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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극장 PART3 차라투스트라의 탄생

 

 

"인간은 위대하고 높은 것으로 생장하듯이,

깊고 무시무시한 것으로도 생장한다." <권력의지>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참고 결딜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09 초인의 도래

"너희들은 나의 초인을 악마라 부르리라."

 

"일체의 글 가운데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넔임을 알게 될 것이다."

 

"훌륭한 명분은 전쟁까지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고

너희들은 말하려는가? 그러나 나는 말한다. 훌륭한 전쟁은

모든 명분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니체는 자신의 피를 짜내 그것을 잉크로 삼아 글을 썼다. 다시 말해, 혼을 바쳐 작품을 썼다. "일체의 글 가운데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넑임을 알게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루 살로메나 파울 레를 저 아래 세속 한가운데 두고, 자신은 산정 높은 곳에 올라 아래 세상을 냉소하듯 내려다봄으로써 도피와 초월을 동시에 실현하려는 마음이 영원회귀라는 기이한 사상을 만나 한층 더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혼자인 자가 끝없이 걸으면서 자기 자신과 이야기한 것을 옮겨놓은 것이 니체의 글이다.

"늘 그렇지만 나는 또 다른 나와의 대화에 너무나도 열성적이다."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영원회귀 사상을 선포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한 책이지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은 '초인 사상'과 '신의 죽음'이다. 영원회귀를 이해하려면, 먼저 '신의 죽음'이라는 절박한 사태를 이해해야 하며, 초인 사상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영원회귀'의 사상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지난날에는 신에 대한 불경이 가장 큰 불경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 그와 더불어 신에게 불경을 저지른 자들도 모두 죽어갔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초인이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신이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일찍이 차라투스트라도 이 세계 저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 하나같이 그러하듯이 인간 저편의 세계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이 세계는 고뇌와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신의 작품으로 보였다. 그때만 해도 이 세계는 한낱 꿈으로, 어떤 신이 꾸며낸 허구로 보였다. 불만에 찬 신의 눈앞에 피어오르는 오색 연기로 보였던 것이다. 

 

아, 형제들이여, 내가 지어낸 이 신은 다른 신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사람이 만들어낸 사람의 작품에 불과했으며 망상에 불과했다. 신이라고 했지만 사람, 그것도 사람과 자아의 빈약한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이 유령이 나 자신의 타고 남은 재와 불길로부터 내게 온 것이지, 진정! 저편의 또 다른 세계에서 유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인간이 신의 작품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작품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선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신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일까.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꾸며낸 것은 고통과 무능력, 그리고 더없이 극심하게 고통스러워하는 자만이 경험하는 그 덧없는 행복의 망상이었다. 단 한 번의 도약, 죽음의 도약으로 끝을 내려는 피로감, 그 어떤 것도 더는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그와 같은 피로감이 온갖 신을 만들어내고 저편의 또 다른 세계라는 것을 꾸며낸 것이다. ... 병들어 신음하는 자와 죽어가는 자들이야말로 신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나라와 구원의 핏방울을 생각해낸 자들이다.

 

 

이 세상 삶의 괴로움과 덧없음이 행복한 저 세상에 대한 망상을 낳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 순간, 신은 거주할 곳을 잃고 죽음에 이른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 대지뿐이다. 니체는 신이 없다면 그 신의 자리를 누군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라고 선언한 뒤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 이 행위의 위대성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즐거운 학문>

 

벗들이여 너희들에게 나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으리라.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참고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

 

이 자만에 가까운 발상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초인이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넘어 신과 같은 존재가 된 인간, 그것이 니체가 생각하는 초인이다.

 

니체에게 신의 죽음은 잃어버린 신의 자리를 인간이 되찾지 않으면 안 되는 무거운 과제 상황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신의 죽음과 함께, 신이 보장해 온, 인간 삶의 근거에 해당하는 모든 가치들이 시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니체가 '연민'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신을 죽인 것이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고 단언한다. 연민 때문에 신이 질식해 죽고 말았다. 

 

질 들뢰즈는 연민이라는 것이 왜 문제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에 근접하는 삶의 상태에 대한 관용이다. 연민은 삶에 대한 사랑이지만,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전투적인 그것은 가난한 자들, 고통 받는 자들, 무능한 자들, 하찮은 자들의 승리를 예고한다. 

 

한없이 무력하고 연약한 삶에 대한 눈물 어린 사랑 때문에 신이 죽었다고 니체는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이 죽었다면 그것은 우선은 연민 때문이라기보다는 근대 계몽 이성이 신의 자리를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자연법칙과 합리적 사유를 갖다 놓았기 때문이다. 옛 시대처럼 편안하게 아버지의 품에 안기듯이 신에게 안길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합리적 이성의 승리보다 신의 속성 변화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사 신이 눈물 많은 연약한 신이 되었다는 데 절망하는 것이다. <구약 성서>의 그 거칠고 야성적인 신은 <신약 성서>에서 가엾은 것들을 하염없이 동정하는 신이 되고 말았고, 바로 그 결과로 신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연민의 정이 깊다는 자들의 어리석은 짓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온 것이 있었던가? .. 언젠가 악마가 내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신 또한 자신의 지옥을 갖고 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그의 지옥이다." ... 그러니 연민의 정이라는 것을 경계하라. '그곳으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니! 나는 천기를 안다! 위대한 사랑은 하나같이 연민의 정 이상의 것이다. .. 창조하는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혹하다. <차라..>

 

니체는 연민보다 가혹함이 훨씬 더 신의 속성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신을 대신해야 하는 초인도 틀림없이 연민을 뛰어넘어 가혹함을 자기 심장에 채우고 있는 자일 것이다.

 

나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 사람에게 원숭이는 무엇인가? 웃음거리 아니면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초인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웃음거리 아니면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일 뿐이다. 너희들은 벌레에서 사람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벌레다. 너희들은 한때 원숭이였다. 그리고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보다도 더 철처한 원숭이다. <차라투...>

 

인간은 마땅히 자신을 극복해 이 인간 너머의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가르침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초인인가? 왜 인간 너머의 인간을 지향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남은 것이 '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라, 나는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초인이 이 대지의 뜻이다. 너희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초인이 이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맹세코 '이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은 스스로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타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는 자들이다. <차라투스...>

 

신이 사라졌으므로, 신이 거주하던 천국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 땅, 이 대지, 차안뿐이다. 더는 인간이 돌아갈 천국이 없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결판을 내야 한다. 인간으로 살다가 멸망하고 마느냐, 아니면 인간을 극복해 초인이 되느냐, 그런 양자택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상황이 그러하므로 사라져버린 하늘나라에 대한 헛된 희망을 말하는 자들은 우리 삶에 독을 타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자들이다. 

 

형제들이여, 너희들이 지니고 있는 덕의 힘을 기울여 이 대지에 충실하라. 너희들은 베푸는 사랑과 너희들이 터득한 앎으로 하여금 이 대지의 뜻에 이바지하도록 하라! ..... 그리고 모든 사물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서 너희들은 전사가 되어야 한다!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

 

그렇다면 왜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이, 인간이란 존재가 한없이 경멸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를 주던 신이 죽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끝에 남겨지는 것은 무의 감정, 곧 허무주의뿐이다. 문제는 인간이라는 족속이 그 경멸의 감정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먼저 인간의 삶이, 그 목적 없는 삶이 경멸스럽다는 것,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체험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저 위대한 경멸의 시간이다." 

 

먼저 경멸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이다. 삶의 끝에 허무의 벼랑이 버티고 있다는 것, 삶의 목적지에 허무의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삶의 그 진상을 알지 못한 채로 좁은 시야에 갇혀 쳇바퀴 돌 듯 하찮은 목표를 두고 맴도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멸스러운 것임을 아는 순간, 인간은 다른 길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의 허망한 삶이 경멸스러운 것임을 깨닫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너희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이, 그와 마찬가지로 너희들의 이성과 덕이 역겹게 느껴지는 바로 그런 때"이며,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되는 때이다.

 

나의 행복, 그것이 다 뭐란 말이냐! ... 나의 이성, 그것이 다 뭐란 말이냐! 마치 사자가 먹이를 찾듯 그것은 지식을 갈구하고 있지 않은가? ... 나의 덕, 그것이 다 뭐란 말이냐! 덕은 아직까지 나를 열광시키지 못했다. 나는 나의 선과 악 사이에서 얼마나 지쳐 있는가! 이 모든 것이 궁핍함이요 추함이며 가엾기 짝이 없는 자기만족에 불과하지 않은가! ...  나의 정의 그것이 다 뭐란 말이냐! ... 나의 연민, 그것이다 뭐란 말이냐! 연민이란 사람을 사랑했던 그가 못 박혀 죽은 바로 그 십자가가 아닌가? 그러나 나의 연민, 그것은 결코 십자가형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 내가 자랑스럽게 사용하는 이성, 나의 덕, 나의 정의, 이런 인간적인 가치들이 하찮기 이를 데 없는 자기만족의 대상일 뿐, 어떤 영속성도 위대성도 초월성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다시 말해 우리가 벌레처럼 살다가 사라질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 자체에 절망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 곧 초인을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인류가 아니라 초인이 목표다. <권력의지>

 

초인이라는 말은 최고의 완성된 인간 유형을 지칭하는 말이며, 현대인, 선량한 사람, 기독교인, 여타의 허무주의자들과 반대되는 말이다. <이 사람을 보라>

 

니체는 우리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내부에서 찾지 않고 우리 위에서 찾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너의 진정한 본질은 네 안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너보다 훨씬 높이, 적어도 네가 보통 너의 자아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있다." <반시대적 고찰>

 

민족도 국가도 인류도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정점에, 위대한 개인 안에, 성인 안에, 예술가 안에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 위대한 천재들은 그들의 머리를 쳐드는 것입니다. 천재는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 집니다. 반면에 그는 어쨌든 인류의 정점이며 궁극의 목적입니다. 천재에 대한 준비와 발생보다 더 높은 문화의 경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가 또한 이런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유고>

 

체사레 보르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하나의 모델로 다룬 냉혹한 인간의 전형이다. 니체는 여기서 초인이 고귀한 성자보다는 차라리 잔인한 전사로 이해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초인의 본질이 이제까지의 인간을 '초월한다'는 데 존재한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인을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개"라고 묘사한다.

