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충코이 철학에서 번역해주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사유의 깊이가 약해서 듣는 것 만으로는 이 두분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어
정리를 통해 생각해보려 정리해보았습니다.
이 영상은 철학자 미셸 푸코와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1971년 권력과 정의에 대해 토론한 것을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 의역한 것입니다.
원 영상 링크는 더보기란에 있습니다.
https://youtu.be/7WZxH8Itqgo
https://www.youtube.com/watch?v=xpVQ3...
촘스키 :
제가 이미 말씀드린 것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만약 인간 본성의 근원적인 요소 중 하나가
강압적인 기관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제한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 옳다면
저는 이게 옳다고 믿습니다만, 어쨌든 만약 그렇다면,
좋은 사회란 분명 이 근본적인 인간의 특성이
실현될 가능성을 극대화해야 할 겁니다.
이 작업은 사회의 억압과 파괴와 강압의 요소들을
극복하는 것을 필요로 하겠죠.
예를 들어서, 저는 연방적이고 탈중앙적인 경제적,
사회적 기관들의 연합체가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체계를 아나르코생디칼리즘이라고 부르는데요.
윤리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모든 위계가 철폐된,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체계입니다
저는 이게 기술이 고도로 발전해서 사람들이 더 이상 기계의
톱니바퀴로 기능하도록 강요될 필요가 없는 지금의 사회에서
사회가 올바르게 조직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창조성이 발현될 수 있을 겁니다.
창조성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발현될지
그 구체적 면모를 제가 다 알 수는 없겠지만요.
푸코 :
제 접근방식은 촘스키씨에 비해 훨씬 덜 진전되었습니다.
무슨소리냐 하면
저는 무엇이 이 과학과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가 기능하는 데에
있어서 이상적인 사회적 모델인지 당장 제시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제 생각에 가장 긴급하고 즉각 관심
기울여야 할 사안 중 하나는 이겁니다.
적어도 유럽 사회에서는 권력이 정부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게
관습적으로 흔히 견지되어 온 생각입니다.
그리고 권력은 다양한 기관들을 통해서 행사된다고 생각이 되고요.
예를 들어서, 관공서, 경찰, 군대는 모두 권력을 행사하죠.
우리는 이런 기관들이 명령들을 전달하고 수행하며, 그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정치적 권력은 겉으로 보기에 정치적 권력과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기관들을 통해 자신의 힘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런 기관들은 어핏 보기에는 독립적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죠.
겉으로 보기에 대학교는 지식 전달을 위한 기관입니다.
하지만 대학교는,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교육제도 전반은 지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분배하고 특정한 사회 계급에 권력이 남아 있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다른 계급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을 배제시키죠.
다른 예시는 정신의학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정신의학은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고
이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신의학은 특정한 사회적 계급에 대해
권력이 행사되도록 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정신의학은 사회로부터 배제되어야 할 사람들을
선별하고 그들을 격리시킵니다.
사법체계 또한 하나의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 시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과제는
겉으로 보기에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것 같이 보이는 기관들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에 어떤 문제와 한계가 있는지를 밝혀내고, 그것들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행되는 정치적 폭력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는 정치적 폭력들의 전반적인
관계들을 제대로 비판적으로 고찰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 사회를 위해 어떤 방향을 제시하려 한다면,
아마 지금 일어나고 있는 폭력들은 그대로 반복되고 말 겁니다.
아나르코생디칼리즘 같은 굉장히 고귀하고 순수한 사회형태를
실현한다고 해도 말이죠.
촘스키 :
동의합니다.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행위의 측면에 있어서 까지요.
우리가 지성적으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미래의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찰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생각하는 거죠.
둘째는 우리 사회의 권력과 억압과
공포와 파괴의 본성을 잘 이해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지금 사회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거죠.
이런 작업에는 당연히 푸코씨가 말씀하신
기관들에 대한 이해도 포함됩니다.
또한 현재 모든 선진국들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경제적, 상업적, 재정적 기관들에 대해서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다가오는 미래에는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에 대한
이해를 잘 할 필요가 있는데요.
심지어 그런 기업들은 지금 오늘 밤의 토론회에서도
물리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 기관들은 억압과 강압, 그리고 독재적인 지배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기관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요.
그런 기관들은 우리가 그저 시장의
민주주의의 질서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완전 다른데 말이죠.
