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감이 곧 정체성이란 신화가 우리를 기만.
인간에게는 혼자이고 싶어 하는 속성도 있다.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는 독립적 개인이고 싶은 때도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저자는 인간의 삶을 집단주의적 성향과 개인주의적 성향의 긴장 관계로 풀이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개인은 항상 조직의 장래와 이익을 고려한다.
우리는 생각과 기분, 즉 뇌 활동을 동조화하는 경향을 띤다. 따라서 심리학과 뇌과학, 역사학과 인류학, 문학과 철학을 총망라해 이런 동조화 메커니즘과 그 영향을 살펴보려 한다.
연령과 지역이 가까운 사람들과 우선적으로 교감한다.
문화의 공유 여부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 전체,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응원하는 민족, 응원하는 정당과 스포츠팀 등 다양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문화라 할 수 있다.
하이브 마인드 뜻
첫째, 우리가 관심과 목표와 정서를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 정도를 가리킨다.
“감정의 발산은 피부 끝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 감정이 반드시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감정을 공유하기도 한다.”
둘째,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독자적인 경험과 결정에 의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의견과 패션, 더 나아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개인의 범주를 벗어나, 그 자체로 고유한 생명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이브 마인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참되며,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멋진 것인지를 집단으로 결정을 내린다.
진정한 단절은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모니터가 아니라, 집단보다 개인, 이타심 보다 야망, 인간의 진보보다 개인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분위기에 있다고 주장.
“사회 연결망에서의 행동이 행복에 좋으냐 나쁘냐는 그 행동이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인간의 내적 욕망을 채워주느냐 억누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인간에게 내재된 집단주의적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 했다.
1장에서는 당신이 지금까지 고유한 개인사와 세상에 대한 견해를 지닌 독립된 자아로서 살아왔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전제라는 것을 설명.
사회적으로 형성된 정체성을 ‘거울 자아’.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사회적 타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에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끌어낸다.
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당신에게 심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식과 믿음과 편견으로 이루어진 문화적 하이브 마인드, 즉 우리의 축적된 지식을 이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 학교 선생님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혹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누구도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연대감을 느끼고, 누군가는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따뜻하게 받아들이지만 누군가는 차갑게 냉대한다. 생물인류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런 현상이 어떤 이유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려한다.
신경학적 차원에서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신뢰한다.
음모론과 대중운동과 광신적 종교 집단 사이에는 공통된 원칙들이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군인가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집단 사고에 의해 형성된다는 과거의 연구를 근거로 삼아, 우리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이야기를 바꾸면 우리 현실도 문자 그대로 바뀐다는 걸 보여줄 것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은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집단주의적 속성과 관계를 맺는 방법의 문제점들을 알아가고자.
01 하이브 마인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SF영화와 소설은 개인의 욕망이 다수에게 철저히 예속되는 사회에 대한 섬뜩한 경고들로 채워진다.
사회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운전대를 외부의 영향에 무의식적으로 넘겨준다는 뜻이다.
우리가 대체로 자신의 태도와 감정과 결정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가정도 점점 의심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뇌는 다수의 하부 조직과 경향이 민주적으로 경쟁을 벌이며 시시때때로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씨름하는 조직처럼 기능한다.
신경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의식이 있는 이유가 순간순간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정보를 처리해 우선순위를 따지고,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 추정한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알다’라는 개념의 정의를 바꿔야 한다. 이제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자아가 뇌라는 거대한 저택에서 아주 작은 방 하나에 불과하고, 의식적인 자아가 우리 주변의 현실을 거의 통제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지각과 예측의 무의식적인 면이 빚어낸 우리 주변의 현실도 결국에는 하이브 마인드가 우리에게 전해준 현실에 대한 합의된 이야기라는 뜻이다.
우리가 독자적인 몸과 뇌를 갖지만 생각과 정서와 기억은 공유한다.
정신적 현상은 우리 몸의 물리적 경계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확산되며 우리가 세상을 비슷한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인간은 고유한 개성과 공유된 집단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인 존재.
우리는 입력(운동 근육의 움직임과 목소리 내기)과 출력(상대의 움직임과 음성을 보고 듣기)을 맞추는 과정에서 우리 몸의 지각력과 자아의식을 집단으로 확장할 수 있다.
동료 군인들과 함께 기계적인 행진 훈력을 반복할 때 활홀경을 경험했다며 “온몸에 스며들던 행복감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단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온몸이 확대되는 기분, 온몸이 부풀어올라 실제보다 더 커진 기분이었다”
근육 운동과 목소리를 맞추는 훈련은 ‘경계의 소멸’로 이어진다.
피라미드의 건설이나 군사 훈련까지 조화롭게 짜맞춘 움직임과 소리의 위력을 실감하고 또 실감했다.
피억압자들이 움직임과 목소리를 맞추는 연대의식을 강화하고 반문화를 고취하는 수단이 되었다.
절망과 낙담의 시대에 활홍경에 빠져 함께 춤을 추며 더 나은 세계를 꿈꾸었다는 것에서 유령 춤이 급속히 확산되고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었을 수 있다.
“나는 자의식에 충만하면서도 집단의 일원이라는 느낌, 나 자신을 포함해 그곳에 있던 모두를 알아간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원무는 참가자를 몽롱하게 만들어 자아를 버리고 집단과 함께하도록 하이브 마인드로 몰아가는 듯하다.
몸의 물리적 경계가 허물어지고 의식이 합쳐질 때 몸에서 생성되는 내인성 오피오이드와 신경펩타이드 옥시토신의 분비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과 말투를 모방하는 미러링 능력이 여기에 속한다.
