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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게임

 

 

서문

지위,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꿈

인생은 게임이다. 

게임의 숨은 규칙은 우리의 내면에 새겨져서 우리의 생각과 신념과 행동을 은밀히 조종한다.

 

이런 형태를 띠는 이유는 인간의 진화 과정 때문이다. 인간은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설계되었다. 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종으로서 인간의 생존은 항상 공동체에 받아들여져 지원을 받는지에 달려 있다.

 

수용의 기쁨과 거부의 고통 두 가지 강렬한 정서가 작동한다.

인간은 집단에서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위로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삶에 의미와 목적이 있고 잘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관계를 맺고 지위를 얻으려 한다. 집단에 수용되고 집단 안에서 지위를 얻으려 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이 인생의 게임이다.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들으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나아가 우리 집단도 다른 집단과 지위 경쟁을 벌인다.

우리 집단이 지위 경쟁에서 승리하면 우리도 승리한다. 우리 집단이 패하면 우리도 패한다. 이런 식의 게임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룬다. 

 

우리는 지위를 갈망하고 지위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지위를 잃으면 우리의 사고는 변형되고 안정적인 행복을 누릴 가능성도 사라진다. 항상 타인의 멸시와 찬사에 주파수를 맞추고 살아가며 옹졸해지기도 하고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하고 과격해지기도 하고 과대망상이나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모든 사회적 소통에서 일이나 사랑이나 가정생활에서, 인터넷에 게시물을 올리면서도 교묘히 지위 게임을 벌인다. 옷차림과 말투와 신념으로 게임을 한다. 깨어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해석하며 살아간다. 살짝 미끄러지면 공포에 휩싸이고 조금 올라가면 희열을 맛본다. 이렇게 매일 매 순간 오르내리고 또 오르내리며 요람에서 무덤으로 향한다. 이것은 끝나지 않는 게임이다.

 

이것은 최선의 현실이다. 이렇게 특이하고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면 인간은 애초에 다른 동물들을 능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위를 얻는 데는 여러 가지 전략이 있다. 전략을 세우고 혁신하려 하고, 승리하기 위해 자기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그러다 성공하면 수 많은 사람이 우리의 노력으로 혜택을 본다. 또 인간은 덕망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분투한다. 

 

이렇게 노력하는 동안 게임을 따라 온갖 감정이 요동친다. 

 

이 이야기를 파헤쳐보면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가 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망상과 독재에 빠지는 지도 알 수 있다.

 

우리가 과거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집단으로 갈라져 충돌하는 이유는 우리가 삶을 지위 게임으로서 '플레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무수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입장과 남들의 입장을 저울질한다. 그리고 자동으로 각자의 입장과 각자가 속한 집단을 서열화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이야기의 행태로 경험한다. 뇌는 우리에게 저들이 왜 우리 위에 있고 저들이 왜 우리 아래에 있는지에 관해 왜곡된,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를 공급한다. 이야기 속에서는 복잡다단한 현실이 선과 악이 대결하는 만화처럼 단순한 도덕적 갈등으로 축소된다. 누구나 이런 이야기를 쉽게 믿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망상이다.

 

이 책은 인간 삶의 숨은 구조를 파헤친다. 그리고 지위 게임의 규칙이 바뀌는 사이 자아와 문화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아 볼것이다. 세 가지 지위 게임(지배 게임, 도덕 게임, 성공 게임)을 정의.

 

이 책의 주장은 지위가 인간의 기본 욕구라는 단순한 개념에서 출발한다. 궁극적 추동이라고 부르며 일종의 '동기의 어머니'로서 진화 과정에서 자연선택으로 살아남아 뇌에 새겨진 다른 많은 하위 신념과 행동의 기원인 셈이다.

 

따라서 인생이 지위로만 굴러간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른 많은 욕망으로 움직인다. 

 

인간의 삶을 더 정확히 정의해서 모두가 삶의 도전에 맞서고 삶의 공포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궁극적으로는 의미 있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에 관해 조금이라도 더 확신하는 것이 바램이다.

 

 

1부. 집단적 존재로서의 인간

1. 교도소에 쌓은 지위의 성전

범죄자 벤의 두 개의 삶

뇌는 스스로 삶을 구축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구축한다.

 

"저는 종신형 재소자로서 교도소 내 서열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했어요. 교도소 변호사로서도 그랬고요. 이런 게 제게 지위를 주었어요.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순간 다 물거품이 되는 거죠."

 

지위 욕구는 교묘히 정체를 숨기고 있다. 지위는 남들에게 호감을 사거나 수용되는 것과는 다르다. 관계와 연관된 별개의 욕구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추종하거나 존경하거나 추앙하거나 칭찬하거나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도록 허락해주는 상태, 이것이 지위다.

 

지위는 안녕감과 강력히 연결되어 있다.

 

2. 어울리고, 앞서 나가기

지위 게임의 핵심은 관계다.

 

신념을 품고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다고 세상은 말한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는 부족의 일원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과 연결되려는 본능이 있다. 그리고 집단에 들어가서는 사람들에게 인정과 찬사를 받으려고 애쓴다. 성공에는 타인의 인정과 칭찬이 필수다.

 

높이 올라갈수록 살아가고 사랑하고 자손을 낳을 가능성도 커진다. 이것이 인류 성공의 핵심이다. 이것이 지위 게임이다.

 

사회적 동물에게 단절은 두려운 상태다. 단절은 인생이 실패했고 세상은 적대적인 곳이 되었다는 경고 신호다.

 

하지만 관계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누구나 인정받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위로 오르고 싶어 한다. 

 

만성적으로 지위를 박탈당하면 마음이 적대적으로 바뀌어 자기를 파괴할 수도 있다.

우리의 뇌에 지위는 산소나 물만큼 중요한 자원이다. 그래서 지위를 잃으면 무너진다.

 

 

3. 뇌는 우리를 영웅이라 속인다

상징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

 

우리는 스스로 이야기속의 영웅이라 믿는다. 이것은 뇌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낸 착각이다.

 

뇌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다음으로 그 경험의 중심에 우리를, 자아를 놓는다. 뇌는 영웅을 만드는 장치로서 자아라는 환상과 이에 대한 흥미로운 서사를 지어내서 인생을 희망의 땅으로 가는 여정으로 설정한다.

 

개인적인 서사, 곧 의식 차원에서 경험하는 이질적인 부분들이 모두 엮여서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혼돈 속에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대개는 틀린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뇌는 주인이 스스로 영웅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기 위해 뇌는 우리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우리의 신념이 더 올바르고 우리의 미래가 더 희망적이라고 믿게 하기 위한 수많은 '현실 왜곡'의 무기를 사용한다.

 

우리는 도덕적 편향을 사용하여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얼마나 부정직하게 게임을 하든, 뇌는 우리가 결국 대다수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이 만든 꿈속에서 살아간다.

 

뇌가 "세상을 보상 공간으로 표상'한다고 말한다. 뇌는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도록" 설계되었다.

 

인간은 관계와 지위에 가치를 둔다.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유대감을 쌓는다. 그리고 자원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 한다.

 

인생의 게임에는 점수판이 없다. 그저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상징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뇌의 보상 체계는 절대적 보상보다 상대적 보상이 주어질 때 가장 많이 활성화된다. 우리는 그냥 더 많이 얻을 때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보다 더 많이 얻을 때 가장 행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권력과 마찬가지로 도 지위의 상징이다. 인간은 상상력이 뛰어나서 거의 모든 것을 지위의 상징으로 삼는다.

 

뇌의 지위 탐지 체계는 한순간도 꺼지지 않는다. 누가 최상층에 내리는가? 제일 화려한 여행 가방을 가져왔는가? 등등

 

인간이 이처럼 상징적인 지위를 쫓는 이유는 "인간의 사회적 삶이 주로 많은 사람이 상징을 인지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쓴다. 서로 연결된 사람들은 "이런 상징에 대한 지각을 공유하면서 이것을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정체성에 통합한다. 말하자면 서로 연결된 사람들을 '친족'으로 경험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현실을 우리와 비슷하게 다루고 인생에 대해 같은 꿈을 꾸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하나의 집단을 이룬다. 서로 같은 상징을 알아보고 같은 게임을 한다. 서로에게 지위를 부여하고 참마의 부족이 되는 것이다. 참마를 보면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현실을 지각하는 사람들과 깊이 연결된 느낌을 받는다.

 

모두가 공유하는 상징을 이용해 거대한 의미의 왕국을 건설한다. 이런 왕국-가상의, 모두가 연결된, 현실에 대해 뇌가 만들어낸 환각-이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이다. 지위 게임은 장소다. 신경계 영토이자 우리의 세계다.

 

 

4. 사회적 존재이기에 게임을 한다

규칙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

우리는 이런 진실 위에 무한히 다양한 상상의 게임을 구축한다.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지위'를 의미하는 상징으로 무엇을 삼을지 합의한 다음 저마다 그 상징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꿈은 이런 상징에 가치를 부여한다.

 

사실 인생은 상징을 중심으로 조직된 일련의 환각적 게임이다. 

인생의 지위 게임도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합의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옳다고 배운 대로 행동하면서 규칙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를 기준으로 우리 자신과 남들을 평가한다. 다시 말해서 지위를 측정하고 부여하고 박탈한다. 규칙은 가까운 조상과 먼 조상이 만든 것이다.

 

이 규칙은 DNA와 문화에 새겨져 있다.

 

아동기에 들어선 아이는 교사와 부모가 처벌과 칭찬을 반복하면서 문화적 규칙과 상징을 주입한다. 이를 통해 양심이 발달하면서 수치심과 당혹감, 죄책감, 후회와 같은 거친 감정의 파도를 헤쳐 나간다.

 

양심은 우리에게 '사회적 거울'이 되어준다. "우리는 끊임없이 양심의 거울을 흘깃거리며 평판을 흠집 낼 법한 수치의 함정을 끊임없이 추적하거나 개인의 성장을 자랑스럽게 기록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의 규칙과 상징이 우리의 신념과 생각과 행동을 이끈다. 이런 규칙이 우리를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가 내재화한 규칙을 잘 따르면서 게임을 잘한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 지위를 부여한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서 지위를 빼앗는다.

 

지위 게임은 우리의 내면에 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밖으로 표출된다. 그래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의미의 세계를 구축해서 그 안에서 게임을 수행한다.

 

명상은 정반대의 기능을 한다. 치유가 가능

 

5. 지위 게임의 세 가지 변종

지배 게임, 도덕 게임, 성공 게임

 

우리가 주먹과 송곳니에서 멀어진 이유는 공동의 상상 속에서 상징으로 게임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상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얼마나 잔혹한지가 아니라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이제는 스스로 집단에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서 명성에 따른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이 되어 남들에게 유익한 지식과 기술을 선보이는 방법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명성을 높여서 지위를 얻는 방법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신념이나 행동을 보여주는 방식)

 

명성 게임은 상징의 게임이다. 우리의 평판으로 하는 게임이다.

평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우리의 상징적 모습이다. 뇌는 이렇게 고도로 구체적인 상징적 '자기'를 축적할 능력을 요구했다.

 

평판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 속에서 살고 죽었다. 소문을 퍼트리기 위해 말이 생겼다.

 

소문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부족의 규칙을 알리고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소문을 나누면서 서로 규칙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규칙에 얼마나 충실한지 보여주고 그걸로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소문은 "관심을 끌고 사회적 비교를 통해 자신의 이익과 이미지를 높이고 남들의 이익과 이미지를 떨어트리는 행위"다.

 

"자연선택이 우리의 심리에 영향을 끼쳐서 우리는 고분고분 행동하고, 규칙을 어기면 부끄러워하고, 사회적 규칙을 습득하고 내면화했다."

 

지위를 얻는 게임의 방식이 변화 했다.

번쩍이는 보석을 치장하고,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탐나는 물건을 만들고 거래하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지위 추구 활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만심이 강해지는 한편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되었다. 지배 게임에서 평판 게임으로 넘어가면서 원시 영장류에 비해 집단의 구성원에게 더 너그러워졌다.

 

인간 만큼 명성 게임을 하는 종은 없다. 명성은 인간이 가장 갈망하는 가치다. 명성은 우리가 쓸모 있고 부족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이끄는 뇌물과 같다.

 

명성은 우리가 서로 협조하면서 살아가는 능력을 기르게 해준다. 우리는 협조하는 집단의 일원으로서 목표를 추구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애초에 우리가 게임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중시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의 종으로서 성공해서 지구를 지배할 수 있게 된 비결이다.

 

인간은 지위를 잃으면 견딜 수 없다.

 

우리는 지위 게임을 할 때마다 평판을 쌓는다. 평판은 모든 플레이어의 마음속에 제각각의 깊이와 제각각의 공정성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평판은 우리가 인생의 게임에서 내세우는 왜곡되고 부분적인 아바타의 평판이지 우리 자신의 평판이 아니다.

