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시간 파헤치기
01 유일함의 상실
시간 늦추기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평지에서는 더 느리게 흐른다.
시간이 지연된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무려 한 세기전에 깨달았다. 심지어 정밀 시계도 없이 알아냈다. 그 위대한 인물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눈으로 보기 전에 이해하는 능력은 과학적 사고의 핵심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편견에 불과했음을 배운다.
물체가 떨어지는 것도 시간의 지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원인)
춤추는 만 명의 여신
사물은 필요에 따라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화하고,
그것들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당화된다.
- 아낙시만드로스
산과 평지에서 각각 몇 년 동안 살았던 두 친구가 다시 만났을 때, 이들이 손목에 찬 시계는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이때 둘 중 어떤 시간이 t일까?
유일하다고 생각한 '시간'이라는 양은 시간들의 거미줄 속에서 산산조각 난다. 세상은 사령관의 구령에 맞춰 움직이는 군부대의 대형처럼 균일한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그려진 시간의 모습이다.
이것의 의미는 시간은 첫 번째 층인 유일함을 상실했다.
02 방향의 상실
영원한 흐름은 어디서 시작될까?
과거와 미래는 다르다. 원인은 결과에 선행한다. 상처가 나야 통증이 생기지, 통증을 느낀 뒤에 상처가 나는 일은 없다. 과거는 우리가 바꿀 수 없다. 반면 미래는 불확실하고 욕망과 불안이 교차하며, 어쩌면 미래 자체를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미래를 살 수 있고,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다. 미래에는 모두 가능한 것이다. 시간은 양쪽 영역으로 똑같이 뻗은 선이 아니다. 끝부분이 서로 다른 화살표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은 무엇일까? 세상의 문법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메커니즘 중에서 이미 존재해왔던 과거와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와 미래가 그토록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와 20세기 물리학은 시간이 장소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예상치 못한 사실과 마주하며 당혹스러워했다. 세상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기본 법칙에서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열
사디 카르노는 '열이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증기 기계가 작동한다는 생각'을 했다.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사디의 아이디어 핵심을 짚어 법칙을 발표해 세상의 칭송을 받는다. "열은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이동할 수 없다."
여기서 핵심은 이 열의 특징과 낙하하는 물체와의 차이점이다. 공은 낙하하기도 하지만, 반동으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열은 그럴 수 없다.
물리학에서 과거를 미래와 구분하는 일반 법칙은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발표한 이 법칙 뿐이다. 뉴턴 역학,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법칙, 그 어떤 방정식도 과거를 미래와 구분하지 않았다.
ΔS≥0
'델타 s는 0과 같거나 그 이상이다.' 라고 읽고 '열역학 제2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희미하게 보기
볼츠만은 이 공식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열 요동은 카드 한 묶음이 계속 섞이는 것과 같다.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던 카드들을 뒤섞으면 무질서해진다. 이렇게 열은 (분자들의) 뒤섞음에 의해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이동할 뿐 그 반대로는 이동하지 않는다. 자연의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친숙하게 일어난다.
볼츠만은 이것을 알아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기본적인 운동 법칙이나 심오한 자연의 문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점점 사라지는 것에 있다.
이것은 대단한 통찰력이었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 사이의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그 근원까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질문의 방향만 바뀌었다. 그의 의문은 시간의 두 방향 중, 왜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한쪽에서만 사물이 정리된 상태에 있었는가였다. 과거에는 왜 엔트로피가 낮았을까?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현상을 관찰해보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이유가 분자들이 요동치면서 전체적으로 무질서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우리 주위에 관찰되는 현상들은 왜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걸까?
어떤 구성이 다른 구성에 비해 좀 더 특별하다는 개념은(예를 들어 검은 카드 26장 뒤에 놓인 붉은 카드 26장) 카드들의 어떤 측면만 봤을 때(예를 들면 색상만 보는 것) 의미가 있다. 모든 카드를 다 구별하면 구성은 전부 동등해진다. 어느 것이 더 특별하다거나, 어느 것은 덜 특별하지 않다. '특수성'의 개념은 세상을 대략적으로, 희미하게 바라볼 때만 만들어진다.
볼츠만은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엔트로피는 우리가 희미한 시각으로 구별하지 못하는 다양한 구성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산출하는 양이라는 점을 정확히 증명했다. 열과 엔트로피,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 등은 자연을 대략 통계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이 희미함과 깊이 연결돼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정확한, 미시적인 상태에 대한 모든 상세한 내용을 고려할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에 관한 특징적인 부분들이 사라질까?
그렇다. 사물의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진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의 미래는 현재의 상태에 따라, 즉 과거의 상태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시간에서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물리 법칙들에 의해 표현되는 규칙성이 있는데, 여기서 미래와 과거는 서로 대칭적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볼츠만의 연구에서 나온 결론은 당혹스럽다. 결국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우리 자신의 희미한 시각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결론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에 대한 나의 느낌이 이렇게 생생하고 명확하고 실존적인데, 내가 이 세상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가? 나의 근시안 때문에 오류 같은 것이 생긴다는 말인가? 내가 정말 수십억 분자들이 어떻게 춤을 추는지 정확하게 관찰하고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미래가 과거와 '똑같이' 펼쳐지는 것인가? 과거의 지식(혹은 무지함)을 미래의 지식과 똑같이 소유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약화시킨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불신이 싹튼다. 그러나 지구운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한 이 이론에도 압도적인 증거가 있다. 시간의 흐름을 특징짓는 모든 현상은 이 세상의 과거에서 '특정한' 상태로 환원되며, 그 '특정성'은 우리의 희미한 시각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시간은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잃었다. 바로 과거와 미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다. 볼츠만은 시간의 흐름에는 본질적인 어떤 것도 없으며,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우주의 불가사의한 불가능성이 희미하게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03 현재의 끝
속도도 시간을 늦춘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질량에 의해 늦춰진다는 것을 깨닫기 10년 전에, 시간이 속도 때문에 늦춰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 발견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파괴적인 것이었다.
걸어 다닌 친구의 시간이 더 천천히 흐른다.
이 사실은 아주 복잡한 추론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맥스웰 방정식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이 의문은 수학자들도 알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알았다. t는 멈춰 있는 나에게 흐르는 시간, 나와 함께 멈춰 있는 현상들에 적용되는 리듬이다. 한편 t'는 '당신의 시간', 즉 당신과 함께 움직이는 현상들에게 적용되는 리듬이다. 그 누구도 제자리에 멈춰 있는 시계와 움직이는 시계의 시간이 다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전자기 방정식 속에서 이 차이를 감지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움직이는 물체는 정지해 있는 물체보다 더 짧은 기간을 경험한다. 움직이는 물체에서 시간은 줄어든다. 여러 장소에서의 시간도 하나로 공통적이지 않지만, 한 장소에서의 시간도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간은 정해진 궤적을 지나는 어떤 사물의 움직임과만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고유 시간'은 당신이 어디 있는지에 따라, 인접해 있는 물질의 질량이 많고 적은지에 따라 달라질 뿐 아니라, 이동하는 속도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매우 이상하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면 정말 놀랍다.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거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주 곳곳에 잘 정의된 '지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환상이자 우리 경험의 부적절한 외삽이다.
행성 사이의 우주 공간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해보자. 두 개의 돌이 이 공간 속에서 '같은 높이'에 있는가? 이 질문의 타당한 답은 '우주에는 같은 높이라는 통합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잘못된 질문'이라는 것이다. 혹은 지구에서의 사건과 프록시마b에서의 사건, 두 사건이 '같은 순간'에 발생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타당한 답도 '우주에는 같은 순간이라고 규정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잘못된 질문'이다.
'우주의 현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가 없는 시간 구조
우주의 시간 구조 역시 원뿔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적인 선행' 관계도 원뿔형으로 이루어진 부분의 순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완전'하지 않고 '부분'적인 우주의 사건들 간의 순서를 정의하는 특수상대성이론이 우주의 시간 구조가 친척 관계와 같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인간 사회에 자손도 선조도 아닌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확장된 현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사건들 전체를 뜻한다.
공통적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공간의 시간 구조는 시간의 층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광원뿔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25세의 나이에 깨달은 시공간의 구조다. 10년 뒤,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장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시공간의 구조는 사실상 정리된 상태가 아니라 흐트러질 수 있고 또는 혼란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현재가 아무 의미 없다면 우주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존재'하는 것이 '현재 속에' 있는 것 아닌가? 우주가 어떤 특별한 구성으로 '지금'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생각은 이제 더는 타당하지 않다.
04 독립성의 상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인간은 수 세기 전에 시간을 하루 단위로 '나누었다'. '시간'이라는 말은 인도유럽어로 '나누다'라는 뜻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류는 13세기가 되서야 유럽에서 사람들의 일상이 기계식 시계를 통해 조율되기 시작했다. 종탑에 자리 잡은 시계가 공동체 생활에 리듬을 부여했다. 시계로 조절되는 시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시계의 유용함은 모두에게 같은 시간을 표시해준다는 것이다. 어느 곳이든 시간이 같아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된 개념인것 같지만, 실은 거의 현대에 들어와 발생한 것이다. 19세기에 전신이 상륙하고 기차가 일반화되고 그 속도도 빨라지면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할 때 시계를 그런잘 맞추는 일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사물이 어떻게 바뀌는지 계산하는 수단, 이것이 인간이 오래전부터 생각한 전통적인 시간에 대한 개념이다. 우리가 아는 한, 시간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문제 삼은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 변화의 척도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물은 계속 변화하고,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측정하고 계산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한다.
'언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떤 사건을 기준으로 한다. "사흘 뒤에 돌아올 거야."라는 말은 출발해서 돌아오기까지 태양이 하늘에서 세 번 회전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 걸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무 움직임이 없으면 시간은 없다. 시간은 움직임의 흔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턴은 이와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뉴턴은 사물이나 사물의 변화와 상관 없이 '진짜' 시간은 흐르고, 모든 사물이 멈추고 우리 영혼의 움직임마저 얼어붙어버려도 '진짜' 시간은 냉정하게 그리고 동일하게 계속 흐른다고 보았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인류 역사상 다시 없으리만치 예리하고 심오한 두 연구자가 시간에 대해 정반대의 사고 방법을 제시했다. 두 거장이 우리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시간은 단순히 사물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측정하는 수단일까, 아니면 사물과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흐르는 절대적인 시간이 존재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뉴턴의 생각에 반발했다. 라이프니치는 시간은 발생한 순서일 뿐, 자율적인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기존의 논리를 옹호하고 나섰다. 뉴턴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인류에게 시간은 사물이 어떻게 변하는지 헤아리는 방식이었다.