집단이 함께 운동과 활동에 참여할 때,
여가를 보낸 우리가 이런 활동들을 보람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시도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미러링, 즉 무엇인가를 우리가 직접 경험하든 사회적 타자가 경험하든 간에 우리 뇌는 유사하게 반응한다는 견해.
아버지가 나에게 똑같이 해주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낀다.
내 손가락 끝에서 어머니가 느껴진다.
우리는 감정을 전달하고, 사회적으로 순응하는 과정에서 동조화하며 “공유하는 감정, 공유하는 화합, 공유하는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생각도 재즈와 같아서 개인적인 즉흥성과 사회문화적 요소가 결합된 것이다.
사회적 동물, 소셜미디어의 등장
커피숍에 흐르는 곡조가 옛 연인을 기억에 떠올려준다. 당신은 곧바로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완벽한 카푸치노 사진도 첨부한다.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중대한 위기가 닥치면 페이스북으로 당신의 안전함을 지인들에게 알리고, 위기가 끝난 후에는 후유증을 담은 동영상을 업로드한다.
우리는 서로 접속해 동조화 하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수단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물리적인 움직임과 대면 접촉을 수반해 동조화하는 방법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생각과 정서도 테크놀로지적 수단을 통해 동조화된다. 밤낮으로 언제라도 당신은 사회적 동반자들의 생각에 접속할 수 있고, 사회적 동반자들이 어떤 세계를 보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동반자들의 살아 있는 경험을 실질적으로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경험을 공유하게 해주는 매개 수단만이 아니라 경험을 공유하는 범위까지 바뀌었다. 지상의 모든 인류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 영향을 받는다.
‘밈’은 생물학적 유전자와 달리 생각과 관습을 전달하는 문화적 유전자를 지칭하는 개념.
도킨스는 자연선택과 유사한 압력이 유전자처럼 문화적 요소들에 작용하고, 어떤 요소는 신속히 확산되며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반면에 어떤 요소는 금세 힘없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갖게 된 것이다.
실생활에서 사회적 타자들과 상호작용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기분과 생각에 우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석된다. 결국 사회적 전염은 디지털 세계에서도 확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트위터의 해시태그를 이용하면 정서가 상호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추적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를 찾아냈다. 하지만 두려움과 연대감의 표현이 예측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보스턴 현장의 직접 경험이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지역을 자신과 동일시하느냐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 지역이 당신의 내면에 어느 정도까지 스며들어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정서도 대면 접촉과 온라인 모드를 통해 확산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열 때 마다, 텔레비전 채널을 CNN에 맞출 때마다 보위와 관련된 사진과 동영상, 일화와 인용글을 볼 수밖에 없었다면, 또 로드와 마릴린 맨슨, 폴 매카트니가 그 돈키호테 같은 음악인과 만났을 때에 대해 전해주는 감동적인 일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면 보위의 죽음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모두의 관심이 그런 이미지와 이야기에 집중되며, 일종의 집단 경험에 빠져든 것이다.
<군중심리>에서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격화된다.”
정서 자극을 혼자 받아들이는 경우와 무리지어 받아들이는 경우를 연구한 결과에서도 정서 자극을 함께 받을 때 감정의 격화로 이어진다는 것이 확인된다.
슬픔이 온라인에서도 눈에 보이며, 테크놀로지로 시각화된 집단 감성이 환상적인 둥근 고리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동조화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직접 접촉하든 온라인에서든 마음속의 생각이나 감정이 주변에 쉽게 확산된다. 두려움, 사랑, 증오는 전염성을 띠며, 특히 뉴미디어를 타고 확산된다.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자신의 모든 욕구를 채울 수 없다.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들 덕분에 당신은 평소의 삶을 무리 없이 유지하며, 당신의 전문 지식으로 사회에 보답한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은 두려움을 느낀 남성 지원자들의 땀 냄새를 맡을 때는 감각 정보를 확대하려 했고, 혐오감을 느낀 남성 지원자들의 땀 냄새를 맡을 때는 감각 정보를 차단하려 했다.
여성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정확히 감지했다는 것.
우리의 행동이 예상보다 본능적으로, 또 자각의 한계를 넘어선 동기에 영향을 받아 무의식적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살펴보았다. 따라서 인간과 꿀벌이 똑같이 무의식적인 충동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더라도, 인간은 그런 충동을 이해하고 억제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이 둘의 가장 큰 차이이다.
02 우리 자아는 허구
단어를 사용해 생각과 이미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행위.
우리는 집단으로 어울리며 동조화하고 결속하는 경향을 띠는 데 그치지 않고, 진실감과 세계관도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지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개개인이 평생 동안 중요하게 생각한 책들로 꾸며진 내적인 도서관만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집단 도서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집단 도서관은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책들로 꾸며진다.
이야기에 담긴 철학과 심상과 감정이 이리저리 결합되며 형성된 의미를 우리가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이드는 한 줄도 읽은 적이 없었고 한 장면도 본 적이 없었지만, 하이브 마인드의 작용으로 줄거리가 그의 의식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린헌트는 우리가 문자로 쓰인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은 덕분에 보편적 인권을 깨닫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이입, 즉 정서적 연대이다. 작품의 문학성보다, 작품이 독자에게 어떻게 감동을 주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어떤 감동을 받느냐에 따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 자아와 타자 간의 경계가 흐려지기 때문인 듯하다.”
