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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책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6장

 

이 책의 결론이 된 부분부터 정리를 해봅니다.

앞 쪽은 양자 역학을 통한 새로운 관점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이런 결론이 나오는 이유에 대하 설명이고 이 장 부터의 내용이

결론을 내는 느낌이라 

 

6장 "자연에게는 해결된 문제다."

단순한 물질

 

양자 역학은 비록 일상의 직접적인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더라도, 세계의 양자적 본질에 대한 발견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마음의 본질과 같은 큰 미해결 질문과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마음의 작용을 비롯한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다른 현상들이 양자 현성이어서가 아니라, 양자의 발견으로 물리적 세계와 물질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바뀌어 질문의 조건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믿음은 우리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자연현상 중에서 특수한 사례일 뿐, 그 어떤 현상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위대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은 '이 세상이 단순한 물질,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의 생각과 지각, 주관성, 가치, 아름다움, 의미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진적이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물질'이 어떻게 색, 감정, 내가 존재한다는 생생하고 뜨거운 느낌을 만들어내는 걸까요? 어떻게 배우고, 알고, 감동하고, 놀라고, 책을 읽고, 물질 자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할 수 있는 걸까요?

 

양자역학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뭔가 관련 있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양자론은 질문이 조건을 달라지게 하기 때문이죠.

 

양자론은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이유가 의식의 본성에 대해 잘못된 직관을 갖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단순한 물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잘못된 직관을 갖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 인간은 작은 돌멩이는 단순한 물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돌멩이 하나도 광활한 세계입니다. 확률과 상호작용이 요동치는, 이글거리는 양자들의 은하계죠. 다른 한편 우리가 '돌'이락 부르는 것은 의미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 겹겹이 쌓인 층으로, 이는 점과 같은 상대적인 물리적 사건들의 은하계와 우리 사이의 상호작용이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단순한 물질'이 흩어져 복잡한 층이 되어, 갑자기 단순하지 않게 보입니다. 희미하게 풀린 우리의 정신과 단순한 물질 사이의 간극은 어쩌면 뛰어넘을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계의 미세한 입자가 질량과 운동만을 가진 물질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 무정형의 입자로부터 우리의 복잡한 지각과 사고를 재구성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미세한 입자들을 관계의 관점에서 가장 잘 기술할 수 있고, 어떤 것도 다른 것들과의 관계가 없이는 속성을 갖지 않는다면, 그러한 물리학에서는 우리가 지각과 의식이라고 부르는 복잡한 현상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는 요소들을 어쩌면 더 잘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물질적 실체라는 형이상학적 토대가 없이, 물리적 세계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이미지들의 정교한 직조로 짜여 있다면, 아마도 우리 자신이 그 일부라는 것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에 심적인 것이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의식이 있고, 또 우리가 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전자와 양성자는 이미 모종의 '원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나는 이러한 논증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물질의 차가움을 피하기 위해 '원 의식'을 기초 체계에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적 변수들과 그 상관관계로 세상을 가장 잘 기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마도 이를 통해 우리는 물질의 객관성과 정신적 삶 사이의 급진적 대립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의 경직된 구분이 흐려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을 모두 자연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물리적 세계의 부분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입니다.

 

 

 

 

의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언어의 낱말은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고양이'는 고양이를 의미하죠. 생각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은 뇌에서 일어나지만, 우리가 호랑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뇌에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호랑이는 바깥 세계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종이 위에서 검은 선의 이미지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여러분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여러분이 보는 선은 여러분 '외부'에 있는 것이죠. 종이 위의 선들과 관계된 어떤 과정이 뇌에서 일어납니다. 이 선들은 이제 의미를 갖습니다. 선들은 글을 쓰고 있는 내 생각을 가리키고, 이는 다시 읽고 있는 가상의 당신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심적 과정이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전문용어는 '지향성'입니다. 지향성은 의미 개념과 우리 정신생활 전반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생각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생각 '밖'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생각이 의미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양이'라는 단어와 고양이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도로표지판과 표지판이 의미하는 것 사이도 그렇고요.