두 거장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조하를 이루려면 제3의 거장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간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은 공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시간은 '때'를 물을 때와 관련된 것이다. 공간은 '어디'를 물을 때와 관련된 것이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가?"의 대답은 그 무엇의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나는 사하라에 있다."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내가 드넓은 사막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한 물체의 공간은 그 물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뉴턴은 다른 방식의 개념을 제안했다.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위에 있는 것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 공간이 "상대적이고 겉보기이며 통속적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간 그 자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존재하는 공간이 "절대적이고 참되며 수학적"이라고 했다.
뉴턴은 두 물체 사이에 '빈 공간'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공간은 사물의 정렬 상태일 뿐이므로 '빈 공간'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사물이 없고 이 사물들이 확산되어 있지 않으며 접촉하지도 않으면, 공간도 없는 것이다. 뉴턴은 사물은 어느 한 '공간'에 위치해 있고, 이 공간은 사물을 치워도 빈 상태로 여전히 계속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뉴턴의 공간이 정말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정말 무정형일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은 시간에 대한 의문과 거의 흡사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흐르는, '절대적이고 실재하는 수학적'인 뉴턴의 시간이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사물과 전혀 다른 것일까? 그래서 사물과 관계가 없는 걸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면 세 번째 거장이 개입 해야한다.
세 거인의 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과 뉴턴의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보석 같은 연구로 통합되었다. 앞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뉴턴이 물질 저 너머 세상에 존재한다고 예상한 시간과 공간이 현실 속에 '존재한다'이다. 뉴턴의 시간과 공간이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뉴턴이 상상한 것처럼 절대적이거나, 세상에 일어나는 현상들과 무관하거나, 세상의 물질들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우리가 아는 최선의 지식에 따르면, 이 세상의 물리적 현실의 씨실을 구성하는 물질들을 물리학자들은 '장 field'이라고 부른다. '전자기장'은 빛을 이루는 씨실로, 전기 모터를 회전시키고 나침반의 바늘을 북쪽으로 돌리는 힘들의 원천이다. '중력장'이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중력의 근원이지만, 뉴턴의 공간과 시간을 형성하고 이 세상의 나머지 부분이 그려지는 직물이기도 하다. 시계는 이러한 중력장의 외연 크기를 측정하는 메커니즘이다.
시공간이 중력장이고, 중력장이 시공간이다. 뉴턴이 예상한 것처럼 물질이 없어도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하지만이 세상의 여타 사물들과 다른 존재자(뉴턴이 생각했던 것처럼)는 아니고, 다른 장들과 같은 장이다. 이 세상은 캔버스 하나의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들의 층으로 뒤덮여 있고, 중력장은 그러한 것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중력장 역시 절대적이지도 균일하지도 고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구부러지기도 펴지기도 하고, 다른 것들과 서로 밀고 당기기도 한다.
질량이 큰 물체 근처에서는 시계가 느려지는 것도 그곳엔 더 많은 중력장이 있기 때문에 시간도 더 느려진다. 즉, 시간이 더 적어지는 것이다.
시간은 공간 기하학과 함께 구성된 복합적인 기하학의 일부가 된다. 아인슈타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개념과 뉴턴의 시간 개념을 합성한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둘 다 옳았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움직이거나 변화하는 단순한 사물 외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뉴턴의 예상은 옳았다. 그러나 시간이 사물과 관련이 없으며 규칙적으로 꾸준히, 그 어떤 것과 아무 상관없이 흐른다는 추측은 틀렸다. '언제'와 '어디'가 항상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은 옳았다.
이 세 명의 위대한 연구자들의 춤 덕분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아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중력장이라는 실제적인 구조가 존재하고 이것이 다른 물리학과 동떨어지지 않으며, 세상이 그냥 한번 흘러 지나가는 무대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중력장은 다른 것들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 우리가 미터기나 시계라고 부르는 것들의 리듬과 모든 물리적 현상의 리듬을 정하는, 이 세상의 위대한 춤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요소다.
성공은 항상 그렇듯 단명할 운명에 있다. 인슈타인은 1915년에 중력장 방정식을 썼는데,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16년, 이 방정식이 공간과 시간의 본성에 대한 최종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중력장도 다른 모든 사물들처럼 양자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
05 시간의 양자
지금까지 설명한 묘한 풍경은 공간과 시간의 양자적 특징을 떠올리면 한층 더 낯설어진다. 앞 장에서 설명한 일반상대성 이론의 나머지 시간 구조도 양자를 개입시키면 사라진다. 보편적 시간은 무수히 많은 작은 고유 시간들로 산산조각 났지만, 양자를 생각하면 이 모든 시간이 각각 나름대로 '요동'을 치고 마치 구름처럼 사라지며, 특정한 값들만 가질 수 있고 그 밖의 값들은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양자역학 덕분에 얻은 발견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인데,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과 미결정성, 관계적 양상이다.
입자성
시계로 측정한 시간은 '양자화'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값만 취하고 다른 값들은 없는 것이다. 시간을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알갱이로 나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모든 현상에는 최소 규모가 존재한다. 중력장에서는 이 규모를 '플랑크 규모'라고 부른다. 최소 시간은 '플랑크 시간'이라 한다. 이 상수들이 규정하는 값은 10억 분의 10억 분의 10억 분의 1억 분의 1초이다. 이것이 플랑크 시간인데, 이 엄청나게 짧은 시간 속에서 시간의 양자 효과가 나타난다.
시간의 '양자화'는 한 값에서 다른 값으로 껑충 뛰어넘는, 불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간의 '최소' 간격이 존재하는데 이 간격 이하로 내려가면,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시간으로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입자성은 자연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빛은 빛의 입자인 광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 속 전자들의 에너지는 특정한 값 외에 다른 값은 취할 수 없다. 공간과 시간도 다른 물질처럼 물리적 실체라고 했으니 이 또한 입자성을 지닌다고 자연스럽게 제안할 수 있다.
시간의 양자중첩
양자 역학의 두 번째 발견은 불확정성이다. 내일 전자가 어디에서 나타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확률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 이런 상황을 물리학자들은 '중첩'이라고 한다.
시공간은 전자와 같은 물리적 물체다. 시공간도 파동처럼 흔들리며 다양한 형태로 '중첩'될 수 있다. 시공간이 중첩되면 한 입자가 공간에서 널리 퍼질 수 있듯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전과 후 모두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관계들
'요동'이 아무것도 결코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특정한 순간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다. 이러한 미결정성은 하나의 양이 다른 양과 상호 작용할 때는 해소된다.
전자의 구체화에는 묘한 측면이 있다. 전자는 그것과 상호 작용하는 다른 물리적인 물체와의 관계 하에서만 구체화된다. 물리적인 물체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의 상호 작용은 미결정성을 오직 확산시킬 뿐이다. 구체성은 물리적 체계와의 관계에서만 발현된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가장 급진적인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전자 하나가 물체와 부딪힐 때, 예를 들어 오래된 음극선관 텔레비전의 화면에 부딪히면, (전자의) 확률구름은 '붕괴'되고 전자는 화면상의 어느 한 지점에 구체화되어, TV 영상을 만드는 데 쓰이는 발광점을 생성한다. 이런 일은 화면과의 관계에서만 발생한다. 하지만 전자가 다른 물체와의 관계하에 놓여 있었다면, 전자와 화면은 함께 중첩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직 제3의 물체와의 또 다른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만, 전자와 화면이 함께 공유한 확률구름은 '붕괴'되고 전자와 화면은 특별한 형태로 구체화된다.
전자가 이렇게 고약하게 군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공간과 시간의 작동한 방식은 받아들이기 더 당혹스럽다. 하지만 모든 증거에 따르면, 양자 세상,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렇다.
시간의 기간과 물리적 간격을 결정하는 물리적 기체인 중력장은 질량의 영향을 받는 역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또한 무엇인가와 상호 작용할 때까지는 결정된 값을 가지지 않는 양자적 존재자다. 상호 작용이 있을 경우, 시간의 기간들은 중력장이 상호 작용하는 그 무엇을 위해서만 입자화되어 결정된 값을 지니게 된다. 우주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미결정 상태로 남는다.
시간은 더 이상 일관성 있는 하나의 캔버스가 아니라, 관계들의 느슨한 망이 된다. 여러 시공간들이 파동처럼 요동치고, 서로 중첩이 가능하고, 특정한 물체와 관련해 특정한 시간에 구체화된다는 이미지는 우리에겐 매우 모호하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정교한 입자성을 위해선 최선이다. 우리는 지금 양자 중력의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간과 관련하여 남는 것은 무엇인가? "손목에 찬 시계는 바다에 던져버리고 시간이 잡고자 하는 것은 바늘의 움직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편이 낫다." 이제 시간이 없는 세상으로 들어가보자.
2부 시간이 없는 세상
06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
시간이 잃은 것들(유일함, 방향, 독립성, 현재, 연속성 등) 중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이 수많은 '사건들'의 네트워크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세상의 사건들은 변화하고 우연히 벌어진다. 이 우연한 발생은 무질서하게 확산되고 흩어진다. 이동 속도가 다른 시계들은 동일한 시간을 표시하지 않는다. 한 시계의 바늘은 다른 시계와의 관계에서 볼 때 다르게 움직인다. 기본 방정식들에 하나의 시간 변수는 포함되지 않지만, 서로의 관계 안에서 변화하는 시간 변수들은 포함된다.
세상이 끝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과학적 진보는, 세상을 읽는 최고의 문법이 영속성이 아닌 변화의 문법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존재의 문법이 아니라 되어감의 문법이다.
