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가득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남기
프롤로그
새의 깃털이 주는 교훈
첫째, 검은 백조는 '극단값'이다. 극단값은 과거의 경험으로는 그 존재 가능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대 영역 바깥에 놓여 있는 관측값을 가리키는 통계학 용어다. 극단값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과거의 경험으로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검은 백조는 극심한 충격을 안겨 준다. 셋째, 그 존재가 사실로 드러나면, 인간은 적절한 설명을 시도하여 검은 백조를 설명과 예견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요컨대 희귀성, 극도의 충격, 예견의 소급 적용, 이 세 가지가 검은 백조의 속성이다. 우리는 몇 마리 되지 않는 검은 백조로써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특정 사상과 종교가 발흥하는 이유, 역사적 사건들 사이의 역동적 관계, 인간 각자의 삶에 중요한 요소 등등.
내 관심을 끄는 현상은 우리가 검은 백조란 없다고 가정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불확실성을 측정하는 도구를 갖고 있다고 착각해 왔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무작위성에 대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맹목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대체 심대한 결과를 낳을 증거가 명명백백한 굵직한 사건들은 도외시하고 어째서 사소한 일들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우리가 모르는 것
검은 백조 원리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많은 경우, 검은 백조 현상은 예상 밖의 일이기 때문에 발생하며 또 그래서 그 효과가 증폭되는 것임에 유의하자.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니, 이보다 기이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그것을 파악했다는 사실을 상대가 알게 될 경우 우리가 알아낸 것은 곧 현실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이런 전략 게임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진정 일어나지 않을 일이 될 수 있다.
'알고 있는 것'에서는 어떤 위험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빈껍데기 전문가
극단값을 예견하지 못하는 것은 곧 역사의 진행 방향을 예견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역사적 사건들을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검은 백조에 지배되는 환경에서 우리는 예측 능력이 없는데다가 예측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대체로 모르고 있다. 실제 드러난 예측 능력을 보면 그들은 경험적 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에 소위 전문 분야에서도 결코 일반 대중보다 더 많이, 더 깊이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이 일반인보다 나은 점은 그럴싸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 더 심각하게는 복잡한 수학 모델로 보통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능력,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정장 차림을 좋아한다는 것뿐이다.
'사회과학'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대부분의 발견이나 발명은 의식적으로 계획하거나 설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얻어진다. 이것들이 바로 검은 백조다. 따라서 탐사나 경영은 하양식 계획에 의존하는 대신 기회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최대한 이것 저것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나 애덤 스미스의 후예들과 견해가 다르다.
자유시장이 작동하는 것은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 혹은 인센티브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 공격적인 시행착오 끝에 행운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공의 전략은 간단하다. 최대한 집적거리라. 그리하여 검은 백조가 출몰할 기회를 최대한 늘리라.
배우는 법을 배워라
인간에게는 이와 관련된 또 한 가지 장애가 있다. 그것은 아는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것이다.
마지노선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가 독일의 재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구축한 방어선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대응은 간단했다. 이 마지노선을 슬쩍 우회해서 침입한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실제적인 것에 집착했고, 자신들의 안전에 지나치게 골몰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구조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실, 오직 사실만을 머리에 우겨 넣는다. 우리는 추상적인 것을 얕잡아 본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왜 이런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려면 상투적인 지식을 전복시켜, 이런 지식이 복잡다기하며 회귀적인 속성이 갈수록 강해지는 현대 사회의 상황에 들어맞지 않음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 주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을 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것일까?
통념과 달리 많은 증거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적게 생각한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생각하고 있나'를 생각하는 순간일 것이다.
또 다른 배은망덕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의명분에 헌신한 순교자들도 있다. 그들의 공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우리는 그들의 대의에 대해 알지 못한다. 바로 그들의 대의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이가 항공기 조종실 출입문에 방탄장치와 자동 잠금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하는 법안을 발의 하여 통과 시켰다면 항공사 직원들은 성가신 일거리를 던져 준 이 법안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이 법안 덕택에 9.11 테러는 사전에 방지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법안을 발의한 이 장본인에 대해서는 그 흔한 동상 하나 세워지지 않는다. 그가 사망했을 때에는 부고 기사조차 없을것이다. 그가 도입한 조치가 귀찮고 돈만 낭비한다며 유권자들은 항공사 직원들과 한편이 되어 그를 의원 선거에서 떨어뜨려 버렸을 것이다.
다시 9.11 사태 이후 누가 세상의 인정을 받았는가? 뉴욕증권거래소 회장 리처드 그라소는 '뉴욕 증시를 보호했다'는 명분으로 엄청난 보너스를 받았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뉴욕 증시의 개장을 알리는 벨을 누른 것뿐이었다. 텔레비전은 '공정한 매체'가 아니라 검은 백조에 눈을 감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이러한 예는 앞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의 가치'를 살펴보면서 알게된 '거꾸로 된 논리'이기도 하다. 수습보다 예방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예방 행위에 보상이 돌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책은 이름 없는 공헌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껍데기에만 집착하는 족속인가 우리 인간은 얼마나 불공평한 존재인가.
인생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사건
이 책은 불확실성을 다룬다. 나는 희귀한 사건을 불확실성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나는 정상적인 것에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친구의 성격을 알려면 장밋빛 일상생활이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
사회생활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희귀하지만 인과관계가 분명한 충격과 비약에 의해 일어난다. '정상적인 것', 특히 '정규분포'를 전제로 추론을 전개하는 대부분의 사회 연구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정규분포란 큰 편차를 무시하거나 다룰 수 없는데도 마치 우리가 불확실성을 길들이고 있다는 확신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대한 지적 사기'라 부르겠다.
플라톤과 헛똑똑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 '개연성 없는 것', '불확실한 것'을 같은 의미로 혼용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서로 다르다. 위의 개념들은 앎이라는 의미의 모호한 영역을 구체적으로 또는 세밀하게 구분한 '엉터리' 범주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즉 '앎의 결핍(한계)'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앎의 정반대'다.
어떤 목적지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지도를 혼동하는 경향, 즉 순수하고 정교한 형식에만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나는 플라톤적 태도라고 부른다. 수학의 삼각형, 사회적 개념, 유토피아, 민족성 등등. 플라톤적 태도가 우리의 이해 능력을 높여 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디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플라톤적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어떤 특정한 상황에 적용하게 되면 오류로 나타난다. 문제는 1) 플라톤적 도식이 어디서 오류를 빚을지 사전에 알 수 없고(오류가 발생한 후에야 알게 된다), 2) 이로 인한 실수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나는 플라톤적 태도가 복잡한 현실과 만나는 폭발성 있는 경계지대를 플라톤 주름지대라고 부른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간극이 넓어서 위험한 지점, 바로 그곳이 플라톤 주름지대다. 검은 백조는 바로 이곳에서 잉태된다.
공허한 이론은 피할 것
강단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판별하지 못한다.
출발점
오늘날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강력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과업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남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이리저리 꿰맞춘 것이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자신의 주장에 부합되는 증거만 찾는 사람은 어느새 그 증거들로 인해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 인간의 관습적 사고와 반대로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극단적인 것, 미지의 것, 개연성이 극히 희박한 것(이때의 개연성이란 우리의 현재 지식에 의거한 판단일 따름이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우리는 익히 알려진 것, 반복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사소한 이야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나는 인간 지식의 진보와 성장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바로 그 진보와 성장 탓에 미래는 갈수록 예측이 어려워질 것이며, 인간의 본성과 사회과학은 이것을 감추는 데 진력하고 있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1부 움베르트 에코의 반서재
이미 읽은 책은 아직 읽지 않은 책보다 한참 가치가 떨어진다. 서재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관련된 책을 채워야 한다. 진정 알면 알수록 읽지 않은 책이 줄줄이 늘어나는 법이다. 읽지 않은 책이 늘어선 대열, 이것을 반서재라 부르기로 하자.
우리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개인 자산으로 취급하여 지키고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지식은 사회적 서열을 표시하는 장식물이다. 이런 지식관은 이미 알려진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서재에 대한 에코의 관점과 상반되며, 우리의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편견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자신이 배우지 않은 것, 경험하지 않은 것을 적은 '반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돌발 사태의 가능성과 읽지 않은 책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검은 백조가 나타난다.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여기, 아직 읽지 않은 책에 주목하고 자신의 지식을 대단한 자산이나 소유물 혹은 자존심 향상을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을 회의적 경험주의자라고 부르기로 한다.
1장. 한 경험론적 회의주의자의 도제 시절
역사와 삼중의 불투명성
역사와 만나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은 세 가지 증상을 겪는다. 이 세 가지 증상을 나는 삼중의 불투명성이라고 부른다.
1) 이해의 망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꿰고 있다고 저마다 생각하지만, 세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다.(아니 무작위적이다)
2) 사후 왜곡. 우리는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야 관련 사건들을 돌아보게 된다.
3) 사실 및 정보에 대한 과대평가와 권위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겪는 장애로 인한 것들. 특히 그들이 '범주'를 만들어 낼 때, 즉 '플라톤적 사고를 펼칠 때' 일어난다.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첫 번째 불투명성은 사고의 병리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제보다 이해하기 쉽고 설명하기 쉬우며 결국 예견하기도 쉽다는 병리적 사고를 말한다.
이런 오류는 자신의 희망을 사고의 근거로 삼는 오류, 즉 희망에 눈먼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여기에는 지식의 문제도 개재되어 있다. 말하자면 레바논 분쟁은 워낙 역동적이어서 쉽게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할 수 없었는데도 사람들이 사태를 바라보는 방식이 항상 고정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는데도 그들은 그 사건들이 예상 밖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일단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그 뒤에는 그것이 뜻밖의 것이 아닌 듯이 보이게 된다. '소급적 개연성'이라는 것이 작용해서 그것을 희귀한 사건이 아니라 있을 법했던 사건으로 이해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뒷날 나는 비즈니스에서의 성공이나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도 이와 똑같은 망상이 작용하는 것을 목격했다.
역사는 기어가지 않는다, 비약한다
레바논 분쟁을 겪으면서 나는 사건의 발생에서 보이는 무작위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그야말로 탁월한 '설명 기계'라는 생각을 강하게 굳히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거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고 갖가지 현상을 풀이해낼 수 있는 반면에 '예견 불가능성'은 일절 용납하지 못한다.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는데도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나설수록 설명은 더욱 그럴듯하게 들린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제기된 신념이며 설명들은 논리적으로 조리 있어 보이며, 모순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레바논 분쟁에 몇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다. 관용적 삶의 귀감으로 여겨졌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야만의 전형으로 돌변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예견할 수 있는가? 게다가 변화는 또 왜 그리 급박하게 일어났는가? 처음에 내 생각은 레바논 전쟁이 워낙 예측하기 어려운 데다 레반트 주민들이 몹시 복잡한 족속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역사적 대사건들을 살펴보면서 내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다. 예상 밖의 행동은 결코 레반트 지방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과거의 사건들을 아무리 꼼꼼하게 파고들어도 역사의 속마음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역사를 이해한다는 착각을 허용할 뿐이다.
역사는 기어가지 않는다. 사회도 기어가지 않는다. 역사와 사회는 비약한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예견 가능하도록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세계를 믿고 싶어한다.
이것을 깨달은 후 내게는 신조가 하나 생겼다. 우리는 '뒤돌아보는 쪽으로 발달된 거대한 기계'라는 것, 인간은 자기기만에 탁월한 존재라는 것이다.
친애하는 베를린 일지 : 뒤로 가는 역사에 대하여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와 관계있는 수백만개, 심지어 수십 억 개의 사실들이 쏟아진다. 그렇지만 일이 터지고 나면 우리는 그 가운데 단 몇 개의 사실들만을 가지고 사건을 이해해 버린다.
나는 헤겔, 마르크스, 토인비, 아롱, 피히테 등의 이론들을 웬만큼 소화할 만큼 변증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역사에 어떤 법칙이 있어서, 모순(혹은 대립)의 방식을 통하여 인류를 고도의 사회로 상향 발전시킨다는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사고는 레바논 전쟁 당시 내 주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것이었다.
샤이러의 책을 통해서 철학과 역사 이론의 대부분을 배웠다고 이야기 한다. 덧붙여 나는 이 책이 앞으로 전개될 상황과 지나간 과정의 차이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서도 가르쳐 준다고 말해 준다.
어떻게 가르쳐 준다는 것인가? 간단하다. 이 책은 사건을 사후에 정리한 것이 아니라, 사건의 발생 자체를 서술한 일지이기 때문이다.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전개되는 역사 속에 살던 가운데 똑같이 역사의 전개를 경험하던 사람의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책을 읽으며 다음에 일어날 사건을 영화 장면처럼 떠올려 보려고 애썼지만 (막상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그렇게 단순 명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샤일러의 일지는 불확실성의 역동성을 감지하는 연습장이 된 셈이다. 내 꿈은 철학자였지만, 직업 철학자들이 어떻게 먹고사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 꿈이 나를 모험(불확실성을 실행에 옮기는 모험)으로 이끌었으며, 또한 철학 대신 수학과 과학 쪽으로 이끌었다.
택시 기사에게 배운 것
세 가지 불투명성 중 세 번째 요소, 즉 학습의 저주를 살펴보자. 할아버지는 국방장관을 지내다가 전쟁 초기에 내무장관 겸 부총리를 맡은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런 지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그의 자동차 기사인 미하일보다 사태를 조금도 더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학식이 높고 정보도 훨씬 더 많이 접하는 사람들이 택시 기사보다 예견력이 뛰어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뒤쳐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택시 기사들은 자신들이 배운 사람들만큼 사태를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엘리트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신문들 사이에 중복되는 부분이 워낙 많아서 신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점점 줄어든다. 그런데도 살마들은 모든 사실 하나하나를 외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모든 새로운 인쇄 자료를 읽고 모든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다음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명쾌한 답이 그안에 담겨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정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끼리끼리
언론인들이 반드시 동일한 견해를 중심으로 편이 갈리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분석틀을 중심으로 편이 갈리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점이다. 언론인들은 상황을 범주화하고, 현실을 그 범주에 맞춰 재단해 버린다. 현실을 앙상한 형상에 끼어 맞추는 플라톤적 태도가 여기서도 발휘되는 것이다.
범주 나누기는 인간의 편의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런데 범주 나누기는 모호한 경계선에 대한 고려나 그 구분선의 재조정을 차단시키면서 범주 자체를 고정시켜 버리는 병리적 결과를 낳는다. 독립적인 시각을 가진 100명의 언론인이 있다면 우리는 100가지 견해를 입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판에 박힌 방식으로 기사를 쓰도록 만드는 과정이 작동하면서 이런 다양성이 급격히 위축되고 만다. 그리하여 견해도 하나로 수렴되고,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항목도 동일해진다.
