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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책들

사피엔스

 

 

한국의 독자들에게

 몸과 마음은 21세기 경제의 주요한 생산물이 될 것이다.

 심지어 죽음조차 완전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역사 과정을 통틀어 죽음은 언제나 형이상학적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우리가 죽는 것은 신이, 우주가, 대자연이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혹시라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재림 같은 모종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몸짓뿐이라고 사람들은 믿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우리는 죽음이 기술적인 문제라고 재정의하였다.  전통적으로 죽음은 사제와 신학자의 전공이었지만 오늘날 이 분야를 공학자들이 넘겨받았다.

‘인간 강화’

나는 이 책이 독자 스스로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막대한 힘을 얻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세상에 독립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직면한 주된 문제들 역시 글로벌한 성격을 띠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기후가 급격히 바뀌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직업시장에서 컴퓨터가 사람을 대체하고 대부분의 인간이 경제적으로 쓸모가 없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이오 기술의 혁신 덕분에 인간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해지고, 가난한 자와 부자간에 진정한 생물학적 격차가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모든 인간이 직시할 필요가 있는 질문이며, 이를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기술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고, 마침내 사람들이 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1부  인지 혁명

1.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135억 년 전 빅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물질과 에너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우주의 이런 근본적 특징을 다루는 이야기를 우리는 물리학이라고 부른다. 물질과 에너지는 등장한 지 30만 년 후에 원자라 불리는 복잡한 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원자는 모여서 분자가 되었다. 원자, 분자 및 그 상호작용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화학이라고 부른다.

  38억 년 전 지구라는 행성에 모종의 분자들이 결합해 특별히 크고 복잡한 구조를 만들었다. 생물이 탄생한 것이다. 생물에 대한 이야기는 생물학이라 부른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종이 속하는 생명체가 좀 더 정교한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문화가 출현한 것이다. 그 후 인류문화가 발전해온 과정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 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

 

 생물학자들 생물을 종으로 분류한다. 서로 교배를 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으면 된다. 말과 당나귀는 최근에 같은 조상에서 갈라졌고 신체적 특질에 공통점이 많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성적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굳이 교배를 하게 유도할 수는 있으나 그 후손인 노새는 불임이다. 그러므로 당나귀의 DNA에 생긴 돌연변이는 말에게 전달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두 동물은 각기 다른 종으로 분류되며 각자 다른 진화의 길을 걷는다.

 같은 조상에게서 진화한 각기 다른 종들을 묶어서 이라 부른다. 사자와 호랑이, 표범과 재규어는 표범 속에 속하는 각기 다른 종이다.

 예컨대 사자의 학명은 ‘Panthera leo’ Pantera 속에 속하는 leo 종이라는 뜻이다. 속의 상위에 있는 것이 . 고양이과(사자, 치타, 집고양이), 개과(늑대, 여우, 자칼) 코끼리과(코끼리, 매머드, 마스토돈) 등이 그런 예다. 같은 과에 속하는 모든 동물은 동일한 선조의 후손이다.

우리는 거대 영장류라는 크고 유달리 시끄러운 과의 한 일원이다. 가장 가까운 친척은 침팬지다. 불과 6백만 년 전 단 한 마리의 암컷 유인원이 딸 둘을 낳았다. 이 중 한 마리는 모든 침팬지의 조상이, 다른 한 마리는 우리 종의 할머니가 되었다.

 우리는 뻔뻔스럽게도 스스로에게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란 이름을 붙였다. 이들 종은 덩치가 크기도 했고 작기도 했다. 일부는 무서운 사냥꾼이었고 일부는 온순한 식물 채집인 이었다. 하나의 섬에만 사는 종도 있었지만 대륙을 방랑한 종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호모 속에 속해 있었다. 모두가 인간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이들 종을 단일 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에르가스터가 에렉투스를 낳고 에렉투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낳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우리 종이 되었다는 식이다.

사실은 이렇다. 2백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구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동시에 살았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요약 : 현재 지구 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 들은 다양한 종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만이 호모 사피엔스 단 한종만이 있다. 과연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의 비용

커다란 뇌는 자원을 고갈시키는 밑 빠진 독이다. 무엇보다 갖고 다니기 어렵다. 커다란 두개골 안에 들어 있으면 더 그렇다 심지어 연로도 많이 소모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뇌는 몸무게의 2~3퍼센트를 차지할 뿐이지만, 뇌가 소모하는 에너지는 신체가 휴식 상태일 때 전체의 25퍼센트나 된다. 반면에 다른 유인원의 뇌가 소모하는 에너지는 신체가 휴식 상태일 때 전체의 8퍼센트에 불과하다.

 고 인류는 뇌가 커지면서 두 가지 대가를 지불했다. 첫째, 식량을 찾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둘째, 근육이 퇴화했다. 국방예산을 교육 부문으로 전용하는 정부처럼 인류는 근육에 쓸 에너지를 뉴런에 투입했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대초원에서 살아남기 좋은 전략이었다고 성급히 결론을 내려버릴 수는 없다. 침팬지는 호모 사피엔스와 논쟁을 벌여 이길 수는 없지만 인간을 헝겊 인형처럼 찢어버릴 완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의 큰 뇌는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자동차와 총을 만들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침팬지보다 훨씬 빨리 이동할 수 있고, 레슬링을 하는 대신 총으로 안전한 거리에서 침팬지를 쏠 수 있다. 하지만 차와 총은 최근 등장한 산물이다. 인간의 신경망은 2백만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장을 거듭해왔으나, 몇몇 돌칼과 날카로운 막대기를 제외한다면 그것이 이룬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지난 2백만 년간 인간의 엄청난 뇌 용량 증가를 일으켰을까? 솔직히 우리는 모른다.

 인간의 또 다른 이례적 특징은 직립보행이다. 이로 인해 여성은 큰 비용을 치렀다. 똑바로 서서 걸으려면 엉덩이가 좁아야 하므로 아기가 나오는 산도도 좁아지는데, 하필이면 아기의 머리가 점점 커져가는 기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자연선택은 이른 출산을 선호했다.

 인간의 아기는 무력하여, 여러 해 동안 어른들이 부양하고 지키고 가르쳐주어야 한다.

 인간의 사회적 능력이 뛰어난 것도 이 덕이요, 특유의 사회적 문제를 안게 된 것도 이 탓이다. 혼자 사는 엄마는 줄줄이 딸린 자녀와 자신을 위한 식량을 충분히 조달하기가 어렵다. 애를 키우려면 가족의 다른 구성원 및 이웃의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인간을 키우려면 부족이 필요했고 따라서 진화에서 선호된 것은 강한 사회적 결속을 이룰 능력이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인간은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교육을 받고 사회화를 할 수 있는 기간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 길다.

인간의 몇몇 종들이 대형 사냥감을 정기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40만 년 전부터였고,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으로 뛰어오른 것은 불과 1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부터였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던 사자나 상어는 수백만 년에 걸쳐 서서히 그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 생태계나 사자나 상어가 지나친 파괴를 일으키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사자의 포식 능력이 커지자 가젤은 더 빨리 달리는 쪽으로 진화했고, 하이에나는 협동을 더 잘하도록 진화했으며, 코뿔소는 더욱 사나워지도록 진화했다.

 이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빨리 정점에 올랐기 때문에 생태계가 그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 자신도 적응에 실패했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대부분 당당한 존재들이다. 수백만 년간 지배해온 결과 자신감으로 가득해진 것이다. 반면에 사피엔스는 중남미 후진국의 독재자에 가깝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두 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치명적인 전쟁에서 생태계 파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참사 중 많은 수가 이처럼 너무 빠른 도약에서 유래했다.