심리학자와 경제학자가 인간의 합리성에서 맹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신중하게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감정과 잘못된 경험 법칙을 근거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그 결과로 행동경제학이란 새로운 분야가 탄생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전해들은 것이고, 요점에 기반을 둔 집단 지식이며, 대체로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사회적 타자의 행동 방식에 절묘하게 맞추고,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우리 행동을 수정하기도 한다.
우리도 얼음물을 머리 위에 쏟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적 타자들의 대열에 참여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행하는 것이 실질적인 규범이고, 대부분이 어떻게 행동한다는 생각이 규범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이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는 규범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이 실질적인 규범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집단주의적 관점에서 말하면, 이런 규범이 이른바 문화라는 것의 근간을 이룬다. 심리학자인 마이클 토마셀로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서로 협력하기 시작하며 점점 더 큰 집단을 형성해가자 문화가 잉태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가장 먼저 구축한 것은 ‘공동의 상호작용’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협력하고 목적과 의도를 이해하는 능력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공동의 상호작용은 ‘집단 의도성’으로 진화했다. 다시 말하면 특정 집단의 규범과 윤리의식이 흡수되고 무의식화되었다. 집단이 점점 커져감에 따라, 우리는 더 이상 개개인을 추적할 수 없었고 개개인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는 동일한 부족에 속한 존재라는 표식이 필요했다. 그 표식은 이웃한 부족의 그것과 달라야 했다. 따라서 차별성을 띤 인간 문화가 잉태되었다.
우리만의 예법, 식사법, 사냥방법, 집을 짓는 방법 등 우리만의 사회 규범이 존재.
우리의 자아감을 형성하는 것의 대부분은 외부에서부터 은밀히 스며들었다.
리더와 유명인사처럼 이상화된 타자에게 더 쉽게 영향을 받는다.
인플루엔서에게 무료 제품과 무료 숙식권을 보내며, 그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그 제품을 언급하거나 사용하는 모습을 게시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회 규범이 사라지고 다른 사회 규범이 채택되는 티핑 포인트는 놀랍게도 25퍼센트에 불과했다.
“소규모 무리도 어떤 임계점에 이르면 기존의 사회적 관습을 확실히 뒤집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용인되던 것이 순식간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기업들은 소비자들에게서 파악한 사회 규범을 구체적으로 이용해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전략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전기 회사는 당신이 이웃과 비교해 얼마나 많은 전기를 사용하는가에 대한 보고서를 보여준다. 그 보고서를 읽는 당신의 표정에서, 당신이 에너지 소비와 관련된 사회 규범을 지키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세계관은 개인적인 사회 연결망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얼굴조차 마주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하이브 마인드를 통해 확산된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연결망을 구축해간다.
섕크와 에이벌슨은 의미 기억 같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실에 기반을 둔 것’처럼 보이는 기억도 실제로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지고, 자전적 기억의 일부이다.
당신이 뉴욕에서 자랐다고 말하느냐 네브래스카에서 자랐다고 말하느냐에 따라, 당신이란 사람에 대한 상대의 예측과 평가가 달라진다.
우리는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암묵적 연상을 시도하고, 그 상호작용이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관으로 발전한다.
정치적 신념도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떤 종류의 가치를 우위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주고받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무리 내에서 어린 자식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색다른 진화의 계기였다. 그런 노력을 ‘공동 양육’
무리에 속한 구성원들의 근원적 욕구를 이해하고 채워주는 능력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은 웹에서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허구적 인물의 욕구만이 아니라, 우리와 호흡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동기까지 이해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우리가 이야기 속에 이입될 때 우리는 등장인물이 되어, 그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그가 행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쓴 등장인물의 선택이 우리에게 진실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비평이다.”
우리가 작가와 공유하는 상상에서만 존재하는 등장인물이 그 허구적 세계를 이해하는 기준과 가치관에 상반되게 행동할 때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학습할 수 있다는 특별한 능력 덕분에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이 때 때문에 공감하고 협력하는 관습은 인간에게 특히 중요한 듯하다. 우리는 공감하고 자신을 타나에 투영해서 얻은 정보를 인식해 활용하는 신경학적 매커니즘을 갖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 정보를 활용하는 방법을 문화라는 과정을 통해 어린 시절에 어떤 식으로든 주입해야 한다.
이야기들은 협력, 더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를 강조한다.
이야기는 집단이 사회 규범과 문화적 가치를 구축하고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우리가 자유로운 시간에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켜도록 진화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신경이 한가한 시간에는 이야기를 꾸미는 데 몰두 하도록 진화되었다.”
‘평가’라는 용어는 어떤 사건의 중대성이나 참신성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고, 그 사건이 당신 목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를 행한다.
이 허브가 생선 타코에 기분 좋은 새콤한 맛을 더해줄까? 감독관의 대답이 미루어지는 것이 당신의 미래에 투자하겠다는 징조일까, 테크놀로지는 사회에 해로운 장치일까, 이 모든 것이 평가이다.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대응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평가가 바뀌면 그 결과로 감정에도 변화가 생긴다. 당신 자신의 내면을 유심히 관찰하면 그런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부부싸움, 친구 간의 다툼은 두 다른 평가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충돌의 원인을 철저히 논의함으로써 사회적 타자의 평가를 이해하면 분노가 눈 녹듯 사라진다.
이야기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생각은 행동을 예지하고 결정한다.
03 진영의 문턱
우리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대부분의 사람과는 공유하지 않는 감정과 경험에 그가 접근하는 걸 허락한다.