내가 말하는 범주 나누기의 자의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면 정치에서 편 가르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한번 보기 바란다. 지구를 방문한 화성인에게 왜 임신중절을 허용하자는 정치인들이 사형 제도에는 반대하는지, 또 왜 낙태를 허용하자는 쪽에서는 세금 인상에는 찬동하면서 군비 확장에는 반대하는지, 또 왜 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이 개인의 경제적 자유에는 반대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범주 나누기는 현실의 복잡성을 단순화시켜 버린다. 그것은 플라톤주의의 발현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단순화는 불확실성의 원천들을 배제해 버림으로써 파국을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급진 이슬람교도를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선 여러분의 동맹이라고 판단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비행기 두 대가 맨해튼 도심을 향해 돌진하기 전까지 그들의 성장을 돕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와튼스쿨에서 '효율적 시장'이라는 아이디어에 충격을 받았다. 효율적 시장 이론에 따르면, 시장 가격은 모든 가용 정보를 자동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에 유가증권 거래에서 수익을 거둘 길이 없다. 공표된 정보는 특히 사업가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가격은 그러한 모든 정보를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백만 명이 공유하는 뉴스는 당신에게 아무런 이점도 주지 않는다. 정보를 입수한 수천 수억 명의 사람들이 이미 해당 유가증권을 매입했을 것이며 따라서 가격을 올려놓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나는 비즈니스 세계의 세세한 것들에서 어떤 흥미로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천박하고 따문하고 거만하고 탐욕스럽고 무지하고 이기적이고 지겨울 뿐이었다.
쇼는 어디에서 벌어지는가?
내가 세계 역사상 최강 국가의 손꼽히는 비즈니스스쿨에서 본 바에 따르면, 세계 최강 기업의 경영진들이 그곳에 와서 자신들이 돈벌이한 이야기를 떠들어대는데, 그 사람들 역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할 가능성이 짙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 마음속에서 그것은 가능성 이상이었다. 인류의 인식론적 오만의 무게에 등골이 묵직해질 정도였다.
내 연구 주제였던 고도로 개연성이 낮지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요행이 쌓여 얻은 결과에 도취되는 것은 대기업 경영지들만이 아니었다. 이름 있는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검은 백조를 비즈니스에서의 행운과 불운의 문제에서 지식과 과학의 문제로 돌려놓았다. 어떤 과학적 결과물들은 고도로 개연성이 희박한 사건들의 충격을 평가절하함으로써 실생활에서 무용지물이 될 뿐 아니라 그중 상당수는 검은 백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아이디어였다.
3.3kg 살찐 이후
1987년 10월 19일('검은 월요일')은 심각한 금융 재난이 터진 날이었다. 역사상 최악의 주가 폭락이었다. 정신적 외상이 더욱 심했던 까닭은 우리가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플라톤주의의 경제학자들과 손잡고 (그들의 유치한 정규분포 방정식을 이용하여) 거대 규모의 충격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최소한 예견하거나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시점에 재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연코 검은 백조였다.
금융분석가는 불확실성에 관한 수학적 모델을 금융(혹은 사회경제적) 데이터와 복잡한 금융 도구들에 적용하는 산업과학자다. 다만 내가 맡은 금융분석가의 역할은 정반대였다. 나는 수학적 모델들의 허점과 한계를 파고들어 이 모델들이 실패하는 플라톤 주름지대를 찾아내고자 했다. 나는 내가 시장가격을 예측하는데 완전히 무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인데, 다만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고 또 자신들이 거대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역사철학과 인식론(지식에 관한 철학) 모두 시계열 데이터에 대한 경험주의적 연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시계열 데이터란 시간에 따라 연속되는 숫자들로 단어 대신 숫자가 들어 있는 일종의 역사 문헌이다. 숫자는 컴퓨터로 처리하기 쉽다. 역사적 자료에 대한 연구는 역사가 뒤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해주며, 또 역사가 몇 개의 단어로 설명되는 것보다 실은 훨씬 더 난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식론, 역사철학, 통계학 등은 모두 진실을 이해하고, 그 진실을 낳은 메커니즘을 탐구하고, 역사적 사건에서 우연적인 것을 제거하고 규칙을 분리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몰두한다. 다른 점을 말하자면 서로 다른 빌딩에 산다는 것뿐이다.
퍽 유어 머니
퍽 유어 머니는 노예 계약에서 벗어나서 빅토리아시대 신사처럼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돈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완충장치다. 월급에 목을 매지 않고 새로운 직업을 선택할 자유를 줄 만큼은 되는 돈이다.
리무진을 모는 철학자
"저는 회의적 경험주의자이고 게으른 독서가이며, 한 가지 아이디어를 깊이 파고드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이랍니다." 그러나 나는 리무진 운전기사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2장. 예브게니아의 검은 백조
예브게니아는 마침내 자신의 작품 <회귀>의 원고 전체를 인터넷에 올렸다.
그녀의 책은 문학사에서도 보기 드문 엄청나고도 기묘한 성공을 거두었다. 예브게니아의 책이 바로 검은 백조다.
3장. 투기꾼과 창녀
예브게니아가 성공한 환경은 '극단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환경 덕분이다.
최선(혹은 최악)의 충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내게 해준 '충고'들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것은 겨우 두어 개뿐이다. 나머지는 그저 말에 불과했다. 그 충고라는 것에 대게 "좀 더 균형 있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주문이 꼭 들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검은 백조 아이디어와 모순된다. 그러나 경험적 현실은 결코 '균형 잡혀' 있지 않으며, 현실의 '합리성'은 결코 합리성에 대한 얼치기 식자들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진정한 경험주의는 현실을 최대한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또 진실에 충실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거나 그 결과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돌이켜 보면 가장 귀중한 충고는 사실 나쁜 충고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분명한 겨로가를 낳은 충고가 되었다. 이 충고는 내가 검은 백조의 역학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와튼스쿨 2년차 학생 하나가 내게 '규모가변적인' 직업, 다시 말해서 노동시간에 따라 급여를 받지 않는, 따라서 노동의 총량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 직업을 택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직업을 구분하는 아주 간단 명료한 기준이었으며, 거기서부터 불확실성의 여러 유형들 사이의 구분을 일반화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를 중요한 철학적 문제, 즉 검은 백조의 학문적 명칭인 귀납적 진리의 문제로 이끌어 주었다. 이리하여 나는 그때까지 논리적 차원의 난관으로만 생각했던 검은 백조 현상을 수월하게 활용할 수 있는 문제 해결 수단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경험적 현실의 맥락 속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직업의 세계를 생각해보자. 치과 의사, 컨설턴트, 마사지사 같은 직업은 규모가변적이지 않은 직업이다. 일정한 시간에 받을 수 있는 환자나 고객의 수에 상한선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직업들에서는 연수입의 절대 액수가 얼마든간에 증가율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런 직업에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들만 일어난다. 여기서는 검은 백조가 출현하지 않는다.
나는 노동을 파는 '노동' 인간과 거래나 약간의 노동의 형태로 지적 산물을 파는 '아이디어' 인간을 구분했다.
이 차이는 추가적인 노동이 전혀 없이도 수입을 열 배, 백 배 늘릴 수 있는 직업과 하나를 더 얻을 때마다 그만큼의(유한한 자원인) 시간과 노력을 또 투입해야 하는 직업 -다시 말해서 중력에 종속된 직업-의 차이다.
규모가변성에 주목하라
그 학생의 충고가 나쁜 충고였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직업의 선택이라는 측면에 한정하면 그것은 실수였다.
내가 충고하는 입장이라면, 나는 규모불변적인 직업을 선택하라고 조언해 줄 것이다. 규모가변적인 직업은 성공하는 경우에만 좋다. 그러한 직업은 경쟁이 극심하고, 괴물 같은 불평등을 낳고, 너무나 우연적이며, 노력과 보상 사이의 불일치가 너무 크다. 몇몇이 파이의 대부분을 차지해 버리고, 나머지 대다수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빈털털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
직업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첫 번째 범주는 평범한 것, 평균적인 것, 중도적인 것에 의해 추동된다. 여기서 평범한 것이 집단적으로 과실을 얻는다.
규모가변성의 출현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 이전인 오페라 가수 자코모의 운명을 보자. 자코모의 시절에도 파이가 불평등하게 분배되긴 했지만, 참을만한 정도였다. 이제 녹음의 효과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엄청난 불평등을 초래한 발명이었다. 이제 시골 피아니스트들은 최저 임금에 허덕이며 별 재능도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진화는 규모가변성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사회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문자의 발명이라 생각한다. 정보를 저장하고 재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문자는 위대하지만 불평등한 도구다. 그것은 한층 더 위험하고 고약한 인쇄기의 발명으로 인하여 더욱 증폭되었다. 인쇄기의 힘 덕분에 책이 국경을 넘어 전파되면서 승자 독식 사회가 급속히 형성되었다. 책의 확산이 불평등하다니, 무슨 소리인가? 문자 발명은 창작자가 에너지를 추가로 지출하지 않고도 이야기와 사싱을 정확하면서도 무한히 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야기와 사상의 전파를 위해 창작가가 살아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떠돌이 음유시인들의 시대에는 누구나 청중을 가질 수 있었다. 이야기꿈들은 제빵사나 구리세공사와 다를 바 없이 제 몫의 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경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을 위협할 일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극소수의 사람이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나머지 대다수는 한푼도 얻지 못한다.
이와 똑같은 메커니즘에 의해 영화의 등장은 동네 배우들을 대체하여 그들의 사업을 문 닫게 만들었다. 영화의 성공을 만드는 것도 비선형적 행운의 법칙이다.
영화의 성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일종의 감염 현상이다.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폭넓은 문화 상품들이 그렇다. 사람들이 특정한 예술 작품을 사랑하는 것은 예술 그 자체에 매료되어서만이 아니라 특정 집단에의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방을 통해 또 다른 모방자들과 가까워진다. 모방은 곧 고독과의 싸움이다.
대성공을 일으키는 요인을 예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규모가변성과 세계화
유럽보다 미국은 훨씬 더 창의적이다. 거리낌 없이 고정관념을 뒤집어 보거나 마음껏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에 대해 미국은 그들보다 훨씬 더 너그럽다. 오늘날 세계화 덕분에 미국은 창의적인 일들, 말하자면 컨셉트나 아이디어의 생산에 더욱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야말로 생산에서 규모가변성이 큰 부분들이다. 규모가변성이 낮은 직업들은 분리하여 해외로 수출해 버린다.
아이디어 세대들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기회와 행운이 점점 더 크게 작용하게 되는 것은 아이디어에 큰 보상이 주어지는 세계경제의 어두운 측면이다.
평범의 왕국으로의 여행
규모가변적인 것과 규모불변적인 것 사이의 구분은 불확실성의 두 가지 범주, 즉 두 가지 유형의 무작위성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만일 포본 집단의 수가 1만 명이라면 이 사람이 총 몸무게에 기여하는 부분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평범의 왕국이라는 이상향에서는 개별 사건 하나하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기 어렵고 집단적으로만 의미를 지닌다. 이 왕국을 지배하는 최고의 법칙은 만약 표본이 크다면, 어떤 단일한 사례가 전체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일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극단의 왕국
책 판매 집계를 살펴 보면 작가 1000명을 뽑아서 그들의 책 판매량을 집계해 보라. 그 작가중 해리포터 작가인 J.K. 롤링이 있다면....
이러한 양상은 학술논문 인용 빈도, 미디어 노출 정도, 수입, 기업의 규모 등등에도 적용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이러한 문제들을 사회적인 문제라고 부르기로 한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극단의 왕국에서는 불평등이 극심해서 하나의 관측값이 불균형한 비율로 전체에 충격을 가한다.
몸무게, 키, 칼로리 섭취 등은 평범의 왕국에 속하는 것들인 반면에 부는 그렇지 않다. 사회적 사건들은 대부분 극단의 왕국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양은 정보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질 수가 없다. 은행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은 중요한 무엇이긴 한데,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물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에너지 소비를 동반하지 않고도 일체의 가치를 취할 수 있다. 돈은 그저 숫자다!
주목할 점은 현대 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쟁도 평범의 왕국에 속했다는 사실이다. 적을 한 사람 한 사람 처치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는 전사자 수는 많지 않았다.
이제 검은 백조의 함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극단의 왕국은 검은 백조를 낳을 수 있으며, 실제로 낳는다.
극단의 왕국와 지식
이처럼 이러한 차이(극단의 왕국과 평범의 왕국 사이의 차이)는 사회적 공평성과 사건들의 역학 모두에 심각한 파장을 불러온다. 이번에는 이 차이가 인간의 지식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러분이 극단의 왕국에 속하는 양을 다루고 있다면 어떤 표본으로부터 평균값을 산정해 내기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관측값이 평균값을 좌우해 버리기 때문이다. 극단의 왕국에서는 하나가 전체에 터무니없이 큰 영향을 쉽게 미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자료에서 이끌어 낸 지식은 의심해야 한다. 이것은 두 종류의 무작위성을 구분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불확실성 시험법이다.
평범의 왕국에서 자료를 바탕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은 정보가 주어짐에 따라 빠르게 증가한다. 그러나 극단의 왕국에서 지식은 느리게 증가하며 축적된 자료와 어긋나기 일쑤다.
극단적인 것과 평범한 것
무엇이 사건을 지배하는가
평범의 왕국은 우리가 집단적인 것, 진부한 것, 명백한 것, 예상되는 것의 지배를 견뎌야 하는 곳이다. 반면에 극단의 왕국은 우리가 단 하나의 것, 우발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예상치 못한 것의 난폭한 지배에 내맡겨져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비참한(혹은 운이 좋은) 결과를 겪는 것은 이 둘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극단의 왕국이 곧바로 검은 백조를 뜻하지는 않는다. 희귀하고 심대한 결과를 초래하지만 예측 가능한, 특히 (통계학자, 경제학자, 정규분포곡선 찬양론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에) 그런 사건들에 늘 대비하고 있는 사람들, 그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예측 가능한 사건들도 있다. 그것들은 유사 검은 백조다. 과학적으로 웬만큼 추론해 낼 수도 있다. 이들의 출현을 알면 돌발 사건으로 인한 경악을 완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희귀하지만 예상할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회색' 백조라고 할 만한 이런 사건들을 특별히 만델브로 무작위라고 부른다.
이것은 흔히 규모가변성, 지수 법칙, 척도 불변, 레비 안정성, 파레토-지프 법칙, 율의 법칙, 파레토 안정과정, 프렉털 법칙 등으로 불리는 현상을 생성시키는 무작위성을 포괄하는 범주다.
평범의 왕국에서도 흔치는 않지만 심각한 검은 백조를 경험할 수 있다. 어떻게? 뭔가가 무작위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결정론적으로 생각할 때 느닷없이 돌발 사건이 발생한다. 또 상상력이 결핍된 탓에 땅굴 파기에 매달려 불확실성의 원천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4장. 천하루째 날에 살아 있기
무엇이 우리를 원형의 검은 백조 문제에 데려다 줄까?