 

근데 자연계에는 이런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리적 사건 자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혜성은 뉴턴의 법칙에 따라 이동하고 있지 표지판을 읽으면서 이동하는 건 아니죠.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면, 이 의미의 세계는 물리적 세계로부터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순전히 물리적인 측면에서, 의미의 세계란 무엇일까요?

 

두 가지 개념을 통해 답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두 개념은 정보와 진화라는 개념입니다.

 

 

 

섀넌의 정보 이론에서 정보는 단지 어떤 것의 가능한 상태의 수를 세는 것입니다. 비트 수로는 메모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며, 메모리에 있는 내용이 뭔가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냥 노이즈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섀넌은 또한 '상대적 정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데, 이는 두 변수 간의 물리적 상관관계를 측정하는 개념입니다. 두 변수가 각각의 가능한 상태 수의 곱보다 적은 수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면 '상대적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플라스틱 조각에 붙어 있는 두 동전의 뒷면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즉, 두 동전은 '서로의 뒷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상대적 정보'라는 개념은 순전히 물리적인 개념입니다. 양자 구조를 고려하면, 물리적 세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상대적 정보는 세계를 구성하는 상호작용들의 직접적인 귀결인 것이죠. 상대적 정보는 의미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두 사물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리적 측면에서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상관관계로 가득 차 있지만, 대부분의 상관관계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니까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에는, 뭔가가 빠져 있습니다.

 

다른 한편, 생물학적 진화의 발견 덕분에, 우리는 생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개념과 자연계의 다른 사물에 대해 사용하는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유용성'과 '관련성'과 같은 개념의 생물학적 기원이, 궁극적으로는 물리적 기원이 명확해졌습니다.

 

생물권은 생명의 지속에 유용한 구조와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숨쉬기 위한 폐, 보기위한 눈처럼 말이죠. 다윈이 발견한 사실은, 이러한 구조의 유용성과 존재 사이의 인과관계를 뒤집어 생각하면 이러한 구조가 왜 존재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기능(보고, 먹고, 숨 쉬고, 소화하는 등 생명에 기여하는 것)이 그 구조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러한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살기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보기위해 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이 있어 보는 것이고 숨을 쉬기 위해 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폐가 있어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다는 의미 결국 인간이 목적 즉 지향성이라는 것은 편이를 위해 반대로 생각하는 부분이 존재하는듯

 

생명은 지구 표면에서 펼쳐지는 생화학적인 과정이며, 지구를 가득 채운 태양빛의 풍부한 자유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이 과정은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간이 지나도 지속되는 동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기 조절하는 구조와 과정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러나 구조와 과정은 유기체가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러한 구조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생존하고 번식하기 때문에 생물이 생존하고 번식합니다. 생물은 기능적이기 때문에 번식하고 지구를 채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엠페도클레스가 생명은 사물의 정상적인 조합으로 인해 무작위로 구조가 형성된 결과라고 주장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구조의 대부분은 곧 소멸하지만, 생존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 구조는 예외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살아 있는 유기체, 생명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송아지가 구조를 잘 갖춘 채로 태어나는 것을 우리가 보지 않느냐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설명을 개체에서 종으로 옮기고, 오늘날 유전과 유전학에 대해 알게 된 많은 것에 비추어 보면, 엠페도클레스의 생각이 본질적으로는 옳았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다윈은 생물학적 구조의 변이성과 자연선택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변이성이 있기에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계속 탐색할 수 있고, 자연선택이 있기에 이 공간의 더욱 확장된 영역으로, 즉 구조와 과정이 함께 더 잘 지속될 수 있는 곳으로 점점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분자생물학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유용성'이나 '관련성'과 같은 개념이 의미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의 기원과 물리적 세계에 뿌리를 둔 방식이 명확해지죠. 즉, 그것들은 실제로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계의 특징인 것입니다.

