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여긴다.
5.1 순환적 인과성
우리는 할 수 있을 때마다 원인과 결과에 따라 사물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감정과 생각 간의 인과관계가 그렇게 단순한 경우는 드물다.
화와 일 두 행위기구는 한꺼번에 두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단일한 종합 속에 결합된 상태를 이룬다.
A는 B를 야기한다. "존은 일에 지친다고 느꼈기 때문에 집에 가고 싶어 했다."
B는 A를 야기한다. "존은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일에 지친다고 느꼈다."
존은 일을 하기 싫어 시작했고 집에 가고 싶어 하기도 시작했기 때문에 '앞선 원인'이 전혀 필요 없다. 그리하여 순환적 인과성의 고리가 발생하고, 거기에서 두 목표가 결합하여 형성된 강압을 물리칠 수 없을 때까지 각 목표는 다른 목표로부터 지지를 얻는다. 우리는 항상 인과적인 고리들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자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원금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것도 어려움의 실제 원인이 아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원금과 이자에 관련된 순환의 관계에 당신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너무 복잡하게 꼬인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우리는 '사태를 똑바로 펼침(사태를 해결함)'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항상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인과적' 설명들을 모색함으로써 그 상황을 통과할 수 있는 '통로'를 찾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하는 데는 당연한 이유가 있다.
고리들을 포함하는 무수히 많은 유형의 네트워크들이 있다. 그러나 아무런 고리도 포함하지 않은 모든 네트워크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 네트워크들 각각은 단순한 형태의 한 개의 고리를 갖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동일한 유형의 추론을 적용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사태를 똑바로 펼침'이 의미하는 바다. 그러나 그러한 통로를 열기 위해 다른 방향들로 내닫는 중요한 상호작용과 의존관계를 무시해야만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5.2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무엇이 우주를 야기했는가, 그리고 왜?
인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믿음들이 참된지 당신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무엇이 선한지 당신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겉보기에 각기 다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다 대답이 불가능하다는 하나의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
이 질문들은 모두 다 순환적이다! 당신은 최종적인 원인을 결코 찾을 수 없다.
이런 질문들은 계속해서 또다시 반복해야만 히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
이럴 때 어른들은 "그냥 그런거야?!" 라고 답함으로써 대처하는 법을 배운다.
이는 나름대로 자기제어의 한 형식이다. 어른들이 끝없는 질문을 받아들이지 않고 적당한 지점에서 뭄추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한 가지 방법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 수치스럽거나 금기를 어기는 것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질문들에 관련해서 놀라움이나 신비스러움을 덧붙이는 것이다. 두 방법 모두 그러한 질문들이 담고 있는 주제가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하도록 한다. 합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한 일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데는 사회적인 양식이나 관행이 작동한다. 거기에서는 묻고 따지지 않는 법이다.
모든 인간 문화는 법, 종교, 철학에 관련된 제도들을 발전시켜 왔다. 이 제도들은 물고 물리는 질문들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들을 채택했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권위 제도를 확립했다.
그 특별한 신념의 제도들은 순환적인 고리에 얽매여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방어하는 기능을 한다.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에 마음을 쏟아 노력할 때만 더욱 생산적인 삶을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생각을 일으킨 근원으로 계속 되돌아간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순환적인 생각이 근원으로 되돌아갈 때마다 더 심오하고 더 강한 관념들을 낳음으로써 성장으로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바람직한 일이 수반된다. 우리는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의 체계들이 다른 마음에 뿌리 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언어, 과학, 철학이 각각 단독적인 마음의 도덕성이 지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개인이 어떤 낙원에 갈 것으로 정해져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종교들은 기묘하게 옳다. 그 종교들은 오로지 자신만의 낯선 영혼에게 사후의 삶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표를 어떻게든 성취하고 있다.
5.3 원격 조정 하는 자아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했는데도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든 어떤 대답을 제시한다.
