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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물 동맹 #3 번역의 사회학의 몇 가지 요소들

 

제 3 장. 번역의 사회학의 몇 가지 요소들

- 가리비와 생브리외 만의 어부들 길들이기  (미셸 칼룽)

 

서론

이 논문의 목표는 번역의 사회학을 개설하고, 이러한 분석틀이 권력관계의 구성에서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연구하는 데 특히 적합하다는 것을 보이는 데 있다.

 

출발점은 지난 몇 년간 과학의 내용을 상세히 분석한 사회학자들이 모순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인식이다. 사회학자들이 제안한 설명과 해석은 분명한 비대칭성을 띠고 있다. 과학자와 공학자가 논쟁하고 연구할 권리를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 사회학자들은 무한한 관용을 베풀었다. 사회학자는 공평하게 행동하며, 논쟁의 여러 주인공들 중의 한 명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모두를 같은 용어로 설명한다. 사회학자는 행위자가 이성이나 과학적 방법, 진리 또는 어떠한 효율성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용어들이 성공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행위자의 성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과학의 형성에 대한 매우 생생하고도 자세한 묘사의 기반에는 이러한 관점이 있었다.

이 문장은 과학의 형성과 과학 활동을 분석하는 사회학자들이 가진 관점과 접근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학자들이 과학적 성공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모순을 다루고 있습니다.

1. **사회학자들이 과학 활동을 분석하는 방법**:
   - 사회학자들은 과학자와 공학자가 **연구하고 논쟁할 권리**를 가진 독립적인 행위자로 보고, 그들의 활동을 **공평하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분석하려고 노력합니다.
   - 과학적 성공이나 실패를 특정 가치(예: 이성, 과학적 방법, 진리 등)로 평가하기보다는, **모든 행위자를 동일한 기준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2. **비대칭적 관용**:
   - 과학자와 공학자가 연구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나 주장을 펼칠 때, 사회학자들은 이 과정에 대해 **굉장히 관대하게 이해**합니다.
   - 즉, 누군가가 자신의 주장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키더라도, 그 성공을 특정 요소(예: 진리, 효율성)로 단순히 설명하지 않고, **과정 전체를 상세히 묘사**하려고 합니다.

3. **사회학자들의 관점과 모순**:
   - 사회학자들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이성, 과학적 방법, 진리 등)를 그 자체로 **성공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 대신, 이러한 용어들은 **성공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고 봅니다. 즉, 누군가 "진리"를 주장했을 때, 사회학자는 그 "진리"가 성공의 이유라기보다는 **성공 후에 붙여진 설명**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4. **과학 형성에 대한 생생한 묘사**:
   - 이러한 관점 덕분에, 사회학자들은 과학 활동의 과정을 매우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학의 성공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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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풀어서 설명
사회학자들은 과학자나 공학자의 성공을 특정한 "진리"나 "효율성" 때문이라고 단순히 설명하지 않고, **그들이 성공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공평하게 분석하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용어(예: 이성, 진리)는 성공의 원인으로 보지 않고, **그들이 성공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사회학자들은 과학의 과정을 생동감 있게 설명하지만, 과학적 성공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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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이 문장은 사회학자들이 과학을 분석하는 방식의 특징(비대칭성과 공평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과학적 성공을 평가할 때 발생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에서도 나타나며, 과학과 기술의 형성을 과정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하지만 행위자들이 사회나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 개방적으로  토론하는 것을 허용할 만큼 사회학자가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행위자들이 논쟁의 과학적 측면이나 기술적 측면들을 설명하면, 사회학자는 기존의 입장을 충실하게 복원함으로써 논쟁의 한쪽 편으로 치우치는 것을 적절하게 절제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자연에 대한 묘사 사이에 우선권이나 위계관계를 세우지 않으면서, 다수의 묘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모순이 드러난다. 사회학자는 자연과학과 기술을 향한 불가지론이 사회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에게 자연은 불확실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순한 특권의 문제일까? 사회학자가 그들 자신의 지식을 공개된 토론에서 분리시켰을 때, 그들은 집단적인 반사작용으로 스스로에게 특권을 용인한 것일까? 대답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과학과 기술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자연 그 자체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합의를 이끌어낼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사회학자와 철학자는 논쟁의 발생, 전개 그리고 최종적인 종결을 설명하기 위해 더욱 강제적이고 덜 모호한 그 무엇을 필요로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높은 수준의 강제력을 과학적 방법과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과학의 실행을 보장하는 사회적 규범의 존재 수준으로 떨어트린다. 다른 이들은 계급, 조직, 직업과 같이 실재하는 사회적 힘에 의지한다. 사회학자가 묘사하는 사회가 자연을 마주할 때에는, 언제나 사회가 마지막으로 발언함으로써 자연의 입을 막는다. 규범이 제거된다면, 또는 신뢰성이라는 개인적 자본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과학자들 사이의 경쟁이 사라진다면, 그 때 과학과 기술은 모든 표현 수단을 박탈당해 중단되기에 이른다.

 

과학과 기술을 설명하는 방식에 관해 사회과학에 주어진 이 빈번히 함축적인 특권은 우리를 세 가지의 주요 난점으로 이끌어간다.

 

첫 번째, 그리고 가장 분명한 난점은 표현 스타일의 문제이다. 과학 논쟁의 가장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는 과학자나 공학자가 자연에 대해서만큼 사회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고 할지라도, 대부분 사회학자의 설명에서는 사회구조에 대한 이들의 토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사회학자들은 행위자가 그들 자신, 그들의 동맹, 그들의 적 또는 사회적 배경에 관해 말할 때, 행위자를 선택적으로 검열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학자는 행위자가 자연에 관해 말할 때에만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검열이 강제되지 않은 흔치 않은 문헌들은 매우 다른 문체적 효과를 낳는다. 이는 행위자가 그들의 일부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에 기인한다. 과학의 내용을 분석한 최고이 저작들은 사회학적 환원주의의 인상을 주었는데, 이들은 분명히 사회학의 이름으로 사회학자들이 행한 체계적인 그리고 때로는 가차 없이 행해진 검열의 결과이다. 

 

연구원들은 태양의 중성미자, 통계적 조합의 계수 또는 뇌의 형태에 대해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토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제안하고 토론하는 사회적 분석과 해석은 부적절하다고 여겨지거나, 나쁘게는 연구원에 반하여 그들의 과학적, 기술적 선택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다. 때로는 이러한 영향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독자는 특권을 지닌 사회과학적 지식, 즉 의문의 여지가 없고 모든 비판의 위에 있다고 판단된 사회학이 자연과학을 재판하는 재판정에 참석했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이다.

 

두 번째 난점은 이론적인 성격의 것이다. 다수의 저자들이 밝혔듯이, 사회학적 설명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다. 사회학자들은 아주 드물게만 그들 사이에서 동의에 다다르는 데 성공한다. 꼭 그들이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똑같이, 사회학자들도 계속되는 논쟁으로 인해 분열되는 것이다. 합의는 다른 분야에서보다 훨씬 더 드물고 취약해 보인다. 우리는 규범과 제도보다도 사회적 계급과 이해에 관해 논해야 할 것인가?

 

이 논쟁은 사회학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과학사회학도 예외는 아니다. 두 입장이 비슷하게 호전적이며 비슷하게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관찰이 오직 소수이 개인들에 국한될 때 사회 계급에 대해 논하는 것은 정당한가? 어덯게 게임의 규칙이나 규범이 추출될 수 있으며, 어떻게 그 보편성이 결정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사회과학을 분열시키는 질문들 중의 몇 가지 사례이며,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쟁점은 명확하다. 과학, 기술 논쟁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은 그것이 설명하는 지식과 대상만큼이나 논란의 여지를 갖는다. 여기에 이론적 난점이 뒤따른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둘 다 똑같이 불확실하고 애매하며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분석에서 이 둘이 다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사회는 자연보다 더 분명하지도 않고 덜 논쟁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사회학적 설명이 어떤 견고한 토대도 찾을 수 없다.

