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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극장 0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PART 2 방랑하는 자유정신

"자유로운 인간은 모든 점에서 관습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고자 하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다." <아침놀>
"영혼의 야전 진료소. 
가장 강력한 치료제는 무엇일까? 승리다." <아침놀>

 

0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대들이 이상적인 것을 보는 곳에서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본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바그너도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보아도 그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트립셴, 저 멀리 축복 받은 이들이 살고 있는 집. 트립셴과 비슷한 그림자조차 바이로이트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바이로이트 극장의 주춧돌을 놓았던 비길 데 없이 위대했던 나날들, 섬세한 일을 다룰 수 있는 손을 가졌던 소수의 선구자들. 나는 결코 이와 비슷한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바그너가 독일어로 번역되고 말았다. 바그너주의자들이 바그너의 주인이 되고 말았다! ............. 가엾은 바그너! 그는 도대체 어디로 들어갔는가? 돼지 무리에 들어가는 것이 그에게는 더 나았을 것을! 독일인들 사이에 떨어지다니! <이 사람을 보라>

 

바이로이트의 잔치판 분위기였다. 니체가 목격한 바이로이트는 한마디로 말하면, 오페라를 배경으로 한 거창한 사교 모임이었다. 음악 정신은 사라져 보이지 않고 왕족, 귀족, 은행가, 외교관, 귀부인들만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공연은 지루해하고 사교 모임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술 운동의 동지'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항적이고 도전적이었던 바그너가 독일의 '교양 속물' 세계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뜻이다.

판단의 기이한 혼탁, 모든 대가를 지불하면서 재미있고 즐거운 것을 얻으려는 천박한 숨어 있는 욕망, 학자인 체하는 관심사, 예술의 진지성에 대해 잘난 체하고 과시하려는 모습, 돈벌이에 대한 동물적 탐욕을 품고 있는 주최자들의 모습, 자신들의 득실에 따라서 민중을 생각하고 의무에 대한 생각 없이 극장과 음악회를 다니는 상류층의 공허하고 정신 나간 행위 이런 모든 모습이 우리의 현재 예술 상태의 답답하고 타락한 공기를 형성하고 있다. <반시대적 고찰>

 

바그너에게서 독립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느끼면서도 바그너라는 세계를 잃어버리는 데서 오는 상실감을 다스리지 못하는 내적 갈등 상황이 니체의 정신을 타격했던 것이다.

 

위대한 창조를 하려면 고독이 필요한데, 결혼이라는 삶의 형식은 고독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이 저작 부터 확연히 다른 니체의 새로운 관점과 시야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니체 사상의 중기는 <아침놀>과 <즐거운 학문>까지 이어지며, 그 뒤를 잇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후기 혹은 제3기가 시작된다.

 

이 시기 니체의 '실험주의적 사유 방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체계적이고 수미일관하게 새로운 사상을 세우는 것이 쉽지 않다면, 먼저 기존의 사상과 다른 사유들을 떠올려 대립시켜 보는 것이다.

 

니체는 사유 실험을 통해 자신의 정신을 가두고 있던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사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유정신이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됐다는 것인가? 같은 곳에서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설명하면서 그 질문에 답한다.

그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은 승리의 표현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이상주의는 나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은 '그대들이 이상적인 것을 보는 곳에서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

 

니체는 이상주의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이상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말한다. 이때의 이상주의는 바꿔 말하면,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이고 바그너의 예술철학이며, 더 넓히면 플라톤 이래 서양의 이상주의 철학이다. 

 

그런데 뒷날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재판을 펴내면서 쓴 1886년 서문에서 이 자유정신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자유정신은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창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내게 필요했던 '자유정신들'을 창안해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이 우울하고 용감한 책은 바로 그 자유정신들에게 바친 것이다. 하지만 이 자유정신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면서 니체는 질병이나 고독 같은 나쁜 상황 속에서도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정신을 만들어냈으며 "친구가 없는 데 대한 보상으로 자유정신들이 동반자로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자에게 마치 지진처럼 돌연히 다가온다. ....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심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기서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이런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 퍼진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힘은 자유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이다! .... 그 사이에는 긴 회복기가 놓여 있다.  .... 거기에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과 대양의 행복이 속해 있다. 즉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과, 호기심과 가냘픈 멸시의 감정이 얽힌 제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이 차가운 단어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편안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어 니체는 이 서문에서 이 자유정신이 마침내 얻게 된 하나의 '진리'를 제시한다. 