 

변이와 자연선택은 멋진 개념이지만, 이조차도 자연계에서 '의미'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의미'에는 변이성이나 자연선택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지향적인 내포가 있습니다. '의미'의 의미는 다른 무언가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보와 진화라는 두 가지 아이디어가 결합하면 작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정보는 생물학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합니다. 구조와 과정은 수억 년, 때로는 수십억 년 동안 스스로를 재생산고 있으며, 진화의 느린 흐름에 의해서만 변화됩니다. 재생산이 이렇게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조상과 거의 유사하게 유지되는 DNA 분자 덕분이죠. 이는 상관관계가, 즉 상대적인 정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DNA 분자는 정보를 암호화해 전달합니다. 정보가 이토록 안정적이라는 것은 아마도 생명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 것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에서 정보가 관련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는데, 바로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상관관계입니다. 이러한 상관관계의 대부분은 유기체와 관련이 없습니다. 내 뇌에 있는 분자의 상태는 흡수된 우주선을 통해 멀리 떨어진 별과 상관관계가 있지만, 이 상관관계는 내 생명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다윈의 이론에서 정의된 관련성의 의미에서는, 생명과 관련된 상관관계가 존재합니다. 즉,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서 언급한 다윈의 이론에서 정의된 관련성의 의미에서는, 생명과 관련된 상관관계가 존재합니다. 즉,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바위를 피하려면 바위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내 몸이 어떻게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의 물리적 변수와 돌의 물리적 상태 사이에 물리적 상관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상관관계는 존재합니다. 나의 시각계가 주변 환경을 뇌의 신경 과정과 연관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외부와 내부 사이에는 온갖 종류의 상관관계가 있지만, 이 상관관계에는 특별한 특징이 있습니다. 만약 이 상관관계가 없거나 적절하지 않다면, 나는 바위에 치여 죽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위의 상태와 뇌의 뉴런을 연결하는 내부와 외부의 상관관계는 다윈적 의미에서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있고 없고가 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박테리아에는 먹이가 되는 포도당의 농도를 감지할 수 있는 세포벽, 헤엄칠 수 있는 섬모, 포도당이 더 많은 방향으로 박테리아를 유도하는 생화학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세포벽의 생화학은 포도당 분포와 박테리아 내부의 생화확적 상태 사이의 상관관계를 결정하고, 이는 다시 박테리아가 헤엄치는 방향을 결정합니다. 이 상관관계에는 관련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중단되면,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박테리아의 생존 확률이 감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생존과 관련된 물리적 상관관계입니다.

 

이러한 유관한 상관관계의 존재로부터 의미 개념의 물리적 원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련된 상대적 정보입니다. 섀넌의 (물리적) 의미에서의 상대적 정보, 다윈읜 (생물학적, 따라서 궁극적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관련성, 당의 농도에 대한 정보가 박테리아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혹은 내 뇌 속의 호랑이에 대한 생각의 의미, 즉 해당 신경 세포 구성의 의미가 정확히 호랑이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정의된 관련 정보라는 개념은 순전히 물리적이면서도, 브렌타노의 의미에서는 지향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부의) 어떤 것과 (보통은 외부의) 다른 어떤 것 사이의 연결입니다. 거기에는 '참' 또는 '정확함'과 같은 개념이 자연스럽게 수반됩니다. 즉,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서 박테리아의 내부 상태는 포도당의 농도 차를 정확하게 인코딩하거나 그러지 못하거나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의미'를 특징짓는 데 필요한 재료는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아주 다양한 맥락에서도 '의미'라는 말을 합니다. 시는 의미로 가득 차 있지만, 시를 읽는다고 해서 생존이나 번식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논리학, 심리학, 윤리학 등에서 우리가 '의미'라고 부르는 것의 전체 스펙트럼은, 직접 관련된 정보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미의 이 풍부한 스펙트럼은 물리적 뿌리를 가진 무언가로부터 시작되어 우리 종의 생물학적, 문화적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것이고, 여기에 우리의 신경계, 사회, 언어, 문화의 엄청난 복잡성에 적합한 표현들이 부가된 것입니다. 이 무언가가 관련된 상대적 정보인 것이죠.

