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비극의 탄생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돼 있다."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은 음악과 비극이란 무엇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예술철학적 탐구이고, 세계의 궁극적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이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탐구이고, 논리적인 지성에 입각한 학문을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로 내세우면서 비극적인 음악과 신화를 비하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과 이러한 형이상학에 입각한 서양 역사와의 대결이기도 하다.
<비극의 탄생>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세계관에 입각해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해명하고, 이어 바그너 예술을 그리스 비극의 부활로 해석하고 찬양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통제되지 않은 폭발적인 창조적 힘'을 가리킨다면, '아폴론적인 것'은 그것을 지배하는 힘을 가리킨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태양과 같은 밝음, 이러한 밝음 아래서 모든 사람들이 드러내는 균형, 절도, 질서, 명료한 형태, 그리고 국가의 도덕이나 법률, 아름다운 가상 및 이러한 아름다운 가상을 형성하는 예술적 능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고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 = 카오스, 아폴론적인 것 = 코스모스라고도 볼 수 있을 듯
반면에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아폴론적인 밝음과 절도에 대비되는 밤의 어둠과 심연, 혼돈 그리고 아폴론적인 평정에 대비되는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하는 생명력,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들이 아폴론적인 개성과 차별과 구별을 극복하고 혼연일체가 되는 도취와 황홀경의 상태,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고 있다."
니체는 이 두 가지 원리가 결합해 그리스 비극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서로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는 이 두 종류의 충동들은 대체로 공공연히 대립하면서 서로가 항상 새롭고 한층 힘 있는 탄생물들을 낳도록 자극하면서 평행선을 이루며 나아간다. 이러한 탄생물들 속에서 저 대립을 단지 외견상으로만 연결시켜줄 뿐이다. 그 두 충동들은 그리스적인 '의지'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기적을 통해서 결국에는 서로 짝을 맺게 되며, 이러한 결혼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아폴론적이면서도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한 아티카 비극 작품이 산출되는 것이다. <비극의 탄생>
디오니소스 축제는 사람들을 도취와 환각 상태로 이끌었으며 극도의 환희와 고통의 극단적인 긴장 상태로 끌어들였다.
"디오니소스는 소년 시절, 거인들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기었고 이렇게 찢긴 상태로 자그레우스로 숭배받게 된다." <비극의 탄생>
디오니소스의 이 이미지, 찢김과 다시 태어남, 파괴와 재생의 이미지는 후기로 갈수록 니체 사상에서 비중이 커지고 의미심장해지며, 또 성격이 변한다. 즉 단순히 비극의 기원이 되는 도취와 황홀경의 신에서, 영원히 돌아오는 생의 긍정을 상징하는 신이 된다.
"갈기갈기 찢긴 디오니소스는 삶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영원히 다시 태어날 것이고 영원히 파괴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권력의지>
여기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은 명백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에 대응한다. 세계의 본질인 맹목적 의지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그 의지가 드러난 현상인 '표상'은 아폴론적인 것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 = 의지(카오스), 아폴론적인 것 = 표상(코스모스)
"태산과 같은 파도를 올렸다 내리면서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채 포효하는 광란의 바다 위에 뱃사람 하나가 자신이 탄 보잘것없는 조각배를 믿고 의지하면서 그것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 인간 개개인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면서 고요히 앉아 있다." <비극의 탄생>
이때 이 '개별화의 원리'가 세계의 본질인 의지를 개별적인 현상으로, 곧 '표상'으로 나타나게 하는 원리이다. 니체는 이러한 원리에 대응하는 것을 아폴론적인 것이라 부르고, 그것의 본체에 해당하는 맹목적인 의지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은 각각 의지와 표상, 본질과 현상, 진리와 가상에 상응한다. (우연과 필연도)
그리고 그리스 비극 자체로 보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합창대의 노래, 즉 음악에 해당하고 아폴론적인 것은 등장인물들의 대화, 즉 연극에 해당한다. 니체는 여기서 음악, 곧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그 본질을 예술로 성립시켜주는 아폴론적 형식이 연극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세계의 본래적 이념이며, 연극은 이 이념의 반영, 즉 그것의 개별화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의 첫 번째 주제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만남이라면, 두 번째 주제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소크라테스적인 것의 대결이다. 이 둘의 대결은 다른 한쪽의 파멸로 끝났다.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죽고 소크라테스적인 것이 승리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죽음과 함께 비극이 몰락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풀 수 없는 갈등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것은 비극적으로 죽은 것이다." <비극의 탄생>