 

세 번째 난점은 방법론적인 것이다. 과학적, 기술적 혁신을 연구한 사회학자는 이를 정교화하면서, 논쟁의 전개 과정에서는 행위자들의 정체성과 행위자들 각각의 중요성 둘 모두가 문제가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자연발생설 논쟁에 관한 파스퇴르나 푸셰를 확신에 차게 만들었던 그들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논쟁의 주역들이 차지하는 입장은 결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으며, 소급해서도 밝혀지지 않는다.

 

이는 입장에 대한 정의 그 자체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전력 공사가 20세기의 끝에는 불가피하게 전기 운송 수단의 이용 확대를 보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르노 자동차사의 이해관계는 실제로 무엇이었는가? 르노 자동차사가 정말 원했던 것을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과학과 기술은 극적인 반전을 가지는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 속에서는 행위자의 정체성이 쟁점들 중 하나가 된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등한시하는 관찰자는 행위자의 정체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왜곡된 이야기를 쓸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난점들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시작점으로 되돌아가서 과학과 기술에 사회학적인 정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우리가 취하는) 방법은 과학기술사회학의 최근 발견들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사회를 불확실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다룰 때 분석이 수행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연구된 논쟁들에서, 개입하는 행위자들은 상반되는 주장과 관점을 전개하며, 이는 그들이 사회적, 자연적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제안하도록 이끈다. 분석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적,사회적 세계를 다루는 협상들 사이에 대칭성을 유지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완전한 무질서일까? 이러한 질문들이 이 연구에서 우리가 대답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위에 제시된 세 가지 난점들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방법론적 원칙을 충실히 준수하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원칙은 관찰자의 불가지론이 사회과학도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것이다. 관찰자가 논쟁의 주인공들이 사용한 과학적, 기술적 주장만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가 그 자신이나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검열하지 않도록 절제하는 것이다. 관찰자는 행위자가 사회를 분석하는 방식을 평가하지 않는다. 어떠한 관점도 특권을 갖지 않으며, 어떠한 해석도 검열하지 않는다. 만약 행위자의 정체성이 여전히 협상되고 있는 중이라면, 관찰자는 관계된 행위자들의 정체성을 확장하지 않는다.

 

두 번째 원칙은 일반화된 대칭성이다. 이는 블루어의 대칭성 법칙과 비슷하나 더 확장된 것이다. 그 목표는 과학 논쟁이나 기술 논쟁에서 충돌하는 견해와 주장들을 같은 용어로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논쟁이 사회와 자연 둘 다에 관한 생각이 혼합되어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로 우리는 관찰자가 논쟁을 묘사할 때 하나의 레퍼토리만을 쓰도록 요구했다. 묘사와 설명을 위해 선택된 어휘는 관찰자의 재량에 맡길 수 있다. 관찰자는 자신이 연구하는 행위자가 암시한 분석을 단순히 반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무한한 수의 레퍼토리는 가능하다. 그의 과제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레퍼토리를 선택하고, 동료들에게 그가 바른 선택을 했음을 확신시키는 일은 사회학자에게 달려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번역의 어휘를 선택하면서, 우리의 서술이 다른 어떤 서술보다 더 타당하지도, 그러나 덜 타당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반화된 대칭성 법칙을 가정하면, 우리가 따라야만 할 규칙은 연구하는 문제의 기술적인 면에서 사회적인 면으로 이동할 때, 기록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연구되는 행위자의 레퍼토리가 아닌, 번역의 레퍼토리가 독자들을 납득시키기를 희망한다.

 

세 번째 원칙은 자유로운 연합에 관한 것이다. 관찰자는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사건들 사이에 있는 기존이 모든 구분을 포기해야 한다. 이 둘을 분리하는 명확한 경계의 가설을 거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이 갈등을 낳는 이유는 이 구분이 출발점이라기보다 결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찰자는 그가 사용하는 카테고리들, 동원된 실체들, 이들 간의 관계 모두가 행위자의 토론 주제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 미리 제정된 분석의 틀을 강요하는 대신, 관찰자는 행위자들이 상이한 요소들을 정의하고 결합시키는 방식, 사회적 세계이든 자연적 세계이든 행위자들이 그들의 세계를 형성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밝히기 위해 행위자들을 추적해야 한다.

 

이 뒤에서는 이 원칙들을 적용한 예가 제시된다. 우리의 목표는 행위자도 사회를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행위자들이 그들 각각의 정체성, 변화에 대한 공동 대응의 여지, 그리고 그들에게 열려 있는 선택의 범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증명하고자 희망하는 것은,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가감없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권력관계의 확립과 전개에 더 나은 이해를 제공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추적된 이야기에서, 어떤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들로 하여금(그 행위자가 인간이든 조직이든, 아니면 자연적 실체이든 간에) 그들을 따르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은 사회와 자연이 얽혀 있는 복잡한 상호작용의 그물망에 달려 있다.

 

 

가리비와 어부

프랑스 소비자에게 매우 고맙게도, 가리비는 단지 지난 20년 동안에만 체계적으로 '착취'되었다. 가리비는 이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인기 있는 미식품이 되어서,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에는 가격이 상당히 비싸져도 판매량이 제법 증가할 정도이다. 프랑스에서 가리비가 잡히는 곳은 세 곳이다. 노르망디 해변, 브레스트 의 선박 정박소 그리고 생브리외 만이다. 가리비에는 몇 가지 다른 종이 있는데, 브레스트의 가리비 같은 어떤 종들은 일 년 내내 산홋빛을 띠지만 생브리외 만에서는 가리비가 봄과 여름 동안에는 산홋빛을 잃는다. 이 특징은 상업적으로 중요한데, 어부들의 확신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산홋빛이 있는 가리비를 그렇지 않은 가리비보다 선호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동안 블스트의 가리비 군락은 점점 감소했다. 이는 여러 원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해양 육식동물(불가사리), 바닷물의 전반적인 온도를 낮춘 일련의 추운 겨울, 그리고 만족할 줄 모르는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리비가 번식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일 년 내내 가리비를 찾아 해저를 긁어댄 어부들이 그 원인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생브리외의 생산량도 꾸준히 감소했으나, 다행히도 여기서는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육식동물의 수가 적었고, 산홋빛 가리비에 대한 소비자들의 취향 때문에 어부들이 일 년 중의 절반은 육지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요인들의 결과로 가리비 군락은 브레스트보다 생브리외 만에서 덜 감소할 수 있었다.

 

이 연구의 목적은 1970년대를 통해 나타난 '과학적 지식'의 구성을 통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점진적인 발전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1972년에 브레스트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시작된다. 과학자와 어부 공동체의 대표는 가리비의 양식을 관리하여 이 갑각류의 생산량을 증대시킬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이 회의에 참석했다. 토론은 다음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해 이루어졌다.

 

1) 국립 해양 연구소의 일원인 세 명의 연구원은 일본 여행에서 가리비가 다량으로 양식되는 것을 발견했다. 기술은 다음과 같다. 가리비 유생은 바다 속 수집기에 부착하여 자라는 동안 육식동물로부터 보호된다. 조개가 충분한 크기로 자라면 양식장에 '뿌려져' 채집되기 전까지 2~3년 동안 안전하게 자란다. 연구원의 여행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술을 통해 기존 군락의 크기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회의에 제출된 다양한 기고문들은 모두 이 보고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2) 가리비 발생 과정 메커니즘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과학자 공동체는 이 주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집약적인 가리비 채취가 최근에야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부들조차도 가리비 발생의 초기 단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어부들은 끌그물에 걸린 성체 가리비만을 보았던 것이다. 1970년대 초에는 가리비 유생과 어부 사이에 어떠한 직접적인 관계도 없었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들 사이의 연결은 연구원의 활동을 통해 점차 성립되었다.

