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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 : 무작위성에서 시작되는 규칙성

3. 큰 수의 법칙 - 무작위성에서 시작되는 규칙성

우리가 자랑하는 자유는 집단 속에 흡수되어 사라져버린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리적, 도덕적 법과 관련되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일생동안의 어떤 행동도 그 용도나 풍습이나 필요성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 존 허셜(1850)

 

볼츠만의 과학적 업적은 '고뇌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시간의 화살에 대한 그의 설명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제기했던 중요한 의문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19세기 말의 빈은 프로이트, 쇤베르크, 비트겐슈타인, 무질 등을 중심으로 치열한 지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질이 지적했듯이, 시민들은 관습에 얽매여서 생기를 잃어버리고 입을 굳게 다문 군중일 뿐이었다.

 

그렇게 경직되고 유물적인 사회에서는 자살이 놀라울 정도로 많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분명해 보이는 것들 중에는 19세기 이전까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사건을 평균 발생률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일은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었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세상은 마술과 미신과 기적과 음모로 가득 차버릴 것이다.

 

오늘날에도 위험과 우연의 일치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에서는 통계의 가치가 쉽게 무시된다.

원자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집단의 거동에 대한 의미 있는 설명에는 통계가 필수적이다. 오늘날에는 그런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러나 19세기 과학에서 통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사회의 측정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스승이었던 베이컨이 제시했던 "자연 집단"과 "정치 집단" 사이의 비유를 논리적 결론으로 발전시켰다. 결국 정치학도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탐구로 해부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 일종의 자연과학이라는 뜻이다. 홉스는 과학적 정치학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역학을 기본적인 틀로 선택했다.

 

1660년대 존 그란트는 정책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사회적 수"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출생하고 사망하는 사람의 수를 모르면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법을 만들고, 통치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란트의 통계학을 정교한 방법론적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기록을 맡았던 소박한 사람들은 "한 잔의 에일과 더 많은 뇌물"에 쉽게 매수되어 사망의 원인을 (매독처럼) 수치스러운 것 대신 (폐결핵) 정상적인 것으로 기록해주었다. 그렇지만 그가 만든 사망 원인과 연령 표는 사회의 인구 증감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그란트의 제자 페티는 사회통계학을 이용해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방법이 정책을 수립하는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홉스의 경우처럼 개인의 기본적인 심리에 대한 가정을 근거로 이론을 유도하는 대신 사회 집단에 대한 관찰의 결과를 활용하려고 했던 경험주의자였다.

 

그러나 그가 제안했던 정책들은 대부분 무시되어버렸다. 사실 그렇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사회정책에 대한 페티의 분석적인 접근은 사람들의 희생을 무시한 지나친 합리주의의 대표적인 예였다.

 

당시 국가의 입장에서는 국민의 수를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정복 전쟁이 인구를 늘리기 위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그랬듯이 인구 감소의 원인이었다.

 

경제학자 맬서스가 <인구론>을 썼던 1826년에 이르러서야 유럽과 미국의 정부는 국민의 수를 세는 지혜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의 노력은 정복한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한 행정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았다.

 

18세기에 이르면서 그런 사회통계에 사회가 작동하는 방법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쥐스밀히는 남녀의 출생률과 사망률 차이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모두가 결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인간 생활의 혼란 속에서 사회를 안정화시켜주는 일종의 집단 법칙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1784년 칸트가 주장한 다음과 같은 "보편적 법칙"으로 이어졌다.

 

원인이 불확실하더라도, 우리가 인간 의지의 자유를 대폭적으로 허용한다면 그 속에서 규칙적인 움직임을 구별하고, 개인의 경우에는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이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는 규칙적이고, 느리기는 하지만 발전하는 것으로 보일것을 기대하게 된다.

 

한편으로,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사회의 "법칙"에 대한 믿음은 우주의 규칙성에 대한 계몽주의적 믿음의 산물이었다. 19세기 이전에는 그란트의 "사회적 수"에 적용되는 법칙이 성스러운 지혜와 설계의 증거로 여겨졌지만, 후세의 비평가들에게는 재앙과 혁명의 징조였다.