 

너희들은 신을 창조할 수 있는가? 가능한 일이 아니니 일체의 신들에 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초인은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 형제들이여, 너희들 자신은 초인을 창조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 자신으로 하여금 초인의 선조가 되고 조상이 될 수 있도록 할 수 는 있을 것이다. <차라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긍지에 찬 인간 상과 비슷하다.

 

긍지에 찬 인간은 자신이 고귀하고 탁월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사실 그렇게 고귀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다. ... 긍지에 찬 사람은 자신이 가장 고귀한 것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기에 그에게는 외적인 선들 중에서 오직 하나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바로 명예다. 

긍지에 차 있는 인간은 이렇게 명예에 관심이 있지만 부와 권력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도 자신의 고귀한 품격에 적합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성공했다고 해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실패했다고 해도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사실 명예조차도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서 권력이나 부를 추구하지만, 이 명예조차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모든 것들은 어떠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교만하게 보인다.

긍지에 찬 인간은 자신의 고귀함에 상응하는 몇 가지 일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에 뛰어든다거나 위험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위대한 것을 위해서라면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긍지에 찬 인간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겸손한 태도를 취한다.  ... 그는 자신의 증오와 사랑을 공공연히 표명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솔직함을 희생하는 비겁한 짓이기 때문이다. ... 긍지에 찬 인간의 발걸음은 조용하고 음성은 깊이가 있으며 말하는 것도 침착하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항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성급하지 않으며 또 어떠한 것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흥분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매우 품위 있고 고귀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정신이 드높은 인간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니체가 암시하는 초인과 비교하면 관조적,자족적,인간적 성격이 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니체의 초인은 긍지에 찬 인간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강력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괴테의 나폴레옹에 대한 관점

첫눈에 그는 위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그는 언제나 굳건하게 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결단을 내렸네. 그는 항상 환경에 적응하면서 어느 순간,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대처할 수 있었어.

 

항상 명석한 상태로 깨어 있고 결단성이 있었으며, 또한 유리하거나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이라면 즉각 실천에 옮기기에 충분할 만큼 정력을 타고났었네. 

 

그의 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체험하고 견뎌냈는가를 생각하면 나이 마흔인 그의 신체에는 성한 곳이 한 곳도 남아 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네.

 

마치 다른 길을 지시하는 최후의 암시처럼, 일찍이 존재했던 인간 가운데서 가장 유일하고 뒤늦게 태어난 인간 나폴레옹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에게서 '고귀한 이상 그 자체'는 문제로 육화되었다. 그것이 어떤 문제인지 잘 생각해보라. 비인간과 초인간의 이러한 종합인 나폴레옹을... <도덕의 계보>

 

<권력의지>의 메모 "인간은 비동물이면서 초동물이다. 상위의 인간은 비인간이면서 초인간이다." 

 

여기서 '비인간'이란 말은 인간이 아니라는 뜻도 되지만, 비인간적 존재라는 뜻도 함축한다. 두렵고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뜻이다. 더 높은 인간은 비인간적인 존재이자, 초인간적인 존재인 것이다.

 

초인이 존재한 적은 아직 없다. 나는 가장 위대하다는 자와 가장 보잘것없다는 자가 발가벗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저들은 아직도 너무 닮았다. 정녕, 나 알게 되었다. 더없이 위대한 사람조차도 너무나도 인간적이라는 것을! <차라투스..>

 

나는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나의 악마 이야긴데 나는 그가 엄숙하며 심각하고, 심오하며 당당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력의 악령이었던 것이다. 저 악마로 인해 모든 사물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차라투스트라..>

 

나 진정으로 중력의 악령에 대해 불구대천의 적의와 최대의 적의 그리고 뿌리 깊은 적의를 품고 있으니! ... 날지 못하는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차라투스트라...>

 

창조는 고통을 구제한다.

밝은 모습의 초인은 춤추는 자임과 동시에 창조하는 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창조하는 자의 길"을 묻는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너 자신에게 악과 선을 부여하고 너의 의지를 율법이라도 되는 듯 네 위에 걸어둘 수 있느냐? 너는 너 자신에 대하여 판관이, 그리고 너의 율법의 수호자가 될 수 있는가?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물음으로써 니체는 창조하는 자가 악과 선의 기준을 새롭게 세우고 자기 자신에 대한 판관, 자기 자신에 대한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의 기준을 새롭게 세우지 못한다면 창조하는 자가 될 수 없고, 초인의 길을 갈 수 없다. 그러나 그 길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어서 "이단자, 마녀, 예언자, 바보, 의심하는 자, 경건하지 못한 자, 그리고 악한"이라는 "일곱 악마들이 있는 곳"을 지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 하는" 자는 "파멸의 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차라투스트라..> 

 

그런 파멸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마침내 창조하는 자가 된다면, 그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창조의 밑불로서 구제될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창조가 고통에 찬 삶을 구제한다고 선언한다.

 

창조,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경쾌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있어야 하며 많은 변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들의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허다하게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너희들은 덧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 자신이 다시 태어날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가 되어야 하며 해산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진실로, 나 100개나 되는 영혼을 가로질러 나의 길을 걸어왔으며 100개나 되는 요람과 해산의 고통을 겪어가며 나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이미 허다한 작별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은 마지막 순간들을 잘 알고 있다. <차리투스트라..>

 

여기서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창조란 바로 자기 창조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나의 불과 같은 창조 의지는 언제나 새롭게 나를 사람들에게로 내몬다. 이렇듯 창조 의지는 망치를 돌로 내모는 것이다. 아, 사람들이여,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 잠자고 있구나! 내 머릿속에 있는 많은 형상 가운데 으뜸가는 형상이 잠자고 있구나! 아, 그 형상이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고 보기 흉한 돌 속에 갇혀 잠이나 자야 하다니! 이제 나의 망치는 저 형상을 가두어두고 있는 감옥을 잔인하게 때려 부순다. 돌에서 파편이 흩날리고 있다. 무슨 상관인가? 나는 저 형상을 완성하고자 한다. 내게 어떤 그림자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만물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 경쾌한 것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초인의 아름다움이 그림자로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니체는 여기서 자기 창조를 조각가가 돌에서 형상을 꺼내듯 자기안에서 하나의 형상을 끄집어내는 것에 비유한다.

창조하는 자란 결국 자기 안에서 '초인'을 창조하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그 창조의 과정은 무수한 망치질을 동반하는 한없이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감옥을 잔인하게 때려 부수지 않으면 초인은 해방되지 못할 것이다.

 

초인은 놀이하는 정신을 지닌 자, 유희 정신으로 충만한 자이기도 하다. 

 

나 이제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차라투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꿋꿋하게 걷는 당위성의 정신이다. 그는 의무감 속에서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견뎌낸다.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을 모두 마다히지 않고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린다." <차라투스트라..>

 

그러다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사자가 된 낙타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자는 자유정신을 나타낸다. 사자는 낙타처럼 묵묵하게 의무를 견디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사자는 그의 마지막 주인인 용을 찾아가 일전을 벌인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가르쳐 준다. 사자의 정신은 용의 당위성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라는 의지와 욕망을 내세운다. 사자는 용과 싸워 이김으로써 자유의지의 주인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자가 곧 가치의 창조자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재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적어도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에 대해서조차 경건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 <차라투스..>

 

사자가 자유의 투사일 수는 있지만, 창조자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창조하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차라투스트라...>

 

창조가가 되려면, 언제든 과거를 망각 속으로 던져 버리고 새로운 것을 향해 유쾌한 기분으로, 마치 가장 즐거운 놀이를 처음 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매번 시작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언제든 삶을 긍정한다. 울고 떼쓰고 나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놀이에 또 뛰어드는 것이 어린아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차리투스트라..>

 

이 유희의 정신이 곧 초인의 정신인 셈이다. 그러므로 초인은 유희하듯 창조 작업을 하는 존재다.

바그너의 충직한 제자였던 시절, 의무의 짐을 진 낙타로서 <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 고찰>을 썼고, 이어 사자가 돼 바그너라는 용에 대항해 전쟁을 벌이면서 자유정신으로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즐거운 학문>을 썼으며, 마침내 <차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와서 유희하는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영원회귀의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세 단계의 단절이 상대적인 것임도 지적한다. "세 가지 변신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은 의심할 나위 없이 상대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사자는 낙타 안에 현존해 있고, 어린아이는 사자 안에 깃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자 안에는 낙타가 들어 있고, 어린아이 안에는 사자와 낙타가 들어 있을 것이다. 동시에 자유정신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바꿔낼 것이고, 유희 정신은 자유정신을 유희의 중요한 파트너로 삼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아이와 창조하는자와 춤추는 자는 하나의 존재 안에서 만나게 된다. 어린아이, 다시 말해 어린아이를 자기 안의 본질로 품은 자는 춤추는 자이며, 놀이하는 자이며, 그 놀이의 정신으로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지하실의 들개들은 자유를 원한다"

초인이라는 목표, 곧 선이 실현되려면 꼭 거기에 맞게 악이 필요하다도 말하는 데서 이 어두운 초인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뭘 그리도 놀라는가? 사람도 나무와 다를 바 없다. 나무가 더욱 높고 환한 곳으로 뻗어 오르려면 그 뿌리는 더욱더 땅속으로, 어둠 속으로, 나락으로, 악 속으로 뻡어내려야 한다. <차라투스트라..>

 

니체는 선의 뿌리는 악이며, 큰 선을 이루려면 큰 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단 한순간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생각을 강화했다. 중대한 것을 창조하려면 중대한 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초인의 창조에 악은 필수적 요소로 참여한다.

