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잡음은 자연의 섭리이다.
존 업다이크
서문
바얌은 신경망과 인류문명의 본질에 관해 더 관심이 있었다.
"문명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하나의 독립체로서 복잡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문명을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놋쇠 같은 것일까요? 개구리 같은 것일까요?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복잡계를 연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문명은 놋쇠보다는 개구리 같은 면이 많다. 한 가지는 진화한다는 것이다. 너무 복잡한 나머지 사실상 독립된 부분들로 나눌 수 없는 것을(생명체 같은것) 설계하고 창조하는데에는 진화하고 적응하는 과정이 필수이다. 사회경제계는 생태계와 비슷하고, 사실상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핵심은 패턴 형성에 관한 연구이다.
이론물리학은 기본 대칭성 개념 위에 세워졌습니다. 때문에 포용하기 어려운 패러다임 전환이 있어야 한다.
카오스는 '정보'의 창조자이다. 후버만은 정보망에서 예기치 않게 나타난 복잡한 행태를 보았던 것이다.
프롤로그
1970년대가 되자 몇몇 과학자들은 무질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불규칙성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으려 했다.
'동역학계'라는 새로운 학문을 정립
단순한 모델 속에 숨어 있는 놀랄 만큼 복잡한 형태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모양이야말로 자연의 구성 원리라고 생각했다.
10여 년 뒤 카오스는 과학의 구조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운동의 대명사가 되었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카오스가 상태보다는 과정의 과학이고, 존재의 과학이라기 보다는 생성의 과학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체적인 것을 찾고 있다고 믿었다.
카오스 이론은 결정론적 예측 가능성이라는 라플라스 적 환상을 깬다.
우리가 보고 만지는 우주, 말하자면 인간 척도에 있는 대상들에 적용된다. 일상의 경험과 세계의 실제 모습이 탐구 목표가 된 것이다.
호킹은 소립자물리학으로 자연의 법칙을 이해한다 해도, 가장 단순한 계 외에는 이들 법칙을 적용하는 방법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난류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거침없이 점점 더 무질서가 증가하는 엔트로피가 지배하는 우주 속에서 질서는 어떻게 생성되는가?
1960년대에 극히 단순한 수학 방정식으로 폭포수와 같이 격렬한 계를 빈틈없는 모델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인식하면서 현대 카오스 연구가 시작되었다.
초기조건의 민감성이라는 현상에서 시작.
제1장 나비효과
물리학자들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를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리처드 파인만
항상 수학적 법칙을 따르면서도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 패턴들의 진가.
과거에는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라, 그러면 우주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라는 숨어 있는 철학이 바탕이었다.
초기조건과 (우주의 진화를 이끄는) 물리법칙을 통해 우주의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는 것.
행성운동 계산이 너무 정확해서 이것이 예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었다.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사실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바람과 구름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할까?
날씨는 훨씬 더 복잡한 현상이지만, 역시 동일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로렌츠는 원시적인 컴퓨터를 가지고 기상 현상을 뼈대만 남을 때까지 단순화시켰다. 그럼에도 상당히 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 로렌츠는 시간이 갈수록 익숙한 패턴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주 정확하게 반복되지는 않았다. 패턴이 있었지만, 교란도 있었다. 질서정연한 무질서였다.
주기가 반복되면서도 결코 똑같은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 파동선의 규칙성은 최면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드디어 예보가의 눈에 계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로렌츠는 뜻밖의 것을 보게 된다.
1000분의 1 정도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반올림한 3자리 숫자를 입력했던 것이다.
수치상의 작은 오차는 한 줄기 미풍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조그만 오차가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드러났다.
로렌츠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수학적 직관에(동료들은 나중에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가 철학적으로 어긋난 느낌이었다. 사고방식의 근간이 흔들렸다.
사람들이 먼 앞날을 예측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태양이나 달과 같이 우리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물리 현상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왜 대기에 대해서는 같은 예측을 할 수 없을까? 그 둘의 차이점은 단지 서로 다른 유체계라는 것뿐이고, 법칙의 복잡함도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비주기적인 형태를 보이는 어떤 물리계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9~80년대만 해도 컴퓨터를 이용한 경제 예측과 세계 기후 예측은 아주 닮아 있었다. 이는 측정으로 얻어진 초기조건 -기압이나 통화공급-을 바탕으로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계량경제학 모델로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로렌츠는 자신의 날씨 모형 안에 들어 있는 무작위성 너머를 보았다.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를 보았으며, 무작위성으로 가장한 질서를 보았던 것이다.
로렌츠는 정상 상태를 찾을 수 없는 계, 즉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기는 하지만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는 계들을 수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점점 더 몰두했다.
나비 효과는 전문용어로 '초기조건의 민감성'이라 부른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사건의 연쇄가 조그만 변화를 증폭시키는 임계점을 가지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로렌츠의 동료들은 끊임없이 기계적으로 계산을 반복하는 12개의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날시 모델이, 비주기성과 초기조건의 민감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놀랐다. 어떻게 그러한 풍부함과 예측 불가능성, 즉 카오스가 단순한 결정론적 계에서 생겨날 수 있을까?
로렌츠는 날씨 문제를 제쳐두고 이런 복잡한 형태를 만드는 훨씬 단순한 방식을 찾았다. 결국 그는 3개의 방정식만으로 이루어진 계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비선형 방정식이었다.
이렇게 서로 얽힌 변화 가능성 때문에 비선형성을 계산하기가 어렵지만, 이는 또한 선형계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풍부한 운동 형태를 만들어낸다.
유체역학에서 모든 현상은 하나의 표준 방정식인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으로 요약된다. 방정식에는 유체의 속도, 압력, 밀도 및 점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지만 비선형적이다.
로렌츠의 계가 대류를 완전히 모델화하지는 못했지만, 실제계와 아주 유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를테면 구식 발전기에서 전류는 자장 속에서 회전하는 원판 내에서 흐르는데, 로렌츠의 방정식은 이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어떤 때는 발전기가 스스로 역전하기도 한다.
아마 지구발전기는 자신만의 카오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정론적 비주기성 흐름
애초 로렌츠가 이 그림을 보여준 이유는 "이것은 복잡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카오스의 풍부한 구조가 거기에 모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로렌츠는 물리학자인 우리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직감한 형태를 보여주는 일반화된 혹은 추상화된 모형은 외부 세계의 몇몇 측면의 특성이었음을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를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었던 거지요. 한참 후에야 우리는 로렌츠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제2장 혁명
당연히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통상적인 범위 바깥의 통계라 불리는 것에게.
스티븐 스펜더
전문 과학자들 역시 자연현상을 짦은 시간에 불확실하게 보았을 때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고통과 혼란에 쉽게 빠진다. 이런 부조화가 -과학자의 사고방식을 바꿀 때- 가장 중요한 진전을 가능하게 한다. 쿤이 주장하듯, 그리고 카오스 이야기가 시사하듯.
1962년 쿤이 과학자들의 연구 방식과 과학혁명의 발생 방식을 다룬 책을 처음 출간하자 찬사만큼 반대도 들끓었다. 쿤은 지식이 증가하고 새로운 발견이 계속 덧붙여지면서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고, 새로운 이론은 새로운 실험적 사실이 이를 필요로 할 때 출현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비판하고 나섰다. 또 과학은 물음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질서정연한 과정이라고 보는 견해에 반기를 들었다.
전문 용어와 수학기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연구하는 과학의 토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할 많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쿤의 생각에서 핵심은 이렇다. 정상과학을 문제풀이로 본다는 점이다.
"정상 조건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는 발명가가 아니라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 수수께끼는 과학자가 현존하는 과학 전통에서 명시할 수 있고 또 풀 수 있다고 믿는 것들이다."
그리고 혁명이 있었다. 새로운 과학은 기존 과학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출현한다. 종종 혁명은 학제적 성격을 띠기도 하는데, 이 말은 전문 영역의 정상적 경계를 벗어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확신을 하지 못하고 위험을 감수한다. 혼자서 연구하는 몇몇 자유사상가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며, 동료에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것조차 꺼린다.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지적 흥분도 있었다.
카오스는 물리학자들에겐 너무 추상적이었던 반면 수학자들에겐 너무 경험적이었다.
개념이 피상적이면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개조하도록 하는 개념들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한 카오스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 없이 연구한다는 것은 수학자에게 자기학대나 다름없습니다. 그림이 없이 어떻게 이 운동과 저 운동의 관계를 볼 수 있을까요? 직관을 어떻게 전개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과학의 실험용 쥐는 진자였다. 진자는 고전역학의 상징이나 구속된 운동의 전형이며, 시계 장치와 같은 규칙성의 표본이었다. 진자는 막대 끝에서 중력의 힘만으로 흔들린다. 진자 만큼 난류의 불규칙성으로부터 거리가 먼 것이 또 있을까? (진자 운동에서 불규칙성을 찾아냄)
갈릴레오가 본 진자의 규칙성은 단지 근삿값일 뿐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동역학계에 카오스가 숨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몇몇 화학반응은 심장박동과 마찬가지로 진자운동과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 한 물리학자가 썼듯, 예상치 못하게 이런 문제들은 "생리학과 정신의학, 경제 예측, 나아가 사회의 진화 문제로' 확대되었다.
한편으로는 제동이 걸리고 한편으로는 추진되는 계가 평형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이는 평행 상태가 아니며, 이 세계는 이런 계들로 가득하다. 날씨부터가 운동하는 공기와 물의 마찰 그리고 우주 공간으로의 열의 발산에 의해 제동이 걸리고 태양에너지의 끊임없는 유입에 의해 추진된다.
하지만 1960~70년대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이 진자를 다시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 아니었다. 예측 불가능성은 그저 이목을 끄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카오스 동역학 연구자들은 단순한 계의 무질서한 운동 행태가 '창조' 과정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무질서한 행태는 복잡성을 만들어낸다. 풍부하게 조직화된 패턴, 때로는 안정되고 때로는 불안정한, 때로는 유한하고 때로는 무한한, 하지만 언제나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매력을 지닌 운동 행태를 만들어냈다. 바로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진자를 가지고 놀았다.
전통적으로 역학자들은 계의 방정식을 밝혀내면 그 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리학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자운동의 기본적 매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했지만, 장기간에 걸친 운동에게까지 확대시킬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미시적인 것은 아주 명쾌하게 이해했지만, 거시적 운동 행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계를 국소적으로 이해하는 전통, 즉 메커니즘을 분리하고 그런 다음 다시 이를 결합시키는 전통이 깨지기 시작했다.
위상수학과 동역학계를 연결함으로써 우리는 모양을 이용하여 어떤 계의 모든 운동 행태를 가시화할 수 있다. 단순한 계라면 모양은 일종의 곡면일 것이다. 복잡한 계에서는 다차원의 다양체가 될 것이다.
