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의미의 귀환
정보 피로, 정보 과잉, 정보 압력은 이전에도 모두 있었던 것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쇄시대와 기계시대로 들어갔던 엘리자베스시대 사람들만큼이나 전기시대에 깊이 들어와 있다. 또한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 상반된 형태의 사회와 경험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들이 느꼈을 법한 혼란과 망설임을 경험하고 있다.
반세기가 더 흐른 지금 우리는 연결의 규모가 얼마나 방대한지 도 그 영향이 얼마나 강한지 목도하기 시작했다.
전신이 막 나왔던 때처럼 우리는 다시 한 번 공간과 시간의 소멸을 이야기한다. 매클루언에게 이는 지구적 의식, '지구적 앎'이 생겨나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를 아우를 정도로 우리의 중추신경계를 확장하고 있으며, 우리가 사는 행성에 관한 한 공간과 시간을 폐기했다. 우리는 인간 확장의 마지막 단계, 즉 의식의 기술적 모사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여기서 앎의 창조적 과정은 집합적으로 그리고 공동으로 전체 인간 사회로 확장될 것이다."
아, 대지여, 네 앞을 달려 바다 밑을 지나는 이 속삭임은 무엇인가?
모든 나라가 교감하는 것인가? 지구에는 오직 하나의 마음만 있는 것인가?
무선통신의 확산으로 인해 곧 세계가 연결되자 새로운 지구적 유기체의 탄생이라는 낭만적인 상상이 생겨났다. 심지어 19세기의 신비주의자와 신학자들조차도, 서로 교감하고 있는 수백만 명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공유된 정신 혹은 집합적 의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창조물을 지속적인 진화의 자연적인 산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다원주의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인간이 특별한 운명을 실현하기 위한 길이라고 보았다.
프랑스 철학자 에두아르 르루아는 1928년 이렇게 썼다. "(인간을) 더 낮은 수준에 있는 자연 위에,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드는 자리에 두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떻게? 바로 진화사에서 절정을 이루는 "돌연변이"인 "인지권", 즉 정신의 권역을 창조하는 것이다. 르루아의 친구이자 예수회 철학자인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은 지구의 "새로운 피부"라고 말한 인지권을 널리 알리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치 사지와 신경계, 지각 중추, 기억을 가진 거대한 몸이 태어나는 과정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바로 그 위대한 존재의 신체가 성찰하는 존재 안에서 생겨난 열망을 실현하기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진화하고 있는 전체에 대한 사명감과 함께 상호 의존성이라는 새롭게 얻은 의식에 의해 열망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웰스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 두뇌는 네트워크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두뇌를 만드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다. 심지어 지식의 분배도 아니다. 바로 상호연결성이 두뇌를 만든다. 웰스가 말한 '네트워크'라는 단어는 당대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원래의 물리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로 엮이는 줄이나 선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의미가 거의 사라졌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네트워크는 추상적인 존재이며, 네트워크의 영역은 정보이다.
정보이론은 정보에서 의미를 가차 없이 제거함으로써 탄생했다. 정보에 가치와 목적을 부여하는 의미를 빼버림으로써 정보이론이 탄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섀넌은 그냥 의미가 "공학 문제와 무관하다"라고 밝혔다. 인간의 심리는 잊어버리고, 주관성은 버려버리는 것이다.
섀넌은 메시지가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즉 분명한 물리적 혹은 개념적 실체를 가진 일부 체계를 가리키거나 그것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초창기 인공두뇌학 학회에서 하인츠 폰 푀르스터는 오직 인간의 두뇌에서 이해가 시작될 때, "그때" 정보가 탄생하는 것이지 신호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정보이론이 단지 "신호음"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 불평했다. 의미론적 보완물과 함께 정보이론의 확장을 꿈구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의미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도서관 사서들은 책에서 의미를 찾는 헛되고 미신 같은 습관을 거부한다. 책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꿈이나 혼란스러운 손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인식론자들은 신호음과 신호가 아니라 지식에 관심을 두었다. 점과 선 혹은 연기 혹은 전기 임펄스에 대한 철학을 하느라 애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호를 받아 정보로 바꾸려는 인간 혹은 "인지적 중개자"가 필요하다. 프레드 드레츠키는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고, 정보는 받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다" 라고 말한다.