 

익혀 먹는 종족

 먹이사슬의 최정점으로 올라서는 핵심 단계는 불을 길들인 것이었다.

이제 인간은 빛과 온기의 믿을 만한 원천이자 배회하는 사자에 대항할 수 있는 치명적인 무기를 가졌다.

 불을 조심스럽게 잘 지르면 통행이 불가능하던 잡목 숲을 사냥감이 우글거리는 최고의 초원으로 바꿀 수 있다. 게다가 일단 불이 꺼지면 석기시대 사업가는 그 잔해 속으로 걸어 들어가 불탄 동물과 견과류, 덩이줄기 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불이 하는 최고의 역할은 음식을 익히는 일이다. 조리 덕분에 인간이 자연 상태 그대로는 소화할 수 없는 밀, , 감자 등이 인간의 주식이 되었다. 불은 식품의 화학적 조성뿐 아니라 그 생물학적 영향도 바꿔놓았다. 불에 익히면 음식을 오염시키는 세균과 기생충이 죽는다. 인간이 원래 좋아하던 과일, 견과류, 벌레, 죽은 고기도 불에 익히면 씹고 소화하기가 훨씬 더 쉬워졌다. 침팬지는 날것을 씹어 먹느라 하루 다섯 시간을 소모하지만 사람은 익힌 음식을 먹는 데 한 시간이면 족하다.

 일부 학자들은 화식의 등장과 뇌가 커진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다란 창자와 커다란 뇌를 함께 유지하기는 어렵다. 둘 다 에너지를 무척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다. 화식은 창자를 짧게 만들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게 해 주었고, 의도치 않은 이런 변화 덕분에 커다란 뇌를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은 불을 길들임으로써 무한한 잠재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불의 힘이 신체의 형태나 구조, 힘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었다. 부싯돌이나 불붙은 막대기를 가진 여자 한 명이 몇 시간 만에 숲 전체를 태울 수도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을 해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라비아 반도에 상륙했을 당시 대부분의 유라시아 지역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 이미 정착해 있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두 가지 상충하는 이론이 존재한다. ‘교배 이론’은 교배 이론’은 그들이 서로 끌려 성관계를 하고 뒤섞였다는 설이다.

예를 들면 사피엔스는 중동과 유럽에 도착해서 네안데르탈인을 만났다.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보다 근육이 발달했고 뇌가 더 컸으며 추운 기후에 더 잘 적응했다. 이들은 도구와 불을 사용했고 훌륭한 사냥꾼이었으며 병자와 약자를 돌본 것으로 보인다.  교배이론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유라시아인은 순수한 사피엔스가 아니라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혼합이다. 마찬가지로 사피엔스는 동아시아로 퍼져나가서도 현지의 호모 에렉투스와 교배했다. 그렇다면 중국인과 한국인은 사피엔스와 에렉투스의 혼합이다.

 이와 대립되는 견해는 ‘교체 이론’이다. 그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반감을 보였으며 심지어 인종학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피엔스와 다른 인간 종들은 해부학적으로 달랐으며 짝짓기 습관이나 체취까지도 차이가 났을 가능성이 매우 커서 서로에게 성적인 관심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최근 몇십 년은 교체 이론이 이 분야의 상식이었다. 이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상대적으로 더 확고하며 정치적으로도 더 올바른 것이었다. (현대 인구집단들에게 유의미한 유전적 다양성이 있다고 말하면 인종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2010년에 끝이 났다. 4년간의 연구 끝에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지도가 발표된 것이다. 그 결과는 과학자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중동과 유럽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이 지닌 인간 고유의 DNA 1~4퍼센트가 네안데르탈인 DNA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두 번째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과학자들이 2008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한 손가락뼈에서 추출한 DNA로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현대 멜라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의 인간 고유 DNA 중 최대 6퍼센트가 데니소바인의 DNA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가 유효하다면 최소한 교배 이론에 뭔가 근거가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체 이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오늘날 우리의 게놈에 아주 작은 양만 기여했기 때문에, 사피엔스와 다른 인간 종의 합병을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하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사피엔스에 합병된 것이 아니라면 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가능성은 사피엔스가 이들을 멸종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사피엔스는 기술과 사회적 기능이 우수한 덕분에 사냥과 채취에 더 능숙했다. 이들은 번식하고 퍼져나갔다. 이들보다 재주가 떨어지는 네안데르탈인은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집단의 크기는 줄어들고 서서히 모두 죽어갔다. 이웃의 사피엔스 집단에 합류한 한두 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말이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폭력과 대량학살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사피엔스의 탓이든 아니든, 사피엔스가 새로운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의 토착 인류가 멸종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호모 솔로 엔시스는 약 5만 년 전, 호모 데니소바는 그 직후, 네안데르탈인은 약 3만 년 전 증발했다.

 사피엔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생태적으로 전혀 다른 오지의 서식지에 그처럼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다른 인간 종들을 망각 속으로 밀어 넣었을까? 튼튼하고 머리가 좋으며 추위에 잘 견뎠던 네안데르탈인은 어째서 우리의 맹공격을 버텨내지 못했을까? 가장 그럴싸한 해답은 바로 이런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언어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2. 지식의 나무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매우 특별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무리를 지어 두 번째로 아프리카를 벗어난 것이다. 이번에 이들은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인간 종들을 중동에서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놀랍도록 짧은 시간 만에 유럽과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런 전례 없는 업적이 사피엔스의 인지 혁명이 일어난 결과라고 믿는다.

 인지 혁명이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을까? 우리는 잘 모른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피엔스의 언어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기에 사피엔스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최초의 언어는 아니었다. 모든 동물들은 언어를 구사한다. 벌이나 개미 같은 곤충도 복잡한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원숭이도 여러 종류의 울음소리로 의사소통을 한다. 고래와 코끼리도 우리 못지않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앵무새보다 나은 점이 있더라도 그것은 목소리와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의 언어는 무엇이 특별할까?

 가장 보편적인 대답은 우리의 언어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한된 개수의 소리와 기호를 연결해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무한한 개수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주위 세계에 대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소통할 수 있다. 녹색 원숭이도 동료들에게 조심해! 사자야!”라고 외칠 수 있지만, 현대 여성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늘 아침 강이 굽어지는 곳 부근에서 한 무리의 들소를 쫓는 사자 한 마리를 보았어.” 이어서 그녀는 정확한 위치와 그곳까지 가는 여러 길들까지 묘사할 수 있다. 이 정보를 두고 그녀의 무리는 강에 접근해서 사자를 쫓아버리고 들소를 사냥할 것인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이론은 또한 우리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수단으로서였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전달할 가장 중요한 정보가 사자나 들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개별 남성이나 여성이 사자와 들소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무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모든 유인원은 이런 사회적 정보에 예리한 관심을 나타내지만, 이들에게는 효율적으로 소문을 공유할 수단이 부족하다. 네안데르탈인과 원시 호모 사피엔스 역시 소문을 공유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 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도 의사소통의 대다수가 남 얘기다. 이메일이든 전화든 신문 칼럼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우리의 언어가 바로 이런 목적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핵물리학자들이 휴식시간에 쿼크에 대한 과학적 대화를 나눌 것 같은가? 물론 그럴 때도 있겠지만, 대개는 자기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적발한 교수, 학과장과 학장 사이의 불화, 동료 중 하나가 연구기금으로 렉서스 자동차를 샀다는 루머 등을 소재로 한 뒷담화를 떠든다. 소문은 주로 나쁜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언론인은 원래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었고, 언론인들은 누가 사기꾼인고 누가 무임승차자 인지를 사회에 알려서 사회를 이들로부터 보호한다.