세상은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질로, '실체'로, '현재에 있는' 무엇인가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 혹은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연적 발생으로, 과정으로, '발생하는' 그 무엇인가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 무엇은 지속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영속적이지 않다.
기초 물리학에서 시간 개념의 파괴는 두 가지 관점 중 첫 번째 관점이 붕괴된 것이지 두 번째가 아니다. 변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의 안정성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일시성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단위는 공간의 특별한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뿐 아니라 '언제'에도 있다. 그것이 바로 사건인데, 그들은 공간은 물론 시간적인 한계가 있다.
실제로 잘 살펴보면, 매우 '사물다운' 사물들은 장기간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 아주 단단한 돌의 경우, 양자장의 복잡한 진동이고, 힘들의 순간적인 상호 작용이다. 돌은 짧은 순간 동안 자신의 형상을 유지하고, 다시 먼지로 분해되기 전 자체적으로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지구의 기본 원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역사 속에 잠시 존재하는 장, 신석기 인류의 흔적, 폴 거리 소년들의 무기, 시간에 관한 어느 책의 예시, 존재론에서의 은유 대상, 인식의 대상, 물체보다는 우리 몸의 인식 구조에 더 많이 의존하는 세상의 세분화 일부, 실재를 구축하는 우주 게임에서의 복잡한 매듭, 그것이 돌의 실상이다. 세상이 금세 사라지는 소리나 바다를 가로지르는 파도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이런 작은 돌만으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세상이 사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 사물들은 어떤 것일까? 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혀진 원자일까? 장 field의 일시적인 요동에 지나지 않는 기본 입자들일까? 상호 작용과 사건을 언급하기 위한 언어 코드인 양자장일까? '물리적'인 세상이 사물로, 존재자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반면, 세상이 사건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하면 작동한다. 아주 간단한 사건이든 아주 복잡한 사건이든 더 단순한 사건들의 조합으로 분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다. 폭풍우도 사물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 산 위의 구름도 사물이 아니다. 파도도 사물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고, 이 물은 언제나 다른 모양을 만든다. 가족도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 느낌의 총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당연히 사물이 아니다. 음식, 정보, 빛, 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속에, 화학적 프로세스의 네트워크 속에, 자신과 비슷한 타인들과 교환한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수많은 매듭들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근본 '실체'의 관점에서 세상을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연구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세상이 존재하는 사물들로써 그다지 잘 이해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다른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훨씬 더 잘 이해된 듯하다. 사물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연구하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오류에 빠진 자들은 플라톤과 케플러와 같은 거장도 있었다. 플라톤은 데모크리스토스 같은 원자론자들의 물리적 직관을 수학으로 해석해보겠다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원자의 '움직임'이 아니라 '형태'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대에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다섯 개의 근본 실체인 흙, 물, 공기, 불, 원자라는 과감한 가설을 시도했다.
이는 완전히 틀렸다. 일단 변화를 무시한 채, 사건이 아닌 사물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려 한 점이 잘못되었다.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원자의 '형태'는 결국 전자들이 원자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에서 나온 답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방정식 역시 사물이 아닌 사건을 다루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떠한지가 아니라 세상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로 설명한다. 우리는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하고 '살아가는지' 연구하면서 생물학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연구하면서 심리학을 이해하고....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세상을 이해한다.
'사물' 자체도 잠깐 동안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다. 이후에는 먼지로 돌아간다. 사실 모든 것은 언젠가 먼지가 된다. 세상은 양자 사건들의 방대하고 무질서한 그물이다. '시간'이 그저 사건을 뜻하는 것뿐이라면, 모든 사물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 있는 것만 존재한다.
07 문법의 부적당함
보통 우리는 '지금' 존재하는 사물들을 '실재'한다고 한다. 과거나 미래의 사물들은 실제로 '있었다'라거나 실제로 '있을 것이다'라고 하지, 실제로 '있다'고 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현재만 실제이고 과거와 미래는 실제가 아니며, '실재성'이 현재에서 그다음 현재로 연속적으로 진행한다고 보는 생각을 '현재주의'라 부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문제가 있는데, '현재'가 전체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우리 인근 주변에서만 근사적인 방식으로 규정되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의 현재가 규정되지 않으면 이 우주 속에서 '실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우주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이 그림에서는 '현재'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제의 '지금'일까?
객관적이고 범세계적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대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움직이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보는 현재이다. 그런데 이 경우 나에게 실제인 것과 여러분에게 실제인 것이 다르다. 우리는 객관적인 의미로 '실제'라는 표현을 되도록 쓰고 싶어 함에도 불구하고,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현재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이 우주를 통일된 단 하나의 시간 순으로 정리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러 변화들이 단일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리되지 않을 뿐이다. 세상의 시간 구조는 순간들이 단일한 선형 형태로 연속되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허상이 아니다. 이 세상의 일시적 시간 구조다. 그러나 세상의 일시적 구조가 현재주의의 시간 구조는 아니다. 사건들의 시간적 관계는 우리가 예전에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지만, 복잡하지 않다고 해서 시간적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친밀 관계가 세계의 질서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허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가 한 줄로 놓여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그 어떤 관계도 없는 게 아니다. 변화와 사건은 허상이 아니다. 우리가 알아낸 것은 하나의 세계적인 질서에 따라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실재'일까? 무엇이 '존재'할까? 이 질문은 '모든 것을 뜻할 수도 아무것도 뜻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면 '실제'라는 형용사의 의미가 애매해 수많은 뜻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돌, 국가, 전쟁, 신, 위대한 사랑, 숫자 등 이 실체들 모두 다른 실체들과 서로 다른 의미로 '존재'하고 '실재'한다. 보통 '무엇이 존재하는지', 혹은 '무엇이 실재인지'를 묻는 것은 동사와 형용사를 어떻게 사용하면 좋은지를 묻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문법적인 질문이지 자연에 관한 질문은 아니다.
문법은 우리의 한정된 경험에 의해 만들어졌고, 점점 거대한 이 세상의 풍부한 구조를 포착하면서 이러한 문법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의 혼란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오는데, 이는 우리의 언어 문법이 부분적으로만 적절한 '과거-현재-미래'의 절대적 구분으로 조직되어 있는 데서 기인한다. 현실의 구조는 이러한 문법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지구는 공 모양이고 '위'와 '아래'의 의미가 이곳과 저곳에서 서로 다르다는 새로운 발견에 일치시키려 싸우고 있었다. '위'와 '아래'는 통합된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도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과거'와 '미래'의 의미가 보편적이지 않고 이곳과 저곳에서 달라진다는 새로운 발견에 합치시키려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세상에는 변화가 있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들에는 시간 구조가 있다. 이 시간 구조는 환상이 아닌 어떤 것이다. 단일한 세계 질서로 설명될 수 없는 지역적이고 복합적인 사건이다.
08 관계의 동역학
모든 일상은 벌어지지만 시간 변수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 세상에는 공통적인 시간도 없고 변화에 특별히 관여하는 방향도 없는 걸까?
세상을 설명할 때 시간 변수는 필요치 않다. 세상을 설명할때 필요한 변수는 우리가 인지하고 관찰하여 결국에는 측정할 수도 있는 양이다. 어느 거리의 길이나 나무의 높이, 이마의 온도, 빵의 무게, 하늘의 색, 기차의 속도, 상실의 아픔 등. 우리는 세상을 설명할 때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사물의 양과 특성은 계속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이러한 양들 가운데 다른 것들과 비교될 정도로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양들이 있다. 날짜 계산, 달의 위상들, 수평선 위의 태양의 높이, 시곗바늘의 위치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값들을 기준점으로 사용하면 편리하다. 상당한 변수들이 서로 서로 충분히 동기화돼 있다면, '언제'를 표현할 때 이들을 사용하면 편리하다.
이 모든 변수 중에서 특별한 변수 하나를 선택해 '시간'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과학을 하고 싶다면 변수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설명하는 이론이 필요하다. 즉, 다른 것들이 변화할 때 이것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 말이다. 세상에 대한 근본 이론은 분명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시간의 변수는 필요하지 않고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만을 설명해주면 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변수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설명해주면 되는 것이다.
양자중력의 기본 방정식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식화가 잘돼 있다. 즉, 시간 변수 없이 변량들 간에 성립하는 가능한 관계들을 나타내면서 세상을 설명한다. 양자중력 이론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물들이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서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세상 사물들이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것뿐이다.
존과 브라이스 이 두 사람이 세상의 동역학을 설명하는 아주 간단한 구조의 방정식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 방정식은 발생 가능한 사건들과 그 사건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다른 것은 없다.
이것이 이 세상에 관한 역학의 기본 형태이며, 여기서 '시간'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시간 변수가 없는 세상은 복잡한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그물망이며, 여기에 작용하는 변수들은 우리가 믿기 힘들 정도로 대부분 잘알고 있는 확률 규칙을 따르고 있다.
기초 양자 사건과 스핀 네트워크
내가 연구하는 루프 양자중력 이론의 변수들은 물질, 광자, 전자, 원자의 기타 구성 요소들을 형성하는 장들과 중력장(다른 장들과 같은 층)을 모두 같은 수준으로 기술한다. 일관되지만 독특한 요소들로 구성되고 '그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세상에 대한 '일관성 있는' 설명일 뿐이다.
장fields들은 소립자와 광자, 중력 양자(혹은 '공간 양자')와 같은 입자 형태로 나타난다. 이 입자들은 공간 속에 담겨져 있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공간을 형성한다. 세상의 공간성은 입자들 간에 성립하는 상호 작용들의 네트워크에 다름없다.
입자들은 시간 속에 살지 않는다. 끊임없이 서로 상호 작용하며 그러한 상호 작용에 의거해서만 입자들은 진실로 존재한다. 이 상호 작용이 세상의 사건이고, 방향도 없고 선형적이지도 않은 시간의 최소 기본 형태다. 이 상호 작용에는 아인슈타인이 연구한 휘고 매끄러운 기하학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양자들이 다른 양자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호혜적 상호 작용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의 동역학은 확률적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시간의 경과는 언제나 상호 작용하는 그리고 상호 작용과 관련된 물리적 체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건들에 대한 완벽한 지도를 그릴 수도, 완벽한 기하학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세상은 서로의 관계 속에 존재하느 관점들의 총체와 같다. '외부에서 본 세상'은 난센스다. 세상에서 '벗어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공간의 확장과 시간의 길이를 결정하는 것은 기본 양자와 이들의 상호 작용인 것이다.