 

다시 말해, 관련 정보라는 개념은 심적 세계의 의미와 물리학 사이의 사슬 전체는 아니지만, 첫 번째 고리이자 어려운 고리입니다. 의미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 전혀 없는 물리적 세계와, 의미와 의미가 있는 신호로 이루어진 문법이 있는 마음의 세계 사이를 잇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제 여기에 (뇌와, 의미를 갖는 과정인 뇌의 개념 조작 능력, 감정을 통합하고 다른 사람의 심적 과정과 관계 맺는 능력, 그리고 자기 자신, 언어, 사회 규범 등과 관계 맺는 능력 등) 우리를 특징 짓는 표현과 맥락들을 추가하면, 우리는 다양하고 더 완전한 의미 개념에 점점 더 가까운 무언가를 얻게 됩니다.

 

일단 물리적 개념과 의미 사이의 첫 번째 연결 고리가 발견되면 나머지는 회귀적으로 따라옵니다. 직접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 상관관계도 의미를 갖게 되고, 그런 식으로 회귀적으로 거듭 이어집니다. 진화는 분명히 이 모든 것을 활용해왔습니다.

 

이러한 관찰은 한편으로는 왜 우리가 의미를 생물학적 과정이나 생물학적 기원의 맥락에서만 말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해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 개념의 뿌리를 물리적 세계에서 찾을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은 의미 개념이 자연 세계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연주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지향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미는 어떤 것을 다른 것과 연관시키고, 물리적 제약이 되며, 생물학적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한 요소를, 우리와 관련된 무언가의 신호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핵심에 도달했습니다. 양자역학을 통해 물리적 세계의 본질을 상관관계의 네트워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상관관계의 정확히 물리적 의미에서, 상호적인 정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사물은 제각각 고유한 속성을 가진 고립된 요소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우리가 위에서 이해한 의미와 지향성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상관관계가 생물학적 영역에서 나타난 특수한 경우일 뿐입니다. 우리 정신생활의 의미들의 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둘 다 모두 관계인 것이죠.

 

우리가 정신적 세계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물리적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 좁혀집니다.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맥락에 따라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두 대상 사이에 상대적인 정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두 대상을 보면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당신은 오늘 하늘 색깔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내가 당신에게 하늘 색깔을 물어보고 나서 하늘을 보면, 당신이 말한 것과 내가 보는 것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당신과 하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대상(당신과 하늘)이 상대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제3의 대상(당신을 관찰하는 나)과 관련된 것입니다. 상대적 정보도 얽힘과 같이 3인조 댄스인 것이죠.

 

그러나 만일 어떤 대상(당신)이 (동물, 인간, 인간이 만든 기계 등과 같이) 계산과 예측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복잡하다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뒤따르는 상호작용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자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당신이 하늘의 색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눈을 감았다면, 다시 눈을 떴을 때 무엇을 보게 될지 눈을 뜨기 전에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정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에서 하늘 색깔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뜨기 전에 무엇으 보게 될지 알고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상대적 정보의 기초적 개념은 물리적 구조이고, 그 위에 더 복잡한 정보 개념들이 놓이고, 그것들이 이제 의미론적 값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개념들 중에는, 물리적 세계의 일부인 우리 자신이 그 외의 부분을 연구하는 일과 관련된 정보 개념도 있습니다. 

 

세계관, 즉 이 세계에 관한 이론이 정합성을 가지려면, 이 세계의 거주자들이 그런 시각과 해석에 도달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방식이 옳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조건은 우리가 물질을 상호작용과 상관관계로 다시 생각한다면 곧바로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은, 의미 있는 정보를 생성하는 상호작용의 한 가지 결과입니다. 그것은 외부 세계와 나의 기억 사이의 상관관계인 것이죠. 하늘이 파랗다면 내 기억 속에는 파란 하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내 기억 속에는 눈을 감았다가 바로 다시 떴을 때 하늘의 색을 예측할 수 있는 자원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내가 가진 그 정보는 의미론적인 값을 가집니다. 우리는 하늘이 파랗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다. 눈을 뜨면 알게 되죠.