 아마도 뒷담화 이론과 강변에 사자가 있다이론은 둘 다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전설, 신화, , 종교는 인지 혁명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이전의 많은 동물과 인간 종이 조심해! 사자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인지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왜 중요한가? 허구는 위험한 오해를 부르거나 주의를 흩뜨릴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요정이나 유니콘을 찾아 숲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버섯이나 사슴을 찾으러 들어간 사람보다 생존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존재하지도 않는 수호정령에게 몇 시간씩 기도를 한다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닐까? 그럴 시간에 먹을 것을 찾아다니거나 싸우거나 간통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신화,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개미나 벌도 많은 숫자가 모여 함께 일하는 능력이 있지만, 이들의 일하는 방식은 경직되어 있으며 그것도 가까운 친척들하고만 함께 한다. 늑대와 침팬지의 협력은 개미보다는 훨씬 더 유연하지만, 협동 상대는 친밀하게 지내는 소수의 개체들뿐이다. 사피엔스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과 매우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다. 개미는 우리가 남긴 것이나 먹고 침팬지는 동물원이나 실험실에 갇혀 있는 데 비해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알파 수컷 침팬지는 자기 무리 내의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려 애쓴다. 두 개체가 싸우면 개입해서 폭력을 중단시킨다. 덜 자애로운 측면도 있는데, 인기 있는 먹을거리를 독점하거나 서열이 낮은 수컷이 암컷들과 짝짓기를 할 수 없도록 막는다. 수컷 두 마리가 알파의 지위를 놓고 경쟁할 때는 각기 지지자들과 동맹을 맺고 싸운다. 그 지지자는 같은 무리 내의 암컷들과 수컷들이다.

 동맹 구성원 간의 결속은 매일 이뤄지는 친밀한 접촉에 기반을 둔다. 껴안고 만지고 키스하고 털을 다듬어주고 서로 호의를 베푸는 행위 말이다.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이 돌아다니면서 악수를 하고 아기에게 입을 맞추듯이, 최고의 지위를 원하는 침팬지들은 다른 침팬지를 껴안고 등을 두드리고 아기 침팬지에게 입을 맞추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알파 수컷이 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보통 육체적으로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크고 안정된 동맹을 이끌기 때문이다. 동맹의 구성원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먹을거리를 나눌 뿐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는 서로를 돕는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결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의 크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이런 집단이 가능하려면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서로 만난 적도, 싸운 일도, 상대의 털을 골라준 적도 없는 두 침팬지는 상대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 서로 도울 가치가 있는지, 둘 중 누구의 서열이 높은지 알지 못할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전형적인 침팬지 무리의 개체 수는 20~50마리다. 집단 내 개체수가 늘어나면 사회적 질서가 불안정해지고 결국에는 불화가 생겨서 이부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다.  서로 다른 무리들은 거의 협력하지 않으며, 영토와 먹을거리를 두고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 무리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학계에 보고되어 있다. 이 중에는 종족학살 사례도 하나 있는데 한 무리가 이웃 무리의 거의 모든 구성원을 체계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패턴이 원시 호모 사피엔스를 포함하는 초기 인류의 사회적 삶을 지배했을 것이다. 특별히 비옥한 유역에 정착하여 원시 사피엔스 5백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낯선 사람들끼리 이렇게 많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누가 지도자가 되고 누가 어디서 사냥을 하고 누가 누구와 짝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겠는가?

 인지 혁명에 뒤이어 뒷담화 이론이 등장한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더 크고 안정된 무리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뒷담화에도 한계가 있었다. 과학적 연구 결과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규모는 약 150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50명이 넘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알고 지내며 효과적으로 뒷담화를 나눌 수 있는 보통 사람은 거의 없다.

작은 가족기업은 이사회나 CEO, 회계부서 없이도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다. 하지만 150명이라는 임계치를 넘는 순간, 이런 방식으로는 일이 되지 않는다. 수천 명을 거느린 사단을 소대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공한 가족기업도 규모가 커지고 사람을 더 많이 고용하면 위기를 맞는다. 새롭게 탈바꿈하지 않으면 망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이 결정적 임계치를 넘어 마침내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아마도 허구의 등장에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대 국가, 중세 교회, 고대 도시, 원시부족 모두 그렇다. 교회는 공통의 종교적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로 만난 일 없는 카톨릭 신자 두 명은 함께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거나 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기금을 함께 모을 수 있다. 둘 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가는 공통의 국가적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세르비아인 두 사람은 상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다. 세르비아 민족, 세르비아 고향, 세르비아 국기의 존재를 함께 믿기 때문이다. 사법체계는 공통의 법적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로 본 적도 없는 변호사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을 변호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법과 정의와 인권의 존재를 믿고, 수임료와 경비로 지급되는 돈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사람들이 지어내어 서로 들려주는 이야기의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인류가 공유하는 상상 밖에서는 우주의 신도, 국가도, 돈도, 인권도, 법도,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시인들이 유령과 정령을 믿음으로써, 그리고 보름달이 뜰 때마다 불 주위에 모여 함께 춤을 춤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강화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한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은 현대의 사회제도들이 정확히 그런 기반 위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기업들의 세계를 예로 들어보자. 현대의 사업가와 법률가들은 사실상 강력한 마법사들이다. 이들과 원시 샤먼 간에 주된 차이는 현대 법률가들이 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이상하다는 점뿐이다. 푸조의 신화가 좋은 사례이다.

 푸조 SA’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일까? 푸조 차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이 곧 회사는 아니다. 설사 세계에 있는 모든 푸조 차들이 폐차로 버려져서 고철로 팔린다 해도 푸조 SA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회사는 공장과 설비, 전시장을 소유하고 있고 정비공, 회계사, 비서를 고용하고 있지만, 이 모두를 합친다고 해서 곧 푸조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혹 재앙이 닥쳐서 푸조의 임직원 전원이 사망하고 조립 라인과 중역 사무실이 모두 파괴될 수 있겠지만 그럴 때에도 회사는 돈을 빌리고 새 직원을 고용하고 공장을 새로 짓고 기계설비를 새로 구입할 수 있다. 푸조에는 경영자와 주주가 있지만 이들이 곧 회사인 것도 아니다. 경영자가 모두 해고되고 주식이 모두 팔릴지라도 회사 자체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판사가 푸조 해산 판결을 내린다면 푸조 SA는 순식간에 사라 질 것이다. 한마디로 푸조 SA는 물질세계와 본질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게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푸조는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변호사들은 이를 법적인 허구라 부른다. 은행 계좌를 열고 자산을 소유할 수 있다. 세금을 내고, 소송의 대상이 되며, 심지어 회사를 소유하거나 거기서 일하는 사람과 별개로 기소당할 수도 있다. 이런 회사의 이면에는 인류의 가장 독창적인 발명으로 꼽히는 개념이 존재한다.

 인간 아르망 푸조는 정확히 어떻게 회사 푸조를 창조했을까?

 그 방식은 역사를 통틀어 사제와 마술사가 신과 악마를 창조해낸 방식과 매우 비슷했다. 오늘날 수천 명의 프랑스 신부들이 일요일마다 교구 성당에서 여전히 성체를 창조해내는 것과도 대단히 유사하다. 그 모두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활동들이다.