 

3) 어획은 채취의 결과가 생브리외 만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할 정도로 집약적으로 이루어졌다. 브레스트는 실질적으로 지도에서 지워졌다. 생브리외에서도 생산량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다. 생브리외의 가리비 산업은 특히 높은 이윤을 내고 있었고, 어부 대표는 군락이 감소하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리비 개체군의 감소는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고, 브레스트의 재앙이 생브리외에서도 일어날 것을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 논문을 위해 선택된 출발점이다 십년 뒤, '과학적'인 지식이 생산되고 증명되었다. 하나의 사회적 집단(생브리외 만의 어부들)이 그들이 형성하고 유지했던 특권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하나의 과학 전문가 공동체가 가리비를 연구하고, 재배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조직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진화의 일부를 거슬러 올라가 조사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자연적 실체들로서의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관리하는 관계의 네트워크가 건설되는 과정과 동시에 지식의 생산이 일어나는 것을 볼 것이다.

 

 

번역의 네 단계

이 전개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우리는 행위자가 자연과 사회를 구성하거나 해체하는 동안 행위자를 뒤쫓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우리의 출발점은 극동 여행에서 돌아온 세 명이 연구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왜 행위하는가 하는 문제는 지금 연구 단계에서 별로 중요하지않다. 그들은 여기서 분석할 이야기의 동인이다. 우리는 그들이 가리비를 길들이려는 첫 시도를 하는 동안 그들을 동반할 것이다. 이 노력은 실제 상황에서는 중복되어 나타날 수도 있는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단계들이 번역이라 불리는 일반적인 과정의 상이한 과정을 구성한다. 이 과정 동안 행위자의 정체성, 상호작용과 변화에 대한 대응책의 가능성이 협상되며 이들의 범위가 결정된다.

 

1. 문제제기(probematization), 또는 어떻게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는가?

연구원들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행에서 받은 인상과 앞으로 착수하고자 하는 연구 계획을 발표하는 일련의 보고서와 논문을 썼다. 그들은 유생이 수집기에 부착한 것과, 육식동물을 피해서 방해받지 않고 자라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들의 질문은 단순했다. 이 경험이 프랑스로 수송될 수 있는가? 더 정확하게, 생브리외 만에서 가능한가?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주어질 수 없었다. 연구원들은 생브리외에서 자라는 종류인 펙텐 막시무스가 일본에서 자라는 큰가리비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원의 확언에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진술이 명백한 것으로 평가되었다고 여긴다. 생브리외에서의 가리비 양식은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주어질 수 없었다. 펙텐 막시무스가 생존의 첫 번째 시기 동안 스스로 부착할 것인가? 첫 질문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질문들도 같이 제기될 수 있다. 유생의 변태는 언제 일어나는가? 어린 조개는 어떤 속도로 자라는가? 만의 군락 수를 늘리려는 계획을 뒷받침할 만큼 충분한 수의 유생이 수집기에 부착할 것인가?

 

그러나 연구원이 쓴 다양한 문서들에서, 세 연구원은 스스로를 위의 질문들을 단순히 체계화하는 데에만 한정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일군의 행위자들을 정하고, 연구원 스스로를 자신들이 만들고 있던 관계의 연결망에서 의무통과점으로 확립시키는 방식으로 행위자들의 정체성을 정의했다. 스스로를 연결망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도록 하는 이러한 이중의 움직임을 우리는 문제제기라고 부른다.

 

1) 행위자들의 상호정의

세 명의 연구원이 구성한 질문과 그들이 제공한 기록을 보면 기리비, 생브리외 만의 어부 그리고 과학자 동료라는 다른 세 행위자들이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연구원들의 보고서에 나타난 대로라면, 세 행위자들의 정의는 매우 개략적이다. 그렇지만, 이 행위자들이 앞으로 나타날 여러 가지 질문에 어떻게 필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히 정확하다. 세 명의 연구원이 내린 정의들은 다으모가 같은 방식으로 종합될 수 있다.

 

a) 생브리외의 어부 :

그들은 가리비 군락에 대한 걱정 없이 마지막 조개까지 어획한다. 지금은 그들이 큰 이윤을 남기지만, 욕심으로 가득 찬 이러한 일들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들은 스스로 파멸할 것이다. 그러나 깊이 숙고한 끝에, 이 어부들은 장기적인 경제적 이해를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만에 가리비 군락을 증대시키는 계획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이며, 이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시작된 연구들에 찬성한다. 어부들의 정체성에 대해 다른 가정은 제시되지 않았다. 세 연구원은 어부라는 사회적 집단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교환 가능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 공동체의 한 기본 단위로서 평균적인 한 명의 어부를 정의했다.

 

b)과학자 동료 :

과학자들은 회의에 참가하거나 다양한 출판물에 인용되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가리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며, 생브리외 지역의 가리비에 대해서도 몰랐다. 게다가 이 조개들이 어떻게 부착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답할 수 없다. 그들은 제안된 지식을 향상시키는 데에 흥미를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계획은 실험 수조보다는 자연 상태에 있는 가리비를 연구하는 것이다.

 

c) 생브리외의 가리비 :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특정 종은 일 년 중 6개월만 산홋빛을 띤다. 바다에서 끌려 나왔을 때에는 성체의 형태로만 관찰되었다. 세 명의 연구원의 질문은 가리비가 스스로 부착할 것이며, 가리비가 번식하고 살아남는 것을 가능하게 할 피난처를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가정하고 있다.

 

물론, 세 명의 연구원도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드러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문제제기 과정에서 어떤 지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기초 연구원, 즉 외국의 성취에 감명 받아 이전에는 완전히 연구된 적이 없는 종에 대해서 유용한 지식을 향상시키려는 연구원으로 나타냈다. 이 연구를 맡으면서, 연구원은 어부들의 삶을 더 편하게 하고, 생브리외의 가리비 군락을 증대시키기를 희망했다.

 

이 예는 문제제기가 연구를 간단한 공식으로 환원시키기보다는, 사회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 둘 다에 속한 구성 요소들을 최소한 부분적, 국지적으로 언급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펙텐 막시무스가 부착할 것이라는 간단한 질문은 행위자들의 정체성과 그들 간의 연결을 수립하여 일련의 행위자들을 연관키에 충분했다.

 

2) 의무통과적(OPP)의 정의

세 연구원은 스스로의 역할을 단순히 몇몇 행위자들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데 한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이 행위자들의 이해관계가 제안된 연구 프로그램을 승인하는 데에 걸려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연구원의 논문에서 그들이 전개한 주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만약 가리비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면(이런 충동을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든지 상관없이), 만약 과학자 동료들이 이 주제에 관한 지식을 향상시키고자 한다면(그들의 동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만약 어부들이 그들의 장기적 경제 이익을 보존하고 싶어한다면(그들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렇다면 그들은 1 : '어떻게 가리비가 부착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알아야만 하고  2 : 이 질문을 둘러싼 그들의 동맹이 그들 각각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림 3-1]은 문제제기가 어떤 동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잘 형성될 동맹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움직임과 우회가 나타나 있다.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성취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볼 때 가리비, 어부 그리고 과학자 동료는 여기에 속박되었다. 그들의 길은 일련의 장애로 막혀 있다. 펙텐 막시무스의 미래는 언제나 그들을 멸종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종류의 육식동물들로 인해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단기적 이익을 탐내는 어부는 가리비의 장기적 생존을 위태롭게 한다. 지식을 발전시키고 싶은 과학자 동료들은 자연 상태의 가리비에 대한 예비적이고 필수적인 관찰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 연구원에게 그렇듯이, 그들의 전체 계획은 펙텐 막시무스의 부착이라는 질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 행위자들에게 선택은 분명하다. 목표를 바꾸든지, 또는 유생이 부착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결과를 얻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든지.