국소적으로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안정적인 것이다.
(주식이 내일 오를지 내릴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인 흐름은 예측 가능하다)
물리학자들은 스메일이 수학의 모든 분야를 현실세계로 되돌려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이저호 사진을 연구하던 천문학자들은 목성이 사실상 전부가 움직이는 유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체역학자들은 난류 한가운데에 있는 안정성이라는 섬을 이해할 길이 없었다.
소용돌이는 나타났다가 하루도 되지 않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붉은 반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커스는 이미지들을 모아 영상을 만들었다. 그러자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NASA의 실물 사진에 나오는 거대 반점과 놀랄 만큼 비슷한 타원체 모양이 되어갔다. 마커스가 말했다. "정말 기쁘게도 작은 규모의 카오스적 흐름 가운데서 거대 규모의 반점이 보였습니다. 카오스라는 바다에 아주 작은 필라멘트 같은 구조가 있었습니다."
반점은 자기조직화하는 계다. 주변에 예측할 수 없는 혼란을 일으키는 것과 똑같은 비선형적 비틀림에 의해 만들어지고 규제된다. 안정된 카오스인 것이다.
마커스는 결국 결정론적 계는 단순한 주기적 행태 이상을 만들 수 있다는 로렌츠의 고휸을 깨닫는다.
제3장 생명체의 번성과 감소
수학적 발전의 결과는
합당한 생물학적 행태에 대한 직관과
끊임없이 비교 검토해야만 한다.
이런 검토에서 불일치가 드러나면
다음의 가능성을 확인해야 한다.
a. 잘못은 형식적인 수학적 발전에서 비롯됐다.
b. 최초 가정이 부정확했거나 너무 심하게 단순화되었다.
혹은 두 가지 다이다.
c. 생물학 분야에 관한 직관이 부정확하게 발전됐다.
d. 통찰력 있는 새로운 원리가 발견됐다.
하비 J. 골드, <생물학적 계의 수학적 모델>
생태학자들에게 자연계는 복잡한 실험실이자 상호작용하는 500만 종들의 도가니와 같은 곳이다. 아니 5000만 종? 사실은 생태학자들도 모른다.
생태학자들은 수학적 모델을 이용하면서도 항상 그 모델이 복잡한 현실세계의 빈약한 근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규칙적인 방정식이 불규칙한 행태를 낳을 수 있다면, 생태학자들은 뭔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집단생물학에 나오는 방정식은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한 단편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모델보다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생명과학에서 연구하는 실제 현상은 물리학자의 실험실에서 볼 수 있는 어떤 현상보다도 복잡하다.
생물학자의 경우 특정한 동물의 개체군만 봐서는 결코 적당한 방정식을 추론할 수 없다.
생태학자들은 몇 세대 전부터 이런 함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생태학자들은 개체수가 증감을 계속하더라도 근본적 평형 상태 주변에서 진동할 것이라 추측했다. 평행 상태는 중요했기 때문에 생태학자들은 평형 상태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스메일은 자신이 한때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카오스를 이 기상학자가 '10년 전'에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소수만이 자연의 본질이 얼마나 비선형적인지를 이해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비선형 매개변수 값을 변화시키던 메이는 계의 특성이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매개변수가 작을 때 메이의 단순 모형은 정상 상태에 도달한다. 매개변수가 클 때 정상 상태는 깨지고 개체수는 두 개의 값 사이에서 진동한다.
메이는 피드백 고리를 활성화한 다음 매개변수의 값을 수백 번씩이나 바꾸어가며 연속된 숫자들이 고정점으로 귀결되는 지 (과연 귀결되기는 하는지) 면밀히 조사했다.
매개변수가 3을 넘자 갑자기 그래프 선이 두 개로 갈라졌다.
결과로 나온 주기적 행태는 또다시 안정적이었다. 개체수 시작 값은 서로 달랐지만 똑같이 4년 주기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들 숫자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래프를 만드는 것이다.
프리먼 다이슨 같은 물리학자에게 '전기 충격'처럼 다가왔다. 직관과는 너무 상반되었기 때문이다.
"카오스는 도처에 존재하고 안정적이며 구조적이다."
명석한 수리물리학자인 야샤 시나이는 재빨리 유사한 계를 열역학적 용어로 해석했다.
요크와 메이는 '주기 배가'에 굉장한 충격을 받고, 그 충격을 과학자 집단에 전달한 최초의 사람들이다.
수학자 호펜스테트는 1000여 개의 각각 다른 매개변수의 값과 그 결과를 컴퓨터 화면에서 영화로 찍었다. 분기가 나타났고, 그다음에는 카오스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카오스의 불안정성 속에서 작은 바늘 같은 질서가 나타났다.
메이는 유전학, 경제학, 그리고 유체역학 등과 같은 분야에서 유사 사례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생태학 분야에서 일어난 논쟁의 핵심은 개체수 변화의 성격과 연관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가 질서정연하다고 보았다. 예외는 있지만 개체수는 조절되며,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로 생각했다. 예외는 있지만 개체수는 불규칙하게 변동한다는 것이다.
개체수가 안정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개체수가 어떤 결정론적 메커니즘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개체수가 불규칙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론적 시그널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를 압도하는 예측 불가능한 환경적 요인에 의해 개체수가 좌우되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결정론적인 수학이 안정적 변화 행태를 만들어내든가 무작위적인 외부 잡음이 무작위적인 변화 행태를 만들어내든가 둘 중 하나였다.
이런 논쟁의 맥락에서 카오스는 놀랄 만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단순한 결정론적 모델이 무작위적 행태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변화 행태는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행태의 어떤 부분도 잡음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발견은 논쟁의 핵심을 꿰뚫은 것이었다.
메이는 생물학자들이 보통 갖는 직관과 상반되는 결과들을 계속 보게 된다. 전염병, 홍역, 소아마비, 풍진과 같은 것들은 모두 감염자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한다. 이런 진동을 비선형 모델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메이는 만약 이런 계가 어떤 갑작스런 자극을 -예방접종- 받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바라던 방향으로 순조롭게 변할 것이라 직감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진동이 시작될 가능성이 많다. 비록 장기적인 추세가 확실하게 아래로 향한다 할지라도.
카오스 연구는 이론생물학자에 엄청난 자극을 주면서, 생물학자와 물리학자를 학문적 동반자로 만들었다.
분자생물학자들은 단백질을 움직이는 계로 보기 시작했다. 생리학자들은 인체 기관을 정적인 구조가 아니라 규칙적 혹은 불규칙적으로 진동하는 복합체로 보았다.
무작위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단순한 모델에서 나올 수 있다면? 동일한 단순 모델이 각기 다른 분야의 복잡성에 적용될 수 있다면? 메이는 자신이 이제 막 탐구하기 시작한 놀라운 구조가 생물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카오스는 자연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고칠 수도 있었다. 또한 시장의 경기 변동 순환에서부터 소문의 확산 과정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선형수학에 기초한 정규교육은 과학자들에게 비선형 현상이 압도적인 세계를 오해하게 만들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연구뿐만 아니라 정치나 경제 같은 일상적인 세계에서도 좀더 많은 사람들이 간단한 비선형계가 필연적으로 단순한 동역학적 성질만을 갖는 것은 아님을 인식한다면 우리 모두는 더 나아질 것이다."
제4장 자연의 기하학
그럼에도 관계는 나타난다.
작은 관계는 모래사장에 드리운 구름의 그늘처럼,
언덕에 있는 구름 모양의 그늘처럼 퍼져나간다.
월리스 스티븐스, <카오스의 감정가>
망델브로는 경제학에도 손을 댔는데, 특히 경제에서 높고 낮은 소득의 분포 문제를 연구했다.
망델브로는 8년 동안의 면화 가격을 나타낸 동일한 도표를 보게 된다.
변동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표준모형은 종형곡선이다.
아무리 해도 하우태커는 면화의 가격변동을 종형곡선에 맞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놀랍게도 전혀 다른 장소에서 망델브로가 윤곽을 보게된 그림을 만들었다.
망델브로는 다른 법칙들이 무작위적이고, 확률적인 현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아주 작은 변화들이 거대한 변화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묶여 있었던 것이다. 망델브로는 어떤 규모에 한정된 패턴들이 아니라 모든 규모에 걸친 패턴들을 찾고 있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형상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어떤 종류의 대칭성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물론 좌우 또는 상하 대칭이 아니라 대규모와 소규모 간의 대칭이었다.
면화 가격 자료를 면밀히 분석한 망델브로는 놀라운 결과를 발견하게 된다. 정규분포라는 관점에서 보면 변이를 초래한 숫자들이 규모라는 관점에서는 대칭성을 보였다. 개개의 가격변동은 무작위적이고 예측 불가능했다. 그러나 연속적인 변동은 규모와 무관했다. 말하자면 매일의 가격변동과 매달의 가격변동을 나타내는 곡선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매우 무질서한 자료 안에 예기치 않은 질서가 있었다. 망델브로는 임의적 숫자들이 왜 어떤 법칙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자문했다. 왜 그 법칙이 개인 소득과 면화 가격에 똑같이 적용될까?
어떤 모양이 주어지면 이를 변환하고 대칭성을 변화시켜 더욱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도 예술가와 작가들이 대중적 취향에서 멀어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자들도 물리학의 요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수학자들의 연구 주제는 자기만족적이었고, 방법은 형식적 공리론적 방법이었다.
자연과 어떤 분명한 연관도 지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과학이 (스포츠처럼) 무엇보다 경쟁을 우선시하고, 좁게 정의된 전문 분야로 완전히 후퇴함으로써 경쟁의 규칙을 명확하게 한다면 과학은 몰락하고 말 것이다. 기성 학문 분야의 지적 번영을 위해서는 스스로 유목민을 선택하는 소수의 학자가 필수적이다."
전송 잡음은 특성상 무작위적이긴 하지만, 집단적으로 발생한다는 것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망델브로는 오류버스트와 깨끗한 전송 간에는 일정한 기하학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류 없는 시간과 오류가 발생하는 시간의 비율은 일정했다.
잡음을 더 많이 제거하기 위해 신호 강도를 높이기보다는 신호는 적당히 고정시키고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다음 오류를 포착하고 수정하기 위해 중복 전략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격은 순간적으로 점프할 수도 있다.
자연에는 추세가 실재하지만, 이런 경향성은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진다.
불연속성, 잡음 버스트, 칸토어의 먼지와 같은 현상들은 지난 2000년 동안 기하학에서 아무런 위치도 차지하지 못했다.
자연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성이 그저 무작위적이거나 우발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의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망델브로는 사실 해안선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무한히 길다고 주장했다.