어쨌든 "우리는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며, 의미 부여가 없으면 자극은 정보로는 쓸모가 없다"라는 것이 인식론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드레츠키는 정보와 의미를 구별함으로써 철학자는 자유로워진다고 주장한다. 공학자들이 제시한 것은 기회와 과제였다. 말하자면 의미가 어떻게 진화하는지, 생명이 정보를 처리하고 코딩하면서 어떻게 해석과 믿음 그리고 지식으로 나아가는지 이해하는 일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진술에도 올바른 진술만큼 (적어도 정보량 측면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이론을 누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이론이었다. 비관론자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를 최악이라 할 만한 영혼 없는 인터넷의 전조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철학자 장 피에르 뒤피는 "우리가 하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면 할수록 더 '지옥 같은' 세상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신학적 의미, 즉 '은총'이 없는 곳이다. 가치가 없고, 불필요하며, 놀랍고, 예측할 수 없는 곳이다. 여기서 역설이 작용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척하지만 갈수록 의미가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은총이 없는 지옥 같은 세상이 온 것일까? 정보 과잉과 탐식, 왜곡된 거울과 위조된 텍스트, 상스러운 블로그, 익명의 증오, 진부한 메시징의 세계가 온 것일까? 끊임없는 수다. 진실을 몰아내는 거짓.
내가 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한때 완벽한 언어는 단어와 의미 사이에 정확한 일대일 대응이 이뤄져야 한다고 여겨졌다. 모호성, 애매성,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신이 말하거나 쓰는 모든 문장은 완벽해야 하며, 따라서 기적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과 함께하든 그렇지 않든 완벽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라이프니츠는 자연어가 완벽할 수 없다면 적어도 계산, 즉 엄밀하게 지정된 기호들의 언어인 계산은 완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의 생각은 원형으로 간주할 수 있는 소수의 생각들로 완전히 분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생각들은 말하자면 기계적으로 조합하고 분해할 수 있다. "일단 이렇게 되면 누가 그 글자들을 사용하든간에 절대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적어도 가장 단순한 검증을 통해 실수를 즉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꿈을 박살낸 것은 괴델이었다.
오히려 완벽함은 언어의 본질과는 반대된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은 정보이론 덕분이었다. 파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글이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그저 한 줄 잉크 자국일 뿐이고, 소리는 음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봐야만 한다.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창조주가 없는 현대에 언어는 분명한 확실성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의미 있는 질서라는 안도감을 주는 환상이 없기에 우리는 무의미한 무질서의 얼굴을 직시하는 수밖에 없다. 의미가 확실하다는 느낌이 없기 대문에 우리는 글이 '의미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들에 압도당하게 된다.
무한한 가능성은 나븐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무의미한 무질서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도전해야 할 것이다. 언어는 사물과 감각과 조합의 무한한 세계를 유한한 공간에 나타낸다. 세상은 언제나 고정된것을 덧없는 것과 섞으면서 변화하며, 우리는 언어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판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순간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모든 사람의 언어는 다르다. 우리는 압도당할 수도 있고, 아니면 대담해질 수도 있다.
이제 갈수록 어휘는 네트워크 안에 들어간다. 어휘는 변화하면서도 네트워크에 보존되며, 접근과 검색이 가능해졌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식은 네트워크 속으로, 클라우드 속으로 스며든다. 모든 곳에서 진실은 거짓과 어깨를 맞대고 있다.
트위터는 전신 같은 신호 보내기일까? 선시일가? 화장실 벽에 휘갈겨진 농담일까? 나무에 새겨진 사랑 고백일가? 그저 트위터는 의사소통이며, 의사소통은 인간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두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책을 소장하기 위해 세워진 의회도서관은 트윗 모두를 역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트윗은 품위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잉여적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트윗은 인간의 의사소통이다.
아울러 네트워크는 지금껏 어떤 개인도 알 수 없었던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맥케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미치지만, 정신을 차릴 때는 한 명씩 천천히 차린다." 대중은 우리가 익히 오랫동안 알고 있던 징후들과 함께 너무나 급작스럽게 군중으로 돌변한다. 열광, 끓어오름, 폭도, 돌발성 집단행동, 십자군, 집단 히스테리, 군중심리, 무조건적 복종, 순종, 집단적 사고 같은 징후 말이다. 이들 징후는 모두 네트워크 효과로 증폭될 가능성이 있으며, 정보 폭포라는 주제하에 연구되고 있다.
집단적인 판단은 매력적인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집단적인 자기기만과 집단적인 악은 이미 대재앙을 가져온 전력이 있다. 하지만 네트워크 속의 지식은 복제와 흉내 내기에 토대를 둔 집단적인 의사 결정과 다르다. 이 지식은 덧붙여짐으로써 발전하고, 기발함과 예외도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를 인식하고 접근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2008년 구글은 '독감'이라는 단어의 인터넷 검색 데이터를 토대로 지역별 독감 추세를 알리는 조기 경보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질병통제예방센터보다 일주일 빠르게 독감 발생 사실을 파악했다고 한다. 이런 방법은 초창기 인터넷 검색법도 집단적인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구글은 사이버공간은 일종의 자기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자기 지식은 한 페이지에서 다른 페이지로 이어지는 링크에 내재해 있으며, 검색엔진이 이 지식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브린과 페이지는 다른 과학자들이 전에 했던 것처럼 인터넷을 노드와 링크를 가진 그래프로 시각화했다. 1998년 초 무렵 거의 20억 개의 링크로 연결된 1억 5,000만 개의 노드가 있었다.
