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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극장 06 아침놀

06 아침놀

"병은 나의 모든 습관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권리를 나에게 주었다."

 

병이 몸에 타격을 가해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해서 니체는 결단을 했다. 병이 니체를 삶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용기를 내게 해주었던 것이다.

니체는 질병이 삶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닫고 고마움을 느꼈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앎의 의지가 얻어낸 인식이라는 결실의 기쁨에 떨면서 니체는 더 많은 삶을 갈구했다.

 

나는 마치 수백 년 세월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면서 살아가고, 날짜도 신문도 생각하지 않고 나의 사상만을 뒤쫓고 있네.

 

어머니 프란치스카에게 아들 니체는 실패한 교수이며, 병들어서 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양말과 소시지를 계속 보내주어야 하는 그런 아들이었다. 이런 상황을 깨닫고 니체는 다시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아주 진지하게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 인간이 쓴 것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가장 고심하고, 가장 깊이 있는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이 책(아침놀)으로 도덕에 대한 나의 전투가 시작된다." <이 사람을 보라>

 

이 책에서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뚫고 들어가고, 파내고,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 없이 전진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당시에 나는 아무도 할 수 없고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했다. 나는 깊은 곳으로 내려갔고 바닥에 구멍을 뚫었으며 우리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신봉해온 낡은 신념을 조사하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은 이 신념이 가장 확실한 지반인 것처럼 그 위에 (철학을) 세우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위에 세워진) 모든 건축물은 거듭 붕괴되었다. 나는 도덕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아침놀>

 

철학자들이 세운 건축물들이 모두 붕괴한 것은 그 건축물들이 도덕이라는 토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따라서 무너지지 않을 철학적 건축물을 세우려면 애초에 부실한 토대를 무너뜨려 버리고, 다시 말해 도덕 자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토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니체는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이 모두 이런 잘못된 도덕적 토대 위에 서 있었으며, 서양 전통 철학을 철저하게 비판한다는 칸트의 비판철학조차 도덕에 관한 한 조금도 철저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칸트도 자신의 사유의 건축물을 낡은 도덕의 토대 위에 세웠다는 것이다.

 

왜 플라톤 이후 유럽의 모든 철학적 건축가들의 작업이 헛수고에 불과했는가? ... 이에 대한 올바른 답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모든 철학자들이 도덕에 유혹되어 (그들의 철학적) 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겉으로는 확실성과 '진리'를 추구했지만 실제로는 '존엄한 도덕적 건축물'을 지향했다. 칸트는 "저 존엄한 도덕적 건축물을 위한 지반을 정비하고 튼튼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그렇게 빛나지는 않지만 공적이 없는 것은 아닌" 가제와 일이라고 보았다. 아아,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광신적인 의도를 지녔던 칸트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광신의 시대라고 부를 만한 시대의 진정한 아들이었다. ...

 

칸트 역시 도덕의 독거미인 루소에게 물렸다. 칸트 영혼의 밑바닥에는 도덕적 광신이 숨어 있었다. ... 칸트는 자신의 '도덕적 왕국'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증명할 수 없는 세계, 즉 논리적인 '피안'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순수 이성 비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달리 말해, 칸트에게는 '도덕의 왕국'을 이성이 공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아니 오히려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순수 이성 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물들의 도덕적 질서가 이성게게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가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놀>

 

니체는 <아침놀>의 본문에서 도덕이라는 것이 그 뿌리에서부터 살펴보면 전혀 도덕적이지 않음을 증명해나간다.

니체는 도덕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일이야말로 도덕을 지키는 일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 책은 도덕에 대한 신뢰를 철회한다. 왜냐고? 도덕에 충실하기 위해." <아침놀>

 

내가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비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피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며 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행해야 하며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전자도 후자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근거들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게 배워야만 한다. 아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더 많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즉 다르게 느끼기 위해. <아침놀>

 

이렇게 별도의 아포리즘으로 자신이 도덕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것은 이 책에서 니체가 그만큰 위험한 높이에서 가혹하게 도덕 비판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여기서 도덕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도덕의 잘못된 근거를 비판한다고 말하지만, 니체의 글이 때때로 도덕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에까지 이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도덕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곳에 니체의 본질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니체는 도덕 비판을 끝까지 밀고 감으로써 "모든 가치들의 재평가"라는 자신의 필생의 주제로 뛰어들었고, 또 모든 도덕 가치들의 구속에서 벗어나 "이제까지 금지되고 경멸받았으며 저주받았던것"을 긍정하게 된다. 

