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The Society of Mind

CHAPTER 9. 요약 [마음의 사회]

9.1 원함과 좋아함

 

우리로 하여금 그 많은 일들을 '좋아하다', '더 좋아하다', '즐기다' 같은 무덤덤한 문장 속에 욱여넣길 바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복합적인 일들을 단순한 가치 또는 즐거움에 관련된 성질로 축소하려고 노력하는 걸까?

 

쾌락에 대한 척도들이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 척도들은 비교를 할 수 있게 하고, 타협과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그 척도들은 다양한 정도의 애착과 만족, 동의를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소통의 기호들이 작동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호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세계의 상태도 그렇거니와 마음의상태는 늘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일차원적인 판단으로 표현될 수 없다. 

 

온갖 절차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개요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의 경험을 '즐기기' 위해서는 일단 행위자들은 성공을 요약해 내야만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한편으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기구들이 다른 가능성들을 강압적으로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안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마음의 최상위 단계들은 가장 간단한 개요를 요구한다. 만약 최고 단계의 감응들이 너무 자주 '혼합'된다고 느낀다면,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길을 걸어갈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행동 수준에서 보자면, 당신은 "그래."와 "아니." 같은 표현들에 맞춰 억지로라도 곧바로 단순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많은 절차들이 한꺼번에 진행되는 마음의 하위 단계들에 충분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한다.

 

마음의 하위 단계들에는 공존하는 더 작은 만족들과 괴로움들이 무리 지어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의해 통제될 수밖에 없다는 듯 말하곤 한다. 사실상 우리는 어떤 것을 원하는 것그것으로부터 잠정적으로 즐거움을 획득하는 것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정말 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저런 일을 하겠는가 하고서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란 자신이 하기 좋아하는 일을 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관계는 전혀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호 여부는 우리의 행위기구들 간의 수많은 협상들에 의한 최종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중차대한 목표를 성취하려면 우리는 다른 가능성을 포기해야만 하고 향수나 후회 등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의 선택을 지켜 내는 기계장치를 개입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택을 유지하게끔 하는 메커니즘들의 작동을 표현하는, '좋아함'과 같은 낱말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좋아함이 하는 일은 다른 대안들을 차단하는 것이다. 억제되지 않는 한, 좋아함은 우리의 세계를 협소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좋아함의 역할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해에 따라 좋아함의 인위적인 명료함이 생겨난다. 그 명료함은 좋아함이 무엇인지를 반영하지 않고 좋아함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보여주기만 한다.

 

 

9.2 불공평한 개편

 

성취가 어떻게 만족을 가져다주는지를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대개 성취와 만족이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추측한다. '만족'이 단순하고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불과한 아주 단순한 동물들의 경우에는 만족과 성취는 잠정적으로 사실상 같다. 그러나 복잡한 인간 두뇌를 보자면, 신체적인 욕구들을 담당하는 행위기구들지성적인 성취들을 상징하거나 인식하는 행위기구들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단계의 행위기구들이 삽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복잡한 체계들에서 성취에 따른 즐거운 감정좌절에 따른 불쾌한 감각들이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우리가 갖춘 상위 수준의 행위기구들이 어떻게 개요를 짜는가와 연루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문제를 더 작은 문제들로 쪼개는 것이고, 그래도 너무 어려울 때는 작은 문제들을 또 다시 나눠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어려운 문제는 하위 목표들과 하위 문제들로 가지를 뻗는 나무 모양을 띠게 된다. 활용할 자원들이 어디에서 적용되어야만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의 문제 해결 행위자들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간단한 개요들을 필요로 한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되었을 때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 경험 전체를 즐겼는가를 묻는다면,, 당신은 "즐거웠어." 나 "끔찍했어."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간략한 대답은 그것들이 무엇을 학습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말해주지 못한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둘 중 하나의 그 어떤 단적인 의미만으로는 당신의 모든 행위기구들 내부에서 진행되었던 많은 일들을 반영하지 못한다.