 

너는 사방이 확 트인 산정에 이르기를 소망하고 있으며 너의 영혼은 별을 갈망하고 있다. 심지어 너의 저열한 충동조차 자유를 갈망하고 있구나. 너의 들개들은 자유를 원한다. 그리하여 너의 정신이 나서서 감옥 문을 모두 활짝 열어젖히려 하자 저들은 기쁨에 넘쳐 지하실에서 짖어대고 있구나 <차라투스트라..>

 

여기서도 니체는 인간의 정신 내부 아래쪽에 들개가 살고 있다고 확언한다. 그 들개가 인간 무의식 내부의 사나운 공격 충동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공격 충동은 무의식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뒤엉켜 있는 것이어서 창조의 에너지가 분출하려면 들개, 곧 공격 충동이라는 원시의 힘도 함께 분출할 수밖에 없다. 

 

그런 충동 에너지가 자유를 위한 투쟁, 초인을 향한 분투에서도 그대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자유로워지려거든, 창조하는 자가 되려거든, 초인이 되려거든, 무시무시한 파괴적 충동과 함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침내 그 충동은 승화해 선으로 변할 것이다. 

 

너는 일찍이 너의 지하실에 사나운 들개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도 결국 새가 되고 사랑스러운 가희로 변하지 않았는가? <차라투스..>

 

"너는 일찍이 열정을 지녔다. 그리고 그것을 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제는 단지 네 자신의 덕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들도 실은 너의 열정에서 자라난 것들이다."

 

형제여, 전쟁과 전투는 악한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악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며, 너의 덕 사이에서 생겨나는 질투와 불신 그리고 중상 또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하나같이 가혹하며, 위대한 사랑은 하나같이 연민을 초월한다.

 

"인간은 약하다." 나를 위로할 생각에서 더없이 지혜롭다는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내게 일러준 말이다. 아, 아직도 그 말이 진실이기를! 악이야말로 인간에게는 최상의 힘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진리가 태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저 선하다는 자들이 악하다고 부르는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야 한다. 오, 나의 형제들이여, 너희들은 이 진리에 걸맞은 만큼 충분히 악한가.

 

 

이 대지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로 가득 차 있고, 생은 많은, 너무 나도 많은 자들로 인해 썩어 있다.

 

국가란 온갖 냉혹한 괴물 가운데서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이 괴물은 냉혹하게 속여댄다. 그리하여 그 입에서 "나, 국가가 곧 민족"이라는 거짓말이 스스럼없이 기어나온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 국가는 선과 악이라는 말을 다 동원해가며 사람들을 기만한다. 국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국가가 무엇을 소유하든 그것은 부당하게 취득한 장물에 불과하다. <차라투스트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다. 존재할 가치가 없는 인간들을 위해 국가가 고안된 것이다! ... 악취를 멀리하라!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벌이고 있는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라!" <차라투스트라..>

 

"국가라는 것이 무너져야 비로소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 꼭 있어야 할 사람들의 삶이 시작된다. 그리고 꼭 있어야 할 자들의 노래, 단 한 번뿐이며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런 멜로디가 시작된다. 형제들이여, 국가가 무너지고 있는 저쪽을 보라! 무지개와 초인에 이르는 다리가 보이지 않느냐?" <차라투스트라..>

 

인간을 모욕하는 것에 대한 나의 공격이 성공하는 경우를 상상해보라. 가장 위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으며, 인류를 개량하려고 하는 저 새로운 삶의 집단은 타락하고 기생하는 존재들을 무자비하게 몰살시킬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 지구 상에 삶의 충일 상태가 실현되고, 이 상태에서 다시금 디오니소스적인 상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니체는 커다란 선을 창조하려면 커다란 악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초인의 창출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과제인바, 이 과제를 완수하려면 그런 악의 작업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니체의 논리다.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걸맞은 적을 찾아내서 일전을 벌여야 한다. 너희들의 사상을 위해! 설혹 전쟁에서 너희들의 사상이 패배하더라도 너희들의 성실성만은 그에 굴하지 않고 승리를 구가해야 하리라! 너희들은 평화를 사랑하되, 또 다른 전쟁을 위한 방편으로서 그것을 사랑해야한다. 그리고 긴 평화보다 짧은 평화를 더 좋아해야 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권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전투다. 내가 너희들에게 권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승리다. 너희들이 하는 노동이 전투가 되고 너희들이 누리는 평화가 승리가 되기를 바란다. <차리투스트라...>

 

훌륭한 명분은 전쟁까지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고 너희들은 말하려는가? 그러나 나는 말한다. 훌륭한 전쟁은 모든 명분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 무엇이 선이냐? 너희들은 묻는다. 용맹한 것이 선이다. ... 사람들은 너희들을 가리켜 무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들의 마음은 순수하다. ... 반항, 노예들에게는 그것이 미덕이다. 그러나 너희들에게는 복종이 미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너희들이 내리는 명령 그 자체가 일종의 복종이어야 한다! ... 이처럼 복종하는 삶,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랜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 어떤 전사가 자비를 구걸하랴! 나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노라. 나 너희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노라. 싸움터에 나가 있는 나의 형제들이여! <차라투스트라 ...>

 

니체는 비유의 어법을 최대치로 사용해 자기 내부의 파괴 욕망과 전쟁 욕망의 출구를 만들어냈다고 봐야 한다. 

그토록 위험한 텍스트가 왜 그토록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는가? 그 위태로운 발언들이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우리 내부의 어떤 원시적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거의 야성적인 힘을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들여진 무기력증을 깨뜨려 내면 저 깊은 곳의 생명력을 들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명력, 그 야성적인 힘을 제어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된다. 

 

니체의 말대로 선과 악은 거의 한몸처럼 뒤엉켜 있다. 악과 뒤섞인 초인, 그 초인은 결코 선한 인간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차라리 그것은 악마의 모습에 가깝다.

 

초인이 선의를 가지고 있을 때조차도 너희들에게는 그가 두려운 존재가 되리라. .... 너희들 내가 만난 최상의 인간들이여 짐작컨대 너희들은 나의 초인을 악마라고 부르리라! <차라투스트라 ..>

 

진정한 사내는 두 가지를 원한다. 모험과 놀이가 그것이다. 그래서 사내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놀잇감으로 여인을 원하는 것이다. 사내는 전투를 위해,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차라투스트라...>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벗이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벗을 사귈 수 없다. 여인들의 가슴속에는 너무도 오랫동안 노예와 폭군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아직도 우정이라는 것을 모른다. 사랑을 알 뿐이다. 여인들의 사랑, 그것은 그것이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공평하지 못하며 맹목적이다. 심지어 여인들이 분별력 있다는 사랑 속에서까지 빛과 함께 예기치 못한 기습과 번개와 어두운 밤이 깃들어 있으니, 여인에게는 우정의 능력이 없다. 여인은 여전히 고양이며 새다. 기껏해야 암소 정도다. <차라투스트라..>

 

지혜, 그것은 우리들이 용감하고 의연하고 냉소적이며 난폭하기를 요구한다. 지혜는 여성이어서 전사 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

 

웃고들 있구나, 저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 저들에게는 저들 나름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어떤 것이 있다. 저들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저들은 그것을 교양이라고 부른다. 교양이런 것이 있기에 저들은 염소치기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경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 한다. 이제 나는 저들의 자부심에다 대고 말하련다. 나 저들에게 더없이 경멸스러운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련다. '최후의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차라투스트라..>

 

보라! 나 너희에게 '최후의 인간'을 보여주겠다. ...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최후의 인간이 날뛰고 있다.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최후의 인간은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빡인다. .... 돌볼 목자는 없고 가축의 무리가 있을 뿐!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하며 실제로 그렇다. 어느 누구든 자기가 특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제 발로 정신 병원으로 가게 마련이다. ... 저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조촐하게 쾌락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건강은 끔찍이도 생각한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짝인다. <차라투스트라..>

 

니체는 초인의 대척점에 놓인 '최후의 인간'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는 현대 대중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

 

당대 부르주아 사회, 혹은 대중이 주인이 되어가는 민주주의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노동자가 주인이 된 사회주의 사회가 니체가 경멸해 마지 않는 '최후의 인간'이 사는 곳이다. 차라투스트라가 그 최후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하는 가운데, 군중 사이에서 고함과 환호가 터져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군중이 외쳐댄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최후의 인간을 달라. 우리를 그 최후의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 그러면 우리가 그대에게 초인을 선사하겠다." 군중들은 차루투스트라를 그렇게 조롱하면서, 최후의 인간의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 아니냐고 오히려 강력하게 외치는 것이다.

 

대중에 대한 고급한 인간의 선전 포고야말로 필요하다!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여 도처에서 평범한 자들이 서로 제휴하고 있다! 유약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만들며 '민중' 혹은 '나약한 것'을 통용시키는 모든 것이 보통 선거에, 바꿔 말하면 저급한 인간의 지배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항 수단을 단련하고 이러한 소동을 전부 백일하에 드러내 심판대로 끌어낼 것이다. <권력의지>

 

최후의 인간은 '천민'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삶은 기쁨이 솟아오르는 샘이다. 그러나 천민들이 와서 함께 마시면 샘에 독이 번진다." 차라투스트라는 권력을 잡기 위해 천민과 흥정을 벌이는 지배자들에게서조차 역겨움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지배자들이 무엇을 두고 지배라고 부르는지를 보고는 저들 지배자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이 말하는 지배란 권력을 잡기 위해 천민들을 상대로 벌이는 거래와 흥정이었을 분이다." 

 

"때가 되면 나 바람처럼 저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가련다. 그리하여 나의 정신으로써 저들의 정신의 숨결을 빼앗으련다."

 

평등을 설고하는 자들이여, 무기력이라는 폭군의 광기가 너희들의 가슴에서 '평등'을 갈구하여 외쳐댄는구나. 너희들이 더없이 은밀하게 품고 있는 폭군적 욕망은 이처럼 덕이라는 말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상처받은 자부심, 억제된 질투심, 너희들의 선조의 것일지도 모를 자부심과 질투심, 이런 것들이 너희들의 가슴속에서 불꽃이 되고 앙갚음의 광기가 되어 터져 나오는구나. 저들은 열광하고 있는 자들과도 같다. 그러나 저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심장이 아니라 복수심이다. 

