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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극장 04 반시대적 고찰

04 반시대적 고찰

"너의 진정한 본질은 네 위로 측량할 수 없이 높은 곳에 있다."

"진리는 환상이다. 진리는 마멸되어 감각적 힘을 잃어버린 비유라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해버린 그런 환상들이며, 그림이 사라질 정도로 표면이 닳아버려 더는 동전이기보다는 그저 쇠붙이로만 여겨지는 그런 동전이다."

 

"인습의 윤리로 인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악한 일에서조차 정직한 것이 훨씬 낫다. 자유로운 인간은 선하게도 악하게도 될 수 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자연의 수치이며 천상의 위로도 지상의 위로도 얻지 못한다."

<반시대적 고찰>

 

니체는 따분하고 협애한 문헌학 연구가 아니라 강렬하고 생생한 삶을 원했다.

개미집처럼 답답한 문헌학 연구에서 벗어나 삶 자체와 맞붙어 진정한 창조적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에 들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쓰는 것으로 창조 열망을 달랬다.

 

니체는 고전문헌학 교수로서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생활을 했지만, 바깥에서 보기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대학교수가 재직 중에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니체는 20대 중반에 거의 다 성취했다. 그는 존경받는 젊은 학자였으며, 그의 말과 판단을 사람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니체는 "오늘날 대학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찬양받는 것과 상반되는 것, 곧 순종, 종속, 훈육, 예속과 더불어 모든 교육이 시작된다" 고 강조 하고 "위대한 지도자에게 추종자가 필요한 것처럼, 지도받아야 할 사람들 또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뭇 권위주의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여기가 정점이었다. 성공에 뒤이어 곧바로 시련의 시간이 닥쳐왔다. <비극의 탄생>에 대한 고전문헌학계의 비판이 터져 나왔다.

 

독일 정신의 디오니소스적 기반으로부터 하나의 힘이 솟아올랐다. 이 힘은 소크라테스적 문화의 근본 조건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소크라테스 문화로는 설명할 수도 변호할 수도 없다.  .... 요즘 우리의 미학자들이 자신들한테만 통하는 아름다움이라는 잠자리채로, 그들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생명을 갖고 움직이고 있는 암윽의 정령을 때려잡으려고 뛰어다니는 꼴은 얼마나 가관인가!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영원한 아름다움,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음악 애호가들이 지치지 않고, '아름다움이여! 아름다움이여!' 외치고 있을 때 한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라.

 

그 경우 그들이 아름다움의 품 안에서 곱게 자라난 자연의 총아처럼 보이는지, 아니면 그들이 오히려 자신의 조잡함을 숨기기 위해 기만적인 형식을 찾고 자신의 빈곤하고 냉랭한 감수성을 감추기 위해 미학적 변명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이런 사람의 예로서 나는 오토 얀이 떠오른다. 그러나 독일 음악 앞에서는 그러한 사기꾼, 위선자도 조심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화 전체에서 음악이야말로 유일하게 순수하고 맑으며 정화시키는 불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탄생>

 

디오니소스의 발견자로서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알리려 했던 니체는 독일 학계의 차가운 반응에 깊이 마음이 상했다. 특히 학자 세계로부터의 소외는 그가 '죽을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힘든 부담이었다.

이때 이후로 독일 학계는 니체의 모든 저작을 침묵과 외면으로 대하게 된다. 그런 냉담한 태도의 지속에 니체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는다.

 

니체의 반발은 갈수록 심해지고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해진다. 니체 내부의 과격한 기질에서 타져 나오는 독일 문화의 본질에 대한 잔인하고도 집요한 규탄이 결국 니체 철학의 심원한 통찰로 이어지게 된다. 독일 지식 세계를 향한 인정 투쟁이 마참애 독일 자체를 꿰뚫고 저 깊은 인식의 심층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시대 비판가의 탄생

지식계의 거부에 부딪힌 니체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경한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아간다. 소크라테스적 지성주의를 부정하고 디오니소스적 삶의 에너지를 긍정하는 니체는 이제 '인식'이나 '진리' 같은 근대 학문의 가장 기초적인 범주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다.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소박하고 불완전하고 근거 없는 것인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수많은 태양계에서 쏟아부은 별들로 반짝거리는 우주의 외딴 곳에 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별에서 어떤 영리한 동물들이 '인식'이라는 것을 발명했습니다. 그것은 '세계사'에서 가장 의기충천하고도 가장 기만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순간일 뿐이었습니다. 자연이 몇 번 숨 쉬고 난 뒤 그 별은 꺼져갔고 영리한 동물들도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의 우화를 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어둡고 단순하고 허망하고 자의적인지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영겁의 시간이 있었다. 또 인간의 존재가 다시 끝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인간의 생명을 넘어서는 어떤 사명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 전집 3 유고>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