 

최종적인 효과를 '전체적으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결론짓는 것을 만족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때때로 감정들이 꽤 뒤섞여 있기도 하고, 그래서 모든 일들이 달콤씁쓸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과도할 정도로 단순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9.3 실패를 통한 학습

 

성공에서 비롯한 학습들은 당신의 마음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일을 악화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이미 잘 작동하는 어떤 절차를 '개선하고자' 노력할 때마다 바로 그 기계 장치에 의존해 있는 다른 기량들에 손상을 입힐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는가를 성찰함으로써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검열자들'과 '억압자들'이라 부르는 툭수한 기억 장치들을 덧붙임으로써 어떤 방법을 변경하는 것이다.

 

학습은 적어도 두 측면을 지닌다. 마음의 어떤 부분들은 방법들이 언제 제대로 작동하는가를 기억함으로써 성공을 통해 학습한다. 그러나 마음의 다른 부분들은 주로 우리가 실수를 범했을 때, 즉 동원된 다양한 방법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실패했던 정황들을 기억함으로써 학습한다.

 

성공을 통한 학습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실패를 통한 학습은 덜 직접적인 방식으로 더 생산적인 생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사람들이 살고, 생각하고, 사물들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완전한 논리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자의적으로 규칙들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불완전한 추측에서 출발하여 그 추측들이 어디에서 잘못되는가를 찾아내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실패를 통한 학습보다 성공을 통한 학습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긍정적인' 학습 경험에만 한정시키면 우리가 이미 할 수 있는 것에서 비교적 작은 개선을 이루는 데 그친다. 사유 방식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할 때 어느 정도의 불만족을 피할 길은 결코 없다.

 

 

9.4 불쾌감 즐기기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동기부여에는 직접적인 보상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성공했을 때 마음속에서 많은 일들이 진행된다. (성취감, 자부심, 성공을 자랑하고 싶은 느낌) 그러나 성공의 달콤함은 다른 문제들이 마음에 등장하면서 재빨리 지워지고 만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독자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문제들에 속한 더 작은 부분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우리의 행위기구들은 어떤 다른 상위 단계로 되돌아가 불만족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고 결국 다른 하위 문제들에 다시 골몰하게 된다. 만족에 굴복하고 말면 그 어떤 일도 끝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상황이 완전히 통제를 벗어나 버리면, 그래서 힘겨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떤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힘겨움을 견뎌 내기 위한 어떤 내적인 계획을 구축하고자 노력하는 일뿐이다. 

 

하나의 속임수는 "모든 게 재미있자고 한 일이잖아."라고 말할 때처럼 순간적으로 목표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이 일을 통해 확실하게 배우게 될 거야." 하는 식으로 앞으로의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내다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효과가 없을 때 "모르긴 해도 내 실수에서 다른 사람들이 배우게 될 거야."하는 자위도 그 책략 중 하나다.

 

이같이 복잡미묘한 사안들은 '즐거움'과 '행복' 같은 일상적인 낱말들에 대해 바람직한 정의를 고안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작은 종류의 언어만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목표들과 소망들을 표현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사람이 새로운 어떤 기술을 획득한다면, 그 초기 단계들에 있어서조차 부분적이나마 반쾌락적인 태도를 차용해야만 한다.  "좋아, 이건 거북함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군. 새로운 종류의 실수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야!" 마음의 어떤 부분들은 이런 태도를 소름끼치게 여기겠지만, 다른 부분들은 이런 태도가 그들을 위해 억지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을 즐긴다. 분명 이러한 절차들이 우리가 성장해 가는 데 대단히 중요한 방법들임에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절차들에 대한 명칭들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

 

이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즐거움이나 좋아함과 같은 개념들을 내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개념들이 우리의 심리에서 하는 역할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들은 복잡한 방식들을 단순화하는 최종적인 효과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