각 링크는 가치(즉, 추천도)를 표현했다. 아울러 모든 링크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가치를 추산하는 재귀적 방법을 발명한다. 여기서 페이지의 순위는 유입되는 링크의 가치에 좌우되고, 다시 링크의 가치는 함유한 페이지의 순위에 좌우된다. 이들은 재귀적 방법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발행했다.
더불어 이 모든 네트워크를 포괄하는 네트워크의 부상은 거대 시스템 안에서 이뤄지는 상호연결성에 대한 위상기하학의 이론적 연구로 이어진다. 네트워크 과학은 1998년 <네이처>에 던컨 와츠와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논문이 게재되면서 명확해졌다. 강렬한 문구와 깔끔한 결과 그리고 놀랍도록 다양한 응용 범위, 이 세 가지가 결합된 논문은 화제를 일으켰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적용 된다는 점도 한몫했다. 강렬한 문구는 '좁은 세상'이었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로 같은 친구를 뒀음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세상 참 좁네요."라고 말한다. 와츠와 스트로가츠가 이야기한 좁은 세상 네트워크는 이런 의미였다.
좁은 세상 네트워크는 진실인 것처럼 보였으나, 직관에 어긋났다. 이들이 연구한 네트워크에서 노드들은 무리를 짓는 경향이 높았기 때문이다. 노드는 파벌적이다. 당신은 많은 사람을 알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여러분의 이웃, 즉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러더라도 같은 사회적 공간에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 사람들은 대개 같은 사람을 알고 있는 경향이 크다. 현실세계에서도 두뇌의 뉴런들, 전염병의 유행, 전력망, 기름 함유 암반의 균열과 채널처럼 복잡한 네트워크에서 무리 짓기는 보편적이다. 홀로 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파편화를 뜻한다. 거기서 기름은 흐르지 않고 전염병은 소멸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은 소원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노드들은 연결고리가 멀리까지 이어지거나 예외적인 수준의 연결성을 가질 수 있다. 와츠와 스트로가츠가 수학적 모형에서 발견한 것은 놀라울 만큼 적은 예외들이(설사 높은 밀도로 무리를 짓고 있는 네트워크라도 소수의 먼 연결고리들만으로) 평균적인 분리도를 거의 제로로 만들고 좁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전염병은 좁은 세상에서 훨씬 더 쉽고 빠르게 퍼지는 것으로 예측된다. 아주 적은 수의 지름길만 있어도 세상을 좁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결과는 두렵고도 너무 빤하지 않다."
사이버공간에서 거의 모든 것은 어둠 속에 존재한다. 또한 거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연결은 특히 연결이 잘되어 있는 사람이나 신뢰도가 높은 사람들 등 비교적 소수의 노드들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모든 노드가 다른 모든 노드와 가깝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네트워크는 구조를 가지며, 그 구조는 역설 위에 세워진다. 모든 것은 가갑고, 동시에 모든 것은 멀다. 사이버공간이 사람들로 들끓는 것처럼 느껴질 뿐만 아니라 외롭게도 느겨지는 이유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바벨의 도서관의 이용자이면서 사서이기도 하다. 보르헤스가 우리에게 말한다. "바벨의 도서관이 모든 책을 소장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첫 느낌은 주체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손상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보물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겼다. 모든 개인적이거나 세계적인 문제의 명확한 해결책은 도서관에 있는 육각형 진열실들 중 어딘가에 있었다. 우주는 해명되었다." 그러고는 비탄이 찾아왔다.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박제된 완벽함 안에서의 완전한 지식이 무슨 소용인가? 보르헤스는 걱정한다. "모든 것이 쓰였다는 확신은 우리를 부정하거나 유령으로 만든다." 이에 대해 존 던은 오래전에 이렇게 대답했다. "책을 찍기를 원하는 이는 책이 되기를 더 많이 원해야 한다."
도서관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도서관은 우주이다. 우리로 말하자면 모든 것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유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복도를 걸으면서 서가를 뒤지거나 재배치하고, 불협화음과 허튼소리가 모인 곳 한가운데서 의미 있는 행들을 찾고, 과거와 미래의 역사를 읽고, 우리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수집하며, 종종 거울을 힐긋 보면서, 우리는 정보의 피조물을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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