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연의 격동
자연 이 다채로운 연방 국가의 균형은 동적이다. 공진화적 결합 안에서 자연의 피조물들이 집단적으로 팽팽하게 서로 밀쳐내고자 할 경우 지형과 기후의 울퉁불퉁한 경계 영역의 일부에서 이질적 생물들의 상호 의존적인 공동 거주지가 생겨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영역이 점차로 퍼져나가기도 한다.
“변화가 없다면 사막은 황폐해집니다.”
‘변덕스러운 강우 현상이 사막 생태를 유지하는 핵심적 요소’라고 결론 내렸다. “해마다 약간씩 다른 형태로 비가 내려 모든 종들을 균형 상태에서 약간 벗어나도록 해야만 합니다. 강우에 변화가 있으면 혼합된 종의 수가 몇백, 몇천 배로 증가합니다. 반면 연간 온도 주기에 따라 일정한 때에 일정하게 비가 내리면 아름다운 사막 생태계는 거의 항상 더 단순하고 지루한 상태로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평형 이란 곧 죽음입니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모든 생태계는 불변하는 평형이라는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 있다는 유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실제로 자연에 풍부함을 부여하는 것은 격변과 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생태학자들은 경제학자들이 경제에서 평형 상태의 종말점을 선호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자연에서 평형을 이루는 종말점을 선호했다. 평형 상태에 대해서는 수학적 계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수천 가지의 불균형 모형들이 만개했다. 실제로 카오스 수학, 비선형적 수학, 미분방정식, 복잡성 이론에 주력하는 소규모 산업들이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자연이나 경제가 안정적인 균형을 찾는다는 개념을 뒤엎는 데 일조한다. 끊임없는 변화와 요동 상태가 정상이라는 이 새로운 관점은 과거의 데이터를 재해석할 길을 열어주었다.
“이 사막의 땅 조각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각 구획의 땅들이 발달 단계에서 동시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이 사막 전체를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자연 재해가 땅의 일부를 쓸어버리더라도 자연 역사의 다른 단계에 있는 다른 구획의 땅으로부터 생물과 종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열대우림처럼 강우 패턴의 변화가 거의 없는 생태계도 주기적인 폭풍이나 쓰러진 나무 등에 의해 각 구획마다 다양한 발달 단계를 보입니다.”
“평형 상태는 죽은 상태일 뿐만 아니라 죽음 그 자체입니다.” “어떤 계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상의 변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너무 큰 변화는 계를 죽일 수 있지요.”
생물학자들은 1960년대 말이 되어서야 드디어 컴퓨터에 손을 대서 역동적인 생태계와 먹이그물을 실리콘 네트워크상에 모델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답을 찾고자 했던 질문 중 하나는 ‘안정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포식자와 먹이의 관계를 컴퓨터에 모형화할 경우 가상의 생물들이 장기적인 공진화적 쌍을 이루며 공존하도록 하는 조건은 무엇이고, 이들을 파국으로 치닫도록 만드는 조건은 무엇일까?
애슈비와 가드너는 단순한 네트워크 회로를 프로그램한 다음 연결점의 수와 연결점 사이의 연결 강도를 조절함으로써 수백 가지 변이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놀라운 결과를 마주했다. 특정 문턱값 이상에서는 연결 강도가 증가되면 오히려 시스템이 재해나 교란으로부터 회복되는 능력이 감소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잡한 시스템이 단순한 시스템보다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그의 결론은 안정성과 다양성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고, 그는 종의 혼합물에서 복잡성이 증가한 결과로 안정성이 얻어진다는 ‘단순한 믿음’을 재고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메이의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오히려 단순성도 복잡성도 종의 상호작용 패턴 만큼 안정성에 많은 영향을 주지 못함을 암시했다.