지위가 먹히는 곳, 정부 기관, 대기업 같은 곳에서 일하는 권위적이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 정치평론가나 '밝은 미래'를 들먹이는 어떤 단체의 회장, 모유의 효능을 단정적으로 부정하는 플라톤주의 의사나, 농담에 웃어 줄 줄도 모르는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의 교수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지식을 대단한 것인 양 여긴다.
말끝마다 '왜냐하면'을 남발하며 무작위적인 사건들에 대해 제 나름의 이론을 늘어놓거나, 설명하려 들거나, 잡담을 늘어놓는 (검은 양복에 판에 박힌 사고방식을 가진) 근엄한 표정의 사업가들과의 미팅 자리가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장난을 하는 상상을 해본다.
더 큰 규모의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 운명의 도움 따윈 필요하지 않다. 현실이 너무도 자주 신념을 재고하게 만든다. 그중 상당수는 꽤 거창하다. 사실, 지식을 추구하는 모든 시도는 우리의 직관에 위배되는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 관습적인 지혜와 기존의 과학적 믿음들을 무너뜨리는 과정이다.
인간의 정신적 결함 탓에 정작 자기 자신들도 미래에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학자들은 거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여러분과 나는 지금 사회적 지식의 현재의 상태를 조롱하고 있다. 거물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다가올 미래에 샅샅이 해부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늘 충격적 미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칠면조의 교훈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에서 귀납법의 문제, 혹은 귀납적 지식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의 예증으로서 내가 말하는 돌발적 충격의 특히 유해한 한 가지 변형된 형태를 제시한다. 우리는 특정한 사례들에서 보편적인 결론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이끌어 내는가? 우리는 우리가 아는 바를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주어진 대상들이나 사건들에서 관찰한 바가 그것들의 다른 속성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관찰을 통해 얻어진 일체의 지식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칠면조가 한 마리 있다. 주인이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줄 때마다 '친구'인 인간이라는 종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인생의 보편적 규칙이라는 칠면조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앞둔 어느 수요일 오후, 예기치 않은 일이 칠면조에게 닥친다. 칠면조는 믿음의 수정을 강요받는다.
칠면조는 어제까지의 사건들에서 내일 있을 사건을 알아낼 수 있는가? 칠면조는 관찰을 통해 배웠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방법이다.
이 문제는 경험적 지식 자체의 성질을 겨냥하고 있다. 과거에 내내 통했던 것이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며,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운 것은 최선의 경우에 쓸모없거나 최악이 경우에는 치명적인 파국을 낳는다.
주목할 것은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사람들은 자신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돌발 사건이 발생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돌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예견하려고 한다.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보지 못한다. 미국의 주식 거래자들은 매년 10월만 되면 또 다른 시장 붕괴 가능성을 열심히 예측하려 하지만, 첫 번째 사건에 전례가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다.
우리가 검은 백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는 과거의 관찰을 미래를 결정짓는 것, 혹은 미래를 표상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바보 되기 훈련
오랫동안 꾸준한 수익을 올리던 은행가가 단 한 번 운명의 장난으로 모든 것을 잃는 경우도 같은 이치다.
그들이 보수적으로 보이는 진짜 이유는 이들의 대출금이 날아가 버리는 일이 드물게, 극히 드물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대출 사업이란 것이 풋내기들이 벌이는 사업이라는 것을, 그들의 모든 수익이 매우 위험천만한 게임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해 여름의 짧은 기간으로 충분했다. 그때까지 은행은 자기 자신들에게 자신들은 '보수적'이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은행업은 보수적이지 않다. 파국적인 큰 손실의 가능성을 양탄자로 덮어 버림으로써 현상적으로는 훌륭하게 스스로를 기만해 왔다.
'보수적인' 은행들은 이윤이 생길때는 자신들이 이익을 챙긴다. 그러나 위기에 빠지면 그 비용을 우리 납세자가 낸다.
뱅커 스트러스트 은행 최고 경영진은 1982년의 교훈은 금방 까맣게 잊고는 매 분기마다 수익을 발표하며 자신들이 얼마나 현명하고 신중하게 수익을 올렸는지 자랑스레 설명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거둬들여다는 그 수익이 언젠가 불시에 되갚아야 할 운명과 맞바꾼 현금 봉투였다는 것이다. 제발 검은 백조에 덜 취약한 다른 사업들 앞에서 우월한 척하지 말라.
검은 백조는 지식에 상대적이다
칠면조 입장에서, 천하루째 되는 날은 검은 백조다. 그러나 도살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검은 백조가 아니다. 검은 백조의 출현은 여러분의 예상에 상대적이다. 우리는 (능력이 된다면) 과학을 이용하여, 혹은 열린 마음을 견지함으로써 검은 백조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사건들이 반드시 순간적으로 발발하지는 않는다.
검은 백조 문제의 간략한 역사
칠면조 문제(귀납법의 문제)는 사실 매우 오래된 문제인데, 무슨 까닭인지 철학자들은 흔히 이를 '흄의 문제'라고 부른다.
경험주의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회의주의 학파 사람들은 당대의 믿음을 의심함으로써 얻어지는 지적인 치료법을 추구했다.
목적 없어 보이는 시행착오에 의존하는 경험주의적 의학 방법론은 계획과 예측에 관한 나의 아이디어들, 즉 검은 백조에서 어떻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알 가젤
'과학적' 지식에 대한 알 가젤의 공격으로 아베로에스와의 논쟁이 시작된다. 이 논쟁이 있은 뒤 아랍의 신학자들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알 가젤의 비판을 수용하고 확대해석하여 인과적 사고를 신에게 맡겨 버리는 쪽을 선호하게 된다.
많은 사상가들이 훗날 아랍 세계가 과학적 방법론을 방기한 것을 두고 알 가젤의 지대한 영향력을 탓한다. 알 가젤의 사상은 수피 신비주의에도 연료를 공급해 주게 되는데, 이 교파의 숭배자들은 신과의 영적 교감을 시도하며 세속과의 일체의 관계를 단절한다. 이 모든 것이 검은 백조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회의주의자들, 종교의 벗
고대 회의주의자들은 '학습된 무지'를 정직한 진리 추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반면에, 후대의 중세 회의주의자들은 모슬렘이든 기독교도든 간에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 부르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회의주의를 채택했다. 검은 백조 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과 귀납적 지식에 대한 우려, 그리고 회의주의는 종교적 주장의 호소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검은 백조를 믿는 회의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종교에서 평온을 얻었다.
나역시 박식함을 중요하게 여긴다. 박심함은 진정한 지적 호기심의 징표다. 자연히 열린 마음과 타인의 사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딸려 나온다. 무엇보다도 박식한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며, 그러한 불만족은 플라톤적 태도, '5분 경영학'의 단순화, 또는 과도하게 축소된 특정 분야 학자의 속물성을 차단해 주는 방패 구실을 해준다. 단언하건대, 소양 없는 학위는 재앙을 낳는다.
칠면조가 되기 싫어!
나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에서 회의주의자다. 말하자면 내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어떻게 하면 칠면조 꼴이 되지 않도록 의사 결정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눈을 감은 채 길을 건너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평범의 왕국에서 살기를 바란다
우리가 평범의 왕국에 살고 있다면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검은 백조라는 돌발 사건의 가능성을 배제해 버려도 되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평범의 왕국이 아니며, 따라서 검은 백조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검은 백조는 출구 없는 터널이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거기서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검은 백조를 도외시함으로써 발생하는 부수적인 문제점들
1. 보이는 것들 중에서 보고 싶은 부분에만 집중하며, 그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일반화시킨다. : 확인 편향의 오류
2. 인간은 명확한 패턴을 좇는 플라톤주의적 갈증에 부합되는 이야기로 스스로를 속인다. : 이야기 짓기의 오류
3. 검은 백조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행동한다. : 인간은 검은 백조에 대비해 프로그램되지 않았다.
4. 우리가 보는 것이 거기에 있는 전부는 아니다. 역사는 검은 백조들을 우리 눈에서 가려 버리며, 그리하여 이러한 사건들의 확률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만든다. : 말 없는 증거에 의한 왜곡
5. '땅굴 파기'에 몰입한다. : (떠오르지 않은 검은 백조를 포기한 채) 잘 정의된 몇몇 불확실성의 원천들, 즉 지나치게 명확한 검은 백조 리스트에만 집중한다.
5장. 확인 편향의 오류
"이봐, 전에 심슨하고 아침을 먹은 적이 있는데, 자기는 아무도 안 죽였다고 하던걸. 정말이야. 난 그 사람이 누굴 죽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 말이 심슨의 결백을 확증해 줄 수 있을까?
이 말은 검은 백조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할 것이며 그 말은 옳다. 여러분은 이 말을 '검은 백조가 출현할 가능성이 없다는 증거가 있다'는 말로 혼동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웬만큼 집중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이 문제를 단순화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하도록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의 불공정함 역시 왕복 여행의 오류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보수주의자들이 모두 멍청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멍청한 사람들이 대부분 보수주의자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 문제는 고질적인 것이다.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노력이 언제나 성공의 열쇠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분이 성공의 비결은 언제나 노력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말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식인 동물은 야생동물이다라는 명제와 대부분의 야생동물은 식인 동물이다라는 명제 사이에 결과론적인 차이가 없었다. 오류는 있지만, 결과의 차이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통계적 직관은 미묘한 변화가 커다란 차이를 낳는 환경에 맞춰 진화해 온 것이 아니다.
SAT 고득점자들도 엘리베이터에 우범 지역 사람이 타면 두려움을 느낀다. 한 상황에서 배운 지식과 추론을 다른 상황에 자동적으로 응용하는 능력의 부재, 이론을 현실에 응용하는 능력의 부재는 참으로 안타깝지만 우리 인간의 선천적 속성이다.
이러한 속성을 반응의 영역 특정성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여기서 '영역 특정성'이란 말은 어떤 문제에 대한 인간의 반응, 사고방식, 직관 따위가 그 문제가 제기된 맥락에 종속된다는 뜻으로, 진화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대상 혹은 사건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강의실과 실생활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어떤 정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 정보의 타당성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틀에 따라, 우리의 사회적, 감성적 시스템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스포츠 클럽에 가서 겨우 2층밖에 안 되는 곳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곧장 운동기구로 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세어 보라.
이와 같은 우리 인간의 추론과 반응의 영역 특정성은 양 방향으로 모두 일어난다. 그래서 어떤 문제들은 실생활에서는 이해되지만 교과서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반면에 어떤 문제들은 교과서에서는 쉽게 파악하는데 실생활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회적 상황에서는 아무런 노력 없이 풀 수 있는 문제인데도 그것이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형태로 제시되면 진땀을 흘린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두뇌 장치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모유의 이점에 대한 증거 없음과 이점 없음의 증거를 혼동한 오류도 마찬가지다.
증거
내가 소박한 경험주의라고 부르는 정신 작용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신이 말하는 세계, 자신이 그리는 세계를 확인해 주는 사례들만 찾는 선천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은 언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이론에 부합하는 과거의 사례들을 찾아내 그것들을 증거로 삼는다. 예를 들면, 외교관은 실패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업적'만 떠벌린다. 수학자는 수학이 사회에 도움을 준 사례들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학의 유용성을 확신시키려고 애쓴다.
부정적 경험주의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이러한 소박한 경험주의를 피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일련의 우호적인 사실들이 반드시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흰 백조를 보았다는 사실이 검은 백조가 없음을 확증해 주지는 않는다.
단 하나의 악성종양만 발견되어도 암이 있음을 확증할 수 있다. 그러나 악성종양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암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입증이 아니라 부정적인 사례들을 통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관찰된 사실들로부터 보편적 규칙을 확립하려는 시도는 틀렸다. 관습적 지혜와는 달리 우리의 지식은 칠면조가 했던 것과 같은 일련의 확증 관찰에 의해서 증가하지 않는다.
1000일의 시간이 당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 못하지만, 단 하루의 시간이 당신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일방적인 준회의주의에 대한 이러한 아이디어를 처음 개진한 사람은 칼 포퍼다. 포퍼는 다른 철학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불확실성이야말로 자신의 전공과목임을, 그리고 불완전한 정보라는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지고하며 가장 긴급한 우리 인간의 목표임을 명심하고 있는 경험주의적 의사결정자들이다.
포퍼는 이 비대칭성과 관련하여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할 수 있도록 고안된 '반증'이라는 기법을 토대로 방대한 이론을 제기했다. 포퍼의 '열린' 사회 개념은 훨씬 더 강력하고 독창적인 사상인데, 이 개념도 규정적 진리를 거부하고 배격하는 절차로 회의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포퍼의 가장 위대한 아이디어는 세계의 근본적이고 철저하고 치유 불가능한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통찰이다.
포퍼는 추측과 반박의 메커니즘을 도입했는데, 그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대담한) 추측을 세우고, 그다음에 그 추측이 오류임을 입증해 줄 사례를 찾아내기 위해 관찰을 행한다.
수열 실험
인지과학자들도 확증해 주는 증거만 찾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연구해 왔다. 그들은 이러한 약점을 확인 편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에코의 서재에 있는 이미 읽은 책들에만 집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들이 있다.
웨이슨은 실험 참자들이 마음속에 하나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설에 부합되지 않는 일련의 수열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것을 확증해 줄 사례들을 찾는 데만 몰두했다는 데 주목했다. 자신들이 처음 세운 가설을 확증해 주는 증거를 찾는 데만 고집스레 매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체스 고수들은 실제로 자신의 수의 약점에 집중한다. 이에 반해 하수들은 자신의 수를 부정하는 사례들보다 긍정하는 사례들을 찾는다. 비슷한 예로, 조지 소로스는 투자를 할때 끊임없이 자신이 세운 최초의 가설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사례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확신이며, 구태여 자신의 에고를 북돋는 신호를 찾으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생할 것이라고 믿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살인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가 무죄라고 믿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아이에게 과체중인 사람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 사람이 어떤 부족의 성원이라고 말한 다음 그 종족의 다른 성원들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해보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종족들은 모두 과체중이라는 결론으로 비약해 버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도 피부색과 관련된 일화에는 다르게 반응한다.
흄과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오로지 경험과 경험적 관찰들로부터만 일반화를 배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믿음은 관습에서 생긴다는 이들의 견해와 달리, 유아 행동 연구를 통해 경험으로부터 선택적으로 일반화를 하게 만드는 (즉, 일정 영역에서는 선택적으로 귀납적 지식을 획득하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의심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두뇌 장치가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직접 경험으로 부터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화 덕분에 우리 선조들이 배운 것들로부터 혜택을 얻기도 한다.
다시 평범의 왕국으로
그런데 우리는 선조들로부터 틀린 것들까지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리(그리고 우리의 인식 체계)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복잡하다. 얼마나? 현대사회는 한마디로 극단의 왕국이다.
