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좋아하는 책들

#05 부의 기원 큰 그림 : 설탕과 향료

2부 복잡계 경제학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경관을 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얻는 데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

 

4. 큰 그림 : 설탕과 향료

필리핀 마닐라 바로 외곽에 위치한 이 쓰레기 집적지는 어울리지 않게도 '약속의 땅'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 곳을 베르나르도 신부는 이렇게 표현한다. "여기서 원시적인 자본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수백만 페소가 매일 여기서 회전되고 있다."

경제는 어디서 오는가? 약속의 땅 경제와 같은 복잡한 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쓰레기 더미에서 마술처럼 나타나게 된 것인가? 경제의 밑바탕을 이루는 행태들, 관계들, 기구 및 제도들, 그리고 아이디어들은 어디서 나오며, 이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발전하는가? 어떤 대상의 원천에 관한, 즉 원천적인 질문들은 모든 과학에서 탁월한 역할을 한다. 

 

전통 경제학은 경제적 파이가 우선 어떻게 여기서 생겨났느냐보다는 경제적 파이가 어떻게 배분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경제 형성의 과정은 지금 우리에게 1급 수준의 과학적 수수께기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 경제학과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될 복잡계 경제학 간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가상의 설탕 섬

브루킹스 연구소 연구원들은 1995년, 사람들이 맨 처음 출발선에서부터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는지 살펴보기 위한 실험을 실시해 보기로 한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인 실리코로 경제 생명체를 유발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전통적인 미시 경제학 모델은 소비자, 생산자, 기술, 그리고 시장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거시 경제학 모델 역시 화폐, 노동 시장, 자본 시장, 정부, 그리고 중앙은행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이런 것들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초기, 즉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서 단지 기본적인 몇 가지 능력을 가진 사람들, 자연 자원이 조금 있는 환경만으로 구성된 모델을 갖고 싶었다. 그들은 경제 활동의 체인을 출발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발견하고 싶었다. 경제 시스템이 경제적 질서를 증가시키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컴퓨터상의 시뮬레이션 섬을 준비 했다. 이 컴퓨터 섬은 거대한 체스판처럼 그 위에 가로세로 각 50개씩의 격자 눈금이 그려진 완벽한 정사각형이다. 이 가상의 섬에는 오로지 단 하나의 자원인 설탕이 있다. 그리고 격자의 각 칸에는 서로 다른 양의 설탕이 쌓여 있다. 각 설탕 더미의 높이는 가장 높은 4(설탕 단위)에서 0(설탕이 전혀 없는 경우)의 범위에 있다. 모양새를 그려 보면 두 개의 산 같은 설탕 더미가 존재 하는 이 설탕 섬을 '슈거스케이프'라고 명명했다.

 

슈거스케이프는 실제 섬을 아주 단순화한 것이지만 현실 세계의 섬이 갖고 있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첫째는 물리적 공간이라는 개념이다. 즉, 동서남북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다. 둘째는 설탕이라는 에너지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땅이 차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산, 계곡, 비옥한 땅과 황무지 등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슈가스케이프에 난파된 가상의 사람들도 매우 단순화한 것이지만 실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주요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다. 가상의 사람들 각자는, 즉 행위자는 슈거스케이프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고, 코드를 통해 정보를 고속 처리한 다음 의사 결정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하나의 독립된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슈거스케이프의 각 행위자는 오로지 세 가지를 할 수 있다. 설탕을 찾고, 움직이며, 설탕을 먹는다. 그게 전부다. 음식을 찾기 위해 각 행위자는 설탕을 찾아다닐 수 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고, 그다음으로 에너지원을 향해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각 행위자는 또한 설탕을 소화할 수 있는 물질 대사 작용이라는 기능을 갖는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이 단순한 환경에서 단순한 행위자들 경제와 같은 특별한 것을 과연 창조해 낼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 행위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시각이 허용하는 한 앞을 바라본다.(대각선은 못본다)
  • 행위자는 시각의 범위 내에서 어떤 비점유 지역이 가장 많은 설탕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한다.
  • 행위자는 해당 칸으로 이동해서 설탕을 먹는다.
  • 행위자가 먹은 설탕의 양은 크레디트로 잡히지만 물질대사에 의해 소비된 설탕의 양은 그만큼 차감된다. 더 많은 설탕을 먹으면 그 양만큼은 저축 계좌에 쌓아 놓는다.
  • 행위자가 저축 계좌에 쌓아 놓은 설탕이 0 이하 수준으로 내려가면 이 행위자는 굶어 죽은 것으로 간주돼 이 게임에서 제거된다. 그렇지 않으면 미리 결정돼 있는 최대 수명만큼 살 수 있다.