 

사회적 수에 대한 연구에는 이름이 필요했다. 1749년 독일의 학자 고트프리트 아헨발은 그런 "과학"이 사회의 자연적 "상태"를 취급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통계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턴 교회

18세기는 정말 극단적인 시대였다. (공포정치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믿음은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다. 많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그런 원리가 이성의 힘을 통해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자유의 시대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콩도르세는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살릴 수단이 없더라도 인구가 지수함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믿었다. 결국 모든 국가는 과밀, 빈곤, 위생 불량, 사회적 불안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억압과 혁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인간 사회의 내부 구조"라는 어쩔 수 없는 법칙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의 거동과 진화를 결정하는 법칙으로 구성된 내부 구조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맬서스의 의견에 사람들은 동의했다. 그런 법칙과 사회의 관계는 뉴턴 역학과 물체의 운동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런 생각은 특히 프랑스에서 유행했다.

 

데이비드 흄은 <인성론>에서 데카르트적 공리보다 경험주의를 통해서 인성을 근본 원리로 환원시킴으로써 정신과학에서의 뉴턴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표현했다. 1741년에 흄이 "정치학을 과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

 

케네는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뉴턴의 물리학적 힘에 대응하는 법칙과 "사회적 힘"을 찾아내기 위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케네의 <경제표>(1758)는 최초의 경제학 이론서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처음으로 "경제학자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업적은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흔히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진 버크는 그런 주장(물질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것처럼 행복도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몹시 싫어해서 정부의 법과 제도는 근본 원리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역사적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창발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기존의 법은 경험과 전통에 의해서 가다듬어지고, 이미 시험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합리적" 이론으로 주물러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버크의 주장에 따르면 어쨌든 국민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역사에 대한 어떠한 "과학적" 분석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버크마저도 자신의 주장을 뉴턴의 역학과 광학 용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인상적인가!

 

그런 계몽주의적 입장은 인류의 발전과 복지를 추구하는 합리적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7)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간섭이 아니라, 사회의 자연법칙을 밝혀냄으로써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콩트는 비록 정량화에 대한 통계학자의 맹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문명의 과학에 대한 꿈과 믿음을 담은 "사회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홉스의 역학적 정치학, 통계적 정량화의 의미, 사회의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을 비롯해서 당시에 등장했던 사회적 탐구의 모든 가닥들이 케틀레의 노력에 의해서 통합되었다. 격동의 반세기 동안에 물리학, 수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사이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홉스와 마찬가지로 케틀레도 역시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사회의 안정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케틀레는 천문학자들이 사회에서 질서를 찾아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람에게 관련된 법칙과 사회의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은 언제나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우주의 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물질세계의 법칙을 생각하고,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놀라운 조화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은 생명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오차의 모양

당시의 사람들은 천체의 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측정이 뉴턴 법칙이 요구하는 수학적 규칙성을 정확하게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든 측정은 오차 때문에 역학 법칙으로 예상되는 관계에서 분명하게 벗어났다.

 

특별한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을 알아내려면 많은 수의 대표적인 측정에서 그런 오차가 얼마 "자주" 발생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오차에 대한 통계를 수집해야 한다.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오차의 분포가 언제나 같은 모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언제나 작은 오차가 큰 오차보다 많이 발생하고, 오차의 크기에 따른 빈도의 감소를 예측할 수도 있었다. 오차의 통계를 그래프에 그리면 오차 곡선이라고 알려지게 된 특별한 곡선이 만들어진다. 그런 곡선과 일치하는 측정은 오늘날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우스" 통계를 따른다고 한다. 이 오차 곡선은 근본적으로 "무작위적" 과정의 결과에서 나타나는 확률 분포에 해당한다.

 

그런 곡선은 확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수학자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동전 던지기 결과의 분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우연에 의한 사건에서 그런 예측 가능한 결과가 얻어진다는 사실은, 어느 쪽으로든 벗어날 가능성이 같아서 서로 상쇄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놀라운 것은 아니다. 

