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좋아하는 책들

#12 부의 기원 물리적 기술 : 석기에서 우주선으로

 

11. 물리적 기술 : 석기에서 우주선으로

 

도구를 만드는 지식이 미래 세대에게 자연적인 방법(유전자를 통한 기억)이 아닌 문화적인 방법으로 전달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진화가 육체의 범위를 벗어나 사회 문화에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기술이 태동되는 순간이다.

 

영화에서 큐브릭의 의도는 명료하다. 인간이 도구를 만들고 그 제조 기술을 문화적으로 전달하게 되면서 인간의 진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오늘날 우주선을 포함한 많은 현대 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인간의 탄생

경제는 두 가지 요소에 달려 있다.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 물리적 기술과 그러한 재화를 생산하고 거래를 원할히 하도록 사람들을 유인하는 사회적 기술이다. 

 

초기 인간의 도구 제작은 초보적인 논리적 추론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강한 돌로 연한 돌을 치면 연한 돌이 깨진다는 등의 추리를 바탕으로 강도가 다른 여러 돌을 이용하여 실험하였을 것이다. 실험에서 성공하면 "이런 종류의 돌이 도끼를 만드는 데 적합하다"는 등의 법칙이 성립하게 된다. 

 

이 법칙은 그 후 다른 사람 혹은 후대에 전수되어 다시 실험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은 기술의 사회적 확산은 인간의 물리적 기술 능력의 발달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확산 과정에서 각각의 세대는 전 세대의 성공과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 온 것이다. 도구의 발전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 가속화되어 왔다는 것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물리적 기술과 우주

현대의 기술도 옛날의 기술 진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각기 다른 기술 간의 관계는 종의 분화 과정과 유사하다. 

 

물리적 기술은 물질, 에너지 및 정보를 어떠한 목적을 위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방법과 디자인이다.

 

예를 들어 유인원 래리가 몇 개의 돌(물질)에 약간의 힘을 들여(에너지) 조각을 내고 그것으로 동물의 뼈를 자를 수 있는 손도끼를 만든다(목적). 혹은 프로그래머가 자판기 식품을 먹고 그의 뇌에 영향을 보급한 다음 컴퓨터에 전기를 연결하고(에너지) 소프트웨어 정보를 활용(정보)하여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목적) 비디오 게임을 만든다(디자인).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물리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기술은 유형의 제품(도끼, 컴퓨터 프로그램 등)을 만들고 어떤 기술은 서비스를 창출한다. 유형의 제품과 같이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도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가 필요하다. 안마는 에너지(안마사의 힘)를 일정한 동작으로 전환하여(디자인) 고객의 근육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다(목적).

 

물리적 기술 그 자체는 제품(도끼, 소프트웨어, 마시지 등)이 아니라 그러한 제품을 만들기 위한 디자인이자 지침 혹은 방법이다. 물리적 기술은 마치 제품을 만드는 절차, 방법 등을 설명하는 지침서와 같다. 

 

예를 들어, 돌도끼 제조 지침서에는 완성된 도끼의 그림, 제조에 필요한 돌의 종류, 제조 방법에 대한 안내 등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앞서 '스미스 도서관'에서 본 것과 같이 우리는 물리적 기술에 대해서도 하나의 도식을 정의할 수 있다. 자연 언어, 수학적 부호, 그림, 청사진, 제조 시범 비디오 등으로 된 도식이다. 무엇이든 이론적으로 신화화할 수 있다면 도식으로 표현 가능하다. 원칙적으로 구전된 지침과 암묵적 지식도 기술 도식으로 코드화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물리적 기술은 여러 측면에서 전통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술과 유사하다. 전통 경제학 이론에 '생산 함수'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원재료, 자본, 그리고 노동을 제품 혹은 용역으로 전환하는 체계를 말한다. 그리고 기술이란 그러한 전환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말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전통 경제학의 경우 기술을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알 수 없는 요소로 간주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의 경우 기술을 일종의 진화의 산물로 보고 그 진화 과정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제 상상 가능한 모든 기술에 대한 도서관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도서관도 주어진 시점에서는 유한하다. 그리고 그 규모는 보유한 기술 중 가장 길고 복잡한 도식의 길이로 정의될 수 있지만 거의 무한대에 가깝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규모는 계속 불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다. 따라서 이 도서관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청사진, 디자인, 지침서와 물질,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다양하게 변환시킬 수 있는 방법 등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무의미하고 실용성이 없는 것일 수 있다. 네모난 바퀴의 자전거, 구멍 뚫린 물병, 치즈로 만든 도끼 등 쓸데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 제품 혹은 서비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은 그중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기능적으로 문제가 없는 기술도 경제적으로는 가치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 진화는 마치 거대한 건초 더미에서 쓸 만한 기술인 바늘을 찾아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경제적 가치가 있는 기술을 찾아내는 것은 경제가 어떻게 진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물리적 기술의 식별자들