"수치 결과가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금세기의 물리학 정신에 내재되어 있다."
불규칙성의 정도는 축적에 관계없이 일정하다. 계속 반복해서, 이 세계는 지속적인 불규칙성을 보여준다.
망델브로는 단어 '프랙탈'을 만들어냈다.
코흐 곡선은 결코 교차하지 않으면서 계속 이어지는 고리이다.
유한한 공간 내에 있는 무한한 길이라는 이 역설적 결과는 20세기 초 수학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무한히 계속되는 복잡성을 머릿속에 완전히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점점 더 작은 축적으로 구조를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전체적인 세계를 열 수 있다.
직관은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저는 처음에 불합리하다고 거부했던 명백한 모양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의 직관을 훈련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저처럼 할 수 있습니다.
망델브로가 면화 가격, 전송 잡음 그리고 하천 홍수 문제를 연구하면서 머릿속에 실재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도 유리한 점이었다. 이제 형상이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자연계의 불규칙한 패턴에 관한 연구와 무한히 복잡한 모양에 대한 연구는 지적인 교차점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유사성이라는 성질이었다. 무엇보다도 프랙탈은 자기유사성을 의미했다.
자기유사성은 모든 축적을 관통하는 대칭성이다. 자기유사성은 회귀, 즉 패턴 안의 패턴을 의미한다.
동일한 변형을 점점 더 작은 규모로 반복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유사성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성질이며, 자기유사성이라는 이미지는 문화 안에서 어디서나 발견된다.
"박물학자들이 벼룩을 보니 그 벼룩보다 더 작은 벼룩이 붙어서 뜯어 먹고 있다. 그리고 이 벼룩에는 더 작은 벼룩이 붙어서 뜯어 먹으니 그렇게 한없이 계속된다."
지난 20년 동안 크고 작은 지진의 분포가 어떤 특정한 수학적 패턴, 말하자면 자유시장 경제에서 개인소득 분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축척 패턴과 동일한 패턴을 따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숄츠의 머릿속은 온통 망델브로의 개념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는 프랙탈을 이용하여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과학세계의 여러 부분을 묘사하고 분류하고 측정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프랙탈 기하학의 통합적 개념은 자신이 관찰한 것이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과 자신의 관찰 내용을 이해할 체계적 방법이 없던 과학자들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했다. 프랙탈 기하학의 통찰은 사물들이 뒤섞이고, 분기하고, 부서지는 방식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에 도움을 주었다.
축척으로 보면, 폴크스바겐의 표면은 다른 수많은 혹 중 하나, 하나의 무작위성일 뿐이다.
숄츠는 프랙탈 기하학이 특정 지표면의 울퉁불퉁한 정도를 표현하는 매우 효과적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금속 표면의 프랙탈 차원을 보면 금속의 강도를 알 수 있다. 또한 지표의 프랙탈 차원을 보면 지구의 중요한 성질에 대한 단서를 파악할 수 있다.
프랙탈 차원은 서로 접촉하고 있는 표면의 특성과 관련된 문제들에 직접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를테면 타이어와 콘크리트의 접촉면이 있다. 기계 결합부의 접촉면과 전기 접점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는 암석 안에서도 매우 작은 축척에서 보면, 분명 유체가 흐를 수 있는 틈새가 있다. 이런 이유로 두 조각 난 찻잔은 결코 다시 붙일 수 없다. 더 작은 축척에서 보면 불규칙한 혹들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프랙탈 기하학은 지구의 변화무쌍한 차원을 포착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델입니다.
만약 사람이 모든 비율은 같지만 크기가 두 배가 된다고 하면, 뼈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부러질 것이다. 축척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지진의 행태를 설명하는 물리학은 축척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큰 지진은 작은 지진이 규모만 확대된 것이다. 지진과 동물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10인치 크기의 동물은 1인치 크기의 동물과 전혀 다른 구조를 가져야만 하며, 100인치 크기의 동물은 뼈가 늘어난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구조가 달라야 한다. 반면 구름은 지진처럼 축척과는 무관한 현상이다. 구름의 특유한 불규칙성은 다른 축척으로 관찰하더라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구름을 수백 마일 떨어진 거리에서 관찰하더라도 프랙탈 차원은 일정하다.
가지처럼 퍼져나가는 혈관의 속성은 프랙탈적이다.
생리학적 필요에 의해 혈관은 차원의 마술을 부려야 한다. 마치 작은 면적에 무한하게 긴 선을 밀어 넣는 코흐 곡선처럼 순환계는 방대한 면적을 제한된 부피에 밀어 넣어야 한다. 신체의 자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간은 귀하고 피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만든 프랙탈 구조는 매우 효율적이어서, 대부분의 세포조직에서 혈관으로부터 셋 혹은 네 세포 이상 떨어져 있는 세포가 없다. 그럼에도 혈관과 피는 공간을 거의 차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교한 구조는 -실제로는 동맥과 정맥이라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얽혀 있다- 결코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신체는 이런 복잡성으로 가득차 있다. 소화관 조직은 주름 속에 도 주름이 있다. 폐 역시 최대 가능 면적을 최소 공간에 채워 넣어야 한다. 동물이 산소를 흡수하는 능력은 폐의 표면적과 거의 비례한다.
해부학 용어는 여러 축척에 '걸쳐 있는' 통일성을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프랙탈 접근법은 전체 구조를 포괄한다. 전체 구조를 만들고, 거대한 규모에서 작은 규모까지 일관된 행태를 보이는 가지치기 측면에서 살피는 것이다.
"대동맥에서 소동맥으로 점차 변하는 과정에서 중간 영역을 구분하기란 어렵다."
망델브로가 생리학적 의견을 발표하고 10년이 지나자 몇몇 이론생물학자들이 신체의 모든 구조를 통괄하는 프랙탈 조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기관지의 분지에 대한 표준 '지수함수적' 설명은 완전히 틀렸음이 증명되었고, 프랙탈적 설명이 자료에 부합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비뇨기도, 간장에 있는 담즙관도 프랙탈적임이 증명되었다. 전류의 고동을 심장의 수축성 근육에 전달하는 특수한 섬유조직망 역시 마찬가지다.
몇몇 심장학자들은 심장박동의 진동수 스팩트럼이 지진과 경제 현상처럼 프랙탈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밝혀 냈고 규모가 점점 작아져도 자기유사성을 가지면서 가지를 쳐가는 프랙탈 조직에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어떻게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냈을까?
프랙탈에서는 몇 가지 정보만 있으면 분지 구조를 단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DNA에는 수많은 기관지와 세기관지, 그리고 꽈리나 나무가 들어가는 특정한 공간 구조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분기와 성장의 반복 과정을 명시할 수는 있다. 이런 반복 과정은 자연의 목적과도 들어맞는다.
듀퐁사가 거위털을 합성하기 시작한 것은 천연털의 놀라운 공기 함유 능력이 털의 주요 단백질인 케타틴의 프랙탈한 마디와 분지에서 생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론생물학자들은 프랙탈 축적이 형태 형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한 어떻게 이런 패턴이 암호화되고 진행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생물학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망델브로는 분에 넘치는 학술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동료 수학자들과 갈등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자부심을 북돋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자부심이 없었다면,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프랙탈'이라는 단어는 불규칙하고 조각나 있으며 들쭉날쯕하고 부서져 있는 모양을 묘사하고 계산하며 생각하는 방법을 타나내는 말이 된다.
비선형 동역학의 단서를 제공하는 구조는 프랙탈임이 증명된 것이다.
자기유사성 개념은 우리 문화 안에 있는 오래된 감수성을 일깨운다.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으로 축척이 변할 때마다 새로운 현상과 새로운 종류의 행태가 생겨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기유사성은 훨씬 높은 차원의 복잡성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건축가들은 한때 크게 유행했던 뉴욕의 시그램 빌딩 같은 투박한 마천루를 더 이상 지으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명백했다. 단순한 모양은 인간미가 없었다. 또한 자연이 자신을 구성하는 방식이나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과도 공명하지 못했다.
미학적 가치 측면에서 프랙탈 기하학이라는 새로운 수학에는 정통과학 그리고 길들여지지 않고 문명화되지 않은 야생의 자연에 대한 독특한 현대적 감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식물들을 보면서 미적 만족감을 느끼고 싶을 때면 정원으로 갔다.
자신들이 자연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연의 창조성이 한 수 위였던 것이다.
제5장 이상한 끌개
큰 소용돌이는 자신의 속도를 줄이는
작은 소용돌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작은 소용돌이는 더 작은 소용돌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점성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루이스 F. 리처드슨
난류는 유서 깊은 문제였다. 매끄러운 흐름이 나선형 흐름과 소용돌이로 바뀐다. 제멋대로인 패턴은 유체와 고체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난류는 거의 알 수 없는 문제처럼 보였다.
비행기 날개 위의 난류는 이륙을 방해하고, 오일파이프 속의 난류는 오일의 흐름을 마비시키는 항력이었다.
그렇다면 난류란 무엇일까? 난류는 모든 축척에서 뒤죽박죽 나타나는 무질서이며, 큰 소용돌이 속의 작은 소용돌이이다.
'어떻게' 매끄러운 흐름에서 난류로 바뀌는 것일까? 완전히 매끄러운 관에 완벽하게 균질한 물이 진동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잔잔히 흐른다고 가정하자. 어떻게 이런 흐름이 '무작위적인'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모든 법칙들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흐름이 매끄럽거나 층류인 경우, 작은 교란이 생기더라도 곧 사라진다. 하지만 일단 난류가 시작되면 교란은 폭발적으로 커진다. 이러한 시작은 과학에서 중대한 미스터리였다.
제아무리 슈퍼컴퓨터라도 불규칙한 유체운동 문제에서는 맥을 못 췄다.
유체를 흔드는 것은 낮은 주파수나 큰 파장으로 에너지를 가하는 것으로, 첫 번째로 보게 되는 것은 큰 파장이 작은 파장으로 분해되는 것이다.
유체에는 소용돌이가 생기고, 그 소용돌이 안에 더 작은 소용돌이가 생기며, 각각은 유체 에너지를 소멸시키면서 독특한 리듬을 만든다.
콜모고로프는 유체가 균질한 것으로 상정했다. 하지만 이런 균질성의 가정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고, 심지어 이미 40년 전에 푸앵카레는 강물의 거친 표면을 관찰하면서 소용돌이가 항상 순조로운 흐름과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용돌이는 국소적이다. 에너지는 실제로 공간의 일정 부분에서만 소멸된다.