니체는 비극의 본질을 디오니소스적인 것, 곧 본능적이고 도취적이고 무의식적인 에너지로 본다. 이 본능적 에너지를 제압하고 그 열기를 식히고 그리하여 힘을 빼앗아 버린 소크라테스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이론이고 논리이고 지식이다. 소크라테스는 세계의 어떤 비밀도 논리를 통해 파악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원리의 발견으로 인해 논리로 증명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짐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나게 된 의미 심장한 '망상'이 존재한다. 이러한 망상은 사유가 인과율의 실마리를 따라서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도달하고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정할 수도 있다는 저 확고한 믿음이다. .......... 그는 학문이라는 저 본능의 손에 이끌려 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있었던 최초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따라서 '죽음에 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지식과 논거에 의해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인간의 모습으로서 학문의 입구에 걸려 누구에게나 학문의 사명을 상기하게 만드는 표장인 것이다. <비극의 탄생>
이 이론적 인간이 심연을 파헤치는 논리의 힘으로 디오니소스적인 힘을 죽였다는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그 소크라테스적 인식주의가 니체 당대 세계의 보편적인 이념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삶에 대한 본능적 힘'을 약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창백하고 힘없는 이론적 인간, 곧 학자가 근대 세계 인간 유형의 대표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 니체의 진단이다. 이런 인간 유형의 출발점에 있는 존재가 소크라테스다.
학문의 사제,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철학의 여러 학파들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물결처럼 차례로 교체되어 갔다. 지식욕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정도로 보편적인 것이 되어서 학문은 교양 세계의 광대한 영역에서 높은 능력을 갖춘 모든 사람들에게 본연의 과제로 간주되어 드높은 대양으로 이끌려갔으며 그 후 이 대양에서 다시는 완전히 추방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지식욕이 이렇게 보편적인 것이 됨으로써, 사상이라는 공동의 그물망이 온 지구 위에 펼쳐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태양계 전체의 작용 법칙까지도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 <비극의 탄생>
우리의 근대 세계 전체는 알렉산드리아적 문화의 그물 속에 사로잡혀 있어서 최고의 인식 능력을 갖추고 학문을 위해서 일하는 이론적 인간을 이상으로 여긴다. 이 이론적 인간의 원형과 시초가 소크라테스다. 우리의 모든 교육 수단은 근본적으로 모두 이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비극의 탄생>
근대인은 말하자면 영원히 굶주린 자이고, 환희도 힘도 없는 '비평가'이며, 결국은 도서관 사서이고 교정자이며, 책 먼지와 활자의 오식으로 눈이 멀게 된 알렉산드리아적 인간인 것이다. <비극의 탄생>
그래서 바그너,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부활
음악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논리 정신, 음악 정신의 그 도취적 흥에 찬물을 끼얹어버리는 차가운 앎의 의지, 바로 이런 소크라테스주의가 에우리피데스(그리스 3대 비극작가중 막내)를 통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목을 졸랐고 결국엔 그리스 비극을 죽여버렸다고 니체는 보는 것이다.
"비극이 음악 정신으로부터만 탄생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음악 정신이 소멸할 때 비극도 몰락한다." <비극의 탄생>
이렇게 자살로 마감한 그리스 비극은 이제 지상에서 영원히 소생 가능성을 잃어버린 것인가. <비극의 탄생>의 세 번째 주제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니체의 응답이다.
니체는 여기서 바로 바그너의 음악극이 그리스 비극 정신을 부활시켰다는 주장을 편다.
그 음악이 근대의 소크라테스적 문화의 대척점에서 그 문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의 현재 세계 속에서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점차 깨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조짐이 보일 때 우리 마음속에 얼마나 희망이 샘솟겠는가! ........... 독일 정신의 디오니소스적 기반으로부터 하나의 힘이 솟아올랐다. 이 힘은 소크라테스적 문화의 근본 조건과는 아무런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소크라테스 문화에 의해서 설명할 수도 변호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소크라테스 문화에 의해서 두렵고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압도적이고 적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힘이란 독일 음악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바흐로부터 베토벤, 베토벤으로부터 바그너에게로 태양처럼 강력하게 운행하는 독일 음악이다. 인식을 갈망하는 우리 시대의 소크라테스주의가 아무리 유리한 입장에 있더라도 이 한없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다이몬(마신)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비극의 탄생>
삶의 비극성을 견디는 의지의 힘
니체는 <비극의 탄생> 전편에 걸쳐 "삶과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영원히 정당화된다"를 강조한다.