다른 디자인 공간들처럼 물리적 기술도 도식으로서의 요건을 갖추려면 도식 식별자가 이를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물리적 기술에 담겨 있는 정보를 읽어 내고 이를 물질, 에너지, 정보로 이루어지는 실제 경제 활동으로 바꾸려면 특별한 사람, 또는 특별한 무엇이 필요하다. 즉, 설계 도면을 알아보고 실제로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식은 누구나 그것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격을 갖춘 식별자만이 그 계획을 읽고 제품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중요한 원칙은 그러한 기술 설명 자료가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되거나 정리되고 식별자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멘델의 도서관, 스미스의 도서관에서와 마찬가지로 물리적 기술에 대한 도식과 그 식별자는 상호 작용하면서 진화, 다시 말해 공진화를 한다. 즉, 주택 건설자의 기술과 방법이 변하면 주택의 디자인이 변하고, 주택의 디자인이 변하면 그런 주택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기술자의 요건도 달라진다는 얘기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면 암묵적 지식의 경우 도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지 않느냐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든 기술이나 지식이 표현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 확산될 수 없다. 

 

진화가 일어나려면 지식이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떤 형태로든 코드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만약 래리가 아주 멋있는 도끼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술을 어떤 형태로든 코드화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면 그 기술은 래리와 함께 사라지고 더 이상 진화할 수 없을 것이다.

 

초기의 물리적 기술의 전달 과정에서는 오류들도 불가피하게 끼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화가 적절하게 작동하려면 정보 전달에 최소한의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 결국 언어의 출현은 보다 규모가 크고 복잡한 기술을 코드화하고 이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일들을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정확하게 수행하는 데 엄청난 돌파구 역할을 하였다.

 

인간의 언어 능력이 정확하게 언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도구 디자인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확산은 인간의 언어 능력 형성의 강력한 증거라는 역추론이 가능하다.

 

 

물리적 기술은 스스로 자란다

인간이 만든 물리적 기술이 가진 놀라운 특성은 바로 그 스스로가 새로운 발명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스튜어트 카우프만은 내연 엔진의 개발이 자동차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고 자동차의 확산으로 고무 타이어, 와이퍼, 아스팔트 포장, 모텔, 패스트푸드, 고속도로 요금소, 심지어는 라스베이거스의 드라이브 인 예식장 등의 관련 기술과 제품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발명은 새로운 발명의 가능성을 열어 줄 뿐 아니라 그러한 발명에 사용된 부품 소재 또한 새로운 재발명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자동차 같은 경우 그러한 기술 효과가 엄청난 반면 어떤 경우에는 그 영향이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카우프만은 그 규모는 거듭제곱 법칙을 따른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발명이든 작더라도 리플 효과(파급효과)는 있기 마련이다. 어찌하여 기술은 기하급수적으로, 스스로 급증하는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기술은 어떻게 스스로 성장하는가?

 

물리적 기술도 다른 도식들과 마찬가지로 앞서 살펴보았듯이 모듈화된 빌딩 블록의 특성을 갖고 있다. 모든 물리적 기술은 요소와 구조인 전체적 디자인, 이 두 가지를 코드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택은 방, 배관, 창문 등으로 되어 있고,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집 모양(예를 들어 튜더 양식 등)을 갖추게 된다. 안마도 개별 근육을 어떻게 이완시키느냐 하는 개별적 요소들과 이들을 적절히 결합한 하나의 디자인으로 구성된다.