신장이 수백 킬로미터나 되는 사람이 출현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우리의 직관은 이러한 사건들은 배제시켜 버린다. 그러나 책의 판매 부수나 사회적 사건의 규모와 같은 것에는 이러한 제한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았던 먼 과거에는 인간은 이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추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검은 백조가 출현하는 영역은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우리의 재빠른 추론을 하게 만드는 본능, '땅굴 파기'(소수의 불확실성의 원천, 또는 이미 알려진 검은 백조의 원인에만 몰두하는 것)를 하게 만드는 본능이 여전히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한마디로 이 본능이 우리의 질곡이다.
6장. 이야기 짓기의 오류
내가 원인 찾기를 거부하는 원인에 대하여
모든 노력에는 보상이 따르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듣게 되는 프로테스탄트 사회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마 당신은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볼수는 없었을 거요. 행운의 의미를 재검토하고 '원인'과 결과를 분리해서 바라 볼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동방의 정통 지중해 문화 속에서 자란 덕분일 거요. 순간적으로 나도 그의 해설에 귀가 솔깃할 정도였다.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요약하기를 좋아하고, 단순화하기를 좋아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환원시키기를 좋아한다.
확대해석에 단호히 반대하고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입장.
그는 원인을 발명해 내야 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인과관계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며, 사실 나 역시 순간적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는 연쇄적 사실들을 억지 설명이나 논리적 연결고리, 즉 화살표에서 벗어나서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가리킨다. 설명은 사람들을 엮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보다 기억하기가 용이해지며 납득하기가 용이해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해했다는 느낌이 증폭되는 그 순간, 이러한 습성은 과녁을 빗나간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즉 우리의 정보 집합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추론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우리는 보이는 것, 즉 우리의 정보 집합 안에 존재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그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왜곡들을 검토해 볼 것이다. 나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단순화와 그것이 검은 백조와 광폭한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지각 능력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좌우 반구 분리증이 말해 주는 것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론화하지 않기야말로 적극적인 행동이며 이론화하기는 의지를 가진 행동의 결핍, 즉 옵션 자체의 결함에 따른 결과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설명 욕구를 억제하면서 있는 그대로 사실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는(그것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쏟아야 한다. 게다가 '이론화'하기라는 병은 참으로 제어하기가 어렵다.
해부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뇌는 대상을 해석 없이 원형 그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그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
사후합리화
실험 참여자들은 먼저 선택을 한 다음에 이유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이해보다 설명에 더 능한 존재임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오른손잡이 환자의 좌반구와 분리된 우반구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한 다음 좌반구에게 그 행동에 대해 설명을 해보라고 하면 그 환자는 (사실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 분명할 때에도) 변함없이 어떤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즉 좌반구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한 다음 우반구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돌아오는 반응은 그저 "모르겠는데요."라는 밋밋한 대답뿐일 것이다. 좌뇌가 언어와 추론 능력을 관장하는 부위임을 상기하기 바란다.
우뇌는 일련의 사실들(개별적인 것, 즉 나무들)을 보는 반면에 좌뇌는 패턴(일반적인 것, 즉 숲)을 지각한다.
해석 작용을 피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인간의 뇌 기능이 종종 지각의 바깥에서 작동한다는 것이 열쇠다. 마치 호흡처럼, 해석 작용은 자동화된 통제력 바깥의 다른 활동들을 수행하면서 동시적으로 행해진다.
이론화하지 않기가 이론화하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지출하게 만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신이 추론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상태라면 지속적인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을 중단할 수 있겠는가? 또 지속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한다면 피곤하지 않겠는가?
도파민 공급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패턴 인식 능력은 뇌에 도파민이 집중될 때 증가한다. 도파민은 또한 기분을 조절하고, 뇌 내부의 보상 체계를 유지해 준다. 도파민 공급이 늘어날수록 회의주의적 태도는 감소하고 패턴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박벽은 무작위 수에서 일정한 패턴을 읽어 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지식과 무작위성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지식'이라 부르는 것(그리고 내가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의 몇몇 측면에는 일종의 병적 요소가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러한 작용에는 생리적, 신경학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 인간의 마음은 대체로 인간 신체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의 법칙
인간의 이야기 짓기 성향에 대해 더 심오한 또 다른 근거가 있다. 그것은 시스템 내에서 정보의 저장과 검색에 미치는 질서의 효과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확률과 정보 이론의 핵심 문제라고 나는 여긴다.
첫 번째 문제는 정보는 얻는 데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정보는 뉴욕의 부동산처럼 저장하는 데에도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보는 조작하고 검색하는 데에도 비용이 든다.
뇌세포는 1000억 개가 넘기 때문에 저장 능력 자체에는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정보 색인 작업이다. 크기로 인해 작업의 한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데에는 압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패턴, 즉 연쇄의 규칙을 발견하면 더 이상 전체를 다 기억할 필요가 없다. 패턴만 저장하면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책을 들여다보며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정보가 무작위적일수록 차원이 더 커지며, 따라서 요약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거꾸로, 요약할수록 더 질서 정연해지고 무작위성은 감소한다. 말하자면, 단순화를 강요하는 바로 그 조건이 세계를 실제보다 덜 무작위적인 것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
검은 백조는 단순화 작업에서 버려지는 부분이다.
예술적 작업과 과학적 작업도 차원을 줄이고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 욕구의 산물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 수조 개의 세부요소로 가득 찬 세계를 생각해 보라. 그 세계를 기술해보라. 아마 여러분은 한 가닥의 실로 세계를 직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설, 이야기, 신화, 민담 등은 모두 똑같은 구실을 한다. 그것들은 세계의 복잡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주며, 우리에게 세계의 무작위성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제공해 준다. 신화는 인간 지각의 무질서와 지각된 '인간 경험의 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한다.
실제로 심각한 심리적 질병들은 주변환경에 대한 통제력 -주변 환경에 대한 '이해' 능력- 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동반한다.
죽음을 더 잘 기억하는 법
"왕이 죽었고 왕비가 죽었다."
"왕이 죽었다. 그러자 왕비가 슬픔에 빠져 죽었다."
두 개의 정보가 하나의 정보로 통합되었다. 기억하기가 쉬워진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도 쉽다. 말하자면 패키지로 판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 짓기의 정의이자 기능이다.
좀 오래된 것들의 기억
이야기와 인과관계에 대한 집착은 차원 축소하기라는 동일한 질병의 다른 정보들이다. 게다가 인과관계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도 연대기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을 유도한다. 인과관계는 시간을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하는데,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거의 사실들 중에서 어떤 이야기에 꼭 들어맞는 것들은 더 쉽게 기억하는데 반해 그 이야기 속에서 인과적 역할이 없는 듯이 보이는 것들은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지?'라는 질문의 대답을 아는 상태에서 기억 속의 사건들을 회상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이 최신 사건을 기억하면서 이전의 기억에 이를 덧붙여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자기도 모르게 발휘하지 않는가. 요컨대 우리는 인과관계의 사슬 속에서 기억을 끄집어내고, 무의식적으로 이를 수정해 나간다. 우리는 새로 발생한 사건까지 감안하여 논리적으로 들어 맞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 짓기를 되풀이한다.
뇌의 특정 부위가 더욱 강하게 활성화되면 연결망이 두터워지는데, 이렇게 해서 기억이 견고해진다. 활성화가 될수록 기억은 더 명료해진다. 이런 과정을 '반향'이라 부른다. 우리는 기억이 견고하고 불변이며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지만, 이는 사실과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야기 짓기에 들어맞는 쪽으로 정보를 사후에 선택함으로써 기억이 더욱 생생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어떤 기억들은 만들어진 것이다.
미치광이의 이야기 짓기
편집증 증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하찮은 일도 하나하나 긁어모아 자신에 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논리를 정교하고 일관되게 만들어 낸다. 과대망상에 빠진 편집증 환자 열 명이 있다면,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 저마다 그럴듯한 10개의 풀이가 나오게 된다.
사건에 대한 주관적 풀이가 빚어내는 오류는 우리의 지각 작용 때문에 생기기도 하지만, 논리 자체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사건에 대한 단서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편집증 환자는 어떻게 완벽한 관찰과 철두철미한 논리 법칙에 따른 듯한 풀이를 해내는 것일까?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100만 가지의 설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정말로 올바른 풀이는 우리가 알 수 있든 없든 하나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과관계를 찾기를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야기 짓기의 오류를 피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검증할 수도 있고,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예견을 하면 될 것이다.
이야기 짓기와 심리 치료
이야기 짓기는 지난 사건을 다시 서술하여 예상과 기대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실제 현실보다 무작위성이 적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이야기 짓기는 무작위성이 가하는 고통을 피해 가는 치료제 역할을 한다.
(금융시장처럼) 우연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분야의 직업인들은 지나간 사건들이 남기고 간 쓰라린 상처에 더 크게 시달린다.
심장이 고동치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도가 있을까? 좀 더 나은 해결책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사태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밀하고 세세한 분석이 만능인가
뉴스 매체는 시장 변동이 생길 때마다 '이유'를 븉여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는 법이다.
'원인'은 뉴스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하고 더 손에 잡힐 듯 느껴지게 한다. 선거에서 패배한 후보의 눈앞에는 유권자의 불만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던 갖가지 '원인'이 등장한다.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 줌으로써 인과관계를 채워 넣으려는 우리의 속성을 만족시켜 준다. 온갖 풀이와 설명들이 모이는 쓰레기 집하장에서 새롭고 근사한 논리가 발견될 때까지 이런 일은 그치지 않는다.
신문은 순수한 사실만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국 '이러저러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식의 원인 진단을 했다는(혹은 새로운 지식을 축적했다는) 인상을 주도록 꾸며진 이야기를 짓고 있는 것이다.
평판에 연연하는 언론인이나 유명 지식인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명쾌하게 꿰뚫어 보지 못하게 하는 데에도 일조한다.
직감과 검은 백조
이제 검은 백조를 파악하는 일에 이야기 짓기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자. 이야기 짓기는 눈이 번쩍 뜨이는 사실만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사건 발생 확률에 대한 직감도 흐트러 놓는다.
1)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을 대홍수가 미국에서 일어날 가능성.
2) 캘리포니아에서 지진이 일어나 대홍수를 발생시켜 1000명 이상 사망자를 낳을 가능성
응답자들은 1)의 발생 확률이 2)의 발생 확률보다 낮다고 답했다. 실험 참여자들은 즉각 캘리포니아의 지진을 재난의 원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대홍수가 일어날 확률(그들 머리로 감정한 확률)이 더 높다고 답했던 것이다.
'흡연으로 인한 암' 이란 표현은 특별한 원인을 적시하지 않은 일반적 암을 가리킬 때보다 더욱 그럴 법한 것으로 느껴진다.
요컨대 우리는 검은 백조 출현을 상상하고 논의하고 걱정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검은 백조는 실제 출현할 검은 백조를 닮지 않은 것이다. 다음에 살펴보는 것처럼, 우리는 엉뚱하게도 '일어남 직하지 않은' 사건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 백조에 대한 맹목
우리가 대체로 검은 백조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지만 어떤 검은 백조는 사람들의 마음에 지나치게 작용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답은 희귀한 사건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검은 백조로, 사람들의 입에 이미 오르내리고 있어서 텔레비전에서 들을 수도 있는 검은 백조다. 둘째는 기존의 이론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검은 백조다. 첫 번째 검은 백조는 과대평가하고 두 번째 검은 백조는 과소평가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복권처럼
우리가 어떤 사건을 인지하고 일단 입에 올리면 가능성이 낮은 사건도 과대평가하는 성향이 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구체적인 확률을 알려 주지 않되 스스로 확률을 조정해 보도록 하자, 참가자들은 확률이 희박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실제보다도 더 낮게 평가했다고 한다. 즉 빨간 공과 검은 공이 들어 있는 항아리가 있되, 전체 공 숫자 중 검은 공의 숫자가 훨씬 많다. 이때 두 색깔의 공이 어떤 비율로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을 경우, 공을 꺼내는 사람은 빨간공이 들어 있는 비율이 실제보다 적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빨간 공이 들어 있는 비율을 알려 줄 경우, 예컨대 전체의 3퍼센트가 빨간 공이라는 식으로 알려 줄 경우, 참여자들은 새로 뽑는 공이 빨간 공일 확률을 실제보다 높게 예측했다.
참으로 궁금한 것이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우리 인간이 평범의 왕국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많은 사회에서 연장자들을 대우해 주는 것은 인간의 기억력이 오래가지 못함에 대한 보상이라는 사실이다. 노인들은 희귀한 사건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여 복잡한 추론 능력을 습득한 지식의 보고다.
우리는 반복을 통하여 학습하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대비하지 못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두 번 일어나지 않는 사건은 무시하다가, 일단 그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이번에는 이를 과대평가한다.
위기가 보이지 않는 안정기에는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가 일어난다. 이 시기에는 문제가 발생할 확률을 낮게 평가한다. 이윽고 위기가 도래하면, 사람들은 충격에 빠져 자산 투자를 두려워한다. 기이한 점은 포스트케인스주의자들뿐 아니라, 반대 진영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유사한 분석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밝혀낸 사실은 동일하지만 처방은 반대다. 즉 첫 번째 부류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주기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권유한 반면, 두 번째 부류의 경제학자들은 공무원들이 이런 과업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두 학파는 이처럼 주장이 서로 상충되긴 하지만, 경제가 근본적으로 불확실성에 지배받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주류 경제학파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불확실성의 원리 따위를 오히려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이들 연구는 우리가 어떤 사건의 진귀함에는 눈을 크게 뜨면서도 그 사건이 실제로 몰고 오는 충격에는 얼마나 둔감한지를 보여주었다.
런던 비즈니스스쿨의 학생들은 평범의 왕국과 같은 환경에서 일어나는 희귀 사건의 역할을 추론해 내는 데에는 능숙함을 보였다. 그러나 평범의 왕국 바깥에 존재하는 변수들이 등장하면 이들의 직관은 번번이 틀렸다. 이것은 베스트셀러 서적의 판매고나 전체 서적 판매고의 관계와 같이 확률이 낮은 사건이 몰고 올 충격을 직관으로 판단하는 데 우리가 능숙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제 다음으로 추상적 문제가 미치는 영향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지 못하는가를 살펴보자.
직감의 힘
사실 추상적인 통계 정보의 힘은 이야기가 갖는 힘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능숙한 사람도 추상적 정보로는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힘들다.
