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과거와 미래는 구분할 수 있는가?
세상을 설명하는 기본 법칙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없다. 오직 열역학 제2법칙만이 이를 구분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값을 알 수 없기에 세상을 희미하게 보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보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존재 하고 방향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사물의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사라진다. 방향이 상실된 것이다.
02 방향의 상실
영원한 흐름은 어디서 시작될까?
과거와 미래는 다르다. 원인은 결과에 선행한다. 상처가 나야 통증이 생기지, 통증을 느낀 뒤에 상처가 나는 일은 없다. 과거는 우리가 바꿀 수 없다. 반면 미래는 불확실하고 욕망과 불안이 교차하며, 어쩌면 미래 자체를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미래를 살 수 있고,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다. 미래에는 모두 가능한 것이다. 시간은 양쪽 영역으로 똑같이 뻗은 선이 아니다. 끝부분이 서로 다른 화살표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은 무엇일까? 세상의 문법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메커니즘 중에서 이미 존재해왔던 과거와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와 미래가 그토록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와 20세기 물리학은 시간이 장소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예상치 못한 사실과 마주하며 당혹스러워했다. 세상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기본 법칙에서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열
사디 카르노는 '열이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증기 기계가 작동한다는 생각'을 했다.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사디의 아이디어 핵심을 짚어 법칙을 발표해 세상의 칭송을 받는다. "열은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이동할 수 없다."
여기서 핵심은 이 열의 특징과 낙하하는 물체와의 차이점이다. 공은 낙하하기도 하지만, 반동으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열은 그럴 수 없다.
물리학에서 과거를 미래와 구분하는 일반 법칙은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발표한 이 법칙 뿐이다. 뉴턴 역학,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법칙, 그 어떤 방정식도 과거를 미래와 구분하지 않았다.
ΔS≥0
'델타 s는 0과 같거나 그 이상이다.' 라고 읽고 '열역학 제2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희미하게 보기
볼츠만은 이 공식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열 요동은 카드 한 묶음이 계속 섞이는 것과 같다.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던 카드들을 뒤섞으면 무질서해진다. 이렇게 열은 (분자들의) 뒤섞음에 의해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이동할 뿐 그 반대로는 이동하지 않는다. 자연의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친숙하게 일어난다.
볼츠만은 이것을 알아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기본적인 운동 법칙이나 심오한 자연의 문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점점 사라지는 것에 있다.
이것은 대단한 통찰력이었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 사이의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그 근원까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질문의 방향만 바뀌었다. 그의 의문은 시간의 두 방향 중, 왜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한쪽에서만 사물이 정리된 상태에 있었는가였다. 과거에는 왜 엔트로피가 낮았을까?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현상을 관찰해보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이유가 분자들이 요동치면서 전체적으로 무질서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우리 주위에 관찰되는 현상들은 왜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걸까?
어떤 구성이 다른 구성에 비해 좀 더 특별하다는 개념은(예를 들어 검은 카드 26장 뒤에 놓인 붉은 카드 26장) 카드들의 어떤 측면만 봤을 때(예를 들면 색상만 보는 것) 의미가 있다. 모든 카드를 다 구별하면 구성은 전부 동등해진다. 어느 것이 더 특별하다거나, 어느 것은 덜 특별하지 않다. '특수성'의 개념은 세상을 대략적으로, 희미하게 바라볼 때만 만들어진다.
볼츠만은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엔트로피는 우리가 희미한 시각으로 구별하지 못하는 다양한 구성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산출하는 양이라는 점을 정확히 증명했다. 열과 엔트로피,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 등은 자연을 대략 통계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이 희미함과 깊이 연결돼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정확한, 미시적인 상태에 대한 모든 상세한 내용을 고려할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에 관한 특징적인 부분들이 사라질까?
그렇다. 사물의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진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의 미래는 현재의 상태에 따라, 즉 과거의 상태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시간에서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물리 법칙들에 의해 표현되는 규칙성이 있는데, 여기서 미래와 과거는 서로 대칭적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볼츠만의 연구에서 나온 결론은 당혹스럽다. 결국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우리 자신의 희미한 시각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결론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에 대한 나의 느낌이 이렇게 생생하고 명확하고 실존적인데, 내가 이 세상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가? 나의 근시안 때문에 오류 같은 것이 생긴다는 말인가? 내가 정말 수십억 분자들이 어떻게 춤을 추는지 정확하게 관찰하고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미래가 과거와 '똑같이' 펼쳐지는 것인가? 과거의 지식(혹은 무지함)을 미래의 지식과 똑같이 소유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약화시킨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불신이 싹튼다. 그러나 지구운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한 이 이론에도 압도적인 증거가 있다. 시간의 흐름을 특징짓는 모든 현상은 이 세상의 과거에서 '특정한' 상태로 환원되며, 그 '특정성'은 우리의 희미한 시각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시간은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잃었다. 바로 과거와 미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다. 볼츠만은 시간의 흐름에는 본질적인 어떤 것도 없으며,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우주의 불가사의한 불가능성이 희미하게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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