 

인식이란 인간을 초월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인식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인식은 삶을 위해 발명된 것일 뿐이다.니체는 인식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혹은 신앙이 어리석은 것임을 이렇게 보여주면서, 인식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라고 암시한다. 인식을 위해 삶이 훼손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삶을 보호하고 확장하고 충일하게 할 수 있다면 '올바른 인식' 따위는 던져버릴 수도 있다는 발상이 여기에 깔려 있다.

 

니체는 글에서 '진리'를 부정하는 발언도 한다. 영원한 진리,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니체의 주장은 뒷날 20세기 철학, 특히 탈근대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유동적인 한 무리의 비유, 환유, 의인관들이다. .... 진리는 환상이다. 진리는 마멸되어 감각적 힘을 잃어버린 비유라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해버린 그런 환상들이며, 그림이 사라질 정도로 표면이 닳아버려 더는 동전이기보다는 그저 쇠붙이로만 여겨지는 그런 동전이다. <니체 전집 3 유고> 

 

뒷날 니체는 진리를 발견하고 참된 인식을 얻으려는 진리 충동, 인식 충동을 인간의 원초적인 권력의지의 발현 양태로 이해함으로써 그 충동들을 권력의지의 하위 범주로 삼게 된다. 

동시에 그는 어떤 거짓도 기만도 없는 투명한 인식, 참다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분투한다. 니체가 권력의지를 삶과 세계의 본질로 인식해가는 과정 자체가 진리를 향한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니체는 한편으로는 진리의 보편성, 진리의 진리성을 부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다운 진리를 찾기 위해 삶 자체를 거는 모험을 감행한다.

 

이런 진리 비판은 어떤 특정한 진리만 진리로 아는 자기 시대의 '진리관'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그너와 멀어지는 만큼 니체의 삶과 사유는 독립성을 얻었다.

바그너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과 바그너로부터 조금 떨어져 어떤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뒤엉켜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시대의 문화에 대항해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는 커다란 투쟁의 동맹자라고 생각했다.

 

파울 레라는 젊은 철학자를 만난다. 레는 니체의 사상과 삶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레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의 개척자였다. 도덕은 관습일 뿐 본성이 아니며, 선과 악은 단지 규약에 불과하다는 레의 관점에 니체는 매료되었다. 

 

나에게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나의 내면에 있는 논쟁적,부정적 소재 전체를 우선 토해내는 일이네. <로데에게 보낸편지>

 

나는 언제나 제대로 생산적인 사람이 될까? <게르스도르프에게 보낸편지>

 

쇼펜하우어의 삶을 빌려 니체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그들, 이 정신적으로 고독한 자유인들은 알고 있다. 자신들은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진리와 정직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하고 있지 않은데, 오해의 그물이 그들을 빙 둘러싸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강력하게 원해도, 그들의 행동 위에 서려 있는 잘못된 견해, 순응, 어정쩡한 용납, 관대한 침묵, 잘못된 해석의 안개를 막을 길이 없다.그로 인해 그의 이마에는 멜랑콜리의 구름이 모여든다. 왜냐하면 그런 천성을 지닌 사람들은 가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죽음보다 더 증오하기 때문이다. 가식에 대해 끊임없이 분노하기 때문에 그들은 화산처럼 폭발적이고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그들은 때때로 강압적인 자기 은폐, 강요된 자제에 대해 복수한다. 그들은 무서운 표정으로 동굴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폭발하고, 그로 인해 그들 자신이 파멸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위험하게 살았다. <반시대적 고찰>

 

제국이 된 독일의 한 천박한 문화적 전형으로 비쳤다. 니체는 이 늙은, 지난날의 헤겔 좌파에게 달려들어 제일성을 내뱉었다.