이런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각 행위자들은 시각과 물질대사를 위한 일종의 유전적 소질(형질 또는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각 행위자는 앞에 위치하고 있는 칸들을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는지, 매회 얼마나 많은 설탕들을 소비하는지 설명해 주는 컴퓨터 코드, 일종의 컴퓨터 DNA가 부여되어 있다. 매우 좋은 시각을 가진 행위자는 그 앞에 놓여 있는 여섯 개까지의 칸들을 볼 수 있고, 반면시각이 나쁜 행위자는 단지 바로 앞에 놓인 한 개의 칸만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느린 물질대사를 하는 행위자는 매회 살아남기 위해서 단지 1단위 설탕을 필요로 하는 반면, 빠른 물질대사를 하는 행위자는 4단위를 필요로 한다. 각 능력은 무작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행위자들이 동일한 게 아니란 얘기다. 어떤 행위자는 시각이 나쁘지만 대단히 좋은 물질대사 기능을 갖고 있고, 반대로 시각은 좋지만 열악한 물질대사 기능을 갖는 행위자도 있다.

 

행위자들이 설탕을 먹어 치움에 따라 설탕은 곡물처럼 다시 자라난다. 그 성장 속도는 주어진 기간(시간 단위)당 1단위씩이다. 만약 4단위의 설탕을 다 먹어 없애버리면 원래 수준으로 되돌아오는데, 시간적으로 4기간이 걸리게 된다. (한정적 자원을 의미)

 

행위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방목 가축과도 같다. 오랫동안 설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더라도 행위자들은 매우 간단한 규칙만으로 그 환경에서 최대의 가치를 빨아들인다. 설탕 더미가 다시 자라나 최대 용량에 이르자마자 곧바로 방목하는 행위자의 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조직화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곧바로 볼 수 있다. 행위자들은 스스로 두 개의 집중된 부족으로 재빠르게 조직화된다. 각자 설탕 산에 거주하며 효율적으로 설탕이라는 곡물을 수확하면서 말이다.

 

부익부 원리

이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해 다양한 통계를 수집하고 기록했다. 이들이 추적했던 변수 중 하나는 행위자의 부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부의 분포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는지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 했다. 시뮬레이션 초기에 슈거스케이프는 꽤 평등한 사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분포는 크게 바뀐다. 행위자들이 두개의 설탕 산에 집결함에 따라 평균적인 부는 상승했지만 부의 분포도는 한쪽으로 크게 치우친 형태(편중된 분포)로 변화한다.

 

간단한 슈거스케이프 모델이 보여 준 부의 분포는 바로 현실 세계의 파레토 분포(80-20법칙)와 같은 종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밝혀야 한다. 왜 슈거스케이프에서조차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 지는가?

 

슈거스케이프라는 통제된 세계에서 다양한 가설들을 검증하기는 매우 쉽다. 첫째, 이것은 본성인가? 다시 말해 각 행위자의 유전적 형질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대답은 "아니오"다. 유전적 형질은 균등한 임의의 분포로 나누어졌다. 부가 만약 슈거스케이프의 유전적 형질과 상관관계가 있다면 부의 분포 또한 매우 균등해야 한다. 

 

본성이 아니면 양육 때문인가? 다시 말해, 행위자들의 태어난 환경이 원인인가? 설탕이 쌓여 있는 산꼭대기에서 태어난 행위자들은 모두 부를 다 가지고, 황무지에서 태어나는 나쁜 운을 가진 행위자들은 모두 가난하게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도 "아니오"다. 유전적 형질과 마찬가지로 행위자의 출생지 역시 완벽하게 임의적으로 주어졌다. 따라서 이것이 정말 각 행위자들의 궁극적인 경제적 위치를 결정하는 원인이라면 그 분포 또한 매우 균등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임의적인 초기 상태에서 어떻게 불균등한 부의 분포에 이르게 되었는가?

