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의식
당신의 자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 채 당신은 당신의 몸과 마음을 운용한다.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생각(관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생각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흔히 의식이라 일컫는 어떤 절차들이 있는 모양이다.
원심력을 이용하여 다음 발걸음에서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이러한 절차는 온갖 근육과 뼈, 관절들로 구성된 거대한 하나의 사회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전문가들조차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호작용하는 수백 개의 프로그램들에 의해 조종된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저 길목에서 돌자.'라는 것이고, 그 바람은 자동으로 완수된다.
작용에는 결과가 따른다. 결과가 작용 그 자체의 성격에 내재된 것이 아니고 작용에 그저 할당되었을 뿐일 때, 그 작용을 일컬어 '신호'라고 부르고자 한다.
가속페달을 밟는 것 자체는 자동차의 속도를 올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를 밀어붙이라고 엔진에게 보내는 신호일 뿐이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페달에 자동차의 속도 조절을 손쉽게 할당할 수 있고, 핸들에 자동차 방향 조종을 손쉽게 할당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적인 생각들은 우리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절차들을 제어하면서 우리의 마음속 엔진들을 조종하기 위해 신호-기호들을 사용한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그 거대한 기계에 신호를 보냄으로써 목표에 도달하는 법을 배운다.
이는 예전에 마법사들이 주문을 걸기 위해 의식을 치렀던 것과 흡사하다.
6.2 신호와 기호
우리는 무언가를 어떻게 이해할까? 내 생각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저런 종류의 비유를 활용함으로써, 즉 새로 나타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대표함으로써 이해를 수행한다.
그것의 어떤 부분이든 더욱 친숙한 기호들과 관련지어 나타내려 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새로운 일을 좀 더 일상적인 일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 말하자면 신호, 상징, 낱말, 명칭을 활용한다.
우리의 마음은 이 수단들을 활용하여 낯선 것을 통상적인 것으로 바꾼다.
출구EXIT라고 쓴 판자를 덧대면 된다.
진짜 문이 아닌 발명품에 문의 상징을 할당하는 것은 단순한 속임수처럼 보일 것이다.
마음속에는 문이 전혀 없고 그저 기호들 간의 연결들 뿐이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면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시스템들이 사용하는 정신적 스크린에 이따금씩 번쩍이는 메뉴 목록 정도의 것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게이머가 게임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 복잡한 기계 내부에서 작동하는 절차들을 발동시키기 위해 상징 기호들을 사용하는 방식과 똑같다.
과학자들은 수년에 걸쳐 두뇌 구조들의 작은 조각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다행인 것은 일상생활의 목적들을 달성하는 데에는 단어나 신호가 마음 안에서 몇몇 유용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망치를 망치 자체로 보지 않고 두들기고자 하는 그 무엇으로만 볼 수 있다거나, 공을 공 자체로 보지 않고 던지고 잡는 무엇으로만 볼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사물을 보되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더 잘 보는 것일까? 그것은 영양, 방어, 생식을 비롯해서 그 외 그것들과 유사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을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식은 우리가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활용하는 한에서만 유용한 것이다.
6.3 생각-실험
당신은 세상에 관한 것들을 어떻게 발견하는가? 간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연히 한 번 쳐다보는 시선은 당장 보이는 장면을 나타내고, 다른 경험을 통해 기록된 것들과의 차이를 요약해내는 데 10억 개의 뇌세포를 동원한다.
당신의 행위기구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론들을 조금도 공식화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의 행위기구들은 당신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추측을 확인하거나 재공식화하는 작은 실험들을 하도록 한다. 그 실험들은 아주 간단해 보이는데,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에 관한 것들을 어떻게 발견하는가?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한 약간의 이론을 만들고,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해 자그마한 실험들을 통해 검토한다. 문제는 생각-실험이 명쾌하고 산뜻한 종류의 발견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 어려운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실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마음-실험 자체다. 그러므로 마음-실험에 관한 우리의 생각들이 서로 방해한다.
생각은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컴퓨터가 두뇌처럼 하나의 시스템이 여러 절차들에 동시에 관여하도록 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
6.4 B-두뇌
B가 A의 목표를 방해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B가 보기에 A가 끝없는 순환의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과제에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여기며 지겹다고 불평하는 일이 습관화 된다.
6.5 동결된 성찰
그 어떤 관리자도 자신의 모든 행위자들이 하는 일들을 모두 알 수는 없다.