임의의 어떤 모델을 만들 경우, 진짜 단순한 경우(예컨대 먹이도 딱 하나, 필요한 자원도 딱 하나인 모델)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던 거죠. 여기에 다양성과 상호작용을 더하거나 먹이사슬의 길이를 증가시키다보면 곧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종을 추가하고, 계속해서 망치다보면 놀랍게도 결국 어느 순간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혼합물에 이르게 됩니다. 어느 순간 공짜로 질서를 얻게 되는 거죠. 단지 이 제대로 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반복된 실패가 필요할 뿐입니다. 지금껏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복잡한 시스템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반복해서 될 때까지 그 시스템을 조합하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한 그 최종적 상태가 어떻게 성공에 이르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생물학의 관찰 결과는 시스템이 네트워크의 연결점당 연결 개수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상의 각 연결점 사이의 연관성, 연결의 강도까지 조절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은 연관성을 보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 경제, 기계 시스템에서도 이와 유사한 연관성 보존의 법칙이 적용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미국삼나무는 원래부터 딱 그 해안의 언덕에 속하는 것이고, 악어들 역시 원래부터 플로리다의 평야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이들을 지금 그 모습대로 보호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들은 그 장소에 그리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천년만년 그곳에 존재하리란 법도 없는 자연의 불법 점유자에 지나지 않는다. “방해받지 않은 자연은 형태나 구조나 비율에 있어서 항상 일정한 모습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모든 국면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영원한 것은 삼나무 숲도 아니고 의회도 아니고 변화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변화를 통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정부나 경제 또는 생태계와 같이 느슨하게 연결된 분산된 존재는 어떤 의미 있는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변화가 가져올 미래의 상태를 예측할 수는 있을까?
진화는 단단하게 연결된 그물망이고 생태계는 느슨하게 연결된 그물망이다.
다양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거친 환경이 없다면 생물은 그저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칠수밖에 없다. 이 경우에도 생물은 변이와 새로움을 창조해낸다. 그러나 자연의 세계에서든 인공의 세계에서든 피조물을 거칠고 커다란 변이를 보이는 환경에 가져다놓을 때 훨씬 더 큰 다양성을 얻을 수 있다.
가상 생명 연구가인 데이비드 애클리는 “마침내 놀라울 정도로 진짜 생물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가상 생물을 만드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진짜로 복잡한 피조물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대신 단순한 피조물을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환경 속에 집어넣는 것이지요.”
문득 지구상의 생물이 얼마나 서로 비슷한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생명은 나를 속일 수 없다. 사실은 모두가 똑 같은 것이다. 생명은 모두 대동소이하다.
생명은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산되어 있는 존재이다. 생명은 드넓은 시공간으로 확장되어 있는 하나의 유기체이다. 개별적인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떨어져서 살아가는 단일한 생물이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생명이 이리저리 흩어져서 형성된 명확한 각각의 개체라는 개념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생명은 생태계의 소유물이며 각 개체에 속하는 순간은 덧없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은 거대한 비밀은 일단 생명이 태어나면 불멸성을 띈다는 사실이다.
지구상에서 생명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생명의 저지할 수 없는 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비시스템의 복잡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생명 동력의 복잡성이 지금까지 알려진 파괴력의 복잡성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명 형태를 다른 생물이 소비해버리는 행위가 일반적으로 전체 계의 복잡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증가시킬 수도 있다.
이 세계의 모든 질병과 사고는 인간의 생명의 성벽을 무너뜨리고자 70여 년 동안 전면적 공격을 벌이는 셈이다. 이러한 공격을 견뎌내는 생명의 끈질김은 인간 몸의 복잡성에 기인한다.
제트 엔진은 4만 시간 정도 사용하고서 교체해야 한다.단순한 전구는 2000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다. 생명이 없는 복잡한 시스템의 수명은 생명의 끈질긴 지속성에 필적하지 못한다.
실제로 스스로 붕괴되지 않도록 막는 기능은 복잡한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자연의 영웅적 성취는 작은 바다 동물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태고 이래로 존재해온 죽음이 결코 시스템을 부서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네트워크화된 복잡성은 사물의 신뢰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옛날 카메라는 고장이 잘 났지만 고치기도 쉬웠다.하지만 새로운 카메라는 매우 창의적인 방식으로 고장이 난다.
창의적으로 고장이 나는 것이 바로 비비시스템의 특질이다. 죽기는 어렵지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수천 가지가 넘게 있는 것이다.
복잡한 시스템은 단순하게 죽을 수가 없다. 시스템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전체와 흥정을 벌인다. 각 부분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전체를 위해 희생할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로 뭉치면 우리 각각의 합보다 더 큰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복잡성은 생명을 가두어 잠근다. 각 부분은 죽지만 전체는 살아남는다. 시스템이 더 큰 복잡성을 향해 스스로를 조직해나가면 그와 더불어 생명 역시 증가시킨다. 생명의 길이를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를 크게 만든다. 시스템은 더 많은 생명을 갖게 된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유기체 안에서 자기 조직을 이루고 있는 하부 시스템을 살펴보면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많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포조차도 다수의 생명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각 세포들은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박테리아가 결합하여 생성된 것으로 추론할 근거가 되는 흔적 소기관을 세포 안에 보유하고 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살아있다!”