소중히 아끼는 내집단에서 한 걸음 나오면, 우리 내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 나는 용감한 것처럼 허세를 부리거나 표정을 고나리할 필요가 없다. – 그들은 우리의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있고, 우리가 도움을 필요할 때는 도움도 준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우정이라 칭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정체성의 출처를 찾으며 ‘그들’과 다른 ‘우리’를 형성한다.
공정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두 중대한 평가는 ‘결핍’과 ‘불안정’이다. 결핍이란 평가에서, 자원은 한정된 것이므로 경쟁과 다툼은 필연적인 것일 수 있다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불안정이란 평가에서는 현재의 위치가 취약해서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나가 떨어질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주변에 배를 채우기에 충분한 포도가 없으며(결핍), 우리는 포도를 구하려고 노력하지만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언제라도 낚아챌 수 있어야 한다(불안정).
워너는 대학생들이 정신 건강 문제로 고생하는 비율이 높은 이유가 이런 평가 방식에 있다고 보았다.
결핍과 불안정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경쟁과 이기심이 격화될 수 있고, 자원을 비축하거나 공짜로 얻으려는 행위에 대한 비난도 거세질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사회적 타자를 관찰하고 얻은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우리 생각은 우리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 생각은 멀리 뻗어나가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생각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확산 된다는 해석
인간의 공감은 ‘도덕의 원’안에 존재한다. 가장 안쪽 원에 속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가장 크게 공감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원에는 당신만 있다. 하나 밖에는 가족이 있고, 다음에는 마을 공동체, 다음에는 종족 집단, 다음에는 국가, 최종적으로는 인류에 이른다. 물론 더 나아가면 모든 생명체까지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의 경계가 자의적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직접 겪은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비교하고,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인식하는 방법을 다듬어간다. 하지만 이것도 맥락과 평가의 문제이고, 우리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이야기이다.
사회적 타자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먼저 그들과 동조화를 시도한다. 습관과 행동만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까지 맞추어간다. 문자 그대로 그들을 우리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신경 동조’
학생들은 서로 모르지만 앞으로 수년간 강의를 듣고 연구하며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과정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어가는 인간 집단이었다.
뇌의 차원에서 우리가 친구들과 세상을 어느 정도까지 유사하게 경험하고, 우리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친구로 삼느냐는 복잡한 문제의 답을 찾아 나섰다. 휘틀리는 이런 경향을 ‘신경 동종 선호’라 칭했고, 여기에서 동종 선호는 자신과 비슷한 것에 끌리는 경향을 가리킨다.
사회 연결망 전체를 측정.
친구의 친구의 친구들은 동영상에 비슷하게 신경이 반응하지 않았다.
두 가지 설득력 있는 가능성이 있다. 첫째로는 뇌에서 확인되는 상관관계는 공통된 삶의 경험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정의 발달에는 세상에 대한 반응을 맞춰가는 과정이 필수적이고, 그 결과가 뇌의 동조화로 나타난 것일 수 있다. 이 가정이 맞는다면, 함께 경험하는 삶의 시간이 길어지고 우정이 깊어감에 따라 뇌의 동조화는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가 자신과 세상에 비슷하게 반응하는 사람에게 처음에 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법이 비슷하면 해석과 기억도 유사하게 조정되어 동조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의 목표와 욕구를 더 정확히 추정하고, 그에 맞추어 우리 행동을 조정하며 사회적 상호작용과 사회적 친밀성을 더 돈독히 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는 강렬한 감정을 느끼면 주변 환경에서 유사한 특징에 눈과 귀를 돌리며 뇌 활동을 동조화함으로써 그 경험을 유사하게 받아들이고, 그 결과로 서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 상태를 맞추며 공유하는 동안 뇌 활동 패턴의 유사함을 보여주는 신경 동조의 예를 보았다.
이런 중첩은 대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경험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다.
내가 말하고 당신은 조용히 듣고 있을 때도 둘 모두가 대화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여하튼 우리는 어떤 사람이 친구로 더 적합한지 알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감정과 동조화가 낭만적 사랑에서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사랑과 관련된 모든 경험에서는 자신과 소중한 타자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생각과 시간, 목표와 우선순위가 뒤엉키고, 더 나아가 자아와 타자 간의 경계가 문자 그대로 해체된다. 물리적 자아의 엄격한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혼자인 독립된 자아를 일시적이더라도 환희에 취해 기꺼이 중단하고 누군가와 하나가 되는 더 없는 행복감이 아니라면 성행위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겠는가?
처음에는 사적인 감정이 전혀 없는 질문(전화를 걸기 전에 할 말을 연습해본 적이 있나요?)으로 시작해 점차 친밀감을 높여가는 질문을 사용하는 기법. 많은 질문이 구체성을 높여가며 두 사람이 서로 칭찬하도록 유도하고 “우리’를 사용해 대답하도록 유도한다.
낭만적 사랑은 호르몬 분비와 동기 부여가 관련된 감정적이고 인지적인 경험인 데다, 무척 광대하고 복잡한 감정이어서 마법이라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럴진대 일련의 질문들에 대답하고 어색하게라도 누군가와 눈길을 교환한다고, 낭만적 사랑 같은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까?
그 질문들은 당신과 상대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물어뜨리고, 당신의 가장 은밀한 바람과 기억과 두려움을 숨김없이 내놓도록 전문가의 손으로 설계된 것이다.
내면에 관련된 질문들이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타자에게 제기되면, 그가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당신과 공유한다.