무엇이 두뇌를 제어하는가? 마음이
무엇이 마음을 제어하는가? 자아가
무엇이 자아를 제어하는가? 그 자신이
이 개념은 당신 안에 당신이 하는 일을 해내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한다. 이는이른바 '소형인간'이라 일컫는 문제를 야기하며 역설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 내부의 자아, 즉 소형인간은 자신이 보고 있는 영상의 내용을 자신 속에 투영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상이 자기 자신 내부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단독의 중심적인 자아라는 생각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아무런 부분도 갖지 않는 것은 우리가 설명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그 어떤 단편들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누군가, 즉 우리의 자아에 의해 수행된다는 기묘한 생각을 왜 그렇게도 자주 품게 되는 걸까? 그것은 우리 마음의 많은 영역이 언어적인 부분으로부터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5.4 인격적 정체성
우리는 왜 자기 내부의 중심 자아라는 역설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일까? 그것은 이 이미지가 실생활의 많은 영역에서 제법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 절차들은 왜 그렇게도 자주 '의식의 흐름' 속에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계속해서 정신 절차를 잘 통제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단순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이 우리 자신들을 개체로 보는 데 도움이 되는 강력한 이유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지녔다는 것을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살마도 다른 신념, 다른 계획, 다른 기질을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음을 배워야 한다.
단일 자아의 전설은 이를 묻는 우리의 물음을 연구의 목표에서 벗어나게 할 뿐이다.
5.5 유행과 양식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는 지상의 삶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좋아할까?
"예술을 위한 예술"
"나는 그것이 미학적으로 만족을 준다는 것을 알아."
"나는 그것이 더 좋아."
"굳이 그걸 설명해야 돼?"
왜 우리는 이같이 애매하면서도 저항적인 단언을 하면서 그 속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할까?
우리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도 없지만 크게 영향을 미치는 선택을 할 때 실용적인 이유들을 종종 마련해서 활용한다.
프레드킨의 역설 : 두 가지 대안이 똑같이 매력적일수록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그와 동일하게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가 덜 중요해질 뿐이라는 것은 상관없이.
'취향'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들이 많은 경우에 우리의 생각 아래에 깔려 있는 형식들을 활용하고자 하는 전략을 공유한다는 것일 뿐이다. 언제 우리는 논리적인 추론을 벗어나 양식에 의거한 규칙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가?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은 '미학적인' 선택을 했을 때 실용성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이유와 연결되어 있지 싶다.
우리가 때때로 "꼭 예술 같다"라고 하면서 느끼는 그 묘하게 머릿속을 떠도는 죄의식 같은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생각을 너무 무모하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되새기는 징표일 것이다.
5.6 개성
작가가 인물들을 그토록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굳이 언급하지 않고 남겨놓은 아주 많은 일들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지식'이라 부루는 것
적개심은 방어본능을 일으킨다. 좌절감은 공격성을 솟구치게 한다.
우리는 또한 개인이 특수한 성격적인 자질과 개성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제인은 깔끔하다. 메리는 수줍음을 잘 탄다. 그레이스는 똑똑하다.
찰스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아. 그건 찰스의 행동 방식이 아니야.
왜 이와 같은 개성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까?
"무엇이 인물 묘사를 그토록 용이하게 하는가?"
백만 개의 행위기구들로 된 하나의 체계가 간단히 몇 마디 낱말들로 기술될 수 있다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선별성
양식
예측가능성
자기 신뢰
우리는 자신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머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어떻게 나에 대한 신뢰가 가능할까? 이를 성취하는 한 가지 방법은 개성의 측면에서나 자신을 생각하고, 그 특성에 의거한 자아 이미지에 따라 행동하는 훈련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인격이란 여전히 한 사람의 표면에 불과하다. 우리가 개성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규칙성에 해당될 뿐이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 자신을 결코 모른다. 우리가 행동할 때 직접 드러나지 않으면서 배후에서 작동하는 많은 절차와 대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5.7 영속적인 정체성
내가 어릴 때 에서 '내'는 무엇을 뜻할까?
다음의 글자들을 읽지 말고 그저 보기만 하려고 노력해 보라.
DON'T READ THIS
의식에 관한 한, 우리는 사물들이 의식에 나타나는 모습과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사물들에 새로운 의미를 배우기 이전에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였는가를 회상할 수 없다면, 무엇이 지나간 시간들에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회상할 수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불변에 대한 감각을 경험한다.
그 의미들이변하긴 하되 천천히 변하는기억들의 덩어리가 바로 '당신'인가? 아니면, 인생의 시간이 진행됨에 따라 당신의 행위자들 중 어느 것이건 최소한의 것만 변할 뿐인가?
'[Book] The Society of Mind'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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