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시간은 어디에서 온것일까?
세상에 대한 흐릿한 시각을 말할 뿐인 거시적 상태에서 에너지는 보존이 되며 이 에너지가 결국에는 시간을 생성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희미함의 원천은 양자의 비결정성, 엄청난 수의 분자들이고 이것이 시간의 핵심이다.
결국 물리학의 시간은 세상에 대한 우리 무지의 표현이다. 시간은 무지인 것이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희미하고 불확실한 이미지가 열적 시간이라는 변수를 결정한다. 이 변수는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과 닯은 어떤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고, 평형 상태와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
그렇다고 열적 시간이 시간은 아니다.
3부 시간의 원천
09 시간은 무지
우리는 시간의 원천을 찾는 것이다. 시간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제 파악해보자. 이 세상의 기본 동역학에서 모든 변수가 동등하다면 인간이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의 기본 문법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그냥 어떤 식으로든 '등장'하는 것은 상당히 많다.
- 고양이는 우주의 기본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다. 지구 곳곳에서 불쑥 '등장' 하기를 반복하는 복잡한 것이다.
- 풀밭에 있는 청년 무리들이 무슨 게임을 할지 결정하고 팀을 짠다. 이 과정 전에 두 팀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어디에도 없었다. 팀을 정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 '위'와 '아래'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세상의 기본 방정식은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온 걸까? '위'와 '아래'는 근처에 질량이 큰 무엇인가 있을 때 '등장'한다.
- 안개와 고지대의 깨끗한 공기를 구분하는 '표면'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안개나 구름은 환영인가? 아니다. 멀리서 보았던 광경이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표면이 그렇다. 단단한 대리석 탁자는 내가 원자 정도의 작은 크기가 된다면, 안개처럼 보일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세상 사물들이 '모두' 뿌옇게 보일 것이다. 산이 사라지고 평원이 시작되는 곳은 정확히 어디일까? 우리는 세상이, 중요한 개념들이 상당히 규모로 '등장'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 하늘이 매일 우리 주위를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회전을 하는 것은 우리다. 그렇다면 회전하는 우주의 일상적인 모습이 '환영'일까? 아니다, 실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만 그런 것이 아니다. 태양이나 별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다가 알게 된 것이다. 우주의 움직임은 우리와 우주이 관계에 의해 '나타난다'.
실재하는 어떤 것은 극히 단순한 수준의 세상으로부터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시간도 시간이 없는 세상에서 등장한다.
열적 시간
열 분자들의 격렬한 혼합 과정을 보면, 변화할 수 있는 모든 변수가 실제로 계속해서 달라진다. 그러나 하나는 달라지지 않는다. 바로 고립계 자체의 총 에너지다. 에너지와 시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에너지와 시간은 위치와 운동량, 회전 방향과 각운동량처럼 물리학자들이 '켤레'라 부르는 독특한 물리량의 쌍을 형성한다. 이 커플의 두 항은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서로 묶여 있다. 하나는 어떤 계가 에너지가 무엇인지 아는 것(에너지가 계의 다른 변수들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를 아는 것)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아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시간에 따른 변화를 다루는 방정식들이 에너지의 형식으로부터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에너지가 시간의 흐름 속에 보존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이 변화할 때조차 에너지는 변화할 수 없다. 계가 열교란 상태에 있을 때, 그 계는 동일한 에너지를 갖는 모든 배열들을 거쳐 지나간다. 이 배열들의 집합은 '(거시적) 평형 상태'이다. 잔잔한 상태의 뜨거운 물 한 컵이 바로 이런 상태이다.
시간과 평형 상태의 관계를 해석하는 보통의 방법은 시간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는 계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관장하고, 평형 상태에 있는 계는 동일한 에너지를 가진 모든 배열들을 혼합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해석하는 종래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시간 -> 에너지 -> 거시적 상태
이 논리는 거시적 상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알아야 하고, 에너지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무엇인지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시간이 우선이고 다른 모든 것들에 독립해 있다.