어떤 비비시스템의 복잡도가 클수록 더 많은 생명을 그 안에 담을 수 있다. 적어도 우주가 점점 식어가는 동안에는 생명은 더욱더 흥미로운 변이를 만들어나갈 것이고 더욱더 정교한 네트워크를 쌓아나갈 것이다.
생명이 생겨나기 전, 우주에는 복잡한 물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이 나타난 이후 훨씬 복잡한 물질들이 생겨났다. 우주화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주 공간 중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복잡한 분자들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생명은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물질을 낚아채서 그것을 복잡하게 만든다. 기묘한 산수에 의해 이 공간에 생명이 스스로를 더 많이 채워넣을수록 앞으로 생명을 채워나갈 공간이 더 많이 생겨나게 된다.
생명은 지금은 적대적으로 느껴지는 환경 속에서도 번성할 수 있는 자신의 분신을 진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일단 생명의 한 종류가 어느 장소에 발을 딛게 되면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변형의 본질이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 다른 종의 생명에게도 적합하도록 만든다.
슈뢰딩거는 생명의 힘이 열역학적 붕괴의 압력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것을 네겐트로피 라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정보이다.”
생명이 가차 없이 물질을 정복해나가듯, 생명과 비슷하지만 더 높은 차원의 연산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생명과 다른 모든 물질을 정복해나가고 있다.
마음이 물질에 스며들어가 물질을 통제하는 경향이 바로 자연의 법칙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약 1세기 전, 생명이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 스며들어 있는 신비로운 액체라는 전통적 믿음이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져서 생기론이라는 현대 철학으로 탄생했다. 생명을 잃었다고 할 때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물질이 그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상상한다.
생명을 ‘죽어 있는 부분들이 조직화됨에 따라 창발되는 속성이지만 한편으로 그 죽어 있는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 형이상학적 교의처럼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시험을 거칠 수 있다.
나는 생명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의 네트워크와 같은 배열에서 창발할 수 있는, 거의 수학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라는 관점에 동의한다. 그것은 일종의 확률 법칙과 같다. 충분한 수의 부분들을 한데 끌어 모으면 시스템은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 평균의 법칙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이 법칙에 따라 배열되면 그 결과로 생명이 출현한다. 그리고 그 법칙은 이제야 막 발견되고 있다. 이 법칙은 빛에 적용되는 물리학의 법칙만큼이나 엄격하게 적용된다.
이처럼 엄격한 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절차임에도 생명은 우연히도 영적인 느낌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이 생명 조직이 바로 그 법칙에 의해서 예측할 수 없는 것과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생명 조직의 결과물은 가능한 모든 기회마다 스스로를 복제해야 하는데 그 때문에 마치 급박하고 절실한 욕망을 가진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셋째, 그 결과물은 많은 경우 빙 둘러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할 수 있고 그 결과 창발적 속성을 얻게 된다.
이 모든 속성들을 생명의 ‘창발적’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법칙은 불규칙성, 순환 논리, 반복, 놀라움을 특징으로 한다.
진보의 과정을 설명
먼저 코페르니쿠스가 지상의 세계와 나머지 물리적 우주 사이의 불연속성을 제거했다. 그 다음 다윈이 인간 존재와 나머지 생물 세계 사이의 불연속성을 제거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프로이트가 자아의 합리적 세계와 비합리적 무의식 세계 사이의 불연속성을 제거했다. 그러나 마즈리쉬는 하나의 불연속성이 더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이 ‘네 번째 불연속성’은 바로 인간과 기계 사이에 존재한다.
태어난 존재와 만들어진 존재 사이를 가로질러 연결하는 다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근본적 불균형 상태, 바로 생명이라 불리는 법칙이다. 미래에 살아 있는 생명체와 기계가 공통으로 가지게 될 본질, 이들을 우주의 다른 모든 물질들과 구별해줄 속성은 둘 다 역동적으로 자기 조직적 변화를 이루어나간다는 특징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명이란 우리 인간이 발견하고 인식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법칙들을 따르는, 끊임없는 요동 상태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생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진화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면 생명과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만일 우리가 생명과 진화를 ‘자율적 절차’라고 본다면 생명과 진화의 이기적 목표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그들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
“야생의 모든 조건과 경로와 목표와 원천은 즉각 그 자신 이상의 무엇인가를 생성해내고는 그것을 놓아준다. 항상 변화하고 생성한다.”