 

 대답은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다. 편중된 분포는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특성이다. 거시적인 행태는 행위자들의 집단적인 미시적 행태들로부터 출현한다. 물리적 환경, 유전적 형질, 자신들이 태어난 곳, 따라야할 규칙들, 서로 간 또는 환경과의 상호 작용, 그리고 행운 등이 결합돼 편중된 분포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똑같은 조건에서 시작했지만 처음의 조그만 우연적 행위가 게임의 흐름 과정에서 확대되면서 두 행위자 간에 매우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 이 결과는 경제학자들이 '수평적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전통 경제 이론에서는 엄격히 금지돼 있다. 전통 경제학의 균형 세계에서는 똑같은 능력, 똑같은 선호도, 태어날 때 똑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은 똑같은 수준의 부를 가지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임의로 분포된 잡음이나 오류 때문일 따름이다. 그러나 슈거스케이프라는 불균형 세계에서 수평적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다.

 

핵심은 어떤 한 지점에서의 조그만 차이(즉, 행운이나 불운 같은 것)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가 나는 길로 접어들게 한다는 점이다. 이런 조그만 차이들이 가속화되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부유한 쪽으로 가고, 다른 사람들은 넝마로 전락하는 그런 추세가 나타난다.

 

슈거스케이프라는 이 단순한 모델에서조차 가난과 불평등을 이끄는 인과 관계가 결코 간단치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난과 불평등은 매우 복잡한 요소들의 혼합된 결과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슈거스케이프는 여기서 현실 세계의 가난과 불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나 단순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델이 한 가지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있다. 가난은 이들을 착취하는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좌파적 진단, 그리고 당신이 가난하다면 당신은 멍청하거나 게으르거나 아니면 이 둘 다라고 생각하는 우파적 진단은 모두 잘못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새와 꿀벌처럼

이 모델에 요소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이른바 섹스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각 행위자에게 나이와 성별을 표시하는 표를 부여하기로 했다. 행위자가 임신이 가능한 나이에 이르고 그 행위자가 최소한 설탕 저축 계좌를 갖고 있다면 번식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매회 이 가임 행위자는 동서남북으로 한 칸 범위에 있는 이웃들을 탐색한다. 그래서 반대 성을 가진 다른 가임 행위자를 발견하면 바로 출산한다. 그 결과 출생한 아기 행위자의  DNA 는 엄마로부터 반, 아빠로 부터 반을 임의로 부여받는다. 또 이 아기 행위자는 양쪽 부모로부터 부를 상속받는데 아버지의 부 반, 어머니의 부 반을 더한 것이다. 아기 행위자는 엄마,아빠와 인접한 빈 칸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부모가 풍부한 혹은 열악한 설탕 근처에 사느냐에 따라 그 아기 역시 그곳에서 인생을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행위자들은 부를 수확하는 행위자 주변으로 분주하게 모여들었고, 가임 행위자들은 재빨리 상대방을 발견, 로맨스가 결실을 맺었다. 그러면서 다음 세 가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째, 거의 적응을 하지 못한 행위자들은 그냥 죽어 사라진 반면, 가장 적응을 잘한 행위자들은 점점 더 많은 후손을 가지게 됐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각과 물질대사 효율성의 평균치가 상승하기 시작 했다. 이 평균치가 상승함에 따라 부 역시 상승했다.

 

둘째, 출생과 사망이라는 이 새로운 역동성이 추가되면서 인구 변화가 일어났다. 섹스가 도입되기 전에는 인구가 항상 일정했고 환경이 허용하는 용량과 균형 수준을 이루었다. 그러나 섹스와 함께 풍요로움과 궁핍이라는 사이클이 일어났다. 잘 적응한 행위자들은 저축 계좌를 늘리고 다수의 후손들을 갖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환경적인 수용 용량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행위자들이 설탕 비축 분을 가지고 과잉 방목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근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 기근은 인구 감소를 초래했다. 그 결과 환경은 재생되었고 사이클은 또다시 반복됐다.