 

벗들이여, 충고하건대 남을 징벌하려는 강한 충동을 갖고 있는 그 누구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이야말로 악랄한 족속이며 열등한 피를 타고난 족속이다. 그런 자들의 얼굴에서 사형 집행인과 정탐꾼의 모습을 엿볼수 있지 않은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가를 과시하기 위하여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도 믿지 말라! <차라투스트라..>

 

"선악, 빈부, 귀천, 그리고 가치의 모든 명칭들, 이것들은 모두 무기가 되어야 하며, 삶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리 나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삶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다. 니체는 삶이 자기를 극복하는 데에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의 가치들이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삶 자체를 구렁에 빠뜨린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자기 극복의 최대의 적은 이 평등화한 대중 사회라는 니체의 진단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가 니체의 목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삶의 자기 극복과 초인의 탄생을 목적으로 삼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민주주의, 평등주의 이념과 가치들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반민주주의도 반평등주의도 니체에게는 수단의 지위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니체가 그렇게 굳게 믿었던 반민주주의, 반평등주의 신념이 시대의 한계에 갇힌 오류로 드러난다고 해도 니체의 전체 기획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도 '삶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니체의 명제는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권력의지' 사상으로 펼쳐진다.

 

 

10 권력의지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권력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허무를 의지한다." <도덕의 계보>

 

"기쁨을 주거나 고통을 줌으로써 우리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의 권력을 느끼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선 고통을 가한다. 왜냐하면 기쁨보다 고통이

권력을 느끼게 하는 데 훨씬 강한 느낌을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즐거운 학문>

 

니체는 "심연에서 수직으로 날아올라 정상에 도달했다"고 느꼈다. 

니체의 충직한 제자 페터 가스트는 "그와 같은 것은 결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신이 제시하는 인류의 목표는 이제껏 어느 누구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또한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바로 답장을 썼다. "그대의 편지를 읽었을때 전율이 나를 뚫고 지나갔다네. 그대의 말이 옳다면, 내 삶은 실패가 아닌 것일 테지?"

 

"침묵의 시간은 지나갔네. 나의 차라투스트라가 자네에게 내 의지가 얼마나 높이 날아올랐는지 보여주고 싶어 하네. ... 모든 범상하고 기이한 말의 배후에는 나의 가장 깊은 진지함과 전체 철학이 숨어 있네. 나 자신을 밝히기 시작한 첫 책이네."

 

차라투스트라는 많은 나라와 많은 민족을 둘러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많은 민족들이 저마다 무엇을 선으로, 그리고 무엇을 악으로 간주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 어떤 민족에게 선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이 다른 민족에게는 웃음거리와 모욕으로 폄훼되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곳에서는 악한 것으로 불리는 많은 것들이 저곳에서는 존귀한 영예로 장식되는 경우도 나는 보았다. ... 저마다의 민족에게는 저마다의 가치를 기록해둔 서판이 걸려 있다. 보라,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이 극복해낸 것들을 기록해둔 서판이다. 보라,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이 지닌 권력의지의 목소리다. <차라투스트라..>

 

선과 악이라는 것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느냐 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인식이다.

 

어떤 민족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 위에 지배자로 군림케 하고 승리를 쟁취케 하며 영예를 누리게 하는 것, 그리하여 이웃 민족에게 전율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와 같은 것이 그 민족에게는 숭고한 것, 첫 번째의 것, 척도, 만물의 존재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 참으로, 형제여, 네가 먼저 어떤 민족이 처해 있는 곤경, 그 민족의 땅과 하늘, 그리고 그 민족이 누구와 이웃하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너는 그 민족이 어떻게 극복을 하는지, 그 극복의 법칙과 어떤 이유에서 그 민족이 그러한 극복의 사닥다리를 타고 그 자신의 희망을 향해 오르고 있는지 그 까닭을 미루어 알 수 있으리라. "너는 언제나 으뜸이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한다. 시샘에 불타는 너의 영혼은 벗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저 그리스인의 영혼을 전율시킨 가르침이었던바, 이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저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여기서 니체는 권력의지의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를 발설한다. 권력의지는 날것 그대로 관찰하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패배시켜 지배자로 군림함으로써 이웃 민족들에게 두려움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드러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다시 말해 만물의 척도이자 의미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니체의 설명을 따르면,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타자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에서 관찰된다.

 

그런데 이 권력의지는 '극복'과 연관이 있다. 그 극복은 먼저는 다른 민족을, 타자를 이겨내고 올라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인들의 영혼을 전율시킨 원칙이 바로 그것이었다. 으뜸이 되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 즉 타자를 극복하고 그들 위에 서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은 위대한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타자를 극복하고 그 위에 서는 것은 그 자신안에서 보면 자기 자신을 극복하여 자기 위에 서는 것과 같다. 타자 극복은 결국엔 자기 극복이다. 이 자기 극복의 문제를 니체는 2부에서 깊이 천착하게 된다. 자기극복에 이어 니체는 자신의 중요한 철학적 주제가 될 '가치 평가'라는 문제를 거론한다.

 

사람들은 그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해왔다. 먼저 사물들에 그 의미를, 일종의 인간적 의미를 부여 했던 것이다! 그들 자신을 '사람', 다시 말해 '가치를 평가하는 존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 평가, 그것이 곧 창조 행위다. 귀담아 듣도록 하라, 창조하는 자들이여! ....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그런 평가가 없다면 현존재라는 호두는 빈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 가치의 변천, 그것은 곧 창조하는 자들의 변천이기도 하다. 창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끊임없이 파괴를 하게 마련이다. <차라투스트라..>

 

사람들이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권력의지의 행위다. 사물을 평가하고 거기에 맞게 가치를 매기는 것이야말로 권력의지가 드러나는 유력한 방식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것, 어떤 것을 선이라고 평가하고 어떤 것을 악이라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권력의지의 발현이라는 것이 니체의 통찰이다. 니체는 이 가치 평가 행위 자체가 창조 행위라고 말한다. 사물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것, 다시 말해 이제까지 선한 것으로 간주되던 것을 악한 것으로, 악한 것이라고 낙인찍혔던 것을 선한 것으로 달리 규정하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창조라는 것이다.

 

가치 전복이야말로 창조다운 창조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가치가 변한다는 것은 창조하는 자들이 변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창조하는 자가 되려면, 기존의 가치, 기존의 척도를 때려 부수고, 새로운 가치, 새로운 기준을 세워야 한다. 창조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행위, 그러니까 파괴 행위와 창조 행위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권력의지라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본디는 민족이라는 집단이 창조의 주체였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창조하는 개인이라는 것이 나왔다. 실로, 개인 그 자체는 최근의 산물이다." <차라투스..>

 

선과 악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처음엔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의지도 처음엔 집단적 차원에서 발동했다는 것이다. 개인이 창조의 주체, 선과 악을 판별하는 주체로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라는 것이다.

 

개인들과 국민들이 얻게 될 이익과 그들의 허영심이 위대한 정치에 아무리 많이 영향을 끼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몰아대는 가장 강력한 흐름은 '힘의 느낌에 대한 욕구'다. 이러한 욕구는 군주나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에 못지않게 민중의 낮은 계층에서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용솟음친다. <아침놀>

 

기쁨을 주거나 고통을 줌으로써 우리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의 권력을 느끼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선 고통을 가한다. 왜냐하면 기쁨보다 고통이 권력을 느끼게 하는 데 훨씬 강한 느낌을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항상 그 원인에 대해 묻게 되는 반면에 기쁨은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는 경향을 지닌다. 어떤 방식으로건 이미 우리에게 예속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호의를 베풂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권력을 증대시키려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권력을 증대시키거나, 우리의 권력에 내재된 이점을 그들에게 보여주게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더 만족하게 되어 우리의 권력에 대항하는 적대자들에게 한층 더 적의를 품게 되고 투지를 불태우기 때문이다. <즐거운 학문>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세계와 우주의 형이상학적 본질로 보았다. 이와 달리 니체는 권력의지를 우주적 원리로까지 이해하지 않았다. 니체는 우리 주위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흔하고도 근본적인 삶의 법칙이 권력의지라고 보았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쇼펜하우어가 의지의 분출과 충돌 때문에 이 세계에 평화가 없고 갈등과 혼란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지 자체를 없앰으로써 불교적 열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제시했다. 반면에 니체는 권력의지를 삶을 창조하고 전진시키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되어서는 안 되고 또 부정될 수도 없는 삶의 본질이자 목표이다.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권력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더 약한 자가 더 강한 자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약한 자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데, 그 약한 자는 자기보다 더 약한자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이 기쁨만은 그 약한 자의 의지도 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더 약한 자가 한층 더 약한 자를 지배하는 기쁨과 권력을 얻기 위해 더 큰자에게 헌신하듯, 이렇게 한층 더 큰 자도 역시 헌신하며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생명을 거는 것이다. 모험과 위험에 뛰어들고 죽음을 건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자의 헌신이다. <차라투스...>

 

권력의지가 생명체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제시한다. 그 권력의지는 주인의 지배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인의 복종에서도 나타난다.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의 눈길이 있는 곳에서조차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더 약한 자들은 뒷길로 해서 더 강한 자들의 요새 속으로, 심장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힘을 훔쳐낸다." <차라투..>

 

가장 강한 자는 목숨을 걸고 모험에 뛰어드는데, 그것도 더 큰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강자든 약자든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권력의지인 것이다. 니체의 이런 설명을 들으면, 생명체는 그 자체로 권력의지라 해도 좋을 정도다.

 

"나 너희들에게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 즉 모든 생명체의 본성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명체를 추적해 살펴본 끝에 "모든 생명체는 복종하는 존재"임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복종이 생명체의 본질적 특성인 것이다. 다시 차라투스트라는 이 복종이라는 것이 타자에 대한 복종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복종을 뜻하며, 자기 자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자는 결국 명령받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알게 된 것이 "복종보다 명령이 더 어렵다는 것"이다. 