 

모든 도덕의 기원이 다음과 같은 혐오스럽고 비소한 추론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해로운 것은 악한 것(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선한 것(그 자체로 기분을 좋게 하고 유익한 것)이다. 나에게 한 번 또는 몇 번 해를 입히는 것은 그 자체로 적대적인 것이다. 나에게 한 번 또는 몇 번 이익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우호적인 것이다." 아 수치스ㅓ운 기원이여! <아침놀>

 

니체는 자신이 '비윤리적' 존재임을 사뭇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비윤리적인 존재란 부도덕한 존재라기보다는 기존의 관습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모든 점에서 관습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고자 하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다. 인류의 모든 근원적인 상태에서 '악하다'는 것은 '개인주의적이다', '자유롭다', '자의적이다', '길들여지지 않았다' ...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관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명령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이 명령한다는 이유로 우리가 복종해야 하는 좀 더 높은 권위다. ... 처음에는 모든 것이 관습이었다. 그래서 관습을 뛰어넘고자 하는 사람은 입법자, 주술사, 반신이 되어야 했다. 즉 그는 관습을 만들어야 했다. <아침놀>

 

 

오늘날 기존의 풍습과 법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이 조직을 이루어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으려 하는 최초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지금까지 그 사람들은 범죄자, 자유사상가, 비도덕적인 인간, 악한으로 비난받은 채 추방당하고 양심의 가책의 지배 속에서 ... 살아왔다. (이런 시도가) 비록 다가올 세기를 위험하게 만들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저마다 총기를 들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전체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정당하고 좋은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인습적인 도덕에) 반하는 사람들은 흔히 독창적이고 생산적인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더는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행동과 사상과 관련해 도덕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는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삶과 사회에 대해 무수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거대한 짐은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 한다. 정직하고 진리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가장 보편적인 목표들을 인정하고 추구해야 한다! <아침놀>

 

 

"동정은 나약함이다"

니체는 왜 우리가 타인의 불행과 고통에 동정심을 느끼게 되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동정심에 빠져서는 안 되는지 인간 심리를 분석해 설명한다. 동정심 때문에 빠져서는 안 되는지 인간 심리를 분석해 설명한다. 동정심 때문에 언제나 고통을 받았던 니체는 여기서 자기 자신의 본성을 거역해 심리의 근본에까지 파고들어 동정심을 부정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악의와 적의마저 느끼는데도 그가 피를 토할 경우 왜 우리는 고통과 불안을 느끼는 것일까? "동정 때문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오직 다른 사람만을 생각한다"라고 사려 없는 사람들은 말한다. 진실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의 불행은 우리에게 모욕감을 준다. 우리가 그를 이러한 불행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없다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아마도 자신의 무력함과 비겁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타인의 불행은 이미 그 자체로 타인에 대한, 혹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명예를 감소시키는 동기가 된다. 또는 타인의 불행과 고통은 우리도 겪을 수 있는 위험을 가리킨다. 그리고 인간의 위험한 처지와 연역함을 가리키는 징표만으로도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동정적인 행위를 통해 이런 종류의 고통과 모욕을 거부하고 그것들에 복수한다. 동정적인 행위 속에는 심지어 세련된 자기방어 혹은 복수심마저 존재할 수 있다. <아침놀>

 

(다른 사람과 함께 괴로움을 겪는다는 의미의) 동정은 그것이 정말로 고통을 낳는 한 - 그리고 이것이 여기서 우리의 유일한 관점인데 - , 유해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나약함이다. 동정은 이 세상의 고통을 증대시킨다. 동정의 결과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고통이 경감되고 제거된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무의미하고 우연한 이러한 결과들을 이용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질적으로 유해한 동정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비록 하루를 동정이 지배하더라도 인류는 그 때문에 곧 멸망하게 될 것이다. 동정 그 자체에는 다른 어떤 충동과 마찬가지로 좋은 성질이 없다. .... 시험 삼아 한번 실제의 생활 속에서 동정심을 일으키는 계기들을 한동안 의도적으로 뒤쫓아보고 자신의 환경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모든 비참을 항상 마음에 그려보는 사람은 반드시 병들고 우울해질 것이다. <아침놀>

 

 

쇼펜하우어의 '동정'은 나의 삶에서 지금까지 커다른 어려움을 야기했습니다. ... 이것은 위대한 그리스인이라면 모두 비웃을 허약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실천적 위험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의 이상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상에 따라 자신의 주변 인물에게 자기와 같이 가도록 강요하거나 그들을 제압해야 합니다. 즉 창조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동정을 억제하고 우리의 이상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은 내가 너무 당연한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내가 이런 '지혜'에 이르기까지는 나는 내 생애 거의 전부를 희생해야 했습니다. 