유체는 매끄러운 흐름에서 난류로 변하는 경계선을 어떻게 넘어가는가? 난류가 완전히 전개되기전에 어떤 중간 단계를 거칠까? 이런 물음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조금은 강력한 이론이 있다. 란다우의 모형은 서로 경쟁하는 리듬들이 집적된 것이다. 란다우는 어떤 계에 에너지가 더해지면 새로운 진동수가 하나씩 생기는데, 이 새로운 진동수는 이전의 진동수와 조화되지 않는다고 추측했다. 불협화음
액체든 기체든 간에 개별적 조각들이 모인 집합이고, 이 조각들은 너무 많아 무한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울러 각각의 조각이 독립적으로 움직인다면, 유체는 무한히 많은 가능성, 즉 전문용어로 무한히 많은 '자유도'를 갖게 될 것이며, 이를 나타내는 운동방정식은 무한히 많은 변수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입자는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입자의 운동은 이웃하는 입자의 운동에 크게 영향을 맏는다- 매끄러운 흐름에서는 자유도가 거의 없을 수 있다. 요컨대 잠재적으로는 복잡한 운동이 아직은 상호 연관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혼란이, 즉 불가사의한 거친 운동이 나타난다. 이러한 운동에는 진동, 비뚤어진 정맥류, 교차 굴림, 매듭, 지그재그 등이 있다.
아마도 이것이 난류일 것이다.
더 짧은 시간 축척에서 더 작은 입자를 연구한다는 것은 더 높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산화탄소가 증기에서 액체로 바뀌는 임계점 주변에서 열을 얼마나 잘 전달하는가를 측정하는 기구를 설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전도율이 조금 변화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스위니는 열전도율이 1000배나 변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부분의 카오스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상전이도 미시적 세부사항을 관찰해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일종의 거시적 변화 행태를 포함하고 있다. 고체를 가열하면 에너지가 더해지면서 고체 분자들이 진동한다. 분자들은 서로 결합하려는 힘에 맞서 바깥쪽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물질을 팽창시킨다. 열을 더 가하면 더 많이 팽창한다. 하지만 어떤 온도와 압력에서 변화는 급격하고 불연속적으로 된다. 줄을 잡아 늘이면 어느 순간 끊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평균 원자에너지는 거의 그대로이지만 -이제는 액체이거나 자성 물질 혹은 초전도체인- 물질은 새로운 영역에 들어선다.
정지한 액체가 흐르는 유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다룬 수학이 왜 증기의 액화를 나타내는 수학과 같은 것일까?
상전이와 유체의 불안정성이 유사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란다우는 운동하는 유체 내에서 상충하는 리듬이 계속 축적된것이 난류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스위니와 골룹은 운동하는 유체의 혼란스러움과 싸울 준비를 했다.
란다우는 유체 흐름이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진동이 한 번에 하나씩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란다우의 예상은 붕괴되었다. 실험이 이론을 확인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다음 전이에서 흐름은 구별할 수 있는 주기라고는 전혀 없는 혼돈 상태로 갑잡스레 바뀌었다. 새로운 진동은 물론 복잡성의 점진적 증가도 없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그것이 카오스적으로 된다는 것이었다."
<난류의 본질에 관하여>란 논문에서 이들은 진동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독립적 운동이 무한히 겹쳐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3개의 독립적 운동만으로도 난류의 복잡성을 완전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논문 속에 들어 있는 '이상한 끌개'라고 부른 이미지는 매혹적이었다.
이상한 끌개는 현대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위상공간에 존재한다. 위상공간은 기계적이든 유동적이든 간에 움직이는 물체의 계로부터 본질적인 모든 정보를 추상화하여 숫자를 그림으로 바꾸어, 계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 융통성 있는 로드맵을 만든다.
마찰을 고려하면 그림이 달라진다. 마찰력이 작용하는 진자의 운명을 알기 위해 운동방정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상태를 공간에서의 점으로 생각하면 변화를 관찰하기 쉽다는 이점이 있다.
물리계의 위상공간 그림은 본디 볼 수 없는 운동 패턴을 보여준다. 마치 적외선 사진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패턴이나 세부 구조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 어느 때나 유체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선 독립된 3개의 숫자가 필요해서였다.
난류 흐름에서 에너지의 소산은 위상공간의 수축으로 이어져야만 한다고, 말하자면 끌개를 향해 당겨져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끌개는 고정점이 아님이 분명한 게, 흐름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빠져나가기도 하지만 계 안으로 유입되기도 한다.
진자는 어디에서 운동을 시작하든 결국은 하나의 궤도에 정착할 것이다. 계는 실제로 두 개의 끌개를 갖고 있는데, 하나는 닫힌 고리이고, 다른 하나는 고정점이다.
짧은 시간이라면 위상공간 내의 어느 점이라도 동역학계의 가능한 행태를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동역학계의 가능한 형태는 오직 끌개 자신밖에 없다. 다른 종류의 운동은 순간적이다. 정의상 끌개들은 안정성이라는 중요한 성질을 갖는다. 운동하는 부분이 현실세계의 잡음에 떠밀리고 부딪히는 실제계에서 운동은 끌개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유체 안의 난류는 다른 질서의 행태로, 다른 리듬을 제외한 어떤 단일 리듬을 결코 만들지 않는다.
난류는 백색소음 또는 공전 소음과 같다. 이것이 간단한 결정론적 방정식계에서 생길 수 있을까?
뤼엘과 타켄스는 적절한 성질을 가진 뭔가 다른 종류의 끌개가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첫 번째는 안정성. 안정성은 잡음투성이 세계에서 동역학계의 최종 상태를 나타낸다. 두 번째는 저차원. 세 번째는 비주기적. 결코 자신으 반복하지 않고, 괘종시계처럼 일정한 리듬을 갖지도 않는다. 기하학적으로 이런 질문은 수수께끼였다. 도대체 어떤 궤도가 절대 스스로를 반복하지도 않고, 또 절대로 교차하지도 않으면서 한정된 공간 내에 그려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리듬을 만들려면 궤도는 한정된 면적 안에 있는 무한하게 긴선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프랙탈이어야만 한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연속스펙트럼이 단지 몇 개의 자유도와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단시했습니다.
끌개는 안정적이었고, 저차원이었으며, 비주기적이었다. 결코 스스로 교차하지도 않았다. 만약 교차한다면, 다시 말해 이미 지났던 점을 다시 지나간다면 그때부터 운동은 주기적 고리 안에서 자신을 되풀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끌개의 뛰어난 점이었다.
게다가 상자에 갇힌 채 유한한 공간 내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무한히 많은 길이 유한한 공간 안에 있을 수 있을까?
뤼엘과 타켄스가 단서를 추적하려는 노력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상한 끌개를 시각화하려는 이론적 노력이었다. 또 하나는 이상한 끌개를 자연의 카오스에 적용할 수 있다는 극히 비수학적인 신념의 비약을 입증하거나 반박하기 위한 일련의 실험이었다.
의학박사 오토 뢰슬러는 우선 이상한 끌개를 철학적 대상으로 파악한 이후 수학적으로 연구했다.
뢰슬러는 이렇게 말했다. "한쪽 끝에 구멍이 열려 있는 호스가 있으면, 바람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이 갇힙니다. 에너지는 중세의 악마처럼 의지에 반해서 무엇인가 생산적 활동을 할 것입니다. 자연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어떤 일을 하고, 자기 얽힘을 통해 아름다움을 낳는 것이 자기 조직화의 원리입니다."
어느 방법을 쓰든 간에 이렇게 만든 그림들은 로렌츠가 상상한 프랙탈 구조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구상성단에는 놀랄만큼 별들이 빽빽하다. 어떻게 별들이 함께 모여 있을 수 있는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진화하는지의 문제는 20세기 내내 천문학자들을 괴롭혔다.
동역학적으로 말하면, 구상성단은 거대한 다체문제다. 이체문제는 간단하다. 그런데 중력을 가진 단 하나의 물체만 더 집어넣어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삼체문제는 어렵다. 어려워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푸앵카레가 발견했듯 이는 거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에농은 조금은 임의적인 추정을 한다. 말하자면 성단의 규모가 변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유사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계산을 하던 에농은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된다. 성단의 핵은 운동에너지가 증가함에 따라 밀도가 무한대로 되면서 붕괴한다는 것이었다.
계에서 본질적인 것들만 추출함으로써, 다른 계뿐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계에도 적용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에농이 말했다. "저 역시 당시 사람들처럼 궤도는 모두 이처럼 규칙적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게 된다.
로렌츠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미분방정식 -시공간에서 연속적으로 변하는 흐름-에 집착해 있을 때, 에농은 시간을 이산적으로 다루는 차분방정식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로렌츠 끌개처럼 에농의 끌개는 마치 하나 속에 또 하나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의 끝없는 연속과도 같은 무한 회귀를 보여줬다.
컴퓨터가 보여주는 이상한 끌개를 보게 된 과학자들은 곧 이것이 난류 흐름이라는 음악에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서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 것처럼 여겼다. 자연은 '구속적이었다.' 어떤 공통된 근본 테마를 가진 패턴에 무질서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이상한 끌개에 대한 인식은 수치 실험을 하는 사람들이 실행할 수 있는 명확한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카오스 혁명에 기름을 부었다. 이들은 자연이 무작위적 행태를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이상한 끌개를 찾아 나섰다.
이론상 이상한 끌개는 카오스의 근본적인 새로운 속성에 수학적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초기조건의 민감성이다. 다른 하나는 '혼합'이다. 하지만 이런 속성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어떻게 그것들을 수치로 표시할 것인가 하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이상한 끌개는 프랙탈처럼 보였고, 진정한 차원은 소수라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 누구도 차원은 소수라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 누구도 차원을 어떻게 측정하는지 혹은 이런 측정법을 공학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지 몰랐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상한 끌개가 비선형계의 가장 심오한 문제에 관해 뭔가를 말해줄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쉽게 계산되고 분류되는 선형계와 달리 비선형계는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분류가 불가능해 보였다. 모두가 천차만별이었던 것이다.
하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다음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로렌츠 끌개가 본디 패턴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계의 안정성과 숨겨진 구조를 보여준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특이한 이중나선 구조가 어떻게 관련 계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된단 말인가? 아무도 몰랐다.
뤼엘은 "나는 이상한 끌개의 미학적 매력에 관해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 곡선의 계와 이 점들의 구름은 때로 불꽃놀이나 은하수를, 또 때로는 기이하게 번식하는 식물을 암시한다. 탐구해야 할 형상과 발견해야 할 조화의 영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제6장 보편성
이런 선을 반복해서 그으면 금이 생긴다.
땅 위에 이렇게 원을 그리면
회오리바람과 태풍과 천둥과 번개가 일어난다.