또 다른 방법은 반대로 읽는 것이다. 거시적 상태, 곧 세상에 대한 흐릿한 시각을 말할 뿐인 거시적 상태는, 에너지는 보존하면서 이 에너지가 결국에는 시간을 생성하는 하나의 혼합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거시적 상태 -> 에너지 -> 시간
이러한 관찰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모든 변수들이 사실상 동등한 수준에 있고 그것들에 대해 오직 거시적 상태들을 통해 흐릿하게만 알 수 있는 기본 물리계에서는, 하나의 거시적인 일반 상태가 하나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중요하기에 다시 반복해서 말하면, 하나의 거시적 상태(상세한 사항들을 무시한 상태)가 시간의 어떤 특성들을 지닌 특별한 변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간은 흐릿함의 효과로 간단하게 결정되어진다. 볼츠만은 한 잔의 물속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시적 변수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열의 거동의 흐릿함을 알아냈다. 여기서 물에 대한 가능한 미시적 배열들의 '수'가 바로 엔트로피다. 그런데 사실 흐릿함 자체가 특별한 변수인 시간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상대론적 물리학에서는 그 어떤 변수도 '선험적으로' 시간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거시적 상태와 시간의 흐름의 관계를 뒤바꿀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이 거시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흐릿한 거시적 상태가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거시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 시간을 '열적 시간'이라 부른다. 이것은 어떤 의미의 시간일까?
미시적 관점에서 열적 시간은 특별할 것이 전혀 없고 그저 하나의 변수일 뿐이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에서는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모든 동등한 수준에 있는 수많은 변수들 중 열적 시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간'이라 부르는 변수와 가장 유사한 행동 방식을 지닌 시간이다. 왜냐면 열적 시간과 거시적 상태의 관계는 우리가 아는 열역학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적 시간이 보편적인 시간은 아니다. 거시적 상태, 즉 흐릿함에 의해 결정되어 아직 이에 대한 설명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양자 시간
로저 펜로즈는 상대성에 관한 물리학이 시간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양립 가능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아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양자 상호 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가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 알랭 콘은 시간의 기원과 관련하여 양자 상호 작용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였다.
상호 작용이 분자의 '위치'를 고정시키면, 분자의 상태가 변화한다. 분자의 '속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속도가 '먼저' 고정되고 그 '이후에' 위치가 고정되면, 분자의 상태는 두 사건이 역순으로 발생할 때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만약 내가 전자의 위치를 먼저 측정하고 속도를 그 후에 측정하면, 속도를 먼저 측정하고 그다음에 위치를 측정했을 때와 다른 방식으로 전자의 상태를 바꾸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위치와 속도가 '교환되지 않는 것', 즉 아무 영향 없이 위치와 속도의 순서를 서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양자 변수의 '비가환성'이라 부른다. 이 비가환성은 양자역학의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다. 비가환성은 두 물리적 변수를 측정함에 있어서 순서, 즉 시간성의 기원을 결정한다. 물리적 변수를 측정하는 일은 고립된 행동이 아니며 상호 작용을 포함한다. 이 상호 작용의 영향은 측정 순서에 따라 달라지며, 이 순서는 시간 순서의 기본 형태이다.
상호 작용의 영향이, 세상의 시간 순서의 기반을 형성하는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순서에 달려 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알랭 콘은 기본 양자 전이에서, 시간성이 이러한 상호 작용들이 자연스럽게 (부분적으로) 정렬돼 있다는 사실에 기반 한다는 흥미진진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알랭 콘은 이 아이디어의 수학적 버전도 제공했다. 시간의 흐름과 같은 것은 물리적 변수들의 비가환성에 의해 암묵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비가환성으로 인해 한 계에서 물리적 변수들의 집합은 '폰 노이만 비가환 대수'라는 수학적 구조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자체에 어떤 흐름이 암묵적으로 정의돼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알랭 콘이 정의한 양자계에서의 흐름과 내가 앞서 논의한 열적 시간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알랭 콘은 양자계에서 다양한 거시적 상태들에 의해 결정되는 열 흐름들은 동등하며 일정한 내부 대칭에 이르고, 이 열 흐름들은 함께 모여 정확히 알랭 콘의 흐름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간단히 말해, 거시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 시간과 양자의 비가환성에 의해 결정된 시간은 동일한 현상의 양상들이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근본 수준에서 시간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실제 우주에서 이 열적 시간(혹은 양자 시간)이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변수가 된다.
사물 속 양자의 본질적인 비결정성이 볼츠만의 희미함처럼 이 세상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은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희미함을 만든다. 우리가 측정 가능한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다 해도 말이다.
희미함의 두 원천, 즉 양자 비결정성과 물리계가 엄청난 수의 분자들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 모두 시간의 핵심이다. 시간성은 희미함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희미함은 우리가 세상의 미시적인 세부 사항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결국 물리학의 시간은 세상에 대한 우리 무지의 표현이다. 시간은 무지인 것이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희미하고 불확실한 이미지가 열적 시간이라는 변수를 결정한다. 그 변수는 분명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과 닮은 어떤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고, 평형 상태와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 열적 시간은 열역학, 그러니까 열과 관련이 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는 유사하지 않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고 방향도 없으며 우리가 흐름이라 말할 때 부여하는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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