 

'정보'라는 말의 이중적 의미 때문에, 이 개념은 애매한 성격을 띠게 됩니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정보이며, 이는 우리와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입니다. 우리는 이 상관관계 안으로부터 세계를 알게 됩니다.

 

 

 

안쪽에서 바라본 세계

의미 있는 정보라는 개념은 정신적 세계의 어떤 측면을 물리적 세계와 연결하지만, 이 두 세계 사이의 거리감을 해소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양자론이 우리에게 실재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덕분에,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더 있습니다.

 

정신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의 거리라는 문제는, 때로 직관적으로 명확해 보이지만 정확히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의 심적 세계에는 의미, 지향성, 가치, 목적, 감정, 미적 감각, 도덕감, 수학적 직관, 지각, 창의성, 의식 등 매우 다양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기억하고, 예상하고, 반성하고, 추론하고, 흥분하고, 분노하고, 꿈꾸고, 희망하고, 보고, 자신을 표현하고, 상상하고, 인식하고, 알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등 아주 많은 일을 합니다. 하나씩 살펴보면 우리 뇌의 많은 활동은, 충분히 복잡한 물리적 장치를 다소 쉽게 만들 수 있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에서는 나올 수 없는 뭔가가 있을까요?

 

데이비드 차머스는 의식의 문제를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로 구분했습니다. '쉬운' 문제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즉 뇌는 우리의 정신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활동을 어떻게 일으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가 말하는 '어려운' 문제란 이 모든 활동에 동반되는 주관적인 느낌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가상의 좀비와 구별되는 '추가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추가적인' 무언가가, 물리적 세계에 대한 현재의 개념으로는 주관적 경험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차머스가 생각하는, 의식에 관한 진짜 문제입니다.

 

'어려운 문제'는 두뇌 활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어렵다고 봤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활동이 일어날 때,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이 그러한 활동에 동반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문제인 것이죠. 달리 말해, 우리의 정신생활과 물리적 세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두뇌/정신 활동은 내부에서 1인칭으로 경험하는 반면, 물리적 세계는 외부에서 기술한다는 사실을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 따라 세계를 다시 생각하면 질문의 조건이 달라집니다. 세계가 관계적이라면, 우리가 물리적 실재를 물리계에 자신을 나타내는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세계를 외부에서 바라본 기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세계에 대한 기술은 궁극적으로 모두 내부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기술이 결국 '1인칭'인 것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세계 안에 위치한 존재로서의 관점('특정 상황에 놓인 자아')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리학이 제안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물의 총체를 상상할 때, 우리는 우리가 우주 바깥에 있고 '거기서' 바라본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사물의 총체에는 '바깥'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 관점입니다. 세계에 대한 모든 묘사는 내부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외부로부터 본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서로를 비추는 부분적이고 내부적인 관점들만이 존재할 뿐이죠. 세계는 관점들의 이러한 상호 반영인 것입니다.

 

양자 물리학은 이러한 현상이 이미 무생물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일한 대상과 관계된 속성들의 집합이 하나의 관점을 형성합니다. 관점을 다 버리고서는, 사실의 총체를 재구성할 수 없습니다. 사실이란 오직 상대적인 사실일 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사실이 없는 세계에 있게 됩니다. 

 

관계론적 관점에 따르면 물리학은 항상 하나의 관점에서 실재를 1인칭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마음의 본질에 대한 생각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나뉩니다. 마음의 실재성은 무생물의 실재성과 완전히 다르다는 이원론, 물질의 실재성은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관념론, 모든 심적 현상을 물질의 운동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소박한 유물론이 그것입니다. 이원론과 관념론은 우리를 포함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알려진 자연법칙을 따른다는 증거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과도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소박한 유물론은 주관적 경험의 실재와 직관적으로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입니다.