 

손도끼와 같이 원시적인 물리 기술도 마찬가지다. 돌도끼의 경우 요소는 깎는 돌과 도끼로 깎인 돌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구조는 전체적인 디자인 그 자체다. 따라서 요소들과 구조를 다양하게 결합하면 다양한 디자인들의 수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도끼의 손잡이를 어떠한 모양으로 하느냐에 따라 손바닥으로 움켜쥐는 원형 도끼와 손가락으로 싸고 쥐는 나팔 모양 도끼로 나누어진다. 도끼날의 경우에도 돌 한쪽만 깨어 만든 것과 양쪽을 깎아 만든 것이 있다. 전체적인 구조 측면에서도 소형 도끼, 대형 도끼, 화강석 도끼, 부싯돌 도끼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요소와 구조의 결합적 특성 때문에 물리적 기술들의 공간은 우주보다도 큰 규모를 갖게 된다. 이는 기술 혁신이 일어나면 물리적 기술 공간을 기하급수적으로 확대시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손도끼를 만드는 데 양날 만들기와 홑날 만들기 같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어느 날 유인원 '해리'가 도끼날을 만드는 더 좋은 방법을 개발했다고 하자. 또한 이 새로운 방법이라는 것이 조그만 돌을 이용해 돌을 조금씩 더 정밀하게 깨서 더욱 날카로운 도끼 날을 만드는 기술이라고 하자. 이 기술의 개발로 우리는 세 가지 형태의 도끼날을 갖게 된다. 이 하나의 기술 혁신으로 가능한 손도끼 종류의 수가 16에서 24로 늘었다. 

 

제품 구조에서의 기술 혁신 또한 SKUs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올 수 있다. 해리가 하루는 대형 나팔형 손도끼를 쥐고 도끼날을 세우는게 아니라 오히려 도끼날을 갈아 무디게 만들었다고 하자. 이건 어뜻 생각하기에는 요소에 대한 사소한 기술 혁신 같지만 사실 전혀 새로운 제품 구조의 혁신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약간의 변화가 손도끼를 견과류, 곡류 등을 찧는 전혀 다른 용도의 도구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기술 혁신은 제품의 복잡도에 따라 SKUs의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킨다. 그리고 제품 구조의 혁신이 새로운 요소 혁신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새로운 발명의 의의는 경제적으로 시장에 새로운 SKUs를 추가시키는 것뿐 아니라 가능한 모든 SKUs들로 이루어지는 공간도 확대시킨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 발명은 새로운 발명의 가능성을 넓혀 주고, 이에 따라 물리적 기술의 공간은 손도끼로부터 규브릭이 영상화한 지구 둘레를 회전하는 우주선으로까지 확대된다.

 

 

연역적 추론에 의한 기술의 진화

진화의 환경은 지형으로 말하자면 전형적으로 알프스 산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물리적 기술 공간의 경우에도 진화의 환경, 즉 적합도 지형이 그와 같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진화가 물리적 기술의 탐색에 가장 좋은 방법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는 물리적 기술 공간의 지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즉, 이 공간에서 서로 비슷한 물리적 기술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적합도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리적 기술 공간의 적합도 지형 역시 서로 가까이 위치하는 경향이 있는, 높은 장점들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고원도 있고, 움푹 파인 곳도 있는 그런 지형과 같을 것이다.

 

물리적 기술 공간이 알프스 산맥과 같은 그런 적합도 지형이라는 가설을 지지하는 추가적인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 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진화는 그와 같은 지형을 추적하는 데 매우 유용한 방식이며, 또한 진화의 과정은 그러한 지형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들의 물리적 기술에 관한 혁신 과정이 진화적인 탐색 과정과 같다는 것만 증명할 수 있다면 물리적 기술의 공간도 그와 같은 지형, 즉 알프스 산맥과 같은 적합도 지형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물리적 기술 혁신이 진화의 과정이라고 주장하면 당장 "진화는 맹목적이고 임의적인 과정인 데 반해 기술 혁신은 인간의 이성과 의도에 의한 것이다. 그 점을 어떻게 풀 것인가?

 

그러나 진화 알고리즘의 특성상 반드시 의도성이나 합리성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을뿐더러 진화가 반드시 임의적이어야 한다는 이유도 없다. 기본적으로 진화는 실험과 선택, 그리고 (선택된 것의) 확산의 반복적 과정이다.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서 임의적인 부분은 선택이 작동하기 위한 변종들의 창출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조차 완전히 임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돌연변이는 임의적일 수 있지만 양성 생물의 재조합은 그렇지 않다. 짝짓기를 위한 경쟁의 원리상 적합도 점수가 높은 것들끼리 맺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제 유일한 필요조건은 알고리즘에서 선택을 위한 실험이 충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형적으로 설명하자면, 실험은 최소한 진화의 알고리즘이 정점(가장 경쟁력이 있는 상태)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의 넓은 적합도 지형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떻게 그와 같은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물리적 기술 공간을 추적하는 인간의 경우 연역적 추론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연역적 추론은 심리학자 도널드 캠벨의 아이디어들과 허버트 사이먼의 '의도적 적응'이라는 개념을 빌려 혼합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발명에서 두 가지의 인식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나는 연역적인 논리적 사고다.  두 번째는 궁리한다는 것, 즉 무언가 한 번 실험을 해 추론하는 것이다. 현대의 엔지니어들이 과학을 활용하듯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실험해 보자"고 하는 것이다.