 

힘의 철학자 니체의 등장

이 고백대로 니체는 동정에 대해 냉정한 판단력을 얻으려고 <아침놀>을 쓰던 시기에도 집요하게 사유했고, 그 결과로 이 편지에서처럼 동정을 죽여 '힘'을 획득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힘의 철학자 니체, 권력의지의 철학자 니체가 이 책에서 비로소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니체의 힘에 관한 실험적 성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이 '힘과 진리'의 관계다. 니체는 진리도 힘이 있을 때만 진리 노릇을 한다고 생각한다.

 

진리 그 자체는 힘이 아니다. (진리에) 아첨하는 계몽주의자가 아무리 반대로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있을지라도! 진리는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항상 다시 몰락하게 될 것이다!  <아침놀>

 

니체는 지식인들의 일반적 믿음을 뒤집어놓는다. 진리는 강력하고 무적이고 불패라는 것이 지식인들의 믿음이다. 진리만 손에 쥐면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 자신이 고통과 고립과 낙담으로 삶의 최저점에 놓여 있던 순간에 느낀 것은 진리의 무력함이었다.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를 획득하고 진리를 주장해봐야 그에게 현실적인 힘이 없다면 진리는 무기력한 하나의 의견으로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만큼 중요한 것이 힘, 권력이다. 아니 어쩌면 힘이 진리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힘이 있으면 진리도 만들어낼 수 있다. 니체는 나중에 힘을 향한 의지, 곧 권력의지야말로 존재의 비밀, 존재의 진리라고 믿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많은 악한 일을 한 것으로 기억되는 힘이 단지 선하기만 한 것으로 평가되는 무력함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즉 그들에게서 힘의 감정(느낌)은 그 어떤 유용성이나 좋은 평판보다 더 높이 평가되었다.<아침놀>

 

니체는 행복과 힘의 관계에 대해서도 숙고한다. 힘의 느낌, 나에게 힘이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행복이 가져오는 첫 번째 효과라고 그는 단언한다. 

 

행복이 가져오는 첫 번째 효과는 힘의 감정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인간에 대해서든 표상에 대해서든 상상의 존재에 대해서든 이러한 힘의 감정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선물을 주는 것, 조롱하는 것, 파괴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의 공통된 근본 충동에 근거한다. <아침놀>

 

니체는 이렇게 힘, 힘의 느낌, 권력 감정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인간이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요도 욕망도 아니고 힘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인류의 수호신(데몬, 악령)이다. 인간에게 모든 것, 즉 건강, 음식, 주택, 오락을 줘보라. 그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불만스러울 것이다. 마력적인 존재가 기다리면서 채워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한테서 모든 것을 빼앗고 이 마력적인 존재를 만족시켜보라. 그러면 그들은 대부분 행복하게 된다. <아침놀>

 

홉스는 <리바이던>에서 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 발견되는 일반적 성향으로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힘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제일 먼저 들고자 한다. 이것은 인간이 이미 획득한 것보다 더 강렬한 환희를 구하기 때문에 그런것도 아니요, 보통 수준의 힘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잘살기 위한 더 많은 힘과 수단을 획득하지 않으면, 현재 소유하고 있는 힘이나 수단조차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배인 니체가 선배인 홉스의 힘 사상에서 강력한 영감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니체는 힘 사상을 발전시켜 결국 권력의지라는 개념에 이르게 되는데, 이 권력의지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홉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결코 충족되지 않고 해소되지 않는 모든 인간의 영원한 충동이다. 이와 달리 홉스는 힘을 다투는 권력 충동의 세계가 무서워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을 얼른 불러들인 뒤 모든 힘들을 봉쇄해버린다.

 

니체는 힘과 돈의 관계도 살피는데, 자본주의 세계에서 힘에 대한 추구는 돈에 대한 추구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신분이 없다! 우리는 '개인'이다. 그러나 돈은 힘이고 명성이며 존엄이고 우위이며 영향력이다. 현재 돈은 한 인간이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크고 작은 도덕적인 편견을 만들어낸다! <아침놀>

 

오늘날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이 과도한 초조함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 어떤 사람은 불공정한 저울을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고액의 보험을 든 후에 자신의 집에 불을 놓고, 어떤 사람은 위조 화폐 제조에 참여한다. ...