 

셋째, 부유한 행위자와 가난한 행위자 간 격차가 훨씬 더 벌어졌다. 섹스를 추가 하니 부의 불평등이 더 가속화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등장

지금까지는 순수한 수렵, 채집민이었다. 즉, 자신들이 발견한 설탕을 수집하고 소비했다. 그러나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이 인공적인 세계에 현실적인 요소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설탕 외에 향로라는 두 번째 상품을 도입했다. 이 모델에서 행위자들의 물질대사 기능과 관련하여 조금 변경을 하는데, 각 행위자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설탕뿐 아니라 향로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어떤 행위자들은 설탕을 많이 필요로 하는 반면 향료는 조금만 필요로 하고, 다른 행위자들은 설탕보다는 향료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이것은 DNA로 사전에 결정된다. 이런 수요의 차이는 행위자들의 선호와 같은 것이다. 또 전처럼 각 행위자들은 자신들이 소비하지 않는 설탕이나 향료는 저축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위자들이 서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전형적인 전통 경제학 모델 처럼 시장이나 경매인에 대한 가정은 없었다. 대신 개인들 간의 물물 교환이 허용됐다. 

 

다시 스위치를 눌렀다. 행위자들은 분주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곧 활발한 비즈니스가 시작됐다. 거래의 패턴은 많은 측면에서 전통 경제학이 예측했던 것과 매우 비슷했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사회를 더 부유하게 한다는 점을 알았다.한 행위자는 설탕을 가지고 있지만 향료 부족으로 거의 죽음에 가까운 상황이고 다른 한 행위자는 그 반대 상황이다. 만약 거래가 금지되면 둘 다 죽는다. 물론 거래가 허용되면 둘 다 산다. 이렇게 거래는 환경 수용능력을 증가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므로 모든 행위자에게 이익이 된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거래 네트워크의 발전을 추적했다. 추적 결과 지역별로 거래 네트워크상의 집적 효과가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지역에 있는 행위자들과 더 빈번하게 거래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거래의 이익은 자기 강화적이기 때문에 거래가 거래를 낳는다.

 

집중된 거래 네트워크 집적지들이 출현했다. 마치 지역별 장터 처럼 말이다. 게다가 향료라는 두 번째 상품의 도입은 행위자들의 움직임을 보다 복잡하게 만들었다. 행위자들은 더 이상 두 개의 설탕 산 위에 부족을 형성하며 모여 살 수 없게 됐다. 이들도 밖으로 나가 향료와 거래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지역과 인구의 역동성이 결합되면서 복잡한 거래 경로가 생겼다. 행위자들이 설탕과 향료가 집중된 산들을 오가면서 고대 실크로드와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이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각 행위자들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일련의 가격 범위에서 기꺼이 매도하거나 매입하는 설탕 또는 향료가 어느 정도인지 측정한다. 모든 행위자들을 통틀어 이 수치들을 합산하면 각 상품별로 공급,수요 곡선이 만들어 진다. 이들은 자신들의 모델에서 공급과 수요에 관해 그 무엇도 명시적으로 제시한 것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이 공급과 수요 곡선들은 행위자들의 단순한 상호 작용에서 나온, 순전히 밑바닥에서부터 형성된 현상으로 나타났다.

 

 

균형의 실종

 경제가 순간적으로 근사한 X자 형태의 공급,수요 곡선을 만들어 냈지만 거래가 이루어진 실제의 가격과 수량은 결코 이론적으로 예측된 균형점이 아니었다. 균형에서 벗어난 가격의 변동 폭은 모델을 아무리 길게 돌려보아도 그대로였다. 슈거스케이프에서 가격은 어떤 끌어당기는 것, 즉 유인체 주변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지만 실제로 균형에 안착하는 일은 결코 없다.

 

또 시스템이 균형으로 향하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거래가 일어난다는 점도 발견했다. 균형 가격에 대한 전통적인 예측에 따르면 자연스레 도출되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급과 수요가 균형으로 이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거래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전통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는 상품 시장, 금융 시장 모두에서 거래량이 이론에서 예측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똑같은 의문이 슈거스케이프에서도 반복되는데, 전통 이론에서 예측된 것보다 가격 변동성이나 거래량이 더 크다. 

 

슈거스케이프에서 전체 행위자들을 조정하는 메커니즘은 없다. 행위자들은 물리적 거리에 의해 분리되어 있고, 따라서 움직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순히 이웃에 있는 행위자들과 거래를 할 뿐 전체적인 균형을 찾아 나서는 일은 없다. 따라서 거래의 새로운 기회가 생기는 경우는 행위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우연히 다른 행위자를 만날 때다. 그결과 거래량도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전통 경제학의 또 다른 핵심적인 예측은 일물일가 법칙이다. 상품은 균형 가격에서만 거래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슈거스케이프에서는 특정 시점에 가격 변동의 폭이 넓다. 모든 일이 단 한 번에 일어나는 균형 모델과 달리 슈거스케이프에서는 시간에 따라 일들이 전개되고 있고 또 거래 상대방을 찾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역동성이란 경제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화를 행위자들이 결코 쫓아갈 수 없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가격은 이론에서 생각하듯 결코 완전하게 균형에 이르지 못한다.