공간적 인접 관계는 공간 양자들을 네트워크로 묶는다. 이것을 '스핀 네트워크'라고 한다. 네트워크는 그 나름대로 비연속적인 점프를 통해 다른 형태로 변화하고, 이론적으로는 '스핀 거품'이라 부르는 구조로 설명된다. 네트워크 점프들이 큰 규모에서는 조직이 매끄러운 시공간 구조로 나타난다. 반면 작은 규모에서는 이론적으로 떠다니는 변동이 있고 확률적이며, 불연속적인 '양자 시공간'이 된다. 또한 작은 규모에서는 양자들이 대규모로 무리 지어 나타났다 사라지기만 한다.
이것이 내가 합의의 길을 찾기 위해 애쓰는 세상이다. 평범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없는 세상은 아니다. 이런 이론에서 이제 공간과 시간은 세상을 담는 틀이나 용기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한 형태는 양자 동역학의 근사치일 뿐이며, 그 자체만으로는 공간도 시간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오직 사건들과 관계들만이 존재한다.
3부 시간의 원천
09 시간은 무지
우리는 시간의 원천을 찾는 것이다. 시간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제 파악해보자. 이 세상의 기본 동역학에서 모든 변수가 동등하다면 인간이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의 기본 문법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그냥 어떤 식으로든 '등장'하는 것은 상당히 많다.
- 고양이는 우주의 기본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다. 지구 곳곳에서 불쑥 '등장' 하기를 반복하는 복잡한 것이다.
- 풀밭에 있는 청년 무리들이 무슨 게임을 할지 결정하고 팀을 짠다. 이 과정 전에 두 팀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어디에도 없었다. 팀을 정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 '위'와 '아래'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세상의 기본 방정식은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온 걸까? '위'와 '아래'는 근처에 질량이 큰 무엇인가 있을 때 '등장'한다.
- 안개와 고지대의 깨끗한 공기를 구분하는 '표면'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안개나 구름은 환영인가? 아니다. 멀리서 보았던 광경이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표면이 그렇다. 단단한 대리석 탁자는 내가 원자 정도의 작은 크기가 된다면, 안개처럼 보일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세상 사물들이 '모두' 뿌옇게 보일 것이다. 산이 사라지고 평원이 시작되는 곳은 정확히 어디일까? 우리는 세상이, 중요한 개념들이 상당히 규모로 '등장'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 하늘이 매일 우리 주위를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회전을 하는 것은 우리다. 그렇다면 회전하는 우주의 일상적인 모습이 '환영'일까? 아니다, 실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만 그런 것이 아니다. 태양이나 별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다가 알게 된 것이다. 우주의 움직임은 우리와 우주이 관계에 의해 '나타난다'.
실재하는 어떤 것은 극히 단순한 수준의 세상으로부터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시간도 시간이 없는 세상에서 등장한다.
열적 시간
열 분자들의 격렬한 혼합 과정을 보면, 변화할 수 있는 모든 변수가 실제로 계속해서 달라진다. 그러나 하나는 달라지지 않는다. 바로 고립계 자체의 총 에너지다. 에너지와 시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에너지와 시간은 위치와 운동량, 회전 방향과 각운동량처럼 물리학자들이 '켤레'라 부르는 독특한 물리량의 쌍을 형성한다. 이 커플의 두 항은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서로 묶여 있다. 하나는 어떤 계가 에너지가 무엇인지 아는 것(에너지가 계의 다른 변수들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를 아는 것)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아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시간에 따른 변화를 다루는 방정식들이 에너지의 형식으로부터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에너지가 시간의 흐름 속에 보존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이 변화할 때조차 에너지는 변화할 수 없다. 계가 열교란 상태에 있을 때, 그 계는 동일한 에너지를 갖는 모든 배열들을 거쳐 지나간다. 이 배열들의 집합은 '(거시적) 평형 상태'이다. 잔잔한 상태의 뜨거운 물 한 컵이 바로 이런 상태이다.
시간과 평형 상태의 관계를 해석하는 보통의 방법은 시간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는 계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관장하고, 평형 상태에 있는 계는 동일한 에너지를 가진 모든 배열들을 혼합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해석하는 종래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시간 -> 에너지 -> 거시적 상태
이 논리는 거시적 상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알아야 하고, 에너지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무엇인지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시간이 우선이고 다른 모든 것들에 독립해 있다.
또 다른 방법은 반대로 읽는 것이다. 거시적 상태, 곧 세상에 대한 흐릿한 시각을 말할 뿐인 거시적 상태는, 에너지는 보존하면서 이 에너지가 결국에는 시간을 생성하는 하나의 혼합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거시적 상태 -> 에너지 -> 시간
이러한 관찰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모든 변수들이 사실상 동등한 수준에 있고 그것들에 대해 오직 거시적 상태들을 통해 흐릿하게만 알 수 있는 기본 물리계에서는, 하나의 거시적인 일반 상태가 하나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중요하기에 다시 반복해서 말하면, 하나의 거시적 상태(상세한 사항들을 무시한 상태)가 시간의 어떤 특성들을 지닌 특별한 변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간은 흐릿함의 효과로 간단하게 결정되어진다. 볼츠만은 한 잔의 물속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시적 변수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열의 거동의 흐릿함을 알아냈다. 여기서 물에 대한 가능한 미시적 배열들의 '수'가 바로 엔트로피다. 그런데 사실 흐릿함 자체가 특별한 변수인 시간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상대론적 물리학에서는 그 어떤 변수도 '선험적으로' 시간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거시적 상태와 시간의 흐름의 관계를 뒤바꿀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이 거시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흐릿한 거시적 상태가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거시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 시간을 '열적 시간'이라 부른다. 이것은 어떤 의미의 시간일까?
미시적 관점에서 열적 시간은 특별할 것이 전혀 없고 그저 하나의 변수일 뿐이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에서는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모든 동등한 수준에 있는 수많은 변수들 중 열적 시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간'이라 부르는 변수와 가장 유사한 행동 방식을 지닌 시간이다. 왜냐면 열적 시간과 거시적 상태의 관계는 우리가 아는 열역학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적 시간이 보편적인 시간은 아니다. 거시적 상태, 즉 흐릿함에 의해 결정되어 아직 이에 대한 설명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양자 시간
로저 펜로즈는 상대성에 관한 물리학이 시간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양립 가능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아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양자 상호 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가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 알랭 콘은 시간의 기원과 관련하여 양자 상호 작용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였다.
상호 작용이 분자의 '위치'를 고정시키면, 분자의 상태가 변화한다. 분자의 '속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속도가 '먼저' 고정되고 그 '이후에' 위치가 고정되면, 분자의 상태는 두 사건이 역순으로 발생할 때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만약 내가 전자의 위치를 먼저 측정하고 속도를 그 후에 측정하면, 속도를 먼저 측정하고 그다음에 위치를 측정했을 때와 다른 방식으로 전자의 상태를 바꾸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위치와 속도가 '교환되지 않는 것', 즉 아무 영향 없이 위치와 속도의 순서를 서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양자 변수의 '비가환성'이라 부른다. 이 비가환성은 양자역학의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다. 비가환성은 두 물리적 변수를 측정함에 있어서 순서, 즉 시간성의 기원을 결정한다. 물리적 변수를 측정하는 일은 고립된 행동이 아니며 상호 작용을 포함한다. 이 상호 작용의 영향은 측정 순서에 따라 달라지며, 이 순서는 시간 순서의 기본 형태이다.
상호 작용의 영향이, 세상의 시간 순서의 기반을 형성하는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순서에 달려 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알랭 콘은 기본 양자 전이에서, 시간성이 이러한 상호 작용들이 자연스럽게 (부분적으로) 정렬돼 있다는 사실에 기반 한다는 흥미진진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알랭 콘은 이 아이디어의 수학적 버전도 제공했다. 시간의 흐름과 같은 것은 물리적 변수들의 비가환성에 의해 암묵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비가환성으로 인해 한 계에서 물리적 변수들의 집합은 '폰 노이만 비가환 대수'라는 수학적 구조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자체에 어떤 흐름이 암묵적으로 정의돼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알랭 콘이 정의한 양자계에서의 흐름과 내가 앞서 논의한 열적 시간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알랭 콘은 양자계에서 다양한 거시적 상태들에 의해 결정되는 열 흐름들은 동등하며 일정한 내부 대칭에 이르고, 이 열 흐름들은 함께 모여 정확히 알랭 콘의 흐름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간단히 말해, 거시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 시간과 양자의 비가환성에 의해 결정된 시간은 동일한 현상의 양상들이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근본 수준에서 시간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실제 우주에서 이 열적 시간(혹은 양자 시간)이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변수가 된다.
사물 속 양자의 본질적인 비결정성이 볼츠만의 희미함처럼 이 세상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은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희미함을 만든다. 우리가 측정 가능한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다 해도 말이다.
희미함의 두 원천, 즉 양자 비결정성과 물리계가 엄청난 수의 분자들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 모두 시간의 핵심이다. 시간성은 희미함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희미함은 우리가 세상의 미시적인 세부 사항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결국 물리학의 시간은 세상에 대한 우리 무지의 표현이다. 시간은 무지인 것이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희미하고 불확실한 이미지가 열적 시간이라는 변수를 결정한다. 그 변수는 분명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과 닮은 어떤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고, 평형 상태와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 열적 시간은 열역학, 그러니까 열과 관련이 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는 유사하지 않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고 방향도 없으며 우리가 흐름이라 말할 때 부여하는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10 관점
과거와 미래의 전반적 차이는 세상의 엔트로피가 과거에 낮았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인할 수 있다. 엔트로피가 과거에는 왜 낮았을까? 이번 장에서는 이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생각을 설명할 것이다.
돌고 있는 것은 우리다!