 

명령하는 자가 복종하는 자들 모두의 짐을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짐이 그를 쉽게 짓누를 수 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모든 명령에는 시도와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명령을 할 때 생명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거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때조차 그렇다. <차라투스트라..>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을 일으켜 세워 러시아 침략을 명령했을 때, 나폴레옹은 그 명령과 동시에 명령에 복종하는 국민들의 짐을 모두 짊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했다. 처음에는 그 짐에 짓눌리지 않았겠지만, 러시아 정복에 실패하고 패퇴할 때는 아마도 그 짐의 무게를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 패배의 여파로 그는 결국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유배 당하고 만다.

 

명령에는 그 명령이 가져올 결과들에 대한 책임도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명령은 언제나 시도와 모험을 품고 있는 것이다. 명령이 지닌 그런 위험의 성격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령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거는 행위여서 얻거나 잃거나 하는 '주사위 놀이'와 같은 것이다. 결과는 좋을 수도 있지만 나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 나는 내 존재 전체를 잃을 수도 있다. 바로 이 명령-복종의 관계 속에서 권력의지가 작동한다는 것을 니체의 날카로운 눈은 간파한 것이다.

 

권력의지와 생존 의지(삶의 의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직 생명이 있는 곳, 그곳에만 의지가 있다. 그러나 나는 가르치노라. 그것은 삶의 의지가 아니라 권력의지다. 생명체에게는 많은 것이 생명(삶) 그 자체보다 더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한 평가를 통해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있으니 권력의지가 그것이다!" <차라투스트라..>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권력의지를 표면만 보면 더 높은 삶, 더 많은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권력의지를 삶을 위한 것, 삶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권력의지는 오직 권력의지 자체를 목표로 할 뿐, 삶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사람은 어떤 경우엔 적극적으로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삶을 내버려서라도 붙들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권력의지다. 그러므로 권력의지는 삶의 의지로 환원될 수 없다. 대부분의경우에 권력의지가 삶의 의지, 번식의 의지, 번영의 의지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권력의지의 범주는 삶의 의지보다 크다. 극단적인 경우에 삶을 던져서라도 자기를 관철하는 것이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지하고자 한다." <도덕의 계보> 무언가를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느니, 무라도 의지한다는 것이 니체의 발견이다. 즉 허무의 의지로 세계를 파괴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렇게 니체는 복종 행위, 자살 행위, 헌신 행위에서 모두 권력의지라는 공통요소를 찾아낸다.

권력의지가 삶을 넘어선다고 해도, 권력의지는 어디까지나 생명체에게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너희들은 너희들을 앞으로 내몰고 열렬하게 불타오르게 하는 것을 두고 '진리 의지'라고 부르는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 나 너희들의 의지를 그렇게 부른다! 너희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우선 사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 그러나 존재하는 것 일체는 너희에게 순응해야 하며 굴복해야 한다! 너희들의 의지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이것이 너희들의 의지의 모든 것인바, 그것이 바로 권력의지다." <차라투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불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모든 것의 비밀을 파헤쳐 그 본질, 그 실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한 욕망 아닌가. 그러나 니체는 이 진리 의지란 것이 세상 모든 것을 생각을 통해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의지, 다시 말해 나의 이해 능력으로 장악하고자 하는 의지임을 폭로한다. 그렇게 사유 능력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그 대상을 내 의지 아래 굴복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리 의지는 그러므로 지배 의지이고, 권력의지다. 알고자 하는 의지, 인식의 의지는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정신의 푸른 불꽃 같지만, 실은 대상 세계를 휘어잡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잔인하고 가혹한 의지의 표출인 것이다. 

 

사물이 아닌 사람을 떠올려보면 진리 의지 또는 앎의 의지가 왜 권력의지인지 금방 드러난다. 어떤 사람의 내면을, 그의 생각과 고민과 꿈을 모두 알고자 하는 의지는 그의 내적 세계를 끄집어내 내 세계로 동화시키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것이 내 세계를 확장하는 것일 수도 있고 타자를 흡수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 권력의지임은 분명하다.

 

권력의지는 언제나 자기 극복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삶은 내게 다음과 같은 비밀도 직접 말해주었다. "보라, 나는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물론 너희들은 그것은 생식을 향한 의지, 혹은 하나의 목적을 향한 충동, 더 높고 더 멀고 더 다양한 것을 향한 충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하나의 비밀이다. 나는 이 한 가지를 단념하느니보다 차라리 몰락하고 싶다. 그리고 정녕, 몰락이 있고 낙엽이 지는 곳에서, 보라, 생명은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힘을 확보하기 위해! .. 내가 무엇을 창조하든 그리고 그것을 얼마만큼 사랑하든 나는 곧 내가 창조한 것과 그 창조한것에 대한 나의 사랑에 대항하는 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기를 나의 의지가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하는 자여, 너마저도 내 의지가 가는 길의 오솔길이며 발자국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나의 권력의지는 네 진리 의지조차도 발로 삼아 걸어가는 것이다. <차라투스..>

 

자기 극복은 일종의 자연 필연성이다.

떡갈나무의 나뭇잎이 무성해지고 열매가 맺힌다. 떡갈나무는 잎을 떨어뜨린다. 가지가 말라 죽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자기 극복이다. 떡갈나무는 이듬해 더 크고 더 푸른 나무로 자라 오를 것이다. 또 열매들은 어떤가. 어미 떡갈나무가 낳은 새끼 열매들은 어미의 잎들이 썩은 토양에서 뿌리를 내려 다시 떡갈나무로 자라난다. 열매들이 더 멀리 퍼져 여러 그루의 떡갈나무로 자란다면, 어미 떡갈나무의 처지에서 보면 자기를 희생해 더 많은 자기로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자기 극복인 셈이다. 자기 극복으로 나타나는 떡갈나무의 내적 본성이 바로 권력의지다.

 

이렇게 설명해나가다 니체는 방향을 인간적인 상황으로 돌려 창조와 자기 극복의 관계로 나아간다. 내가 무엇을 창조하든, 그리고 내가 창조한 것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든 나는 내가 창조한 그것과 대결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나를 적으로 삼아 나를 이겨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의지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자기 내부에서 오직 자기 존재 유지를 위한 욕구만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너무 소극적인 것이다. 내부의 자아는 팽창하는 힘과 상승과 축적의 경향을 이미 갖고 있다. 현상 유지만 하는 것은 결국 멸망한다. 상승하는 것만 유지된다." 우리가 창조한 것에 자족하는 순간, 우리는 현상을 유지하기는 커녕 뒤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니, 우리는 현상을 유지하기는커녕 뒤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니,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릴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것들과 대결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사랑스럽더라도 그 앞에서 멈추면 안 된다.

 

파우스트는 자신이 개척한 땅에서 곡식이 자라 넘실대는 것을 사상 속에서 펼쳐보며 외친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이렇게 말하는 순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대로 파우스트의 영혼을 가져가고 파우스트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이 문학적 비유를 니체는 생명의 본질로 치환한다. 그리하여 자기 극복은 모든 생명체의 권력의지가 드러나는 형식이 된다. 또 인간이라는 존재에게서 자기 극복은 그대로 실존적 명령이 된다. 우리는 아무리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순간을 향해서도 멈추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를 끝없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가 말한 자기 극복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해석한다. " '생의 유지'가 단지 생의 유지에 그칠 때 그것은 이미 생의 몰락일 것이다. '생의 공간'의 확보는 살아 있는 것의 목표가 결코 아니며 '생의 고양'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생은 근본 성격인 권력의지로부터 경험될 경우 생의 고양과 상승을 향한 충동이며 지배, 즉 상위에 존재함을 향한 충동이다."

 

그렇다면 자기 극복은 어디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초기 니체는 '자기 자신을 극복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제시했다.

우리가 쉼 없는 자기 극복을 거쳐 도달해야 할 곳에 초인이 서 있을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이렇게 자기를 극복해 나아가는 길에서 인식하는 자의 진리 의지조차 수단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자기 극복을 지향하는 권력의지의 냉혹한 모습이다. 먼저 여기서 인식하는 자의 진리 의지를 발로 삼는다는 말을,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쓴 책이나 남긴 가르침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온건하게 읽을 수도 있다. 동시에 이 비유는 타자를 자기 극복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해석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자기를 극복해 상승하기 위해서라면, 타자를 인식의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세상과 맞붙으라는 명령이 이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권력의지 사상을 깊이 파고들어 숙고한 사람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하이데거가 니체의 권력의지를 그 자체로 이해하지 않고 하이데거 자신의 철학 안에 니체를 우겨넣었다고 비판한다. 이에 들뢰즈도 한마디 했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생각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 더 가까운 니체 철학 해석을 제공한다."

 

하이데거 해석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를 존재자 전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본질로 이해한다. "존재자 전체에 대한 진리는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이라고 불린다." "존재자 전체의 근본 성격을 니체는 그가 '권력의지'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인식하고 정립한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연결된, 플라톤 철학의 마지막 후예로 이해한다.

 

니체는 권력의지를 모든 것의 본질로 삼았던 것일까? 니체는 언제나 권력의지를 생명체 또는 살아 있는 것들의 본질로 이야기 했다. "오직 생명이 있는 곳, 그곳에만 의지가 있다."

 

이 세계가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자. 그것이 어디로 확장되고 있다는 말인가? 무엇에서 영양을 섭취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성장하고 번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유기체가 무엇인지 대략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우주를 유기체라고 부르는 자들처럼, 이 지구의 표면에서 인지할 뿐인 지극히 피상적인 것, 뒤늦게 생겨난 것, 희귀하고 우연적인 것(즉 생명체)을 본질적으로 보편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짓은 내게 구역질을 일으킨다. ...