이탈리아 아기의 일화
레바논 사람들은 이런 난리 속에서도 우물에 빠진 이탈리아 아이의 운명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 숫자다." 통계란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테러리즘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지만 가장 무서운 살인자는 환경 재앙이다. 우리는 자연이 몰고 오는 피해보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피해에 더 큰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오토바이 타기
우리는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는 통계를 아무리 산더미같이 제시한다고 해도 끄덕도 않다가, 주변 사람이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고 나서야 오토바이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야기 기법을 이용하면 남들의 주의를 끌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 짓기를 잘못된 상황에서 이용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지름길
인간의 행동은 사고 유형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데, '시스템1'과 '시스템2' 즉 '경험적 사고'와 '인지적 사고'가 그것이다.
시스템1 (경험적 사고) :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의식적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병렬처리로 작동. 우리가 '직관'이라 일컫는 것. 이런 사고는 빠르기 때문에 유용하지만 우리를 심각한 오류로 몰고 가는 경우도 이따금 발생한다.
시스템2 (인지적 사고) :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라고 부르는 것.
추론 과정에서 빚어지는 대부분의 오류는 실제로는 시스템2를 작동시키면서도 스스로 시스템1을 작동시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생겨난다.
시스템1이 우리의 신속한 행동을 유도하게 하는 무기는 감정이다. 감정의 작용 덕택에 우리는 인지 시스템을 작동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뇌를 믿지 말라!
뇌에는 각각 대뇌피질과 변연계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 피하기
우리가 검은 백조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까닭은 시스템1, 즉 이야기 짓기, 직감, 감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건들의 실상에 대해 틀린 그림을 갖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일상의 일들을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현실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충분히 성찰하지 못한다. 검은 백조란 우리에게 너무 추상적인 개념으로 존재하기 때문.
평범의 왕국은 이야기 짓기가 효과를 발휘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분석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극단의 왕국에서는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우리를 속여 넘기곤 하는 과거의 경험을 믿지 말아야 하며 손쉽고 명쾌한 이야기는 멀리해야 한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를 피하려면 이야기, 역사 경험담 등을 대하더라도 실험자와 같은 자세를 견지해야 하며, 이론 앞에서도 임상의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 단지 남들보다 앞서 어떤 부류의 지식을 선호하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충분하다. 나 역시 인과관계라는 말을 꺼리는 것은 아니다. 대담한 추측이나 실험 결과를 말할 때다.
또 다른 접근 방법도 있다. 미래에 대한 예견을 세세하게 해놓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의의 목적이라면 이야기 짓기의 방법을 취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올바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이야기로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검은 백조 앞에서 눈을 멀게 하는 인간 내부의 두 가지 기제, 즉 확인 편향의 오류와 이야기 짓기의 오류를 살펴 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외부적 요인으로서, 두 가지 결함을 살펴볼 것이다.
7장. 희망의 대기실에서 살다
지적, 과학적, 예술적 활동은 극단의 왕국에 속하기 때문에 성공의 기회가 극소수에만 쏠린다. 내가 보기에 재미있고 '흥미 만점'이라고 느껴지는 전문적 직업의 세계는 모두 이 원리가 지배한다.
성공이 한쪽에만 집중될 때의 효과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은 두 배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규칙성이라는 허구적 보상 원칙이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호르몬 체계 역시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야금야금 늘어나는 보상 방식을 원한다. 이러한 보상 체계에는 안정과 편안함이 지배하는 세계관이 깔려 있기 때문에 확인 편향의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세계관으로는 급속히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환경에서 소외되고 만다.
동료 평가, 그 잔혹한 세계
매일 아침 우리는 연구소로 출근한다. 지인들은 의례적인 인사로, 괜찮은 하루였냐고 묻는다. 어쨌든 오늘 하루가 괜찮을 리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로 소중하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음도 발견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매달려 있는 직업은 꼬박꼬박, 즉각적으로, 결과물을 내주는 일이 아닌 반면, 주변 사람은 정반대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우리는 곤혹스럽다. 바로 이런 상황이 오늘날 사회에 비치는 과학자, 예술가, 연구자들의 모습이다. 이들이 예술가 마을처럼 고립된 자기들만의 세상에 살지 않는 한 이런 형국은 피하기 어렵다.
보상은 막대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는 직업은 매우 많은데, 이것들은 대체로 소명 의식이 없으면 일하기 어려운 일이다.
분석가는 꾸준한 실적을 중요시하지만 우리가 제일 해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꾸준한 실적이다. 우리를 모두 바보라고 해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일 년을 허송한 것으로만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참내 쾅! 엄청난 사건이 터져 큰 보상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아니면,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거듭되는 실패를 겪을 때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보답이란 참으로 힘겹기 짝이 없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지옥은 타인들이다.
감각할 수 있는 것이 가치 있던 시절
우리의 직관은 비선형적인 일은 잘 포착하지 못한다. 사건의 과정과 결과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원시시대에 산다고 생각해 보자. 목이 마르다. 그러면 물을 마셔 적절한 만족을 준다. 이때는 더 많이 일할수록 더 많은 결과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격려를 얻는다.
원시의 환경에서 가치 있는 것은 감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점은 우리의 지식에도 적용된다. 세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때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본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저절로 감각할 수 있는 것에 주의가 쏠린다. 실제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보다 감각 가능한 것이 우리의 관심을 차지해 버리는 것이다. 하여간 이 안내 시스템이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 사이의 공진화 과정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우리는 두 개의 변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할 때 한쪽의 값이 일정하게 입력될 경우 다른 쪽의 결과는 항상 같은 값을 산출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감정 장치는 직선적 인과관계에 맞게 설계되어 있다. 예컨대 사람들은 매일 빠짐없이 공부를 할 경우 배움의 양도 거기에 비례하여 늘어나기 마련이라고 기대한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 주는 부분, 즉 우리 마음의 '고등한' 논리적 부분이 즉각적인 보상을 원하는 동물적 본능을 이겨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크게는 아니고, 그것도 항상 그렇지는 않다.
세계는 비선형이다
이 세상에는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 것, 즉 비선형적인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
비선형적 관계는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작용한다. 선형적 관계가 오히려 예외적이다. 선형적 관계를 주목하는 것은 학교와 교과서에서뿐이다. 그 이유는 선형적 관계가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현상에서 엎어놓은 종 모양의 확률 분포를 찾는 사람도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다.
결과보다는 과정
우리는 감각할 수 있는 것,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것을 선호한다. 우리가 받드는 영웅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손에 잡히지 않는 업적을 내놓은 영웅, 혹은 결과보다 과정에 주력하는 영웅은 우리 인간의 뇌리에 자리 잡지 못한다.
작가는 명예를 위하여 글을 쓰는 게 아니며 미술가는 미술 자체를 위하여 창조 행위를 하며, 그 보상은 '행위' 자체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이는 반쪽짜리 거짓말이다. 물론 작가와 미술가의 행위가 지속적인 자기만족을 얻는 데 가치를 두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술가들이 남들의 이목을 어떤 형태로든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이름을 날리게 됨으로써 오히려 불행해진다는 것도 아니다.
흄과 같은 최고의 철학자도 자신의 대작이 어떤 얼빠진 평자에게 혹평을 당하자 몇 주씩 몸져누운 적이 있다. 그 평가가 잘못된 것이며 논점도 완전히 잘못 짚은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한 가지 목표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은 (도래할 가능성이 대체로 없는) 그날을 기다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견뎌 낸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자잘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다. 더 원대하고 멋진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 목표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고통에 둔감하지는 않다. 특히 남들의 조롱을 받을 때에 그들은 참지 못한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보상 체계는 열매를 쉽게 맺어 주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구설수에 오르고 신망을 잃고 형언하기 어려운 수치심에 휩싸이는 과정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남을 존중해 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값어치를 발휘하는 행위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검은 백조 사냥꾼은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기록을 살펴보면, 발명가보다 벤처 자본가가, 작가보다 출판사가, 그리고 미술가보다는 화상들이 더 많은 수입을 올린다. 이러한 도박에 몸담은 개인들이 받는 보상은 물질적 성공이 아니라 희망뿐이다.
인간의 본성, 행복, 불균등한 보상
'쾌락적 행복' 이라 부르는 것의 핵심을 파악해 보기로 하자.
'긍정 효과'라 일컫는 긍정적 감정을 얼마나 자주 느끼는가에 훨씬 더 좌우된다. 요컨대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으로 충분할 뿐, 어떻게 좋으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즐거운 인생을 사는 방법은 작은 '효과'를 가능한 한 균일하게 여러 차례로 나누어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저 그런 좋은 소식이라도 그 횟수가 많아지면 한 번 쏟아지는 엄청난 희소식을 능가한다.
그러므로 내가 '쾌락 계산법'이라 부르는 관점에 따라 한 번에 큰 것을 얻겠다고 겨냥해서는 이득이 없다. 자연은 적은 양의 보상이라도 한 번은 여기, 또 한 번은 저기, 빈번하고 꾸준하게 주어질 때 즐거움을 느끼도록 우리를 만들어 놓았다. 수천 년이 넘도록 우리가 가장 크게 느끼는 만족은 먹을 것과 마실 것(그리고 좀 더 은밀한 것까지)이 아니었던가. 쾌락이 이렇게 꾸준히 주어질 때 우리의 만족은 금방 최고조에 달한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환경이 꾸준한 욕구 충족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의 역사는 검은 백조가 지배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니 현대 인간의 삶이 내면적 보상과 긍정적 피드백을 제공하는 쪽으로 발달하지 못한 것은 불행이라고 할 것이다. 같은 원리를 불행에 적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고통과 환희의 이러한 비대칭성을 초월하기도 한다. 그들은 쾌락의 결핍을 이겨 내고 쾌락과 고통 사이의 게임에서 벗어나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희망의 대기실에서 살다
희망에 취해 일생을 보내다
드로고는 도시에서 새 삶을 사는 일을 미루고 복무를 연장해가며 세월을 보냈다. 언젠가 사람 하나 얼씬 않는 저 먼 언덕에서 적들이 쏟아져 나와 전투를 치르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35년을 보낸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드로고는 길가의 여인숙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임종에 맞추어 그가 평생 기다리던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드로고는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기대' 라는 달콤한 함정
앞서 나는 발생하리라 예상하지 못한 중대한 사건, 즉 검은 백조란 극단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는 그 반대의 경우가 놓여 있다. 즉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지만 발생 가능성이 매우 적은 사건이 있는 것이다. 드로고는 가능성 없는 사건에 사로잡혀 눈이 멀 정도가 되었다. 발생할 가능성이 적은 것, 바로 그것이 그의 존재 이유였다. 바로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온갖 것을 희생하고 작은 변화나 흐뭇한 보상도 마다하며 그저 희망의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드로고와 똑같은 삶이었다.
검은 백조의 속성 가운데 하나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 결과가 불균형하다는 것이다.
동료라는 존재의 힘
우리가 살아가는 데 타인의 도움은 생각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 사회의 인정을 받을 길이 요원한 독특한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도 동료를 찾고 외부와 격리된 소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학파라는 존재의 덕목이다. 설혹 사회로부터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당하게 될 터이니 그나마 나은 것이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검은 백조 효과에 영향을 받는 활동을 하고 있다면, 한 집단을 이루는 편이 좋겠다.
타타르 사막
네로는 헬리콥터 사고를 당하고 회복 중이었다. 몇 차례 투자 성공을 거둔 뒤 그는 자만심에 빠져 사업에서는 오히려 편집증일 정도로 극도의 보수적 전략을 견지하면서도, 위험한 모험을 즐기기 시작했다.
예브게니아는 두툼한 손가락과 막대한 예금 잔고를 갖고 있는 브루클린 촌놈들이 역겹기만 했다. 반대로 네오의 브루클린 출신 친구들에게 예브게니아는 교만 덩어리로 비쳤다.
네로는 브루클린 출신 여부나 교양 수준이나 학력을 불문하고, 단편적 지식을 넘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 낼 수 있는 살마들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했다.
칠면조 유형, 역칠면조 유형
사람은 두 분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칠면조 유형이다. 이들은 아무런 조짐도 감지하지 못하고 대사건을 맞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역칠면조 유형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대사건을 믿고 대비하는 사람들이다.
네로는 이런 위험을 안고 있는 사업 '수상쩍은 사업'이라고 불렀다. 그는 특히 붕괴의 확률을 계산한다는 기법들을 절대로 믿지 않았다. 기업 평가의 기준이 되는 회계연도가 너무 짧기 때문에 기업의 사업 실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의 직관이 피상적이기 때문에 위험도 평가란 것도 성급하게 내리기 십상이다.
여기서 네로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그는 성공의 열매는 거대하지만 그 확률은 매우 적되 많은 경우는 적은 손실을 입는 사업 분야가 있다고 했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실패할 확률이 높을 때, 성격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탁월한 스태미너를 갖춘 사람이라면 이 사업에 투자할 만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투자 전략을 이행하는 데에는 대부분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전략이 성공하려면 마음이 절대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순간을 끈기 있게 기다리며 고객이 내뱉는 침을 눈깜짝 않고 견뎌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증권거래사는 손실을 보는 동안 고객에게는 몹쓸 강아지로 취급당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네로는 파탄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투자 전략을 좋게 위장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전략은 '피 흘리기'였다. 이것은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손실을 보면서, 지금까지의 손실을 만회하는 수익을 올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단 한 번에 투자를 날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몇 년 혹은 10년, 때로는 100년 동안 흘린 피를 보상해 주는 큰 수익을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특이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소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손실 때문에 그의 몸은 하루 종일 신경생물학적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주위의 조롱을 받아 부정적 감정이 날마다 조금씩 쌓이는 고질적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 충격을 모두 흡수하는 기관도 해마라고 추정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어떻게든 합리화할 수 있지만, 고질적 스트레스의 영향은 해마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축시킨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사소하고 무해해 보이는 스트레스 유발인자는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를 이루는 중요 기관을 죽이는 것이다.
고도의 정보를 접한 것이 네로의 신체에는 독으로 작용했다.
그의 증권 거래 경력은 20년이지만, 실적 호조를 기록한 해는 단 4년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단 한번의 성공으로 모든 것을 역전시켜 버렸다. 100년의 손실이라도 뒤엎을 단 1년의 실적, 이것으로 충분했다.
오랫동안 손실이 이어졌을 때에도 네로는 죄송하다는 자세를 투자자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투자자들은 역설적으로 네로가 도도하게 굴수록 네로를 믿어 주었다. 사람들은 자신감에 손톱만큼이라도 균열이 생길 때 동물적 감각으로 눈치를 챈다. 그러므로 개인적 접촉을 할 때에는 자신감 있는 태도를 각별히 자연스럽게 유지해야 한다. 내가 패배자로 행동하면 상대도 나를 패배자로 대우한다.
우리를 평가하는 척도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잘 되고 못 되고의 절대적 척도는 없다. 우리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침착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투자은행의 평가서는 사원의 '질적' 실적을 평가하는 대신, 파국이 도래할지 모르는 순간에도 단기 수익 놀음에만 골몰하게 만든다. 예컨대 은행은 부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안전하고 멍청한 대부에만 집착하는데, 이는 대출 담당자가 다음 분기 평가만 의식하기 때문이다.