‘우리’를 사용한 대답은 효과를 더해준다. 그런 대답은 두 사람에게 각자의 정체성을 병합하고, 두 사람이 한 사람인 것처럼 각자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라고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을 조금씩 자극해 경계를 지워가고, 생각과 욕망을 동조화하도록 유도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낭만적 사랑은 탈리아 휘틀리와 동료들이 사회적 타자와의 친밀함과 우정의 토대에서 연구하는 신경 동조의 극단적 사례일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을 비슷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선택하고, 그들과 동조한다. 낭만적 사랑은 동조화의 최정점일 수 있다. 두 사람이 해체되어 더는 개별적인 객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리는 평가, 우리가 머릿속에서 만드는 이야기에 내집단도 영향을 받는다.
한때 우리 정체성을 완벽하게 반영하던 집단에 우리를 묶어주던 끈이더라도, 우리가 나이를 먹고 관심사가 변하면 느슨해질 수 있다. 집단에 대한 평가와 도덕의 원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
쇼셜미디어는 인간에게 내재된 사회적 속성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04 소셜미디어의 장점과 단점
고정관념은 우리가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주고받거나 혼자 머릿속에서 지어내는 이야기이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는 우리를 이미 현실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끌어가고,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로 인도함으로써 공동체의 폭과 깊이를 더해줄 수 있다.
하나의 게시물을 떼어놓고 그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친구의 생활 리듬을 파악할 때 ‘주변 인식’을 빠뜨리지 않듯이, 게시물들이 큰 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풍경에 그 가치가 있다. 우리가 아침 식사로 먹은 것이나, 식사하며 읽었던 기사, 통근 기차에 대한 불만을 게시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삶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고, 그 지도를 사회 연결망과 공유하는 것이다. 톰슨은 “주변의 도구들이 이런 정보를 엮어서 한 눈에 보이는 태피스트리를 빚어내며, 그 결과로 더 완전하고 더 유혹적인 그림이 완성된다.”라고 말했다.
또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친구의 게시물이 중단되는 걸 눈치채면 곧바로 연락을 취해 힘든 일을 겪고 있는지 확인하거나,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곁에 있지 않는 사람들과 연결해줄 수도 있다. 손녀딸의 첫걸음을 담은 동영상을 받고 환한 미소를 짓는 할머니, 일손을 멈추고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게 하지만 그날의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문자 메시지, 친구가 보낸 짤방을 받고 폭소를 터뜨리는 대학생을 생각해보라.
우정과 사랑은 예부터 정신적 내면이 중첩되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주변 인식이 가능해짐에 따라 우리는 친구와 애인이 독자적인 공간에서 움직이며 무엇을 먹고 마시며,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언제라도 의식하고 확인할 수 있다.
‘눈팅’은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직접 글을 게시하고 댓글을 달며 공유하는 행위는 행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절친한 친구들로부터 받은 구체적인 반응(사진, 기억, 링크 공유)은 행복의 전조이지만, 눈팅이나 ‘원클릭 피드백(좋아요)’은 행복의 전조가 아니다.
이런 공동체는 많은 이유로 존재하는 공백을 메워준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이 주변에 없을 수도 있고 갑자기 이사할 수도 있지 않은가.
지리적 조건이나 인구 통계 혹은 우연에 기대지 않고 공동의 관심사를 기초로 연결망을 구축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것이 인터넷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소속감은 인간의 행복에서 무척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중첩되는 여러 정체성을 지니며, 그 정체성들이 우리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
온라인에서 우리의 경험이 조정되면, 결국 우리는 좁은 세계만 보게 된다.
이런 시대에 뉴스는 특정 정치 집단보다 대중 전체를 대상으로 짜였다. 달리 말하면, 뉴스가 한층 더 객관적이었다는 뜻이다.
미국인에게는 배경과 경험이 달라도 동일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국민 의식이 있다. 선스타인은 이런 공유된 경험이 국민 의식에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행동은 강화하고 어떤 행동은 소멸하는 연속적인 피드백고리에서, 상대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면 우리도 크게 영향을 받아 사회 규범을 준수하는 방법으로 행동하고 말하게 된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동조화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터넷의 비동조화는 자연스런 상호작용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 찡그린 얼굴, 한숨, 갸우뚱한 고개 같은 미묘한 단서에 반응하며, 그런 피드백에 근거해 다음 말을 조절한다. 이런 단서들은 온라인에 없다.
우리 사회에는 동료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인종차별, 인권 탄압, 성희롱 같은 행동을 규제하는 규범이 있다. 이런 사회 규범의 강요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잘못된 정보를 퍼뜨린 사람을 처벌하는 메커니즘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지 못했다.
인간은 사기꾼을 알아내서 벌을 주는 시스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진실함을 평가하는 시스템(얼굴표정, 냄새, 목소리)까지 진화시켰다.
05 자아화와 타자화
소셜미디어를 통해 고향 주를 비롯해 많은 곳에서 눈이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창밖에서 똑같이 부드러운 눈이 흩날리는 걸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들과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짐의 목표는 팟캐스트를 통해 과학자들이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에게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공간을 제공하고, 그 자신을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최근 무엇에 의문을 품는지 알아보고 그들과 함께 웃는 공간을 자주 갖는 것이다.