과학자들은 어떤 상황의 특정한 측면들을 선정해서 주의 깊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실험 기록은 '동결된 현상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론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갖도록 한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어떻게 이와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한 기록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모종의 기억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은 K-라인을 이용해서 두뇌의 다른 어떤 행위자들이 특정한 순간에 하는 일을 기록할 수 있다. 나중에 당신이 그 K-라인을 활성화하면, 해당 K-라인이 다른 어떤 행위자들을 이전의 상태로 복구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이전의 정신 상태를 '기억'하도록 하는데, 당신 마음의 일부가 이전에 했던 일들을 똑같이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6.6 순간적인 정신의 시간
일상생활에서 '지금'이 '시간상 이 순간'을 뜻한다는 것은 말이 된다. 그러나 '지금'의 의미는 한 사회 속에서 어느 한 행위자에게는 너무나 불명료하다.
그 어떤 마음의 일부도 다른 모든 행위기구들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행위기구는 과거에 일어나는 것과 지금 일어나는 것 양쪽을 적어도 약간씩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마음속 각각의 행위자들은 약간씩 다른 시간의 세계에 사는 것이다.
6.7 인과적 지금
정신적 시간의 진행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은 틀렸다. 그러한 생각들에는 각각의 행위자들이 다른 인과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위한 여지가 없다.
문제는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행위기구들이 수행하는 순간 순간의 연결들에서 생겨난다.
당신은 "나 방금 사랑을 했어"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사랑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말하는 행위기구들은 사람들의 애착에 관련된 행위기구들이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유지되는 상태로 느리게 작업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들은 간접적으로만 물리적인 시간에 연결된다.
행위기구가 느르게 작동할수록, 즉 상태가 변할 때 그 변화의 간격이 길면 길수록 그 간격 내부에 더 많은 외부의 신호들이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빠르게 작동하는 행위기구들에게보다 느리게 작동하는 행위기구들에게 외부 세계가 더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6.8 생각하지 않고 생각함
생각하지 않고 걸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생각한다! 근육들이 어떻게 우리를 걷게 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정신적인 작업을 하는 행위기구들에 관해 우리는 훨씬 더 모른다.
우리가 통찰이라 부르는 이해 방식의 대부분은, 일어나는 일을 '형상화해 내는' 또 다른 방식의 변종일 뿐이다.
6.9 구름 속의 머리
우리가 마음이라 부르는 것은 여러 다른 지각들의 무더기 또는 결집에 불과하다. 이것은 어떤 관계들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데, 완전한 단순성과 동일정체성을 지닌 것으로 오인된다. - 데이비드 흄
나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의미들과 관계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견해를 유지할 것이다.
각각의 부분이 다른 부분들에게 의미를 제공하는 하나의 사회가 있다는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다.
만약 모든 마음들이 자신 속에 다소 다른 것들을 건립한다면, 어떻게 마음이 다른 마음과 소통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결국 소통이란 정도의 문제이고, 마음들끼리 서로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통탄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똑같다면 다른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쨌든 당신 마음 내부에서의 상황도 이와 똑같다. 심지어 당신 자신조차도 당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비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것들에 그것을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이유로 어떤 것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거의 틀릴 수밖에 없다. 단지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 어떤 것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단 하나만의 의미를 지닌 생각은 단 하나의 경로로만 당신을 인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럴 때 만약 일이 잘못되면 여지없이 곤경에 빠진다.
뭔가를 '기계적으로 암기해서', 즉 그 어떤 감각적인 연결 지점이 없이 배웠을 때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풍부한 의미-망들은 여러 다른 길들을 제공한다. 만약 당신이 주어진 문제를 어느 하나의 방식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물론 너무 많이 얽힌 나머지 까다로운 연결들은 마음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잘 연결된 의미의 구조들은 당신이 마음속에서 생각들을 잘 굴리도록 만들어서, 당신이 그중에서 원만하게 작동하는 생각을 찾아낼 때까지 대안들을 고려하고, 많은 관점들에서 여러 가지 가능한 사태들을 미리 그릴 수 있도록 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제시하는, 생각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다.