너는 너의 주인이며 동시에 네 자신의 미덕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과거에는 미덕이 너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 미덕은 다른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너의 도구여야 한다. 너는 너의 찬성과 반대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여 너의 더 높은 목적에 필요할 때마다 그 미덕을 붙이거나 떼내버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너는 모든 가치에서 관점주의적 감각을 터득해야만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친절함, 동정심, 정직함, 관대함 같은 미덕들이 내가 어찌해보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고, 내가 그 미덕들을 지배해 미덕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니체는 동정심이나 친절함이 몸에 배어 이 '미덕'의 관습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런 식의 주인답지 못한 삶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나는 동정심을 베풀 수도 있고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할 수도 있지만, 또 필요하다면 그런 미덕을 거두어들일 수도 있다. 미덕은 본디부터 옮은 것도, 그런 것도 아니고 '내 관점에서 볼 때'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관점주의적 태도다. 

천재 예찬의 위험과 이익. 위대하고 탁월하며 창작력이 풍부한 정신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극히 자주, 그 정신이 초인적인 근원을 가졌다거나 특정한 신비로운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그 능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인식에 관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종교적인 미신과 .... 여전히 결부돼 있다. 사람들은 흔히 그들에게는 현상이라는 외투의 구멍을 통해서, 세계의 본질을 직접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서 그들이 학문의 노력과 엄밀성 없이도 이 신비로운 투시력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것을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 다른 한편, 천재, 천재의 특권, 그리고 특수한 능력에 대한 미신이 천재 자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경우, 그것이 그에게 이익을 가져올지 그렇지 않을지는 의문이다.
당연히 신에게만 바치는 제물의 냄새가 천재의 두뇌에까지 스며들어, 그로 인해 그의 두뇌가 허우적거리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자신을 초인적인 존재라고 간주하기에 이른다면 그것은 위험한 징후다. 그 징후의 결과는 무책임, 예외적 특권의 감정, 자신과 교제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믿음, 그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하물며 더 낮게 평가하거나 또는 그의 작품의 잘못된 점을 공개하려는 시도에 대한 미친 듯한 분노 따위가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게 됨으로써 마침내 그의 날개에서 깃털이 하나씩 뽑혀 나간다. 그 미신은 그의 능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는 아마 그를 위선자로까지 만들게 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는 자신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바그너와 연결된 끈을 매몰차게 끊어야 했다. 그 단절 작업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었고, 그 작업의 고통스러운 흔적은 책의 이곳저곳에 남았다.

세계의 본질을 폭로하는 자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불쾌한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사물 자체'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그만큼 의미심장하고 깊이 있으며 경이롭고 행복과 불행을 안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문장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를 부정하려는 니체의 의지를 느끼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현상과 현상 배후의 본질 세계인 '사물 자체'로 세상을 나눈뒤, 그 현상을 표상이라고 부르고, '사물 자체' 곧 사물의 본질을 '의지'라고 보는 것이 쇼펜하우어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틀이다. 니체는 본질 세계인 '사물 자체'는 무의미하다고, 다시 말해 세계의 영원한 본질인 '의지' 같은 것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다음 명제가 도출된다. 사물의 배후, 현상의 배후에는 아무런 형이상학적인 세계도 없고 본래적인 실체도 없다. '사물 자체'에 거주하던 칸트의 '도덕'도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현상, 표상, 사물의 세계뿐이다. 이 세계를 도덕적으로 지탱해주는 배후의 형이상학적 원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이상주의적인 원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쇼펜하우어 철학을 부정함으로써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음악관도 동시에 부정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음악은 '사물 자체'의 세계에서 직접 솟아나는 것이자 '의지'의 직접적 구현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이제 그런 주장을 부정한다.