 

전통 경제학의 또 다른 기본적인 원칙은 파레토 최적이다. 그러나 슈거스케이프 시장은 파레토 최적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 작동한다. 모든 사람들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지만 아직 성사되지 못한 그런 거래가 항상 있다. 이 역시 행위자들의 거래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약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서쪽 구석에 있는 행위자 A는 북동쪽 구석에 있는 행위자 B가 큰 거래 파트너일 수 있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 더구나 설사 이를 알았다고 해도 그들이 서로 만나기 위해 가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데다 그때쯤에는 가격이 또 변해 있을지 모른다.

 

현실 세계에서 대부분의 거래는 슈거스케이프와 더 닮았다. 다른 말로 하면 거래가 두 당사자 간에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쌍방간 거래에서는 가격의 범위가 보다 넓긴 하지만 훨씬 효율적이다. 전통 경제학에서 거래가 경매 시장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 유일한 이유는 그런 가정이 있어야만 수학적으로 균형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래가 도입되자 모두가 더 부유하게 되었지만 빈부의 격차는 더욱 확대됐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에 따르면 부의 편중된 분포 정도가 현실 세계 경제의 모습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계층 구조의 진화

슈거스케이프 경제는 개인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경영자나 노동자, 또는 공급자, 중간 거래자, 그리고 소매업자 등과 같은 계층은 없다. 그러나 계층은 현실 세계 경제에서는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다. 그래서 행위자들의 행태에 한 가지 더 추가적인, 간단한 변화를 주었다.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슈거스케이프에서 차용자가 될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가지기 위해서다. 엡스타인과 액스텔은 다음과 같은 규칙을 도입했다. 어떤 행위자가 너무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거나 양육에 쓰고도 남을 정도의 저축이 있다면 그러한 행위자는 대여자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자식을 가지기에는 지금의 저축이 불충분하지만 설탕과 향료 소득이 지속 가능하다면 이 행위자는 차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화를 위해 이자율과 대출 기간을 고정했고 채무 불이행에 대한 기본적인 조치도 만들었다.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를 통해 단순히 상당한 차용과 대출이 일어났다는 점이 아니라 복잡하고 계층적인 자본 시장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차용자와 대여자의 관계를 추적해 보니 어떤 행위자들은 차용자이면서 동시에 대여자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들은 사실상 중간 거래자들이다. 슈거스케이프에서 은행이 출현한 것이다!

 

어떤 가상 실험에서는 계층 구조가 5단계로 늘었다. 이 가상 실험에서 단순히 은행이 출현한 것뿐만 아니라 제도권 투자자들, 투자 은행, 상업 은행, 그리고 소매 은행들도 출현했다.

 

이런 대규모 거시적 패턴들은 국지적으로 각종 미시적 가정들이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을 함으로써 밑에서 부터 분출됐다.

 

 

인 실리코 경제

엡스타인도, 액스텔도 슈거스케이프가 그 자체로 모든 경제 이론을 설명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 자신들의 모델이 '부의 기원/원천'에 대한 질문에 완전한 답을 제시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슈거스케이프는 대응 원리에 따라 우리에게 흥미로운 새로운 방향들을 제시하고 있다. 공급과 수요 법칙은 현실 세계에서 그런 것처럼 비슷하게 작동했고, 거래를 통해 상당한 이익을 거둘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은 슈거스케이프가 전통 경제학에서 발견된 주요한 예외적인 현상들도 일부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일물일가 법칙의 위반, 수평적 불평등의 존재, 그리고 전통 경제학에서 예측하는 것보다 더 큰 가격 변동성과 거래량 등이 그것이다.

 

슈거스케이프는 균형 상태로 갈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대신 부족, 장터, 거래 경로, 자본 시장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해 복잡한 질서, 구조, 그리고 다양성 등을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들 중에 사전에 기획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은 시스템에 부여한 단순한 출발 규칙에서 시작해 아래서부터 형성, 출현했다.

 

 

복잡계 경제학의 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