6.10 마음 밖의 세계
단독적으로 실재하는 사유의 세계는 없다. 각각의 마음은 그 나름의 내적인 영역을 발달시킨다. 우리가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사유의 세계는 여러 목표들과 행동들이 우리의 인생을 영위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범위의 영역들을 끌어당기면서 맞물리게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불교도나 공화주의자나, 또는 시인이나 위상수학자 등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정신적인 출발 지점들은 거대하고 일관성 있는 대륙들로 성장해 간다. 수학, 과학 그리고 철학의 특정한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적지만 명료한 생각들은 복잡하지만 일관된 새로운 구조의 끝없는 영역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덧셈과 곱셈의 규칙들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느끼지만, 그 규칙들을 결합하게 되면 수세기 동안 풀리지 않은 소수에 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또한 마음은 실용적인 일들로 이루어진 즐거운 세계를 만든다. 이 일들은 우리가 사물들을 질서 있게 짜맞추어 놓음으로써 그것들이 작동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수없이 많은 인위적인 도식들을 만들어 억지로라도 일들이 질서정연해 보이게끔 하는데, 법전과 문법 규칙, 교통 법규를 특별히 만드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성장하게 되면 누구나 그 모든 것들을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
세계를 질서 있게 보이도록 하는 또 다른 해로운 방식이 있다. 그 경우 마음은 그저 제 자신을 단순하게 만드는 법을 발견한다. 이것은 어떤 아이디어가 너무 많은 내용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 마다 우리가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때 아마도 실제로는 어떤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마음은 그저 두뇌에서 2차 경로를 찾았을 것이고, 이 경로를 통해 곧장 자동적으로 모든 의심과 차이를 제거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일종의 계시라고 여겨지는 느낌을 받을 때 생겨난다. 조금의 의심도 없는 상태나 놀랍도록 뚜렷한 광경이 주어지겠지만, 그 어떤 세세한 내용도 자세히 얘기할 수 없기 마련이다. 정신적 억압감을 주는 사건은 묻고 의심하고 입증하는 등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억누른다.
이러한 묘한 사건에 사로잡힌 자가 그 사건을 반드시 다시 경험해야겠다고 여기게 되면, 그의 삶과 인격은 때때로 영구히 변하게 된다. 그럴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눈에서 빛나는 빛을 보고, 또 영광의 소리를 듣고서 그들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역설을 환대하는 것은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기대는 것과 같다.
일단 모순이 자리 잡고 나면 "일체는 하나다."와 같은 슬로건이 지닌 그 파괴적인 힘을 쫓아낼 수 있는 마음은 거의 없다.
6.11 안으로-보기(통찰)
통찰과 이해는 결코 관찰 자체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어떤 이론이나 가설로부터 출발하지 ㅇ낳고서는 데이터를 활용할 수 없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의 원인과 기능은 그자체로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관념들은 어디에서 얻는가? 대부분의 개념들은 우리가 자라 온 공동체들로부터 온 것들이다. 우리 스스로 '얻는' 관념들조차 공동체들로부터 온다. 두뇌는, 근육이 힘을 행사하고 난소가 에스트로겐을 만들듯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생각들을 가공하지 않는다. 하나의 멋진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방대하게 다양한 작업을 하는 하부 기계들의 거대한 조직을 끌어들여 활용해야 한다.
만약 서로 다른 언어와 사고방식을 사용하는 부분의 마음이 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을 시도한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행위기구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6.12 내부적 소통
만약 행위자들이 서로 소통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행하는 많은 일들은 공통된 지식과 경험에 근거한다. 그래서 비록 하위 수준의 정신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거의 언급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 수준의 절차들에서 작동하는 공통 유산들을 활용할 수 있다.
상위 수준의 목표와 계획을 요약하는 데 사용하는 낱말과 상징은, 하위 수준의 목표와 계획을 제어하는 데 사용되는 신호와는 다르다. 자전거를 타면서 어떻게 균형을 잡는지, 그림을 실물과 어떻게 구분하는지, 기억에서 어떻게 사실을 불러내는지 등
우리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기 전에 균형을 잡는 법과 보는 법과 기억하는 법을 배웠다.
'의미' 자체는 크기, 규모와 관련되어 있다. 많은 의미를 가질 정도로 충분히 넓은 체계 내에서 의미에 대해 말할 때에만 그 말이 성립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말은 부조리하게 된다. 충분치 못한 작은 체계들 내에서 의미라는 개념은 공허하고 불필요해진다.
예를 들면, 건축가의 행위자들은 그들의 일을 한다는 의미를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 보내기는 그저 갖기와 올리기를 켜야만 한다. 그때 갖기와 올리기는 켜기라는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그 어떤 미묘한 감응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 언어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 두 언어의 한쪽을 다른 쪽으로 번역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두 행위자가 공유하는 것이 전혀 없으면 둘 사이에 그 어떤 번역도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들 사이는 번역이 어렵다. 각각의 낱말이 많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할 때 주된 사안은 주어진 낱말의 의미의 폭을 줄여 두 언어가 공유하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공유하는 것잉 없다면 폭을 줄여 나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6.13 자기 인식은 위험하다
좀더 완전하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좋아 보인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생각에는 몇몇 오류가 숨겨져 있다.