음악 그 자체는 우리의 내면을 위해 중요한 것도 아니고 감정의 직접적인 언어로 간주해도 좋을 만큼 깊은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다. .... 우리는 오늘날 음악이 직접 내면을 향하여 말하며 내면에서 나온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 어떤 음악도 그 자체로는 심오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그런 음악은 '의지'와 '사물 자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 지성이 스스로 이 의미를 처음으로 음향 속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 정신을 죽인 장본인으로 규탄받았던 소크라테스는 니체의 새책에서 사물을 편견 없이 투명하게 인식하려고 분투했던 자유정신의 위대한 원형으로 부활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필요했던 한 여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가 만약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그녀를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자유정신의 영웅주의도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크산티페는 집과 가정을 불편하고 끔찍하게 만듦으로써, 소크라테스를 고유의 직무 속으로 더 깊숙이 몰아넣었다. 크산티페는 길거리가 됐든 다른 곳이 됐든 사람들이 잡담을 하고 일 없이 노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도록 소크라테스를 가르쳤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아테네 최대의 길거리 변증가로 키웠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일이 잘 진행되면, 사람들이 도덕과 이성의 안내서로서 <성서>보다 <소크라테스 회상록>을 손에 드는 시대가 .... 올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아주 다양한 철학적 삶의 양식의 길들이 거슬러 올라가 통하고 있다. 그것은 ..... 이성과 습관을 통해 확립돼 있으며 삶에 대한 기쁨,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기쁨을 가리키고 있다. ...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에 비하면 소크라테스는 진지하되 즐거운 방식으로 진지하며 인간 영혼을 가장 훌륭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장난기 가득한 지혜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그에게는 더 훌륭한 지성이 있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전체를 아울러서 보면, 이 시기에 니체는 이전에 그토록 찬양했던 디오니소스적인 비합리적 충동 대신에 투명한 합리적 인식을 향한 의지를 앞세워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라는 낭만주의적 정신세계의 탈출로를 확보하려 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니체의 관심을 받은 철학자가 에피쿠로스다. 친구들과 함께 작은 정원에 은거해 분수에 넘치지 않는 절제된 생활을 했던 '소박한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는 니체의 책에서 행복한 삶의 한 모범으로 제시된다. 이때 에피쿠로스에게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인식'이다. 인식하는 자 에피쿠로스, 사물의 본질을 투명하게 꿰뚫어보는 자 에피쿠로스가 니체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니체 후기에는 에피쿠로스의 인식주의적 삶을 '퇴락한 삶'으로 비판하게 된다.

 

이 시기 니체의 이런 인식주의는 사람과 사물을 냉정한 이성의 눈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파악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예술이 주는 위로의 베일을 걷어내고, 음악이 주는 도취의 황홀을 씻어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인식주의는 회의주의, 곧 만사를 의심의 대상으로 보는 태도로도 나타났다. 관습과 제도를 의심하는 회의주의는 사물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인식주의와 나란히 갔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 인간을 세계의 유일한 의미로 보는 인간 중심적인 관습적 사고를 거부하면서 인류의 삶을 우주 속의 티끌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에서 니체의 의심하는 눈은 매우 뛰어난 통찰을 얻어낸다.

이 우주에서 우리가 유일한 존재라고? 아,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종종 지구를 떠난 시야를 실제로 얻게 되는 천문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주 속에 있는 생명의 물방울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거대한 대양의 총체적 성격에 견주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 수많은 별들도 지구와 마찬기자로 생명을 생산해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이러한 별들은 아주 많이 있지만, 생명을 한 번도 발현해본 적이 없거나 오래전에 잃어버린 수많은 별들에 비한다면 한 줌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 이런 모든 별들의 생명은 존재 기간으로 측정해보면 단지 한순간 한 번 반짝거렸던 것뿐이며 그 뒤에는 길고 긴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 따라서 생명이 결코 그 별들이 존재하는 목적과 궁극적인 의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줄 것이다. 우리가 공상 속에서 인류의 몰락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지구의 몰락과 결부해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마 숲 속의 개미들은 자신들이 숲이 존재하는 목적과 의도라고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는 도덕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얽어매는 사슬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유정신을 획득하려면 이 사슬에서 풀려나야 한다고 절박하게 생각했다.

 

니체는 도덕의 기원을 더 파고들어가 결국 도덕이 비도덕적 뿌리에서 자라난 것임을 밝혀낸다

 

"사랑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의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기운까지 자식에게 내준다."