 

 

6. 인플루언서를 모방하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마음을 끄는 이런 행동을 배워서 자기도 서열에서 위로 올라가려 한다. 그래서 최대한 그 사람 곁에 가까이 있으려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얻은 소중한 시간과 지식의 대가로 그 사람에게 상징적 지위를 부여한다.

 

명성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지위의 신호(문을 잡아주고, 특별한 위치에 앉히고, 존칭을 불러주고, 선물을 주는 신호)에 즐거워 한다.

 

원숭이도 지위가 높은 원숭이를 모방한다. 그러나 모든 행동을 모방 하지는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모든 행동을 모방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부터 기업까지 수많은 지위 게임의 특징인 '신념'이라는 개념의 바탕으로 보인다. 타당하지 않더라도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신념과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낄 수 있다. 

 

모방 행동의 상당 부분은 잠재의식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왜 모방하는지 모른다. 배울 가치가 있는 여러 '단서'를 무의식중에 탐색하는 것이다.

 

뇌는 일단 감지되면 집중하게 만드는 네 가지 주요 단서를 찾도록 설계되어 있다.

  1. 자기 유사성
  2. 능력
  3. 성공
  4. 명성

이런 단서들이 사람들에게서 잠재의식 차원의 모방-아첨-순응 행동을 매우 효과적으로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의 중심에 명성 있는 사람을 모방해서 나 역시 명성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7. 도전받을 때 우리는 짐승이 된다

지위에 대한 감각이 도전받을 때 우리는 손쉽게 존재의 다른 상태로 미끄러진다. 원시적인 설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게임의 지위가 위협받으면 지배적인 지도자를 옹립하는 경향이 있다.

 

살인 사건이 주로 "지위 문제로 발생한 것"이고 "사소한 문제로 격렬하게 말다툼하다 벌어진 결과"

 

범죄자들의 폭력의 원인을 연구 하면 "그자가 날 무시해서"

 

여자들은 경우 폭력의 원인이 조금 다르다. 지능이나 비행이나 성 행동과 연관된 모욕감에 의해 촉발된다.

여자 청소년은 항상 관계를 중심으로 공격성을 표출한다. '네 평판이나 관계를 망가트릴 거야"라는 식으로

적을 외면하고 게임과 단절시키고 조롱과 소문과 모욕을 통해 적의 지위를 빼앗으려 한다.

 

지배 행동은 각자의 상대적 지위가 모호할 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누구나 속에 짐승을 품고 산다.

 

 

8. 남성, 과대망상, 모욕감

지위와 마찬가지로 모욕감도 남들에게서 온다. 지위와 마찬가지로 모욕감은 사회적 서열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관련이 있다.

 

모욕감은 지위와, 지위를 얻는 능력을 철저히 박탈당한 상태

모욕적인 사건의 네 가지 전제 조건

  1. 자신이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2. 사건은 공개적으로 발생한다.
  3. 비하하는 상대에게 어느 정도 지위가 있어야 한다.
  4. "지위를 얻으려는 지위를 거부"당해야 한다.

심각한 모멸 상태에 놓이면 서열의 아래로 추락해서 더는 지위 게임에서 쓸모 있는 참가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인간이 저지르는 폭력의 근본 원인이 "수치심과 모욕감을 떨쳐내고 그것을 자부심으로 대체하고 싶은 마음"에 있다.

 

사회에서 급작스럽게 거부당하거나 오랜 시간에 걸쳐 거부당한 상태는 학교 총기 난사 사건에서 주요 원인으로 밝혀졌다.

 

관계와 지위의 원천이 사라진 그의 머릿속에서 대혼란이 폭발했다.

 

WOW는 그가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낀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것은 지위 게임이었고, 그는 그 게임에 뛰어났다. 게임이 엘리엇이 보인 광기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정신을 붙잡아준 마지막 끈이었을 것이다.

 

9. 최선의 게임 조건

일상, 얼굴을 맞댄 사람들, 적절한 보상

 

WOW는 지위를 생성하는 장치다. 대안 현실을 마련해 주었다. 엘리엇은 그 안에서 삶을 구축했다. 자기 나름으로 지배와 성공의 게임에 참여한 것이다.

 

우리는 수 많은 가상 세계에서 지위를 두고 경쟁한다.

이런 게임은 대개 시간 제약이 있다. 또한 공공연한 '제로섬' 게임이다.

구체적인 목표가 있고, 또 공식적인 서열이 있어서 참가자나 팀의 지위가 구체적으로 점수로 표시되어 모두가 볼 수 있게 공개된다. 하지만 일상적인 인생의 게임에는 이런 것이 없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인생의 지위 게임에서는 게임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별도로 조작할 필요가 없다.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보내주는 상징적 보상으로 인해 더 큰 성과를 올리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서열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많은 적을 완파했다는 신호보다 우리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집단이 주는 긍정적 감정이 핵심이다.

 

"우리는 서로의 성과를 비롯해 별별 것을 다 칭찬해줘요. 누가 자기 운동을 다 마치지 못하거나 힘든 일을 겪거나 슬럼프에 빠질 때면 다 함께 응원해주는 게 좋아요."

 

행복은 사회 전체의 다른 모두와 비교해서 자신의 서열을 확인하는 사회경제적 지위와는 밀접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작은 게임이 중요하다.

 

애초에 작고 국지적인 게임을 하도록 타고난 인간의 성향

 

국가 지도자의 원대한 목표보다 전우들과의 관계와 전우들에게 존중받고 싶은 욕구와 지배 게임의 원초적 황홀경에서 동기를 얻는다. 

 

내부 경쟁이 치열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모두가 모두와 대적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잡히면 서로에게 지위로 보상해 주는 방식은 중단되고 지위 공급이 부족해질 수 있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삶이 비참해질 수 있다. 한마디로 게임이 오염된다.

 

나은 전략은 대립 구도를 만드는 것이다. 대립 구도는 경쟁과는 그 초점이 다르다. 경쟁은 다수가 다수와 겨루는 것이고, 대립 구도는 주로 일대일의 관계다.

 

 

2부 한계 없는 욕구

10. SNS라는 슬롯머신

'좋아요'에 중독되는 뇌

 

인간은 관계와 지위를 얻을 때 성공한다.

우리가 관계와 지위를 얻기 위해 쓰는 전략이 우리의 정체성이 된다.

SNS는 지위 게임이다. 인간의 삶이 온라인에 펼쳐지는 것이다.

 

컴퓨터와 설득은 뭐가 다른가? 한마디로 양방향인 점이 다르다. 컴퓨터는 이용자나 이용자의 삶과 상호작용하면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전략을 조율하면서 마치 지각이 있는 존재인 양 소통한다.

 

포그 모형에서는 세 가지 힘이 동시에 충돌할 때 행동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1. 동기 : 그것을 원해야 한다.
  2. 촉발 요인 : 무언가가 그것을 더 얻고 싶은 욕망을 자극해야 한다.
  3. 능력 : 쉽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링크드인은 허브 앤 스포크 아이콘으로 이용자의 직업 네트워크의 크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이콘이 클수록 지위가 높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지위를 원하고(동기), 아이콘을 키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촉발 요인), 링크드인은 이에 대한 간단한 해결책으로 이용자들이 이 사이트를 통해 서로 더 많이 연결되게 해준다(능력).

 

단순한 아이콘 하나가 수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건드리며 강력한 효과를 냈다.

 

포그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는 지위 게임이 작동하는 방식을 변주해서 이용자들이 SNS에 강박적으로 집착할 만한 기능을 고안했다. 프로그래머가 이용자를 어떤 행동으로 유도하고 싶으면, 이용자가 원하는 '목표 행동'을 수행할 때 그 행동을 강화하는 상징을 제시해야 한다. 이때 긍정적 강화가 일관적이지 않아야 한다.

"기존 행동을 강화하려면 강화 요인이 예측 불가능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슬롯머신이 좋은 예다.

 

이런 예측 불허의 보상은 목표 행동(도박)을 더 강렬하고, 심하게는 중독적으로 만들어 준다.

 

사실 SNS는 지위를 위한 슬롯머신이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 때마다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도박하는 사람들이 슬롯머신에서 얼마나 나올지 알 수 없듯이 우리도 어떤 보상을 받을지 모른다. 상이 매번 바뀐다. 이런 변주가 일어나면서 강박이 생긴다. 게임을 계속해서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계속 알아보려 하는 것이다.

 

SNS는 거대한 지위의 저장고이자 포기하기 어려운 소중한 자원이다. 이미 가진 것을 지키고 더 많이 얻으려면 게임을 계속해야 한다. 슬롯머신 손잡이를 당기고 또 당겨야 한다.

 

SNS의 이러한 영향은 우리가 위대한 여정에 오른 영웅이 아니라 어디서든 상징적인 지위 게임을 하도록 설계된 생물학적 존재라고 본다면 SNS의 성공에 고개가 끄덕여질 뿐 아니라 필연적인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11. 그 누구도 완벽하게 행복할 수 없다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지위 욕구

 

행복한 결말은 없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끝내 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지위의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승리하든 끝까지 만족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완벽한 행복은 우리가 현실을 기반으로 해 만든 꿈의 일부다. 

 

기업에서 서열이 낮은 사람은 "서열이 높은 사람의 의견과 행동에 습관적으로 과장되게 동의하면서 영향력을 얻으려 하면서도" 비판적인 생각은 거의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결함'이 표출된다. 지도자들은 지위를 높여주는 달콤한 소식을 쉽게 믿어버린다. 칭찬과 동의는 비판 없이 선뜻 인정하면서 나쁜 소식은 너무 적은 데 의심을 품지 않는다. 누가 나쁜 소식을 전하면 그 사람에게는 까다롭다거나 부정적이라거나 "팀에 협조적이지 않다"는 오명을 내린다. 그의 자리까지 위협한다.

 

지위에 취한 지도자는 게임에서 자신의 자리를 보면서 자기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유리한 꿈을 만들어낸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유리한 꿈을 만들어낸다. 그의 뇌는 그를 높은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는 영웅담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착각에 빠져서 듣기 좋은 말은 진실로, 반박하는 말은 부당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합리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은 악당으로 만들어 처벌한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히 두려워하며 입을 다물어버린다. 흔한 일이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기중심적인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 남들에게 아첨을 받고 그걸로 들뜨면 자신의 삶에 의구심을 품기 어렵다. 그냥 인정하고 즐기고 자기가 더 많이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아가 이미 얻은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게임을 계속하면서 다음 행동이나 그다음 행동이 자기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어쩌면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지위를 얻는다고 해서 완벽히 행복해지지 않는다.

 

"유명해지면 누구도 예전처럼 믿지 못하게 돼요...." 슈퍼스타들은 이런 게임에 환멸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위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들이 제대로 된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수없이 많은 성공을 이루었는데 이제 도덕의 지위를 원하는 것이다.

 

12. 제로섬 게임

공식적 지위와 비공식적 지위

 

인간은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으스대는 꼴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와 계층, 성별, 문화를 초월하는 분노의 마음이다.

 

사회의 개인이 대체로 평등해지는 이유는 누구도 자기보다 압도적으로 큰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모두가 투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가 '권위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신호에 매우 민감했고 이런 신호를 예의 주시하며 색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끌리기도 한다. 유명한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따라서 게임에서 유능한 사람과의 관계에는 무서울 정도로 상반된 감정이 공존한다.

 

아마도 우리 뇌의 게임 기능과 현대의 비대한 게임 구조가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발생한 현상일 것이다. 우리 뇌는 작은 부족 집단에 특화되었지만 현대의 우리는 -특히 직장과 온라인에서- 거대한 게임을 수행해야 하고 그 게임에서 걸출한 사람들이 삼나무처럼 빽빽하게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다. 지위는 상대적이다.

 

지위가 자원이라면 남달리 잘나가는 사람들이 그 자원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이다. 예외가 있는데 바로 우리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동일시하는 지도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우리를 상징한다. 이들은 우리 정체성의 한 조각, 우리 육신의 일부를 가지고 있어서, 이들의 성공은 곧 우리의 성공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성공에 환호한다.

 

우리 본성에 맞는 작은 게임과 현실에서 참여하는 거대한 게임 사이의 어색한 부조화로 인해 온갖 갈등과 불평등이 발생한다.

 

개인의 지위와 직업이 출생에 크게 좌우되는 현재의 계급 제도는 사실 수천 년 전에 문명이 동틀 무렵부터 내려온 것이다.

 

정착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전 시대보다 잉여 식량이 증가했다. 처음으로 개인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승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들은 자기네에게는 위로 오를 자격이 있다고, 한마디로 그들은 진정으로 특별한 존재라는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로 설명한다. 그들은 대개 아래 계급 씨족과의 혼인을 금한다. 자기네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이고 신성한 계급이라고 정의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새로이 지위와 상징이 축적되면서 이제껏 게임을 통제하던 기존의 방법이 더는 통하지 않았다. 부족 사회에서는 소문으로 각 계급을 움츠러들게 만들 수 있었다. 부족민들이 거물이나 거물의 행동을 벌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위가 높고 힘 있는 통치자들이 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엘리트들은 그들이 누리는 지위를 마땅한 것으로, 심지어 신이 내린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뇌에서 자기중심적인 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함'이 튀어 나왔다. 지위에 익숙해지면서 더 큰 지위를 원하게 되었다. 엘리트들은 침략 행위로 영토를 넓히려 했고, 왕국과 국가와 제국으로 확장되었다.