절친한 사회적 타자가 우리 자아감에 어떻게 동화되는지를 뇌의 차원에서 연구하고 있다. 절친한 사회적 타자와 일정한 수준의 친근함에 이르면, 우리의 신경세포는 우리 자신과 타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게 짐의 생각이다. 짐은 그 경계를 ‘사회적 기준선 이론’이라 칭하며 인간은 혼자 지내도록 진화되지 않고 함께 지내도록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 뇌는 자신의 뇌 지도, 즉 무엇이 자아이고 무엇이 타자이며, 무엇이 우리이고 무엇이 우리 친구인지를 그려놓은 지도에 친숙한 타자들을 넣어두기 때문에 그런 믿음이 생긴다.
손을 잡아주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위협의 처리와 관련된 뇌 영역이 훨씬 더 활성화되었다. 더구나 낯선 사람보다 배우자가 손을 잡아주는 경우에는 활성화 정도가 훨씬 적었다.
짐의 연구를 종합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압력에 덜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뇌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지배하는 영역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낮아진다.
인간은 무리지어 협력하며 일하고 싶어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현대 인간 사회는 많은 면에서 이런 내적 욕구를 간과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서구 사회가 물질적으로 부유해지고 의식주에 대한 구성원의 기본적인 교구를 충분히 채워주지만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건강이 점점 악화되는 근원은 이런 내적 욕구의 간과에 있다. 결국 물리적인 욕구는 채워졌지만 개인주의가 심화되며 심리적인 욕구는 충족되지 않고 방치 된다는 뜻이다. 국가가 전쟁을 시작하면 자살률이 떨어지고, 자연 재앙이 닥치면 국민이 하나가 되는 의외의 단결력을 보여준다.
전쟁 참전 군인은 다른 트라우마 보다 일상의 삶으로 복귀 시 수반되는 사회적 유대감과 목적의식의 상실에서 더 큰 고통을 받는다.
긴밀하게 맺어진 집단을 떠나, 대부분의 구성원이 밖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는 사회로 복귀한다.
궁극적인 목적은 뇌가 친밀한 것을 행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 당신은 나에게 친밀하게 느껴질까요? 친밀하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알고 있어 어느 정도까지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란 뜻이다.
우리는 친밀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친밀함은 그보다 깊이 내려가고, 뇌가 자아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와 밀접히 관련된다.
생물학적 유기체는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계를 지어야 합니다. 인간은 무엇이 자아이고 무엇이 타자인지를 알아내는 탄력적이고 가변적인 방법을 확대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관적으로 결정된 경계를 친밀하고 선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누구는 아닌가를 규정하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좌절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헐뜯게 되고, 죽음의 공포가 심화되면 내집단의 결속력이 강화되고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이 격화된다.
탈인간화
‘금수 같은’ 속성을 지닌 존재로도 묘사된다. 이런 평가들은 본능적인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을 향한 최악의 죄는 인간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무관심한 것이다. 무관심은 비인간적인 행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미국에 해악을 안길 잠재적인 암덩어리다.” “샌버너디노 테러 공격에서 입증되었듯이 무슬림은 미국인에게 큰 위협거리이다.” 라는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 발언을 지지하는 경향을 띠었다.
탈인간화된 언어가 정치 성향에서 우익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
사회적 결속을 유도하는 미묘한 메커니즘이 탈인간화를 부추길 수 있다.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행동을 조율하는 반면, 개인들은 개인적인 신념과 바람 및 도덕적 기준을 위배하는 행동과 말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권위에 순종하고 순응하는 사회, 구성원이 부화뇌동하는 경향이 높은 문화권에서 외집단에 대한 폭력과 종족 학살이 더 빈번하다.
당신이 외집단의 탈인간화라 생각하는 것도 결국 내집단의 편향성에서 시도된 새로운 틀 짜기일 수도 있습니다. 집단들이 대립하고 위험이 감지되면, 사람들은 자원을 외집단에 할애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욱 결집하며, 바깥쪽보다 안쪽에 신경을 집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집단은 우리를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자아이고 무엇이 타자인지 우리 뇌가 인지하는 데도 개입한다. 이런 이유에서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이 위협을 느낄 때 우리도 덩달아 위협을 느낀다.
탈인간화하는 것이 아니라 탈자아하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내집단에 속한 사람과 같은 식으로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일부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를 인간적으로 보지만 선택된 사람만을 우리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진화로 얻은 우리 본성은 협력을 지향하므로 내집단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과 폭력은 훨씬 나중에야 생긴 것이고, 문화적 산물일 가능성이 더 크다.
본능보다 문화와 평가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익명성은 행동에 대한 사회적 결과에서 자유롭다는 인식을 부추길 수 있다.
나치 구호를 외친 사람
트위터도 신속히 움직이며, 그를 비롯해 사진에 담긴 많은 사람의 신상 털기에 나섰다. 그들에게 도덕적 비난과 사회 규범을 위반한 죄값이 가해졌다. 소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직장을 잃었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도 있었다. 사타노비치는 모교에서 번질나게 시위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네바다 주립대학교는 미국 수정 헌법 1조에서 보장한 권리로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구역질나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의 견해도 어둡고 축축하며 숨겨진 곳에서만 자라고 번창합니다. 따라서 그의 견해가 환한 곳에 나와, 더 나은 견해와 경쟁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06 내부의 적
대부분의 공포영화가 연쇄 살인범, 귀신 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상황 –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현실이 하이브 마인드, 즉 다수의 합의로 인해 혼란에 빠지는 비정상적 상황 – 에 대한 우리의 고질적인 두려움을 다룬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 나도 죽은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어. 내 아이가 적그리스도일지도 몰라. 괴물이 꿈속에서 나를 뒤쫓고 나를 죽일거야.” 그러나 도움을 줄 만한 중요한 사람이 의심하며 주인공의 말을 믿지 않는다. 게다가 주인공이 편집증적으로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며 집ㄷ단으로 배척당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런 모든 두려움에 내재한 원초적 두려움이 실제로는 현실과 단절되었다는 두려움이고, 괴물의 선택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외계인은 외국인 혐오, 유령은 죽음과 내세에 대한 두려움, 흡혈귀는 몸의 욕구에 대한 두려움
탈인간화도 전염된다.