야생의 자연은 그 자신 이외에 어떤 목적도 없다.
야생이라고 부른 것을 나는 생명의 네트워크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을 점점 더 확장시키고, 자신의 불균형 상태를 모든 물질을 향해 밀어붙이며 생물과 기계에서 모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거의 기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밖으로 분출하는 힘이다.
생명은 생성의 순환 고리이자 자기 촉매로서 자체의 불꽃을 가지고 스스로를 불태우며 스스로에게 더욱 많은 생명, 더욱 많은 야성, 더욱 많은 ‘생성’의 씨앗을 뿌린다. 생명은 모든 조건에서, 매 순간 생명 그 자체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생성하고 있다.
7. 통제의 출현
크테시비오스의 조절 장치는 자기 조절, 자기 통치, 자기 제어가 가능한 최초의 생명이 없는 물체였다. 따라서 이 장치는 생물학의 영역 밖에서 탄생한 최초의 자아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자동 장치, 즉 자신의 내부로부터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장치였다.
이 장치를 어떻게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중세의 시각으로 보자면 변기가 이런 자동 배관 장치를 이용해 항상 물이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를 열망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증기기관의 발명자 와트는 기존의 엉성한 엔진에 두 가지 성능을 덧붙였다. 하나는 진화적이었고 다른 하나는 혁명적이었다. 그가 이룩한 진화적 혁신은 가열실과 냉각실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엔진은 엄청나게 강력해졌다. 너무 강력해진 나머지 와트는 이 새롭게 고삐 풀린 기계의 힘을 완화하기 위해 속도 조절 장치, 즉 조속기를 달아야만 했다.
그의 새로운 조절 장치 덕분에 증기 기관은 자신의 힘을 제어할 고삐를 잡게 되었다. 조속기를 조절함으로써 와트는 증기 기관을 원하는 어떤 속도로든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축과 바퀴는 유전자를 가진 생물체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매커니즘이다.
만일 와트의 증기 기관과 같이 불을 먹는 기계들에 자기 제어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들의 에너지를 돌보고 관리하는 데 이 기계들이 대치하고자 했던 인간의 노동력이 그대로 소모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계의 힘을 유용하고 바람직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연료가 아니라 바로 정보이다.
그들이 고안한 장치에 작으나마 자기 제어 능력과 감각적 지각 능력을 부여했고 그 결과 미래의 상태를 예측하는 길을 열었다. 이와 같은 조절 시스템은 자신의 속성을 감지하고 현재 상태가 과거에 마지막으로 감지했을 때의 상태와 비교해 변화가 있는지를 점검한다. 그러고 나서 현재 상태를 자신의 목표에 맞게 수정해나간다.
철학적 의미에서 볼 때 이 시스템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되먹임(피드백) 고리와 같이 가장 단순한 자동 회로를 전자 제품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데에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그토록 오래 걸린 이유는 전기는 발견된 순간부터 근본적으로 힘의 원천, 즉 ‘전력’이라는 측면이 부각되었을 뿐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측면은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전화 교환 네트워크라는 샛길에서 최초의 전기적 자아가 탄생했다.
헤론의 조절 밸브나 와트의 조속기나 드레벨의 온도 조절 장치등이 순수하게 기계적 자아라고 한다면 파르소의 서보 기구는 인간과 기계의 공생, 즉 두 세계의 결합 가능성을 암시했다. 조종사는 힘을 얻고 기계는 존재를 얻는다.
워너의 저서 영향으로 피드백이라는 개념이 거의 모든 기술 문화의 측면에 스며들어갔다.
전자 제어 회로가 산업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자동 제어의 연속적 속성 때문에 전반적인 생산 속도도 향상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측면은 자기 제어 회로의 전적으로 예상치 못했던 기적에 비하면 사소한 이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기적은 바로 조악함으로부터 정교함을 이끌어내는 능력이었다.
어떻게 기본적인 피드백이 부정확한 부분들로부터 정확성을 이끌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실화로서
… 균일한 두께의 철강판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모두 헛수고였다. 한 가지 요소를 통제하면 의도와 달리 다른 요소들을 모두 어지럽히는 꼴이 되었다.
모든 요소들이 다른 모든 요소에 영향을 주었다. 통제라는 행위가 꼼짝달싹 할 수 없이 상호 의존적인 그물망에 휩싸여 있는 듯 보였다.