 

독일의 여론은 전쟁, 특히 승리로 끝난 전쟁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의 금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즐겨 경청하는 저술가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 여론보다 더 중요한 의견은 없다고 생각하며 그런 까닭에 전쟁을 찬양하고 또 이 전쟁이 윤리, 문화, 예술에 끼치는 영향의 강력한 현상들을 환호하면서 앞다투어 조사하는 데 열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승리는 크나큰 위험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패배보다 승리를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승리의 결과로부터 더 심각한 패배가 발생하지 않도록 승리를 견뎌내는 일에 비하면, 그러한 승리를 쟁취하는 것 자체가 훨씬 더 쉬운 것처럼 보인다. 최근 프랑스와 치른 전쟁이 남긴 모든 나쁜 결과들 중에서 아마 가장 나쁜 것은 널리 확산된 일반적 오류일 것이다. 그것은 독일 문화도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이처럼 특별한 사건과 성과에 어울리는 화환으로 독일 문화를 장식해야 한다는 여론과 그러한 여론에 맞춰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오류다. 이 망상은 매우 해로운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망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 이 오류가 우리의 승리를 완전한 패배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승리가 '독일 제국'을 위한 독일 정신의 패배, 아니 근절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시대적 고찰>

 

니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곧바로 문화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독일 문화가 우수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전쟁 승리가 입증했다고 믿는 것, 그런 여론이 퍼져가고 그 여론에 반대하는 것이 위험시되는 것, 그런 들뜬 시대 분위기다. 문화의 그런 경박함을 이끄는 사람들을 니체는 이 책에서 '교양 속물'이라고 명명한다.

 

니체가 이렇게 교양 속물이라는 말로 비판하는 것은 '예술을 알지 못하고, 예술을 훼손하는 시민'이었다. 바그너 예술이 삶을 구원하고 삶을 끌어올린다고 믿었던 니체는 그런 예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슈트라우스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뒷날 니체 자신도 바그너와 결별하고 나서는 예술이 삶을 구원하고 삶을 끌어올린다는 젊은 시절의 믿음과 거리를 두게 된다.

 

이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니체는 삶이란 그 자체로 살 만한 것이 아니며, 삶의 비참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오직 예술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괴로워하고 서로 괴로움을 끼치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인간사의 진행이 폭력, 기만, 부정으로 규정되는 한, 사람들은 결코 윤리적으로 될 수 없다. 모든 인류가 지혜에 대해 경쟁심으로 오랫동안 서로 싸우지 않는 한, 그리고 개인을 매우 현명한 방식으로 생활과 지식으로 인도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결코 현명해질 수 없다. 만약 자신의 투쟁, 노력, 몰락 가운데에서 그 어떤 숭고하고 의미 심장한 것을 인식할 수 없다면, 그리고 만약 위대한 정열의 리듬과 이 정열의 희생에 대한 쾌락을 누리는 것을 비극에서 배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엄청난 불만의 감정을 견대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 마치 그 누구도 잠 없이 지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갖로 삶에서 괴로워하는 자는 그러한 가상(예술) 없이는 지낼 수 없는 것이다. <반시대적 고찰>

 

이 시기에 니체는 마치 어린아이가 담요를 붙들 듯 예술이라는 위안거리를 붙들고 있었다. 예술은 잠과 같은 것이고 꿈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없다면 삶의 괴로움을 조금도 씻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삶의 위안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예술관에 대한 집착을 바그너 세계에서 탈출하면서 함께 버렸다. 니체는 예술이 없는 삶, 예술이라는 가상의 도움을 받지 않는 삶 그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삶을 다른 것의 도움 없이 삶 자체로 극복하는 것이 바그너와 이별한 뒤 니체의 진정한 과제가 된다. 

 

"나의 초기 저작을 읽은 독자에게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내가 초기 저작에서 피력했던 형이상학적이고 예술가적인 생각을 버렸다. 그러한 생각들은 기분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계속 잡아둘 수는 없는 것이다." <니체 전집 9 유고>

 

슈트라우스 비판에 이어 쓴 <반시대적 고찰> 제 2 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에서 니체는 당대에 유행하던 또 다른 지적 흐름인 '역사주의'를 비판의 과녁으로 삼았다. 

 

헤겔 철학의 유행으로 당시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역사는 끝없는 유여곡절을 겪지만 결국에는 진보하고 인류는 전진할 것이라는 믿음, 그러므로 이 역사의 전진과 진보에 자신을 바치는 것은 고귀한 희생이라는 생각이 퍼져있었다. 이 시기에 역사는 거의 인격적 특성을 획득해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지위를 얻었다. 니체는 이런 역사주의적 세계관을 문제 삼았다.

 

그의 주장은 삶이 역사에 봉사해서는 안 되며, 역사가 삶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니체는 헤겔의 역사주의가 삶을 병들게 한다고 진단하면서, 이 역사주의의 무게로부터 인간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 구해내야 할 인간이 인류라는 추상적인 차원의 집합 명사가 아니라 철저하게 단독자로서 존재하는 개인이라는 사실이다.