크리스토퍼 말로, <파우스투스 박사>
'카오스 속의 질서' 과학에서 가장 오래된 상투어였다. 자연에는 숨겨진 통일성과 공통의 근본적인 형태가 있다는 생각은 나름대로 호소력이 있었다.
파이겐바움은 물리학자들이 카오스 속의 질서라는 개념으로 어떤 이론을 만들고자한다면, 그 개념을 수치로 표시할 수 있는 실질적인 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카루서는 훌륭한 과학이 항상 계획에 의해서 개발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파이겐바움은 자신이 비선형 문제라는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 했다는 확신을 안고 로스앨러모스로 갔다.
그는 새로운 과학을 하고 싶어 했다. 일단 그는 실제 복잡성 해석에 대한 생각은 제쳐두고, 자신이 찾을 수 있었던 가장 간단한 비선형 방정식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코넬 대학교와 버지니아 공과대학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4년을 보낸다. 여기서 '아무 성과 없다'는 말은 쉽게 다룰 수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연구 논문을 쉬지 않고 발표하는 일이다.
카루서가 원한 인재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마법의 마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 같은 창조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질이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액체로부터 기체로, 혹은 자기를 띠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를 띤 상태로- 변화하는 지점 근처에서 어떤 행태를 보이는지 연구하고 있었다. 존재의 두 영역 사이에 있는 단일 경계인 상전이는 수학적으로 매우 비선형적 경향을 보인다.
선택 과정에서 금속 원자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해야만 한다. 카다노프의 통찰력은 정보 교환이 축척 개념을 통해 가장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데 있었다. 사실 그는 금속을 상자들로 나누는 것을 상상했다. 각상자는 바로 이웃한 상자와 정보를 교환한다. 정보 교환은 어떤 원자가 이웃한 원자와 정보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면 된다. 따라서 축척 개념이 유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금속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금속을 크기가 모두 다른 상자들로 이루어진 프랙탈 모델로 설명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 보편성에서 나온다. 카다노프의 개념은 임계 현상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실, 즉 겉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변화들 -액체의 비등, 금속의 자기화 등- 이 모두 동일한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윌슨은 1960년대에야 비로소 재규격화군 이론의 성공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윌슨 역시 카다노프처럼 축척의 원리에 대해 생각했다. 소립자의 질량과 같은 양들은 마치 일상적으로 보는 어떤 사물의 질량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항상 변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재규격화군 이론은 질량과 같은 양이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여김으로써 지름길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양들은 축척에(이들이 관찰되는 위치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뜻 보면 불합리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망델브로가 기하학적 모양들과 영국 해안선에서 깨달았던 것과 아주 비슷하다.
(축척에 따라 해안선의 길이가 달라지는 이야기)
질량이나 길이의 표준 치수가 가변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양이 일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랙탈의 경우에는 소수 차원이 이러한 일정한 양이었다. 다시 말해 계산될 수 있고 또 계산을 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는 상수인 것이다. 질량이 축척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수학자들이 모든 축척을 관통하는 유사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까지 고도의 비선형 문제들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식은 섭동 이론이었다. 계산을 하기 위해 우선 비선형 문제가 계산 가능한 선형 문제와 상당히 근접하다고 가정한다.
운이 좋다면 계산이 문제의 답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수렴이 나타날 만하다가도 사라져 버리곤 했다.
결국 섭동 이론이 지루하고 모호하며 별 쓸모가 없다고 확신하고는 윌슨의 새로운 재규격화군 이론 쪽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자기유사성을 인정하면서, 복잡성을 한 번에 한 단계씩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사실 재규격화군 이론은 상당한 기교가 필요했다. 물리학자들은 이 방법으로 난해한 난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결국 자기유사성은 난류, 겹쳐 일어나는 동요, 겹쳐 나타나는 소용돌이의 신호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난류는 -질서 정연한 계를 카오스 상태로 변하게 하는 불가사의한 순간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가?
왜 현상들은 아주 멀리서 보았을 때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일까?
뇌에 세상의 사물들이 직접 복사된 자신만의 사본이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인식한 이미지들을 비교 대조할 수 있는 형상들과 관념들이 있는 도서관 같은 것도 없다. 정보는 형태를 바꾸기 쉬운 방식으로 저장된다. 때문에 기이한 병렬이나 상상력의 비약이 가능하다. 외부에 존재하는 카오스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데 뇌는 고전물리학보다 훨씬 융통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괴테는 색상을 지각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자연은 미묘한 평형과 반평형의 상태를 이루면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진동을 한다. 이에 따라 시공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의 다양성과 조건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파이겐바움은 괴테가 색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실제로 기발한 실험을 했음을 알게 된다. 뉴턴은 프리즘을 빛 앞에 놓고는 분리된 광선을 하얀 표면에 비추었다. 하지만 괴테는 프리즘을 눈앞에 놓고는 이 브리즘을 통해 보았다.
프리즘을 통해 하얀 표면을 보건 맑고 푸른 하늘을 보건 모두 똑같았다.
하지만 작은 반점이 하얀 표면 위에 떨어지거나 구름이 하늘에 나타나면 색깔의 향연을 볼 수 있었다. 괴테는 색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빛과 그림자의 교체 현상'이라고 결론지었다.
괴테는 색은 "그림자와 관련된 어둠의 정도"다. 특히 색은 경계 조건과 특이성에서 생겨난다.
파이겐바움은 괴테의 색채론이 옳다고 생각했다.
괴테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은 바로 색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았다.
파이겐바움은 인간의 인식, 특히 혼란스럽게 뒤섞인 경험을 채로 걸래내 보편적 성질을 찾아내는 인식과 일치하는 수학적 공식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자문했다. 뉴턴주의자들이 생각하듯 빨간색은 반드시 특정한 파장대의 빛은 아니다. 빨간색은 혼돈스런 우주의 한 영역이고, 그 영역의 경계를 묘사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규칙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일관성을 가지고 빨간색을 찾아낸다. 한 젊은 물리학자의 이러한 생각은 유체의 난류와 같은 문제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인간의 마음이 인식의 혼돈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질서가 보편성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확실히 이해해야 했다.
파이겐바움은 로버트 메이가 집단생물학에서 연구한 간단한 방정식과 비슷한 것에서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공교롭게도 고등학교 기하학에 나오는 포물선 방정식이었다.
생태계학적 모델링에서 개체수 급감에 상응하는 것이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비현실적인 무한 증가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이런 단순 계산을 한 번이 아니라 피드백 고리로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계산값은 다음 계산을 위해 다시 입력되었다.
처음에는 연속된 숫자들이 포물선 위를 이리저리 튀어 다니지만, 곧 안정된 평형 상태, 즉 x와 y가 같고 따라서 값이 변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수치 실험물리학자들도 비커 안에서 일고 있는 거품의 반응을 자세히 관찰하는 화학자처럼 '관찰'한다. 여기서 결과는 일련의 숫자들이었고 안정적인 최종 상태로 항상 수렴하지는 않았다. 결국 두 값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진동할 수도 있다. 아니면 메이가 집단생물학자들에게 설명했듯 계속해서 카오스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이렇듯 다양하게 가능한 행태 중에서 어느 쪽으로 귀결되느냐 하는 것은 매개변수값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포물선방정식의 '사상'을 연구한 폴 슈타인은 복잡성이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가장 단순한 방정식도 아주 다루기 힘든 것으로 판명되었다면, '실제계'를 나타내는 훨씬 복잡한 방정식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이 방정식은 하나의 교훈이었다. 말하자면 단순한 계가 복잡한 양상을 보일 수도 있다는 교훈이었다.
메트로폴리스와 폴 슈타인 그리고 미런 슈타인은 이 문제를 어떤 수치값과도 관계없는 위상수학적 패턴들 모음을 분류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특정한 지점에서 피드백 과정을 시작해, 포물선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연속적인 수치를 관찰했다. 결과는 수학자에게 상당히 흥미로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특정한 순서대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에게는 모호하고 지루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기상학자들은 답은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어떤 측정할 수 있는 행태는 (변동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반드시 평균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는 전혀 자명하지 않다.
로렌츠는 어떤 매개변수가 주어질 때 방정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폈다. 작은 매개변수를 택하면 방정식은 안정된 고정점에 이르렀다. 확실히 그 계는 가장 평범한 의미의 '기후'를 만들어냈다. '날씨'는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반면 매개변수가 커지면 두 점 사이에서 진동할 가능성이 있었고, 그 계 역시 단순 평균으로 수렴했다. 하지만 어떤 지점을 넘어서면 카오스가 일어났다.
답은 평균값 역시 불안정하게 변동한다는 것이었다. 매개변수값이 매우 근소하게 변화하더라도 평균값이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이로 유추할 때, 지구의 기후는 장기간에 걸쳐 평균적 행태를 보이는 평행 상태로 결코 가지 않을지도 몰랐다.
로렌츠의 기후 연구는 수학 논문으로 보면 실패작이었을 것이다. 증명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한 방정식을 사용해 지구의 기후에 관한 결론을 끌어낸다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유사성이 단지 우연이 아니며, 차분방정식이 물리학은 몰라도 수학의 상당 부분, 즉 하나의 흐름에서 다른 흐름 상태(균일한 흐름에서 소용돌이치는 흐름)로 전이하는 것에 대한 수학 그리고 사실상 불안정한 현상 전체에 대한 수학을 포착하고 있다고 느낀다.
로렌츠는 카오스 계의 독특한 가능성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지구의 기후가 얼음으로 뒤덮인 상태가 되려면 어떤 외부적 원인에 의해 거대한 충격을 받아야 한다.
기상학자들은 지구에 사는 우리가 매일 측정하는 균형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강하게 가진 모델들을 만들려는 자연스런 편향을 갖고 있다.
방하시대는 단지 카오스의 부산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카오스로 가는 길은 주기 2가 주기 4로 되고, 주기 4가 주기 8로 되는 과정이 계속되는 주기 배가의 연속이었다.
파이겐바움은 추측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계 안에는 예상 밖의 규칙성이 숨어 있었다.
주기 배가는 그저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율로 빨리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할까? 대개 기하학적 수렴이 존재한다는 것은 뭔가가 어딘가에서 다른 축척으로 자신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수렴의 비율을 계산하여 4.669라는 수를 찾아냈다. 이 비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로버트 메이는 역시 이런 기하학적 수렴을 보았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메이에게는 이런 수렴이 기이한 숫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메이가 생각하던 동물군집의 계나 경제 모델 계와 같은 현실계에서는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잡음이 그와 같은 정밀한 세부사항들을 압도했던 것이다.