 

대상의 성질이 다른 것과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정신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의 구분이 훨씬 흐려집니다. 물리적 변수들과, 심리 철학자들이 '감각질'이라고 부르는 것, 즉 '나에게 빨갛게 보인다'와 같은 원초적인 심적 현상 모두, 다소 복잡한 자연현상일 수 있습니다.

 

주관성은 (보그다노프 '조직화') 복잡성의 증가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항상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부터 관점들로 구성된 세계 속에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와 '물질'의 관계에 관해 질문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이 두 개념은 모두 혼란스러운데, 그 때문에 의식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둘러싸고 혼란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느낌을 경험하는 '내'가 우리의 심적 과정의 통합된 총체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일까요? 물론 우리는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어떤 통일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우리 몸이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과, 의식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심적 과정이 작동하는 방식에 의해 정당화될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나'는 잘못된 형이상학의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즉, 과정을 실체로 착각하는 흔한 실수의 결과인 것이죠. 마흐는 "'나'는 구제받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의식의 신경 과정을 해명한 후에 의식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뇌우의 물리학을 이해한 후에 뇌우가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습니다. 무의미한 질문이죠. 

 

감각을 '지닌 자'를 추가하는 것은, 뇌우라는 현상에 제우스를 추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뇌우의 물리학을 이해한 후에도 뇌우를 제우스의 분노와 연결시키는 '어려운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나'라는 독립된 실체에 대한 '직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과거 우리는 제우스가 뇌우의 배후에 있다는 '직관'도 가지고 있었고.. 지구가 평평하다는 '직관'도 가지고 있었죠. 우리는 무비판적인 '직관'에 의존해서는 세계에 대한 효과적인 이해를 구축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내적 성찰은 최악의 탐구 도구입니다. 자신의 뿌리 깊은 편견을 만나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두 번째 항인 '단순한 물질' 또한 잘못된 형이상학, 즉 물질에 대한 지나치게 순진한 개념에 기반한 형이상학의 잔재입니다. 물질을 질량과 운동으로만 정의되는 보편적 실체로 보는 것이죠. 그러나 이는 양자 물리학과 모순되기 때문에 잘못된 형이상학입니다.

 

과정과 사건, 상대적 속성과 관계들의 세계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사이의 괴리는 훨씬 줄어듭니다. 우리는 두 현상 모두, 상호작용의 복잡한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자연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어느 정도 서로 연관된 다양한 학문들로 표현됩니다. 이제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근본적인 실체를 밝힌다는 18세기 기계론의 주장은 사라졌습니다. 반대로, 실재의 문법에 대한 이해는 더 풍부하고 더 정교해진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더욱 명료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수준에서 상호 간의 정보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입니다. 다윈주의 메커니즘 안에서 유의미하게 된 정보는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주는 변화이고 삶은 담화이다"라고 데모크리토스가 말합니다. 우주는 상호작용이며, 삶은 상대적인 정보를 조직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한, 우리는 실재를 구성하는 관계의 그물망의 섬세하고 복잡한 자수 무늬입니다.

 

멀리서 숲을 바라보면, 짙은 녹색 벨벳이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벨벳이 갈라져 줄기, 가지, 잎사귀가 됩니다. 나무껍질, 이끼, 벌레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무당벌레의 눈 하나하나에는 매우 정교한 세포 구조가 있고, 그 세포는 뉴런과 연결되어 무당벌레를 살게 합니다. 세포 하나하나는 도시이고, 각 단백질은 원자들로 이루어진 성이며, 각 원자핵 속에서는 양자 역학의 지옥이 펼쳐져, 쿼크와 글루온이 소용돌이치고, 양자장이 들뜨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이 숲은 한 작은 항성 주위를 돌고 있고, 또 그 항성은 천억 개의 항성으로 이루어진 은하에 속해 있으며, 그 은하를 포함한 1조개의 은하가 있는 우주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우주의 구석구석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실재의 층이 있습니다.

