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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 : 에덴의 질서 - 협력의 학습

17. 에덴의 질서 - 협력의 학습

 

문명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계몽운동 이후로 수많은 비평가들은 문명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해소되어야 할 긴장에 관심을 가져왔다.

 

개인의 자유는 문명의 선물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는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이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자유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구속은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런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 개인의 권력이 집단의 권력으로 대체된 것이 문명을 향한 결정적인 단계였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렇지만 어떻게 그런 권력과 구속의 한계를 정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 타협을 이룰 수 있을까? 

 

홉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독재의 멍에를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권리 이외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에만 야만적인 자연 국가에서 문명이 등장할 수 있다.

 

존 로크의 사회적 계약은 전체적으로 훨씬 더 상호협조적이었다. 시진들은 국가가 시민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권리의 일부를 국가에 맡긴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홉스가 인정하는 거의 무한의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 어떤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는가에 상관없이 문명사회의 평화와 질서는 스스로 포기하거나 받아들이는 개인 권리의 구속에 대한 대가라는 해석이 있다. 

 

절대적인 자유는 무의미한 것이다. .... 우리에게는 각자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비슷한 사회가 필요하다. 내 자유와 당신의 자유가 비슷해지려면 모두가 서로에 대한 폭력을 포기해야만 한다. 내가 당신을 쓰러뜨리지 않을 것이니, 당신도 나를 쓰러뜨리지 말아야 한다.  - 카를포퍼

 

프로이트도 홉스가 주장했듯이 그것이 우리의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충동, 즉 "죽음의 본능"과 어긋나는 것임을 인정했다. 결국 인간의 공격성은 "무의식적으로 내재화된 것으로, 사실 그것이 처음 발현되었던 스스로의 자아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가 끊임없는 죄의식이고, 그것은 다시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는 종교와 원죄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유, 정부, 권력에 대한 이런 논의들이 모두 심각하고 놀라울 정도로 근시안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치철학에서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강요할 권위가 필요하다고 보거나, 아니면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를 대부분 문명적으로 유지하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실내 게임의 천박함에서 비롯된 한 이론이 도덕적인 고려가 전혀 없는 적들 사이에서도 선한 행동이 생겨나서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게임 이론은 일반적으로 물리학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경험적인 특성을 가진) 수학의 한 분야로 인식된다. 그러나 게임 이론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사회물리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개인의 구성된 집단의 행동은 개인 사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직관적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방법으로 생겨난다. 여기서 우리는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무관심, 행동양식이나 통계적 집단의 갑작스러운 변화, 변화에 대한 민감성, 일반화시킬 수 있는 "법칙"과 같은 익숙한 현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게임 이론의 결론 중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도 있다. 우리의 근본적인 믿음의 체계를 부정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결론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론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유추할 수 있거나 유추할 수 없는지와, 그런 결론이 어느 정도까지 진짜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련이 있는지를 가능하면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게임 이론은 수학적인 사회과학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우리가 도덕적 지혜를 가지고 객관적인 결과를 해석해야 하며, 기술적인 결론을 인류학적인 용어로 설명할 때에는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자칫하면 정치적인 기폭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필요할까?

플라톤은 국민 중에는 사악하고 비도덕적인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국민에 의한 지배"인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비난했다.

 

정부가 국민의 생활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은 인간의 선함에 대한 로크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가장 진보적인 정치철학의 시금석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문명화된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권력이 정당하게 집행되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밀은 개인이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권리마저도 그것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된다고 믿었다. 그런 진보적 철학의 뿌리에는 밀에 의해서 정의된 공리주의의 온화한 사회적 수학이 자리잡고 있다.

 

루소는 문명은 퇴화한 것이고 오로지 원시적인 "야만성"만이 고귀하고 선한 것이라는 믿음을 근거로 한 낭만적 무정부주의를 주장했다. 

 

중세의 마을에는 모든 사람들이 가축에게 풀을 뜯게 하는 공동구역이 있었다. 그런 체제는 자제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가축을 기르게 되면 공동구역의 풀을 조금 더 소비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곧 따라하게 된다. 결과는 공동구역의 풀이 말라 버리는 "공동의 비극"이다. 어족 자원이 사라질 정도로 지나치게 고기를 잡고, 강물이 오염되고, 하늘이 온실 기체로 채워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런 사정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자발적 협력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런체제는 공동체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사람들에 의해서 착취될 가능성이 높다. 무임승차를 막으려면 가혹한 법률이 꼭 필요한 것일까?

 

누가 세상을 운영해야 할까?

핵심 권력이 없더라도 국가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을까? 강한 국가가 작은 국가들을 착취해서 이익을 챙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침략적인 "매"나 평화적인 "비둘기" 중 어느 쪽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좋을까? 국가들이 상당한 군사력과 핵무기를 축적해서 매처럼 보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침략을 당할 경우에 무엇이 "옳은" (로크의 표현에 따르면 "자연적인") 반응일까? 전쟁만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게임 이론만으로는 그런 의문을 해결할 수 없지만,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고 나면 적어도 문제를 더 명확하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

 

참호 속에서의 전쟁

수많은 영국 군인들은 "독일군"을 경멸하는 심정으로 전선에 나갔고, 독일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이 적을 그냥 두면 적도 자신을 그냥 둔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그런 환상은 깨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서부 전선에서 서로 대치하던 부대중에는 공식적으로 휴전한 경우도 있었다. 지휘자들은 그런 행동을 반역으로 여겨서 주동자를 엄벌에 처했다. 그러나 참호 속에서 번지던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수단은 공개적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은 서로 대치하던 군인들의 공모에 의해서 은밀하게 이루어졌고, 양측의 장군들을 분노하고 절망하게 만들었다.