 

[그림 3-2]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제기는 실체들 간의 동맹 또는 연합의 체계를 묘사하며, 그로 인해 정체성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의한다. 이 사례에서는, 생브리외 만의 가리비 번식을 유도하기 위해 '신성 동맹'이 맺어져야 했다.

 

2. 관심끌기(interessement)의 장치, 또는 어떻게 동맹들을 적당한 자리에 고정시킬 것인가?

우리는 문제제기의 가설적 양상을 강조했다. 정체성이 주어진 집단들은 종이에서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 연구원이 작성한 보고서와 논문에서만 실제 존재를 가졌다. 그러나 실재란 그것이 연속적인 상태로 통과하는 화학적 몸처럼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 이야기의 이 지점에서, 정체성이 주어진 실체들과 예견된 관계들은 아직 테스트를 통과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 연구원들의 문제제기가 얼마나 견고한지 결정할 일련의 힘의 대결을 위한 무대가 준비되었다.

 

문제제기로 징병된(enlisted) 각각의 실체는 처음의 계획을 따라 통합될 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자신의 정체성이나 목적, 계획, 지향, 동기 또는 이해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여 거래를 거절할 수도 있다. 사실 상황은 절대 칼로 베어낸 듯 명확하지 않다. 문제제기 단계에서 보았듯이, 실체들이 완전히 독립적인 방식으로 정체성과 목적을 공식화하는 것처럼 관찰자가 묘사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이것들은 오직 행동을 통해서만 형성되고 조절되기 때문이다.

 

관심끌기는 한 실체(여기서는 세 연구원)가 문제화를 통해 정의된 다른 행위자들의 정체성을 강제하고, 안정화시키려는 행동들의 집합이다. 이 행동들을 이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들이 쓰인다.

 

왜 관심끌기에 관해 이야기하는가?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적절한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심을 갖는 것(to be interestde)은 사이에 있는 것(inter-esse), 사이에 끼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의 사이인가? 세 연구원에게로 돌아가 보자. 문제제기 과정 동안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리비, 어부,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과 힘을 합쳤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조심스럽게 동맹들의 정체성, 목표, 경향을 정의했다.

 

그러나 이 동맹들은 또 다른 행위자들의 문제제기에도 일시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정체성은 경쟁적인 상이한 방법으로도 정의된다. 관심끌기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행위자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행위자의 정체성을 다른 방법으로 정의하고자 하는 모든 다른 실체들과 행위자 사이에 둘 수 있는 장치를 정의하고자 하는 모든 다른 실체들과 행위자 사이에 둘 수 있는 장치를 조립하는 것이다.

 

B와의 연결을 원할 법한 다른 실체들(C, D, E 등)이 보이지 않는(혹은 때때로 잘 보이는) 집단과 B의 모든 연결들을 자르거나 약화시킴으로써, A는 B의 흥미를 끈다. B의 특성과 정체성은(그것이 가리비, 과학자 동료 또는 어부) 관심끌기 과정 중에 강화되고 재정의된다. B는 그것을 A와 연결시킨 연합의 '결과'이다. [그림 3-3]에서 보듯이, 이 연결이 B에게 다른 정의를 주려고 시도하는 C, D, E 모두와 B를 분리한다. 우리는 사회적 연결을 형성하고, 강화하기 시작하는 이러한 초보적인 관계를 관심끌기의 삼각형이라 부른다.

 

관계에 중단을 초래할 수 있는 전략과 메커니즘의 범위는 무한하다. 과학철학자 파이어아벤트가 과학적 방법에 대해 말했듯이, '뭐든지 된다'. 만약 B와 C, D, E 사이의 연결이 견고하다면, 순수하고 단순한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만약 B가 이미 A의 문제제기에 가까이 왔다면 유혹이나 간단한 권유를 사용할 것이다. B의 형태가 제안된 문제제기와 완벽하게 부합하는 매우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흥미를 가진 실체의 정체성과 '외형'은 관심끌기 과정 처음부터 줄곧 수정된다. 우리는 가리비를 길들이는 이야기로 이러한 요점들을 예증할 것이다.

 

가리비 길들이기는 일반적인 관심끌기 메커니즘을 인상적으로 잘 설명하는 예이다. 세 연구원은 일본인이 발명한 기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는 대략 다음과 같다. 수집기를 달아 맨 밧줄을 바다에 담근다. 각각의 수집기에는 고운 그물로 만들어진 자루가 있으며, 그 안에는 유생의 부착을 위한 지지물이 담겨 있다. 이 자루는 어린 가리비의 탈출을 예방하는 동시에, 물과 유생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을 보장한다. 이 장치는 육식동물이 유생을 공격하는 것 또한 방지한다. 이런 방법으로 유생들은 조개껍데기라는 방어물이 없을 때에도 보호된다. 수집기는 줄에 직렬로 고정되었고 두 줄의 끝은 제자리에 고정된 부표에 연결되었다.

 

밧줄과 수집기는 전형적인 관심끌기 장치이다. 유생은 그들의 환경에서 '추출'되는 데, 이를 통해 그들은 그들을 공격하고 전멸시키려는 육식 동물(불가사리)로부터, 유생을 소멸시키는 해류에게서, 그리고 유생에게 피해를 주는 어부들의 그물에게서 보호된다. [그림 3-4]에서 보듯이 유생은 (물리적으로) 그들을 위협하는 모든 행위자들에게서 분리된다.

 

게다가 이 관심끌기 장치는 연구원이 가리비와 유생에 대해 만든 세 가지 가설을 확장하고 물질화한다. 1 : 무방비상태의 유생은 육식동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는다. 2 : 유생은 부착할 수 있다. 3 : 생브리외의 가리비들은 그들의 일본 사촌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일본이 경험은 프랑스로 전해질 수 있다. 만약 유생이 부착하기를, 자라나기를, 변태하고 (상대적으로) 속박되어 번식하기를 '거절'한다면, 수집기는 모든 유효성을 잃을 것이다. 만약 성공적이라면 관심끌기는 문제제기와, 문제제기가 수반했던 동맹의 타당성을 확증한다. 그리고 이 특별한 사례 연구에서는 문제제기는 결국 반박되었다.

 

가리비와 유생의 관심끌기에는 수집기가 필요했지만, 이러한 종류의 '음모'가 어부와 과학자 동료의 관심끌기에는 불필요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게다가 세 연구원은 어부 집단 전부를 확신시키려 들지도 않았다. 연구원들이 도움을 구했던 표적은, 어부 집단보다는 전문가 조직의 대표들이었다. 세 연구원은 가리비가 멸종한 이유를 어부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모임과 토론을 곱으로 늘렸다. 연구원은 생브리외 만 가리비 군락의 놀라운 감소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그래프를 작성하고 해설했다. 그들은 또한 일본의 '극적인' 결과를 강조하여 표현했다. 회의하는 동안, 그리고 출판물을 통해서 그들은 과학자 동료들의 지지를 구했다. 논증은 언제나 똑같았다. 기존 문헌들에 대한 철저한 재검토를 통해 가리비에 대해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경제적 중요성이 증대하고 있는 종의 생존이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지식의 결여는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가리비의 경우에(어부와 과학자 동료의 경우처럼), 관심끌기는 앞으로 등록될 행위자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일정한 해석과 이러한 행위자들이 결합하는 존재들에 기초하고 있다. 관심끌기의 장치들은 유리한 힘의 균형을 창조한다. 첫 번째 집단에게 관심끌기 장치는 생브리외 만에 담긴 밧줄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집단에게는 세 연구원의 계획을 따르도록 관련된 행위자들을 유혹하는 글과 대화이다. 관련된 모든 집단의 관점에서 관심끌기는 실체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어 등록되는 것을 돕는다. 게다가 관심끌기는 잠재적으로 경쟁하는 모든 연합들을 가로막고, 자신만의 동맹 체계를 건설하려 한다. 이를 통해서 사회적, 자연적 실재 둘 다를 포함하는 사회적 구조가 형성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3. 등록하기(enrollment), 또는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고 조정할 것인가?