 

우리가 살고 있는 별의 질서는 예외에 속한다. 이 질서와 그것에 의해 조건 지어진 지속성이 다시금 예외 중의 예외인 유기체의 생성을 가능하게 했다. 반면에 이 세계의 전체적 성격은 영원한 카오스다.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질서, 조직 구조, 형식, 미, 지혜, 그밖에 우리가 심미적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 우주는 결코 인간을 모방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미학적 판단이나, 도덕적 판단도 우주에 적용 되지 않는다! 우주는 자기 보존 본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도대체 본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즐거운 학문>

 

하이데거는 의인화, 다시 말해 인간적 관점을 우주에 적용하는 변형을 통해서 권력의지를 존재자 전체, 곧 우주의 본질로 만들고 만다.

이것은 니체가 권력의지를 존재자 전체의 본질로 보았다는 점이 입증되지 않는 한 무리한 일로 끝나고 만다.

 

니체의 글들을 읽어보면, 형이상학적 욕망이 아주 없었던 것 같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권력의지에 대해서도 니체는 그것을 형이상학적 체계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감행했다. 자신이 발견한 원리를 존재자 전체의 본질적 원리로 구축하려는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대들은 또한 나에게 '세계'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내가 그대들에게 이 세계를 내 거울에 비추어 보여주어야만 하는가? 이 세계는 곧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으며, 소모되지도 않고 오히려 전체로서는 그 크기가 변하지 않지만, 변화하는 하나의 확고한 청동 같은 양의 힘이며, 지출과 손해가 없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증가도 수입도 없고, 자신의 경계인 '무'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가계 운영이며, 흐릿해지거나 허비되어 없어지거나 무한히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힘으로서 일정한 공간에 끼워 넣어지는 것인데, 이는 그 어느 곳이 '비어' 있을지도 모르는 공간 속이 아니라, 오히려 도처에 있는 힘이며, 힘들과 힘의 파동의 놀이로서 하나이자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서 쌓이지만 동시에 저기에서는 줄어들고, 자기 안에서 휘몰아치며 밀려드는 힘들의 바다며, 영원히 변화하며, 영원히 되돌아오고, 엄청난 회귀의 시간과 더불어, 자신의 형태가 빠져나가는 썰물과 밀려들어 오는 밀물로, 가장 간단한 것으로부터 가장 복잡한 것으로 움직이면서, 가장 고요한 것이나 가장 단단한 것, 가장 자기모순적인 것으로 움직이고, 그다음에는 다시 충일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 모순의 놀이로부터 조화의 즐거움으로 되돌아오고, 이러한 동일한 자기 자신의 궤도와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긍정하면서, 영원히 반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축복하면서, 어떠한 포만이나 권태나 피로도 모르는 생성이다.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라고 하는 이러한 나의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이중적 관능이라는 이러한 비밀의 세계, 이러한 나의 선악의 저편의 세계, 이는 순환의 행복 속에 목적이 없다면 목적이 없으며, 원환 고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의지가 없다. 그대들은 이러한 세계를 부르는 이름을 원하는가? 그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하나의 해결을? ..... '이러한 세계가 권력의지다. 그리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들 자신 역시 권력의지다. 그리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유고>

 

권력의지에 관한 대작을 구상할 때 쓴 이 아름다운 글은 니체가 머릿속에 생각한 세계, 권력의지와 영원회귀가 일치하는 우주적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니체는 이 메모를 공식 출간한 책 어디에도 삽입하지 않고 메모로 남겨두었다. 왜 그랬을까?

 

권력의지는 우리 세계 안의 우리 생명체들의 문제다. 좀 더 좁히면, 사회를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 인간들, 그리고 창조하고 투쟁하는 개인들의 문제다. 그러므로 권력의지는 쇼펜하우어처럼 우주를 주재하는 단 하나의 의지가 아니라, 무수한 개체들 안에서 각각 작용하는 복수의 의지들이다. 이 권력의지들의 만남과 충돌과 경합과 투쟁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권력의지는 결코 권력을 원하는 의지, 지배를 욕구하는 의지가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권력의지를 설명한다.

 

오로지 비굴한 자들만이,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비굴하게 머무는 노예들만이 지배하길 욕구하며, 타인들로부터 자신들의 인정을 구한다. 따라서 권력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탐내는 자들은 노예들이다. 반면에 주인들은 자신들이 곧 지배하는 자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는 자들, 즉 자기 원인적이고 능동적인 힘으로서의 권력을 소유한 자들, 그리고 그 권력을 실제적으로 드러내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권력을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지 않으며, 다만 실현할 뿐이다. 일단 그 내용을 떠나서 주인과 노예라는 축면만으로 권력의지를 고려한다면 권력의지란 이처럼 주인에게 속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권력의지를 '지배욕'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한, 그것은 불가피하게 기성의 가치들에 의존하는 것이 되고 만다. ... 니체의 말을 따르면, 권력의지는 무언가를 격렬하게 원하고 '획득하는' 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산출하는' 데 존재한다.

 

지배욕이야말로 약자들이 생각하는 권력의지라는 것이 들뢰즈가 전하는 니체의 주장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획득'이 아니라 '창조'의 관점에서 강자와 약자를 나눈다. 그러면서 약자들 혹은 노예들이 구사하는 반동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가 승리하는 사태를 두고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한다. 왜 니힐리즘이 문제인가. "노예들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빼는 것으로 승리하기" 때문이다. 노예 또는 약자는 이렇게 승리를 훔친다.

 

창조하는 자, 산출하는 자를 강한 자로 이해하고, 약자를 강자의 힘을 훔치고 빼내는, 창조하지 못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들뢰즈의 설명법은 잘 깎아놓은 조각상처럼 말끔하다. 그러나 거듭 강조할 것은 이 모든 것이 들뢰즈의 눈으로 해석한 니체라는 사실이다. 니체의 텍스트는 들뢰즈의 매끄러운 니체상을 훼손하는 가시철조망 같은 구절들로 넘친다.

 

3부의 '흔히 말하는 세 가지 악에 대하여'만 살펴봐도 사태는 분명해진다.

니체는 "감각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 이 세 가지가 지금까지 가장 혹독하게 저주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가장 고약하게 비방받고 왜곡되어왔던 것들이다. 나 이 셋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저울질해볼 참이다." <차라투스..>

 

"감각적 쾌락, 그것은 쇠잔해 있는 자들에게야 감미로운 독이지만, 사자의 의지를 지닌 자들에게는 대단한 강심제요 정성스레 저장해온 최상의 포도주다." <차라투스트...> 이어 지배욕이라는 악을 다시 평가해 찬미한다.

"지배욕. 높은 자가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열망할 때 누가 그것을 두고 '병적 탐욕'이라고 부르겠는가! 참으로 그런 열망과 하강에는 병적인 것도 탐욕적인 것도 없거늘!" <차라투...>

마지막으로 이기심이라는 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이비 현자들, 모든 사제들과 세상살이에 지쳐 있는 자, 여인과 하인의 영혼을 지닌 자, 오, 예로부터 이런 자들의 농간이 얼마나 이기심을 학대해왔던가! 거기에다 이기심을 학대한 것, 바로 그런 행위가 덕으로 간주되고 덕으로 불려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무욕', 세상살이에 지쳐 있는 겁쟁이들, 그리고 십자거미들이 그것(무욕)을 소망한 것도 실로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그날이, 변화와 심판의 날이, '저 위대한 정오'가 다가오고 있다. 이제 많은 것이 반드시 백일하에 드러나리라! 그리고 자아를 두고 건전하고 신성하다고 말하며, 이기심을 두고 복되다고 말하는 자, 그는 진정 예언자로서 그가 통찰하고 있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차라투스..>

 

이기심을 떠받들고, 지배욕을 찬양하는, 니체의 육성이 담긴 이런 구절을 읽으면, 들뢰즈의 매력적이고 산뜻한 글은 오히려 '사이비 현자'의 우아한, 그러나 공허한 말처럼 들린다.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권력의지가 예술적인 창조성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11 영원회귀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폭풍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더없이 잔잔한 말들이다.

비둘기처럼 조용히 찾아오는 사상, 그것이 세계를 끌고 간다."

 

"갈기갈기 찢긴 디오니소스는 삶에 대한 약속이다.

그는 영원히 다시 태어날 것이고 영원히 파괴로부터 다시 돌아올 것이다."

<권력의지>

 

"차라투스트라여, 무슨 걱정이냐? 네 말을 하라. 그러고 나서 파멸하라!"

 

나는 대답했다. "내가 내 갈 길을 찾아내어 길을 떠나자 저들은 나를 조롱했다. 그때 진정 나의 두 발은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저들은 말했다. '길을 잊더니만 걷는 법조차 잊어버렸구나!' " 그러자 다시 소리 없이 내게 말하는 것이 있었다. "저들의 조롱이 무슨 대수냐? 너는 복종하는 법을 잊은 그런 자의 하나구나. 그러면 이제 명령을 해야 한다! 뭇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너는 모르는가? 바로 위대한 것을 명령할 줄 아는 자가 아닌가. 위대한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더 어려운 것은 위대한 것을 명하는 일이다. 너는 그럴 만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지배를 하려 들지 않는구나. 그것이 너의 가장 용서받지 못할 점이다." <차라투스..>

 

여기서 복종의 뜻은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내 안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 말에 따라야 한다. 니체에게 복종은 일차로 자기 내면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복종할 줄 알아야 타자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고 니체는 이야기 한다.

 

이에 나는 대답했다. "내게는 명령을 하기 위한 사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없다." 그러자 다시 속삭이듯 내게 말하는 것이 있었다. "폭풍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더없이 잔잔한 말들이다. 비둘기처럼 조용히 찾아오는 사상, 그것이 세계를 끌고 가지.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앞으로 출현해야 할 자의 그림자로서 내게 주어진 길을 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너는 명령을 하게 될 것이고 명령을 하며서 앞서 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에 나는 대답했다. "부끄럽다." 그러자 다시 소리 없이 내게 말하는 것이 있었다. "너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수치심을 모두 떨쳐버려야 한다. ..." 이에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떨렸다. 이윽고 나는 내가 처음에 했던 말을 다시 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 <차라투스..>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자신의 위대한 사상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끝없이 머뭇거리며 선포의 순간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그러자 내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 얼마나 그 웃음이 내 오장육부를 뜯어내고 심장을 도려내던지!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ㄹ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의 열매들은 익었다. 그런데도 너 자신은 아직 이 열매들을 거둬들일 만큼 무르익지 않았구나! 이제 너는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 무르익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한 번 웃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니체는 자신의 근본 사상을 설파하는 것이 힘든 과제임을 암시한다.