패거리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영 : 좀비
가장 걱정스런 것은 좀비의 파멸에 대해 말하며 느끼는 은근한 쾌감입니다.
어떤 유형의 인간이 고문하고 얼굴에 총을 쏘는 걸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1920년대에는 대부분의 이미자가 백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카톨릭신자와 유대인이었던 까닭에 여전히 ‘타자’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카톨릭신자는 교황에게 어쭙잖게 충성하고, 유대인은 서로에게 충성하는 까닭에 클랜은 카톨릭신자도 유대인도 미국 문화에 동화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급격히 진행되는 일자리의 현대화, 인종과 성별이 사회를 제약하는 요인들로 부각되며 다양한 형태로 주어지는 관심, 용인 가능한 언어와 행동으로 여겨지는 수준에 대한 사회 규범의 변화
클랜이 국가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삶에 더 전통적으로 접근하던 과거를 아쉬워하며 다양성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백인 프로테스탄트의 생활방식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존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클랜은 우리가 세운 평범함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중산층이고, 교육을 받은 남자와 여자이며, 이런 백인 우월주의 사고방식에 매몰된 사람들입니다.
청중들은 ‘저런, 그들도 우리와 너무 비슷하군요’라고 반응합니다.
1920년대의 클랜은 추종자들에게 기존의 공동체를 제공한 까닭에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가족 소풍으로 모였고, 공동체에서 함께 자원봉사했으며, 거리를 행진하며 집단 의례의 희열을 만끽했다.
집단적 속성을 활용했다. 추종자들은 의미를 공유하는 종족으로 환영을 받았다. 클랜의 말과 글은 추종자들에게 집단 정체성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건과 같은 의상도 조직원의 탈개인화를 부추기며, 그가 조직에 속해 있더라도 독립된 자아라는 걸 잊게 만들고, 원대한 목표에 몰두하게 해줄 수 있다. 이런 탈자아는 개인의 정체성을 접어두고, 집단 의지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불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회원들과 함께 할 때 어떤 감동을 느끼는지, 또 클랜의 일원이 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에 대해서도 글을 썼습니다. 의례는 몸이 기억하게 합니다. 몸에 기억을 심어주기 때문에 모두가 그 행동을 계속하게 됩니다.
자신의 운명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급증하며 개인적인 정체성을 포기하더라도 집단으로 뭉치려 할 때 대중운동이 일어난다.
그들이 완전한 전향자로서 대중운동에 가담하면 새롭게 태어나 긴밀하게 다져진 조직의 일원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한편 동조자로서 대중운동에 끌리면 그 운동의 노력과 성취와 가능성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자부심과 자신감과 목적의식을 갖게 된다. 대중운동의 세력화와 성장은 개인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열정을 얼마나 자극하고 채워주느냐에 달려 있다.
추종자들은 자유 선택의 짐이라 생각되는 것을 기꺼이 포기한다. 호퍼는 “해방감은 불안정한 개인적 존재의 부담과 두려움과 무력감에서 벗어났을 때 오는 것”:
자신과 가족 혹은 사회의 기대치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사람들에게 이런 끌림은 무척 강력할 수 있다.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개인이 되는 것보다, 전체 태피스트리의 한 가닥이 되는 게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화적 지배력을 상실했다는 불안감, 그들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이 집결해 복수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공유할 수 있다. 실제로 클랜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기사라 칭하며 전사의 모습으로 꾸미기도 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섬뜩한 것을 믿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도마뱀 인간?
음모론, 집단행동, 광신적 종교 집단에는 하이브 마인드가 내재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파악하기 힘든 현실의 사회적 속성 및 소속과 확신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구를 이용한다는 것도 같았다.
대부분의 종교에는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있고,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지침, 인도자의 지도하에 함께 모여 노래하고 찬송하는 모임, 조직을 위해 돈을 바치는 시간이 있다.
건강법, 사업체, 훈련법 같은 세속적인 것을 중심으로도 폐쇄적인 강력한 집단이 형성될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공상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편향적이고 핵심에만 기반하는 하이브 마인드에 의존하기 때문에 진실과 공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들을 성공의 길로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 – 사람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지켜본다고 생각하는 편집증과 피해망상 –
구성원에게 공동체가 공격받고 있으므로 방어에 나서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보다 내집단의 결속을 강력하게 다지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적은 외부의 적이다.
외부의 적은 당신과 닮지 않은 사람, 즉 당신이 먹는 것을 먹지 않고, 당신이 입는 옷을 입지 않으며, 당신과 똑 같은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은 당신과 맞지 않는 타자이고, 따라서 무척 의심스런 존재이다.
사악한 것에 맞선 투쟁으로 해석하는 경향.