그로부터 1~2년 안에 압연기에 전자 피드백 장치가 설치되었다.
필러 게이지가 압연기를 갓 빠져나온 철강 판의 두께를 측정한 다음 그 신호를 판의 견인 장치라는 하나의 변수를 통제하는 서브모터로 전달한다. 이 변수는 철판 강이 압연기를 지나가기 직적에 마지막으로 금속에 영향을 주는 변수이다. 이 단순한 하나의 피드백 고리에 의해 전체 변수들의 무리가 통제된다. 모든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최종 두께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한 가지 요소만 통제할 수 있다면 간접적으로 다른 모든 요소들도 통제하는 셈이다. 최종 두께를 목표한 값에서 이탈하게 하는 것이 원 재료의 불균일함 때문인지, 낡은 롤러 때문인지, 실수로 온도가 올라가서인지 등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동화 고리가 마지막 변수로 하여금 다른 변수들의 영향을 상쇄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만일 모든 변수들이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 중 한 변수를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변수들도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원리이다.
“조절 장치는 원인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편차를 감지하고 그것을 수정할 뿐이다.”
시스템이 어떤 순간에 어떻게 합의점을 찾느냐 하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굳이 알 가치도 없다.
경제학자들은 복잡한 네트워크에서 피드백 경로를 추적하려는 시도들을 분석한 후 그와 같은 노력이 소용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경제에서 자원 할당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신 가격이라는 단일 변수를 가지고서 자원 할당에 관여하는 다른 모든 변수들을 조절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경우 우리는 국민 한 사람당 비누가 몇 개 필요한지, 또는 나무를 베어서 집 짓는 데 사용해야 할지 아니면 책 만드는 데 사용해야 할지와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계산들은 맨 바닥부터 상향식으로, 사람의 통제 없이, 상호 연결된 네트워크 그 자체로부터 실시간으로 그리고 병렬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자동제어(또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통제)의 결과 엔지니어들은 완벽하게 균일한 원자재, 완벽하게 조절된 절차에 대한 끊임없는 긴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이제 그들은 불완전한 재료, 부정확한 절차로도 공정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시작하더라도 자동화 기술의 자기 교정 속성을 이용해 오직 최상의 생산품만 공정을 빠져나가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같은 품질의 재료를 가지고 시작하더라도 피드백 고리를 이용할 경우 훨씬 높은 품질 기준을 설정 할 수 있으므로 다음 공정에 더 큰 정확성을 부여할 수 있다.
자동화된 자아는 인간이 물질로부터 쥐어짜내는 정확성을 한층 더 개선하는 고품질 기계가 되었다.
소박한 자동화 회로는 기존에 사용하던 거의 모든 기계에 덧붙여 설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인쇄기와 같은 미운 오리 새끼를 하룻밤 사이에 말 잘 듣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줄줄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피드백 고리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더 큰 피드백 고리를 돌아가는 메시지가 입력 위치에 도달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이 상당히 변화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빠르게 움직이는 환경 속에 있는 방대한 크기의 네트워크 경우 신호가 회로를 도는 데 걸리는 짧은 시간이 상황이 변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리기도 한다.
최신식의 이차적 제어 기능을 갖춘 변기는 이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 변화하는 목표에 맞추어 적응할 줄 알게 되었다.
승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것이다. 해커들은 이것을 회귀적 회로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3000년 된, 논리에 바탕을 둔 철학과 정면으로 맞선다. 모든 고전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다. 만약 뭔가가 동시에 그 원인이자 결과라고 한다면 합리성을 아무데나 가져다 붙일 수 있게 된다.
자아는 어디에서 생겨날|까? 자아는 그 자신으로부터 출현한다.
“생물은 그 자신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내재된 질서이자 조직입니다. 자연 선택이 생물의 원인이 아닙니다. 유전자가 생물을 발생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생물을 출현시킨 원인이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물은 스스로를 야기하는 행위자입니다.” 따라서 자아는 스스로 꾸며낸 형태이다. 자아는 일단 출현하고 나면 그 자신을 초월한다. 마치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뱀이 신화 속의 상징적 고리인 우로보로스가 되는 것처럼
융은 혼돈 상태와도 같은 다양한 꿈의 이미지들이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안정적인 마디(node)로 이끌려 가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융 학파의 이론적 토대에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는 자아의 상징적 표현이다. 뱀이 둥그런 원을 완성하는 것은 동시에 한 존재, 그리고 그 존재와 경쟁하는 부분들을 아우르는 자아의 자기 충족성을 상징한다.