자신을 바꾸었으면 하는 마음은 마음 자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앎으로써 이득을 얻기 위함이 틀림없다.
일상생활을 보면 우리의 쾌락 시스템은 우리를 강압적으로 점검하여 균형을 잡도록 함으로써 처신하는 법을 배우도록 한다. 예컨대 처음에는 즐거운 행동이었는데 행동을 똑같이 거듭하면 왜 지겨워지는 걸까? 충분한 다양성이 주어지지 않으면, 쾌락 시스템은 싫증을 내는 경향이 있다. 모든 학습 기계는 그와 같은 보호 도식을 갖추어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똑같은 행동을 무한히 반복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단지 다양성의 문제라기 보다 익숙한 패턴은 더이상 보상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다양성 문제라면 마약 같은 중독은 설명이 힘들 수도 있다. 다만 무한히 반복 하는 제어 장치는 있어 보인다.
만약 우리가 쾌락 시스템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실제로 성취하지 않고도 성공에 따른 쾌감을 산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생존이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마약이 사회적 문제를 야기 하는 것이며, 사회적, 법적으로 금지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가상세계를 통해 sex나 성공의 쾌감을 얻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매트릭스 세계로 돌아 가려는 배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 마음의 시스템을 마음대로 제어하지 못하도록 하는 걸까? 우리의 마음은 많은 자기 억제들에 얽매어 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가장 바꾸고 싶어 하는 행위ㅏ자들을(어린 시절에 장기간 지속되는 자아 이상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해우이자들)바꾸는 것이 특히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 행위자들을 바꾸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그것들의 진화적인 기원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정신적 행위기구들도 장기간의 안정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들의 안정성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우리의 이미지들을 얼마나 천천히 바꾸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무작위로 우연에 몸을 맡긴 채, 모험적인 충동이 마음껏 인격적인 토대를 변경해 버리도록 내버려 둔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상적인 '마음 변경'은 얼마든지 또 뒤집을 수 있지만, 자아 이상들을 바꾸게 되면 스스로를 되돌릴 수단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각 개인의 성장은 부모의 권위를 나타내는 이미지들에 따라, 부모를 기쁘게 하고 달래주고 대립하고 또는 차단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에 지배된다는 것을 이론화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오래된 이미지들이 우리의 성장에 미친 영향들을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너무 유치하고 무가치하게 여긴 나머지 견딜 수 없게 될 것이고 다른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본능과 사회와 결합된 그 모든 유대를 끊어 버린다면, 과연 무엇으로 그것들을 대체한단 말인가?
부모를 잃는다던가 나라를 잃는다는 현상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이유인듯 하다. 부모는 어린 아이의 생존과 관계가 있어 이해가 쉽지만 나라를 잃으면 왜 그런 큰 충격을 받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듯 하다.
6.14 혼동
의식의 개입은 주로 시스템이 실패했을 때 이뤄진다.
일반적인 걷기와 발을 다쳤을 때 걷기의 차이를 생각하면 될듯하다.
우리는 자신이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가를 반성하기 시작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의 전략들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앎을 활용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
"이제 정신차려 정돈을 잘해야 해. 왜 집중하지 못하고 세세한 일에 정신을 팔고 있지?"
역설적이게도,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은 결함이 있는 절차를 바꾸거나 수정하는 데 우리의 지성을 활용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동에 대한 인식이 지닌 힘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기 일수다. 그래서 혼동 상태에 있다는 느낌을 싫어하고 비난한다.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의식적인 경험은 고통과 닮았을 수 있다.
혼동과 고통으로 인해 적정 수준을 넘어 목표를 포기하는 쪽으로 연결되면 중상에 해당하는 해를 입게 된다.
"그 모든 사안이 나에게 아픔을 줘, 아마도 나는 모든 기획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직장도 인간관계도."
그러나 심지어 그 정도로 절망적인 생각이라 할지라도 도움에 쓰일 수 있는 다른 행위기구들을 발견하는 탐색자 역할을 할 수 있다.
큰 아픔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이유로 볼 수 있을듯 하다.
'[Book] The Society of Mind'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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