 

듀크 대학교의 공과대학 교수인 헨리 페트로스키는 이를 두고 "실패를 해야 전적이 쌓이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궁리를 한다는 것 자체는 무의식적인 귀납적 인식 과정, 연상 그리고 유추 등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단순히 무작위적 행동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연역적인 논리와 귀납적인 추론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에 열광하는 인간의 속성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롱비치의 거의 전 지역에 정전 사태를 일으킨 사건. 그는 단지 그냥 한번 날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비록 야외 의자로 비행하는 실험에는 실패하였지만 무엇인가에 열광하는 사람들 때문에 물리적 기술 공간에서의 실험은 계속 확대되고 간혹 성공하는 기술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의 기술에서부터 마치 곤충의 촉수처럼 뻗어 있는 가지 모양인데, 그러한 가지는 연역적 실험의 영역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역은 이론, 과학 그리고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의미 있다고 판단되는 쪽으로 뻗어가게 되어 있다. 그 밖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점들이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그냥 실험을 해보는 점들을 나타낸다. 적합도 지형에서의 이러한 실험의 분포는 임의적인 돌연변이나 교배로 실험이 이루어졌을 때와 똑같은 모양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실험이 진화의 원리가 작동할 수 있을 정도로 넓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기술 지형에서의 선택

 따라서 연역적 추론은 물리적 기술의 변이를 위한 메커니즘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기술 중에서 어떻게 적자가 결정되며, 물리적 기술 지형에서 적합도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경우 생물학적인 진화와는 그 과정이 다르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모든 물리적 기술은 목적이 있고 어떤 기능이 있다. 휴대용 전화는 통신을 위한 것이며 커피 잔은 커피를 담기 위한 것이다. 물리적 기술을 선택하는 기준은 얼마나 그러한 목적에 적합하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목적한 바의 기능을 더 잘 수행하는 기술을 선호하는 것이다. '더 낫다'는 것은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눈 장갑을 만드는 기술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눈 장갑이 놀이뿐 아니라 기념품으로서의 기능도 효과적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 경쟁력이 있다는 뜻.

 

진화 시스템 속에서 선택이라는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과임신' 상태가 발생하여야 한다. 즉, 주어진 환경에서 벅찰 정도로 많은 디자인들이 출현하여 이들 간의 경쟁이 불가피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기술의 경우,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기술의 종류가 더 많은 상황, 예를 들어 관광객의 수요보다 기념품 장신구가 더 많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경우 상호 경쟁적 기술이 동시에 존재하고, 또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목적에 가장 맞는 기술을 선호하기 때문에 선택을 통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모방은 가장 진심 어린 칭찬이다

진화의 과정을 점검하는 마지막 단계는 복제의 과정이다. 성공적인 디자인이 다른 경쟁 디자인에 비해 눈에 자주 띈다는 것은 진화의 시스템이 실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생물의 경우 진화의 과정은 단순 명료하다. 살아남는 데 가장 필요한 유전자는 그렇지 못한 유전자에 비해 후대로 상속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기술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어떻게 적응력이 높은 기술이 복제되고 확산되는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람에게 유용한 기술은 모방된다. 예를 들어 벽돌 만드는 기술은 기원전 5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개발되었다. 이 기술은 그 후 널리 모방되었고 '연역적 추론'을 통해 여러 형태의 벽돌 기술이 이로부터 진화되었다. 벽돌 만드는 기술은 사람의 두뇌에 저장되었고 벽돌 그 자체에 체화되었을 뿐 아니라 기록으로도 남겨졌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모방하였으며, 숙련 기술자는 도제들에게 가르쳤고, 또한 어떤 사람들은 벽돌 자체를 보고 어떻게 만들까 궁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는 기록되어 벽돌 기술은 급속도로 세계 각지로 퍼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기술은 사람의 두뇌를 통해 전파되고 그 기술을 담고 있는 제품이 모방되면서 복제된다. 그리고 그 기술에 대한 기록이 돌에 새겨지거나, 책으로 인쇄되거나 웹 페이지에 올려지면서 복제된다. 성공적 기술은 확산되고 그렇지 못한 기술은 쇠퇴하면서 기술의 시장 점유율이 변한다.