 

이런 대대적인 확장은 지배자들에게는 유리하게 작동했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고통받기 시작했다. 아래 계급 사람들은 갈수록 힘이 약해지고 병들어 갔다.

 

인류가 한 곳에 정착하고 땅을 차지하는 사이 지위 게임은 무섭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때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험 참가자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인은 게임에서 실제 불평등의 수준이 아니라 불평등이 겉으로 보이는지 여부였다. 참가자의 부가 숨겨져 있을 때는 상류층을 비롯해 모두가 더 평등주의적이 되었다. 하지만 부가 겉으로 드러나 있으면 모든 참가자가 덜 우호적이고 "절반 정도만 협조"했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할 가능성이 유의미하게 커졋다.

 

인류가 거대하게 확장되면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또 하나의 보편적인 특이 현상이 있다. 지위 게임을 비공식적으로 하도록 진화했다. 사실 수렵채집 시대에는 노골적인 성공의 단서 - 뼛조각 목걸이, 족장의 안전한 거처-로 서열이 표시되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위를 알아챘을 것이다. 몸짓 언어와 말투와 존중 수준으로 감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착 사회를 이룬 이후에는 직함과 의례, 의무적인 존중 행위와 명예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동시에 두 가지 게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화와 경제와 사회의 거대한 계층으로 드러나는 공식 게임과 참가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비공식의 진정한 게임이다.

 

공식적인 제로섬 게임에 자주 노출되는 현실이 21세기에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과 불안과 탈진의 원인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우리는 남들에게 적대감을 느낀다.

 

우리는 억울함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위에서 으스대면서 자격도 없이 지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벌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들이 자극하는 억울함은 세상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를 틀어지게 만든다. 우리 나름의 정의감과 시기심에 차 그를 향한 조롱의 노래를 부른다.

 

13. '우리'라는 과대망상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서로를 감시한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 게임은 계속 공정하고 안정적이어야 하고 거물은 감시당해야 한다. 하지만 게임과 게임 간의 지위 경쟁에는 이런 식의 감시가 없다. 오히려 우리 게임의 서열을 높이고 경쟁자의 서열을 떨어트리려 하면 우리 게임의 동료들이 우리의 지위를 올려준다.

 

우리는 흔히 지위 불안을 느끼면 경쟁자 -기업, 종교, 축구 클럽,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무리, 학교 내 패거리, 국가-를 보면서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우월하다고 자신한다. 경쟁자가 게임의 서열에서 위에 있어도, 우리는 차라리 현재 우리 위치가 낫다고 말해주는 이야기를 되새긴다. 우리 게임이 중요하다. 우리 축구팀, 우리 회사, 우리 무리, 우리 부족, 우리 종교. 이처럼 우리 게임에 관한 과대망상은 특히 스포츠에서 두드러진다.

 

서로에게 확신을 심어줄수록 그들의 꿈은 더 단단해지고 그들은 게임을 대표해서 더 자기애로 충만해진다. 이것이 지위 게임이다. 정직하지 않고 악의적인, 삶의 중요한 쾌락 중 하나다.

 

이런 집단적 과대망상은 민족주의에서도 두드러진다. 스포츠 팬들처럼 다수의 국민이 무의식중에 국가의 위상에서 개인의 지위를 찾는다.

 

국가의 지위가 개인의 행복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보면 대영제국의 시대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가 세계 최고다. 

 

오래전부터 우리 게임의 동료들을 더 좋게 봐주는 원시적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집단과 연결되는 순간 아무리 느슨하게 연결되더라도 우리 뇌에서는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불공정한 기제가 작동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게임에 참가한 무력한 인간이고 애초에 불공정하게 게임을 치르도록 설계된 존재다. 뇌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남들이 가진 것과 비교하면서 경쟁 관계 속에서 지위를 판단한다. 우리 집단이 많이 가질수록 우리에게 돌아오는 상도 크다. 탐욕과 타락보다 더 해로운 것은 우리의 뇌가 이런 성향을 우리 자신에게조차 숨긴다는 점이다.

 

 

14. 혁명의 조건

지위가 하락할 때 혁명은 시작된다

 

뇌와 문화가 지어내는 이야기를 잘 믿는 우리의 성향은 인류 역사를 얼룩지게 만든 부정의 주요 원인이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우리에게 유리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갈등 상황에서 정의의 편이라는 확신을 주고 서열에서 위로 올라가는 데 매진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심지어 우리가 스스로 예속되도록 설득하기도 한다.

 

바로 거대 종교의 역할이다. 종교의 숨은 진실은 종교도 지위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종교들은 저마다 게임의 규칙과 상징을 합의한 다음 위로 오르거나 아래로 내려가는 계층 구조를 형성한다. 이런 진실 위에 구축된 꿈의 세계는 이번 생이 아니라 다음 생에서 주어질 중요한 지위에 관해 이야기한다. 종교는 도덕 게임이다.

 

모든 지위 게임의 궁극적 목적은 통제에 있다. 지위 게임은 진화의 역사에서 우리가 서로 협력하게 하고 한 개인으로서 순응하도록 강요(지배 게임)하거나 매수(성공과 도덕의 명성 게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종교는 메가 사회가 만들어 지며 전례 없이 많은 사람이 가까이 붙어 살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을 감독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현했다. 소문만으로는 더는 다수의 이질적인 사람들을 감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우리를 유혹하고 벌주면서 행동을 유도하는, 곧 설교하는 신을 만들어냈다.

 

거대 종교는 다양한 언어와 민족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따르는 표준적인 규칙과 상징을 정립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다. 카스트 같은 제도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 다수가 이 꿈을 믿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위계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계급 간에 끊임없이 갈등을 빚으면서도 혼란에 빠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이 본래 가까운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면서 국지적인 게임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주한 일상과 거기서 얻는 지위에 사로잡혀 있다. 대체로 가까이 연결된 집단에 의무를 다하려 하고 지역의 규칙과 상징을 충실히 지켰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잘 치르는 수준에서 게임의 성격이 정해졌을 것이다.

 

게임이 잘 굴러가고 우리 집단이 기대한 보상을 받기만 하면 현상 유지가 잘되었다. 탄탄한 사회는 그 사회의 구성원이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고 기대대로 지위의 낙수 효과를 얻는 사회다. 하지만 맨 밑바닥 카스트가 사실상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더라도 대개는 사회의 안정성은 위협받지 않는다. 사실 혁명의 조건은 극심한 불평등이 아니라 게임이 정해진 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사람들이 불가피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사회에서 적절한 지위를 잃었다고 인식하는 것이 혁명의 핵심이다.

 

우리가 받는 대접이 곧 우리 집단이 받는 대접이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과 우리 사람들이 집단의 지위가 하락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심각하게 고통 받는다.

 

게임에서 지위가 하락하기 시작하면 무자비해진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려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게임이 상류층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대개의 혁명에서 민중을 자극하여 체제를 타도하도록 조력하는 세력은 상류층이다."

 

상류층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지위가 하락하고 기대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느끼는 '대중 조직'과 공모한다.

 

또한 한 사회가 몰락하는 조짐이 '엘리트의 과잉 양산'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엘리트가 심각한 수준으로 과잉 양산되면 이들은 얼마 안 되는 지위를 두고 다투게 되며, 결국 상위 집단에 맞서서 그들만의 지위 게임을 형성하려 한다. 이들이 지위를 얻기 위해 싸우고 기득권 세력을 공격하면서 결국 사회는 불안정해진다.

 

게임에서 기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 여파로 혼란의 역사가 시작되는 현상

 

지위에 굶주린 제국의 세력이 한 민족을 정복하면 그곳에서 엘리트 계급을 형성한다. 그리고 여러 세대가 지나는 사이 토착민들이 지위를 얻기 위해 점차 제국의 게임에 뛰어들고 제국의 규착과 상징을 받아들인다. 결국에는 엘리트 계층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하고 대등한 지위를 요구하며 대개는 시민 불복종이나 법적 이의 제기나 폭력의 형태로 공격한다. 그러면 이제 제국을 건설한 세력이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제국의 주기"라고 표현한다.

 

이런 지위 게임의 숨은 규칙이 인간의 역사를 이끄는 데 일조했다.

 

15.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게임의 총합이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우리는 간절히 원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말해주는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 

 

"여전히 날마다 수십 가지의 결정을 본능적으로, 신속하게 내리지만 개인의 삶에서 기준이 되는 옳고 그름의 개념이 아니라 직업인의 삶에서 기준이 되는 가치관에 따라 결정합니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의 개념이 아니라 수익이 되고 교묘히 빠져나갈 길이 무엇인지에 관한 가치관입니다. 시스템은 개인의 가치관을 시스템의 가치관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고, 결과적으로 시스템에 이익이 돌아갑니다."

 

이 시스템 -이 게임-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하는 막대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시스템의 규칙과 상징에 맞춘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이 달라진다. 게임에 통합되며 각자의 개성은 그 경계가 흐려지고, 그사이 도덕적 행동과 현실에 대한 지각도 흐트러진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게임의 총합이다.

 

16. 진실이 아니라 믿음을 믿는다

우리는 왜 아직도 미신을 믿고 잘 속고 종교에 심취할까?

 

인간은 경이로운 진보의 여정에 나선 영웅이 아니라 게임에 맞게 설계된 플레이어다. 우리는 게임에서 성공하기 위해 지위가 높은 협력자를 찾는다. 그리고 협력자를 발견하면 우리의 모방-아첨-순응 회로가 켜진다. 협력자들의 행동뿐 아니라 믿음까지 모방한다. 진지하게 믿을수록 지위는 더 높아진다. 그래서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 권장된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에 깊이 뿌리를 내린 수많은 신념을 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집단이 믿는 것을 믿고 엘리트층의 인식을 따르고 엘리트가 정의하는 세상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지위 게임이 일어나는 방식이고 인간의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살면서 매사에 사실을 검증할 수 없고, 그냥 위를 쳐다보며 지침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념이 있다. 우리는 믿는다. 때로는 이상한 것도 믿는다.

 

정치적 신념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은 대개 어떤 정책에 대한 의견에 따라 지지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정책에 대한 의견을 바꾼다."

 

우리의 뇌는 온갖 술수를 부려서 세상에 대해 게임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수용하고 그 이야기가 전개되는 대로 믿게 만든다. 그 이야기는 우리 집단의 구성원이 다른 집단의 구성원보다 더 똑똑하다고 말해주고, 우리 집단의 신념과 주장에 반박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말해주고, 우리가 이미 동의하는 의견은 사실로 처리해주며, 우리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어리석고 편견에 치우치고 도덕적이지 못하고 믿을 만하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그들의 신념을 무시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여기서 지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실은 강하므로 진실을 알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면 합리적 사고는 가능하다. 우리가 아무런 갈등 없이 받아들이는 신념의 영역이 있는데, 이런 영역에 속한 다수의 사실은 객관적으로 측정이 가능하지만 지위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다. 이런 유형의 사실을 놓고 끈질기게 논의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 지위가 얽혀 있지 않아서다. 하지만 사실에 지위가 개입되면 우리의 생각은 순식간에 정상적 사고를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무엇이 진실인지 직접 확인하지 않고 엘리트에게 확인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을 믿는다. 나아가 우리의 신념에서 가장 소중한 것, '도덕적'으로 분류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덕적 현실은 곧 도덕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는 도덕성을 드러내면서 지위를 얻는다. 

 

우리는 혼자서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할 때도 우리는 상상 속 청중에게 인정받으면서 흐뭇해한다. 도덕적 지위는 우리가 우리의 이익보다 남들 -특히 우리와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앞세우게 만드는 미끼다. 우리는 도덕적 신념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실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꿈이다. 우리가 우리의 꿈을 믿는 것처럼 그들에게 그 꿈은 더없이 당연하고 진실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도 시간에 따라 변한다.

 

간디가 오늘날 서구의 인종 개념을 갖추지 못했다고 개탄하는 것은 바이킹에게 넷플릭스가 없다고 탓하는 격이다. 도덕적 '진실'은 상상의 행위다. 그리고 우리가 게임에 적용하는 개념이다.

 

이런 꿈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꿈은 모두 게임을 만들어낸 뇌에서 만들어진다. 우리 몸을 둘러싼 세계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 그래도 우리의 뇌는 그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폭풍우 소리 같은 소음이 들릴 때 뇌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추정해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정확하고 다채롭고 구체적인 세계로 바꿔 원하는 것을 얻는다.

 

우리의 뇌는 주어진 현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고 어떤 보상이 어떻게 주어질지 제안하는 게임을 발견하면 그 게임의 규칙과 상징을 열심히 받아들인다. 그러면 소음이 잠잠해 진다. 혼돈이 길들여진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발견할 뿐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맡은 영웅의 역할을 발견한다. 우리는 진실과 방식, 즉 삶의 의미를 배운다!