만약 우리가 더 추상적이고, 말하자면 철학적인 작업을 잃어버린다면
혹은 그것을 완전히 부차적인 일로 치부해 버린다면
아주 부끄러운 처사가 될 겁니다.
우리는
자유, 존엄, 창조성, 그리고 다른 근본적인 인간적 특성들이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잘해야 하고
이런 통찰을 사회적 구조에 대한 관념들과 연결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적절한 사회 구조를 실현함으로써 인간의 그러한 성질들이
잘 실현되고 사람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다다르고자 하는 지점을 디테일하게
규정하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모순이 될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의 방향성에 맞춰서 규정하려고 하면
또 다른 억압으로 이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사회적 변혁이나 혁명에 대해 생각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 스스로가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대해서 무언가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아나르코생디칼리즘 같은 이론이
그 방향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푸코 :
네. 하지만 위험성이 있지 않나요?
촘스키씨는 인간에게는 특정한 본성이 있고
지금 이 사회에서는 그 인간 본성을 실현시킬 만한 권리와
가능성이 주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만약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정의하려는 위험성을 갖게 되는 게 아닌가요?
인간 본성은 동시에 실재적이면서 관념적입니다.
인간 본성은 실제로 인간이 갖고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측면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우리의 상상이나 이론적, 관습적 정당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부여된 것들이죠.
그리고 인간 본성은 오늘날까지 감추어지고 억제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특정한 방향으로 인간 본성을 규정하고
정의하려는 온갖 시도들을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촘스키씨는 지금
기존의 사회, 문명, 문화로부터 그대로 빌려온 것들을 통해서
인간 본성을 정의하려는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아마 촘스키씨는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이 정말로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인간 본성을 특정한 방향으로
정의하려고 함으로써 오류에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인간 본성과
프롤레타리아아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그는 그 둘이 똑같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촘스키 :
정치적 행위와 관련해 지성적인 영역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몇몇 관념들에 기초해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지성적인 영역에서 우리는 정치적 행위의 영역에서
마주하는 문제와 완전히 똑같은 문제를 마주합니다.
한번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기 위해 예시를 들어보면,
제 많은 정치적 행위들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되었는데요.
그리고 저는 아주 많은 에너지를 시민 불복종 쪽에 쏟았습니다.
미국에서 시민 불복종은 그게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상당히 불확실한 상태로 행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시민 불복종은 사회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질서를 위협하는 게
파시즘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에게도, 베트남에게도, 모든 사회에도 다 좋지 않겠죠.
이 시민 불복종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수행한다는 건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이 행위를 하지 않는 것 또한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지 않으면, 어쩌면 미국의 힘에 의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사회는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불확실성의 연속 속에서 우리는 행위를 선택해야 합니다.
비슷하게, 지성적인 영역에서도 우리는 푸코씨가
올바르게 지적하신 불확실성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은 제한적이고, 편향적이고,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고, 개인적 결함의 구속 아래 놓여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지성적 문화의 결함과
한계에 의해서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능한 몇 가지 목표들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불가능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으로써는 실현불가능해 보이는 미래를 향한 성찰을 이어나가고
그에 맞는 사회이론을 구축해 나가기 위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비록 그 일이 지금 단계에서 불확실하고, 한계지어져 있고,
편향적인 지식 위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틀릴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하더라도요.
푸코 :
제가 생각하기에는 정의라는 관념 자체가 계급 사회안에서 작동합니다.
정의는 억압받는 계층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고
권력을 쥔 계급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과연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도 정의라는 개념을
계속 사용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촘스키 :
저는 그 생각에 매우 반대합니다.
제 생각에 정의는 근본적인 인간적 퀄리티와
관련된 절대적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의 정의 체계는 단지 계급을 억압하는 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존하는 정의 체계는 계급을 억압하는 요소를 갖고 있고,
다른 억압적인 요소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의 체계는 정의, 올바름, 사랑, 온정 등의
가치 있는 참된 인간적 개념들을 추구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푸코 :
이것만 말하겠습니다.
촘스키씨가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제 생각에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
선이라는 관념, 정의, 인간 본질 등의 관념과 그것의 실현은
모두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어 온 관념 및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우리의 문명, 특정 종류의 지식,
특정 형태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관념들은 모두 계급 체계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긴 하지만, 우리는 결코 우리 사회의 기초 자체를
전복시키려는 투쟁을 기술하거나 정당화하는 데에 있어서
그 기존의 관념들을 계속 고수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기존의 개념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그 어떤 역사적 정당화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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