 

이 층들에서 우리는 규칙성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 규칙성에서 우리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여 개별 층에 대한 일관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 각각은 근사치입니다.실재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분화한 층위들과, 실재가 분리되면서 나타난 대상들은, 자연이 우리와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개념이라고 부르는, 두뇌 속 물리적 사건들의 역동적 구성들 안에서 말입니다. 실재를 여러 층위로 구분하는 것은 우리가 실재와 상호작용하는 방식과 관계된 것이죠.

 

기초 물히학도 예외는 아닙니다. 자연은 항상 단순한 법칙을 따르지만, 사물의 복잡성은 일반적인 법치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나의 여자 친구가 맥스웰의 방정식을 따른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고 해서,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죠. 엔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우려면, 기본 입자 사이의 핵력은 무시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들에는 자율성과 독립성이 있으며, 그래서 각 지식 분야가 마땅히 자율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기초 물리학은 물리학자의 생각보다 훨씬 더 쓸모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서로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물리학을 가지고 화학의 기초를 이해할 수 있고, 화학을 가지고 생화학의 기초를 이해할 수 있으며, 생화학을 가지고 생물학의 기초를 이해할 수 있는 식으로 되어 있죠. 우리가 잘 이해하는 연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연결도 있습니다. 단절이란 우리의 이해에 난 갈라진 틈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 개념의 물리적 기초에 대한 질문이 뜻하는 것입니다.

 

관계적 관점에 설 때 우리는 이원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밝히고 그것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밝히고 나면, 그 후에 이해해야 할 무엇이 더 남아 있을까요? 이러한 과정은 거기에 함께 참여한 우리 몸과 외부 환경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반응이자 그 관계가 정교화된 것입니다. 이 과정들은 우리 몸의 외부와 내부 사이를 (그리고 내부와 내부 사이를) 가로지르죠. 우리 의식의 현상학이란, 뉴런이 전달하는 신호에 포함된 관련 정보를 서로 비추는 거울 게임에서, 이러한 과정이 자신에게 부여한 이름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것으로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려진 자연법칙 내에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려진 자연법칙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의 정신생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심신 문제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문제이지만, 자연에게는 해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연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는 것뿐"

 

 

 

 

7장 하지만 정말 가능할까?

이 세계를 조금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지도

최근 신경과학의 가장 흥미로운 발전 중 하나는 시각 시스템의 기능에 관한 연구입니다. 우리 눈의 망막에 도달하는 빛을 수용체가 감지하여 신호로 변환해 뇌 내부로 전달하면, 일군의 뉴런들이 더 복잡한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해 해석하고 사물을 식별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뇌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대부분의 신호는 눈에서 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뇌에서 눈으로 이동합니다. 

 

뇌는 이전에 일어난 일과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가 보일 거라고 예상합니다. 뇌는 눈에 보일 것으로 예견되는 상을 만듭니다. 이 정보는 중간 단계를 거쳐 뇌에서 눈으로 전달됩니다. 뇌가 예상하는 것과 눈에 도달하는 빛 사이에 불일치가 감지되면, 그때만 신경 회로가 뇌로 신호를 보냅니다. 즉, 관찰된 주위의 이미지가 눈에서 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예상하는 것과 불일치하는 정보만 전달되는 것이죠.

 

시각이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이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뇌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만 해주는 신호를 뇌에 보내는 것은 쓸모가 없을 테니까요. 컴퓨터 과학자들은 이미지 파일을 압축할 때 비슷한 기술을 사용합니다. 모든 픽셀의 색을 저장하는 대신 색이 바뀐 곳의 정보만 저장하는 것입니다. 적은 정보로 충분히 이미지를 재구성할 수 있죠.