인간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자연의 조각들이고, 우주라는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채우는 일부분이며, 수 많은 것들 중 아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와 세상의 나머지(우리를 제외한 모든 세상) 사이에는 물리적 상호 작용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변수가 우리나 우리가 속한 세상의 한 조각과 상호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변수들 중 극히 '일부'만 상호 작용을 하고 대부분은 우리와의 상호 작용이 전혀 없다. 변수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도 변수를 알아채지 못한다. 세상의 배열이 분명이 다른 배열들임에도 우리에게는 동등하게 보이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와 물 한 컵(세상의 두 조각) 사이의 물리적 상호 작용은 각 물 분자의 움직임과는 무관하다. 마찬가지로,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세상의 두 조각) 사이의 물리적 상호 작용은 저 밖에서 벌어지는 자세한 일들을 무시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희미하다. 왜냐면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의 일부와 나머지 세상 사이의 물리적 상호 작용이 수많은 변수들에 대해 여전히 깜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미함이 볼츠만 이론의 핵심이다. 이 희미함에서 열과 엔트로피의 개념들이 탄생되고, 이 개념들은 시간의 흐름을 규정하는 현상들과 연결돼 있다. 하나의 계의 엔트로피는 확실히 희미함에 달려 있다. 엔트로피가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에 영향을 받는 이유는 '구별할 수 없는' 무수한 배열들에 의해 엔트로피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미시적 배열이 어떤 희미함에 대해선 엔트로피가 높을 수 있고, 또 다른 희미함에 대해선 낮을 수 있다. 이는 희미함이 정신적인 구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희미함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상호 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엔트로피는 임의의 주관적인 양이 아니다. 속도처럼 '상대적인' 양이다.
물체의 속도는 물체 자체의 성질이 아니다. 다른 물체와의 관계 속에서 맺어진 물체의 성질이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에게 "가만히 있어"라고 한다면 이 속도는 '기차와의 관계 속에서' 아이가 멈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속도는 다른 물체와의 관련 속에서 한 물체가 갖는 특성이다. 상대적인 양인 것이다. 엔트로피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이 명확해지면, 시간의 화살에 숨겨진 신비에 대한 매혹적인 답이 열리게 된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세상의 배열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희마하게 하는 방법에 의해서도 달라지고, '우리'와 상호 작용하는 세상의 변수들이 무엇인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즉, 세상의 엔트로피는 세상에서 우리가 속한 부분과 상호 작용하는 변수들의 영향을 받는다.
아주 먼 과거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에게 매우 낮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엔트로피는 세상의 상태를 빈틈없이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변수들 가운데 물리계로서 '우리'와 상호 작용해온 일부 변수들의 집합만을 고려한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세상과 상호 작용하면서 세상을 설명할 때 기술하는 거시적 변수들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극적인 희미함이 발생할 수 있고, 이와 관련하여 우주의 엔트로피가 낮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에 우주가 매우 독특한 배열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대신 우리와, 우주와 우리의 상호 작용이 아마도 특별한 것이다. 우주의 특별한 거시적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우리다. 우주 초기의 낮은 엔트로피, 즉 시간의 화살은 우주보다는 '우리'로 인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이 내 생각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현상 중 하나가 낮동안 이루어지는 하늘의 순환이다. 우리 주변의 우주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장대한 특징이 바로 회전이다. 그런데 정말 이 회전이 우주의 특징일까? 아니다. 회전하는 것은 우주가 아니라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늘이 회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주의 신비로운 역동성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의 독특한 이동 방식에서 기인한 관점 효과 때문이다.
시간의 화살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우주 초기의 낮은 엔트로피는 우리가 우주와 상호 작용을 하는 특별한 방식(우리가 속한 물리 체계)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우주의 양상들 가운데 일부의 특별한 집합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 집합'이 시간에 맞춰져 있다.
우리와 나머지 세상 사이의 특별한 상호 작용이 어떻게 낮은 초기 엔트로피를 결정하는 것일까?
붉은색 카드는 앞쪽, 검은색 카드는 뒷쪽인 카드들을 섞으면 무질서도가 증가 되어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된다. 그러나 처음에 '여러분'이 앞쪽 부분에 어떤 카드들이 있었는지를 기록(기억)해두었기 때문에, 이 카드의 배열은 그것들을 매우 특별한 배열로 선언되었다. 엔트로피가 적은 상태인 것이다.
똑같은 일이 우주의 엔트로피에도 발생할 수 있다. 아마 우주도 특별하게 배열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속해 있는 독특한 물리계와 관련해서만 우주의 상태는 특별할 수 있다.
만약 우주의 어느 부분이 특별하다면, 이 부분의 관점에서 과거에 우주의 엔트로피는 낮고 열역학 제2법칙이 성립하게 된다. 기억이 존재하고 흔적이 남으며, 삶과 사고의 진화가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에 이와 유사한 무엇인가 있다면(내 생각에는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그 무엇인가에 속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종종 접근하고 우주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물리적 변수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은 우주의 특징이 아닐 수 있다. 하늘의 회전처럼, 우리의 한 모퉁이에 박혀 있는 우리가 갖고 있는 특별한 관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과주를 마시는 북유럽에서는 사과가 자라고, 포도주를 마시는 남유럽에서는 포도가 자라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혹은 사람들이 나의 모국어로 말하는 곳에서 내가 태어났다거나, 혹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태양은 우리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이 모든 예에는 인과관계를 혼동하여 발생한 '이상한' 우연이 있다. 사람들이 사과주를 마시는 곳에서 사과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과가 자라는 곳에서 사람들이 사과주를 마시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관계있는 전형적인 현상들은 아무 곳이 아니라 바로 이런 곳에 있다. 진화와 더불어 시간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자각, 그리고 삶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그곳에는 사과주를 만드는 사과가 자라고 있고, 시간도 있고, 삶의 모든 단맛과 쓴맛을 담은 달콤한 주스도 있다.
지표성
과학을 연구 할 때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기술하려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파생되는 왜곡이나 착시 현상을 없애려 노력한다. 과학은 객관성을 추구하며, 동의할 수 있는 관점을 공유한다.
매우 감탄할 만하지만, 관찰자의 관점을 무시함으로써 우리가 잃게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객관성에 집착하다가 우리의 세상 경험이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 던지는 모든 시선은 어쨌든 특별한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 수많은 일들이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지도에서 가리키는 것과 우리가 직접 본 것의 관계가 확실해진다. 지도와 우리가 본 것을 비교하려면 중요한 정보를 추가해야 한다. 지도상에 우리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해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지도가 표현한 장소에 우리가 고정돼 있지 않을 때, 지도는 우리가 있는 곳을 모른다. 예를 들어 산간 지역에 가면 볼 수 있는, 샛길까지 표시되고 붉은 점 옆에 '당신의 위치'라고 적힌 지도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문구다. 지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것은 철학자들이 '지표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표성은 사용할 때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 어떤 단어들의 특성을 일컫는다. '여기', '지금', '나', '이것', '오늘 밤' 등과 같은 말은 말하는 주체와 말하는 주체의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이러한 지표적 문장들은 관점이 존재하고 있고, 관찰 가능한 세계에 대한 모든 설명에 이러한 관점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공간과 시간, 주체의 관점을 무시하고 순전히 '외부로부터' 세상을 설명한다면, 수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세상의 중요한 어떤 측면들은 간과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은 외부에서 본 세상이 아니라 내부에서 본 세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을 하든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마음과 뇌, 공간의 어느 지점, 시간의 어느 순간 안에 있다. 세상 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시간에 관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이다. 우리는 '외부에서 본' 세계의 시간 구조와 우리가 보는 세상의 측면, 즉 우리가 세상 안에 세상의 일부로 존재함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측면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지도를 사용하려면 외부에서 그것을 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지도에 나타난 공간 중 나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시간도 외부에서만 시간을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경험하는 매 순간 우리가 시간 '내부에' 위치해 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주의 수많은 변수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 그 안에서 우주를 관측한다. 우리가 본 것은 희미한 이미지다. 이 희미함은 우리와 상호 작용하는 우주의 동역학이 희미함의 양을 측정하는 엔트로피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주보다는 우리와 관련된 것을 측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위험할 정도로 우리 스스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 대해 다루기 전에, 어떻게 엔트로피의 증가가 (아마도 관점의 효과일 뿐인데) 전반적이고 방대한 시간 현상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별도의 장이 필요하다.
지난 두 장에서 다룬 난해한 내용들을 다시 요약하면, 근본적인 수준에서 세상은 시간의 질서를 갖지 않은 사건들의 집합이다. 이 사건들은 '선험적으로' 동일한 수준에 있는 물리적 변수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세상의 각 부분은 모든 변수들 가운데 일부만으로 서로 상호 작용을 하는데, 이 변수들의 값이 '특별한 부분 계와 관련하여 세상의 상태'를 결정한다.
작은 계(부분 계) S의 입장에서, (S를 제외한) 나머지 우주에 관한 세부 사항들은 구분되지 않는다. S가 극히 일부의 변수들 만으로 나머지 우주와 상호 작용하기 때문이다. S의 '관점에서' 우주의 엔트로피는 S가 구분할 수 없는 우주의 (미시적) 상태들의 수로 계산한다. S가 볼 때 우주는 높은 엔트로피의 배열에 있게 된다. 왜냐면 (정의상) 높은 엔트로피의 배열에 더 많은 미시적 상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시적 상태들 가운데 하나에 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높은 엔트로피 배열에서는 하나의 '흐름'이 나타나는데, 이 흐름의 변수가 바로 '열적 시간'이다. 작은 계 S가 볼 때 엔트로피는 열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마도 위아래로 요동치면서 일반적으로 높게 유지될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다루는 것이 고정 규칙이 아니라 확률이기 때문이다.
이 광활한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 계 S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열적 시간이 흐르는 '양 끝 지점 중 하나에서'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변동이 발생하는 소수의 특별한 작은 계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계들에서 변동은 대칭적이지 않기에 엔트로피는 점차 증가하게 되는데, 이러한 엔트로피의 증가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우주의 초기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작은 계 S가 특별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을 찾다가 그것이 특별한 부분 계와 관련된 관점 효과라는 것을 재발견하게 되었따.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해볼 것이다.