반면 파이겐바움은 자신이 찾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왜냐하면 기하학적 수렴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방정식 안에 있는 뭔가가 바로 '축척'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축척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재규격화군 이론은 축척에 의존했다. 일견 다루기 어려워 보이는 계에서 축척은 다른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는 어떤 성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이겐바움은 방정식을 더 단순하게 변형시킴으로써 좀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수들을 자세하고도 확실히 조사하자 수들이 또 기하학적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새로운 방정식의 수렴 비율을 계산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다시 4.669라는 결과치를 계산해냈다.
똑같은 수치였다. 놀랍게도 이 삼각함수는 일관된 기하학적 규칙성만 나타내는 게 아니었다. 훨씬 더 단순한 함수의 규칙성과 수치상으로 '동일한' 규칙성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형태와 의미가 매우 다른 2개의 방정식이 똑같은 결과치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어떠한 수학적, 물리학적 이론도 없었다.
이후 파이겐바움은 다른 함수들, 즉 자신이 생각하기에 연속적 주기 배가를 통해 무질서에 이르는 함수라면 뭐든 연구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똑같은 숫자가 나왔다.
굽이치는 흐름, 흔들리는 진자, 전자진동자 등 많은 물리계들이 카오스 상태가 되는 과정에서 전이를 거치는데, 이런 전이 과정들은 너무 복잡하여 분석할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은 모두 동역학이 완벽하게 이해되는 것처럼 보였던 계들이었다.
파이겐바움이 보기에 방정식들은 요점을 놓치고 있었다. 적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닙니다. 어떤 것에 대해 '안다'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는 겁니다.
파이겐바움은 복잡한 비선형 문제들을 계산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데 필요한 증거를 발견했다.
보편성을 발견했고, 규칙성은 사인함수와 아무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이유가 뭘까?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축척과 관련이 있었고, 파이겐바움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파이겐바움은 끌개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파이겐바움의 사상에 의해 도달한 안정된 평형 상태는 다른 모든 점들을 유인하는 고정점이다. 출발 '개체수'에 상관없이, 끌개인 고정점을 향해 끊임없이 진동할 것이다. 최초의 주기 배가를 통하여 끌개는 세포가 분열하는 것처럼 두 부분으로 갈라진다. 처음에 이 두 고정점은 거의 붙어 있지만, 매개변수가 증가함에 따라 두 점 간의 거리는 멀어진다. 그런 다음 도 다른 주기 배가를 통하여 주기 2인 끌개의 각 점들은 동시에 다시 둘로 나누어져 주기 4인 끌개가 된다. 파이겐바움의 수는 주기 배가가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정확한 값 역시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매년의 실질적인 개체수를 예측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또 다른 기하학적 수렴이 있었다. 이 수들 역시 축척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파이겐바움은 수학과 물리학 사이에 놓여 있는 잊힌 중간 영역을 탐구하고 있었다.
파이겐바움은 숫자와 함수를 연구했다. 숫자와 함수는 궤적과 궤도가 있었고, '직관을 창조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그들은 어던 부분에서의 미세한 변화가 전체 형태에 괄목한 만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새로운 확신을 갖게 되었다.
관찰하고 있는 다축척 패턴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수학은 뭘까? 이 함수들에는 뭔가 (하나의 행태가 그 안에 숨겨진 다른 형태에 의해 인도된다는 측면에서) '회귀적'이고, '자기준거적'인 면이 분명 있었다. 파이겐바움은 무한대를 처리하기 쉬운 양으로 다루기 위해, 축척을 이용한 재규격화군 이론을 적용했다.
아름다움과 유용성의 차이는 보편성에 있다.
보편성은 어떤 쉬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보다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물리학자에게 준다. 해답들은 같을 것이다. 더구나 파이겐바움은 자신의 이론을 재규격화군의 틀 위에 정립함으로써 물리학자들이 거의 표준적인 계산 기법으로 인정할 옷을 재규격화군 이론에 입혔다.
보편성은 서로 다른 계들이 동일한 형태를 보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이겐바움은 자신의 이론이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전이 과정에 있는 계에 관한 자연법칙을 나타내고 있다고 믿었다.
보편성은 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양적인 것이었고, 구조적인 것만이 아니라 계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보편성은 패턴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숫자까지 확장되었다.
현대경제학은 효율적 시장 가설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지식은 이리저리 자유롭게 흘러 다니며, 중요한 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정보의 핵심에 접근한다고 여겨진다.
각각의 발견과 새로운 영감은 가장 최근의 것 위에 세워진다. 과학은 빌딩처럼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린다. 이렇게 보면 지식의 연대기는 사실상 선형적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들 각각은 자신들만의 지적 족보가 있다. 또한 과학자들은 자신만의 개념적 풍경화를 갖고 있으며,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그 그림을 그린다. 지식은 불완전했다.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간 것은 어떤 과학위원회가 아니라 개인적 통찰력과 목표를 가진 몇몇 개인들이었다.
"파이겐바움은 보편성을 발견했으며, 이것이 어떻게 흥미로운 카오스로 이어지는지를 직관적으로 알아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모델을 발견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20세기에 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리학자들이 주변 세계에 대한 본질적으로 정확한 설명을 우연히 발견하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양자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흙을 가지고 컴퓨터를 만드는 방법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우리의 우주를 다루도록 배운 방법입니다. 화학 제품이 만들어지고 플라스틱이나 기타 등등이 만들어지는 방법이지요.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계산되는지 압니다. 분명치 않은 부분만 빼면 굉장히 훌륭한 이론입니다."
"이런 양자 이론의 이미지에서 빠진 게 있습니다. 만약 방정식들이 실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 이론으로 설명하는 세계가 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그 설명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더욱더 미묘한 질문들을 - 이를테면 이 이론에 의하면 세계는 어떻게 보이는가- 하기 시작한다면, 결국 사물을 그려내는 우리의 정상적인 방법에서 상당히 벗어나, 온갖 상충된 사고의 혼란을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것이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일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물을 직관하는 방식에서 그렇게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모든 정보를 규합하는 다른 방식이 없음은 진정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가 진정 근본적이라 생각하는 본질을 이해할 때까지 세계의 각 요소들을 분리하는 것이라는 게 물리학의 근본 가정입니다.~~"
"결국 (세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기어를 바꿔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재구성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헛수고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발생한 것은 유체 혹은 특수 방정식과 아무 관련도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물이 반복하여 작용할 때 매우 다양한 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이는 문제를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야 함을 뜻합니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큰 기계에 집어넣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추정치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현실성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큰 구조와 작은 구조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축척의 구조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혼란한 유체, 즉 연속적인 과정에서 복잡성이 나타나는 복잡한 구조를 봅니다. . . .
보편적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축척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이란 세계가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방식에 대한 이론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예술가들이 성취한 것은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들은 아주 적은 양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게 무엇인지를 간파했다는 점입니다.
이들 화가들에게 요동치는 물결은 항상 축척 개념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정말 구름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만큼 짙은 구름 조각이 있고, 그 옆에 저만큼 짙은 구름 조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 곧 매우 세분화된 정보들을 누적시킴으로써 대상을 기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는 분명 사람들이 사물을 인지하는 방법도 아니며, 예술가가 사물을 어덯게 인지하는지 말해주지도 않습니다. 어디에서든 편미분방정식을 쭉 적어 내려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어쨌든 지구에는 아름다운 사물들, 경이롭고 매혹적인 사물들이 있으며, 우리 인간이 이런 사물들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제7장 실험물리학자
과학자에게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과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정확히 일치함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경험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깜짝 놀라게 된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진짜 외부 세계에서
실제로 실현될 수 있음을 보고 놀라워한다.
거대한 충격이자 아주 큰 기쁨인 것이다.
레오 카다노프
장 모레와 리브샤베르는 1977년 난류의 발생을 보여주는 실험을 시작한다.
항상 진동이 성가신 문제였다.
비선형은 계를 불안정하게 할 뿐 아니라 안정시키기도 한다. 비선형 피드백은 운동을 조절함으로써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리브샤베르는 생물계가 잡음을 방어하기 위해 비선형성을 사용한다고 믿었다. 단백질에 의한 에너지의 전달, 심장전기의 파동, 신경계, 이들 모두는 잡음투성이 세계에서 자신들의 다양한 능력을 잘 보존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이겐바움이 난류의 시작과 비슷해 '보이는' 수학적 유추를 발견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리브샤베르는 '흐름'이라는 추상적이고, 분명치 않으며, 유령 같은 것도 좋아했다. 흐름은 모양과 변화의 결합, 운동과 형상의 결합이다. 미분방정식계를 생각하는 물리학자는 계의 수학적 운동을 흐름이라 부를 것이다. 흐름은 플라톤적 개념으로 계 안의 변화가 특정한 순간과는 관계없이 어떤 현실을 반영한다고 가정한다. 리브샤베르는 이 우주가 숨겨진 형상들로 가득 차 있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실험하면서 액체가 다른 액체가 다른 액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을겁니다. 책상에는 이런 실험 사진들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부엌에서 가스 불을 켜면 불꽃이 그런 모양임을 또다시 보게 됩니다. 매우 광범위하고, 보편적이지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인지, 액체 속에 있는 액체인지, 자라나는 고체의 결정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모양입니다."
"18세기부터 과학이 공간 안에서의 모양의 진화, 시간 안에서의 모양의 진화를 놓치고 있다는 어떤 망상 같은 게 있었습니다. 우리는 흐름 하면, 경제학에서의 흐름이나 역사적 흐름 등 수많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층류일 수도 있고, 다음에는 좀 더 복잡한 상태로 분기될 수도 있고, 그다음에는 카오스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표준적 미분학으로는 접근이 힘들었다.
그는 흐름이 어떻게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반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신비스러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유체운동을 관찰하며 운동과 보편적 형상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추구했던 것은 자료를 구성해 모양을 밝히는 것이었다.
불꽃과 같은 동적 모양과 나뭇잎과 같은 유기체의 모양들은 아직 이해되지 않은 힘들이 얽혀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확신했다. 가장 끈질기게 카오스를 추구했던 이들 실험가들은 현실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성공하게 된다. 이들 개념은 스티븐스가 '단단한 것의 부드러운 피어오름'이라 말한 것과 유사했다.
괴테의 <색채론>
괴테는 물리학자들이 우리가 매 순간 보는 모양을 낳는 생명력과 흐름보다는 정지된 현상문을 중시한다고 믿었다.
슈벵크는 예술가의 눈으로 자연에 나타나는 흐름의 모양을 수없이 묘사했다.
책에는 흐름으로 가득하다. "차가운 물 자체가 제방 구실을 하는" 강이었다. 흐름이 지나갔거나 볼 수 없을 때도 흔적은 남는다.