 

17. 지위의 금맥을 찾아서

그들과 소통하려면 이 생각을 믿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위는 다른 얘기다. 지위를 얻으려면 이 생각에 동의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신념에 사로잡히고 신념을 옹호하고 나아가 신념을 전도하고 신념에 따라 살아야 한다. 깊이 빠져들수록 더 높이 올라간다. 사실 지위만 한 연료도 없다.

 

지위는 끝없이 새로 생성되고 또 생성된다. 그러면서 화력이 약해지지도 않는다. 비합리적 신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위 게임일수록 무서울 정도로 널리 퍼져 나가면서 온갖 거짓과 혼란과 극심한 고통을 온 세상에 퍼트린다.

 

"그때는 제가 상황을 진전시키거나 사실을 확인해주면 확실히 뭔가를 성취한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말하면 그 사람들이 '잘하고 있어'라고 계속 말해줬어요."

애초에 악마 사냥꾼들이 의식 학대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면 '성공 게임'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성공 게임에서는 각자가 경쟁력을 입증할 때 보상으로 지위가 주어진다. 그리고 경쟁력은 분석과 실험, 연습, 연구, 검사, 검토, 데이터, 열린 토론이 있는 문화를 조성하는 데 일조한다.

 

도덕 게임은 주로 게임 그 자체의 지위를 높이는 데 집중하면서 사람들이 그 게임에 계속 순응하도록 유도하고 올바른 신념과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폭발력은 찬사를 듣고 싶은 욕구에서 올 수 있다. 이런 공황 상태는 대개 어떤 게임이 참가자들에게 과도한 지위를 만들어주는 방법을 찾아낼 때 발생한다. 게임에서 과도한 지위를 만들어주는 방법을 찾아낼 때 발생한다. 게임에 끌리고, 게임의 신념이 아무리 비현실적이어도 게임의 전제 조건으로서 그 신념을 수용하게 된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믿을 때 지위가 주어진다.

 

참가자가 많아지면 지위도 더 많이 생겨서 게임의 흡입력은 더 강해지고 상황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자체적으로 유지되고 자체적으로 팽창하면서 마침내 사회 전체가 옳다고 느낄 만큼 거대해진다. 이 과정에서 주어지는 지위는 거대하고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유혹적이다. 그사이 평범하게 살아가던 개인은 세상을 바꾸는 강력하고 고귀한 존재로 변모한다.

 

적극적으로 믿어야만 지위가 주어진다면 더 많이 의심해야 한다.

 

사람들이 게임의 핵심 신념을 수용하고 그 신념에 따라 행동할 때, 관계와 지위를 얻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저당 잡힌다. 이제 신념이 지위의 상징이 된다.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환상에 빠져들어 스스로 현실을 왜곡하면서 결국 게임의 주인이자 운동가가 되어 정신을 빼앗기고 이성적으로 토론하기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한마디로 신념이 신성시되는 것이다.

 

뇌에서 경험하는 세계는 전체가 '상징'으로 구성된다.

신념도 신성시될 수 있다. 그래서 신성시된 신념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신성한 상징은 우리의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상징을 공격하면 우리의 게임과 동료들을 공격한다는 의미이고, 나아가 우리가 이룬 모든 것과 우리가 가치를 두는 모든 것을 폄훼한다는 뜻이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꿈, 우리의 인생의 경험, 우리가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능멸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신념이 우리를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신념은 우리를 전쟁터로 내보낼 수도 있다.

 

 

18. 이념이라는 영토, 신념의 전쟁

타인의 믿음은 왜 '사악'한가

 

오늘날 모든 SNS 플랫폼은 웰의 뼈대 위에 구축된 것이다. 

웰의 기본 개념은 지극히 단순했다. 좋아하는 와인이나 음악 취향과 같은 임의의 주제로 연결되면서도 그런 연결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서로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한발 뒤로 물러나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다 '임의의 연관성'으로 모인 사람들이 지위 게임을 시작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은 온라인 포럼에서 "클럽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일상과 전문 지식을 나누면서 자신의 지식을 과시했다.

 

우리의 믿음과 반대로 믿는 사람을 만나면 몹시 불편해진다. 신경이 쓰이고 혐오감이 들고 지배하려는 상태로 넘어간다. 신념은 우리를 전쟁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모르는 누군가가 틀린 말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이유가 뭘까?

인터넷에서 분노하는 행위야말로 그 어떤 무의미한 선택만도 못해 보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반사적으로 반응할까?

 

사실 인생은 상징으로 이루어진 게임이고, 신념은 침략자의 깃발 못지않게 상징적일 수 있다.

 

우리는 지위 게임을 통해 현실을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와 경쟁하는 다른 게임에 속한 사람을 만나면 불편해지는 것이다. 그 사람이 우리와 충돌하는 규칙과 상징에 따라 산다면 우리의 규칙과 상징 -지위를 얻기 위한 기준- 은 무가치해지고 현실에 대한 우리의 꿈은 거짓이 된다. 우리가 평생 쌓아 온 가치관이 부정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모욕감을 주는 것이다.

 

지위는 자원이고 그들이 우리에게서 소중한 자원을 빼앗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짐벨 교수가 참가자에게 각자의 정치적 신념이 틀렸다는 증거를 제시하자 그들의 뇌에서 "숲에서 곰을 만났을 때 나올 법한 반응과 상당히 유사한" 반응이 관찰되었다.

 

이럴 때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편하다. 이런 자리에서는 세상에 대한 환상에 생긴 상처를 광적인 대화로 어루만지고 서로에게 지위를 주는 말로 상처에 약을 바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꿈이 위험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와 경쟁자 사이에 차이가 있어야 하고, 그 차이에 관해서 경쟁자들이 단순히 잘못된 자들이 아니라 사악한 자들이라고 말해주는 도덕적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러면 비방도 허용된다. 그리고 적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정당화해주는 증거를 찾아내려 한다.

 

"그들이 어떤 실수를 하든, 그것이 정치와 관련이 있든 없든, 모두 사회 계급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그들이 농구장에서 파울을 범하면 '부농의 정신 상태가 표출된 또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현실에 대한 병든 꿈이 계속되어 혐오를 지속시킬 때 우리는 언제든 혐오를 정당화할 새로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혐오를 더 정당화해주는 근거는 우리의 지위 게임이 상상의 행위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라는 신념에서 나온다. 지위를 얻기 위한 우리의 기준이 현실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을 우리의 규칙으로 판단하는, 악의적이고 속물적인 습성이 있다. 

 

그래서 미국인은 길에서 침을 뱉는 중국인을 경멸하고, 일본인은 코를 푸는 그 미국인을 경멸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중요하고 진실한 상상의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끌어내리려 한다.

 

반론을 제기하면 우리는 터무니없을 만큼 강력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우리의 주장에서는 터무니없을 만큼 약한 증거도 인정한다.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상대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생기는 불협화음을 잠재운다.

 

우리는 도덕성을 명백한 선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선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따르는 도덕 규칙은 우리의 지위 게임, 곧 우리가 사는 꿈의 세계를 이루는 요소다.

 

현대는 폭력적으로 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신념의 전쟁을 벌인다. 인간에게 이념은 영토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로 전쟁을 벌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유동적이고 창조적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정의해주는 것은 성별 이나 인종이나 국적과 같은 기본적인 표지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는 게임이다.

 

우리는 씁쓸하게도 동족에게는 놀라운 수준으로 비폭력적이면서도 게임과 게임의 대결에서는 '유난히' 폭력적이다.

전쟁의 개념을 이념의 영토에서 벌어지는 싸움으로 확장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무서울 정도로 공격적인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이런 공격에서 우리는 남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그들의 게임이 아니라 우리의 게임을 하고 우리의 꿈을 꾸도록 바꿔놓으려 한다.

 

그리고 모든 전향자에게는 도둑질이 선물로 바뀐다.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지위를 빼앗는 자에서 우리에게 지위를 주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누구나 신경계의 제국주의자로서 남들의 마음에 급습해서 우리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싸운다.

 

우리가 계속 전쟁을 벌이며 승리하려는 이유에 관해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집단을 다른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열등하다고 느끼기 때문" 사람들은 자기 집단의 우월성에 중점을 두는 경쟁의 렌즈로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이기면 그 집단의 구성원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적어도 단지 우리 집단이 승리한다는 사실 자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더 많이 얻기를 바라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경쟁자 사이에 커다란 승리의 격차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집단의 구성원이 얼마나 가졌는지가 아니라 다른 집단의 구성원보다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지위를 요구하는 상대와는 함께 살수 없었다. 반드시 어느 한쪽이 이겨야 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인생 게임의 불가피하고 끔찍한 결과다. 이런 집단들은 '모두를 위한 공정'에 관해 환상적인 꿈을 만들지만 그 꿈은 거짓이다.

 

 

3부. 극단의 게임

19. SNS속 부족 전쟁

지위 게임은 강력한 유기체다. 때로는 그 자체로 지능이 있어서,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지능을 압도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개인에게는 이런 집단행동의 스위치를 켜거나 끄는 능력이 없었다. 게임의 면역계가 참가자의 마음에서 작동하는 것 같았다. 게임의 면역계가 참가자의 마음에서 작동하는 것 같았다.

 

게임이 참가자들에게 내리는 명령은 전쟁 상태로 전환될 때 강해진다. 참가자들 사이의 관계가 끈끈해진다. "사회적 위협이 강할수록 사회적 유대가 더 커진다."

 

하지만 이처럼 결속력이 강한 전쟁 모드는 승리하면 돌아오는 지위가 있을 때 발동한다. 

"자원을 획득할 기회"는 "집단의 화합을 끌어내는 데 효과적인 조건"이었다.

 

게임이 치열해지면 개별 참가자들은 서로 융합하고, 게임의 꿈은 더 강력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점차 게임 안에서 자기를 잃고 게임에 헌신한다. 하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 게임이 치열해지는 과정을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무섭게도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우리는 자신과 서로를 강제하기 시작한다.

 

바로 지위 게임은 어느 한 사람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시대에는 리더십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물론 수렵채집 사회가 계층을 중심으로 조직되기는 했지만 한 사람의 '거물'이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간혹 지혜로운 누군가가 잠시든 영구적이든 지도자의 지위에 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겸손해야 한다. 모든 이의 의견을 겸허히 경청하고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온화하게 조력해야 한다. 심각한 일탈자를 처리할 방법을 처리할 때도 지도자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집단 전체를 위한 결정이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권위를 지니는 당사자는 지도자 한 사람이 아니라 집단 전체다.

 

우리가 이렇게 진화한 데는 어느 정도는 집단 내부의 지배적인 구성원을 다루기 위한 방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지배적으로 행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고 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게임이라면 그런 게임은 플레이어가 참여하기 어렵다. 골칫거리가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플레이어들이 경쟁자의 부당한 행위를 비난하고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다라서 게임이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플레이어들은 생각하는 유기체를 이루었고, 그 안에서 합의에 도달해야만 살인이 허용되었다. 우리의 친족 기반의 게임에서는 친족들은 원치 않는 사람을 살릴지 죽일지를 집단적으로 결정했다.

 

누구나 독재자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우리의 '사촌들'도 독재자 못지않게 잔혹할 수 있다.

우리가 "전통이라는 사회적 우리" 안에서 "순응하겠다는 의지에 따라 살거나 죽는" 존재라고 표현한다. 사촌들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사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위험에 처했다."

 

우리 집단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인상이 중요하다. 엄밀한 의미의 합의일 필요는 없었다. 집단이 하나의 유기체로서 그 행위를 지지한다는 전반적인 인식이 중요했다. 

 

대개는 소문이 들끓고 과거의 죄가 낱낱이 밝혀지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죄인을 향해 도덕적 분노가 폭발했다. 집단은 죄인을 처형할 뿐 아니라 모멸감을 안겨줄수도 있었다. 

 

앉을 자리를 내주지도 않고 앉으려 하면 "짐승은 맨바닥에서 잔다"는 핀잔을 받는다.

이렇듯 사촌들은 무시무시하고 막강했다. 사촌들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 깊이 박혀 있다. 

우리는 사촌들을 두려워하고 규칙이라는 사회적 우리에 순응하면서 게임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사촌들은 우리 마음속에도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이 놀이 친구를 거부하는 이유를 알아본 연구에서는 상대 아이가 주로 그들이나 친구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 우리는 게임을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압제와 혐오를 지우고 타락한 지도자와 사악한 계략에 책임을 넘기는 이야기를 선호한다. 이런 순진한 발상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연결되면 유토피아가 창조될 거라고 기대한, 인터넷과 SNS의 선구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이버 공간 독립 선언문

"우리가 건설하는 지구적 사회 공간은 자연히 당신들이 우리에게 가하려는 독재로부터 독립 할 것이다. .. 우리가 만들어 갈 세상에서는 어디에 사는 누구든, 얼마나 특이한 신념을 지녔든, 침묵하거나 순응하라고 강요당할까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당당히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SNS에서는 아무런 악의가 없는 발언에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분노를 표출한다. 온라인 군중은 지배-도덕 게임을 한다. 지배-도덕 게임에서는 집단 안이든 밖이든 모든 사람에게 자기 집단의 규칙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지위가 주어진다. 온라인 군중은 사촌들의 무시무시한 권력을 등에 업고 맹렬하게 흥분한다. 