 

니체가 역사주의에 담긴 인류의 공동 목표 따위를 부정하고 사태를 오로지 개인의 관점에서 본 것은 슈티르너 사상과 확실히 닮은 데가 있다. 슈티르너는 헤겔 좌파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주장했다.

슈티르너 철학에 대한 자프란스키의 간명한 해설은 '유명론에 입각한 개인주의'를 흝어보게 해준다. 여기서 유명론이란 모든 보편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슈티르너는 중세의 유명론학자들이 보편 개념을, 특히 신과 관계되는 보편 개념을 아무런 실체 없는 공허한 '입김'이라고 여긴 것에 동의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에는 창조적인 힘이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환영을 만들고, 그 환영은 인간을 다시 구속한다. 즉 인간의 해방이란 스스로 생산한 환영과, 사회적 관계에서 유래하는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인간이 "우리 밖에 있는 저 피안의 세계." 즉 신이나 신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도덕을 파괴하는 것은 당연히 옳은 일이라고 슈티르너는 말한다. 바로 이것이 '계몽의 완성'이다. 하지만 "우리 밖에 있는 저 피안의 세계"가 없어지더라도 "우리 내부의 피안의 세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신은 죽었다. 우리는 신이 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신의 죽음 이후에 우리를 괴롭히는 더 지독한 환영이 생긴다. 슈티르너는 신의 살인자인 헤겔 좌파가 저 옛날 피안의 세계의 자리에 다른 피안의 세계, 즉 내적인 피안의 세계를 앉혔다고 비판한다. ..... 내적 피안의 세계는 또한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보편 개념의 지배, 예를 들면 인류, 휴머니즘, 자유 등과 같은 보편 개념의 지배를 뜻하낟. 우리 자아는 자신이 의식하는 한 이런 개념들의 그물에 갇혀 있다.  ..... 슈티르너가 목표로 삼는 것은 개인을 .... 그의 본질적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감옥은 우선 종교적이다. 이 종교적인 감옥은 이미 충분히 비판되고 해체되었다. 아직도 해체되지 않은 것은 다른 본질적 환상들의 지배다.

 

예를 들면 역사적 논리, 사회의 법칙, 휴머니즘과 발전, 그리고 자유주의에 관한 생각들이 바로 본질적 환상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유명론자인 슈티르너에게는 보편 이념인데, 이 보편 이념은 아무런 실체도 갖고 있지 않지만 만일 우리가 그것들에 사로잡히면 심각한 실제적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슈티르너의 관심사는 오직 '나'였다. 그가 보기에 세상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밖에 없다.

 

오직 사람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나의 지배력을 원할 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소유물이기를, 다시 말해서 그들이 나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한다.

 

네가 존재할 '힘'을 지녔다는 것은 곧 네가 존재할 '권리'를 지녔다는 것이다. 오직 나로부터 모든 권리와 정의가 파생된다. 내가 힘을 갖자마자 곧바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내가 할수만 있다면, 나는 제우스, 야훼, 신 등을 쓰러뜨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내가 이들을 쓰러뜨릴 수 없다면, 이 신들은 그들의 권리와 힘에 의존해서 내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신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무력함을 내리누를 것이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이렇게 '자아'를 유일자이자 절대자로 세우는 극단적 유아론으로 끝나는데, 니체는 슈티르너의 생각을 자기 식으로 소화해, 개인들 속에서 위대한 자, 인류의 최고의 전형을 창출하는 일이야말로 역사의 목표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세계 과정이나 인류-역사의 모든 구조를 현명하게도 포기하는 시대가 앞으로 올 것이며, 우리가 더는 대중을 관찰하지 않고 다시 개인들, 즉 생성의 거친 강물 위에서 일종의 다리가 되는 개인들을 관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 개인들은 하나의 과정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동의 영향을 허용하는 역사 덕분에 무시간적,동시적으로 산다. 그들은 쇼펜하우어가 일찍이 말한 바 있는 천재 공화국을 이루고 산다. 거인이 시간의 틈을 통해 다른 거인을 부르고, 그들의 발밑에서 기어 다니는 소란스럽고 방자한 난쟁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고차원적인 정신의 대화를 지속한다. 역사의 과제는 그들 사이에 중계자가 되어 언제나 위대한 자를 산출 할 수 있는 동기와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아니 인류의 목표는 그 종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최고의 전형 속에 있다. <반시대적 고찰>

 

니체에게 포착된 숖ㄴ하우어라는 인간은 '천재'의 전형이다. 천재는 어떤 존재인가. 현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하는 사람, 이 세계의 척도를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 니체는 이 천재의 상 반대편에 대중의 상을 맞세운다. 천재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대중이다. 