삶은 근원적으로 비극적이며 그 비극성을 견딜 수단은 예술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왜 삶은 본래적으로 비극적인가. 니체는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그런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세계에서 불을 훔쳐내 인류에게 전해줌으로써 신의 세계를 모독한다. 그때문에 인류는 온갖 괴로움과 비참함을 감수해야 하지만 아이스킬로스는 이 행위를 인간 욕망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필연적인 재앙으로서 또 필연적인 벌로서 받아들이고 거기서 생긴 인간의 커다란 고뇌를 인정하낟. 거기에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독자성이 있다.
신들의 세계에서 불을 훔침으로써 인간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 동시에 끔찍한 갈등과 재해를 야기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인간 삶의 비극성에 관한 니체적 인신의 가장 뚜렷한 모델이다. 삶이란 고통과 죽음과 온갖 종류의 잔인함의 지배를 받는다.
그런데도 니체는 삶의 이런 끔찍한 운명을 부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운명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삶을 끔찍함, 잔인함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그 가혹한 조건들 속에서 삶의 온갖 긍정적인 것들이 자라고 꽃피기 때문이다. 그런 모순의 결합태가 바로 우리의 삶이며, 삶에 대한 그런 인식의 비극적 인식이다.
그렇다면 비극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니체는 바로 "삶과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괴로움과 잔인함 속에서 그 괴로움과 잔인함을 통해 인간이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미적 창조와 향유가 있기 때문에 삶은 살 만한 것이 된다는 인식인 것이다.
그러나 바그너와 결별한 뒤로 니체는 이런 예술 구원론적인 생각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니체는 예술의 자리에 삶 자체를 놓게 된다. 삶은 삶 자체로 정당하다. 굳이 예술이라는 베일을 빌릴 필요가 없다. 나중에 니체는 그렇게 생각을 바꾸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야말로 온갖 고통과 갈등의 원흉이므로 이 의지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성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삶도 세계도 무로 드러날 것인데, 그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우리들 앞에 남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로 융해되는 것이 저항하는 우리의 본성이야말로 바로 생에 대한 의지이고, 이 의지가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세계다. 우리가 이렇게 심하게 무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생을 의욕하고, 또 우리가 이 의지에 불과하며, 이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궁핍과 속박으로부터 눈을 돌려 세계를 초극한 사람들을 바라보자.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나타내는 것은...... 높은 이성보다 높은 평화, 대양과 같은 완전히 고요한 마음, 깊은 평정, 부동의 확신과 명량함인데, 이것이 라파엘로나 코레조가 그린 얼굴에 반영된 것만으로도 완전하고 확실한 복음인 것이다. 거기에는 인식만 남아있고 의지는 사라지고 없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결론
이렇게 끊임없이 의지의 부정과 의지의 소멸을 주장하는 쇼펜하우어를 니체는 정반대로 뒤집는다. 니체는 의지를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지를 적극적으로 시인하고 긍정한다.
온갖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의지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가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삶의 욕망을 찬양하는 것, 니체는 그런 삶의 태도를 그리스 비극 정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음악 정신이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다. 아무리 혹독한 고통도 디오니소스를 죽이지 못한다. 죽음을 견디고 디오니소스가 부활하듯이, 그리스 비극 속에 담김 그리스의 정신은 그렇게 삶을 의욕하고 삶을 찬양한다고 니체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니체 당대까지 지배력을 행사했던 그리스 문화, 다시 말해 '명랑한 그리스' 이미지를 뒤엎는 것이었다. 고귀한 단순함과 온화한 위대함의 시대, 평온한 휴머니즘의 시대, 명랑성이 지배하는 밝은 시대라는 빙켈만적 그리스관이 그 시대에 대한 아주 커다란 오해의 결과임을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지적한다.