 

21세기의 SNS에서 벌어지는 부족 전쟁은 비록 현실이 아닌 온라인이지만 일탈자를 배척하는 방향으로 무섭게 합의가 이루어지는 정서, 그리고 소문이 퍼지고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고 수치심을 주는 과정에서도 그렇다. 혐의가 지극히 '국부적'이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템플러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꿈에서는 그들의 표적이 어떤 규칙을 어겼는지가 명백해 보였다. 하지만 외부인의 눈에 템플러의 죄는 모호했다. 사촌들은 템플러를 배척하기로 합의했고 합세해서 템플러의 죄를 단죄하기 위해 공격했다. 모두 그들의 정의와 열망에서 비롯된 일이다.

 

온라인 군중은 희생자를 설득해서 자기네 쪽으로 포섭하려 하지 않는다. 희생자의 지위와 상징을 최대한 제거하려 하고, 가장 이상적인 목표로 평판을 죽이려 한다. 명성의 게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살인 방법이다. 말소의 궁극적인 표적은 그 당사자가 아니라 그의 신념이다.

 

포상에 끌린 야심 찬 사람들이 점점 더 몰려가서 게임은 그 자체로 지배의 황홀경에 도취된, 공격하는 짐승이 된다.

 

군중 행동을 주도하는 사람은 전체 사회에서 소수 집단 중에서도 소수라는 뜻이다. 하지만 SNS에서 이들의 우세한 목소리가 민주주의의 우세한 목소리가 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진보 활동가들은 두려움을 전파하여 비대한 지위를 차지하는 측면이 있다. 

 

이들이 퍼트리는 소문과 비난과 무자비한 분노는 사회 전체가 여기에 합의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사촌들에 대한 원시적인 두려움을 일깨우고 결국 우리를 협박하여 사회적 우리 안에 가둔다.

이렇게 군중 심리가 승리한다.

 

20. '주작'하는 정서

게임이 전쟁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더욱 경직된다. 개인에 대한 지배가 강해지고, 개인의 자아가 점차 게임 활동과 뒤엉킨다. 게임이 들려주는 꿈이 점점 원대해진다. 영웅은 더 영웅으로 보이고, 악당은 더 악랄해 보이며, 도덕적 교훈은 더욱 순결해진다. 이들이 들려주는 희생자 서사는 대개는 적을 막강하고 무자비하고 위험하게 묘사한다. 이런 이야기는 현실에 충분한 근거가 없어도 간단히 지어낼 수 있다.

 

자작극을 벌이는 사람들은 조작과 날조로 그들의 게임이 세상에 관해 들려주는 단순한 도덕적 이야기를 재확인하면서 지위를 얻기 위한 그들의 기준이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선봉에 선다. 그들의 이야기는 고난과 용기와 생존의 이야기다. 그들은 희생자의 처지를 딛고 분연히 일어나 영웅이 된다. 그들은 게임의 다른 참가자들도 괴물들에 맞서 함께 고결하게 저항하면서 그들도 스스로 영웅이 되었다고 자부하게 해준다.

 

전사들은 포상을 받기 위해 전쟁에 나가고 싶어 한다. 포상에는 '지위 상승이나 존칭이나 특수 휘장'이 포함된다. 전사들은 그들의 게임이 우월하므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집단에 대한 만족감과 자부심이 과대망상으로 발전하지만 않는다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관용의 미덕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요한 차이는 그것이 자아도취적 꿈이냐에 있다.

 

우리 게임은 특별하고 남다른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고 확신하는 태도다. "내집단의 우월성과 남들의 인정에 집착하는 집단적 자아도취자들은 그들의 집단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신호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해서 그 신호를 과장하고 모욕적이라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전사들은 게임에 강하게 동일시하면서 게임을 과도하게 신봉하고 개인적인 지위를 게임에 더 많이 투영할 가능성이 크다.

"집단의 지위가 위협받으면 그 집단과 강하게 동일시하는 개인은 집단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

 

예를 들어 참가자의 일부에게 미국인 영웅이 러시아인 전사 이반 드라고에게 패하는 줄거리 영화를 편집해서 보여주었다. 미국인에 가장 밀접하게 동일시하는 참가자들은 그들의 지위에 대한 '심각한 타격'에 괴로워하면서 "록키가 패하는 장면을 보고 자기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 다음으로 참가자들에게 경쟁자인 러시아인들에게 적대적인 의견을 표출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을 "모욕적으로 판단하는 말을 한" 사람들은 상처받은 자존감이 회복되는 느낌을 받았다.

 

전사들, 곧 게임에 강하게 동일시하고 게임을 대신해서 자아도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얻은 지위에 도취되어 어디에서나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한다. 방어하기 위해서든 공격하기 위해서든 걸핏하면 적에게 싸움을 건다.

 

역사적으로 '사촌들'은 게임의 규준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전사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 게임을 위해 싸우며 경쟁 집단에게서 자원을 쟁탈하거나 침략자에게서 자기 집단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두 역할의 원형이 통합되는 예가 많다.

 

어느 누구나 이런 행동에 뛰어들 소질을 갖추었다. 이것은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경직된 상태라고 경고하는 신호는 게임의 신성한 신념과 그 신념을 수행하는 일에 완전히 집착하는 태도다. 적극적인 믿음을 자신의 모든 생각과 발언과 표현으로 드러내어 지위라는 상을 받기 때문이다.

 

음모론과 '가짜 뉴스'를 비롯한 '적대적인 정치적 소문'을 퍼트릴 가능성이 가장 큰 부류는 주로 "지위에 집착하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고, 이들의 행동은 "높은 지위를 향한 욕망이 좌절되면서" '급발진'하고 이들의 목표는 "대중을 선동해서 워낙에 반감을 많이 산 엘리트들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연구자들은 지위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서로 앞서려고 싸우면서 게임의 도덕적 지위를 점점 더 경직된 자리로 밀어 넣으며 '강화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단 남들의 관점이 무엇인지 들으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평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우리의 세계관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세계관을 조금 변형해서 우리가 집단에서 도덕적 모범이라는 지위를 계속 지키려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두 번째 선택지를 선호한다." 이런 식으로 전사들이 늘어날 때 그들은 "올바른 도덕적 주장에 도달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도덕적으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다."

일부 참가자는 집단의 꿈을 진심으로 믿고 그것에 흡수된다.

 

강압적인 사촌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전사들이 싸우고 마녀들이 화형당하고 게임의 신경계 영역은 지배-도덕 연극의 초현실적이고 질식할 듯한 악몽으로 뒤덮인다. 순응과 순수에 대한 요구가 일어나고, 소문과 공포, 피해망상, 규탄이 터져 나오고, 법적 보호 장치를 느슨하게 풀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적에 대한 이중 잣대가 생기고 환상의 죄를 부당한 수단으로 처벌하고, 절망과 수치와 고통이 일어나고, 누군가의 삶은 유린당하고, 때로는 끝장이 나기도 한다.

 

21. 합리적인 광신도

종교는 도덕 게임을 제공한다.

 

"생태적, 역사적 위협에 맞서는 집단은 혼돈 앞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위협이 강할수록 사회가 더 경직된다. 경직된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은 위계질서와 권위를 더 많이 존중한다. 경직된 사람들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로 정확하고 올바른 도덕적 행동으로 지위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사이비 종교는 가장 경직된 게임이다. 이들 집단은 신도들에게 관계와 지위를 주는 유일한 원천이 되어 권력을 유지한다. 사이비 집단에서 지위를 얻는다는 것은 그 집단의 신념 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신념 체계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게임에 집착해서 신경계 영역 전체를 게임에 종속시킨다는 뜻이다. 단 하나의 정체성만이 존재한다.

 

인생 게임에 실패한 사람들 즉, 소외되고 상처받고 궁핍한 사람들의 뇌는 자신에게 확신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게임을 찾으려 한다. 이런 게임에서는 절대적이고 정확한 규칙을 따르면 관계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이 세운 규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졸업하면 존재의 '다음 단계', 곧 '인간을 넘어선 진화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설계했다. 선발 되면 UFO를 타고 천국으로 날아갈 거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천국의 문 신도들은 세뇌를 당해서 그곳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뇌는 인간의 뇌가 본능적으로 원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뿐이다.

 

우리는 지위 게임의 기준이 될 만한 규칙과 상징을 찾으려 한다.

우리의 뇌는 "관계와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신도들이 기꺼이, 심지어 열성적으로 죽음에 이른 이유는 자살이 (그들의) 신념 체계 안에서 합리적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승리였다.

 

 

22. 히틀러의 지위 게임

정치가 시민을 굴복시키는 법

 

성공적인 게임은 지위를 생성하는 장치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게임 그 자체를 위해 지위를 생성할 때 그 게임은 성공한다.

 

인간에게는 지위가 필요하다. 그래서 게임에서 지위를 얻으려 한다.

 

지도자들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왕관을 빌렸을 뿐이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진정한 지위를 얻어야 한다.

독재자도 구성원들을 기쁘게 해주어야 하고, 특히 독재가 오래 존속되려면 적절한 보상을 기대하는 군부 엘리트들을 충분히 만족시켜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성공한 군주는 "재능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유능한 인재를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각자의 역할을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에게 명예를 주어라"고 조언했다.

마키아벨리는 더욱 교묘하게도 의무를 다할 때 군주에게 상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심어주라고 조언했다. "현명한 군주는 신민이 모든 상황에서 군주에게, 그리고 군주의 권위에 의존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신민은 언제나 군주에게 충성할 것이다."

 

지위 체계가 구성원이 "집단적 노력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으면 그 대가로" 그에게 존중과 영향력을 보상해주는 식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성공한 지도자는 똑같이 거부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더 높은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고 내가 이끄는 대로 잘만 따라오면 그런 지위에 오르게 될 것"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행복한 결말로 가는 이야기는 경쟁자의 위협이 도사릴 때 더 유혹적으로 보인다. 게임의 지위가 적의 위협으로 위태로워질 때 구성원들은 게임을 지지하기 위한 전투에 뛰어들고 열성적으로 싸울 만한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연구에서는 경쟁적 분노가 승리를 향한 낙관적인 열정과 결합할 때 구성원에게 더 큰 동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분노하거나 열광하게 만드는 정치적 메시지를 읽으면 사람들은 관여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비이성적이고 악랄한 세력이 독일처럼 발전한 국가에서 그렇게 광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는지 의아해한다. 어떻게 그렇게 교양 있고 영리한 민족이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자를 지도자로 선출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수천 명이 광장에 모여 그가 신이라도 되는 양 광적으로 환호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위 게임의 관점에서는 나치의 부상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는 근원적 모멸감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전 독일에서 바로 이런 감정이 포착된다. 국가 차원의 총체적 모멸감.

 

1차 세계 대전에 패하고 독일은 갑작스럽고 충격적으로 패배를 선언하면서도 베르사유 조약의 강화 조건이 공정하게 조율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런 조항은 거의 모든 독일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부당한 능멸로 받아들여졌다.

 

마침 반유대주의가 유럽 전역에 일상적으로 퍼졌다. 독일인들은 일탈자를 사냥하면서 대공황과 공산주의의 위험성과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부당한 상실과 그로 인한 모멸감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는 편리한 망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많은 독일인이 자신들이 느낀 모멸감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기는 했지만 유대인에게 가혹한 조치를 가하는 데 지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종 혐오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결집시킬 방법은 미래의 지위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수많은 유권자에게 거부하지 못할 환상적인 꿈을 제시했다. 독일인은 우수한 엘리트인 아리안족 혈통이고 "명석한 머리에서 항상 신성한 천재성의 불꽃이 번쩍이는 인류의 프로메테우스"라는 꿈이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계급이 아니라 인종이 중요했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20세기 최악의 극악무도한 행위"의 희생양이 되었고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식에 "눈앞의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했다."라고 말하고는 울었다. 그러나 독일인이 모여서 하나의 민족이 될 때 이 모멸감의 시대가 종식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끄는 대로 더 높이 올라가서 영광스러운 천년 아리안족 왕국, 곧 제3제국을 함께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마침내 민족 부활을 위한 현실적인 제안이 나왔다.

 

나치의 게임은 대다수 독일인에게 중요한 지위를 제공하는 유일한 원천이 되었다. 나치 조직원 신분은 사회생활에서 위로 올라가는 계층 이동의 열쇠였다. 개인들이 게임에 참여해서 게임이 주는 보상을 누리기 시작하면 이것이 게임의 정체성이 된다. 