 

이렇게 내적 모순이 있는 행위의 사례를 제시한 뒤 니체는 묻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니체의 답은 부정적이다. 이런 행위는 결코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내부에 있는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인격을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아간다는 것, 이것이 니체의 대답이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들, 즉 소녀의 용서, 군인의 희생, 어머니의 헌신은 결코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즉 개체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룬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더 나눌 수 없는 존재', 그래서 '개체', '개인'을 뜻한다. 그런데 니체는 그 '개인'이라는 나눌 수 없는 존재가 실제로는 나눌 수 있는 존재, 분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뒷날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밝혀낸 인간 정신의 역동적 구조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구조를 구성하는 것이 이를테면, 자아,이드,초자아다. 이드가 쾌락 원칙만 아는 본능적 충동이라면, 초자아도덕 원칙에 입각해 명령하고 검열하고 규탄하는 무의식적 힘이며 자아는 현실 원칙으로서 이 두 힘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조절하고 중재하는 일을 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인격은 이렇게 통일된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내적 세계사'의 현장이 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개인 "내면세계의 탐험가이자 항해자"가 되는 것이다. 

 

미덕은 동정심 따위를 가리킨다. 이런 미덕에 따라 살도록 요구하는 것이 말하자면 초자아다. 초자아는 양심의 명령을 관장한다. 그런데 이 초자아가 마땅히 주인이어야 할 자아의 말을 듣지 않고 주인 노릇을 해왔다고 니체의 이 문장은 지적하는 것이다. 양심이 초자아의 명령에 쫓기고, 그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제 그 관계를 역전시켜야 한다. 자아를 강화해 명실상부한 인격의 주인으로 만들어 초자아를 제압해야 한다. 이것이 니체의 새로운 명령이다. 이렇게 역전된 새로운 도덕적 인식 위에서 니체는 아포리즘들을 계속 써나간다. 그는 선과 악의 엄격한 구분을 파기한다.

선한 행위와 나쁜 행위 사이에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기껏해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선한 행위란 승화된 나쁜 행위이며 나쁜 행위란 거칠어진, 야만스런 선한 행위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더 나아가 니체는 훗날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에서 심도 있게 다룰 문제를 거론한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또 다른 방식은 선을 '고귀함'에, 악을 '비천함'에 대응시키는 방식이다.

선과 악의 개념에 이르기까지는 이중적인 경위가 있다. 그 하나는 지배하는 종족과 계급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보복한다. 즉 감사할 줄 알고 복수심이 강한 사람을 선하다(좋다)고 한다. 반면에 무력하고 보복할 수 없는 사람은 선하지(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 선함(좋은)과 나쁨은 한동안 고귀함과 비천함, 주인과 노예 같은 관계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런 이분법은 니체 철학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렇게 도덕이라는 것, 선악의 구분이라는 것이 그  뿌리를 파고 들어가보면 도덕과는 무관한 것에서 기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니체는 타인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바로 약자들이 쓰는 무기라고 여긴다.

 