덧이 강제적이고 주장에 설득력이 있어도, 결코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다른 말로, 관심끌기 장치가 필연적으로 동맹, 즉 사실상의 등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요점은 질문을 더욱 정확한 일련의 진술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펙텐 막시무스는 부착한다. 어부는 만의 군락을 다시 증대시키기를 원한다, 등등.

 

왜 등록하기(영어로 enrollment로 역할(role)을 집어넣는다는 의미)에 대해 말하는가? 우리는 이 용어를 쓰면서, 사회를 역할과 역할 보유자로 이루어진 실체로 정의하는 기능주의 사회학이나 문화주의 사회학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등록하기는 미리 확립된 역할을 내포하지도, 배제하지도 않는다. 등록하기는 일군의 밀접한 관계를 가진 역할들을 정의하고, 이를 수락하는 행위자들의 속성으로 만드는 장치를 가리킨다. 만약 관심끌기가 성공적이었다면 등록하기를 달성한다. 그러므로 등록하기를 묘사하는 것은 관심끌기에 수반되며 관심끌기를 성공할 수 있게 해주는 다각적인 협상, 힘의 대결과 책략의 집합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만약 가리비가 등록될 것이라면 가리비는 먼저 자발적으로 수집기에 부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부착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실 세 연구원은 그들의 가장 길고 어려운 협상을 가리비와 진행해야 했다. 꼭 어린 아이들의 동화에서처럼, 연구원의 계획을 훼방하고 유생들이 부착되기 전에 이들을 다른 곳으로 쓸어버리려 하는 많은 적군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해류가 있었는데, "설치된 여섯 개의 밧줄 가운데 네 개만이 다른 변수들을 개입시키기 전에 올바르게 기능했다. 조수가 가장 약한 만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유생들이 더 잘 부착하는 것은 분명했다."

 

조수로 인한 교류가 부착의 방해물이었기 때문에 가리비와의 협상은 먼저 해류와의 협사이었다. 그러나 연구원은 해류 외에도 다른 요소들에 대처해야 했다. 온갖 종류의 기생충이 실험을 성가시게 했고 유생을 포획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변수의 대부분은 기생충이 유인되는 방법에 기인한다. 우리는 사고를 야기하고, 끈의 위치를 옮겨놓으며, 수집기를 뒤얽히게 만드는 여러 불청객을 맞았다. 이는 즉각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가리비들은 모든 미세한 처리(자리가 바뀐 끈, 서로 마찰하는 수집기 등)에 극히 예민한 것으로 보이며, 지지물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가는 것으로 반응했다.

 

이러한 목록은 계속된다. 진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해류와 불청객들은 연구원들이 가리비와 맺고자 했던 동맹에 반대하는 세력의 일부였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A-B-C 삼각형에서 배제되어야 할 C는(그것이 해류라고 불리든, 불가사리라고 불리든) 그리 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C(해류나 불가사리)는 A(연구원)와 B(유생) 사이의 관계를 저지할 수 있었는데, C는 모두가 탐내는 B(유생)에 다른 흥미를 일으키며 관계를 저지했다.

 

연구원의 개체수 조사에 따르면 부착이 좀 더 많이 일어나는 곳은 "해저와 해저에서 5미터 높이 사이이다. 이는 아마도 깊이와 가리비가 부착 할 때의 특이한 습성 때문일 것이다. 유생은 가라앉으면서 강하를 방해하는 첫 번째 방해물에 부착한다."

 

관심끌기 장치인 밧줄은 관찰자에게 부착 수준을 보여준다. 연구원의 가설과 해석은 그저 협상의 프로그램일 뿐이다. '이봐 유생, 우리가 너를 만의 바닥에서 찾아야 할까, 아니면 네가 가라앉는 동안 잡기 위해서 네가 떨어지는 걸 기다려야 할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연구원은 유생을 덫에 꾀어 들이기 위해 어떠한 양보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생이 부착할 때는 어떤 종류의 물질을 선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또 다른 일련의 거래가 필요했다.

 

"밀집, 양골담초 또는 수염틸란드시아로 만든 수집기에서는 가리비의 성장이 느리다는 것이 기록되었다. 이런 종류의 지지물은 너무 압축되어서 수집기 안에 물이 순환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와 같이 생활양식이 점진적으로 조정되었다. 만약 이 모든 조건들이 잘 결합한다면 유생들은 의미 있는 방식으로 부착할 것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이라는 형용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파리에서 열렸던 베트남 삼자 협정처럼, 세 연구원이 협상해야만 하는 두 번째 행위자인 과학자 공동체를 소개해야만 한다.

 

처음에는 과학자 공동체에서 일반적인 의견 일치가 있었다. 가리비가 부착하리라는 생각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첫 번째 결과는 예비적인 협상 없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펙텐 막시무스는 유생 상태에서 스스로 부착한다'는 명제가 생브리외 만에서 행해진 실험들 때문에 의문시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수집기에서는 부착이 관찰되지 않았으며, 수집기에 부착한 유생의 수는 결코 일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어느 정도 수가 되어야 일반적으로 가리비가 스스로 부착한다는 것이 확증되고 받아들여질까? 세 연구원이 첫 발표에서 그들이 관찰한 부착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확언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이의에 대한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여기서 우리는 관심끌기를 증대시키기 위해 가리비와의 사이에서 수행되었던 협상의 중요성과, 유생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쓰였던 유혹물(나일론보다는 수염틸란드시아 등)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과학자 동료들과의 거래는 간단했다. 결과에 대한 토의는 과학자 동료들이 부착 법칙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험에는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었다. 동료들이 주장했던 유일한 조건은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나 가리비가 부착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예견한 선행 연구의 존재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가로서 연구원에 의해 주장된 부착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세 연구원의 주장은, 모든 진실한 발견들은 이전에는 무시되던 선구자들의 베일을 기적적으로 벗겨내는 법이라고 이들이 언급한 뒤에 수용되었다.

 

어부들과의 거래, 더 정확히 어부 대표들과의 거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부들은 구경꾼처럼 관망하면서 최종 판결을 기다렸다. 그들은 전문가들이 이끌어낼 결론을 단순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동의는 어떠한 토론도 없이(사전에) 얻어졌다.

 

네 번째 파트너가 어떤 저항도 없이 등록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협상은 세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이 예는 행위자들이 등록되는 여러 가지 가능한 방법들, 즉 물리적 폭력(포식자들에 대항하여), 유혹, 거래, 토론 없는 동의 등을 예증한다. 이 예는 대체로 '역할'(스스로 부착하는 가리비, 수집기가 만의 군락 수를 증가시키리라는 말에 설득된 어부, 부착을 믿는 과학자 동료들)의 정의와 분배가 행위자의 정체성이 결정되고 검증되는 다각적인 협상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4. 동맹군 동원하기(mobilization), 혹은 대변인이 대표성을 갖는가?

