식을 비웃었다. 에너지와 물질은 단지 동전의 양면이며, 어쨌든 하나의 칼로리는 다른 칼로리와 똑같다는 말도 틀렸다고 말했다.

 

즉, 유기체는 네거티브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슈뢰딩거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덜 역석절으로 말하자면, 신진대사에서 본질적인 것은 유기체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생성하는 모든 엔트로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기체는 주위에서 질서를 빨아들인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은 구조의 뷔페로 식사를 한다. 동물들은 잘 조직된 상태의 물질인 유기화합물을 먹고 "상당히 분해된 형태로, 그러나 식물들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완전히 분해되지는 않은 형태로" 반환한다. 

 

한편 식물은 햇빛으로부터 에너지뿐만 아니라 네거티브 엔트로피까지 받아들인다. 에너지를 놓고 보면 다소 엄격하게 회계를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질서를 놓고 보면 계산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질서와 혼돈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더욱 까다롭고, 관련 정의들은 자기 자신만의 피드백 고리에 빠지기 때문이다.

 

슈뢰딩거는 생명체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질서를 저장하고 존속시키는 방법에서 배울 것이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생물학자들은 현미경으로 세포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생식세포, 즉 정자 세포와 난자 세포를 볼 수 있었다. 생식세포 안에는 염색체라는 막대 모양의 섬유조직이 있었다. 한 쌍씩 배열된 염색체는 종별로 일정한 수가 존재하며 유전적 특징들을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슈뢰딩거가 썼듯 염색체는 한편으로 유기체의 "패턴"을 지녔다. "이 염색체 혹은 어쩌면 우리가 현미경을 통해 실제로 염색체로 보는 것의 중축 골격 섬유조직에, 개체가 앞으로 거칠 발생의 전체 패턴이 일종의 암호문으로 들어 있습니다." 슈뢰딩거는 유기체의 모든 단일 세포에 "암호문의 완전한 (이중) 사본이 들어 있다"라는 사실은 경이롭고 신비로우며,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확실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슈뢰딩거는 이를 모든 병사가 지휘관이 세운 계획의 세부사항을 샅샅이 꿰고 있는 군대에 비유했다.

 

이 세부사항은 유기체의 수많은 개별적 '속성들'이었다. 하지만 이 속성이 무엇을 수반하는지는 여전히 매우 불명확했다. (슈뢰딩거는 "본질적으로 통일체, 즉 하나의 '전체'인 유기체의 패턴을 개별적 '속성들'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아 보인다"라고 생각했다) 파란색이거나 갈색인 동물의 눈 색깔은 속성일 수 있지만 개체 사이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유용하며, 이 차이는 염색체로 전달되는 어떤 것에 의해 제어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슈뢰딩거는 "명확한 유전적 특성을 담은 가상의 매개체"로 '유전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당시까지 이 가상의 유전자를 눈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는 시간 문제였다. 현미경으로 유전자의 크기를 추정할 수 있었다. 추정에 따르면 유전자는 100~150원자거리 크기에 1,000개 원자 미만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존재들은 어떤 식으로든 파리나 진달래, 쥐나 인간 같은 생명체의 전체 패턴을 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패턴을 4차원적 대상으로, 배아에서 성체에 이르는 모든 단계, 즉 개체 발생의 전반에 걸친 유기체의 구조로서 이해해야 한다.

 

유전자의 분자구조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면 가장 조직화된 물질의 형태인 결정체를 살피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상대적으로 영속적인 결정 상태의 고체는 아주 작은 '종정'에서 시작하여 점점 큰 구조를 구축해나갔다. 양자역학이 이런 결합 과정에 개입하는 힘들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무언가 빠진 것을 느꼈다. "같은 구조가 3차원적으로 반복되는 비교적 단순한 방식으로" 형성된 결정체는 지나치게 질서 정연했다. 제아무리 정교하게 보이는 결정체라 하더라도 이를 구성하는 원자는 몇 종류에 불과했다. 슈뢰딩거는 생명은 예측 가능한 반복이 없는 구조로, 고도의 복잡성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는 "비주기적 결정체"라는 용어를 내놓는다. "우리는 유전자 혹은 전체 염색체 섬유가 비주기적 고체라고 믿는다." 이것이 슈뢰딩거의 가설이었다. 슈뢰딩거는 주기적인 구조와 비주기적인 구조 사이의 차이에서 나오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강조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두 구조의 차이는 같은 패턴이 일정한 주기로 계속 반복되는 평범한 벽지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정교하고 일관되며 '의미 있는' 디자인을 보여주는 가령 라파엘 직물 같은 명품 자수 사이의 차이와 같습니다.

 

당시 레옹 브릴루앙 같은 일부 열렬한 독자들은 슈뢰딩거가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완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자기 글에ㅓ 얼마나 슈뢰딩거에게 설득 되었는지를 밝혔던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브릴루앙은 정교하지만 생명이 없는 구조인 결정체와의 비교에 매료됐다. 

 

결정체는 어느 정도 자기 복구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압력을 받으면 평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원자들이 새로운 위치로 이동했다. 열역학으로, 그리고 이제는 양자역학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유기체의 자기 복구 능력은 얼마나 더 뛰어날까? "살아 있는 유기체는 상처를 치료하고 질병을 치유하며 어떤 사고로 손상된 구조를 대부분 재생할 수 있다. 가장 놀랍고도 예상할 수 없는 행태가 바로 이런 점이다." 브릴루앙은 또한 슈뢰딩거를 따라 엔트로피를 활용하여 최소 규모와 최대 규모를 연결했다. 

 

지구는 닫힌계가 아니며, 생명은 이 지구 시스템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에너지와 네거티브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 순환주기는 이렇다. 먼저 불안정한 평형상태(연료, 음식, 폭포 등)가 생성된다. 그런 다음 모든 생명체가 이 비축물들을 사용한다.

 

살아 있는 생물은 통상적인 엔트로피 계산을 당혹스럽게 한다.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정보도 마찬가지이다. 브릴루앙의 말을 들어보자. "<뉴욕 타임스> 한 부와 인공두뇌학에 대한 책 그리고 동일한 무게의 폐지를 예로 들어보자. 이것들은 엔트로피가 같을까?" 난로에 넣을 것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여러분이 독자라면 그렇지 않다. 잉크의 배열에는 엔트로피가 존재한다.

 

브릴루앙은 그런 점에서 물리학자 스스로가 네거티브 엔트로피를 정보로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물리학자는 관찰과 측정을 통해 과학적 법칙을 도출하고, 사람들은 이 법칙을 가지고 자연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정말 희한한 구조를 가진 기계들을 만든다. 브릴루앙이 이 글을 쓴 때는 1950년으로 IBM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이것이 맥스웰 도깨비의 끝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문제는 엄밀히 말해 해결되지 못했고, 도깨비는 열역학과 동떨어진 영역, 즉 기계적 연산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도 이루지 못하고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맥스웰의 도깨비는 62세의 나이로(실라르드의 논문이 등장했을 때) 사망했지만, 여전히 들떠 있는 사랑스러운 유령으로 물리학의 성채들에 출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