 

자코브 베르누이는 사상의 결과가 고정된 확률 비율에 의해서 지배되는 경우에 충분히 반복해서 얻어지는 실제 결과의 분포는 언제나 똑같은 비율로 수렴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푸아송은 1835년에 그런 결과를 "큰 수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무작위적인 사상의 수가 충분히 큰 경우에는 순수한 무작위성이 결정론을 따르게 된다. 무작위성 자체가 예측 가능하게 일어나는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파리에서 라플라스의 결과에 감명을 받았던 케틀레는 오차 곡선이 인간에 대한 인구통계학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질서정연한 행동

케틀레는 프랑스의 과학자들로부터 변이가 오차와 관계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 키의 차이가 자연의 독특한 특징이 아니라 우리 몸이 이상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가 "존재하고 보존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평균적인 행동이 "정당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결국 케틀레의 사회물리학은 "평균인"의 개념을 근거로 했다.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평균이 되어야 했다.

 

균일성에 대한 지나친 숭배는 자연히 모든 변이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평균으로부터 심하게 벗어나는 것은 ... 육체적인 추함은 물론이고, 도덕적결함과 성격적인 면에서의 병으로 보인다."

 

케틀레 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결과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가 사람에 대한 통계에서 찾아낸 규칙성에 열광했다. 마르크스도 케틀레의 통계법칙을 이용해서 노동가치설을 만들었다. 벤담의 공리주의를 이어받았던 존 슈튜어트 밀은 케틀레의 업적이 사회와 역사가 (밝혀내기는 어렵지만) 자연과학과 같은 수준의 절대 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했다. 

 

밀은 <논리학 체계>에서 보편적인 오차 곡선을 생각하면서 "근본적으로 가장 변하기 쉽고 가장 불확실한 것처럼 보이며, 개별적으로는 우리가 예측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의 경우에도 상당한 수의 사건을 고려하면 수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규칙성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과학

케틀러의 성과를 영국에 널리 알린 버클도 국민을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지키고 싶어했다. 케틀레는 인간의 간섭을 초월하는 자신의 통계적 법칙에는 정부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믿었다. 버클은 아무도 그런 법칙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유방임주의의 원칙을 강하게 주장했고, 국민들이 스스로를 지배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버클은 사회를 국민에게 맡겨두면 자동적으로 "질서, 대칭, 법" 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고, "정치인은 거의 언제나 사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했다.

버클은 역사 자체도 과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단의 거동이 개인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을 숨겨버린다고 생각했던 칸트도 우리가 "역사적 법칙"을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세계주의 관점에서 본 보편적 역사의 개념>이라는 글에서 "개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국가까지도 스스로의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 자신들이 모르는 자연의 목적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이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버클도 그런 주장에 동의했다. 그의 입장에서 역사는 "위대한 진리"에 의해서 지배된다. "사람들의 행동은 ... 실제로는 결코 모순될 수가 없고, 아무리 변덕스러워 보이더라도 ... 현대 세계의 숨겨진 규칙성이라는 보편적 질서로 이루어진 거대한 체계의 일부일 뿐이다."

 

버클은 사회통계학적 규칙성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케틀레와 마찬가지로 출산, 사망, 범죄, 자살, 결혼의 빈도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 문명의 역사>는 19세기 중엽의 정부는 불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자유방임주의의 사상을 영국의 지식 사회에 확산시켜주었다. 

 

사람들은 점차 사회 환경에 대한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법을 만들어서 시행하려는 모든 시도가 가장 거창하고 위험한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 옛날의 입법가들이 변덕스럽게 다루었던 주제들은 가장 위대한 것에서부터 가장 형편없는 것까지 모두에 대해서 완벽하고 논쟁의 가능성이 없는 법을 만들 수 있었다.

 

랠프 월도 에머슨은 역사통계 법칙의 확실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그는 1860년에 쓴 <운명>이라는 글에서 "통계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핵심 주장을 "인구의 폭이 충분히 넓기만 하면 가장 우발적이고 특별한 사건들이 고정된 계산의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라고 소개했다.

 

니체는 "역사에 법칙이 있다면, 법도 아무 의미가 없고, 역사도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비판했다.

 

사람에서 원자까지

겉으로는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규칙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사회의 통계적 법칙이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에게 그런 법칙을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무작위적인 현상에 적용해보도록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그런 과학자였다.