 푸조 SA의 경우에는, 프랑스 의회가 제정한 프랑스 법조문이 핵심적인 이야기다. 프랑스 의원들에 따르면, 자격 있는 변호사가 적절한 전례와 성찬식을 모두 따른 뒤 모든 필수 주문과 맹세를 멋지게 장식된 종이에 써넣고 문서의 맨 아래에 멋지게 서명을 날인하면, 그러고서 야릇한 주문을 외우면, ! 새로운 회사가 하나 탄생한다.

 효과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남들이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게 어렵다. 역사의 많은 부분은 이 질문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어떻게 한 사람이 수백만 명에게 신이나 국가에 대한 특정한 이야기, 혹은 유한회사를 믿게 만드는가? 그러나 일단 성공하면, 사피엔스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된다. 서로 모르는 사람 수백 명이 힘을 모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이야기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푸조 같은 허구는 이 네트워크 내에서 존재할 뿐 아니라 막강한 힘을 축적한다. 이런 이야기의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들이 창조한 것을 학계에서는 픽션’ ‘사회적 구성물’ ‘가상의 실재라고 부른다.

 거짓말과 달리 가상의 실재는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통의 믿음이 지속되는 한, 가상의 실재는 현실세계에서 힘을 발휘한다.

 대부분의 인권 운동가들은 인권이 존재한다고 진지하게 믿는다. 인권 또한 가상의 실재이다.

인지 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단어를 통해 가상의 실재를 창조하는 능력은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일도 했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신화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로 신화를 바꾸면 인간의 협력방식도 바뀔 수 있다. 상황이 맞아떨어지면 신화는 급속하게 바뀐다. 1789년 프랑스인들은 왕권의 신성함이라는 신화를 믿다가 거의 하룻밤 새 국민의 주권이라는 신화로 돌아섰다. 그 결과 인지 혁명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필요의 변화에 발맞춰 행동을 신속하게 바꿀 수 있었다. 이것은 유전적 혁명이라는 교통체증을 우회하는 고속도로, 즉 문화혁명의 길을 열었다.

 다른 사회적 동물들의 행태는 주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침팬지가 극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DNA가 어떻게든 변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원시인류는 어떤 혁명도 시도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한, 사회 패턴의 변화, 새로운 기술의 발명, 새로운 주거지에의 정착은 문화가 개시한 일이라기보다는 유전자 돌연변이와 환경의 압력에 따른 결과였다. 호모 에렉투스 새로운 인간 종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석기 제작 기술이 발달했다. 호모 에렉투스에게 또 다른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동안, 이들의 석기도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거의 2백만 년 동안이나!

 대조적으로,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 이래 형태를 신속하게 바꾸고 새로운 형태를 유전자나 환경의 변화가 없이도 미래 세대에 전달할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카톨릭 신부, 불교의 승려, 중국의 환관처럼 아이를 갖지 않는 엘리트가 계속 등장했던 것이다. 이런 엘리트의 존재는 자연선택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에 모순된다. 침팬지 알파 수컷은 권력을 이용해 가능한 많은 암컷들과 성관계를 맺고 그 결과 무리의 어리고 젊은 층 가운데 많은 수가 알파 수컷의 자식인 데 비해, 카톨릭의 알파 수컷은 성관계를 전혀 하지 않고 가정을 꾸리지도 않는다. 이런 금욕의 원인은 먹을거리가 크게 부족하다든가 잠재적인 짝짓기 상대가 부족하다든가 하는 특수한 환경적 조건이 아니다. 무언가 특이한 유전자 돌연변이의 결과도 아니다. 카톨릭 교회가 10여 세기 동안 살아남은 것은 교황에서 교황으로 독신주의 유전자를 물려주었기 대문이 아니라 신약과 카톨릭 교회법의 이야기들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시인류의 행동 패턴이 수십만 년간 고정되어 있던 데 비해 사피엔스는 불과 10년 내지 20년 만에도 사회구조, 인간관계의 속성, 경제활동을 비롯한 수많은 행태들을 바꿀 수 있었다. 1900년대 베를린에서 태어난 사람이 100세까지 장수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녀는 매우 다른 다섯 가지 사회 정체 체재(호엔촐레른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제3제국, 동독 공산주의, 통일 민주주의 독일)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녀의 DNA는 계속 똑같았는 데도 말이다.

 이것이 사피엔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다.네안데르탈인은 일대일 결투라면 사피엔스를 이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픽션을 창작할 능력이 없어 대규모의 협력을 효과적으로 이룰 수 없었다. 급속하게 바뀌는 외부의 도전에 맞게 자신들의 사회적 행태를 바꿔 적응할 수도 없었다.

 교역은 매우 실용적인 활동, 허구적 근거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활동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사피엔스 외에는 교역을 하는 동물이 없고, 우리가 상세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피엔스의 교역망은 모두 픽션에 근거를 둔다. 교역은 신뢰 없이 존재할 수 없는데, 모르는 사람을 믿기는 매우 어렵다. 오늘날 전 지구적 교역망은 달러, 연방준비은행, 기업의 토뎀적 상표와 같은 허구의 실체들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부족사회에서 두 낯선 사람이 서로 교역을 하고 싶다면, 공통의 신, 공통의 신화적 조상이나 토템 동물에게 호소함으로써 신뢰를 구축할 것이다.

 이런 차이를 보여주는 도 다른 사례는 사냥 기술이다. 사피엔스는 집단 사냥을 통해 사냥이 아닌 도살장을 만들기도 했다.

 

역사와 생물학

 사피엔스가 발명한 가상의 실재의 엄청난 다양성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행동 패턴의 다양성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 일단 등장한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했으며, 그 멈출 수 없는 변화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지 혁명이란 역사가 생물학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점이었다.

 인지 혁명 이후에는 생물학 이론이 아니라 역사적 서사가 호모 사피엔스의 발달을 설명하는 일차적 수단이 되었다.

일대일, 십 대 십으로 보면 우리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침팬지와 비슷하다. 심각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개체수 150명이라는 임계치를 초과할 때부터다. 숫자가 1~2천 명이 되면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진다. 만일 수천 마리의 침팬지를 월스트리트, 바티칸, 국회의사당에 몰아넣으려 한다면 그 결과는 아수라장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장소에 정기적으로 수천 명씩 모인다. 인간은 교역망이나 대중적 축하행사, 정치제도 등의 질서 있는 패턴을 함께 창조한다. 혼자서는 결코 만들 수 없었던 것들을 말이다. 우리와 침팬지의 진정한 차이는 수많은 개인과 가족과 집단을 결속하는 가공의 접착제에 있다., 이 접착제는 인간을 창조의 대가로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협력하는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도구 제작 그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3만 년 전만 해도 막대기와 돌로 된 창밖에 없었던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핵탄두를 지닌 대륙간 미사일을 만들었을까? 지난 3만 년 사이에 우리의 도구 제작 능력이 크게 개선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수의 낯선 사람들과 협력하는 우리의 능력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2.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오늘날에도 우리의 뇌와 마음은 수렵채집 생활에 적응해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현재의 환경 덕분에 우리는 이전의 어떤 세대와 비교하더라도 물적 자원이 풍부해지고 수명도 길어졌지만, 이 환경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소외되고 우울하고 압박받는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알려면 우리를 형성했던 수렵채집 세계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는 아직도 그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우리는 왜 몸에 좋은 것 없는 고칼로리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일까? /째서 우리가 가장 달콤하고 기름기 많은 음식을 이렇게 탐하는 것일까, 조상들이 살던 초원과 숲에는 칼로리가 높은 달콤한 음식이 매우 드물었다. 전반적으로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3만 년 전 무화과가 잔뜩 열린 나무를 발견한 석기시대 여성을 떠올려보자.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행동은 그 자리에서 최대한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 지역에 사는 개코원숭이 무리가 모두 따 먹기 전에 말이다. 고칼로리 식품을 탐하는 본능은 우리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오늘날 우리는 먹을 것이 가득하지만, 우리의 DNA는 여전히 아프리카 초원 위를 누빈다.