 

이 사실은 우리가 보는 것과 세상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매우 큰 개념적 함의를 갖습니다. 우리가 주변을 둘러볼때 우리는 실제로 '관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오해와 편견을 포함해)을 바탕으로 세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무의식적으로 불일치를 탐지하여, 필요한 경우 수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를 재현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로 수정한 것입니다. 관련된 입력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입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예상과 상충하는 입력입니다.

 

때때로 그것은 사소한 입력입니다. 고양이가 귀를 움직였네! 때로는 다른 가설로 넘어가라는 경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였구나!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장면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유의미한 형태로 상상하여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서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뇌가 일반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PCM(투사적 의식 모델) 가설에 따르면, 의식은 신체와 세계가 가변적이어서 계속적으로 변동하는 입력을 예측하려는 뇌의 활동입니다. 그리하여 표상을 만들어내고, 관찰된 불일치를 기반으로 예측의 오류를 부단히 최소화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외부 지각이란 외부 사물과 조화를 이루는 내면의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지각을 '환각'이라 부르는 대신, 외부 지각을 '확인된 환각'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보는 방식의 연장선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 세상에서 수집할 수 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를 찾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을 수정하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죠.

 

시각적 상은 우리 각자의 뇌에서 순식간에 발생합니다. 이에 반해 지식의 성장은 수년, 수십 년, 수세기에 걸쳐 인류 전체의 긴밀한 대화 속에서 훨씬 더 느리게 진행되죠. 전자는 경험의 개인적 조직화와 관련되어, 심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후자는 경험의 사회적 조직화와 관련되어, 과학이 기술하는 물리적 질서의 토대가 됩니다. (보그다노프 : "심리적 질서와 물리적 질서의 차이는 개인적으로 조직화된 경험과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경험의 차이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지도, 개념적 구조를 업데이트하고 개선합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과 우리가 현실에서 얻은 것 사이에 불일치에 대처하기 위해, 그리하여 현실을 더욱더 잘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죠. 

 

때로 그것은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예상에 의문을 제기하여, 우리가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의 개념적 문법 자체를 건드리는 일이 되기도 하죠.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세계상을 업데이트합니다.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새로운 지도를, 세계를 조금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지도를 찾아냅니다. 

 

이것이 바로 양자론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아주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세계가 사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낡은 편견임을, 더 이상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낡은 수레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엄밀하게 기초 물리학을 끈기 있게 연구해온 결과 이러한 실체성의 해체에 우리가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과학 이론이자 현대 기술의 기반이며, 그 신뢰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실재는 상호작용의 그물망을 짜는 사건들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습니다. '개체'는 이 그물망의 일시적인 매듭에 불과합니다. 개체의 속성은 이러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만 결정되며,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결정됩니다. 사물은 다른 사물 속에 비친 것일 뿐입니다.

 

모든 시각은 부분적입니다. 관점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을 보는 방법은 없습니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시점이란 존재하지 않죠. 그러나 시점들도 서로 소통가능하고, 지식은 다른 지식과 현실과 서로 대화할 수 있으며,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깊어집니다.

 

이런 과정의 행위자는 현상으로 이루어진 현실과 분리된 주체가 아니고 초월적인 시점도 아니며 현실 그 자체의 일부입니다. 현실의 이 부분은 자연선택을 통해 유용한 상관관계, 즉 의미 있는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 또한 그 자체로 현실의 일부인 것이죠.

 

우리의 자아, 우리의 사회, 우리의 문화적, 정신적, 정치적 삶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수백 년 동안 해낼 수 있었던 모든 일은 교류의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져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개인적 자아라는 개념도, 사춘기 시절 저를 거칠고 고독한 질문으로 이끌었던 반항적이고 고독한 자아도, 스스로 완전히 독립적이고 완전히 자유롭다고 믿었던 자아조차도, 결국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속의 잔물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양자의 발견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세계상에서는 아찔함, 자유로움, 쾌활함, 가벼움이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북해의 성스러운 섬으로 여행하고서 열어놓은 양자론의 세계, 그리고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양자론의 세계는 내게 놀랍도록 아름다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