 

골드러시 열풍이 거세지면서 게임은 새로운 참가자들을 끌어들인다. 그 사람들은 나날이 더 빛나는 보상에 이끌려 게임에 빠져든다. 이처럼 게임의 힘이 막강해지는 사이 지위는 더 많아지고 위대해진다. 게임이 더 커지고 강력해진다.

 

이 모든 과정에는 결정적인 경고 신호가 있다. 강압적인 사촌들은 주로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에게는 더 높은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 꼭 그렇게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우리가 이미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지목해서 비난한다. 

 

사촌들이 비난하고 소문을 퍼트리면 우리는 분노하고 열광하고 도덕적으로 격분한다. 그리고 게임에 뛰어든다. 사촌들은 일단 우리를 포섭하면 그때부터 더 엄격해진다. 그들의 신념이 더 극단적으로 치닫고 더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면서 우리의 신념을 더 철저히 감시한다. 그리고 지배 전략이 널리 적용된다.

 

히틀러가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위를 생성하지 않았다면 어느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가 제공한 '지위'는 개인의 삶과 국가 전체가 발전하고 명예를 회복한다는 감각, 그리고 독일인들과 독일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어깨를 펼 수 있었던 데 있다.

 

효과적인 선전의 도움을 받아 이제 히틀러는 독일 부활의 강렬한 상징이 되었다. 히틀러는 지위 게임의 논리에 따라 신성한 존재, 곧 신과 동의어가 되었고, 그의 게임에 참여한 모두가 가치를 두는 상징이 되었으며 사실상 그 자신이 그들의 지위가 되었다.

 

'저희는 총통님을 원합니다'라고 외치는 1만여 명의 광적으로 흥분한 군중. 그들은 히틀러를 메시아처럼 쳐다보았고, 그들의 얼굴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비인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폭압적이고 철저한 지위 게임이었고, 제대로 작동했다.

 

 

23. 테러와 모멸감

과대망상과 모멸감이 폭력의 동력이다

 

게임은 위계질서 -우리 게임의 위치 대 경쟁 게임의 위치-를 살피고, 그런 질서의 형성 과정을 설명해주는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도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야기는 항상 똑같다. 우리는 도덕적인 사람들이라 더 많이 누릴 자격이 있고,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자들은 사악한 무리라는 식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유혹적이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믿고 싶은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지위의 원천이 되고, 더 큰 지위를 얻으리라는 희망과 적을 향한 분노 -신의 진노-의 원천이 된다. 이런 이야기는 신성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의 서사는 더욱 극단적이고 비정상으로 흐른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믿는다. 이야기는 지극히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꿈은 우리가 참가하는 게임의 꿈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살아간다. 꿈속에서 연기한다. 그리고 꿈이 어두워지면 우리가 악몽이 된다.

 

전쟁을 일으키는 당사자는 주로 해로운 도덕성을 품은 꿈을 꾸고 자신의 선한 의도를 확신하면서 공격을 개시한다. "한 국가가 그들에 대한 도덕적 훼손에 모멸감을 느낄수록, 그리고 도덕적으로 충격적인 상황을 많이 겪을수록 복수를 감행할 가능성이 커진다."

 

홍위병

 

우리의 목적은 그들에게 최대한 모멸감을 주는데 있다.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 자신이 그 일을 온전히 즐겼다. 엄청난 즐거움이 느껴졌다."

 

이들은 그저 타고난 본성에 따라 지위 게임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게임의 신념을 단순히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믿고 순응해야만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보상은 어마어마했다. 물론 재미도 있었다. 총구 뒤의 자발적 참여자에게 독재는 언제나 재미있다.

 

모멸감은 다른 많은 테러 행위의 근간이다. 폭탄 테러범의 주된 동기는 "자기네 나라에 주둔한 외국 군대가 그들에게 가하는 수치심과 모멸감"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확신하고, 인종차별적 식민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대영제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의 미천한 삶을 문명화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준다는 자기중심적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과대망상이 능멸당하면 대량 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해자들은 그들이 희생자들보다 우월한 족속이고 사실상 다른 종이라고 말해주는 영웅의 이야기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런 타자들이 방어하거나 보복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자신들의 꿈이 망상이고 지위를 얻기 위한 그들의 기준도 거짓이라는 뜻이 되었다. 그래서 상대의 도발에 비해 과도하게 지배적인 행동으로 반응한다.

 

알제리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프랑스인 103명을 살해하자 전투기를 보내 알제리의 마을 44개를 초토화하고 순양함을 보내 해안가 도시를 폭격하고 특공대를 보내 육지에서 사람들을 살육했다.

 

대량 살상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모멸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지위가 높은 집단이 "지위의 추락이나 지위에 대한 위협"을 경험하거나 지위가 늦은 집단이 "지위가 상승하거나 지위 상승을 시도"할 때 집단 학살이 발생한다. 서로 간에 서열이 좁아진 것이 무서운 광기가 폭발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집단 학살에는 해로운 도덕성이 깊이 뿌리내린다. 알고 보면 "집단 학살은 지극히 도덕적"이다. 집단 학살은 지배-도덕 게임으로서 정의와 공정과 올바른 질서의 회복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다. 집단 학살은 단순한 살인이나 적을 처단하는 일이 아니라 가해자의 상처 입은 과대망상을 괴이한 지배와 모멸감 치료의 행위로 치유하는 과정이다.

 

이는 결코 편의를 위한 행위, 즉 단순히 물질적 이득을 위해 적을 제거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런 악몽에는 메시지가 있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게임을 하는지에 대해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메시지다.

 

24.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

우리는 집단 정체성을 공유한 친족 중심의 관계망 속에서 태어났다. 함께 어울려 잘 산다는 것은 집단의 규칙과 상징에 순응하고 남들의 실수를 감시하고 우월한 사람들을 따르고 주어진 책무를 다하고 충성심과 의무감으로 명성을 쌓고 게임의 성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지배-도덕 게임이 이렇게 오랜 세월 건재한 이유는 이런 식의 도덕 게임이 자가 복제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개인의 능력과 토론으로 이루어진 성공 지향적인 게임이 중요해졌다. 이 게임에서 전능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이상적인 자아 개념이 출현했고, 이것이 서양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성공 게임이 처음으로 낡은 도덕 게임을 압도하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운 곳은 서양이었다. 이것은 우연의 결과였다.

우리가 지위를 얻기 위해 참여하는 게임이 자아와 문화와 역사를 정의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면서 성공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다른 집단과 대륙에서 건너온 새롭고 유용한 개념에 관심을 보였고 이를 연구하고 혁신하고 현실을 올바르게 예측하고 사실을 발견하고 활용하면서 서로에게 보상을 주며 중요한 지위를 생성했다. 성공 게임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성공 게임은 우리가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길이 되었다.

 

사람들은 친족 범위 밖에서 낯선 사람들과 게임을 하면서 지위를 얻어야 했다. "물려받은 끈이 거의 없이 세상을 탐험하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심리가 발달했고 게임을 하는 장치도 다시 설계해야 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특별한 자질을 갈고 닦으며 이런 자질로 친구와 배우자와 동업자를 끌어들여 그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성공과 존경"이 따르는 게임을 창조했다.

 

특히 카톨릭교회의 새로운 규칙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랜 세월 새로운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이 씨족은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집단에 순응하지 않고 외부를 내다보고 외부인을 잘 믿고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자유로운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되자 기능공들은 이제 직업 길드를 결성했다. 길드는 성공 게임이었다. 길드마다 규칙과 상징이 있어서 성공에 따른 지위를 부여하고 '장인'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직업 윤리'가 생기면서 일 자체가 명예가 되었다. "이런 변화는 일 중심의 사회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의 다양한 활동이 점차 적극적인 생산과 고된 노력의 특성을 띠어야 했다."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유형의 게임에서 지위를 얻었다. 씨족 집단에 대한 의무에서 이제는 개인의 능려과 성공 쪽으로 지위의 판도가 요동치며 바뀌었다. 그러자 우리의 심리도 달라지고 게임에 참여하는 뇌의 문화적 영역이 재설계되어 이제 인간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거듭났다.

 

더 독립적이고 더 자기중심적이고 더 외부로 향하고 개인의 우수함에 관심이 더 많아지고 덜 순응하고 전통과 혈통, 의무, 권위에 대한 경외감을 덜 느끼게 되었다. 한마디로 더는 타락하고 지위에 취한 교회로부터 협박받고 유혹당하고 모욕당하기 쉬운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게임이 출현했다. 이 게임에는 개정된 규칙과 상징이 있었고, 도시와 대학, 길드, 시장에서 활동하는 성공 중심적인 사람들에게 적합한 방식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특별한 재능을 내렸으니 그에 맞는 직업을 정해서 재능을 최대로 발휘할 방법을 찾아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덕 게임이 지배했다. '성공'은 '도덕'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범주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부가 기존 권력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성공 게임의 승자가 도덕 게임의 승자와 같은 지위의 상징물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 엘리트층이 격분했다. 사치 금지법이라는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무역 도시의 성공 게임에서 장인과 상인을 중심으로 건강한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비교적 평등한 사회에서 상류층은 다른 계층과의 차별화가 어려워 그들의 지위를 드러내줄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정원과 광장, 집, 조각, 가구, 외모로 취향과 미적 감각을 표현했다. 그 덕분에 더 다채로운 성공 게임의 시장이 열렸다.

 

장인과 상인의 성공 게임이 강력하기는 해도 그들의 문화는 여전히 종교와 귀족의 도덕 게임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서양에서 이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엘리트층은 사람들이 더 개방적이고 자기 집단에 덜 순응하도록 뇌의 설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새로운 개념을 더 열린 자세로 받아들였다.

 

새로운 개념에 열린 자세는 지위를 만들어내는 문화가 되었다. 애호가들은 "과거에는 악덕으로 여겨지던 호기심을 미덕으로 바꿔놓았다."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궁정의 신하들이 학자가 되었고, 사회적 장신구를 얻기 위한 문화가 명예와 존경을 얻기 위한 학문으로 바뀌었다."

편지 공화국 게임의 새로운 규칙

지식인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개념을 독점하려 하기보다는 널리 알리려 했고, 지식을 공공선으로 여기면서도 새로운 개념을 선보이는 사람은 마땅히 그 개념으로 이익을 볼 수 있었고, 지식의 채무를 인정해주고 남의 생각을 훔치는 행위는 불명예로 여겼으며, 편지에는 꼭 답장을 보내야 했고, 새로운 개념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반드시 그래야 했으며, 친족이나 씨족, 국가, 종교가 경계가 되지 않았다.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과학적 방법론'이 개발.

 

편지 공화국의 건립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두 개의 전선이 한데 엮여서 폭발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시대로 날아갔다.

  1. 문화에 대한 수용력 : 과거 지식은 주로 집단 안에서만 전해졌다. 
  2. 성공에서 오는 지위 : 지위를 얻으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노력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편지 공화국의 성공 게임은 지식을 축적하는 능력을 둘러싸고 발전했다. 그 결과로 방대한 지식이 축적되었다. 편지 공화국의 규칙은 결과를 자유롭게 공유하고 동료들에게 평가받는 것이고, 승자는 확실히 축하받고 서열의 상단으로 올라갔다. 이것은 아름답게 구축된 성공 게임이었다. 사람들이 지식을 쌓는 능력과 지위에 대한 욕구를 연결해서 미래를 발견한 것이다.

 

산업혁명은 지위의 골드러시였다. 사람들이 관심사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전파하기 위한 협회를 결성했다. 이들 협회에서는 새롭고 유용한 지식을 양산할 뿐 아니라 성공한 혁신가들에게 큰 지위를 부여했다. 이런 혁명으로 지위 게임이 분출했다.

 

각종 협회는 성공 게임을 통해 능력을 입증한 사람에게 지위를 부여하는 기능을 했다. "전반적으로 발명가들의 위상을 높여주고 명예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스미스는 부에 대한 탐욕이 경제의 궁극적 동력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 정신의 더 깊은 영역에서 다른 무언가가 작용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위대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 한다." 관심과 인정을 향한 욕구는 인간의 기본 조건이다.

 

역사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연결된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집단은 곧 지위 게임이다. 우리가 진실로 남을 돕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성공 게임을 해야 한다.

 

25. 너 자신을 사랑하라

신자유주의의 자아

 

1980년대에 게임이 다시 바뀌었다. 새로운 게임 방식이 출현했다. 대처와 레이건이 훨씬 경쟁적인 게임을 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대처와 레이건의 정부는 이전의 도덕에 얽매인 게임 방식을 과감히 공격했다. 새 시대에는 거의 모든 곳에서 정치가 아니라 시장이 통제력을 지녔다. 이런 '신자유주의' 게임은 더 자유롭고 규칙에 덜 얽매이며 더 개인주의적이 되었다. 

 

이 게임에서 이기려면 우리의 뇌를 다시 한 번 재설계해야 한다. 함게 어우러져서 잘 살려면 더 경쟁적이고 더 물질적이고 더 자기에게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우리는 '정부는 물러가라'라는 태도에서 탐욕은 좋은 것이라는 신념으로 옮겨 왔다.