마침내 니체는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뒤로 미뤄두었던 과제, 영원회귀 사상을 가르치는 일에 나선다. 그것은 '용기'를 내는 일이다. 그래서 니체는 먼저 '용기' 자체를 찬양한다.

 

"용기, 공격적인 용기야말로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모든 공격 속에는 승리의 함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없이 용기 있는 짐승이다. 인간은 그 용기에 힘입어 온갖 다른 짐승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승리의 함성으로써 모든 고통까지도 이겨냈다.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 어느 것보다도 심오한 고통까지도 이겨냈다.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 어느 것보다도 심오한 고통이었는데도 말이다. 용기는 심연에서 느끼는 현기증까지 없애준다. 그런데 사람이 있는 곳치고 심연이 아닌 곳이 어디 있던가! .... 용기는, 공격적인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을 죽이기까지 한다." <차라투스..>

 

"여기 성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길을 보라, 난쟁이여!" .... "길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두 개의 길이 이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 길들을 끝까지 가본 사람이 아직은 없다. 뒤로 나 있는 이 긴 골목길. 그 길은 영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저쪽 밖으로 나 있는 저 긴 골목길. 거기에 또 다른 영원이 있다. 이 두 길은 여기서 마주치고 있다.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 바로 이 성문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에 성문의 이름이 씌어 있구나. '순간.' 난쟁이여, 그러나 누군가가 있어 두 길 가운데 하나를 따라 앞으로, 더욱 앞으로, 그리고 더더욱 멀리 갈 경우, 그래도 이 길들이 영원히 머리를 맞대고 있으리라고 보는가?" 그러자 난쟁이는 경멸조로 중얼거렸다. "곧바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하나같이 굽어 있으며 시간 자체도 일종의 둥근 고리다."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조금 더 자신 있는 말투로 영원회귀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여기 순간이라는 성문으로부터 하나의 길고 긴, 영원한 골목길이 뒤로 내달리고 있다. 우리 뒤에 하나의 영원이 놓여 있는 것이다. 만물 가운데서 달릴 줄 아는 것이라면 이미 언젠가 이 골목길을 달렸을 것 아닌가? 만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미 일어났고, 행해졌고, 과거사가 되어버렸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다면, 난쟁이여, 여기 이 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성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이 길 또한 이미 존재했음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리고 달빛 속으로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는 이 거미와 저기 저 달빛, 함께 속삭이며, 영원한 사물들에 대해 속삭이며 성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여기 이 길에 앉아 있는 나와 너, 우리 모두는 이미 존재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되돌아와 우리 앞에 있는 또 다른 저 골목길, 그 길고도 소름 끼치는 골목길을 달려가야 하지 않는가. 우리들은 영원히 되돌아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동일한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니체는 그렇게 모든 것이, 제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온다고, 거대한 순환을 거듭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처럼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도 달리 찾기 어렵다. 계절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매번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계절의 순환 같은 상식적인 반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확히 동일한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끝없이 돌아오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아직은 그 설명이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사상'과 '속사상'이 두려워 말소리를 점점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동일하게 되돌아온다는 '사상;이 니체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하다.

 

정말이지 내가 그때 보았던 것, 그와 같은 것을 나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몸을 비틀고 캑캑거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어떤 양치기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입에는 시커멓고 묵직한 뱀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내 일찍이 인간의 얼굴에서 그토록 많은 역겨움과 핏기 잃은 공포의 그림자를 본 일이 있었던가? 그는 잠을 자고 있었나? 뱀이 기어들어가 목구멍을 꽉 문 것을 보니. ..... 그때 내 안에서 "물어뜯어라! 물어뜯어라!" 라고 소리치는 어떤 것이 있었다. "대가리를 물어뜯어라! 물어뜯어라!" 이렇게 외쳐대는 것이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나의 공포, 나의 증오, 나의 역겨움, 나의 연민, 내게 좋고 나쁜 것 모두가 한목소리로 내 안에서 외쳐댄 것이다. 여기, 담대한 자들이여! 탐험가, 모험가들이여, 그리고 교활한 돛을 달고 미지의 바다를 향해 떠나본 적이 있는 자들이여! 수수께끼 풀기를 좋아하는 자들이여! 자, 내가 그때 본 수수께끼를 풀어달라! 더없이 고독한 자가 본 저 환영을 설명해 달라. ... 양치기는 내가 고함을 쳐 분부한 대로 물어뜯었다. 단숨에 물어뜯었다. 뱀 대가리를 멀리 뱉어내고는 벌떡 일어났다. <차라투스트라..>

 

뱀은 뱀 모양을 한, 길고도 소름 끼치는 골목길, 곧 영원회귀인 것이다.

뱀을 물어뜯고 일어선 자는 영원회귀의 공포를 이겨내고 시련을 견뎌낸 자인 것이다.

 

이렇게 니체는 영원회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직 그 이야기가 충분히 명료하지는 않다.

 

"심오한 사상이여, 나의 심연에서 올라오라! ..... 삶의 대변자이고 고뇌의 대변자이며 둥근 고리의 대변자이기도 한 나 차라투스트라가 너를, 나의 더없이 심오한 사상을 부르고 있지 않은가! 아! 올라오고 있구나.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는 구나! 나의 심연은 말문을 열고, 나는 나의 마지막 깊은 곳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아! 가까이 오라! 손을 달라! 아! 놓아라! 아아! 메스껍다, 메스껍다. 슬프구나." <차라투스트라..>

 

자기 내부의 심오한 사상을 향해 어서 올라오라고 재촉하는가 하면, 올라온 사상을 보고는 견딜 수 없는 역겨움을 드러낸다.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사상을 찾아낸다는 데 대한 커다란 자부심과 함께 그 사상의 내용이 야기하는 견딜 수 없는 역겨움과 공포가 그를 휘감는 것이다.

 

이후 차라투스트라는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이 체험한 영원회귀 사상의 실체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차라투스트라가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들 입을 통해 말한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이렇듯 영원히 자신에게 신실하다. <차라투..>

 

이말을 듣고 차라투스트라는 짐승들에게 답한다.

 

"이레 동안에 이루어야 했던 것들인데 너희들은 어찌 그리도 잘 아는가. 어떻게 저 괴물이 내 목구멍에 기어들어가 나를 질식시켰는지를 어찌 그리 잘 아는가! 하지만 나 그 괴물의 머리를 물어뜯어 뱉어버렸지."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가 바로 뱀에 질식당한 양치기의 체험을 했던 것이고, 그 체험은 바로 영원히 모든 것이 되풀이되는 '존재의 수레바퀴' 체험이었음을 여기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사람은 악하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사람이라는 것의 최악이란 것이 이처럼 보잘것없다니! 아, 사람에게 최선이란 것이 이처럼 보잘것없다니!" 사람에 대한 크나큰 권태, 그것이 나의 목을 조여왔으며 내 목구멍으로 기어들어왔다. 거기에다 예언자가 예언 했던 것, "모든 것은 한결같다. 아무 소용없다. 앎이 사람을 질식시키고 만다"라는 말이 기어들어왔다. ... "네가 지겨워하고 있는 저 왜소한 사람, 그는 영원히 돌아오게 되어 있다." 나의 비애는 이렇듯 하품을 해가며 발을 질질 끌었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차라투스트라...>

 

아무리 악한 사람도, 아무리 좋은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그런 왜소한 존재일 뿐이다. 선에서든 악에서든 보잘것없는, 왜소한 인간이 되될아온다는 사실이 니체를 질식시킨 것이다. 그만큼 니체는 사람을 초월하고 싶었던 것인데,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해도 똑같은 인간이 되돌아온다면 이건 정말 끔찍한 운명의 저주 아닌가.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처럼 한없이 산정으로 돌을 굴려 올려도 어김없이 다시 굴러 떨어질 운명 아닌가. 니체-차라투스트라는 다시 탄식한다.

 

'아, 사람이 영원히 되돌아오다니! 왜소한 사람 또한 영원히 되돌아 오도록 되어 있다니!' 언젠가 나는 위대한 사람과 왜소한 사람이 맨몸으로 있는 것을 보았다. 저들은 서로 너무나 닮은 모습이었다. 더없이 위대한 자조차도 아직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것이다! 더없이 위대한 자조차도 너무나 왜소했으니! 이것이 사람에 대한 나의 염오였다! 그리고 더없이 왜소한 자들의 영원한 되돌아옴! 이것이 모든 현존재에 대한 나의 염오였다! 아, 역겹다!  역겹다! 역겹다! <차라투스트라...>

 

니체를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게 한 영원회귀 체험이 결국 이 혐오스러운 내용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한 존재조차도 왜소한 인간과 닮았다는 것, 그리하여 그 왜소한 자들이 영원히 돌아온다는 것, 그것이 니체를 절망과 혐오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체험 내용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체험을 한 차라투스트라가 7일 만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을 되찾는 자'가 되는가. 무엇이 그에게 건강을 되돌려 주는가.