 

대중에게 속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나태함을 없애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너 자신이 되어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것, 생각하는 것, 원하는 것은 모두 너 자신이 아니다!" 라고 외치는 자신의 양심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반시대적 고찰>

 

니체의 명령의 본질적 특징은 '자기 자신'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바깥에, 자기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시 묻고 답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가? .... 젊은 영혼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면서 삶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너는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무엇이 너의 영혼을 높이 끌어올렸는가? 그리고 그것들을 .... 네 앞에 세워놓아라. 그러면 그것들은 너에게 .... 너의 진정한 자아의 근본 법칙을 보여줄 것이다. 이 대상들을 서로 비교해보라. 하나가 다른 것을 어떻게 보완하고 확장하고 능가하고 미화하느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 대상들이 네가 이제까지 너 자신에게로 기어 올라갔던 사다리가 되었는지를 보라. 왜냐하면 너의 진정한 본질은 네 안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위로 측량할 수 없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반시대적 고찰> 

 

"측량할 수 없이 높은 곳" 이라는 구절에서 사람이 자기를 극복해 자기가 된다는 이 자기 극복과 자기 회귀의 고양과 순환을 니체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끊없이 반복해서 이야기하게 된다. 

 

"자신을 발견하는 ...... 다른 수단들도 있겠지만, ....... 자신의 교육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수단을 나는 알지 못한다." <반시대적 고찰>

 

자아의 목표는 이 자아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목표는 무엇일까.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니체는 인류의 자아 이상에 해당하는 '천재'를 낳는 것이 인류의 목표라고 답한다.

 

우리를 끌어올리는 자,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진실한 인간들, 더는 동물이 아닌 인간들, 철학자들, 예술가들, 성자들이다. 자연은 결코 비약을 하지 않지만, 그들을 창조할 때 .... 단 한 번 비약을 한다. <반시대적 고찰>

 

어떤 일을 파악하는 것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때로는 더 어렵다. 다음 명제를 생각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도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노력해 위대한 인간을 낳아야 한다. 어떤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이것이 그의 임무다." <반시대적 고찰>

 

다윈의 사상이 승리했다는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력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이라는 이제까지 인류 삶의 근거, 가치의 토대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다윈의 세계관이 도입됨과 동시에 일뉴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게 된다. 의미가 증발해버린 자연의 과정만이 인간의 삶에 남게 되는 것이다. 니체는 다윈이 무너뜨린 그 의미, 인류의 존재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려고 시도한다.

 

니체는 천재의 탄생을 방해하는 범용한 것들의 사상, 이념, 체제인 근대적 질서를 모두 단칼에 부정하게 된다. 민주주의, 평등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모두 천재의 탄생을 가로막는 천민적 가치, 천민의 체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천재의 탄생은 이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주는가. 니체는 '그렇다'라고 답한다. "삶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난 뒤 "삶의 최고의 열매인 천재가 삶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 다시 묻는다. 그리하여 그는 이 천재를 불러내 "이 멋진 창조적 인간은 다음 물음에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는 마음속 깊이 이 현존재를 긍정하는가? 그것으로 충분한가? 너는 현존재의 대변자, 현존재의 구원자가 되려고 하는가? 단 한마디의 진실한 '그렇다'가 네 입에서 나온다면, 그러면 그토록 무겁게 고발당할 삶도 해방될 것이다. <반시대적 고찰>

 

니체에게 바그너는 현실에 존재하는 '자아 이상'이었으므로, 그 이상과 같은 존재를 그려내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적 욕망을 그려내는 일이기도 했다. 

니체는 마지막 문장에서 바그너를 "미래의 예언자"가 아니라 "과거를 해석하고 변용하는 자"라고 진단한다. 그 진단은 니체가 바그너에게 기대했던바 '미래의 예술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는 실망의 표현이다.

 

아마 저 종족은 전체로서는 오늘날의 인간보다 악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악에서나 선에서나 우리보다는 개방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 또 다음과 같은 명제는 우리 귀에 어떻게 울리는가. 정열은 스토아주의(금욕주의)나 위선보다 낫다. 인습의 윤리로 인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악하게도 될 수 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자연의 수치이며 천상의 위로도 지상의 위로도 얻지 못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에 의해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자유는 기적의 선물로 안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런 명제들 말이다. 이런 명제들이 아무리 날카롭게 아무리 기분 나쁘게 울린다 할지라도, 그 울림은 ... 저 미래의 세계로부터 오는 울림이다. <반시대적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