 

왜 모든 전쟁이 그렇게 끝나지 않을까? 서로가 오랫동안 대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대치보다는 협력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도 앞으로 똑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규칙적으로 거래를 하는 관계에서는 상대를 속이거나 부도를 내기가 어렵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똑같은 일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번 있는 거래에서는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상대를 속일 수 있다.

 

엉터리 공격은 장군을 속이기 위한 속임수일뿐만 아니라 "적군"에게 선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적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생존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협동은 이기심에서 생겨났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정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과학적인 문제로 만들려면, 역설적이지만 미국의 군사 두뇌 집단에서도 도구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화려한 토너먼트

유혹은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유혹은 선하고, 친절하고, 신중한 시민이 아니라 반항하고, 속이고, 싸우고, 더러운 일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유혹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고, 때로는 범죄를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선하지 않다는 것이 모든 유토피아의 문제가 된다.

 

체스 게임을 연구하는 일이 수학자에게 간단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복잡성 때문이다. 그러나 포커에는 속임수라는 심리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훨씬 어려운 도전이다. 문제는 체스에서처럼 다음 움직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움직임을 예상하거나, 속이거나, 혼란스럽게 만드느냐가 문제이다. 폰노이만은 포커와 같은 게임에서 위험과 불확실성의 요소로부터 경제학과의 관계를 보았고, 1944년에 경제학자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쓴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세하게 설명했따.

 

죄수 딜레마의 핵심은 "협력"과 "변절"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같은 게임을 여러 번 반복하면 한 번의 죄수 딜레마 게임에서 두 선수 모두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어려움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상황이다. 내가 이웃을 속이면, 이웃도 나에게 복수할 기회가 많아진다. 따라서 반복적인 죄수 딜레마 게임에서 선수들은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면서 상호 신뢰 관계를 만들어갈 기회를 가지게 된다. 진화를 통해서 협력이 등장할 수 있다.

 

맞대응(TFT) 전략. 처음에 협력을 한 후에는 언제나 상대방이 앞의 게임에서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협력의 비밀

게임 이론의 수학적인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 그런 상호 호혜적인 협력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연에서도 맞대응 전략이 관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바이러스의 이타주의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행동은 순전히 유전적 선택의 결과이다. 

 

우리는 게임 이론의 다른 함축도 역시 인간의 경험에 깊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종족 집단을 형성하려는 경향 때문에 집단의 다른 구성원과의 반복적인 상호작용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협력의 기회도 생겨나게 된다.

 

미래의 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해주면 두 집단이 상호 신뢰의 혜택을 누리도록 변화할 수 있다. 그것은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는 뜻일 수도 있다. 상호작용의 빈도를 높이는 것도 방법이다. 작은 집단에서는 같은 사람들이 서로 매일같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만나기 때문에 냉담한 만남이 더 흔한 대도시의 경우보다 더 쉽게 신뢰가 쌓이게 된다. 인구의 이동성이 늘어나면 상호작용의 지속성이 줄어들고, 따라서 협력의 동기도 줄어든다. 일시적인 이웃은 응지벽이 약하고 정말 "이웃 같은" 경우도 드물다.

 

상호작용의 지속성은 정부의 운영에도 관계가 있다. 카를 포퍼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정권이 책임과 권리를 존중하지 않거나, 심지어 정부의 정책이 좋지 않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때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제거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권을 종료시키려면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떠나는 정권은 뻔뻔하게 자기 이익을 챙기더라도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당은 장기적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정당의 존재가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상황을 막아줄 수 있다.

 

그러므로 안정적인 정당 구조를 가진 정치 시스템은 불안정한 정치 조직으로 구성된 경우보다 쉽게 부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카를 포퍼는 의회 의원들이 유권자들보다 정당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만든다는 이유로 정당 시스템을 "끔찍한" 것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에 의해서 정치 시스템이 남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신뢰성을 제거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스위스 행동학적 경제학자 에른스트 페어는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서로 만나지 않는 집단에서도 협동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을 실시했다.

 

투자를 하고 이익을 돌려줄 때마다 학생들을 섞어서 학생들이 상호 신뢰를 쌓을 기회를 없애버렸다. 그렇지만 (투자를 하지 않는) 변절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규칙을 만들면 협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할 때마다 수수료를 부과할 경우에도 선수들은 처벌을 받게 된다. 처벌의 위험이 없으면 협력의 수준은 낮았지만, 처벌 규정을 도입하면 협력은 급격하게 늘어난다. 

 

모든 게임에서 장기적으로는 상호 협력이 가장 좋은 전략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화할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정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크로포트킨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세상은 에덴 동산과 거리가 멀다. 인간 본성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덕스럽다. 그리고 1대1 상호작용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복잡한 사회의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훨씬 더 정교한 게임 이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