 

1992년 갤럽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9퍼센트가 "어떤 사람에게 열심히 일하고 성공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존감"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가장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요인은 "남들에게 보이는 지위")

 

새 천년에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더 단단히 뿌리내리는 사이 사람들은 점점 더 명성에 관심을 가졌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유명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자유주의가 심해지면서 과거에 지역 사회에서 친구와 이웃 사이에서 펼쳐지던 관계와 지위의 게임은 퇴락했다. "관계가 확장되는 새 시대의 문턱처럼 보였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직업적 성공과 상징으로 지위를 평가한다. 우리가 매일 추구하는 대상은 -교육과 예술에서조차- 나날이 경제적인 목적으로 향하고,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재산으로 측정한다. 사람들은 이제 분주한 상태 자체를 지위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분주한 사람들은 "더 유능하고 야망이 클 뿐 아니라 그만큼 더 희소하고 찾는 데가 많은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지위가 더 높다"라고 여겨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적 꿈의 세계는 이런 상징들로 번쩍거린다. 우리는 이런 상징에 열광해 땀 흘리고 시간을 투자하며 다급히 목표를 쫓는다. 향상되려 하고 개성을 눌러 주어진 틀에 맞추려 하고 더 나은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그런데 현대의 이상적 자아는 어디서 오는 걸까?

 

신자유주의적 영웅, 경제의 환상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기준에 못 미치면 성공의 상징은 우리에게 실패의 신호로 읽힌다. 우리는 개인주의자들이다. 승리가 우리의 능력에 달렸다고 믿는 시대에는 승리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의 잘못, 오로지 우리의 잘못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패자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존재가 된다.

 

완벽주의가 1989년에서 2016년 사이에 출현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사회적 완벽주의가 가장 크게 성장했다. 사람들이 "완벽함을 보여주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32퍼센트나 증가했다.

 

젋은 사람들이 사회적 상황을 점점 더 부담스럽게 받아들이고 사람들이 자기네를 더 가혹하게 평가하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줘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뇌의 기본 설계와 신자유주의적 삶을 이루는 거대하고 불공평한 게임은 서로 심각하게 어긋나 있다. 지위는 상대적이다.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남들은 얼마나 가졌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지위 게임은 주로 거대 기업이라는 부족에서 공식적인 제로섬의 상을 두고 벌이는 경쟁에 관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꿈속에서 산다는 것은 일종의 지위 불안에 시달리는 과정이다. 이것이 기본 상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게임에 어떻게 참여하는지를 말해준다. 게다가 이 게임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불공정이 증가한 채로 보상이 분배된다. 

 

우리의 게임이 거대 기업에 지배당하는 사이 다수에게 돌아가는 지위의 질은 떨어졌다. 한때 지역 소유의 독립 사업체가 가득했었다. 낮은 임금의 단기 일자리로 생계를 유지하는 새로운 사회 계층이 출현했다.

 

이들의 생활은 불안정과 불확실, 채무, 모멸감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시민이라기보다 거류민으로서 이 사회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문화적, 시민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상실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조차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한다.

 

기업이 지위의 압도적인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들이 근면하게 일을 해도 지원금을 방아야 한다면 이 게임이 애초에 불공정하다는 뜻이다. 좌우의 정치 분쟁은 주로 성공 게임을 어떻게 조직하고 부를 어떻게 분배할지에 관한 것이다.

 

세계 금융 위기가 터진 이후 사회가 경직되어 간다는 증거들이 발견된다. 신자유주의 게임이 무너지고 기대한 보상이 더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자 학생들 사이에 개인주의와 자기애의 표지도 감소했다. 같은 시기에 SNS 자아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출현했다. 웹사이트의 규칙과 상징을 이용해 온라인에서 어울리는 핵심 집단이 이들 플랫폼만의 야만적인 가치와 유동적 정체성의 게임 방식을 오프라인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반항적이고 맹렬한 그들의 게임은 이제 젊고 특권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위의 골드러시가 펼쳐지는 장이 되었다. 그들이 뛰어든 많은 전쟁터는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우리가 여전히 인종과 성별을 뛰어넘어 모두에게 게임을 할 평등한 기회를 주려고 고군분투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26. 공정과 불공정

지위라는 환상이 만들어내는 차별들

 

편지 공화국 사람들에게는 태어난 국가가 아니라 생각의 질이 중요했다. 이것은 근대성을 지탱하는 성공 게임에 우리가 바라는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지로 찬사를 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때 부족에 속했지만 이제는 우리 자신에게 속하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이 소중해졌고, 개인에게 권리가 생겼다. 여기서 나온 규칙 -위대한 게임은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이나 성적 취향의 경계 없이 작동해야 한다는 규칙-은 급진적이고 새롭다. 이런 규칙에 따라 수많은 사람이 매일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풀어내는 불공정 이야기가 현재 각종 매체와 SNS의 소문의 네트워크를 장악한다. 하지만 초조하게 분노를 분출하는 사이 공정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쉽게 간과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이런 편견(노예제, 인종차별)에 찬 관념이 주류였고, 세계의 많은 명석한 사상가에게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우리와 달리 그들은 서구 문화가 타고난 우월성이나 나아가 정교한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순전히 운과 우연성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여자들에 대한 억압이 자연의 필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서사적이고 역사적인 불공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이런 변화는 인간이 한 개인을 보는 관점이 크게 달라져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고통과 신체가 이제 공동체의 것이 아니라 오직 개인에게 속한 것이므로 개인은 더는 공동체의 선이나 고귀한 종교적 목적을 위해 희생당할 수 없게 되었다."  고문이나 공개 처형과 같은 잔혹한 관행이 서서히 사라진 이유는 "고통과 인간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무너지고 개인이 자기 몸을 소유하고 독립성과 신체적 불가침의 권리를 지니며 타인에게서도 자기와 같은 열정과 정서와 공감을 인식하는 새로운 개념이 서서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종과 성별과 성적 지향 같은 계급 정체성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분위기는 비교적 최근에야 나타난 현상이다. 여전히 기존의 게임을 하면서 피부색이나 출신국이나 성별에 따라 상당한 지위를 얻는다. 이것은 도덕 게임이다. 시선을 안으로 돌리고 우리 친족을 지키는 게임이다. 따라서 명예와 의무와 도덕적 주장이 능력이나 재능이나 지식에 앞선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기본 설계에 따라 작동하기에 게임을 함께 할 상대를 찾을 때 '자기 유사성'을 단서로 삼는다. 인간은 애초에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자기 집단에 편향을 보이도록 태어난 것이다. 

 

명문 사립학교 졸업생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말한다. 이들은 한눈에 '우리팀'임을 알아본다. 이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중에 발생한다. 그들은 자연히 서로의 존재에서 힘을 얻고, 서로 지위를 부여하고, 서로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이 꾸는 꿈의 진실성을 확인한다.

 

명문 사립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느끼는 강력한 유대감은 외부의 다른 야심 차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 있다. 유능한 인재도 그들만의 무의식적 지위의 언어로 소통하지 못해서 결국 배제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거리감, 이런 무심함, 이런 소외감. 이런 감정 때문에 지위 게임에서 뒤처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특권은 폭발력이 있는 개념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들이 자기 위에서 우쭐하게 활보하고 자기가 부당한 지위에 있고 자신의 지위가 전시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한다.

 

특권의 중요한 형태는 유전이다. 성공에 필요한 특성이 있다. 기질과 투지, 지능, 사교성, 지위를 향한 갈망을 타고나고, 그런 다음에 운 좋게 이런 쪽으로 양육을 받으면 성공에 필요한 특성이 더 강화된다. 엘리트층의 다수는 단지 재능을 타고났을 뿐이고, 이런 재능은 신의 은총으로 적절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면서 얻은 선물이다.

 

약속의 땅이 도래하고 계급과 성별과 인종의 해묵은 벽이 무너진다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유전적 엘리트, 다시 말해서 태어날 때 '로또에 당첨된' 승자들에게 지배당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선망하고 그들을 모방하고 그들에게 분노할 것이다. 꼭 지금처럼. 엘리트가 누리는 특권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게임에서 피할수 없는 요소다. 엘리트는 언제까지나 존재할 것이고, 그들이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을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27. 게임의 붕괴

신자유주의 영토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현실에 대한 각기 다른 꿈속에 살면서 경쟁하는 두 집단 사이의 전쟁이다. 양쪽 모두 인생의 게임이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들 두 진영의 싸움은 신자유주의 시대 종말의 초입을 알리는 특징적인 사건이다.

 

신좌파, 신우파 두 진영은 모두 도덕 게임을 한다. 문제는 신좌파든 신우파든 각자의 신념을 지지하지 않는 모두를 적으로 돌려세운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구의 다수가 속한 정치적 중도파는 양쪽 모두에서 공격받는다. 마구 동요하는 세상에서 신좌파와 신우파 다수는 소외당했다고 느끼고 좌절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한다.

 

지위 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문화 전쟁에 동력을 공급하는 숨은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미 어떤 게임에서 기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사회가 긴장 상태에 놓인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것은 신좌파의 다수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MZ 세대가 자신의 상대적 지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다.

 

역사적으로 사회 붕괴의 또 하나의 전조가 '엘리트 과잉 양산'이다. 엘리트가 지나치게 많이 양산되면 한정된 지위를 두고 경쟁해야 한다. 

 

젋고, 인터넷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상대적 지위의 하락은 게임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번져 나간다. 

 

신우파는 "그들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배운 대로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들 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집단에 특권을 안겨주는 해안가 부촌의 미국인과 도시의 엘리트들에게 무시당한다."고 느낀다. 그들의 분노는 인종차별주의로 굳어진다. 엘리트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자신들을 깎아내리면서 소수 집단을 부당하게 띄워준다고 말한다.

 

신우파는 민족 국가를 지향하고 세계화에 반대하고 이민에 반대하고 '과도한 인종 변화'에 반대한다. 이들은 정치인 중에서도 "자국의 문화와 이익을 우선에 두고, 그들과는 동떨어진, 대체로 타락한 엘리트들에게 무시당하고 심하게는 멸시당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정치인을 지지한다.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와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는 바로 이런 현상이다.

 

신좌파는 '다양성, 평등, 포용' 산업을 통해 그들의 게임과 현실에 대한 꿈을 제도화하는 데 성공했다. 신좌파는 강력한 골드러시 운동에 뛰어들어 이 게임에서 유독 뛰어난 사람에게 돈과 함게 중요한 지위와 상징을 주었다.

 

경직된 도덕 게임에서는 적대적인 꿈이 만들어진다.

 

대거넘의 백인 노동 계급 주민들은 인종과 민족성의 상징을 통해 게임을 하기 때문에 이런 해로운 꿈 속에서 산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프로젝트로 인해 그들의 게임이 추락하고 그들의 물리적 영토와 신경계 영토는 패배의 상징으로 뒤덮였다. 그들에게 이민이 영국 경제에 승리를 안겨준다는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지위가 하락하는 데는 자동화와 아웃소싱의 책임도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지위가 하락한 현실만 보인다.

 

2007년  한 여론 조사에서 주민들에게 지역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50년 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자면서 꾸는 꿈은 진실과 광기의 결합이다. 양쪽의 꿈이 충돌하는 가운데 서로의 꿈에 증오와 진실이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28. 공산주의자들의 우화

지위 없이도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앞서 나가기 위한 조건을 없애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회를 건설한다면? 유토피아이자 지상에 펼쳐지는 진정한 낙원이자 인간 진보의 이야기에서 아름다운 마지막 장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무엇이 우리를 구분할까? 무엇이 불공평을 유발할까? 재산이다. 부동산, 상품, 토지, 사업, 산업, 모든 것의 사유권이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이제 사유권이 없다. 모든것을 공유해야 한다. 공동으로 일하고 함께 살아간다. 모두가 나만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보상이 풍성하게 축적되어 탐욕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분배할 수 있다. 이것을 '공산주의'라고 부르자.

 

공산주의에서는 수만 년의 불평등을 낳은 노동 분업이 종식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계급이 사라진 새로운 유토피아가 출현하려면 우선 지배력을 동원해서 사회를 재편하고 자본가들의 손아귀에서 소유권을 빼앗는 일시적인 과도기를 거쳐야 했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사실 공산주의의 오류는 플라톤의 주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처음으로 공산주의의 꿈을 꾼 플라톤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수정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공을 향한 인간의 갈망을 자극하는 것은 부나 사유재산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 갈망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평등하게 만들어야 할 대상은 소유가 아니라 인간의 욕구다."

 

공산주의가 들려주는 이런 우화를 통해 우리는 인간 실존을 게임에서 지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성공하려는 욕구는 언젠가 저절로 불거져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들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다.