 

벽돌 기술이 전성기를 가가하다가 20세기에는 유리 혹은 철강 기술에 밀려 시장에서의 위치가 크게 약화되었다. 따라서 벽돌 기술이 한동안 기술적 우위를 차지하였으나 다른 우월한 기술이 등장하면서 퇴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논의한 물리적 기술의 진화 모형을 바탕으로 지금부터 몇 가지 시사점을 찾아낼 것이다. 첫째, 알프스 산과 같은 지형이 이른바 기술 S커브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둘째, 물리적 기술과 모듈성과 기술 간 상호 관계가 파괴적 기술의 영향을 어떻게 설명해 내는지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이 물리적 기술의 진화 과정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기술 S커브

포스터의 이론은 범선으로부터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이르는 기술에 대한 관찰과 이들 기술에 대한 역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개별 기술에 대한 연구와 자료를 통해 놀랍게도 일관성 있는 패턴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기술의 초기에는 기술의 성과가 부진하고 발전 속도도 더디다. 그러나 투자기와 다양한 시험기가 지나면 기술의 성과가 갑자기 기하급수적인 상승 곡선을 타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는 연구 개발 투자가 기술의 성과를 개선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기술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성과 곡선은 완만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투자 수익이 체감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포스터는 이와 같이 투자에 따른 기술성과의 변화 패턴이 S자와 유사하다고 하여 이를 'S커브'라 명명하였다.

 

포스터 두 번째 이론은 한 기술에 대한 투자 수익이 감소하기 시작하면 기업가들은 다른 새로운 기술을 찾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도 초기의 발전 속도는 더디지만 결국 이륙 단계를 지나면 새로운 기술이 기존 기술을 대체하게 되고 시장은 새로운 'S커브를 타게 된다'는 얘기다. 포스터의 이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S커브와 새로운  S커브 간의 단절 기간이 기업에게는 매우 어려운 취약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미 자리 잡은 기업은 기존 기술로부터 최대한의 이윤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대개 그러한 기업들은 과거의 성과가 장래에도 지속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기존 기술의 성과가 퇴조하는 데도 불구하고 새로 진입하는 신기술의 위협을 과소평가한다. 이러다 보면 기존 기업은 새로운 기술에 바탕을 둔 혁신 기업에게 당하기 십상이다.

 

자전거가 처음 나왔을 때는 앞바퀴가 큰 것, 뒷바퀴가 작은 것, 다양한 방향 조절 손잡이 등 실험적인 디자인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앞뒤바퀴 크기가 같은 요즘 자전거가 등장하면서 자전거의 기본 디자인이 급속히 개선되고 성능도 크게 좋아졌다. 그 후 기술이 S커브의 윗부분에 이르렀고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줄어든 채 기본 디자인은 고정된 상태에서 개선 노력이 기어, 경량화 등 부분적인 기술 변화에 국한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경주용 자전거, 산악용 자전거 등이 등장하면서 자전거 기술은 새로운 S커브를 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진화를 설명하는 지형, 즉 적합도 지형을 이용해서 살펴보자.

 

자전거를 만드는 나쁜 방법의 수가 좋은 방법의 수를 압도하는 까닭이다. 그러다 일단 좋은 디자인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처음 얼마간 헤매다 보면 디자인을 찾게 된다. 그 후 얼마간 등산은 순조롭고 속도도 빠르다. 결국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속도는 떨어지고 새로운 변화가 감지된다. 전과 달리 정상으로 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의 수가 줄어든다. 처음에는 정상으로 가는 길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등산로의 선택은 줄어들고 만다는 것이다.