 고대의 수렵채집 사회가 현대사 회보다 좀 더 공유 공동체적이고 평등한 경향을 지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들 사회는 수많은 개별 단위로 구성되었으며 각 단위는 질투심 강한 커플과 그들이 함께 키우는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 문화에서 일부일처 관계와 핵가족이 표준인 것은 이 때문이다. 남녀가 자기 파트너에 대해 강한 소유욕을 느끼며 자신의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며, 현대국가인 북한과 시리아에서 정치권력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해지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픽션이 등장한 덕분에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동일한 생태적 조건하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매우 다른 상상의 실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서로 다른 상상의 실체들은 서로 다른 규범과 가치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풍요사회

 같은 무리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매우 잘 알았으며, 평생을 친구와 친척에게 둘러싸인 채 살아갔다. 고독과 프라이버시는 없었다. 이웃 무리들은 자원을 놓고 경쟁했을 테고 싸우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호적인 접촉도 있었다. 서로 구성원을 교환하고, 함께 사냥하며, 희귀한 사치품을 매매하고, 종교적 축제를 벌였다. 이런 협력은 호모 사피엔스의 중요한 트레이드 마크였고, 다른 인간종들에 비해서 결정적 우위를 누리게 해 주었다.

 평범한 수렵채집인은 현대인 후손 대부분에 비해 주변 환경에 대해 좀 더 넓고 깊고 다양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연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다. 당신의 아주 좁은 전문영역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할테지만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다른 방대한 영역에서는 다른 전문가들의 도움에 맹목적으로 의존한다. 인간 공동체의 지식은 고대 인간 무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지만, 개인 수준에서 보자면, 고대 수렵 채집인은 역사상 가장 아는 것이 많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농업과 산업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술에 더 많이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

 

2부 농업혁명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농부들은 미래의 몇 해나 몇십 년이라는 세월 속으로 상상의 항해를 떠났다.

 농업혁명 덕에 미래는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농부들은 언제나 미래를 의식하고 그에 맞춰서 일해야 했다. 식량은 오늘, 다음 주, 다음 달 먹을 것까지 충분했지만 이들은 다음 해와 그다음 해 먹을거리까지 걱정해야 했다.

 농업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인간의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농부들이 미래를 걱정한 것은 단순히 걱정할 이유가 더 많았을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부지런한 농부들은 그렇게 힘들여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토록 원하던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슬프게도 얻지 못했다. 모든 곳에서 지배자와 엘리트가 출현했다. 이들은 농부가 생산한 잉여 식량으로 먹고살면서 농부에게는 겨우 연명할 것밖에 남겨주지 않았다.

 이렇게 빼앗은 잉여 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생물학적 협력 본능이 부족함에도 수렵 채집기에 서로 모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의 신화 덕분이었다.

 신화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밀집된 도시와 강력한 제국이 형성될 가능성이 열리자, 사람들은 위대한 신들, 조상의 땅, 주식회사 등등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꼭 필요한 사회적 결속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본능이 늘 그렇듯 달팽이처럼 서서히 진화하고 있는 동안, 인간의 상상력은 지구 상에서 유례없이 거대한 협력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갔다.

 제국에서의 협력이란 말은 매우 이타적으로 들리지만 항상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평등주의적인 경우는 드물었다. 인간의 협력망은 대부분 압제와 착취에 적합하도록 맞춰져 있었다.

 고대 제국의 모든 협력망은 상상 속의 질서였다. 이들을 지탱해주는 사회적 규범은 타고난 본능이나 개인적 친분이 아니라 공통의 신화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신화는 어떻게 해서 제국 전체를 지탱할 수 있었을까? 이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화 두 개를 살펴보자. 하나는 기원전 1776년경의 함무라비 법전이다. 이는 고대 바빌로니아인 수십만 명의 협력 매뉴얼 역할을 했다. 또 하나는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문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현대 미국인 수억 명의 협력 매뉴얼로 기능하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의 첫머리는 메소포타미아의 만신전 중에서도 주신인 아누, 엔릴, 마르두크 신이 함무라비에게 정의가 지상에서 널리 퍼지고, 사악하고 나쁜 것을 폐지하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방지하는임무를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다음에는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 그 판결은 이러이러하다.”는 상투적 문구와 함께 약 3백 건의 판결 목록을 나열하고 있다.

 판결을 열거한 뒤 함무라비는 다시 한번 선언한다.

 이것이 유능한 왕 함무라비가 내린 공정한 판결이다. 함무라비는 여기에 따라서 자신의 영토를 진리의 길에 따라 올바른 삶의 방식으로 인도했다….. 나는 함무라비, 고귀한 왕이다. 나는 엔릴 신이 내게 보살피라고 맡긴 백성, 마루두크 신이 내게 이끌 책임을 맡긴 백성을 부주의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노라.”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론의 사회적 질서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정의의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원칙은 신들이 읊어준 것이라고 단언한다. 계급제도의 중요성은 엄청나다. 법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개의 성별과 세 개의 계급 귀족, 평민, 노예로 나뉜다. 사람은 성별과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가치를 지닌다.

 이 법전은 또한 가족 내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어린이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부모의 재산이다.

 이 법전은 만일 왕의 신민 모두가 위계질서상의 자기 자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행동하면 제국에 사는 수백만 명 모두가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면 사회는 구성원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해서 이를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스스로를 적으로부터 보호하며 더 많은 부와 더 나은 안전을 얻을 수 있도록 영토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두 문서는 우리에게 명백한 딜레마를 제시한다. 둘 다 스스로 보편적이고 영원한 정의의 원리를 약속한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옳고 바빌론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함무라비는 당연히 자신이 옳고 미국인들이 틀렸다고 받아칠 것이다. 사실은 모두가 틀렸다. 함무라비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평등이나 위계질서 같은 보편적이고 변치 않는 정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상상했지만, 그런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는 장소는 오직 한 곳, 사피엔스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들이 지어내어 서로 들려주는 신화 속뿐이다.

 우리는 사람을 귀족평민으로 구분하는 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으로 평등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평등한가? 미국 독립 선언문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생물학 용어로 한번 번역해보자.

 생물학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다. 진화했다. 또한 평등하게 진화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창조주 또한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에 권리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기관과 능력과 특질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르게 진화했으며, 이들은 변이가 가능한 모종의 특질을 지니고 태어났고 여기에는 생명과 쾌락의 추구가 포함된다.”

 평등과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은 이런 추론에 격분할지 모른다.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안다고! 하지만 그 본질만큼은 우리가 모두 평등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안정되고 번영한 사회를 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에 반론을 펼 생각은 없다. 이것이 정확히 내가 상상의 질서라고 말한 바로 그것이니까.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하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는 마라. 그가 밤에 날 죽일지 모르니까.”