 

이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인류에 관한 이야기에서 인간은 본래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은 불평등을 개탄하면서 결국 새로운 계급 질서를 구축하고 그 질서의 꼭대기로 올라가려 한다. 이런 행태가 우리의 본성이다. 지위를 얻고 싶은 욕구는 영원히 근절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게임을 위해 지위를 얻고, 나아가 당신과 당신과 당신 위에서 가능한 한 높은 지위를 얻어서 군림하는 것이 삶의 비밀스러운 목표다. 이것이 우리가 의미를 만드는 방식이다. 정체성을 만드는 방식이다. 우리의 최악의 모습이나 최선의 모습이자 불가피한 진실이다. 인간에게 평등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한 꿈이다.

 

 

29.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

지위가 주는 즐거움은 삶의 규칙에 따라 게임에 참여하고 얻어내는 상이다. 자연은 온갖 기이하고 무시무시한 쇼를 펼치면서 우리가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행위를 견디도록 뇌물 공세를 펼친다.

 

인생의 게임에는 숨은 규칙과 함정이 있다.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 살면서 마주하는 온갖 문제는 결국 현실과 환상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발생한다. 뇌의 속임수로 우리는 우리 집단의 신화와 편견을 믿고, 스스로 게임의 플레이어가 아니라 이야기의 도덕적 영웅이라고 믿는다.

 

이 꿈의 설득력이 이렇게 강력한데 우리가 제대로 된 게임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게임을 하는 동안 필요한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유해한 꿈의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음 일곱 가지 규칙을 명심해야 한다.

 

1. 따뜻함과 진심과 능력을 실천하기

수렵채집 시대 이래 명성은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자유로이 부여하는 것이었다.

성공적인 게임을 위한 세 가지 차원을 정리할 수 있다. 따듯함과 진심과 능력이다. 이것은 인간 행동의 신성한 3요소를 이룬다.

 

인간의 게임에는 지위를 얻기 위한 세 가지 주요 경로가 있다. 우선 지배 행위로 지위를 쟁취할 수도 있고, 도덕성이나 성공을 보여주어 우리 집단에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 명성을 얻을 수도 있다. 따뜻함을 보이는 것은 상대를 지배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진심을 보이는 것은 남을 속이지 않고 공정하게 게임을 치른다는 뜻이며, 능력을 보이는 것은 지위를 위한 경쟁에서만이 아니라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능력을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지도자의 규칙은 조금 다르다. 따듯함은 엘리트층을 상대할 때 적절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게임을 대표하여 게임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지도자들은 우리 집단이 더 높은 지위를 누려야 마땅하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오면 승리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성공했다. 다만 이런 복음주의적 열정이 오만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거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작은 명성의 순간 만들기

사실 삶에서 작은 지배의 순간을 만드는 것은 매우 쉽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국지적인 차원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경쟁에 열을 올린다. 지배 게임으로 넘어가려는 충동을 의식적으로 누르고, 대신 명성 게임으로 넘어가서 상대의 노고를 존중하고 칭찬해주면 된다. 당장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해도 결과적으로는 적어도 모두가 우리를 한 인간으로서 더 좋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배가 아니라 명성이 쌓이면 평판이 월등히 좋아지고 보상이 따를 수도 있다.

 

우리는 남들에게 지위를 줄 수 있고, 그러는 데 비용도 들지 않으며, 지위가 다 떨어져 바닥날 리도 없다는 점을 쉽게 잊는다. 작은 명성의 순간을 만든다는 말은 항상 명성을 사용할 기회를 찾는다는 뜻이다. 남들에게 지위가 높아졌다고 느끼게 해주면 그들도 우리의 영향력을 인정할 가능성이 커진다.

 

부하 직원에게 부탁을 하든 업무를 맡기든 미묘하게라도 지배의 신호를 보내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야 그들이 압박감에 짓눌리지 않고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다. 어던 사안에서 자기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기가 하는 행동을 좋게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상기시키는' 방법이 상대를 설득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버스 요금을 빌려 달라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다"고 알렸을 때 부탁을 들어주는 비율이 높아졌다. 나는 이것이 지위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추정한다.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면 아무리 부드러운 압박이라도 지배에 순응해 행동하는 게 될 뿐이다. 반면에 자유롭게 결정했다고 생각한다면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나약하지 않고 도덕적이며 따라서 너그러운 행동의 대가로 정당하게 보상을 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3. 게임의 위계질서를 이용하기

인생의 게임에서 가장 큰 위험 요인 중 하나는 독재다. 특히 오늘날처럼 물리적 영역만이 아니라 심리적 영역에서도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에 독재자들은 우리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식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미 품은 믿음을 말해주면서 시작한다. 그래서 독재자들의 주장은 '도덕적으로' 일리가 있다. 

 

러시아 민중에 대한 잔혹한 착취를 종식하자는 데 누가 반대할 수 있었을까? 독일의 경제와 국가의 자부심을 회복하고 위험한 공산주의를 제거해준다는 데 누가 반박할 수 있었을까? 아동 학대와 맞서 싸우자는 데 누가 반대할 수 있었을까?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이 옳고 도덕적 영웅이며 높은 지위를 약속하는 땅으로 가는 영광의 길에 올라섰다고 말해주었다. 사람들은 진실이라고 믿는 꿈을 경험했다. 스스로 선의 편에 서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이런 게임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이룬다면, 우리는 자신이 유혹에 넘어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지위를 얻는 방식을 관찰하면 우리의 게임이 어떤 게임인지 파악할 수 있다. 

 

독재는 지배-도덕 게임이다.

  • 일상의 행위나 대화의 상당 부분이 복종과 신념과 적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 당신이 참여하는 게임이 게임 안에서든 밖에서든 사람들에게 게임의 규칙과 상징에 순응하라고 강요하는가?
  • 당신의 게임이 이념의 적을 침묵시키려 하는가?
  • 당신의 게임이 계급 질서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기 집단만 신성시하고 공동의 적을 악마화하는가?
  • 당신 주변의 사람들이 신성한 믿음에 집착하는가?
  • 그들이 신성한 믿음에 대해 반복해서 말하면서 탐욕스러운 즐거움을 느끼고, 그 시념에 대한 믿음이나 적극적인 믿음으로 중요한 지위를 얻는가?
  • 당신의 게임이 대체로 남의 불행에 기뻐하는 마음을 동반하며 타인의 삶을 해롭게 하거나 파괴하려 하는가?
  • 그리고 이런 공격성을 미덕으로 느끼게 하는가?

이것이 독재다.

 

무서운 사촌들이 우리의 뇌 속에 있다. 진심으로 '다시는' 독재를 허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독재는 '좌파'

의 것도 '우파'의 것도 아니고 그저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독재는 열 맞춰 거리를 행진하면서 무시무시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우리를 유혹한다.

 

독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은 여러 가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세뇌당한 듯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한 가지 게임에 몰아넣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한 가지 게임에 전념하면서 거기서 관계와 지위를 얻으려고 애쓴다. 특정 게임 안에서 그것이 주는 지위를 유지하려면 게임의 꿈이 아무리 비현실적 망상이라고 해도 그 꿈으로 자신을 채울 수밖에 ㅇ벗다. 그래서 남들에게 해를 끼칠 뿐 아니라 스스로 파멸할 수도 있다.

 

게임이 실패하거나 게임에서 추방당하면 정체성(자아)이 붕괴한다. 따라서 다양한 정체성으로 다양한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정체성이 붕괴할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여러 개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고 더 안정된 정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간절히 원하는 명성을 얻으려면 그 게임에 속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중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걸린다. 더 끈기 있게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 삶은 게임의 위계질서에 따라 정렬된다. 

 

4. 도덕 영역 줄이기

어떤 지위는 다른 지위보다 손십게 얻을 수 있다. 당신은 그냥 남들을 판단하기만 하면 된다. 지위는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남을 깎아 내리면 내 마음속에서나마 내 지위는 올라간다.

 

스마트폰과 SNS로 인해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따르는 세계적인 도덕 게임이 우리 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지금은 이렇게 '평가'로 도덕적 지위를 얻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편리해졌다. 하지만 여기에는 대가가 따라서, 이 지위로 남들을 비참한 처지로 떨어트릴 수 있고, 특히 지배 행동이 결합되면 과격해지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도덕의 영역을 의식적으로 줄이면 도움이 된다. 남들을 판단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는가? 그래서 값싸고 오염된 지위를 얼마나 얻는가? 도덕 영역을 줄인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서 남들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 관심을 둔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우습게 보고 증오하기 쉬운, 우리와는 동떨어진 꿈을 꾸는 사람들을 무심히 비난하는 행동을 멈춘다는 뜻이다.

 

5. 균형있는 사고방식 기르기

도덕은 공감을 오염시킨다. 우리의 꿈은 지극히 실제적이고 진실해 보이기 때문에 그 세계의 도덕적 확신도 실제적이고 진실해 보인다. 하지만 도덕적 '사실'은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우리의 도덕적 현실이 진정한 현실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현실은 거짓이어야 한다. 따라서 남들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악이 된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가 정답이 없는 질문을 두고 서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민자나 신자유주의나 종교가 선이냐 악이냐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두 순전히 지위 게임이다. 이런 복잡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두 게임이 하나를 달성하려고 하면 하나는 희생되는, '상충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서로 다른 두 게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른 지위 게임에 영향을 끼치는,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가 혼재된 집합체다.

 

우리의 도덕적 진실을 실체가 있는 현실로 보거나 절대적 진실로 존중하려 하기보다는 균형 잡힌 사고 방식을 길러야 한다. 세상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협상하고 거래하는 집단으로 보자는 것이다. 적의 게임을 이해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면서, 그 게임의 타당성에 설득되지 않더라도 지위를 생성하는 그들만의 기준을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심각한 갈등 상황에 놓였더라도 각자의 이야기에는 진실의 한 조각이 담기기 마련이다. 신좌파와 신우파의 충돌에서도 양쪽 모두 진실이기도 하고도 거짓이기도 한 각자의 꿈을 만들었다. 결국 양쪽 모두가 심각한 편견과 싸워야 한다.

 

이민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각기 다른 집단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뿐이다. 지혜를 모으고 단순한 도덕 논리를 넘어 세상을 용과 용의 처단자가 득실거리는 곳이 아니라 협상하고 거래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본다면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 다르게 살기

지위 게임에서의 삶은 고단하다. 특히 오늘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더 힘들다. 그러다 보니 이런 세상에서는 우리도 달라진다. 실패를 알리는 주변의 신호에 더 민감해지고 그래서 더 완벽주의자가 되어 간다. 우리는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판단하는 기준이 매우 높아서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집단의 중요한 행동 기준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작은 비순응의 활동을 하여" 성공을 위한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독창성은 다른 경쟁자들이 따라 잡기 힘들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완벽해지기 위해 실패에 강박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소식이다. 더 나은 전략은 종종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

 

7.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지위 게임은 우리가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기 위해 참여하는 공모의 장이다. 생존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나면 이제 남는 것은 경쟁이다. 무엇을 위한 경쟁일까?

 

우리는 마법처럼 무한한 지위의 상징을 만들어 낸다. 존경, 영향력, 돈, 아첨, 눈 맞춤, 복장, 보석, 직위, 오렌지 주스의 양, 비행기의 왼쪽이나 오른쪽. 우리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들여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에 몰두한다. 인생에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살면서 날아오르고 추락하고 짜릿한 승리를 거두고 치명적인 패배도 겪고, 때로는 자살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죽음의 쓴맛이 실패보다는 달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게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해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새롭고 더 나은 게임을 찾는 편이 낫다. 인생의 후반전에는 전반전보다 더 의미 있게 탐험할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상상의 중심에는 늘 지위를 건 싸움이 있다. 내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면 이 싸움이 시작된다. 이제 나는 이런 과정을 알아채서, 이것이 시작되지 않게 막고, 이 게임의 밖으로 빠져나가고, 조금이나마 합리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위험한 환상에 쉽게 휩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만큼 집단이 위험한 환상에 휩쓸려 압도적인 위력을 발산하는 것도 안다. 나날이 양극화되고 분노가 격해지는 시대의 서구 사회에서 나는 게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새롭고 거친 게임의 꿈이 사회 전반에 형성되고 대중을 현혹시키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집단이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믿는 그 황당한 무언가가 옳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의 이런 인식을 더 자신할 수 있다. 믿는 이들의 수가 많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더 진실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힘이나 플랫폼이나 지적 능력이 더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엘리트와 그들의 게임은 인류 역사 전반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 왔다. 그리고 이 흐름이 우리 시대에 갑자기 멈출 리는 없다.

 

마지막으로 나는 게임의 압박이 극심해지는 순간을 알아채는 법을 터득했다. 이처럼 이상하고 불안정한 꿈의 세계에서 승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 새로운 상징이 계속 출현하는 순간이다. 나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런 상징의 수가 많은 만큼 우스꽝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누구도 세상의 모든 사람과 경쟁할 수 없다는 점을 거듭 상기한다.

 

약속의 땅은 신기루다. 가장 힘든 순간에 꿈의 진실을 떠올려야 한다.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라 결승선이 없는 게임이라는 진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최후의 승리가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한 과정이다. 끝없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누구도 지위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승리해서도 안 된다. 인생의 의미는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