 

끊임없이 충돌하는 구성 입자들의 움직임 때문에 아무도 추적할 수 없는 기체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던 맥스웰은 그것이 개인 행동의 직접적인 동기를 밝혀낼수 없는 사회에 대해서 버클이 씨름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우리가 실험을 할 수 있는 물질의 가장 작은 부분은 수백만 개의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는 그런 분자들을 결코 개별적으로 느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분자들 중 어느 하나의 실제 움직임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격한 역사적 (뉴턴적) 방법을 포기하고, 많은 수의 분자들을 취급하기 위한 통계적 방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종류의 양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때 우리는 평균의 규칙성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규칙성을 만나게 된다. 그런 규칙성은 우리가 모든 실용적인 목적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수백만 개의 분자들이 들어 있는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 관찰되는 균일성은 라플라스가 설명했다. 버클이 궁금하게 여겼듯이 결코 다른 것과 똑같지 않은 수많은 원인들이 서로 뭉쳐졌을 때 나타나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균일성이다.

 

볼츠만 역시 그의 입자와 버클의 통계학을 뒷받침해주었던 사회통계 조사에 등장하는 개인과의 닮은 점을 알아차렸다. "분자들은 운동 상태가 대단히 다양하다는 점에서 많은 수의 개인과 마찬가지이고, 기체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은 평균적으로 주어진 운동 상태에 있는 분자들의 수가 일정하기 때문이다.

 

맥스웰의 친구 테이트는 기체 운동론의 통계적 방법을 "인구가 많은 국가에서 자살, 쌍둥이나 세쌍둥이 출산, 배달되지 않은 편지 처럼 드물지는 않지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의 수가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되는 특별한 일관성"에 비교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통계역학을 사회현상에 적용하는 것을 새롭고 위험한 일이라고 여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기계론적 철학의 쌍둥이 자식이고, 사람들의 습관을 무생물적인 입자들의 습관으로 설명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일이었던 시절이였다.

 

다윈의 사촌인 골턴은 자연선택이 근본적으로 통계 이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종 안에서의 자연변이도 케틀레의 오차 곡선을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전학에서 통계를 이용해야 한다고 고집했던 골턴은 생물학적 변이를 측정하는 생물통계학의 핵심이 되는 수학적 근거를 확립시켰지만, 오늘날에는 우생학의 선구자라는 고약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케틀레가 주장했던 자유방임주의를 근거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자연선택이 결함이 있는 변이를 제거시켜주어서 "완벽한 종"만 살아남게 된다는 이상한 이론을 주장했다.

 

 

의지와 운명

통계학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영국인 j.j.폭스였다.

 

통계학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사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굳이 통계학을 과학이라고 한다면 수학의 영역에 속한다. 통계학의 위대하고 무한한 가치는 그것이 다른 과학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방법" 이라는 사실에 있다. 통계학은 추상적 과학의 법칙, 확률의 수학적 이론, "큰 수의 법칙" 이라고 가볍게 이름 붙여진 것에 근거를 둔 "탐구 방법"이다.

 

그런 지적은 도구는 집어서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정반대가 사실이라는 점은 우리에게 19세기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성과에 대한 철학적 배경을 어떻게 이해했고, 종교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웠는지를 확인시켜준다.

 

사회과학에 대한 통계학적 접근은 처음부터 논란거리였다. 통계학이 사회의 가상적인 자연법칙을 밝혀낼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것이 사람들의 "개인적 행동"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첫 번째 논쟁은 인과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되돌아봄으로써 결과로부터 원인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결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많은 통계자들이 해석할 목적이 없다면 처음부터 숫자를 모을 이유가 없다고 믿었던 것은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해석은 곧바로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숫자들 사이의 상관관계가 반드시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경고.

 

두 번째 논쟁은 미래 확률에 대한 통계학적 예측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미래"를 바라보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이라는 뜻이다. 사회에 대한 숫자가 단순한 사건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면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숫자가 예측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면 통계학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1790년 초에 영국에 살고 있던 사람 100명 중에서 6명이 그해 말에 사망했고, 1791년과 1792년에도 같은 비율이 계속되었다면 1793년이 시작될 때 6퍼센트의 사람이 크리스마스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겠는가? 그런 예측은 매우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심각한 논란거리가 된다.