하루살이 같은 가련한 존속이여, 우연과 고난의 자식들이여, 그대는 왜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나에게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그대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찍 죽는 것이다. <비극의 탄생>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 그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이런 염세주의와 싸워 이겨낸 데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인들이 뼈저리게 절감하던 삶의 잔혹함, 무상함, 어두움과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단순히 명랑한 낙천주의자들이어서 비극을 만든 것이 아니었고, 반대로 이 세계를 사납고 무서운 것으로 인식했으며 그런 세계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비극 예술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니체는 잔인함과 야수성을 긍정하고, 전쟁을 찬양하고, 노예 제도를 옹호하고, 대중을 경멸하고,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 했다.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천재성과 창조성의 적이었다.
그리스 문화의 그 모든 성취는 그들의 잔인성과 야수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 니체의 가장 기본적인 인식이었다. 잔혹성과 파괴성이 승화될 때 거기서 진정한 문화가 꽃핀다고 니체는 주장했다. 이 시기에 인류의 최상의 목표로 생각한 것은 문화의 융성, 문화의 창조였다.
고대의 가장 인간적인 인간들인 그리스인들은 잔인함과 특성과 호랑이 같은 파괴 충동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 그러나 이 특성은 ..... 현대적 인간성이라는 유약한 개념을 가지고 그들과 맞서는 우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 그리스 조각가는 왜 전쟁과 투쟁들을 그토록 수없이 반복해서 형상화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증오나 승리의 자만심으로 긴장한 힘줄의 사지를 내뻗고 있는 인간의 육체, 몸을 굽힌 부상자, 마지막 숨을 그르렁거리며 죽어가는 자들을 조형할 수밖에 없었는가? <니체 전집 3 유고>
니체는 그리스 문화의 그런 잔인함 속에서, 그 잔인함에 대한 속죄로서 고귀한 문화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이 짓누르는 분위기 속에서 투쟁은 행복이며 구원이다. 승리의 잔혹함은 삶의 환호의 정점이다. 그리스적 권리의 개념이 사실은 살인과 살인에 대한 속죄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고귀한 문화는 첫 번째 승리의 월계관을 살인에 대한 속죄의 제물을 바치는 제단으로부터 받는다." <니체 전집 유고3 유고>
그리스인들은 잔혹하고 야만적이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고대 민족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민족이 되었으며, 철학과 과학과 비극을 발명한 민족이 되었고, 최초의 가장 세련된 유럽 민족이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니체는 이 두 번째 불화의 여신이 그리스 사회의 작동 원리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시기심과 이기심을 그리스는 상승과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모든 재능은 싸우면서 만개해야 한다. 이렇게 그리스의 국민 교육은 지시한다. 반면 현대의 교육자들은 그 어떤 것보다 이른바 명예욕이 폭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기심을 '악 자체'로 두려워한다." <니체 전집 3 유고>
니체는 이렇게 말하면서 두 번째 불화의 여신뿐만 아니라, 첫 번째 잔인한 전쟁의 여신까지도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시기심이나 경쟁심뿐만 아니라 증오심과 파괴욕도 그리스 문화의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렸다.
그리스인들에게 이 (정치적) 충동이 과다하게 충만해 있어, 그것은 거듭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격분하기 시작하고 이빨로 자신의 살을 물어뜯는다. 도시 국가들 간의, 또 정당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질투, 작은 전쟁들의 살인적인 탐욕, 패배한 적의 시체 위에서 구가한 표범 같은 승리, 즉 끊임없이 재현되는 트로이아의 투쟁과 공포스러운 장면들, 이러한 광경을 넋을 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그리스인 호메로스가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리스 국가의 이처럼 천진한 야만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원한 정의의 법정에서 어떻게 자신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가? 국가는 당당하고 조용하게 이 법정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는 찬란하게 피어나는 여인, 즉 그리스 사회를 손에 이끌고 나온다. 바로 이 헬레나를 위해 국가는 저 전쟁들을 치렀다. <니체 전집 3 유고>
여기서 니체가 '헬레나'라는 비유로 뜻하는 것이 '문화를 창조한 그리스'다.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면, 국가들 사이의 질투도 전쟁도 살육도 용인된다고 니체는 말하는 것이다. 주기적인 화산 폭발로 대지가 새로운 영양분을 얻는 그런 파괴적인 변화가 문화 유지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니체는 믿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전쟁 수호신'의 힘을 니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니체는 위험한 주장을 계속한다. 노예 계급이 없다면, 높은 수준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문화는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여가의 산물, 여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문화를 창조하려면, 다른 누군가는 대신 일을 전담해주어야 한다. 니체는 이것이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이라고 말한다.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넓고 깊고 비옥한 땅이 있으려면, 엄청난 다수는 소수를 위해 종사해야만 하고,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구의 정도를 넘어서, 삶의 노고에 노예처럼 예속되어 있어야 한다. 저 특권 계급은 이 다수의 희생과 잉여 노동을 딛고 실존 투쟁에서 벗어나서 이제 새로운 욕구의 세계를 생산하고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 이에 따라 우리는 문화의 본질에는 노예 제도가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들리는 진리로 평가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 이 진리는 프로메테우스적 문화 후원자의 간을 갉아먹는 독수리다. <니체 전집 3 유고>
니체는 노동의 존엄이니 인간의 존엄이니 하는 말은 모두 헛소리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부정한다. 노예가 쓸데없는 지식으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인식하게 되어 봐야 좋을 것 없는데, 그런 처지를 알게 된 노예는 '노동의 존엄' 같은 감언이설을 꾸며내 스스로 위로한다는 것이다.