누가 누구의 이름으로 말하는가? 누가 누구를 대표하는가? 연구원들의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이 필수적인 질문들에 대답해야 한다. 관심끌기와 등록하기의 묘사에서 본 것처럼 가리비, 어부, 과학자 동료 모두 오직 적은 수의 개체만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가리비는 정말 스스로 부착하는가? 과학자 동료들에 따르면 그렇다. 관찰된 부착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 부착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부착수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유생은 조용하게, 그리고 남의 눈을 피해 해저에 잠복한 익명의 가리비 집단의 공식적인 대표로 여겨졌다. 세 연구원은 포획을 교묘히 피해간 무수한 다른 유생들을 대표하는 한 줌의 유생을 통해 가리비의 관심끌기를 교섭했다. 일반 대중은 결코 스스로 부착하는 가리비들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다. 소수에게 참인 것은 모든 개체군에게도 참인 것이다. CBI(영국산업연맹)가 노동조합 대표단과 협상할 때 그들은 이 대표단을 모든 노동자의 대표자로 여겼다. 이 적은 수의 개체가 나머지 전부의 이름으로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인식론을 전공하는 철학자들은 귀납을 말하고, 정치학자들은 대변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질문은 같다. 일반 대중(고용주, 노동자, 가리비)이 그들의 대표를 따를 것인가? 대표는 연구원이 동료들이나 어부들과 거래할 때에도 논점이었다. 적절하게 말해서, 그렇게 확신한 것은 과학자 공동체가 아니라 출판물을 읽고 회의에 참석했던 소수의 동료들이었다. 실험을 허가하고 만의 군락 수를 증가시키는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것은 어부들이 아니라 그들이 대표하는 일반 대중의 이름으로 [관심끌기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세 연구원은 오직 소수의 대표들과만(그들이 수집기의 유생들이든 전문적인 대표단이든, 또는 토론에 참여하는 과학자 동료들이든) 관계를 형성했다. 그렇지만 상화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대표단과 동료들은 스스로를 위해 말하지만, 유생들은 침묵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간대표는 진정한 대표인이지만, 반면에 부착한 유생은 단순한 대표인 것이다. 그렇지만 더 철저하게 분석해보면 이러한 차이는 사라진다.

 

가리비에게로 돌아가보자. 수집기에 부착한 유생들은 생브리외 만의 가리비들과 '동등'하다.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부들처럼, 마침내 믿을 만한 대변인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본 것처럼 가리비와 연구원 사이의 협상은 얼마나 많은 유생이 잡힐 것인가라는 한 가지 질문 주변을 맴돈다. 이 숫자가 토론의 주요 주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어떤 절대적인 필요의 결과도 아니다. 유생을 셈으로써, 세 연구원은 그들의 동료 과학자들과 어부들과의 협상에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다. 그들의 대화상대는 부착되는 숫자에 특히 주목했다. 과학자 동료들은 관찰의 일반성을 확신하기 위해서, 어부들은 장치의 효율성을 확신하기 위해서 말이다.

 

얼마나 많은 유권자가 그들의 대표를 선택하기 위해 선거에 나섰는가? 얼마나 많은 유생이 수집기에 부착됐는가? 각각의 경우에서 이것이 중요성을 갖는 유일한 질문이었다. 부착은 투표에 대응하며, 부착한 유생을 세는 것은 투표용지를 세는 것에 해당된다. 어부 공동체에서 대변인이 선출될 때에도 절차는 똑같다. 꼭 만의 가리비처럼 조용한 어부 공동체에서 소수의 개인이 투표함에 그들의 투표용지를 넣기 위해 앞으로 나선다. 투표용지가 세어지고 다른 후보들에게로 표가 나뉜다. 이 결과의 해석이 공식적 대변인의 임명으로 이어진다. 유생의 경우와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유생이 부착하고 세어진다. 세 연구원이 이 숫자를 종이 몇 장에 기록한다. 그리고 이 값을 그래프와 표로 전환하여 기사나 논문에 사용한다. 학회에서는 결과들이 분석되고 토론되며, 만약 결과가 의미 있다고 판단되면 세 연구원은 정당하게 생브리외 만의 가리비들을 대변해 말할 수 있다고 권한을 부여받는다. 펙텐 막시무스는 사실 부착 단계를 거치는 것이 된다.

 

대칭성은 완벽하다. 일련의 매개물과 등가물이 대편인의 임명으로 이어지는 위치에 놓였다. 어부의 경우에는 과정이 조금 더 길다. 투표용지를 세는 것과 세 연구원 사이에 전문적인 대표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같다. 어부와 가리비 모두 결국은 그들을 대신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세 연구원에 의해 대표된다. 어떤 투표도 없었지만, 과학자 공동체의 동의도 같은 종류의 일반 절차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대표자의 수를 조금씩 줄여가는 매개들이 같은 방식으로 연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다양한 회의나 세미나에 참석했던 소수의 동료들은 관련된 모든 연구원을 대신하여 말한다. 한번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세 명의 개인이 전문가의 권위로 가리비와 어부를 대신하여 말하게 되는 것이다.

 

대표 과정의 여러 단계들에 관련된 모든 행위자들에 대해서 대변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문제도 야기하지 않는다. 다른 것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맨 먼저 우리가 대변하는 것들을 침묵시켜야 한다. 인간을 확실하게 침묵시키는 것은 분명히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명료한 언어를 갖지 않는 실체들을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조정과 훨씬 더 복잡한 관심끌기의 도구들이 필요하다.

 

몇몇 집단의 '머리'가 되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영향력을 갖게 되고 다른 이들은 그들의 말에 주목했다. 그들은 학식이 있는 전문가, 세련되지 않은 어부 그리고 맛좋은 갑각류를 함께 뒤섞었다. 하나의 최종적인 대변인을 만들어내는 매개의 연쇄는 행위자를 점진적으로 동원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는데, 여기서 행위자들은 동맹을 형성하고 한 단위의 힘처럼 행동함으로써 "펙텐 막시무스는 부착한다", "어부는 만의 군락수를 증가시키기 원한다"와 같은 명제를 신뢰할 수 있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 동원하기의 개념은 우리가 묘사한 메커니즘에 완전히 적합하다. 이 용어는 모든 필요한 치환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단어의 뜻이 그렇듯이, 동원한다는 것이전에는 움직일 수 없었던 실체들을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리비, 어부, 전문가들이 실제로 모두 분산되어 있었으며,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는 브레스트 회의에서 세 명의 연구원이 이들의 실체가 무엇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이야기했다. 계속적인 대변인의 임명과 일련의 등가물의 정착을 통해서, 모든 행위자들은 치환되고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 다시 모였다. 이러한 동원하기, 또는 집결은 일련의 치환을 통해 체현되는 명확한 물리적 실재를 갖는다

 

가리비는 유생으로 변형되고, 유생은 숫자로 변형되며, 숫자는 쉽게 운송될 수 있고 복제되며 보급될 수 있는 종이에 표현되는 표와 그래프로 변형된다. 유생과 수집기 끈을 브레스트 회의에 참석한 동료들에게 전시하는 대신, 세 연구원은 도식으로 나타낸 재현을 보여주고 수학적인 분석을 제시한다. 가리비는 치환되었다. 가리비는 일련의 변형을 통해 회의실로 운송되었다. 

 

이렇게 각각의 새로운 매개물, 각각의 새로운 대표의 선택은 이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각각의 새로운 치환을 더 쉽게 할 것과 세 연구원을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귀착되는 등가물을 확립하는 요구 말이다. 이는 어부들이 투표용지로 변형되고, 이어서 이전의 관점이 브레스트 회의에서 보고된 전문적 대표 사절로 변형된 것과 같다.