 자연의 질서는 안정된 질서다. 설령 사람들이 중력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내일부터 중력이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이와 반대로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군대, 경찰, 법원, 감옥은 사람들이 상상의 질서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제하면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상상의 질서는 폭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일부 있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집단행동 중에서 가장 조직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폭력이다. 어떤 사회의 질서가 군사력에 의해 지탱된다고 말하는 순간, “군대의 질서는 무엇이 유지하는가?” 오로지 강요에 의해서만 군대를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한 일부 지휘관과 병사는 신이든 명예든 조국이든 남성다움이든 돈이든 뭔가를 진심으로 신봉해야만 한다.

 이보다 더욱 흥미로운 질문은 사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자들에 관한 문제이다. 그들 스스로가 상상의 질서를 신봉하지 않는다면 남에게 그걸 강요하고 싶어 할 이유가 있을까? 냉소적인 탐욕 때문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만, 아무것도 신봉하지 않는 냉소주의자는 탐욕스러울 가능성이 적다. 호모 사피엔스의 객관적인 생물학적 필요를 충족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욕구들을 충족한 뒤에는 더 많은 돈을 들여 피라미드를 건설하거나…… 진정한 냉소주의자에게는 이 모든 일이 완전히 무의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상상의 질서가 오로지 많은 사람이 특히 엘리트와 보안대가- 진정으로 이것을 신봉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는 이유도 같다. 만일 그 주창자 대다수가 인과 예와 효를 신봉하지 않았다면 유교는 2천 년 넘게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과 의원 대다수가 인권을 신봉하지 않았다면, 미국 민주주의는 250년간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투자자와 은행가 대다수가 자본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면, 현대 경제 시스템은 단 하루도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교도소의 담장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한다. 사람이 평등하지 않은 것은 함무라비가 그렇다고 해서가 아니라 엔릴과 마르두크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등한 것은 토머스 제퍼슨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이 최선의 경제체제인 것은 애덤 스미스가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변의 자연법칙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을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세상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상상의 질서 원리들을 끊임없이 주지 시켜야 한다. 그 원리는 요정 이야기, 드라마, 회화, 노래, 예절, 정치 선전, 건축, 요리법, 패션에도 스며들어 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상상의 질서가 정확히 어떻게 삶이라는 직물 속에 짜 넣어졌는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조직화하는 질서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된 요인은 세 가지이다.

 

1.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상상의 질서는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하지만, 우리 주변의 물질적인 실재 세계 속에 짜 넣어질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서구인은 개인주의를 신봉한다. 모든 인간은 개인이며, 그 가치는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개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눈부신 빛이 우리 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선생과 부모는 아이들에게 같은 반 학생들이 놀리면 무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것이니까.

 이런 신화는 상상 속에서 뛰쳐나와 현대 건축에서 돌과 회반죽으로 구현된다. 어린이들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사적인 공간을 가져 최대한의 자율권을 지니도록 한다. 심지어 부모도 노크를 하고 허락을 얻기 전에는 방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공간에서 자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하나의 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밖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퍼져 나온다고 말이다.

 중세 귀족은 개인주의를 믿지 않았다. 사람의 가치는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뭐라고 말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비웃음을 당한다는 것은 끔찍한 모욕이었다. 귀족들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훌륭한 이름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보호해야 한다고 다짐해두었다. 중세시대에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방이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서 어떤 위치에 속하느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2.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실상 모든 사람은 기존의 상상의 질서 속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지배적인 신화에 의해 욕망의 형태가 결정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 개인의 욕망은 상상의 질서의 가장 중요한 방어물이다.

예컨대 오늘날 서구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욕망은 여러 세기에 걸쳐 존재해온 낭만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의 신화에 의해 형성되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는 권유 자체가 우리 마음에 새겨진 것은 19세기 낭만주의 신화와 20세기 소비자주의 신화의 결합을 통해서였다.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상상의 질서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이다. 예컨대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흔한 욕망을 보자. 이런 욕망은 전혀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침팬지 알파 수컷은 권력을 이용해 이웃 침팬지 무리의 영토로 휴가를 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휴가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향해 스스로를 활짝 열어야 하고, 다양한 관계들을 두루 맛보아야 하며, 평소와 다른 요리를 시식해봐야 하고, 다른 종류의 음악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이다. 이 모두를 실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복되는 일상과 친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냄새와 취향과 규범을 경험해볼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이 어떻게 나의 시야를 넓히고 내 인생을 바꾸었는가하는 낭만주의적 신화를 되풀이해서 듣는다.

 소비지상주의는 우리에게 행복해지려면 가능한 한 많은 재화와 용역을 소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뭔가 부족하다거나 올바르지 않다고 느낀다면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해야 한다고 말한다. TV의 모든 광고는 어떤 물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하면 우리 삶이 어떻게 나아진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작은 신화다.

 다양성을 권하는 낭만주의는 소비지상주의와 꼭 들어맞는다. 양자의 결합은 현대 여행 산업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무한한 경험의 시장을 탄생시켰다.  여행산업은 경험을 판다. 파리는 도시가 아니고, 인도는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경험이다. 그것을 소비하면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고, 인간으로서 잠재력이 실현되고, 더 행복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억만장자는 결혼 생활이 곤경에 빠지면 아내를 데리고 피리로 값비싼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어떤 독립된 욕망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열렬한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3.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 상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수백만 명의 낯선 사람에게 나와 협력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상상의 질서는 내 상상력 속에만 존재하는 주관적 질서가 아니라 수억 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상호 주관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객관’ ‘주관’ ‘상호 주관이란 용어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객관적 현상은 인간의 의식이나 믿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가령 방사능은 신화가 아니다. 방사능은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하기 오래전부터 방출되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 위험성을 믿지 않았을 때도 위험했다. 방사능의 발견자 마리 퀴리는 방사능이 자신의 신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주관이란 한 개인의 의식과 신념에 따라 존재하는 무엇이다. 해당 개인이 그의 신념을 바꾸면 주관은 사라지거나 변화한다.  많은 어린이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상상 속 친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가상의 친구는 그 어린이의 주관적 의식 내에서만 존재한다. 어린이가 어른이 되고 그 친구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으면 가상의 친구는 점차 사라진다.

 상호 주관이란 많은 개인의 주관적 의식을 연결하는 의사소통망 내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단 한 명의 개인이 신념을 바꾸거나 죽는다 해도 그에 따른 영향은 없지만, 그물망 속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거나 신념을 바꾼다면 상호 주관적 현상은 변형되거나 사라진다.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인 중 다수가 상호 주관적이다. , , , 국가가 모두 그런 예다.

 푸조는 그 회사 CEO의 상상 속 친구가 아니다. 수백만 명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회사다. CEO가 그 회사의 존재를 믿는 것은 임원들, 회사의 법률가들, 근처 사무실의 비서들, 은행의 출납 계원들, 주식거래소의 중개인들, 프랑스에서 호주까지 전 세계에서 근무하는 자동차 딜러들 역시 그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만일 CEO 혼자서 믿음을 갑자기 버린다면 그는 신속하게 가장 가까운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달러화, 인권, 미국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십억 명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한다. 한 개인은 누구라도 그 존재를 위협할 수 없다. 만일 나 혼자 달러나 인권, 미국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해도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며, 이를 변화시키려면 수십억 명의 의식을 동시에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대규모 변화가 일어나려면 정당이나 이념운동, 혹은 종교적 광신 집단 같은 복잡한 기구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복잡한 기구를 만들자면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을 협력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런 일은 오로지 그들이 뭔가 신화를 공유하고 있을 때만 일어난다. 그러니 현존하는 가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그 대안이 되는 가상의 질서를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푸조를 해체하려면 프랑스 법률체계처럼 그보다 더 강력한 뭔가를 상상해야 하고, 프랑스 법률체계를 해체하려면 그보다 더 강력한 무엇, 예컨대 프랑스라는 국가를 상상해야 한다. 국가마저 해체하려고 한다면, 그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를 상상해야 할 것이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일 뿐이다.