8장. 자코모 카사노바의 기막힌 행운 : 말 없는 증거의 문제
인간이 현실의 사건을 이해할 때 범하는 또 다른 오류는 '말 없는 증거'의 오류다. 즉 인간의 역사는 검은 백조를 감출 뿐 아니라 검은 백조를 만들어 내는 능력도 감추는 것이다.
기도했는데도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
"그런데, 기도하고도 빠져 죽은 사람의 그림은 어디 있소?"
우리는 이런 것을 '말 없는 증거'라고 부른다.
몽테뉴와 베이컨 역시 그들의 저작에서 '잘못된 신념'을 비판하면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점성술, 해몽, 삿된 예언, 종교적 심판 등등 모든 미신들이 그러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들 사상가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 체화하지 않으면 이들이 밝혀낸 위대한 내용이 곧바로 잊혀지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말 없는 증거는 역사라는 개념과 관련된 모든 것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내가 말하는 역사는 일련의 연속된 사건들이 선행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 듯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편향은 어떤 사상이나 종교가 성공을 거둔 요인을 자의적으로 추정하거나, 많은 분야에서 전문가적 솜씨로 위장하게 만들어 주거나, 예술가의 성공을 합리화해 준다. 그뿐 아니라 본성-양육 논쟁에도, 역사의 '법칙'에 대한 환상에도, 가장 심하게는 극단적 사건의 속성에 대한 이해에도 이러한 편향이 작용한다.
사상가들의 역사 이론을 적당히 조합할 때에는 공동묘지, 즉 '기도를 하고도 빠져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 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이런 일은 역사를 말할때에만 해당되지 않으며, 그 어떤 영역에서든 사례를 수집하고 증거를 모으는 방식에서 일어난다. 이때 일어나는 왜곡을 나는 편향, 즉 눈에 보이는 것과 실재 사이의 차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기도를 드리고도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담을 역사로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의 패배자가 된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상에도 해당된다. 주목할 점은 정작 말 없는 증거를 꿰뚫어 봐야 할 인문학자나 역사가들이 오히려 이를 가장 무시해 버린다는 것이다.
말 없는 증거는 발생 확률을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속성을 숨긴다. 특히 검은 백조와 같은 무작위성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회의주의와 경험주의를 철저히 결합하는 일이다.
문자의 무덤
남들의 성공담을 아무리 읽는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전체를 조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슈퍼스타 역학'에서는 '고전 문학작품' 혹은 '대작'이라는 것도 전체 문학작품 속에서는 극히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요점이다. 이 첫 번째 요점에 충실하면 재능이라는 것도 그리 높이 치켜세울 일이 아님을 곧바로 알 수 있다. 그들은 수많은 동료 중에서 극히 일부를 행운아로 선택해주는 불균형의 수혜자일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발자크 한 사람만을 추앙함으로써 그 밖의 대가들을 푸대접한 셈이다.
내가 강조하는 첫 번째 요점은 발자크가 재능 없는 작가라는 것이 아니라 발자크의 재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독보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낼 기회도 얻지 못한 천재의 숫자는 엄청나다. 오디션만 받으면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런 기회조차 잡지 못한 배우의 숫자가 얼마나 많을지도 생각해보라.
앞에서 나는 어떤 일의 성공을 이해하고 그 요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실패한 경우를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열 계단 만에 백만장자 되기
실패한 사람들이 회고록을 쓰기란 어려운 일일뿐 아니라, 설사 회고 원고를 썼다고 해도 아무도 출판해주지 않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을 나누는 진정한 요인은 단 한 가지다. 행운 그저 행운일 뿐이다.
소위 천재들이 행운 없이 만들어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회사는 매년마다 실적 부진 사원을 해고하고 우수 사원만 남긴다. 그러니 회사에는 장기간 조금씩 수익을 올린 사원들만 남는 것 아닌가? 우리는 실패한 투자자들이 묻힌 묘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분야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착각을 한다.
우리는 회고적 결정, 즉 이미 지난 사건을 재구성하여 합리화하는 사고에 입각하여 성공 혹은 실패의 '원인'을 찾아낸다. 일의 원인을 찾아내야 하니까 말이다.
사고실험을 컴퓨터로 수행해 볼 수도 있다. '대안적 세계'를 무작위 확률로 가동함으로써 현실과 비슷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이런 실험에서는 억만장자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일의 성과에 의해 평가되는 분야는 패배자의 묘지가 엄청나게 크다. 배우와 회계사의 직업별 평균 수입이 똑같다고 해도, 한 사람의 가난한 회계사가 배우 몇 십 명만큼 수입을 올린다.
생쥐 헬스클럽
더욱 불합리한 두 번째 말 없는 증거는 러시아인들은 굴라크에서의 생활로 단련되었기 때문에 거칠고 야만스럽다는 것이다. (굴라크는 시베리아 지방의 강제노동수용소) 그런데, 굴라크의 경험으로 단련되었다고? 이 구절은 심각한 오류다.
어떤 강한 놈들도 방사능을 쬔 이후에는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편향의 해악
편향에는 해로운 속성이 있다. 충격이 큰 사건 앞에서는 편향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죽은 쥐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충격이 치명적일수록 더욱 그렇다. 심각한 손상을 입은 표본은 제시될 증거에서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더 깊이 숨겨진 증거 찾기
말 없는 증거를 무시하는 오류는 현실을 움직이는 힘을 관찰하는 능력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종의 안정성 : 화석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종들은 그 숫자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범죄에는 대가가 있다? : 우리 눈에 보이는 범인들은 머리를 제대로 쓰지 못해서 잡힌 사람들이다.
수영 선수 몸매?
도박사들 사이에는 초보자들이 거의 언제나 행운을 거머쥔다는 믿음이 있다. 여기에도 똑같은 착시 현상이 작용한다. 도박을 처음 시작할때에는 누구나 운이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다. 이때 운이 좋은 사람은 게임을 계속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게임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결국 도박을 계속하는 사람들만 기억되기 때문에, 행운이 초보자에게 계속 찾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탈락자는 말 그대로 도박자 대열에서 배제된다. 초보자의 행운이라는 믿음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수영선수 몸매를 타고난 사람은 뛰어난 수영 선수가 될 것이다. 수영때문에 몸매가 좋아진 것은 아니다.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이치를 좀 더 넓혀 생각하면 가능성을 점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의사 결정 행위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분명히 보이는 결과를 염두에 두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혹은 덜 고려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의미심장할 수 있다.
바스티아는 에세이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에서 우리는 정부가 하는 일을 보고 찬양을 올릴 뿐 대안적 정책은 생각해 내지 않는다. 그러나 대안은 있다. 단지 쉽게 드러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확인 편향의 오류'를 다시 떠올려 보자. 정부는 자신들이 해낸 일을 거창하게 홍보해대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실상 그들이 하는 일이란 '짝퉁 선행'에 불과하다.
바스티아의 분석은 좀 더 깊이 들어간다. 만일 어떤 행동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쉽게 알 수 있다면 우리의 판단은 신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일의 긍정적 결과는 그 일을 벌인 사람에게만 돌아간다. 긍정적 결과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일의 담당자에게 보이겠지만, 부정적 결과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다.
그로 인한 손실은 물론 사회가 부담해야 한다. 직업 보호 정책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안전한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조치가 취업 기회를 더 줄일 수 있다는 것은 간과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재난을 복구하는 사업의 경우, 암 환자 치료비를 재건비로 전용하였기 때문에 암 환자들이 피해를 입은 반면에 복구 조치의 수혜자는 정치인들과 짝퉁 인도주의자들이다. 어떤 일의 부정적 측면은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영원히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9.11 테러 사망자는 약 2500명이다. 사망자의 가족들은 정부 기관과 자선단체의 지원을 받았다. 물론 이는 당연하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그해 연말까지 3개월 동안 테러의 영향으로 죽은 '조용한 사망자'가 약 1000명이었다. 비행기가 두려워 자동차 여행을 택하는 사람이 늘면서 교통사고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이들 사망자의 가족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이 가족이 빈 라덴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지'는 쉽게 먹히지만 '내가 당신으로 하여금 어떤 위협을 피하게 했는지'는 쉽사리 먹히지 않는 것이다. 짝퉁 영웅이 공을 뽐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숨은 영웅들이 묻혀 있을까?
의사들
말 없는 증거가 무시됨으로써 매일매일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물론 계산상으로는 사회의 혜택 총량이 많다고 할 것이다.
약품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으면 변호사가 나서서 의사에게 경찬견처럼 달려들 것이다. 물론 그 약품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생명을 구했다는 것은 통계의 문제지만, 부작용으로 투병하는 일은 일종의 이야기가 된다. 통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야기는 눈과 귀에 쏙쏙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검은 백조의 위협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뻔뻔스러움, 혹은 카사노바의 힘
말 없는 증거를 무시하는 오류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 즉 안정성에 대한 환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편향은 과거에 겪은 위험을 지각하는 능력도 떨어뜨린다. 특히 과거의 위험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심각한 위협에 시달리다가도 일단 벗어나게 되면, 그때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과소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카사노바는 과연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운명을 선택받은 사람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화려한 모험을 즐긴 사람은 숱하게 있었으되, 대부분은 파멸하고 말았고 소수는 몇 번씩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이때 이들 소수의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들이 불굴의 인물이라고 믿기 마련이다. 물론 길고도 다채로운 경험을 했을 테니 이것을 책으로 남길 것이다. 그러고는 물론....
내가 만난 여성은 약혼자가 순식간에 재산을 날렸지만 그래도 결혼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약혼자가 현재는 약간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긴 하지만 언제나처럼 멋지게 재기할 것이므로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성은 말했다.
이런 편향은 살아남은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증언자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말에 화가 나는가? 살아남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른 곳으로도 확대된다. 시련을 견뎌 내고 회생한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세워도 마찬가지다. '오뚝이 같은 복원력을 자랑하는 금융 시스템'은 어떤가? 막 전공을 세운 장군은 어떤가?
위험 감수자
요식업자의 무덤은 조용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낙천적 천성의 소유자이며 이 낙천성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어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어떤 모험도 긍정적인 일이며, 어떤 문화에서든 모험은 상찬받아 마땅하다. (나는 모험을 벌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 인간이 엄청나게 운 좋은 종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또 인간이 모험 유전자를 가진 종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은 어리석은 위험 감수자다. 실제로 인간은 살아남은 카사노바다.
나는 모험을 시도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비판하는 것은 무지한 상태에서 벌이는 모험이다. 카너먼은 인간의 모험 행위를 유발하는 것은 허세가 아니라 확률에 대한 무지와 맹목이라는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나는 우리가 미래를 투시할 때 불리한 결과나 극단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좀 더 깊이 있게 다루려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현재 상태까지 우연에 의하여 도달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위험의 확률을 비슷하게 피하게 될 것임은 전혀 아니라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이제 우리가 계속해 온 러시안 룰렛 게임을 그만두고 실제적인 일을 찾을 때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어쨌든 그것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과도한 낙관주의의 정당화가 인간 본성에 대한 그보다 더 심각한 오해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오해란 우리의 결정이 지금까지, 또 지금도 우리 자신의 선택의 산물이라는 믿음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너무나 많은 본능들이 우리를 끌고 간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적자생존을 성경 구절처럼 되뇌며 과장되게 부풀린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에는 말 없는 증거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진화란 요행에 가까운 결과가 이어지는 과정으로, 이 과정의 대부분이 나쁜 결과를 낳으며 좋은 결과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쪽만 바라본다.
이것은 마치 횡재한 도박사가 도박장에서 나와 도박으로 자기가 돈을 벌었으니 도박이 인간에게 좋은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모습과 같다! 진화의 역사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쪽으로 움직인 종들 중 많은 것들이 멸종했다!
"어쨌든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라는 사고방식은 현재를 최선의 세계로 여기는 것이다. 진화가 낳은 훌륭한 결과가 바로 현재라는 사고방식은 말 없는 증거 효과에 비추어 봤을 때는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이다. 맹목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단기적으로는 이따금 승자가 되기도 한다. 더 최악의 경우가 있다. 장구한 시간 동안 '적자생존'이 계속되다가 단 한 번의 희귀한 사건이 터져 나와 그때까지의 종의 운명을 뒤바꿔 놓는 환경에서도 위험을 좇는 어리석은 이가 장기적으로도 승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검은 백조다 : 인류학적 편향
최근 철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이 이른바 자기 표본 가설에 대해 연구해 오고 있다. 자기 표본 가설이란 카사노바식의 편향을 우리 존재에 대해 일반화시킨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태어나 존재하는 것이 매우 낮은 확률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우연의 소산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존재를 탄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요인들이 정확히 들어맞을 확률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세계의 탄생은 결코 우연에 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표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확률 계산을 크게 흔들어 놓는다. 온갖 모험가들을 내려다볼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카사노바 한 사람이 나타날 확률이 결코 낮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중 누군가는 필경 복권에 당첨될 것이 아닌가.
문제는 지금의 이 우주에 인류로 살고 있는 우리가 살아남은 카사노바라는 사실이다. 나 자신의 일생만 돌아보더라도 얼마나 위태위태한 길을 걸어왔는지 나는 놀라곤 한다.
여기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극히 낮은 확률의 사건이지만, 나는 이를 종종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이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룰렛 게임에서 일곱 번 이긴 도박꾼이 수백만 분의 1 확률을 손에 쥐었다고 자랑하며 초월적인 힘 덕택이거나 자신의 능력 덕택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리한 위치를 출발점으로 확률을 계산하지 말것. 그 대신 원점에서 시작하는 평범한 존재들과 똑같이 계산할 것! 이렇게 출발점을 기준으로 계산을 시작해 보면 행운이란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승자의 위치에서 계산을 하면, 즉 패배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계산하면(이것이 핵심이다), 연속해서 게임에 이기는 것은 행운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사건으로 보이게 된다. '역사'란 숫자 놀음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가려지는 것들
이렇게 볼 때, '왜냐하면(because)'이라는 용어를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설명'을 추구하는 동물인지라, 모든 것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으며 여러 설명 중 가장 명백한 것을 취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왜냐하면' 하는 식의 눈에 보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오히려 원인이라 할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서 어떻게 설명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빈번하다. 말 없는 증거는 이런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남은 쪽에 속해 있을 경우, 왜냐하면이라는 용어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생존 상태'라는 것이 다른 설명의 입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의 논리는 두 사건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지 못하는 대신, 설명을 부여하려 하는 인간의 약점을 가져온다.
오늘날의 교육제도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학생으로 하여금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설명을 짜내도록 강제하고, "잘 모르겠어요" 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냉전은 어째서 종식되었는가? 페르시아가 그리스인에게 패배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결과를 만들어 낸 원인을 설명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머리를 땅에 박고 거꾸로 서 있는 꼴과 같이 결말에 맞추어 원인을 끌어대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무작위적 원인이 작용하고 있는지 따져 봐야 한다.