 

얻어진 결과는 인상적이다. 한 줌의 연구원이 소수의 도표와 숫자가 쓰여 있는 표를 밀폐된 방에서 토론한다. 그러나 이 토론은 침묵하는 무수한 행위자들의 집단을 책임지고 있다. 이것들이 소수의 대변인으로 브레스트에서 대표된 가리비, 어부, 그리고 전문가들이다. 이 다양한 집단이 동원되었으며, 그들은 집에서 회의실로 옮겨졌고 개입된 대표를 통하여 펙텐 막시무스의 부착과 어부들의 이익과 손해에 관한 협상에 참여했다. 등록하기는 적극적인 지지로 변형되었다. 1974년 11월의 어느 날 브레스트 해양학 센터의 한 계단식 강의실에서 가리비와 어부는 세 연구원의 편에 있었다.

 

이 분석이 보여주듯이, 대변인이 대신하여 말하는 집단이나 개체군은 조금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대표의 긴 연쇄가 제 자리에 놓인 뒤에야 존재하게 된다. 이는 시작점이 아니라 결과를 구성한다. 등가물의 공고함과, 대표성과 정체성을 협상하는 분산된 매개자들의 충실성에 따라 보증인의 일관성이 엄격하게 평가된다. 만약 동원하기가 성공적이라면, 그때는? 펙텐 막시무스는 스스로 부착하는 종으로 존재하게 되며, 어부들은 군락수를 증대시키기 원하고 실험 계획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이 된다. 과학자 동료들은 얻어진 결과가 유효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사회적, 자연적인 '실재'는 대변인의 대표성에 대한 일반화된 협상의 결과이다. 만약 의견 일치를 이룬다면, 각 실체의 행동 전략은 빈틈없이 그 범위가 결정될 것이다. 최초의 문제제기는 상이한 행위자의 정체성, 상호 관계 그리고 목표에 대한 일련의 협상 가능한 가설들을 정의한다. 이제 우리가 묘사한 네 계기들의 끝에서, 강제적인 관계의 연결망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연결망이 함축하는 의견 일치와 동맹에는 언제라도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이때 번역은 반역이 된다.

 

 

불일치 : 배반과 논쟁

최근 몇 년간, 사회학자들은 논쟁에 관한 연구에 전념했고, 과학과 기술의 동역학에서 논쟁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보여주었다. 왜, 그리고 어떠한 조건에서 논쟁이 일어나는가? 논쟁은 어떻게 끝나는가? 여기서 제기된 분석틀로 이 두 질문을 같은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다. 동시에 이 분석틀은 자연에 속한 논쟁과 사회에 속한 논쟁 사이의 대칭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

 

대변인인가 아니면 매개하는 대표인가? 이 질문은 실천적인 질문이지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가리비, 어부 그리고 과학자 동료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제기된다. 논쟁은 대변인의 대표성이 질문되고, 토론되고, 협상되고, 거절되는 과정이 표현된 것이다. 

 

가리비에서 시작해보자. 첫 번째 실험, 또는 우리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관심끌기 행동이 가리비를 수집기에 부착한 유생의 형태로 동원했고, 브레스트의 학회에서 토론되는 도표의 형태로 동원했다. 이 그룹은 펙텐 막시무스가 유생 단계에서 스스로 부착한다는 사실을 만들어냈다. 생브리외 해변을 따라 망에서 수집된 백여 개의 유생은 보이지 않는, 그리고 잡히지 않는 그들의 수많은 형제들의 행동을 반영한다고 과학자들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이 지속될 것 같은가? 가리비들이 대를 이어 자신의 유생들을 수집기에 부착시킬 것인가? 이 질문이 우리의 세 연구원에게는 결정적인 질문이었다. 이는 미래에 만의 가리비 군락 수가 증가할 것인지에 대한, 어부들의 미래에 대한,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몇 해가 지나고 상황이 변했다. 반복된 실험은 재앙으로 끝났다.

 

연구원은 그물을 쳤으나, 수집기는 절망적일 정도로 비어 있었다. 원칙적으로 유생은 부착하지만, 실제로 유생들은 수집기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처음에 성공적이었던 어려운 협상은 뒤이은 몇 해간 실패했다. 아마도 부착은 우연적인 것이었으리라! 왜 관심끌기가 효과가 없는지 설명하기 위해 적대적인 개입의 증가, 수층의 온도, 예상하지 못한 해류, 온갖 종류의 포획자들, 유행병 등의 이유가 이용되었다. 유생은 스스로를 연구원의 프로젝트에서 분리하였고, 다른 한 무리의 행위자들은 유생들을 멀리 휩쓸어갔다.

 

가리비는 반대파가 되었다. 찬성하던 유생들은 그것들이 대표한다고 생각하던 다른 유생들에 의해 배신당했다. 이 상황은 노동조합의 협상에 조용한 분노로 반응했던 일반 조합원의 상황과 동일하다. 대표성이 문제에 봉착했던 것이다.

 

첫 해의 실험 동안 스스로 부착했던 유생의 대표성에 관한 논쟁은 어부에 대한 다른 논쟁과 결합된다. 어부들이 선출한 대표는 일말의 유보나 의심 없이 생브리외 만의 군락 수를 증대시키기 위한 장기적 프로그램에 등록되었다. 최초의 부착 이후의 2년 동안, 수집기에 '관심을 보인' 유생에서 부화한 가리비들이 만의 바닥에 콘크리트 벨트로 보호된 지역에서 다시 군집을 이루었다. 이 가리비들은 기적적인 어획량의 유혹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던 한 떼거리의 어부들에 의해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파렴치하게도 어획되고 말았다. 이들은 야만적으로,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대변인과 그들의 장기적 계획을 부정했다. 케인스의 유명한 격언처럼, 그들은 가설적인 미래의 보상보다 그들의 즉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가리비와 어부의 조용한 반란에 직면하여 세 연구원의 전략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부착은 의무통과점인가? 과학자 동료조차 회의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세 연구원은 이제 그들의 연구소 소장과 실험에 자금을 조달하기로 동의했던 기관의 의심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처해야만 했다.

 

신뢰의 상태만이 아니라, 관련된 행위자들의 정체성과 특색도 마찬가지로 논쟁과 함께 동요했다. (어부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리비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자연과 사회가 하나가 되어 같은 움직임 속에서 변형되었던 것이다.

 

분석의 틀을 변화시키지 않음으로써 논쟁의 종결 메커니즘이 이제는 좀 더 쉽게 이해된다. 종결은 대변인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간주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일반적으로 꽤 긴 시간이 걸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일련의 협상 후에야 얻어진다. 예를 들어 가리비가 처음 부착한 유생을 따르지 않고 어부가 그들 대표의 공약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세 연구원은 가리비와 유생에 쓰였던 관심끌기 장치를 변형하고, 어부들이 다른 매개와 다른 대표자를 선택하도록 교육하며 정보를 제공하는 거대한 캠페인을 시작할 수 있다. 이야기의 이 지점에서, 이런 분석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이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결론

이 연구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서론에서 제시된 세 개의 원칙을 지켰다.

 

1) 첫 번째 원칙(일반화된 불가지론)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세 연구원이 그들이 정교화하고 구체화한 자연적 사실과 사회적 정황을 어떻게 간주하는지 보았다. 우리는 사회에 대한 그들의 의심과 창조될 수 있었던 동맹들에 대해 충실하게 보고했다. 그에 따라 우리는 가리비의 특성에 대한 불확실성을 다룰 수 있었고, 어부들과 그들의 이익과 손해에 관한 불확실서오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행위자들이 취한 입장을 평가하거나, 그들을 특정한 '사회학적' 해석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체계적으로 피했다. 이로 인해 최근의 과학사회학 연구에서 발견된 첫 난점에 대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세 연구원의 유생 부착에 대한 믿음이나, 동일한 장기 이해관계를 가진 동질의 어부 그룹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결코 판단력의 실수나 착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부착이나 이러한 사회 그룹의 존재나 부재는 우리가 따라온 과정의 끝에서만 결정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 이를 드러내는 것은 세 연구원의 몫이다.