슈벵크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보편적 원칙을 믿었다. 슈벵크의 '전형적 원리'는 이렇다. 흐름은 "주변의 물질에 상관없이 자신을 실현하고 싶어 한다"
슈벵크는 흐름 내부에는 이차적 흐름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종종 말하는 '물줄기'는 사실 단일한 줄기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뒤섞여 있으면서 시간상으로는 과거 흐름이 되는 물의 전체 표면이다." 슈벵크는 물결 속에서 서로 경쟁하는 리듬들과 서로서로 앞서가려는 물결, 분계면들 그리고 경계층을 보았다. 아울러 회오리 모양의 흐름과 소용돌이 그리고 소용돌이 무리를 하나의 면이 다른 면과 만나 '회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의 예술가적 확신은 보편성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비평형성은 '원형적'임을 의미했다.
소용돌이가 회전하고, 양치류가 벌어지고, 산맥에 주름이 가고, 동물 기관들 안쪽에 구멍이 생기는 것은 모두 하나의 길을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고 봤다.
경계에서 생명이 꽃핀다.
슈벵크가 결국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한마디로 유사성이었다.
여러 갈래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 그림과 바로 옆에 있는 놀랍도록 유사한 살아 있는 해파리 그림 사이에서 유사성을 얼마나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저 차원 높은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두 형태가 비슷하게 보인다면,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굴드는 "모든 패턴이 하나의 단일한 발생력 체계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울러 이런 통일성의 증명이 유기적 형태에 대한 과학에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를 이해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톰슨은 생명 전체를 보려고 노력했다.
궁극적 원인은 목적 혹은 설계에 기반을 둔 원인이다. 물리적 원인은 기계적이다.
과학에서는 대체로 물리적 원인이 지배적이다. 설계나 적극적인 목적론 -지구는 인간이 하고 있는 바를 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 의한 논거는 아무 거리낌 없이 버려졌다. 하지만 다윈은 생물학에서 원인에 대한 중심적 사유 방식으로 목적론을 확고히 수립했다. 생물학적 세계는 신의 설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설계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자연선택은 유전인자나 배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 산물에 작용한다.
따라서 적응주의자는 어떤 유기체의 모양이나 기관의 기능을 설명할 때 '원인', 다시 말해 물리적 원인이 아니라 궁극적 원인에 항상 주목한다. 궁극적 원인은 과학에서 다윈주의적 사유가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살아남았다.
자연선택이 어떻게 그처럼 효과적으로 햇빛을 받는 판을 형상화했는지를 통해 나뭇잎을 설명하는 것이 의미가 있고 유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르시 톰슨의 수학은 단순한 기하학적 변형이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선으로 그려진 좌표계에 연관된 종의 두개골을 그리는 것밖에 없었다.
생물의 모양을 만드는 힘들에 대한 다르시 톰슨의 직관은 어떤 주류생물학보다도 동역학계의 관점에 더 근접했다. 톰슨은 '생명'은 항상 운동하고 있으며, "심층에 자리한 성장이라는 리듬"(그는 이것이 보편적 현상을 창조한다고 믿었다)에 언제나 응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모양의 분류 목록을 만들어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아는 수학자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연이나 목적 어느 것도 자신이 오랜 시간 자연을 관찰하면서 수집한 형상의 놀라운 보편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믿기도 했다.
다시 플라톤이었다. 물질의 특수하고 가시적인 모양 뒤에는 눈에 안 보이는 형판 역할을 하는 유령 같은 형상이 반드시 존재한다. 형상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리브샤베르는 시간에 따른 변화로 나타나는 리듬을 찾고 있었다.
한 물리학자는 리브샤베르가 자연을 훔쳐보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리브샤베르는 난류의 발생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행태의 패턴을 발견했다. 완벽한 주기 배가의 연속이 나타났다.
회전이 일정한 속도에 이르면, 계는 평형 상태 -움직이는 평형 상태, 즉 열에너지는 끊임없이 운동으로 전환되고, 마찰을 통해 흩어져 다시 열이 되고 차가운 윗판을 통하여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상태- 에 이른다.
로렌츠가 3개의 방정식계로 모델화한 흐름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주식시장 변동선처럼 거의 무작위적인 것처럼 보였다.
다음 분기는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떨림, 즉 메타떨림을 만들었다.
분기가 계속됨에 따라, 이상할 만큼 일관된 패턴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1979년이 되자 점점 더 많은 수학자들과 수학에 경도된 물리학자들이 파이겐바움의 새로운 이론에 주목했다.
리브샤베르의 셀 같은 것에서도 유체 입자는 사실상 무한성을 갖는다. 각각의 입자는 적어도 독립적 운동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계에서 실제적으로 유의미한 핵심 운동은 결국 사상으로 귀결된다는 생각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험에서 사상이 보이면 정말 흥분됩니다."
사상에서 유체 흐름으로의 도약은 너무 엄청났기 때문에 꿈처럼 느껴졌다. 자연이 어떻게 단순성에 복잡성을 결합할 수 있는가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수 없이 반복하면 간헐성과 준주기성 같은 패턴을 발견했다.
그의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모델은 파이겐바움이 1차원적 사상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상수를 찾아냈다.
제트 터빈에서부터 심장판막을 흐르는 혈액순환에 이르기까지
리브샤베르의 연구를 물리학이라기보다는 철학이나 수학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제가 만약 '상관없습니다. 저의 관심은 이런 모양, 그리고 이런 모양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수학, 이 모양에서 저 모양으로 다시 이 모양으로 가는 분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그건 물리학이 아닙니다, 당신은 수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관련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자연이기도 합니다."
리브샤베르는 하나의 분기 뒤에 또 하나의 분기가 나타나는 장면을 본, 등골이 서늘했던 바로 그 순간을, 그리고 풍부한 구조가 무한하게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던 그 순간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그 순간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제8장 카오스의 형상들
잎사귀 하나의 형태를 지으려
카오스가 모든 힘을 안으로 끌어당길 때
다른 무엇이 있을까?
콘래드 에이킨
수학자 반슬리가 보편성과 주기 배가 그리고 무한 진행의 분기를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반슬리는 이것들이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어떤 환상적인 프랙탈 구조의 일부분이 틀림없다고 직감했다.
이런 주기들이 아무 이유 없이는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논문을 되돌려 주면서 '마이클, 쥘리아 집합들을 말하고 있군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망델브로에게 연락해보세요."
이상한 일들이 경계선 부근에서 발생한 것이다.
컴퓨터는 무엇 하나 '증명'하지 못하지만, 최소한 진리는 드러내 보일 것이고, 수학자는 자기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었다.
초기의 수학자들은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복잡한 심층 구조가 발견되었다.
그 공간을 자세하게 조사하기 위해 컴퓨터를 돌리자 허바드와 학생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그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연구는 곧 동역학계 문제를 공략하는 새로운 시도가 된다.
망델브로 집합은 현대의 예술철학, 수학에서 실험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정당화, 그리고 대중에게 복소수계를 소개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등 그야말로 개념의 우주였다.
물리학에서 복잡계로 관심이 옮겨 간 리히터는 화학과 생화학을 공부하다 생물학적 경로 안에서 일어나는 진동을 연구하게 된다. 면역체계와 설탕이 효모에 의해 에너지로 전환되는 현상을 다룬 몇 편의 논문을 쓴 리히터는 진동이 때로는 통상 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과정의 동역학을 지배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과학자들이 망델브로 집합 자체에서 실제 물리적 현상을 나타내는 새로운 문제들로 나아갈 때, 집합의 경계가 갖는 특질들이 표면화된다.
계가 최종 상태가 되어갈 때 하나의 지배적 형태를 갖는 카오스적 끌개를 가지는 것이다.
경계는 반드시 자기유사적인 것은 아니지만, 무한히 세밀한 프랙탈 집합이 된다.
마이클 반슬리는 다른 길을 갔다. 반슬리는 자연 고유의 이미지, 특히 살아 있는 유기체가 만들어낸 패턴들에 대해 생각했다. "반복되는 함수 계에 의한 프랙탈의 총체적 구성"
카오스 게임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점들이 무작위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양이 생겨나서 점점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망델브로 기법은 건축과 개선의 무한 반복이었다.
반슬리는 자연은 어떤 의미에서 나름의 카오스 게임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양치류를 코드화하는 포자의 정보는 얼마 안 됩니다. 때문에 양치류가 자라면서 가질 수 있는 정교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양치류를 묘사하는 데 간단한 정보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하나도 놀랍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게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연은 불가피한 것일까? 허바드 역시 망델브로 집합과 정보의 생물학적 코드화 사이의 유사성에 대하여 생각했다. 하지만 허바드는 이런 과정들이 확률에 의존한다는 견해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망델브로 집합에는 무작위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물학에서 무작위성은 죽음이며, 카오스도 죽음입니다. 모든 것은 고도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식물을 무성생식시킬 때 가지들이 나오는 순서는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망델브로 집합은 대단히 정확한 체계에 따른 것으로서, 우연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누군가 뇌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를 실제로 밝혀내는 날 그들은 뇌를 구성하는 매우 정밀한 코드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생물학에서 무작위성이라는 개념은 그저 반사적으로 나온 개념일 뿐입니다."
하지만 반슬리의 기법에서도 우연은 도구 역할만 할 뿐이다. 결과들은 결정론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우연성이 역할을 한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무작위성은 프랙탈 대상에 존재하는 어떤 불변하는 척도의 이미지를 얻는 데 긴요합니다. 하지만 대상 자체는 무작위성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항상 똑같은 그림을 그릴 확률은 100퍼센트입니다."
"무작위적 알고리듬으로 프랙탈 대상을 탐색하면 심도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방에 처음 들어갈 때, 눈이 무작위적 순서로 방을 둘러보고 방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과 같습니다. 방은 바로 존재하는 그대로입니다. 대상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훨씬 이전에 자연이 단순한 물리법칙에 의해 자신을 조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무한한 인내로 어디에서나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였을 때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제9장 동역학계 집단
혁명적 분수령을 가로지르는 의사소통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토머스 S. 쿤
자신만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마치 불꽃처럼 결코 반복하지 않는 형태로 너울거리며 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쇼는 곧 초기조건의 민감성을 발견하게 된다. 초기조건을 설정하고 출발 버튼을 누르면 끌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다시 가능한 한 물리계와 가까운 동일한 초기조건을 설정하자 흥미롭게도 궤도는 이전의 경로를 벗어났다가 결국은 동일한 끌개로 귀결되었다.