우리는 '왜냐하면'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 인색해야하며, 그것도 지난 일을 설명하는 데에는 삼가고 실험과 같은 것에만 국한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교훈을 얻는 일을 회피하기 위해 이런 용어를 동원하지 말라는 뜻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원인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특히 말 없는 증거가 있으리라고 여겨질 때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제까지 우리의 경험적 세계 인식에 변형을 야기하고, 그것을 실제보다 더 설득력 있게(그리고 더 견고하게) 만드는 몇 가지 말 없는 증거에 대해 살펴보았다. 확인 편향의 오류나 이야기 짓기의 오류와 함께 말 없는 증거의 출현은 검은 백조 현상의 역할과 중요성을 왜곡한다. 말 없는 증거는 지나친 과대평가나 다른 요인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지각 체계는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 것이나 감정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는 표피적인 것에 매달리는 존재로 길들여져서,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고 마음속에 다가오지 않는 것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말 없는 증거와 이중의 싸움을 벌이는 셈이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부분은 말 없는 증거를 무시해 버린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천성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추상적인 것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9장. 루딕 오류, 혹은 네로의 불확실성
뚱보 토니
토니는 힘 안들이고 돈을 버는 놀라운 수완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의 두 번째 천성이 바로 '봉 찾는 능력'이다. 토니와 함께 한두 블럭을 걷노라면 세상이 그에게 '자진해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여겨진다.
브루클린 출신과는 거리가 먼 존
존 박사는 근면하고 합리적이며 신사적인 사람이다. 그는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전기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그는컴퓨터와 통계학에 모두 능통한 덕택에 보험회사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담당으로 채용되었으며, 이 일을 즐겼다.
이 두 사람 중 누구에게 뉴욕 시장 자리를 맡길 것인가? 존 박사는 완전히 틀에 박힌 사람이고, 뚱보 토니는 이 틀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 전 과목 수를 받던 수재가 사회에 나가서는 도대체 적응을 못하는 반면, 낙제생은 오히려 큰돈을 주무르고 다이아몬드를 척척 사며 수완을 발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히 여겨 본 적은 없는가?
존 박사는 학교 전 과목은 물론 아이큐 테스트에서도 뚱보 토니를 월등히 압도했다. 그러나 토니는 다른 모든 경우의 현실 상황에서 존 박사를 압도했다. 실제로 토니는 교양은 부족하지만 현실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으며, 나의 관점에서는 존 박사보다 사회적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더 과학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의 지식, 즉 플라톤적 지식과 비플라톤적 지식에 대한 가장 까다로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존 박사와 같은 유형은 평범의 왕국 외부에 검은 백조가 나타나게 한다. 이들은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이 문제가 일으키는 가장 골치 아픈 착각은 내가 '루딕 오류'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부딪히는 불확실성의 속성은 시험지나 게임에서 만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코모 호수에서 점심을
다양한 분야에서 불확실성을 다루는 사람들을 모은 연구소에 초대를 받았다. 나는 이 자리에 검은 백조 현상에 대해 발표하기 위해 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우리가 검은 백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 그것은 몰래 다가온다는 것, 그 현상을 플라톤적 논리로 풀이하려는 것은 또 하나의 몰이해일 뿐이라는 것임을 말하려 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국방부의 여러 집단에서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것 -우리가 아는 미지의 것이 아니라- 이라는 표현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헛똑똑이의 불확실성
루딕 오류란 무엇인가? "카지노야 말로 가우스적이고(즉 정규분포곡선에 가깝고) 컴퓨터 작업으로 거의 파악할 수 있는 확률이 지배하는 유일한 투기 사업입니다." 즉 평범의 왕국에 속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근소한 수리적 변화는 정규분포곡선으로 대표되는 완만한 무작위성으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모가변적이며 거친 무작위성으로 추정된다. 수식화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이 아니라 만델브로적인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행운이 차지하는 역할은 일반적으로 과소평가하지만, 확률 게임에서는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된 주사위 굴리기
카지노의 손실 요인은 호랑이 쇼의 사고, 두 번째 손실 요인은 합병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계약자의 폭탄 테러, 세 번째 손실 요인은 내부 서류 관리를 잘못해서 탈세, 네 번째 손실 요인은 소유주의 딸이 납치된 탓에 소유주가 몸값 지불을 위해 불법적으로 카지노 금고에 손을 댄 일이 발각.
위 네 가지 사건 같은 검은 백조 사태가 카지노 측이 평소에 염두에 두는 손실보다 1000배 이상의 손실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카지노마다 도박 이론에 바탕을 둔 정교한 감시 장치를 유지하느라 수억 달러씩 써대지만, 정작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엄청난 위험이 터지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도박장을 모델로 불확실성과 확률 이론을 말하고 있다.
제1부의 요약
1부의 주제는 결국 하나다. 한 가지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면으로 사고를 전개하다 보면 이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원리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에코의 서재에서 우리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은 무시되는 속성이 있다. 말 없는 증거 역시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미 익숙해진 잘 짜여진 도식과 지식을 선호하는 플라톤적 태도에 물든 나머지 실제 세계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귀납법의 함정에 빠지는 것도, 확인 편향의 오류에 빠지는 것도 이 때문이며, 우등생이 학교 밖에서 루딕 오류를 범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잘 짜여진 이야기를 선호한다. 우리 인류는 아직까지 추상적인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진화하지 못했으니, 우리는 언제나 전후 맥락을 들어야 이해를 할 수 있다. 무작위와 불확실성은 추상적인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이미 발생한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일어날 수 있었을지 모르는 일은 무시한다. 요컨대 우리의 천성은 피상적이고 표피적일 뿐 아니라, 그러한 천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동물보다 좀 더 고상한 삶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야기 짓기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 읽는 시간을 줄이고, 인터넷을 무시하라. 결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해악에서 벗어나면 보답을 얻게 될 것이니, 삶이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모든 추상적 개념의 어머니, 즉 확률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이 천박한 존재임을 명심하라. 우리는 주변의 사물과 사건을 더 잘 이해해 보겠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땅굴 파기'를 멈추는 일이다.
나는 카지노를 비유로 플라톤적 맹목을 다루었는데, 여기에는 '초점 맞추기'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불확실한 것을 다룰 때 가장 피해야 할 것이 바로 '초점 맞추기'다. '초점 맞추기'는 우리를 실패자로 만든다. 2부에서 보겠지만, 초점 맞추기는 예견의 문제로 나타난다. 우리가 세계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는가를 보여 주는 진짜 시금석은 이야기 짓기가 아니라 예견이다.
2부. 우리는 결코 예견할 수 없다
오늘날 가장 큰 충격을 준 기술 세 가지만 꼽아 보라고 하면 컴퓨터, 인터넷, 레이저 광선을 든다. 이 기술은 모두 어떤 계획하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미리 예견된 것도 아니며, 발명 당시는 물론 꽤 한참 후 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특징이 있다.이들에 대한 평가는 결과론적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우리의 예견에 대한 기록이 끔찍할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만 빼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를 들여다볼 때 '땅굴 파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미래에 통상적인 것은 없음에도 미래를 통상적인 것, 검은 백조와는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미래는 플라톤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의 일이 쉽게 이해되도록 새로운 이야기까지 만들어 낸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이란 판단의 척도가 아니라 확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의 원천이다. 여기서도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상자 속의 것'을 열어 보지 않고도 예견하는 플라톤적 사고, 즉(사리에 맞지 않는) 법칙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요기 베라에서 앙리 푸앵카레까지
야구 감독 요기 베라는 "예견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는 불확실성의 실천가였으며, 불규칙한 결과를 얻는 것이 당연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서 자신의 성적을 뼛속 깊이 직시했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칼 포머 등의 철학자들은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천성적 한계를 연구해 왔다. 나는 예견 능력과 관련한 인간 고유의 구조적인 한계를 '베라-아다마르-푸앵카레-하이에크-포퍼의 역설'이라 부르기로 한다.
이 세계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 그것은 곧 예측되지 못한 것들의 역할이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10장. 예견의 스캔들
왜 우리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예측이 (거의) 대부분 틀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할까? 나는 이것을 예견의 스캔들이라 부른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연인 숫자 맞추기
인식론적 오만이란 말 그대로 우리 지식의 한계에 대해 교만한 것을 말한다. 분명 우리 지식은 증가한다. 그러나 그보다 지식에 대한 확신이 더 증가함으로써 문제가 심각해진다. 지식이 늘어남과 동시에 혼동과 무지, 자만이 늘어나는 것이다.
인식론적 오만은 두 가지 효과를 발휘한다. 첫째, 이것은 알고 있는 것을 과대평가하게 한다. 둘째, 실현될 수 있는 불확실한 상황이 분포할 범위를 줄임으로써(즉 알지 못하는 것의 범위를 축소시킴으로써) 불확실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이러한 오류는 단순히 지식을 추구하는 영역 밖에서도 적용된다. 당장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자. 미래에 관한 그들의 의사결정도 말 그대로 이런 오류에 감염되어 있다. 우리 인류는 미래가 예측 밖의 길로 빠질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는 습성에 고질적으로 감염되어 있다.
강조할 점은, 내가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아는 바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의 충고 "너의 능력을 믿되, 네가 확신하고 있는 것 혹은 확신한다고 느끼는 것을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돌아온 검은 백조 맹목 현상
살펴본 간단한 실험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극단점, 즉 검은 백조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뿌리 깊이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판단 기제의 작용으로 우리는 십여 년에 한 번 발생하는 사건을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으로 판단하게 된다. 한술 더 떠서 이런 사건을 아주 잘 꿰고 있다고 오판하기 까지 한다.
특이한 사건들은 판단 착오에 취약하다. 어떤 사건의 희귀한 정도가 심해지면 오류도 커진다. 확률이 낮아지면 인식론적 오만도 커지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평범의 왕국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수치들은 대체로 극단의 왕국에 속한다. 즉 그들의 영향이 집중되어 검은 백조 효과에 지배된다.
추측과 예견
무작위적 변수란 내일의 실업률이나 내년의 주식시장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모르지만 남은 알 수도 있는 것을) 추측하는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예측하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미래 예견을 직업으로 한다는 전문가들 대부분도 앞에서 살펴본 정신적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게다가 전문적인 미래 예측가들은 일반인들보다 이런 장애에 더 영향을 받기도 한다.
정보는 지식의 장애물이다
바쁜 티를 내면 인과관계, 즉 자신의 노력과 그 결과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인정받기 쉽다.
오나시스의 성공과 그의 일 처리 방식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착각. 물론 타고난 매력이 힘을 발휘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알 까닭이 없다. 그러나 오나시스식 수법이란 것도 정보와 이해의 연관성에 대한 경험적인 연구라는 관점에서 철저히 검증해 볼 수는 있다. 더불어 인간의 일상사에 대한 시시콜콜한 지식을 쌓는 것은 쓸모없을 뿐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하다는 진술도 간접적으로, 하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소화전을 10단계와 5단계로 희미하게 처리한 사진을 보여 주면 5단계로 처리한 사진을 본 참여자들이 소화전을 더 빨리 인식했다. 이 실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정보를 더 많이 접한 사람들은 더 많은 가설을 생성하기 때문에 그 효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만큼 느려진다. 불필요한 요소를 더 많이 볼 뿐 아니라, 그것도 정보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 이론을 만드는 일에 늦는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외부 정보가 주어지는 간격이 짧을수록 이를 걸러 내는 능력이 떨어진다.
정보를 점점 늘려 준다고 해서 참여자들의 예측이 그만큼 더 정확해지지는 않았다. 정보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참여자들은 처음 내린 결정을 더 확신해 갔다. 정보가 오히려 해가 된 것이다.
빈껍데기 전문가의 비극
이제까지 우리는 자기 지식의 한계를 파악하는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만, 그들의 권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인식론적 오만이 기술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작업 절차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확신을 문제 삼자는 것이다.
문제를 그 심각성에 따라 둘로 나눠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좀 가벼운 경우, 즉 (어떤) 능력이 존재한다는 오만이 그것이다. 둘째는 매우 심각한 경우로, 무능함을 포장한 (빈껍데기 전문가의) 오만이 그것이다.
변화하는 분야와 변화하지 않는 분야
'전문가'란 거의 사기꾼 수준에 육박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순한 수식 하나로 움직이는 컴퓨터보다 나을 바가 없는데, 여기에 직관이 개입되어 그들의 눈을 가려 버린다.
분명히 어떤 분야에는 진짜 전문가가 존재한다. '방법을 아는 것' 과 '어떤 것을 아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전문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분야와 그렇지 않은 분야를 확인해 보는 연구를 시도한 바 있다.
간단히 말해, 변화하는 분야, 그래서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는 대체로 전문가란 나올 수 없다. 반대로 변화하지 않는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전문가가 나올 수 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대체로 미래를 다루는 사람들은 뚜렷하게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자 트라이버스는 또 다른 풀이를 내놓은 바 있다. 트라이버스는 전문가 문제를 자기기만의 문제로 보았다. 조상 전래의 전통을 가진 분야, 예컨대 약탈과 같은 일에서는 힘의 균형을 파악하면 결과 예측이 쉽다. 인간과 침팬지는 상대와 자신 중 어느 편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 즉각 알아차릴 줄 알며, 공격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적은 비용으로도 분석해 낸다. 이렇게 해서 일단 습격이 시작되면 새로운 정보는 무시하게 만드는 착각 상태가 작동한다. 이것이 전투 중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다. 한편 소규모 습격이 아닌 대규모 전쟁이란 인간의 천성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지를 잘못 판단하고, 그에 대응하는 우리의 힘은 과대평가한다.
이와 같은 자기기만을 무시해선 안 된다. 전문가의 문제란, 자신들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의 지식 수준이 높다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올바른 지식을 방해하는 과정이 똑같이 작용해서 자신의 지식 수준에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사건이란 알고 보면 거의 언제나 기이하다
우리는 평범한 일은 쉽게 예측해 내지만 불규칙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예측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건이란 알고 보면 거의 언제나 기이하다. 경제 분야의 예측가들은 실제 수치와는 엉뚱하게 다른 값ㅇ로, 비슷비슷한 전망을 내놓는 경향이 있다. 아무도 저 홀로 다른 수치를 내놓기를 원하지는 않는것이다.
나는 이들 전문가의 유용성을 조사해 보려는 자기반성이 지금껏 거의 없었다는 데 놀랐다.