 

이는 그들이 실제로 궁핍하기 때문이 아니다. ..... 돈이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초조감과 축적된 돈에 대한 끔찍한 욕망과 애정이 밤이든 낮이든 그들을 몰아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조감과 애정 속에서 힘에 대한 저 열광적인 욕망이 다시 나타난다. 힘에 대한 이러한 열광적인 욕망은 옛날에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신념에 의해 불붙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떳떳한 양심으로 비인간적인 일(유대인들과 이단자들과 양서 따위를 불태우고 페루와 멕시코 같은 고등 문화 전체를 근절하는 것)을 감행할 수 있었다. 힘에 대한 욕망이 고용하는 수단은 변화했지만, 동일한 화산이 여전히 불타오른다. ... 이전 사람들이 '신을 위해' 행한 일을, 지금 사람들은 돈을 위해, 오늘날 힘의 느낌과 떳떳한 양심을 제공하기 위해 행한다. <아침놀>

 

힘의 느낌은 언제 가장 뚜렷하고 강력하게 느껴지겠는가.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일 것이다.

 

영혼의 야전 진료소. 가장 강력한 치료제는 무엇일까? 승리다. <아침놀>

 

그렇다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경우 힘의 느낌은 어덯게 되는가? 니체는 이 경우에 힘의 느낌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책임 묻기'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사람들은 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찾아 내려 한다.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킨 사람을 찬양한다. 실패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책임이 추궁된다. 왜냐하면 실패에는 의기소침이 수반되고 이러한 의기소침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적용되는 유일한 치료법은 힘의 감정을 새로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극은 '책임자'에 대한 단죄에서 발견된다. <아침놀>

 

전쟁은 정치 행위의 한 변형이다. 다시 말해 전쟁은 정치의 일부이다. 간단히 말해 정치가 추구하는 것은 힘이다.

 

아무리 많은 이익과 허영심이 .... 위대한 정치에 개입되어 있을지라도, 정치를 전진시키는 가장 강력한 물결은 힘의 느낌에 대한 욕구다. .... 인간은 힘의 느낌을 느낄 때 자신은 선하다고 느끼고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가 자신의 힘을 방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타인들은 그를 악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아침놀>

 

도덕 원리가 아니라 권력 원리

여기서 니체가 명백하게 삶의 원리로서 도덕 원리 대신 권력 원리를 도입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도덕이 어떤 고상한 주장을 떠들든 삶을 지탱하고 전진시키는 근본 원리는 힘, 힘의 느낌, 힘의 느낌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을 니체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상해지고, 고귀해지고, 우월해지려는 인간의 의지도 역시 힘의 원리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일까. 니체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월함의 추구는 끊임없이 이웃을 주목하면서 이웃이 어떤 기분인지 알려고 한다. 그러나 이 충동(우월함을 추구하는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타인의 기분에 대한) 공감과 인식은 ... 선량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오히려 우리는 이웃이 우리 때문에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 감지하거나 추측하려 한다. 우월을 추구하는 사람은  ... 자신을 타인의 영혼에 각인하고 그 영혼을 바꾸고 자신이 의지에 따라 그것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의) 성공을 즐기는 것이다. 우월의 추구는 이웃을 압도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이 극히 간접적이거나 그저 느낀 것, 또한 몽상한 것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아침놀>

 

우월성 추구가 이웃을 압도하려는 것이라면, 철학을 연구하고 철학자로 사는 것, 다시 말해 니체 자신이 추구한 삶의 방식은 어떨까.

 

"해결되어야 할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다." 이렇게 인생의 목표가 철학자의 눈앞에 출현했다. 처음으로 수수께끼가 발견되었고 세계의 문제가 가장 단순한 수수께끼의 형태로 응집되어야 했다. 세계의 수수께끼의 해결자라는 무한한 명예욕과 기쁨이 사상가의 꿈이 되었다. ... 이와 같이 철학은 정신을 전체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일종의 기고만장한 투쟁이다. <아침놀>

 

저 깊은 존재의 밑바닥에서 힘을 향한 욕구를 찾아낸 니체는 그 자신이 그렇게 분투하는 이유조차 힘의 추구라는 사실을 실토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힘, 힘의 느낌, 힘의 느낌의 추구ㅏ면 이 삶의 비밀을 풀 열쇠는 힘이라고 보아도 잘못된 것이 아닐 것이다.