"우리 모두를 끌어모은 것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결정론을 가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파머가 말했다. "우리가 배웠던 고전적인 결정론적 계가 무작위적 현상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델에서 비선형성이 만들어내는 진정한 차이점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방정식이 일견 무작위적으로 튈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서 이런 무작위적 운동이 비롯될까? 방정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치 거져 얻는 것 혹은 무에서 유가 나온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파머가 말했다. "철학적 차원에서 결정론과 화해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정의하는 데 카오스가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는 결정론적이지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동시에 저는 항상 이 세계에서 중요한 문제는 생명이든 지능이든 유기체의 창조와 관계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어떤 방식으로 연구했을까요? 생물학자들은 너무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연구했습니다. 물론 화학자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수학자와 물리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자기조직화의 자연발생적 출현도 물리학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양면을 가진 동전이었습니다. 무작위성이 출현하는 질서가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숨겨진 질서가 있는 무작위성이 있는 그런 동전 말입니다."
정보이론은 전자 시대의 산물이었다.
정보이론의 모양은 하드웨어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정보는 새롭게 지정된 이분법적 온오프 스위치(비트) 안에 저장되기 때문에, 이 비트가 정보의 기본 측정단위가 된다.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정보이론은 무작위적 오류의 형태로 나타나는 잡음이 비트의 흐름을 어떻게 방해하는가를 파악하는 열쇠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어떤 비트들을 점검하는 데 다른 비트를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복'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효력을 발휘한다.
질서와 무질서를 하나로 융합한 이상한 끌개들은 어떤 계의 엔트로피를 측정하는 문제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상한 끌개는 효율적인 믹서였고, 예측 불가능성을 창출했으며, 엔트로피를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쇼가 보았듯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정보를 창조해냈다.
<이상한 끌개, 카오스적 행태와 정보의 흐름>
쇼는 이면에 가려져 있던 고전역학의 몇몇 가정들을 끌어냈다. 자연계의 에너지는 다음과 같은 두 수준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거시적 규모다. 이런 규모에서 일상적 사물들은 셀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미시적 규모다. 여기서는 온도라고 하는 평균적인 어떤 것 이외에는 측정 불가능하며 무수한 원자들이 무작위적으로 운동하며 떠돈다.
고전적 계에서는 미시적 열운동은 무의미한 것, 다시 말해 고립적이고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고전역학 문제를 다루기 위해 온도를 알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카오스적 계와 그것에 준하는 계들이 미시적 계와 거시적 계 사이의 공백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한다는 것이 쇼의 견해였다. 카오스는 정보의 창조였던 것이다.
"흐름은 끊임없이 정보를 낳는다."
이러한 정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정보를 위쪽으로 이동케 하는 통로가 이상한 끌개인데, 이 이상한 끌개는 나비 효과가 작은 불확실성을 거대한 규모의 날씨 패턴으로 확대하듯 초기의 무작위성을 확대한다.
예컨대 어떤 결정론적 계에 외부 잡음을 부가하는 문제는 동역학에서는 낯선 것이었지만 통신에서는 매우 익숙한 문제였다. 이들이 정보를 발생시키는 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염두에 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패턴'이었다.
복잡한 동역학의 맨 꼭대기에 생물학적 진화 과정 또한 사고의 과정이 존재합니다. 매우 복잡한 계들은 정보를 창출해내고 있다는 확신이 직감적으로 들었습니다. 수십억 년 전에는 원형질만이 존재했고, 이것이 진화하여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듯 우리의 구조 안에서 정보가 생성되고 저장되어왔습니다. 사람의 경우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정신이 성장하면서 정보는 단지 축적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없었던 연결로 인하여 정보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당연히 주기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잠깐만 실험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예측 가능한 행태에서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전개되는 계의 흔한 사례입니다. 약간만 더 틀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불규칙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만 지나면 예측 가능한 패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도꼭지 같은 단순한 것조차도 영원히 창조적인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만약 어떤 물리학자가 적절한 경계 조건을 갖는 일련의 비선형 편미분방정식을 설정하여 물방울 문제를 완벽하게 모델링하고 이를 풀려고 한다면 그는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물리학적 측면을 도외시하고 마치 블랙박스에서 나오는 어떤 것처럼 데이터에만 의존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수 있다. 하지만 물방울의 간격을 표시한 수치표만 가지고 뭔가 유용한 것을 알 수 있을까? 사실 이후 밝혀진 것처럼, 이들 데이터를 정리하여 그것을 역으로 물리학에 적용하는 방법을 고안해낼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카오스를 현실세계에 적용하는 결정적인 방법이 되었다.
쇼는 떨어지는 물방울 데이터로 2차원 그래프를 그렸다. x축에는 첫 두물방울 간의 시간 간격을, y축에는 그다음 간격을 나타냈다.
유량이 증가함에 따라, 계는 주기 배가 분기를 일으켰다.
한 변수에 대해 생각할 때, 그 변수의 시간에 따른 변화는 상호작용하는 다른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그 값은 우리가 고찰하는 변수의 변화과정 속에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그 흔적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산타크루스 연구팀은 모든 종류의 계로부터 이상한 끌개를 찾아내는 방법을 알게 된다.
랜퍼드는 파머에게 '보편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머는 랜퍼드가 하는 말의 요점을 놓쳤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보편성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위대한 성과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비선형계는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연구해야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선형계에서 처럼 비선형계를 몇 개의 단위로 묶어 이들 전체에 통용될 해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보편성은 양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형태로, 그룹 전체에 똑같이 해당되는 특성을 찾아낸 것을 의미합니다. '예측 가능한' 속성말입니다.
파이겐바움은 재규격화군이라는 익숙한 도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설명했다.
제10장 내적리듬
과학은 설명하려 시도하지 않으며,
해석하려 들지도 않는다.
과학은 주로 모델을 만든다.
그 모델이란 언어적 해석이 가미된 것으로
관찰된 현상을 묘사하는 수학적 구조를 의미한다.
이러한 수학적 구조의 정당화는 정확히
모델이 작동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폰노이만
불규칙한 행태는 어떤 외부의 신호와도 무관했다. 불규칙한 행태는 계에 내재된 과도한 비선형성 때문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신체를 운동과 진동이 일어나는 장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화무쌍한 진동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현미경상의 슬라이드와 일상적인 혈액 표본에서는 볼 수 없는 리듬을 발견했다. 또한 불규칙한 호흡운동에서 카오스를 연구했다.
심장박동의 불규칙성이 발견된 이후 카오스 연구자들은 심장을 동역학적인 것으로 보았다.
"전에 수학적 연구나 물리학적 실험을 하며 볼 수 있었던 특이한 동역학적 행태가 생물학적 진동자를 주기적으로 교란시킬 때도 대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극이 변화함에 따라 분기가 계속되는 박동 패턴, 즉 주기 배가의 연속을 보았다.
생리학자들은 카오스를 건강 상태로 보기 시작했다.
모든 제어 현상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은 견고성이다. 즉 계가 작은 충격에 얼마나 잘 견디느냐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계에서 중요한 것은 유연성이다.
건강한 동역학계는 나뭇가지 모양으로 갈라진 폐의 기관지망이나 심장의 자극전달섬유처럼 넓은 범위의 리듬에 적응할 수 있는 프랙탈 물리 구조 성격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다양한 축척과 넓은 범위의 스펙트럼을 갖는 프랙탈 과정은 '풍부한 정보를 갖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좁은 범위의 스펙트럼을 갖는 주기적 생태는 정보가 고갈된 단조롭고 반복적인 과정입니다."
"수학적 병리 현상, 즉 카오스가 건강한 것이라는 게 가능할가? 이러한 구조가 예측 가능하고 미분 가능하다고 하는 수학적 정상성이야 말로 병적인 것이 아닐까?"
(예측 가능하고 뻔한 게임이나 영화는 실패 한다. 뻔한것은 좋지 않은 상황일 수도)
"생물학적으로 평형 상태에 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당신의 뇌가 평형의 계인지 아닌지 알려고 한다면, 당신에게 잠시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뇌가 평형의 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모든 것을 약물로 치료하는 '정신약리학'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치료된 환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매우 지독한 정신질환 증상을 순간적으로 억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뇌를 각 지점을 연결하는 화학적 교환기쯤으로 생각한다. 비선형 동역학의 세계에 눈뜬 사람들이라면 '정말 순진하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만델은 동료들에게 정신과 같은 복잡한 계를 뒷받침하는 흐름의 기하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기호와 기억을 모델화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은 끌림 영역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계의 동역학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이들의 프랙탈 구조는 생각을 비롯하여 결정이나 감정 그리고 기타 모든 의식의 산물을 꽃피우는 정신의 능력에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무한한 자기준거성을 제공하낟. 카오스의 유무를 떠나, 진지한 인지과학자들은 이제 더 이상 정신을 정적인 구조로 모델화할 수 없다.
무형성 가운데에서 생겨나는 패턴, 이것이 바로 생물의 근본적인 아름다움이자 신비이다. 생명은 무질서의 바다에서 질서를 끌어낸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질서의 흐름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켜 원자적 카오스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피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물리학에서 우리는 '주기적 결정체'만을 다루었다. 변변치 않은 물리학자들에게 이는 매우 흥미롭고도 복잡한 문제였다. 주기적 결정체들은 가장 매혹적이고 복잡한 물질 구조 가운데 하나를 구성해 무생물적 자연계가 그의 재치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비주기적 결정체에 비하면 그것들은 오히려 평범하고 진부해 보인다." 그 차이는 벽지와 벽걸이 융단 사이의 차이와 비슷하며, 일정한 패턴의 규칙적인 반복과 예술가적 창조성의 풍부하고 논리정연한 변형 사이의 차이와 같다.
슈뢰딩거의 견해는 특이했다. 생명체가 질서를 가지면서도 복잡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었지만, 비주기성에서 이런 특별한 성질이 나온다는 생각은 거의 신비주의에 가까웠다.
제11장 카오스와 그너머
혼돈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분류는
여기서 남김없이 시도되었다.
허먼 멜빌, <모비딕>
파이겐바움이 피드백 함수의 행태를 지배하는 보편적 법칙을 발견했다.
경제학자들은 주가 동향에서 알아볼 수 있는 이상한 끌개를 찾으려 했지만, 아직까지는 찾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하고 결정론적 계들이 복잡성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은 패턴을 형성한다.
금속의 경우 분자 대칭성이 눈송이와 다르고, 합금의 강도를 결정하는 특성적 결정의 모양도 역시 다르다. 그러나 수학적 원리는 같았다. 다시 말해 패턴 형성의 법칙은 보편적이었다.
초기조건의 민감성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에 기여한다.
"진화란 피드백 구조를 가진 카오스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피엔스 (0) | 2021.11.06 |
---|---|
복잡계 세상에서의 투자 (0) | 2021.09.27 |
콘텐츠의 미래 (0) | 2021.07.15 |
한국의 시간 (제2차 대분기 경제 패권의 대이동) (0) | 2021.07.06 |
패거리 심리학 (0) | 2020.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