11 특수성에서 나오는 것
에너지가 아닌 엔트로피가 세상을 이끈다
우리는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에너지라고 배웠다. 그런데 앞뒤가 맞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에너지는 보존된다. 에너지는 창조되지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다. 에너지가 보존된다면 우리가 굳이 계속 만들 필요가 있을까? 같은 에너지를 계속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상당한 양의 에너지가 있고 소비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것은 에너지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낮은 엔트로피다.
에너지는 열에너지로, 즉 열로 전환되어 차가운 사물로 이동하는데, 여기서부터는 특별한 조치 없이는 에너지를 이전 단계로 되돌릴 수 없고, 식물을 자라게 하거나 모터를 돌리기 위해 재사용할 수도 없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는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엔트로피는 상승하는데, '이것' 역시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에너지원이 아니라 낮은 엔트로피의 근원들이다. 낮은 엔트로피가 없으면 에너지는 균일한 열로 약해지고, 세상은 열평형 상태에서 잠들 것이다.
지구는 가까이에 태양이 있어서 낮은 엔트로피의 원천이 풍부하다. 태양이 따뜻한 광자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구는 아주 차가운 광자들을 방출하면서, 어두운 하늘 쪽으로 열을 발산한다. 유입되는 에너지의 양은 방출되는 에너지 양과 거의 같아, 결과적으로 이 교환에서는 에너지를 얻지 못한다. 그런데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도착한 뜨거운 광자 하나당 차가운 광자 열 개를 방출한다. 뜨거운 광자 하나의 에너지가 지구에서 방출된 차가운 광자 열 개의 에너지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광자 하나는 차가운 광자 열 개보다 엔트로피가 적다. 뜨거운 광자 하나의 배열의 수가 차가운 광자 열 개의 배열의 수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다. 태양이 우리에게는 낮은 엔트로피를 꾸준히 공급하는 최고의 후원자인 것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낮은 엔트로피가 풍부하고, '그 덕분'에 식물과 동물이 성장하고, 우리가 모터와 도시를 만들고 생각을 할 수 있고 이런 책도 쓸 수 있는 것이다.
생태계를 설계 하려면 우리도 낮은 엔트로피를 제공하고 그로 인해 생태계가 성장해야 겠네, 근데 낮은 엔트로피를 어떻게 줄 수 있을까???
우주의 거대한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우주의 엔트로피 성장이다. 그러나 우주에서의 엔트로피 성장은 상자 안의 가스가 갑자기 팽창하는 것처럼 급속도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점진적으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나무 더미를 예로 들어보자. 이런 나무 더미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가 아니다. 왜냐면 탄소나 수소 같은 구성 성분들이 아주 특별한('질서 있는') 방식으로 결합하여 나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이 특별한 조합이 깨져야 성장한다. 나무가 불에 타면 이 결합이 깨지는데, 나무를 형성한 특별한 구조에서 나무의 구성 요소들이 분열하고, 엔트로피가 맹렬하게 증가한다.(불은 사실상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이다) 그런데 나무는 스스로 타기 시작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갈 수 있는 문을 열어줄 때까지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로 남아 있다. 나무 더미는 카드로 만든 성처럼 불안정한 상태지만, 무엇인가 나타나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붕괴되지 않는다. 불은 나무가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과정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를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장애물은 우주 곳곳에 널려 있다. 과거에 우주는 기본적으로 수소가 방대하게 펼쳐진 곳이었다. 수소는 헬륨으로 융합될 수 있는데, 헬륨이 수소보다 엔트로피가 높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별이 점화돼야 거기서 수소가 헬륨으로 연소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별에 불을 붙일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또 다른 과정이 있다. 은하를 떠돌아다니는 거대한 수소 구름이 중력으로 수축되는 과정이다. 수축된 수소 구름은 분산된 수소 구름보다 엔트로피가 훨씬 높다. 하지만 수소 구름은 거대하기 때문에 응축되려면 수백만 년이 걸린다. (그동안 계속 가열) 수소를 태워 헬륨으로 만드는 핵융합 과정의 점화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문이다.
우리의 모든 역사는 이렇게 엔트로피 증가가 멈추고 점프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무엇인가 개입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과정의 문을 열기 전까지는 낮은 엔트로피의 분지 속에(나무 더미, 수소 구름 등) 갇혀 있기 때문에, 엔트로피의 증가는 빠르지도 않고 일정하지도 않다.
엔트로피의 증가 그 자체가 때에 따라서는 엔트로피가 또 한 번 증가하는 새로운 문을 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산에 있는 제방은 시간이 흘러 점차 마모될 때 까지 물을 보유하고 있다. 제방에서 빠져나온 물은 하류로 흐르면서 엔트로피를 상승시킨다. 이 불규칙한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 우주의 크고 작은 부분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남아 있다.
생명체도 유사하게 상호 뒤얽힌 과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광합성은 태양으로부터 받은 낮은 엔트로피가 식물에 쌓이는 과정이다. 동물은 음식을 섭취하는 방식으로 낮은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살아 있는 모든 세포 내부는 복잡한 화학 공정들의 네트워크로서 낮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문을 여닫는 구조물이다. 분자들은 촉매처럼 공정들의 얽힘을 촉진하거나, 반대로 억제하기도 한다. 각각의 모든 공정에서 엔트로피의 증가는 모든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은 서로 촉매작용을 하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과정들의 네트워크다. 간혹 생명이 특별히 질서화된 구조들을 만들어낸다거나, 국소적인 영역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고 흔히 말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저 낮은 엔트로피의 음식을 분해하고 소비하는 과정일 뿐이다. 나머지 우주에 존재하는 스스로 구조화된 무질서 그 자체다.
아주 일상적인 현상들도 열역학 제2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돌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왜 그럴까? 돌이 바닥에 떨어지면 '에너지가 적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말하는 책을 종종 본다. 그렇다면 돌은 왜 에너지가 적은 상태에 놓여야 했을까? 에너지는 보존된다고 했는데 왜 에너지를 잃은 걸까? 답은, 돌이 바닥에 부딪힐 때 바닥을 가열하기 때문이다. 돌의 역학적 에너지가 일단 열로 전환이 되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돌을 바닥에 멈추게 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엔트로피다.
우주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무질서해지는 과정이다. 우주를 섞는 거대한 손은 따로 없고,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우주의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 작용 속에서 스스로 조금씩 섞일 뿐이다.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통로들이 열려 이를 통해 무질서가 퍼져나갈 때까지, 광활한 영역들은 질서정연한 배열 속에 갇혀 있다.
세상에 사건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 역사를 쓰는 것은, 몇 안 되는 정리된 배열에서 무질서한 무수한 배열까지 모든 사물들의 불가항력적인 혼합이다. 우주 전체는 조금씩 붕괴되는 산과 같다. 매우 서서히 무너지는 구조물과 같다.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 아주 복잡한 사건까지, 우주의 초기 낮은 엔트로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점점 성장하는 엔트로피의 춤이 진정한 생명이 여신 시바의 춤인 동시에 파괴자인 것이다.
흔적과 원인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는 이후 매우 중요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 결과는 언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또한 과거와 미래의 차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흔적만' 있는 이유는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과거의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것뿐이다.
흔적이 남으려면 무엇인가 정지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을 통해서만, 즉 에너지를 열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컴퓨터가 뜨거워지고, 뇌가 뜨거워지고, 달 위로 떨어진 유성들이 달을 가열한다. 열이 없는 세상에는 모든 것이 탄력적으로 튕기고 그 어떤 것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풍부한 옛 흔적의 존재는 과거가 결정되어 있다는 친숙한 느낌을 준다. 어떤 비슷한 미래의 흔적도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열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흔적의 존재는 우리의 뇌가 지나간 사건들의 지도를 광범위하게 펼쳐놓을 수 있게 해주지만, 미래의 사건에 대한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느낌의 바탕을 이룬다. 과거에 대해서는 뭔가를 할 수 없을지라도, 다양한 미래에 대해서는 선택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뇌의 메커니즘들은 발생 가능한 미래를 계산하기 위한 진화 과정에서 설계되었다. 이를 우리는 '결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세부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현재가 정확히 예외적인 상황이 되면, 뇌의 메커니즘이 대체 가능한 미래를 탐구하게 될 것이다. 이때 자연스럽게 '결과'에 선행되는 '원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미래 사건의 원인은 과거 사건이다. 그 원인이 된 사건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동일한 세상이라면 미래 사건이 더 이상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의 경험상, 원인이 결과에 선행한다는 개념은 시간과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두 가지 사건의 원인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가 있는데, 특히 이 공통적인 원인을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발견한다. 예를 들어 두 쓰나미 물결이 인접해 있는 두 섬에 동시에 밀려오면 우리는 미래가 아닌 '과거에' 두 쓰나미의 원인이 된 한 가지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과거에서 미래로 '인과관계'의 마력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뿐이다. 다시 말해, 공통 원인이 과거에 존재한다는 것은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징후일 뿐이다. 열평형 상태나 순수한 기계 시스템에서는 인과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시간의 방향이란 없다.
버트런드 러셀은 "인과법칙은.... 군주제처럼 실수로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은 지난 시대의 잔재다." 과장이다. 기초 수준에서 '원인'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원인의 개념이 무용지물이 될 수는 없다. 단지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는 원인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기억, 원인, 결과, 흐름, 과거의 확정적 본성 그리고 미래의 비결정성은 우리가 통계적 사실의 결과에 이름을 부여한 것일 뿐, 우주의 과거 상태는 있음 직하지 않다.
원인과 기억, 흔적, 세상의 발생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수세기, 수천 년 동안의 인류 역사뿐 아니라 수십억 년에 걸친 우주의 방대한 대하드라마까지 펼쳐놓는다. 이 모든 것은 사물의 배열이 몇 십억 년 전에 '특별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특별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다. 관점과 관련해서 특별하다는 것이다. 과거 사물의 배열에서 특별함이란 희미함이다. 사물의 배열은 하나의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상호 작용할 때, 그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인과, 기억, 흔적, 세상의 발생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관점의 효과일 수 있다. 하늘의 회전처럼, 세상에서 우리의 특별한 관점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다. 이렇듯 시간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12 마들렌의 향기
이제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서 시간의 본성과 관련해 우리가 하는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실체인가? 하지만 이 세상은 실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서로 결합하는 사건들로 이루어지는데....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밀린다 왕이 현자 나가세나에게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스승님?" 스승이 대답했다. "저는 나가세나입니다. 위대한 왕이시여. 그러나 나가세나는 그저 이름이고 호칭이고 표현이고 단순한 단어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아무도 없다면,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것은 누구란 말인가요? 선행을 하며 사는 것은 누구인가요?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쾌락을 즐기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요? 예술가도 없고, 선도 악도 없다면....."