 

통계는 수를 세는 좋은 방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확실하지만, 확률은 알 수 없는 것을 취급한다. 일부 철학자와 과학자에게 통계와 확률은 백묵과 치즈만큼이나 다른 것이어서 절대 서로 섞일 수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수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잘못이고, 자유의지 대신 운명론을 앞세우는 것처럼 이단적이다.

 

칸트는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쥐스밀히의 출생과 사망률 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규칙성이 일종의 결정론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지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통계에서 나타나는 규칙성 중에는 그렇게 가볍게 합리화시킬 수 없는 것도 있다. 자살이나 살인이나 다른 범죄율을 해마다 일정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어떠 신일까? 그러나 자살과 범죄율은 지극히 자의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자연의 "메커니즘"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케틀레의 입장에서는 범죄와 같은 고의적인 행동에서 나타나는 통계적 규칙성은 그런 행동이 개인의 책임 범위 바깥에 있다는 뜻이었다. 케틀레는 범죄가 사악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범죄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이라고 부르는 현실적인 존재의 관습 때문에 일어나고, 우리는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스스로의 의지와 관습을 부여받았다고 여긴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사회가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케틀레의 표현에 따르면, 범죄는 "놀라운 규칙성으로 지양해야 할 비용"이었다. 결정론의 시대에서 그런 사실은 사회의 조건이 일정한 비율의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할당량이 채워질 때까지 법을 어기도록 만드는 "힘"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철학에서 보면, 세상은 완전히 결정론적이고 자유의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을 통해 통계학 때문에 위협받고 있는 결정론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그런 식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버클이 주장했듯이 그렇게 된다면 미래는 정말 명백할 것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자신이 "자유의지와 필요성의 관계"라고 부른 역사에 대한 버클의 결정론적 견해에서 제기되는 의문과 씨름을 했다. 그는 그런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개념" 이 "국가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라는 외교의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힘이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의문이 남는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는 우리에게 인력과 반발력의 법칙을 인식하지 못하고, 법칙이 진리가 아니라고 알려줄 수 없다. 그러나 역사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나는 자유롭고, 그래서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톨스토이는 우리의 그런 과감성은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역사에서 자유의지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사회가 일정하고 변화하지 않는 상태가 유지되는 "평형"을 믿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을 하고, 그런 선택에 따른 갑작스러운 변화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고집스러운 악령

사회통계학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처럼, 열역학 제2법칙도 마찬가지로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한다. 열이 언제나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흐른다는 냉엄한 엔트로피의 증가는 창조된 모든 것들이 생명이 필요로 하는 조직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쓸모없는 열로 바뀌어버리는 우주적 "열적 죽음"을 의미했다. 

 

맥스웰도 뉴턴의 운동 법칙을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라플라스만큼이나 결정론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이 인간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빼앗아버리는 우주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자유의지가 어떻게 열역학에 위배되지 않고 작동할 수 있을까?

 

맥스웰의 답은 제2법칙이 "큰 수의 법칙"에 해당하는 통계적 법칙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1940년대에 전기통신 기술자인 클로드 새넌이 제안했던 정보 이론과 열역학의 관계가 정립되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과학자들은 맥스웰의 주장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그는 악령이 수행해야만 하는 정보처리 과정과 관련된 열역학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악령은 입자를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절약"되는 것만큼의 엔트로피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문을 열어줄 것인가 닫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맥스웰의 악령마저도 제2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흔히 양자역학이 확률을 문제의 핵심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뉴턴 역학의 결정론적 세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물리학자 스몰루코스프키는 확률이 현대 물리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로렌츠 방정식, 전자 이론, 에너지 법칙, 상대성 원리가 이런 경향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지만,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그런 정확한 법칙들까지도 통계적 규칙성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19세기 사회통계학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과학자들이 각각의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원인을 모르거나 또는 의미 있는 추측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자연에서 큰 규모의 질서와 규칙성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통계적 과학에 이르는 길은 훨씬 더 험난했을 것이다. 이제는 큰 수 안에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