 

2) 두 번째 원칙(일반화된 대칭성)은 우리가 자연과 관련된 논쟁과 사회와 관련된 논쟁을 연구하기 위해 분석의 틀을 바꾸지 않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요건을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문제제기, 관심끌기, 등록하기, 동원하기 그리고 불일치(논쟁-배반)와 가은 용어들은 어부, 가리비 그리고 과학자 동료에게도 동일하게 쓰였다. 이 용어들은 차별 없이 모든 행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이 과정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서론에서 언급된 두 번째 난점을 피했다. 우리는 가리비나 어부에 관한 토론이 왜 일어나고 종결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요인, 규범 또는 특별한 제도적, 조직적인 배치를 사용하지 않았다. 만인에게 가리비가 부착한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어부와의 공모만큼이나 가리비와의 공모도 필요했다. 이 세 부분의 행위자들은 모두 동등하게 중요했다. 단 한 순간도 논쟁의 발달과 종결의 설명을 위해서 사회를 힘의 균형이나 일련의 조건으로 환원하지 않았다.

 

3) 세 번째 원칙(자유로운 연합)은 세 연구원에 의해 형성된 동맹들에 영향을 미친 모든 변동들을, 동맹들에 정해진 역할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뒤따를 수 있게 했다. 가리비나 어부의 정체성과 그들의 대변인의 대표성(부착한 유생, 전문적인 대표단 등)만이 동요를 겪은 것이 아니라, 이들 상이한 실체들 간의 예측할 수 없는 간계 또한 그들이 변하는 대로 그대로 두었다. 이는 어떠한 선험적인 범주나 관계도 설명에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가리비의 부착이 어부들에게 영향을 주리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 관계들은 오직 사건 이후에만 가시적으로 드러났고 설득력을 가졌던 것들이다.

 

이렇게 세 번째 난점은 어떤 문제도 없이 해결되었다. 여기서 묘사된 이야기에서는, 세 연구원이 중심이 되기는 했지만, 스스로를 명백하게 드러내지 않는 행위자는 그 누구도 소개되지 않았고 개입한 실체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고정된 정의도 강요되지 않았다.

 

분석에서 높은 수준의 관용이라고 판단될 만한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무질서는 아니었다. 연구된 행위자들은 분명히 여러 가지 종류의 불확실성에 직면했다. 여기서 그들에게 제시된 상황은 과학사회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상황보다 훨씬 덜 편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그들이 부닥친 어려움에 알맞은 것임을 입증했다. 그들은 오직 어떤 장소와 특정 시간에서만 안정적인 동맹을 만들기 위해, 실체들을 정의하고 연합하며 끊임없이 사회와 자연을 연구했던 것이다.

 

사회를 자연만큼이나 불확실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방법론적 선택이 번역의 용어에 의해 꽤 충실히 설명되는 이례적인 실재를 드러낸다.

 

먼저 번역의 개념은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치환과 변형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목적과 이익, 손해의 치환, 장치, 인간, 유생과 기입의 치환 등. 치환은 모든 단계에서 일어나나. 어떤 것은 다른 것들보다 더 전략적인 역할을 한다. 문제제기 단게에서의 치환은 어부들에게 개인의 단기적 이해를 쫓는 대신 연구원의 연구를 따르기 위해 그들의 우선적인 문제와 계획의 초점을 바꿀 것을 권유했다. 관심끌기 단계에서 치환은 해저로 떨어지거나 해류에 떠밀리는 유생이 그물에 걸릴 때 이루어졌다. 상호 양보를 통해 동의가 얻어지는 등록하기 단계 동안의 치환은 유생을 더 효율적으로 포획하기 위해 새로운 위치로 옮기고, 유생 또한 연구원을 유생들의 영역으로 유인하는 일이었다. 

 

생브리외 만의 어부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던 과학자 동료들은 그들의 대변인이라 주장하는 세 연구원을 지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외관과 상태를 바꾼 후에 브레스트 회의로 옮겨졌다. 그리고 결국, 최종 단계의 치환은 불일치의 치환으로, 어부는 방벽에 잠입하고 연구원을 따르기를 거절하면서 가리비 보호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가리비와 유생은 그들을 부착시킬 용도였던 그물을 피했다. 일련의 예측할 수 없는 치환에 힘입어, 이 모든 과정은 모든 행위자들을 세 연구원과 그들의 개발 계획을 지나쳐가도록 이끌어 여러 가지 변태와 변형의 결과를 낳게 한 번역이었다고 묘사될 수 있다.

 

번역하는 것은 치환하는 것이다. 세 명의 지치지 않는 연구원은 그들의 동맹을 치환시켜 브레스트와 그들의 연구실을 지나쳐 가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번역하는 것은 또한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과 원하는 것, 왜 그들이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합하는지를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대변인으로 세우는 것이다. 과정의 끝에서는, 만약 과정이 성공적이었다면, 오직 일치하여 말하는 목소리만이 들릴 것이다.

 

세 연구원은 가리비, 어부 그리고 과학자 공동체를 대신하여 이야기한다. 처음에 이 세 가지 우주는 분리되어 있었고, 서로 의사소통할 어떤 방법도 갖고 있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확실성의 담론이 그들을 통합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의미가 명료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 맺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된 다양한 종류의 치환과 변형, 협상, 그리고 여기에 수반된 조정이 없었다면 이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리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메커니즘과 그 결과를 명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번역이라는 단어를 쓴다. 세 연구원이 어부, 가리비 그리고 과학자 공동체를 번역했다고 말이다.

 

번역은 결과이기 이전에 과정이다. 실제로는 결코 이 논문에서처럼 명료하지 않은 계기들에 대해 우리가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각각은 정당한 대변자의 임명으로 끝나는 협상의 진행을 표시한다. 이 사례 연구에서 대변자는 가리비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말했고 탄핵되지 않았다. 단지 단순한 추측이었던 문제제기가 동원하기로 변형되었다. 불일치는 이전 단계에서 획득한 것의 일부에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에 상이한 역할을 하며, 여기에서 치환과 대변자는 도전되거나 거부된다. 관련된 행위자들은 이야기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도, 그들의 의견으로는 전심으로 참여했던 느린 변화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자여, 그대는 반역자다"라는 경구가 말하듯이, 번역에서 반역까지는 한 걸음 차이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행해지는 것이 이 한 걸음이다. 새로운 치환이 이전 치환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이것이 행위자들에게 강요되었던 의무통과점에서 행위자들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든다. 새로운 대변인은 이전 대변자의 대표성을 부인한다고 전해진다. 번역은 계속되지만 평형은 변경된다. 세 명의 연구원 겸 대변인이 결국 비난받으며 끝난 이야기가 이런 경우이다. 그와 동시에 사회적, 자연적 실재의 묘사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번역은 사회적, 자연적 세계들이 점진적으로 구체화되는 메커니즘이다. 결과어떤 실체들이 다른 실체들을 통제하는 상황이다. 사회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권력관계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행위자들이 정의되고 연합하며 동시에 그들의 동맹에 대해서 충실하게 남도록 의무를 지우는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다. 

 

번역의 레퍼토리는 갖가지 사회적, 자연적 실체들을 같이 끊임없이 혼합하는 복잡한 과정의 대칭적이고 관용적인 묘사를 제공하기 위해서만 계획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소수가 그들이 동원한 사회적, 자연적 세계들의 수많은 조용한 행위자들을 대변하고 대표할 권리를 어떻게 얻는지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