왕은 주체는 자율적인 존재여야 하고,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 머리카락들은 나가세나의 것이잖아요, 스승님? 손톱이나 치아, 살, 뼈인가요? 이름은요? 감정과 지각, 의식은요?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현자 나가세나는 '나가세나'가 실질적으로 이 모든 것 중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왕은 대화에서 이긴 것 같아 보인다. 나가세나가 이 모든 것 중 아무것도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하는데, 이 다른 어떤 것은 주체이 나가세나일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는 왕이 반대하는 논증을 제시하며 왕에게 마차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묻는다.
"저 바퀴들이 마차인가요? 차축이 마차인가요? 멍에가 마차인가요? 부품들의 집합이 마차인가요?"
왕은 확실히 '마차'는 모든 바퀴와 차축, 멍에 등이 모여 함께 작동하고 우리아도 어떤 관계를 맺는 전체 관계망을 단지 언급할 뿐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또한 이러한 관계와 사건을 넘어서는 실체인 '마차'는 존재하지 ㅇ낳는다고 대답한다. 나가세나의 승리다. '마차'와 마찬가지로 '나가세나'라는 이름도 관계와 사건들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과정이자, 사건들이며, 구성물이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의 정체성과 유일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무엇이 내가 카롤로이게 만들고, 나의 분노와 꿈과 마찬가지로 내 머리카락과 내 손톱, 내 발이 나의 일부라고 느끼게 하고, 생각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인지하는 어제의 카를로와 내일의 카를로가 나 자신이라 느끼게 하는 걸까?
우리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1. 첫 번째는 우리 각자를 세상에 대한 '하나의 관점'으로 동일시 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풍부한 상관관계를 통해 우리 모두 각각에 반영된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성찰하고 받은 엄격하게 통합된 방식으로 정교하게 설명하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2. 두 번째 요소는 우리는 세상을 성찰하면서 그것을 실체들로 조직화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한결같고 안정적인 연속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세상을 그룹화하고 분류한다. 세상과의 상호 작용이 더 잘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몽블랑이라 부르는 바위들을 모아 하나의 실체로 범주화하고, 하나의 통합체로 간주한다. 세상에 선을 그어 부분들로 나누는데, 경계를 설정하여 세상을 근사적으로 조각낸다.
우리의 신경 체계도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구조다. 감각적 자극을 받고 계속해서 정보를 정교화하면서 행위를 만들어낸다. 이는 신경망을 통해 진행되는데, 신경망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수정하면서 유입된 정보의 흐름을 (가능한 한 최대로) 예측 하는 유연한 동역학계를 형성한다. 이를 위해 신경망은 동역학계의 다소 안정적인 고정점과 입력 정보에 나타나는 반복 패턴을 연결하면서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그렇다면, '사물들'은 '개념들'처럼 감각적인 입력 정보의 반복된 패턴과 이에 대한 연속적인 정교화 작업이 만들어낸 산물, 곧 신경 동역학계의 고정점이다. '사물들'은 세상의 양상들의 결합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세상의 반복적인 구조와 상호 작용하는 우리와의 연관성에 따라 달라진다. 마차는 이런 것이다.
우리는 특히 '다른' 인간, 곧 살아 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과정들의 총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그룹화한다. 왜냐면 우리의 삶은 사회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아주 많이 상호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와 관련이 깊은 인간의 매듭들이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 '인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나는 내면적 성찰이 아닌 타인과의 상호 작용에서 자아에 대한 개념이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아마 동료들과의 사이를 조절하려고 개발한 정신적인 회로를 우리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있을 때일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생각하던 나 자신의 첫 이미지는 어머니가 보던 어린 꼬마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친구와 여인, 적들에게 비친 우리의 모습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를 주체라고 생각한 경험은 일차적인 경험이 아니다. 수많은 생각들에 기초한 복합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나의 일차적인 경험은(이 경험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나 자신이 아닌, 내 주위의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나 자신'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는 것은, 어느 순간 우리 자신에게 어떤 부가적 특성을 지닌 인간임을 투영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인데, 그 특성이란 진화를 통해 우리가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도록 수천 년 동안 발달해온 능력이다. 우리는 우리와 닮은 존재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반영이다.
3. 우리의 자아를 세우는 세 번째 요소는 기억이다. 우리는 연속되는 순간들 속의 독립된 프로세스들의 집합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매 순간은 기억을 통해 세 겹짜리 특별한 끈으로 우리의 과거와 단단히 엮인다. 우리의 현재에는 과거의 흔적들이 떼 지어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역사'이고 이야깃거리다.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컴퓨터 자판에 'a'를 두들기고 사라지는 찰나의 고깃덩어리가 아니다.
내게는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의 흔적들로 가득 찬 내 생각들과,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과,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온화한 당정함과, 청소년기의 여행들이 들어 있다. 나의 뇌 속에는 이제까지 읽은 책들이 층층이 쌓여 있으며, 사랑과 절망, 우정, 그동안 내가 쓴 글과 들은 이야기들,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 깊었던 얼굴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1분 전에 잔에 차를 따른 사람이다. 조금 전에 이 컴퓨터 자판에 '기억'이라는 단어를 두드린 사람이다. 방금 전에 이 문장을 생각하고 지금은 쓰고 있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이 사라져도 내가 존재할까? 나는 내 인생이 담긴 한 편의 장편소설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를 형성한 프로세스들은 도처에 깔려 있고, 기억은 이 프로세스들을 함께 단단히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뇌의 작용에 대한 연구를 보면 누군가 어떤 물체를 던지면 우리 손은 민첩하게 잠시 후 물체가 날아올 곳으로 움직여 잡을 것이다. 뇌는 과거의 기억을 이용해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물체의 미래의 위치를 신속하게 계산한다. 좀 더 긴 시간 간격으로 우리는 씨앗을 심어 곡식이 자라게 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생존의 기회를 늘리는데, 진화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뇌 구조를 선택해왔다. 우리가 바로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선택이 우리 정신 구조의 핵심이다. 이 선택이 우리에게는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음악의 힘을 빌어 설명한다. 우리가 어떤 찬가를 들을 때, 하나의 소리는 이전과 이후의 소리들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다. 이처럼 음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데, 우리가 현재의 한순간만 포착한다면 어떻게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인지력이 기억과 예측을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찬가나 노래는 우리에게는 시간으로 받아들여지는 무엇인가와 함께 통합된 형태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난다. 그러니까 음악은 시간이다. 우리의 머리에 기억과 예측으로 있고, 전체적으로 현재에 있는 시간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과거 흔적들의 존재는 바깥세상의 실제적인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의를 제기하기 쉬워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4세기 오컴의 월리엄은 자신의 책 <자연철학>에서 인간은 하늘의 움직임과 스스로의 움직임을 모두 관찰하므로, 본인과 세상의 공존을 통해 시간을 인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몇 세기 뒤 에드문드 후설은 (당연히) 물리적 시간과 '시간에 대한 내적 인지'의 구분에 대한 주장을 펼쳤다. 건전한 자연주의자에게는 전자(물리적 세계)가 먼저이고, 후자(의식)는 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물리학이 우리에게 우리 외부의 시간의 흐름이 실재하고 보편적이며, 우리의 직관과도 일치한다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대한) 완전히 합리적 반대가 된다.
그런데 물리학이 대신 이러한 시간이 실재의 기초적인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무시하고 시간의 참된 본질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서양 철학 사상에서는 시간의 '외적' 특성보다는 '내적' 특성에 관한 예측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공간과 시간의 특성을 논하고 공간과 시간 모두 지식의 선험적인 형식으로, 즉 객관적인 세상뿐 아니라 주체가 이를 파악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없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칸트는 공간이 '외적' 감각에 의해, 즉 우리 '외부'의 세상에 있는 사물들을 보고 이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형성된 반면, 시간은 '내적' 감각에 의해 다시 말해 우리 안에 있는 '내적' 상태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세상의 시간 구조의 기초는 우리 생각의 작용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에서 찾아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후설은 '과거지향'(혹은 '보존')에 의거하여 경험의 형성을 설명할 때 우우구스티누스처럼 멜로디 청취의 은유를 사용했다. 우리가 어떤 음을 듣는 순간, 이전의 음이 '보존'되고, 그다음에는 보존된 음이 보존되고, 그런 식으로 계속 진행된다. 그러 말미암아 현재는 점점 더 희미해지는 과거의 연속적인 흔적들을 포함하게 된다. 후설에 의하면 이러한 보존 과정을 통해 현상이 '시간을 구성'한다.
후설의 도형에서 흥미로운 점은 시간에 관한 현상학의 근원이 현상들의 가상의 객관적인 연속(수평선)에서 밝혀진 것이 아니라, 기억(후설이 '미래지향'이라 부른 예측)에서, 즉 도표의 수직선 부분에서 밝혀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는 점은 이것이 (자연철학 안에서는 물론) 물리적인 세계에서조차 계속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 물리적인 세계에는 선형적인 방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물리적인 시간은 없지만, 엔트로피의 변화에서 만들어진 흔적들만은 있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행적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시간은 인간의 척도 내에서만 시간화된다." 하이데거에게도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고 무엇을 하기 위한 시간, 인간이 전념하는 일을 위한 시간이다. 물론 하이데거가 관심을 둔 것은 존재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점뿐이지만(존재의 문제를 던지는 주체를 위한 것), 결국 시간의 내적 의식이 존재의 지평임을 확인하게 된다.