노예의 무구한 상태를 인식의 나무의 과실을 통해 파괴해버린 불길한 유혹자들! 이제 이 노예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로, 이른바 '만인의 동등한 권한' 또는 '인간의 기본권' '인간으로서 인간의 권리' 또는 '노동의 존엄'처럼, 예리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거짓말로 하루하루를 이어가야 한다. <니체 전집 3 유고>
모든 순간은 바로 앞서 지나간 순간을 삼겨버리며, 모든 탄생은 헤아릴 수 없는 존재들의 죽음이다. 생식, 생명과 살인은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란한 문화를, 피에 흠뻑 젖은 승자, 즉 패자들을 노예로 (잡아) 자신의 마차에 묶어 끌고 오면서 개선 행진을 하는 승자와 비교해도 좋을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권력에 눈먼 노예들은 마차 바퀴에 밟혀 거의 으스러지면서도 '노동의 존엄', '인간의 존엄'이라고 외쳐댄다. <니체 전집 3 유고>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적 문화가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노예 계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문화는 낙천주의적 인생관 때문에 노예 계급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이 때문에 '인간의 존엄'이라든가 '노동의 신성함'과 같은 아름다운 유혹적인 문구와 위로의 문구의 효과가 소진되었을 때 이 문화는 점차 무서운 파멸을 향해 치닫게 된다. 자신의 처지를 부당한 것으로 보는 것을 배우게 되고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손만대를 위해서 복수하려고 하는 야만적인 노예 계급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비극의 탄생>
니체가 동정심을 부정한 것은 그런 나약한 감정이 인간의 문화 창조를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민주주의를 부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주의란 만인 평등의 정신이다. 니체는 민주주의 정신이 문화 창조의 토대를 허물어뜨린다고 보았다.
대중은 세 가지 관점에서만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 나쁜 종이 위에 낡은 건판으로 제작된, 위인들의 희미한 복사본으로서, 둘째, 위대한 인물에 대한 저항으로서, 마지막으로 위대한 인물의 도구로서 가치가 있다. 그 외에 대중 따위는 악마와 통계학에 주어버려라! 뭐라고, 통계학이 역사에 법칙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법칙을? 그렇다, 통계학은 대중이 얼마나 비속하며 얼마나 구역질 날 정도로 획일적인가를 증명하고 있다. 도대체 여러 가지 중력, 우둔, 흉내, 애착, 공복 따위의 작용을 법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반시대적 고찰>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천재의 탄생이었고, 문화의 창조였다. 대중을 옹호하고 대중을 떠받들고 대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이 천재의 탄생을 방해하고 문화 창조를 훼방 놓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천재의 탄생을 위해서는 다양성과 자유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 다양성을 확보 할 수 있고 누구나 천재(지도자)가 될 수 있는 환경으로 더욱더 치열한 전쟁터가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니체의 비판에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확실히 민주주의는 범용성의 지배, 평범성의 범람을 막지 못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아주 강력한 도전이다. 이 도전을 견뎌내고 이겨낼 때만 민주주의는 한층 견고하고도 풍부한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체극장 0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 2022.09.08 |
---|---|
니체극장 04 반시대적 고찰 (2) | 2022.09.08 |
니체 극장 01~02 (0) | 2022.08.25 |
모두가 인기를 원한다 다시 정리 (2) | 2022.06.27 |
스케일 (0) | 2022.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