사회주의자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욕망한다. 만약 풍족한 삶의 영원한 고향인 완전한 국가가 실제로 실현되면, 풍족한 삶이 위대한 지성과 강력한 개인이 성장하던 토양을 파괴할 것이다. 나는 위대한 지성과 강력한 개인을 커다란 활력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완전한 국가가 이루어지면, 인류는 너무나 힘이 빠져 천재를 더는 산출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삶이 그 폭력적인 특성을 유지하고 야만적인 힘과 활력이 몇 번이고 거듭 새로이 솟아나기를 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따뜻하고 동정적인 마음은 삶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따뜻한 마음은 가장 정열적으로 그것을 바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열은 삶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특성으로부터 불같은 열정, 따뜻함, 나아가 자신의 존재까지 얻어냈던 것이다. 가장 따뜻한 마음은 자기 자신의 기초가 제거되기를, 자기 자신이 파멸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마음은 비논리적인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현명하지 못하다. 가장 높은 지성과 따뜻한 마음이 똑같은 인격 안에 공존할 수 없다. 그리고 삶에 관해서 판단을 내리는 현명한 사람은 동정을 넘어서서, 삶을 전체적으로 결산할 때 단지 함께 평가될 수 있는 것으로서만 동정을 고려할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현명하지 않은 동정의 그 극단적인 소망을 거역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신의 유형을 존속해나가고 최고의 지성을 궁극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명한 사람은 단지 피로에 지친 개인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저 '완전한 국가'의 건설을 촉구하려 하지는 않을 거시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결국 가장 따뜻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는 인간이 어리석게 되는 것을 촉구하고 마음이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최고의 지성이 생산되는 것을 저지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천재 혹은 최고의 지성은 강한 활력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데,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따뜻한 마음, 동정심의 도덕은 삶의 강한 활력,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제거해버린다. 그래서 사회주의가 꿈꾸는 보편적 평등의 유토피아는 인류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전쟁은 필수적인 것이다. 인류가 전쟁하는 것을 잊어버렸을 때 인류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공허한 열망이며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다. 당분간 우리는 지쳐가는 모든 민족에게 야영지의 그 거친 활력, 비개인적인 깊은 증오, 양심에 거리낌 없는 살인자의 냉혹함, 적의 전멸 속에서 느끼는 공통된 조직적인 격정, 커다란 상실에 대한, 즉 자신의 현존이나 친구의 현존에 대한 자랑스러운 무관심, 숨이 막힐 듯한 지진 같은 영혼의 감동이 전달될 수 있는 수단으로 큰 전쟁보다 더 강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 .... 문화는 정열과 악덕 그리고 악의 없이는 전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제국이 된 로마 사람들이 전쟁에 약간 싫증이 났을 때, 그들은 동물 사냥, 검투사들의 싸움, 그리스도교 박해에서 새로운 힘을 얻으려는 시도를 했다.  ... 그러나 그러한 대용품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드러내 보여줄 뿐이다. 즉 오늘날 유럽인들처럼 교양 수준이 높고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쇠약해진 인류는, 상실하지 않으려면,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가장 크고 무시무시한 전쟁, 그리하여 야만 상태로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그런 전쟁이 필요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는 이렇게 문화가 살아남고 발전하고 고양되려면 전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 통일 국가 창설'이라는 위대한 정치적 과업을 이루려면 악을 감행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니체도 악 자체를 찬양한 것이 아니라 악을 감당할 만큼 강인한 정신만이 비참한 현실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 끝없는 변화와 순간에서 기쁨을 얻는, 방랑하는 그 어떤 것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물론 그런 사람에게는 지친 밤들, 그에게 휴식을 제공할 도시의 문이 닫힌 나쁜 밤들이 오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그 후 기쁨에 가득 찬 아침이 온다. 그는 그때 이미 어두운 빛 속에서 뮤즈의 무리들이 그의 곁에서 춤추며 산의 안개 속을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후에 그가 조용히 오전의 영혼의 균형 속에서 나무들 사이를 거닐면, 그 나무 꼭대기와 우거진 잎에서 좋고 밝은 것들, 즉 산과 숲 그리고 고독 속에 살고 있는 자유정신들의 선물이 그에게 떨어진다. 자유정신들은 그처럼 어떤 때는 쾌할하고 또 금방 생각에 잠기는 현자, 방랑자 그리고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동트는 새벽의 비밀에서 태어나, 왜 열 번째와 열두 번째를 치는 종소리 사이의 낮이 이렇게 순수하고 투명하며 빛나도록 화사한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들은 오전의 철학을 찾고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는 어둡고 음침하고 암담한 밤을 지나 오전의 철학, 밝음의 사유를 찾는다.

 

네가 앞으로 그리고 더 높이 나아갔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이제 너의 주위는 전보다 더 자유로워지고 전망은 더 풍부해졌다. 너에게 공기는 더 차갑지만 더 온화한 기분이 들 것이다. .... 너의 걸음걸이는 더 발랄하고 확실해졌으며, 용기와 사려 깊음은 함께 성장해왔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너의 길은 이제 네 과거의 길보다 훨씬 더 고독해져도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 더 위험해질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여기서 티체는 자신이 더 높이 올라갔으며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둠의 숲을 뚫고 한없이 나아갔던 니체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삶이 밝아지고 맑아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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