융 학파는 자아를 ‘에고의 의식이 탄생하기 전의 근원적인 마음 상태’라고 했다. 즉 “시초의 전체성의 만달라(불교 등에서 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나타내는 둥근 그림) 상태로 이로부터 개별적인 에고가 탄생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자동 온도 조절 장치가 설치된 용광로가 자아라고 해서 그것이 에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자아란 단순히 바탕이 되는 상태이자 스스로 꾸며낸 형태로 그로부터 나중에, 충분한 수준의 보잡성에 도달할 경우 더욱 복잡한 에고가 출현한다.
모든 자아는 동어 반복이다. ‘천천히 스스로를 치유하는 동어 반복’
자아가 방해를 받거나 어지럽혀지더라도 ‘동어 반복을 향해 자리를 잡아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자아는 자신의 근본적인 자기 지시적인 상태, ‘불가피한 역설’로 이끌린다는 것이다.
모든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려는 다툼이다. 자동 온도 조절 장치의 자아에서는 용광로의 온도를 더 높여야 할지 낮추어야 할지를 놓고 끊임없이 내부적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 헤론의 밸브 시스템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위, 즉 플로트를 움직여야 할지 말지를 놓고 끊임없이 갈등하는 상태이다.
시스템은 자신에게 말을 건다.
자동 제어 기술은 세 단계를 거쳐서 도래하였고 인류의 문화에 세 가지의 거의 형이상학적 변화를 일으켰다.
증기 기관이 가져온 에너지의 제어가 바로 그 첫 번째 단계이다. 우리가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게 되자 에너지는 ‘자유’를 얻었다.
기술적 성취는 물질의 정확한 제어를 확대하는 데에서 온다. 이것이 바로 제어의 두 번째 영역이다. 컴퓨터 칩의 경우처럼 높은 정도의 피드백 메커니즘을 부여하여 물질을 정보화하는 것은 물질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양의 정화화되지 않은 물질을 가지고 하던 일을 점점 더 적은 양의 정보화된 물질로 대치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원하는 무엇이든 원하는 크기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물질은 정보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현재 에너지가 정보의 손바닥 위에 있듯. 그저 다이얼만 돌리면 된다. “20세기의 중심적 사건은 (인간에 의한) 물질의 전복이다.”
물질은 거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제어 혁명의 세 번째 영역은 바로 정보 그 자체에 대한 제어이다. 이곳저곳을 빙빙 돌며 에너지와 물질을 제어하는 엄청난 길이의 정보와 회로로 인해 우리의 환경은 메시지와 비트와 바이트로 넘쳐난다. 이 통제되지 않은 데이터의 밀물은 거의 유해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정보를 만들어내고 있다. 더 많은 정보의 창조라는 약속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정보의 양이 증가하는 것은 마치 다량의 증기가 증기 기관을 폭파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아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을 경우 아무런 쓸모가 없다.
정보를 길들인 효과는, 에너지와 물질의 제어가 그러했듯, 산업과 비즈니스 분야에서 가장 먼저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다음 천천히 개인의 영역으로 스며들어갈 것이다.
에너지의 제어는 자연을 정복했고(그럼으로써 우리를 살찌웠고) 물질의 제어는 물질적 부를 우리의 손 미치는 곳까지 끌어다 놓았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탐욕스럽게 만들었다) 활짝 만개한 정보의 제어는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풍요의 뿔을 가져다 줄까? 혼란? 명석함? 조바심?
자아 없이는 거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아를 부여받은 엄청난 수의 실리콘 칩들이 스스로를 더 작고 빠르게 재설계하고 모터를 지배한다. 그리고 곧이어 자아를 부여받은 엄청난 수의 네트워크들이 실리콘 칩들을 재규정할 것이고 우리가 허락하는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에너지, 물질, 정보의 보물들을 이용하기 위해 이들을 모두 통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손실을 일으킬 것이다.
기계에 인간의 관리, 감독 없이 스스로 적응해나가고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진화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기술의 새로운 위대한 진보이다. 기계에 자유를 부여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기계를 현명하게 통제할 유일한 방법이다.
기계 만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이득을 주며 발전을 가져 오는지 현재를 보면 알수 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책 출간된지 20년이 넘었다는 것은..... 지금에야 이책을 봤다는게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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