외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이 증대하고, 이런 결과는 제한적인 정책(전쟁 지원, 이민의 제한, 정부 규제의 강화)을 원하는 진영의 비위를 맞추는 데 도움이 된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외모 뒤에 감추어진 ‘타자’였다. 이런 두려움은 순응하는 집단화에 매몰되고 집단행동에서 개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
“내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 극도에 달하면 물리적인 세계도 진짜가 아닌 것, 실제의 세계를 은밀히 감추고 있는 얇은 껍질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웃들이 서로 등을 돌리고 견제하며, 무고한 사람이 학대받을 수 있다.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은 결국 개인과 집단을 구분짓는 모든 것이며 당신이 믿을 만한 종족에 속한 사람고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그 밖에도 두 종류의 적이 더 있다. 사회에서의 지위와 관련된 적으로, 지위가 당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래에 있는 사람이 당신을 견제하고 방해할 수 있다.
아래의 적에 대한 피해망상이 위험을 과정하고, 소외된 계급을 탈인간화한다.
아래의 적은 “엄청난 식욕을 가진 야수이며,~~”
음모론적 사고의 기본적 원리를 이야기 했고 이제는 사람들이 극적인 집단 사고에 빠지는 이유와 과정을 살펴보자.
과정은 점진적이다.
처음에는 글을 읽거나 관련된 모임에 처음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음 단계로 당신은 공동체 의식을 얻거나, 그 주제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든다.
사회적 지원 시스템에서 배제되었다는 소외감. 사회 연결망이 붕괴된 사람이 특히 위험하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난 대학생, 최근에 배우자를 잃은 미망인과 홀아비, 일자리 때문에 생소한 지역으로 최근에 이주한 사람 등.
불확실성, 특히 정체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집단과의 동질감을 부추기는 듯하다. 특히 강력한 믿음과 고유한 특징을 지닌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불확실성 정체성 이론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불확실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그 불확실성을 해소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받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채택하는 주된 방법이 어떤 사회 집단, 특히 강력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특정한 행동과 세계관을 금지하는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이론.
회원을 가장 괴롭히는 삶의 문제를 찾아내는 것.
모집자의 역할은 그 문제를 찾아내서, 사이언톨로지가 그 정신적 상처를 해결하거나 치유해줄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컬트가 구성원에게 주는 것은 개인적인 성취, 즉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당신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컬트는 완전한 자기 포기, 즉 외로운 자아가 집단에 몰입하기를 요구한다.
내면의 욕구를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개인적인 환희, 즉 삶을 목적의식과 의미로 채우고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기쁨을 누렸다.
결국에는 그들만이 당신의 사회적 인맥과 연결끈이 된다. 따라서 그 집단의 신념 체계나 행동 방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소외되고 따돌림 받게 된다.
대중운동의 공식은 항상 똑같다. 현재는 견디기 힘들고 끔찍하며, 과거의 찬란함이나 앞으로 도래할 미래의 영광 같은 것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모두가 영광스런 미래를 앞당기는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그래야 하찮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경쟁하는 무의미한 일상에서 벗어나 원대한 목적에 참여할 수 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떳떳하게 그 운동에 참여 해야 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역사책은 아직 완전히 쓰이지 않았다.
이런 조직의 뛰어난 지도자들은 절대적인 확신과 자신감이 넘치고, 사실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거침없이 말하며, 반항을 즐기는 모습을 과시하고, 대중집회 같은 볼 만한 구경거리를 즐겨 사용한다. 그들은 “좌절한 사람들의 영혼을 짓누르는 분노를 명확히 표현하며 정당화 한다.”
그 좌절한 사람들은 진정 곤궁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라, 성공이나 권력을 손에 넣지 못해 목적을 잃고 방황하며 따분하게 지내는 실패자들인 경우가 많다.
절대적인 확신. 답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는 확신의 선물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간절히 원한다.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갈구하고, 원대하고 감동적인 진실을 원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진실하고 확실한 것들을 갖춘 조직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질서와 구조를 단순화함으로써 불안감을 없애준다. 이런 조직들의 교리는 확고하고 확실해야 한다. 조직에 가입하면 모든 의혹이 사라진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컬트의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를 제거함으로써 확실성을 확보한다. 조직의 관례와 규범은 생각을 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도록 유도한다. 한마디로, 선택의 부담을 완전히 없애준다.
여러 단계의 자기 개발을 통해 차근차근 올라가는 복잡한 성장 과정을 ‘완전한 자유를 향한 다리’라고 칭한다.
그래서 컬트가 있는 것이다. 간절히 원하는 소속감과 사회적 인정, 점진적인 몰입, 기존 연결망의 가지치기, 사악한 악의 세력과 벌이는 서사적인 투쟁에 선택되었다는 자부심만이 아니라 개인적 아픔을 치유하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괴롭히는 의혹과 두려움과 깊디깊은 불안감을 덜어주는 절대적인 확신을 컬트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에 찍힌 낙인은 자부심을 주면서도 인기를 끄는 요인이 되는 듯하다.
이렇게 낙인찍힌 지식은 주류 사회에서 배척된 것이 맹신자들에게는 음모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지며 더욱더 증폭된다.
“보라고! 우리 입을 막으려고 하잖아!”
일반대중에게 동료 학자의 심사를 받는 진정한 과학 학술지와 그럴듯하게 꾸며진 학술지를 구분할 능력이 없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알아가고, 그것들과 관계를 파악하려면 교육과 대중문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우리는 전문가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간다.
07 난도질
테크놀로지가 당신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그 테크놀로지를 선택했을 때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당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감정을 배출하는 다른 수단과 행동,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왜 어떤 사람은 형언할 수 없는 시련을 견뎌내고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악몽의 숲에서 방향을 잃고 위협에 과민하게 반응하며 그 후에도 끝없이 트라우마에 시달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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