 

그대,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여, ... 오, 차라투스트라여, 노래하라. 그리고 포효하라. 새로운 노래로 그대의 영혼을 치유하라. 일찍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진 바 없는 숙명을, 그대의 막중한 숙명을 견뎌낼 수 있도록!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가 누구이며 누구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보라, 그대는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이제는 그것이 그대의 숙명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대가 처음으로 이 가르침을 펴야 한다. 이 막중한 숙명이 어찌 그대에게 더없이 큰 위험이 되지 않으며 병이 되지 않겠는가! <차라투스트라..>

 

이 짐승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니체-차라투스트라 내면의 목소리는 영원회귀 시련에 굴복당하지 말고 그 시련을, 그 숙명을 견디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견딜 때 영혼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영원회귀는 끔찍한 시련이지만 그것을 이겨내면 영혼이 치유될 수 있을 것임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것은 이렇게 영원회귀가 가하는 시련과 그 극복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극복할 수 있다면 시련은 단지 시련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보라, 그대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만물이 영원히 되돌아오며, 우리 자신도 더불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미 무한한 횟수에 걸쳐 이미 존재했으며, 모든 사물 또한 우리와 함께 그렇게 존재해왔다는 것이 아닌가. 그대는 생성의 거대한 해, 거대한 해라는 괴물의 존재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이 괴물은 모래시계처럼 늘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다시 출발하여 내달리기 위해. 그리하여 이들 해 하나하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고, 우리 또한 거대한 해를 맞이할 때마다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고, 우리 또한 거대한 해를 맞이할 때마다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 변함없다는 것이 아닌가. <차라투스트라..>

 

이어 짐승들은 이런 끔찍한 영원회귀가 오히려 차라투스트라의 영혼을 가볍게 해줄 것이라며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는 조금도 떨지 않고, 오히려 행복에 겨워 안도의 숨을 쉬며 말하리라. 엄청난 무거움과 답답함이 그대를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제 죽자. 사라지자. 한순간에 나는 무로 돌아가리라. 영혼이란것도 신체와 마찬가지로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대는 이렇게 말하리라. "그러나 나를 얽매고 있는 원인의 매듭은 다시 돌아온다. 그 매듭이 다시 나를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한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나 다시 오리라. 이 태양과 이 대지, 이 독수리와 이 뱀과 함께. 그렇다고 내가 새로운 생명이나 좀 더 나은 생명, 아니면 비슷한 생명으로 다시 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더 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또다시 위대한 대지와 위대한 인간의 정오에 관해 이야기하고, 또다시 사람들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차라투스트라..>

 

니체는 왜 제4부를 또 쓴 것일까. 충분히 밝히지 못한 '의욕의 대상으로서 영원회귀'를 밝혀보려 한다.

 

그대들은 언젠가 쾌락을 향해 '좋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오, 나의 벗들이여, 그랬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온갖 고통에 대해서도 '좋다'고 말한 것이 된다. 모든 사물은 사슬로 연결돼 있고 실로 묶여 있으니. 그대들이 일찍이 어떤 한순간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 일이 있다면, "너, 내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일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영원한,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고, 실로 묶여 있고 사랑으로 이어져 있는,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 된다. 그대 영원한 존재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그리고 고통을 향해 "사라져라, 하지만 때가 되면 되돌아오라!" 고 말하라. 모든 쾌락은 영원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차라투..>

 

니체는 영원회귀가 시련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의욕의 대상임을 나름대로 분명하게 논증하려 한다.

 

"쾌락, 그것은 가슴을 에는 고통보다 더 깊다. 고통은 말한다. 사라져라! 그러나 모든 쾌락은 영원을 소망한다. 깊디깊은 영원을!" 지극한 쾌락은 이번 한 번만이 아니라 영원한 반복을 소망한다. 지극한 쾌락은 그 어떤 고통도 다 받아들인다. "쾌락이 원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쾌락은 모든 고통보다 더 목말라 있으며, 더 간절하며, 더 굶주려 있고, 더 끔찍하고, 더 은밀하다. 쾌락은 자기 자신을 원하고 자기 자신을 물고 놓지 않는다. 그 쾌락 속에는 둥근 고리를 향한 의지가 몸부림친다."

 

살로메로 인한 니체의 즐거움은 영원을 소망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여러 가지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어야 지극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나체에게 최고의 쾌락은 무엇이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창조가 살로메의 배신이라는 끔찍한 고통 끝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면, 그런 고통조차도 창조의 불쏘시개로서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만약 이 지극한 쾌락이 수많은 고통과 연결돼 있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그 수많은 고통 없이 지극한 쾌락이 있을 수 없다면, 이 한번의 쾌락을 위해 나머지 모든 고통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제 영원회귀는 단순히 감내해야 할 시련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욕해도 좋을 일이 된다. 이 최고의 쾌락이 영원히 반복될 수 있다면 어떤 고통도 다 받아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쾌락을 위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고통이여 오라" 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회귀가 이 우주의 비밀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하면 영원회귀를 욕구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 것이냐 하는 문제가 실존적으로 더 절실한 것으로 다가왔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라는 관념이 물리학적으로는 엉터리였다는 사실.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의 반복'으로 해석한다. 창가 조금도 없는 동일한 존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차이와 변화아 생성이라는 그 사태가 반복되는 것이다. 존재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고 생성의 반복이다.

 

이 세계는 곧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으며, 소모되지도 않고 오히려 전체로서는 그 크기가 변하지 않지만, 변화하는 하나의 확고한 청동 같은 양의 힘이며, .... 자기 안에서 휘몰아치며 밀려드는 힘들의 바다며, 영원히 변화하며, 영원히 되돌아오고, ... 여전히 자기 자신을 긍정하면서, 영원히 변화하며, 영원히 되돌아오고, ... 여전히 자기 자신을 긍정하면서, 영원히 반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축복하면서, 어떠한 포만이나 권태나 피로도 모르는 생성이다.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라고 하는 이러한 나의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이중적 관능이라는 이러한 비밀의 세계, 이러한 나의 선악의 저편의 세계, 이는 순환의 행복 속에 목적이 없다면 목적이 없으며, 원환 고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의지가 없다. 그대들은 이러한 세계를 부르는 이름을 원하는가? 그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하나의 해결을? ... "이러한 세계가 권력의지다. 그리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들 자신 역시 권력의지다. 그리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유고>

 

우리의 삶이 반복하며 모든 세세한 사항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것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가능성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면서 환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과연 어떤 태도를 지녀야만 하는가의 문제다.

 

니체에게 영원회귀란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의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두 가지 유형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 고대 이교적인 숭배는 생에 대한 감사와 긍정의 한 형태가 아닐까? 그것의 최고의 대표자는 생을 옹호하고 신격화하는 것은 아닐까? 건강하며 황홀경에 빠져 있고 충일한 정신! 생의 모순들과 의문스런 점들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구원하는 정신이라는 유형! 여기서 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디오니소스라는 이상을 내세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종교적 긍정, 부인되고 반으로 조각난 삶이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긍정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 대 디오니소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립이다. 양자 공히 순교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순교는 그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디오니소스의 경우에는 삶 자체, 삶의 영원한 산출력과 회귀가 고통과 파괴와 절멸을 향한 의지의 원인이다. 이에 반해서 전자의 경우(그리스도의 경우)는 고통이,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자'가 삶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삶을 비난하고 단죄한다. 여기에서 고통의 의미가 기독교적인지 아니면 비극적인 의미인지가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는, 삶은 성스러운 존재에 이르는 길이어야만 한다. 이에 반해 비극적인 의미에서는 삶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며, 따라서 아무리 엄청난 고통이라도 시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비극적인 인간은 가장 가혹한 고통조차도 긍정한다. 그 정도로 그는 충분히 강하고 충만하며 삶을 신성화하는 힘을 갖추고 있다. 기독교적인 인간은 지상에서의 가장 행복한 운명조차도 부정한다. 그는 어떠한 형태의 삶에서도 삶 때문에 고통을 받을 정도로 약하고 가난하며 가진 것이 없다. '십자가에 달린 신'은 삶에 대한 저주이며, 삶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라는 지침이다. 갈기갈기 찢긴 디오니소스는 삶에 대한 약속이다. 그는 영원히 다시 태어날 것이고 영원히 파괴로부터 다시 돌아올 것이다. <권력의지>

 

디오니소스는 식물의 상징이 된다. 식물의 본질은 정적인 식물성이 아니라 동물성이며 열광이며 창조적 충동이다. 그 충동의 사멸과 부활이다.

 

니체의 삶은 끝없는 질병의 침탈과 회복의 반복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니체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절규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지나고 나면 그는 다시 삶을 의욕했고, 의욕하는 그 순간엔 죽음과도 같은 고통조차도 긍정할 수 있었다. 그는 부활했고 창조의 의지로 불탔다. 

 

니체는 고통에 짓눌리는 자기 존재가 "갈기갈기 찢긴 디오니소스"와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삶은 결코 고통에 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태어나고 파괴로부터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영원회귀일 것이다.

 

불멸하기 위해서는 비싼 보상을 치러야 하는 법이다. 즉 불멸을 위해서는 살아생전에 여러 번 죽어야 하는 법이다. <이사람을 보라>

 

영원회귀는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죽음과 재생의 디오니소스 신화다.

디오니소스야말로 영원회귀의 신이며, 영원회귀 자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믿었다. 니체의 무시무시한 언어들은 우리 내면의 어두운 동굴 속 불 뿜는 용을 거꾸러뜨리고, 우리 안의 신화적인 힘에 호소력을 발휘해 그 힘을 밖으로 불러낸다. 니체의 언어를 통해 디오니소스의 귀환과 부활은 낡은 신화에서 벗어나 생생한 현설이 된다.

 

그리고 이 귀환과 부활의 반복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를 출렁이게 하는 힘들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삶을 이끌어가는 무한한 재생의 동력이다.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소멸하지 않고, 꺾인 뒤에도 다시 일어서는 더 많은 힘을 향한 의지, 그것이 권력의지다. 그리하여 권력의지는 삶의 본질이고 영원회귀는 삶의 형식이다. 질병과 고통의 영원한 반복은 권력의지를 시험하는 시련이다. 영원회귀 앞에서 짓눌리지 않고, "좋다, 한 번 더"라고 외치는 것, 어떤 고통도 어떤 시련도 회피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수락하는 것, 그리하여 매번 영원회귀 자체와 결전을 벌이는 것, 그것이 권력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