 

7. 메모리 과부하

 다른 동물들은 낯선 개체를 만나 의례화 된 공격성을 드러낼 때 대체로 본능에 따른다.  세계 모든 곳의 강아지들이 벌이는 개싸움의 규칙은 그들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십 대에게는 축구 유전자가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완전히 낯선 사람들과 게임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이 축구에 대해 배운 일련의 개념들이 서로 완전히 같기 때문이다. 그 개념들은 완전한 상상의 산물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공유한다면 모두가 축구를 할 수 있다.

 이보다 규모가 큰 왕국, 교회, 무역망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축구의 규칙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간결하다. 작은 수렵채집 무리나 소규모 마을에서 협동할 때 필요한 규칙과 상당히 비슷하다.  각자의 행위자는 규칙을 머릿속에 저장하고도 노래, 이미지, 쇼핑 리스트를 담을 공간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스물두 명이 아니라 수천 명, 심지어 수백만 명이 연관되는 대규모 협력 시스템에서는 도저히 한 인간의 뇌에 담아두고 처리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정보를 관리하고 저장해야 한다.

 개미나 꿀벌 같은 일부 동물 종의 대규모 사회는 안정되었으며 회복성이 있다. 해당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보의 대부분이 유전자에 부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꿀벌의 애벌레 암컷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여왕벌이나 일벌로 자라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행태는 DNA에 프로그램되어 있다. 벌집은 매우 복잡한 사회구조를 지닐 수 있지만 벌들에게는 법률가가 필요 없다. 벌들은 벌집의 헌법을 잊을 위험도 위반할 위험도 없기 때문이다. 여왕벌이 청소부 벌들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지 않아도 이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일 일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으레 그런 짓을 한다. 인간은 단순히 자기 DNA를 복사하고 이를 후손에 전해주는 것만으로는 사회운영에 필요한 핵심 정보를 보존할 수 없다. 사피엔스의 사회질서는 가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법과 관습, 절차와 예절을 지탱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질서는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예컨대 함무라비 왕은 사람이 귀족, 평민, 노예로 나뉜다고 포고했는데, 이것은 벌집과는 달리 자연적인 구분이 아니다. 인간의 유전자에는 그런 것의 흔적조차 없다. 만일 바빌론 사람들이 그 진실을 마음에 새겨둘 수 없었다면, 사회의 기능은 마비되었을 것이다.

 농업혁명에 뒤이어 유달리 복잡한 사회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정보가 중요해졌다. 바로 숫자다.

 익명의 수메르 천재들이 뇌 바깥에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을 발명했다.  인간의 뇌에서 비롯되는 사회질서의 제약에서 벗어나 도시, 왕국, 제국의 출현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수메르인이 발명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쓰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쓰기는 유형의 기호를 통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이다.

수메르와 파라오의 이집트, 고대 중국, 잉카 제국이 달랐던 점은 이런 문화들이 문자 기록을 보관하고 목록을 만들고 검색하는 뛰어난 기술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농업혁명 이후 수천 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그런 망을 지탱할 생물학적 본능이 결핍된 상태에서 말이다. 간단하게 답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 체계를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발명품을 통해서 생물학적으로 물려받은 것에 의해 생겨난 틈을 메웠다. 하지만 이런 협력망들의 출현은 불안한 축복이었다. 그 그물을 지탱하는 상상의 질서는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이전 미국의 질서는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한 흑인과 또한 부자와 가난뱅이는 계층이 다르다고 선언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은 부자 부모가 돈과 사업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데 따른 불평등에 대해서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이들이 보기에 평등이란 단순히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동일한 법이 적용되는 것을 의미했다. 평등은 실업수당이나 통합교육, 건강보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자유란 단어 역시 오늘날과는 그 함의가 크게 달랐다. 1776년에 이 단어는 권력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권력을 얻고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지 국가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시민의 사유재산을 압수하거나 그 재산으로 어떤 일을 하라고 시민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미국의 질서는 부의 위계질서를 옹호했다. 일부는 이 위계질서를 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부는 불변의 자연법이 구현된 것이라고 보았다. 자연은 인간의 장점을 부로써 보상하고 나태함을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완고한 자본주의자에게 부의 위계질서에 대해 물어보면 그것은 객관적 능력 차이가 빚어내는 필연적 결과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부자가 더 많은 돈을 가진 것은 더욱 능력 있고 근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자가 더 나은 의료혜택과 교육, 영양공급을 받는 데 대해 아무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부자에게는 그들이 향유하는 모든 특권을 누릴 자격이 넘친다.

 카스트 제도에 집착하는 힌두교 신자들은 우주의 힘이 한 카스트를 다른 카스트보다 우월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이런 위계질서는 모두 상상의 산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계질서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데 비해 다른 사회의 그것은 잘못되고 우스꽝스러운 기준을 근거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현대 서구인은 인종 간에 위계질서가 있다는 생각을 비웃으라고 교육받는다. 이들은 흑인이 백인 동네에서 살거나 백인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백인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을 금지하는 흑인 차별법에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과 유럽인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 사이의 위계질서는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부자는 따로 떨어져 있는 부자동네에 살고, 따로 떨어져 있는 인류 학교에 다니며, 병원 치료도 시설 좋은 외딴곳에서 받도록 만드는 위계질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자가 부유한 이유는 그저 부잣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이 평생 가난하게 사는 것은 그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복잡한 인간사회에는 상상의 위계질서와 불공정한 차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위계질서의 도덕성이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더욱 심한 차별로 고통받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학자들이 알기로 대규모 사회 치고 차별을 전부 없앤 곳은 이제까지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 사회의 구성원들을 가상의 범주에 따라 분류하여 사회에 질서를 창조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범주는 예컨대 귀족과 평민과 노예, 백인과 흑인, 고대 로마의 귀족과 평민, 부자와 가난한 자 등이었다. 이런 범주는 어떤 사람을 법적이나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게 만듦으로써 수백만 명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조율했다. 위계질서는 중요한 기능을 하나 수행한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들끼리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도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물론 사회적 차별이 형성되는 데는 타고난 능력의 차이도 한몫 하지만, 능력과 성격의 다양성은 보통 상상의 질서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재능에는 육성과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재능을 타고났더라도 그것을 키우고 갈고닦고 훈련할 환경이 되지 않으면 재능은 잠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든 사람이 능력을 배양하고 가다듬을 기회를 동등하게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기회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는 그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상의 위계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달려 있다.

 둘째,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정확히 같은 능력을 개발했더라도 이들이 똑같이 성공할 가능성은 적다. 경제라는 게임은 법적인 제약과 비공식적인 유리천장으로 조작되게 마련이다.

 모든 사회는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한다. 대부분의 경우 각각의 위계질서는 일련의 우연한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여러 집단들이 저마다 이해관계를 갖게 됨에 따라 영속성을 얻고 세련되어졌다.

 예컨대 많은 학자의 추측에 따르면,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형성된 것은 약 3천 년 전 인도 아리아 사람들이 인도 아대륙을 침략해 현지인들을 복속시켰을 때였다. 침략자들은 계층화된 사회를 건설하여, 자신들이 윗자리(사제와 전사)를 차지하고 현지인은 하인과 노예로 삼았다.