뇌는 결국 외부 세상과 우리 마음의 작동 구조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존하는 실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은 뇌의 작용이다. 우리가 이러한 작용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것은 뇌 전체가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들에 기초해서 작동한다는 뜻이다. 시냅스는 수천 개씩 계속 만들어지지만, 특별히 잠자는 동안 과거 우리 신경계에 작용하던 흔적에 대한 희미한 생각만 남겨두고 사라진다. 희미한 이미지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눈이 매 순간 수백만 가지의 세부 사항들을 보고 있어도 우리의 기억에는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지만, 분명히 세상을 담고 있다.
끝없는 세상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들렌 향기부터 마지막 단어(시간), 바로 '보존된 시간'에 이르기까지 마르셀의 뇌 시냅시스들에 들어 있는 무질서하고 미세한 풍경들만 가득한 책이다.
프로스트는 자신의 첫 책에 "현실은 오직 기억 속에서 형성된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확고부동했다. 그리고 기억은 흔적들의 총체이자 세상의 무질서와 앞서 본 짧은 방정식 ΔS≥0의 간접적 산물이다. 그 방정식은 세상의 상태가 과거에는 '특별'한 구성이었으며 그 때문에 흔적도 남았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우리를 포함한 아마 아주 드문 부분 계와 관련돼 있기에 '특별한'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다. 또한 우리는 선이다. 이 혼란스럽고 거대한 우주의 조금 특별한 모퉁이에서 세상의 일들이 뒤섞이면서 남긴 흔적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고 엔트로피를 성장시키도록 맞춰진 그 흔적들이 만들어낸 선들이다.
이 공간, 즉 앞날을 예측하려는 우리의 연속적인 과정과 결합된 기억이 시간을 시간으로, 우리를 우리로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이것은 우리가 속한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특별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 하고 흔적을 남기며, 물리적 실체인 우리가 기억과 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측은 사소하지만 귀중한 시간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해준다. 시간은 우리를 세상의 일부와 접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시간은 세상의 일시적인 구조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시적인 변동일 뿐이면서도, 우리를 어떤 존재로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원에 대한 허무한 환상을 만들게 한다.
13 시간의 원천
우리는 온 우주에서 균일하고 동등하게 흐르고, 그 흐름 속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익숙한 시간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이 익숙한 틀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시간은 아주 복잡한 현실의 근사치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온 우주에 공통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부분적'으로만 순서가 있을 뿐이다. 우리 주위에는 현재가 있지만 멀리 있는 은하에서는 그것이 '현재'가 아니다. 현재는 세계적이 아니라 지역적이다.
세상의 사건을 지배하는 기본 방정식에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없다. 그 차이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생각과 함께, 과거의 세상이 우리에게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문제가 될 뿐이다.
지역적으로, 시간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 우리가 물체 덩어리에 가까울수록, 우리가 빨리 움직일수록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른다.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은 단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시간이 흐르는 리듬은 자체의 동역학을 지니고, 중력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실체인 중력장에 의해 결정된다. 양자 효과를 무시하면, 시간과 공간은 우리를 담고 있는 거대한 젤리의 양상들이다.
하지만 세상은 양자적이고, 젤리 같은 시공간 역시 근사치이다. 세상의 기본 문법에도 공간도, 시간도 없고, 오직 물리량을 변화시키는 과정만 있을 뿐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확률과 관계를 산출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우리가 경험한 시간과 유사한 것이 별로 없다. 특별한 '시간' 변수도 없고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없고 시공간도 없다. 우리는 세상을 설명하는 방정식을 쓸 줄 안다. 이 방정식에서 변수들은 서로에 상대적으로 변화한다. 세상은 '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변화가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꽉 막힌 우주'도 아니다. 오히려 사물들이 아니라 사건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9장부터는 시간이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시간 감각이 생길 수 있었는지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다. 놀라운 일은, 시간의 친숙한 면들이 출현하는데 우리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 세상의 작은 일부인 인간의 관점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세상을 본다. 세상과 우리의 상호 작용은 부분적인데,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보게 되는 이유다. 이 희미함에 양자의 불확정성이 추가된다. 그러 인한 무지가 특별한 변수인 열적 시간의 존재와 우리의 불확실성을 양화한 엔트로피의 존재를 결정한다.
아마도 우리는 나머지 세상과 상호 작용하면서 열적 시간의 한 방향으로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특별한 부분 계에 속하는 것 같다. 따라서 시간의 방향성은 실제적이지만 관점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와 관련돼' 있고, 우리의 열적 시간과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이 열적 시간을 간단히 '시간'이라 부르는데, 이 변수 안에서 사물들이 순서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고 우주의 전개를 이끈다. 또한 과거에 대한 흔적과 잔존물 그리고 기억이 존재하도록 한다. 인간은 과거의 흔적들에 대한 기억으로 뭉쳐져 있는, 엔트로피 증가는 대역사의 산물이다. 우리는 각자 각자가 하나의 통합된 존재다. 세상을 반영하고 있고, 타자와의 상호 작용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하나의 통합된 실체의 이미지를 구축해왔으며 기억으로 통합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시간의 '흐름'이라 부르는 것이 탄생한다.
'시간' 변수는 세상을 설명하는 수많은 변수 중 하나다. 중력장의 변수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 우리 규모에서는 양자의 요동을 기록할 수 없기에 시공간을 아인슈타인의 거대한 연체동물처럼 잘 확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규모에서는 이 연체동물의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무시될 수 있다. 따라서 시공간을 탁자처럼 견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탁자에는 차원들이 있는데 우리가 공간이라 부르는 차원과 시간이라 부르는, 엔트로피가 그것을 따라 성장하는 차원이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빛에 비해 매우 낮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계마다 서로 다른 고유 시간이 있음을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며, 또한 어떤 물질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따라 다르게 흐르는 시간의 속도 차이도 너무 작아 식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아닌, 우리가 경험한 균등하고 범세계적이고 순서가 있는 시간, 이 단일한 시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이 시간은 엔트로피의 성장에 의존하여 시간의 흐름에 정착한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특별한 관점에서 기술한, 세상에 대한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이다.
서로 다른 다양한 근사치들에서 파생된 확연히 구분되는 수많은 특성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 구조의 복잡한 개념, 이것이 우리의 시간이다. 시간의 개념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고 다층적인 측면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제각각의 다양한 층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평생 시간의 주위를 맴돌고 나서 알게 된 시간의 물리적 구조이다.
14 이것이 시간이다
현자인 유디스티라에게 무엇이 가장 큰 신비인지 물었다. 이에 현자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데도 살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산다."라고 대답했다.
세월의 흐름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을 두려워하고 태양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이것은 이성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이성적인 논제들이 아니다. 이성은 개념을 밝히고 오류를 찾아내는 데 필요하다. 그런데 이성이라는 것 자체가 포유류로서, 사냥꾼으로서,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내면 구조에 우리가 행동하는 동기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성은 위와 같은 두려움들이 연결되는 사실을 밝히기만 할 뿐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애초에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 두 번째 요건으로 이성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첫 번째 요건은 생존에 대한 갈망과 배고픔, 사랑의 필요성, 인간 사회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는 본능 등을 충족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요건은 첫 번째 요건이 없으면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성은 본능을 다스리지만 본능 자체를 중재의 첫 번째 기준으로 삼는다. 사물과 우리의 갈증에 명목을 부여하고 위험을 피해 돌아가고 숨은 것들을 보게 해준다. 비효율적인 계획이나 잘못된 믿음, 선입견을 인지하게 해준다.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이성이 있다. 이성은 우리가 사냥할 먹잇감을 찾아주는 길이라고 생각해 따라간 흔적이 잘못되었을 때 이를 깨우쳐주기 위해 발전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동기를 인식한다. 그리고 이 동기들에 명목을 부여한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동기가 있다. 그중 일부는 다른 동물들과 공유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또 어떤 것들은 인간끼리만 공유한다. 또 어떤 것들은 우리가 속해 있다고 인식되는 아주 작은 집단과 공유한다. 배고픔과 갈증, 호기심, 동료의 필요성, 사랑에 대한 욕구, 연애 감정, 행복의 추구, 세상에서의 위치 확보와 가치 있는 존재, 인정받는 존재,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할 필요성, 믿음과 명예, 하느님의 사랑, 정의와 자유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욕망....
이 모든 필요와 욕구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원래 이런 것들이 필요하도록 만들어졌고 지금도 필요하다. 오랜 세월을 거친 선택과 화학적,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들의 산물로, 다양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상호 작용을 이뤄 현재의 우리라는 재미있는 프로세스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내면의 성찰과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사소한 것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전두엽이 매우 거대해진 덕분에 우리는 달에 착륙할 수 있었고, 블랙홀을 발견했으며, 무당벌레의 사촌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밝혀내지 못했다.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 자체도 명확하지 않다. 우리는 세상을 보고 설명하고 정리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세상과 실제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온전히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의 시선이 근시적이라는 것은 우리도 잘 안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각이 나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보다는 더 발전된 상태다.
우리가 세상을 관리하고 돌보기 위해 찾은 수단들은 굉장히 많았고, 그중 최고는 이성이다. 이성은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이성은 핀셋 같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기도 하다. 불이나 얼음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에 손을 대야 할 때 사용하는 연장 같은 것인데, 우리가 생생하게 불타는 감정처럼 인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의 실체다.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기 때문에 우리도 멋진 표현을 써가며 이 감정들에 애정을 쏟는다. 또 이 감정들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든다.
내게 삶, 이 짧은 삶은 감정들의 끊임없는 외침에 불과하다. 이 외침은 우리를 이끌어 하느님의 이름 안에, 정치적 신념에, 우리를 안심시키는 의식 안에 가두어 결국 정리된 상태로 아주아주 거대한 사랑 안에 머물게 한다. 결론적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때로는 고통이 되고 때로는 노래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 노래는 시간에 대한 인지이다. 이 노래는 시간이고, 그 자체가 시간의 시작인 베다의 찬가이다. 베토벤의 <장엄미사곡> 중 '베네딕투스'에서 바이올린 곡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순수한 절망, 순수한 행복을 표현한다. 그 곡 속에서 숨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멈춰 있으면, 신비로운 감각의 원천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의 원천도 바로 이것이다.
잠시 후 곡이 잦아들면서 멈출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참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것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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