 

만약 물리적 기술의 진화 과정을 나타내는 적합도 지형이 완전히 임의적인 것이라면, 기술 발전 과정에서 S커브와 같은 패턴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후지산과 같이 하나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 단순한 지형이라면 가장 좋은 자전거 디자인 하나만 존재할 뿐 디자인간 경쟁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S커브 현상은 높은 산 낮은 산 등 여러 산이 어울려 있는 알프스 산맥과 같은 적합도 지형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파괴적 기술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였던 클레이턴 크리스텐슨은 저서 <혁신 기업의 딜레마>에서 왜 하나의 S커브에서 새로운 S커브로 옮겨 가는 것이 성공적인 대기업에게조차 위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크리스텐슨은 기술의 조그만 변화도 때때로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크리스텐슨은 기술이 파괴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기술 진보의 급진성보다 기술 변화가 S커브상에서 어떠한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새로운 기술이 주어진 S커브상에서 성과를 급속히 제고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S커브로의 환승을 초래하지 않는 한, 그 기술은 현재의 기술 경쟁 관계를 깨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신기술이 기존 기술보다 성과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S커브로의 환승을 요구한다면, 이 기술은 파괴적인 기술이며 산업 구조 자체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기술 적합도 지형을 편의상 3차원으로 도식화하여 설명하였으나 기술은 여러 가지 부분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실제 기술의 진화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다차원적 현상이다. 만약 한 디자인에서 5개의 구성 부품을 바꾼다면 이것만 하더라도 5차원의 그림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범선에서 증기선으로의 발전, 경주용 자전거에서 산악용 자전거로의 발전과 같은 구조 자체의 혁신은 많은 것들이 동시에 변할 때 일어난다. MIT의 헨더슨과 하버드의 클라크는 반도체 장비 산업 연구를 통해 산업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구조적 혁신이 부품 혁신보다 훨씬 파괴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즉, 기존 기술로 성공한 기업일수록 기술 적합도 지형에서 새로운 기술로 갈아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기업가나 신제품으로 시장에 진입하는 신규 진입자 입장에서 보면 산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새로운 길도 많고 도전할 수 있는 정상도 많다. 한편 계곡에서 산 위로 올라가려고 하지만 정상에 이르기도 전에 깊은 계곡으로 잘못 빠져 들거나 낮은 봉우리에서 끝나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그 많은 기업 중에 결국 어떤 기업은 정상으로 가는 좋은 길을 찾아내게 마련이다.

 

 

과학 혁명 : 진화의 재프로그램화

물리적 기술 진화의 특징은 과학적 이론 등에 근거한 연역적 탐색이 임의적인 탐색이나 실험적 추론에 비해 성공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연역적 능력은 어떤 사건의 결과를 예측하고(실제로 실험하기보다) 두뇌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실행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인간이 그동안 많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한 기술들이 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0만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간의 발명은 천천히 끊임없이 계속되고 늘어났다.

 

1750년경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때 물리적 기술 공간이 크게 확대되면서  SKUs의 수도 급증한 것이다. 그것을 촉발한 것은 과학 혁명이었다.17세기 과학자들에 의한 엄청난 발전이 가능하였다. 그 후 과학은 기하급수적인 곡선을 그리며 발전하였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과학 발전의 영향으로 인간의 연역적 통찰력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면서 '연역적 추론(연역적 논리와 실험적 추론의 혼합)'에서 앞부분인 연역적 논리 과정이 갑자기 더 중요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론이 현실에 다 맞는다고 하는 엔지니어가 없듯이 연역적인 과학 이론이 실험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이론의 중요성이 점점 증대되면서 물리적 기술의 적합도 지형에서 진화가 새로운 정점을 찾을 수 있는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

 

기술 진화는 물리적 기술 공간이 담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으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탐색하는 인간의 연역적 추론의 결과다. 여기에서 차별화, 선택 그리고 복제 과정의 성격은 생물적 진화와는 전혀 다르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진화 과정이다. 이는 물리적 기술의 진화가 다른 진화의 경우에 적용되는 일반적 진화의 법칙을 따른다는 얘기다. 

 

따라서 물리적 기술의 진화 또한 다른 경우와 같이 혁신은 또 다른 혁신을 촉진한다든지 기술 변화가 이른바 단속 균형을 나타낸다든지 하는 행태를 보인다. 그러나 물리적 기술 진화의 특성은 인간 사회의 시스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 스스로가 진화의 알고리즘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학의 발명은 인류로 하여금 물리적 기술 공간을 매우 빠르게 탐색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이로 인한 산업 및 정보 혁명은 우리 사회외 지구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물리적 기술이란 인류 생활의 반쪽 이야기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