 

'초인'의 출현

옛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적인 '기원'을 지녔다고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고자 했다. 이것은 현재는 금지된 길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길의 입구에는 소름끼치는 다른 동물과 나란히 원숭이가 서 있고 "이 방향으로는 더 갈 수 없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제 반대 방향에서 인간의 위애함을 느끼려 한다. 인류가 향하는 그 길은 인류의 위대함과 신과의 친족 관계를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 이 길도 헛되다! 이 길의 끝에는 최후의 인간이자 무덤 파는 사람의 납골 항아리가 있다. ... 인류가 아무리 많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인류에게 더욱 고차원적인 질서로 이르는 통로는 없다. 이는 개미나 집게벌레가 '생의 역정'의 최후에 신과의 친족 관계나 영원으로 격상되지 않는 것과 같다. <아침놀>

 

다윈주의로 과거에 신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원숭이가 이빨을 드러내고 서 있다. 기원을 따져봐야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미래에 출구가 있는가. 인류의 현재가 그대로 연장될 뿐이라면 미래에 인류의 종말 이외에 더 있을 것이 없다. 미래도 막혔다. 이렇게 앞으로도 뒤로도 막혔다면, 다른 출구는 없는가. 여기서 니체는 대안을 직접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목표가 '위대함' 특히 '신과의 친족 관계를 확보하는 일'임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인류의 목표인데 앞뒤로 꽉 막혀 있다면 위로 솟구치는 수밖에 없다. 위로 올라가 인간의 현존을 초월하는 것, 다시 말해 초인이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곤경에 처했을 때 깊은 번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자살하는 일은 유럽에 사는 모든 사람 중에서 유대인들에게서 가장 드물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의 역사 속에서, 가공할 상황에 처해서도 가장 냉정한 사려와 끈기를 보인 실례들과, 불행과 우연을 가장 세련되게 이용할 수 있었던 영리함의 보고를 발견할 수 있다. .. 그들은 단 한순간도 자신들이 최고의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아침놀>

 

독일인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독일인이 실제로 위대한 일을 할지는 의문스럽다. 독일인은 복종을 통해서만 (어떤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런 종류의 민족이 도덕에 관심을 가질 경우 어떤 도덕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분명히 이 민족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강력한 복종 성향이 이상화되어 나타나기를 바랄 것이다.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져야한다.' 이것이 독일적 감각이고 독일적 일관성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상태에 처할 경우 독일인은 항상 도덕을 넘어서는 곳으로 자신을 고양한다는 사실을! 지금 독일인은 무엇인가 새로운 어떤 일을 해야 한다. 즉 독일인은 그들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해야 한다! 독일적인 도덕은 명령하는 법을 그들에게 가르친 적이 없다! 독일적인 도덕에서는 멸여한다는 것이 잊혀졌다. <아침놀>

 

세계의 파괴자.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잘 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격분해 소리친다. "모두 멸망해버려라!" 이 혐오스러운 감정은 최대의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인바, 이렇게 추론한다.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없다. 따라서 전 세계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 된다! 전 세계는 무여야 한다!" <아침놀>

 

<아침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포리즘은 인식의 바다 저편을 향해 한없이 나아가고자 하는 탐험 욕구와 그 바다 먼 곳에서 좌초하고 표류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함께 품고 있다.

 

멀리, 가장 먼 곳까지 날아가는 이 모든 대담한 새들, 분명히 그 새들은 더 날아갈 수 없게 되어 돛이나 황량한 절벽에 내려앉을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서 .... 그들이 날 수 있는 최대한 다 날았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위대한 스승과 선구자들은 결국 멈춰 섰다. ... 그러나 그것이 나와 그대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다른 새들은 더 멀리 날 것이다! .... 이 새들은 우리가 추구했던 곳, 온통 바다, 바다, 바다뿐인 곳을 향해 날고 있다! 바다를 넘어서 날아가려 하는가? 어떠한 욕망보다도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이 강력한 욕망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그것도 하필이면 왜 바로 이 방향으로, 즉 이제까지 인류의 모든 태양이 침몰했던 곳을 향해서? 아마도 언젠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마저 서쪽으로 향하면서 인도에 도달하고자 했다고, 그러나 무한에 좌초한 채 난파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었다고. 그렇지 않은가? 나의 형제들이여? 그렇지 않은가!  <아침놀>

 

니체가 이 아포리즘으로 <아침놀>을 끝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아침놀>은 긴 밤과 어둠을 뚫고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의 희망을 가리킨다.

 

니체는 대담한 인식의 항해자였다. 그의 항해 욕구는 그 어떤 장애도, 폭풍도, 해일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니체는 그 항해 끝에 자신의 정신이 좌초하고 난파해 침몰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니체가 정신의 배를 띄운 앎의 항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카리브디스의 소용돌이와 스킬라의 암초 사이로 난 오디세우스의 뱃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