 수가 적었던 침략자들은 특권적 지위와 고유의 정체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런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사람들을 카스트로 구분했고, 각 카스트는 특정한 직업을 갖거나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스트를 뒤섞는 사회적 상호작용이나 결혼, 심지어 식사를 함께하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이런 구별은 단순히 법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화와 관습의 고유한 일부분이 되었다. 지배자들은 카스트 제도가 우연한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영원한 우주적 실재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결과 불결의 개념은 힌두교의 핵심 요소로서, 사회적 피라미드를 지탱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힌두교에 특유한 방식이 아니다. 역사를 통틀어 거의 모든 사회에서 오염과 청결 개념은 사회 정치적 구분을 강제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으며, 수많은 지배계급이 특권을 유지하는데 이를 활용했다. 그런데 오염에 대한 두려움은 사제와 대공들이 짜 맞춘 완전한 사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생물학적 생존 메커니즘에 기원을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병자나 시체처럼 질병을 옮길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본능적으로 혐오한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든 격리하고 싶다면 그들이 오염의 원천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믿게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여성, 유대인, 집시, 게이, 흑인 등 어떤 집단이든 말이다.

 미국에서 급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들은 유럽계 백인이라는 지배 카스트와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는 종속 카스트로 나뉠 운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특정 인종이나 출신을 노예로 쓰는 이유가 오로지 경제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도를 정복한 아리아 사람들이나 미 대륙의 유럽계 백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일 뿐 아니라 신앙심이 깊고 정의로우며 객관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신학자들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아의 아들인 햄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햄은 그 아버지로부터 네 자손들은 노예가 되리라는 저주를 받았다. 생물학자들은 흑인들은 불결한 상태로 살며 병을 퍼뜨린다고, 다시 말해 오염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회 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단지 사람들이 생물학적 신화를 통해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양자를 구분하기 좋은 경험법칙이 있는데 자연은 가능하게 하고 문화는 금지한다는 기준이다. 생물학은 매우 폭넓은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람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강제하고 다른 가능성을 금지하는 장본인은 바로 문화다. 생물학은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을 능력을 주었고 일부 문화는 여성들에게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을 의무로 지웠다.

 진실을 말하자면, ‘자연스러움부자연스러움이라는 우리의 관념은 생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서 온 것이다. ‘자연스러움의 신학적 의미는 자연을 창조한 신의 뜻에 맞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장기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한 것이 아니며, 그 사용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예컨대 침팬지는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긴장을 완화하는 데 성관계를 이용한다. 이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인가?

 

 남성적 특질이나 여성적 특질은 대부분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도 남성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남자로 쳐주지 않고 여성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여자로 쳐주지도 않는다. (18세기의 남성성 : 긴 가발, 스타킹, 하이힐, 댄서 같은 자세가 그 시대 남자다움의 전형이었다.)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 끊임없는 의례와 퍼포먼스를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

 특히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잃을까 봐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역사를 통틀어 남성들은 오로지 남들에게서 그는 진짜 남자야란 말을 듣기 위해서 기꺼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거나 심지어 목숨을 바쳐왔다.

 

 인간의 경우 육체적 힘과 사회적 권력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지닌 사람은 보통 근육 조직이 아니라 사회성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심지어 침팬지 사회에서도 알파 수컷은 다른 수컷 및 암컷과 안정적인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아무 생각 없는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다.

 사실 역사를 보면 신체적 기량과 사회적 권력 사이에 반비례 관계가 성립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우리가 최상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적 사회적 기량 덕분이다. 따라서 우리 종 내의 권력 사다리도 폭력이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남자가 신체적 힘으로 여자를 강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안정적인 사회적 위계질서의 토대라고 믿기는 어렵다.

 

3부 인류의 통합

9. 역사의 화살

 농업혁명 이래 인간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그동안 그런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상상의 건축물 역시 더욱 정교해졌다.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게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

 20세기 전반의 학자들은 모든 문화가 완전하고 조화로우며 언제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불변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오늘날 문화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진실은 그 반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문화는 나름의 전형적인 신념, 규범,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환경의 변화나 이웃 문화와의 접촉에 반응해 스스로 모습을 끊임없이 바꾼다.

 또 다른 예는 현대의 정치 질서다. 프랑스혁명 이래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은 점차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모순된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없다.

 만일 긴장과 분쟁과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가 모든 문화의 향신료라면, 어떤 문화에 속한 인간이든 누구나 상반되는 신념을 지닐 것이며 서로 상충하는 가치에 의해 찢길 것이다. (인지 부조화) 인지 부조화는 흔히 인간 정신의 실패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핵심 자산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품을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람을 우리와 그들로 나눠서 생각하도록 진화했다. ‘우리란 누구든 내 바로 주위에 있는 집단을 말했다. 그들이란 그 외의 모든 사람이었다. 사실 어떤 사회적 동물도 자신이 속한 종 전체의 이익에 이끌려 행동하지는 않는다. 침팬지 종의 이익에 관심을 갖는 침팬지는 한 마리도 없고, 지구적 달팽이 공동체를 위해 촉수 한쪽이라도 까딱하는 수고를 들일 달팽이는 없으며, 알파 수컷 사자들 중에 모든 사자의 왕이 되고자 나서는 놈도 없고 벌집 입구에 만국의 일벌들이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붙어 있는 경우도 없다.

 하지만 인지 혁명을 시발로, 호모 사피엔스는 이 점에서 점점 더 예외가 되어갔다. 살마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형제친구라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진화적 구분을 처음으로 어찌어찌 초월했고 인류의 잠재적 통일을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상인, 정복자, 예언자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단일시장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고객이었다. 이들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경제질서를 세우고 싶어 했다. 정복자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단일 제국이었고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민이었다. 예언자들에게는 온 세계에 진리는 하나뿐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자였다. 이들 역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지난 3천 년간 사람들은 이런 지구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점점 더 야심 찬 시도를 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역사상 최대의 정복자, 극도의 관용과 융통성을 지녔으며 사람들을 열렬한 사도로 만들었던 정복자에 대한 것이다.

 이 정복자는 바로 돈이다. 같은 신을 믿거나 같은 왕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기꺼이 같은 돈을 사용하려 한다. 돈은 어떻게 신과 왕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10. 돈의 향기

 아즈텍인은 스페인인들이 금에 집착하는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금속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왜 금이나 달러화를 신뢰할까? 내 이웃들이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주화의 표식 형태와 크기는 역사를 통틀어 크게 달랐지만, 메시지는 늘 같았다. “, 위대한 왕 누구누구는 이 금속 원반에 정확히 5그램의 금이 들어 있다는 점을 개인적으로 보증한다. 감히 이 주화를 위조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나의 서명을 위조하는 것이고 이는 내 명성에 오점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범죄를 최고로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 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4부 과학혁명

 가족과 공동체는 우리의 행복에 돈과 건강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 간에 유대감이 강하고 구성원을 잘 돕는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즉 가족이 제 구실을 못하거나 소속될 공동체를 찾니 못한 이들에 비해서 훨씬 행복하다.

 지난 세기 동안 물질적 조건이 크게 개선된 효과가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로 상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이 각자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 데 전례 없이 큰 힘을 누리게 되면서, 우리는 남에게 헌신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되고 다들 점점 더 외로워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행복이 부나 건강, 심지어 공동체 같은 객관적 조건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인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이 손수레를 원해서 손수레를 얻었다면 만족하지만, 새 페라리를 원했는데 중고 피아트밖에 가지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예언자, 시인, 철학자 들은 수천 년 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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