끼리끼리 모이기
계량과학자 부쇼의 연구는 통계물리학의 방법을 경제 변수 분석에 응용하는 것으로 1950년 베누아 만델브로에 의해 시작된 분야였다. 이 분야는 평범의 왕국의 수학적 계산을 채택하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진실에 관심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의 연구자들은 정규분포곡선에 의존하는 대신 자료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경험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거래중개기관의 분석가들은 아무것도 예측해 낸 것이 없었다. 경험 없는 누군가가 한 기간의 수치를 기준 삼아 다음 기간을 예측해 본다 하더라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내가 '거의' 옳았다니까
테틀록이 분석을 통해 얻은 규칙성은 하나였다. 명성이 오히려 예측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테틀록의 연구는 어째서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깨닫지 못하는지, 즉 어떻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려는 데 더 초점을 두고 진행된 것이다. 대부분 신념이라는 형식을 취하거나 자부심이라는 방어기제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이들이 어떻게 사후 합리화를 해내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분석하고 있다.
어떤 변명을 늘어 놓는지 들어보자.
"그건 전혀 다른 게임이었다니까요."
"극단점이 터져 나오는 통에..."
"거의 옳았었다" 는 방어 전략
우리 인간은 임의적인 사건을 받아들이는 능력의 불균형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성공은 자기 덕분이며 실패는 통제 범위 바깥에 있는 외부적 사건, 즉 무작위성 탓이라는 불균형이 그것이다.
이런 불균형의 또 다른 효과는 우리가 그러한 불균형을 인지하지 못하는 까닭에 자신이 남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고슴도치 유형의 사람은 특이하고 가능성이 낮은 사건에만 집착한다. 이 유형은 사건이 터진 뒤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 내서 우리로 하여금 그 결과만을 맹목적으로 믿게 만든다.
나는 9.11을 예견하지 않았다. 그 사건은 확률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현실적인 분석?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외국 학자들을 초빙해서 밤새 컴퓨터로 복잡한 수학적 작업을 시킨다 해도, 택시 기사들이 간단한 방법으로 되는 대로 내놓는 예측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자기식의 방법론이 통하는 극히 희귀한 사건에만 시야를 좁게 한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경제학자들이 내린 예측에 따라 정책을 펼 경우 실제 경제 현실은 그 예측이 들어맞지 않는 방향으로 변동한다. 세계는 경제학보다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이다.
피치 못할 사정만 아니었다면
이제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또 다른 불변율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은 미래의 일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구조적 오류로서,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복잡성 혹은 조직의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사회 조직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또 외부의 제도에게 자신들이 '미래의 청사진'을 갖고 있는 듯 보여야 한다.
그러나 '땅굴 파기', 즉 계획 바깥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무시하는 성향 때문에 우리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곤 한다.
"돌발적 사건은 계획을 한쪽 방향으로 변경시킨다." 즉 비용을 상승시키고 시간을 더 잡아먹는 것이다.
주어진 과제에 소요되는 시간을 과소평가해서 얻어진 인센티브가 없는 경우에조차, 계획의 문제는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시야가 협소하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돌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계획 속에 있는 문제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계획 바깥의 불확실성, 즉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것', 다시 말해 '아직 읽지 않은 책 속의 내용'은 염두에 두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계획을 수립할 수는 없다. 우리가 미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런 한계점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면 된다. 다만 용기만 있으면 된다.
기술의 아름다움, 혹은 엑셀 스프레드시트
엑셀을 다루면 '판매계획서' 처럼 무한히 늘어나는 자료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계획안은 종래의 모호함과 추상성을 벗어던지고 철학자들이 말하는 구체성을 얻음으로써 손에 잡힐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계획이란 이제 손에 잡히는 대상물로 새 생명을 얻는다.
우리는 지식을 제대로 활용할 줄도 모르면서 강력한 커퓨터 프로그램 덕택에 훨씬 고약한 계획가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여기에는 '닻 내리기'라 불리는 정신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는 어떤 수치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닻을 내려 버림으로써'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덜려고 한다. 마치 진공상태 한복판에 지지대를 만들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예컨대 영업 계획과 같은 어떤 숫자를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후 다음의 정신적 작용을 벌이게 된다. 이는 어떤 것을 그 자체로 판단하기 보다는 비교 수치를 놓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준점이 없이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래 예측가들도 이러한 기준점을 도입함으로써 놀라운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시장에서 흥정할 때 먼저 시작점을 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최종 합의점은 이 시작점에 의해 좌우된다.
예측 오류의 성격
나이를 먹을수록 그 사람의 남은 기대 수명은 줄어들게 된다.
인간이 벌이는 사업과 모험에 관한 한 사정은 조금 달라서, 규모가변성이 큰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규모가변성이 큰 변수는 극단의 왕국에 속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평범의 왕국에서와 정반대가 된다.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이 길어질수록 앞으로 더 기다려야 할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이처럼 규모가변적인 무작위성이란 미세한 차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빚어낼 뿐 아니라 우리의 직관으로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일반적인 경우를 크게 벗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강의 깊이가 (평균) 4피트일 때에는 건너지 말라
기업이나 정부의 프로젝트에는 또 하나의 결점이 있다. 있을 수 있는 오류율을 시나리오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 기관에 소속된 부서가 앞으로 25년간 유가가 그때보다 별반 높지 않은 배럴당 27달러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예측치를 내놓은 지 6개월이 지난 6월 유가는 두 배로 뛰었고 다시 예측치를 배럴당 54달러로 수정했다고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유가는 배럴당 79달러에 가깝다). 첫 번째 예측이 크게, 그것도 곧바로 빗나갔는데 똑같은 식으로 두 번째 예측치를 내놓았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측 업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25년 앞을 내다본다니!
빗나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예측은 세 가지 오류를 낳는데, 이는 모두 불확실성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오류. 중요한 것은 가변성이다. 이 오류는 정확성은 도외시한 채 예측치를 내놓는 것 자체를 중요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계획 자체가 목적이라면 예측에서의 정확성이 예측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강의 깊이가 평균 4피트일 때에는 건너지 말자.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그 정책의 최종 예상 목표가 아니라 추정 가능한 결과의 폭을 더 고려해야 한다. 은행에서 위탁 근무를 할 때, 나는 은행들이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준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고객의 돈을 투입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두 번째 오류는 프로젝트가 연장되면 당초 예측이 설명력을 잃어 간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 데서 생겨난다.우리는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측의 설명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떨어지는 것은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자명하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예측 오류는 엄청나게 컸다. 우리가 미래를 들여다보는 일에 눈먼 선조들보다 별안간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자부할 하등의 근거는 없다.
세 번째 오류. 가장 심각한 오류일 텐데, 예측 대상이 되는 변수가 무작위적 특성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극단의 왕국에서는 희귀 사건의 발생을 염두에 두지 못하기 때문에 커다란 오류를 범했다.
이 세 가지의 오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어진 예측치가 옳다고 생각되어도 우리는 이 예측치에서 상당히 빗나갈 실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가올 일을 내다보는 사람은 현명하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진정한 현자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많은 경제 잡지에 담긴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얻을 수 없다. 실제로는 오히려 예측 능력을 더 떨어뜨릴 수 있다.
예견의 문제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즉 인간의 본성과는 관련이 없으되 정보 자체의 속성에 기인하는 고유의 한계가 그것이다. 예견 불가능성, 파급의 막대함, 사후 합리화
11장. 새 '똥꼬' 찾는 법
이제까지 우리는 인간의 두 가지 성향, 첫째, '땅굴 파기'와 '협소하게' 생각하기(지적 오만), 둘째, 예측 성적을 엄청나게 과대평가한다는 점 등을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자칫 놓치기 쉬운 구조적 한계를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한계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활동의 본성에서 생긴다.
새 '똥고' 찾는 법
조직의 발전은 유기적이어서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며,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이어야 한다. 이 회사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부서가 한 고객의 우연한 전화 한 통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1998년 러시아발 국가 채무 정지 사태라는 검은 백조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의 결과 1998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이들 임원 다섯 명 중 자리를 지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확신하건대, 새로 부임한 임원들은 여전히 다음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회의로 여념이 없을 것이다. 인간은 결코 배우지 못한다.
우연한 발견
인간의 인식론적 오만을 발견한 것은 이른바 우연의 결과다.
고전적인 발견 방식은 다음과 같다. 인도에 이르는 길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예상 밖의 다른 것 아메리카 대륙을 찾는다. 발명이란 계획표에 따라 이것저것 조합한 끝에 얻어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발견과 발명의 대부분은 우연의 산물이다. "언제나 본래 찾던 것 대신에 다른 무언가를 뜻밖에, 혹은 기지를 발휘해서 발견했다."
요컨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 대신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명확한 것을 왜 이제 알게 되었을까, 감탄하게 되며 이 발견 때문에 세상이 뒤바뀐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경은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는 대부분 예상 목록에 들어 있던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뒤안길에 놓여 있던" 것이라고 간파했다.
자연선택설을 통해 현대의 세계관을 만들어 낸 다윈과 윌리스의 진화론이 발표되던 그해 연말에 린네학회 대표는 자기 학회에서 진화론을 발표하도록 했으면서도 이것이 과학혁명을 가져올 만큼 놀라운 발견은 아니라고 보았다.
누구나 자신이 예견을 할 때는 예견 불가능성이란 것을 망각해 버린다. 독자분들 역시 우리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정작 미래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우리의 견해를 잊어버리곤 한다.
우주배경복사가 자주 포착되었는데도 증거를 찾던 과학자들이 이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다른 것을 찾던 사람이 이를 찾고, 그 발견자로 칭송받은 것이다. 이들도 처음에는 새똥 때문에 발생하는 노이즈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역설이다. 예측 전문가들은 예기치 못한 발견이 몰고 올 급격한 변화를 내다보는 데 참담하게 실패할뿐더러 점증적 변화의 경우에는 오히려 변화의 폭을 실제보다 더 크게 잡는다.
해답이 문제를 찾는다
엔니지어들은 도구 개발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일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구는 뜻밖의 발견을 가져다주고, 그것은 또 다른 뜻밖의 발견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지만 도구가 그 목적을 위해 제대로 작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식의 증대는 장난감과 기계 만들기를 즐기는 엔지니어의 취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지식의 진보란 어떤 이론을 입증하거나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도구 덕택에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컴퓨터도 그랬고 인터넷도 군사적 용도로 고안된 것이다. 레이저는 그저 광선을 쪼개 보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는 장난감을 만든다. 그 장난감 가운데 일부가 세상을 바꾼다.
찾고 또 찾으라
어떤거이든 천성이 움직이는 대로 연구를 해보라고 장려하고 있다고 했다. (한 생명공학 회사) 연구에서는 우연한 발견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업 활동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비아그라는 본래 고혈압 치료제였다. 발모촉진제는 또 다른 고혈압 치료제에서 응용된 것이다.
모든 위대한 발견은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파스퇴르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우연을 최대한 자주 만나려면 찾고 또 찾는 길밖에 없다. 기회를 쌓으라, 그리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라.
어떤 기술이 확산될지 여부를 내다보는 것은 유행과 사회 조류를 예측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기술 자체의 객관적 효용과는 무관하다. 매대에 꽂힌 <타임>지를 바라보니, 올해의 '유용한 발명' 이 특집 기사로 기획되어 있다. 언급된 발명품들은 어쩌면 몇 주 더 유용할 수도 있겠다. 언론이란 '배우지 못하는 법'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예견이 가능하다고 예견할 수 있는가?
칼 포퍼를 진실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주장의 증명과 반증을 다루는 포퍼주의적 반증에만 주목한다. 그러나 포퍼의 핵심 사상은 따로 있다. 그의 핵심 사상은 회의주의적 태도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만들어 냈다는 점에 있다. 포퍼는 회의주의자를 건설적인 인물로 격상시켜 주었다.
포퍼의 핵심적 주장은 역사적 사건을 예견하려면 기술적 진보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지만, 기술적 진보란 근본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견이 가능할 정도로 미래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미래에 속한 요소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어떤 발견이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상태라는 풀이다.
우리가 이런 예측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단 하나의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고 해도, 단지 어떤 것이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정도만으로도 이와 비슷한 속성을 가진 도구를 연이어 발명해 낼 수 있는 법이다. 수학의 경우, 어떤 불가해한 정리의 증명법이 발표되면, 생각지도 못한 곳곳에서 자기도 증명했노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일을 흔히 목격한다. 연구 결과를 중도에 누설했다거나 표절했다거나 하는 시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표절 때문이 아니다. 해법이 존재한다는 정보 자체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미래의 발명품을 손쉽게 내다볼 수는 없다. 미래의 발명품들을 예측할 수 있는 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논한 사람은 포퍼가 처음이 아니다. 19세기 말 독일의 부아 레몽은 "인간은 무지하며 앞으로도 무지할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부아 레몽의 주장도 틀렸다. 우리는 인간이 무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 자체에도 서툴기 때문이다. 앞으로 닥칠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을 놓고 우리가 하는 말을 되새겨 보자. 우리는 미래에 얻을 지식을 과소평가하지 않는가. 그것도 의기양양하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고 (부당하게) 비판받은 실증주의의 창시자 오귀스트 콩트는 인간은 별의 화학적 구성 성분에 대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알지 못하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찰스 샌더스 피어스의 말대로, "이 말을 쓴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분광기가 발명되면서 콩트가 절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다시 요약해 보면 예견을 할 수 있으려면 미래에 발견될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기술의 개발에 지금 즉시 착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알게 될 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지만 우리 자신의 결함은 보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인간은 놀라운 자기기만의 기계인 것 같다.
n번째 당구공
앙리 푸앵카레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상가로서는 대체로 평가절하되어 왔으며, 그의 사상이 받아들여지는 데는 거의 1세기나 걸렸다.
그의 역작 <과학과 가설>에서 그가 정규분포곡선을 이용하는 것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대목을 나는 시간이 흘러서야 발견했다.
푸앵카레의 삼체 문제
방정식에 근본적 한계가 있음을 이해하고 설명한 첫 번째 수학의 대가가 바로 푸앵카레다. 그는 작은 변화가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는 비선형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오늘날 카오스이론으로 유명해졌다. 푸앵카레의 연구는 미래 예측에는 비선형성이라는 한계가 있음을 해명하는 데 모두 바쳐졌다. 그러니까 카오스이론이란 수학 기법을 이용해서 더 먼 미래를 투시할 수 있다는 초대장이 아닌 것이다.
푸앵카레의 논리는 단순하다. 우리가 미래를 투시한다고 했을 때, 오류율이 급속히 증가하기 때문에 모델 속의 역학에 대한 정밀 측정값을 점점 더 많이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예견이 어긋나는 정도가 급속히 커지기 때문에 거의 무한대 수준으로 과거를 분석해 내야 하므로, 정밀한 값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푸앵카레는 일명 '3체 문제'라는 유명한 주제를 제시하고 이를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푸앵카레는 우리가 정성적 물질만을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계의 특성 중 어떤 것을 논의할 수는 있어도 계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엄밀한 사고는 가능하지만 계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푸엥카레는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장(field) 개념을 창안했고 이것이 오늘날 위상기하학의 일부가 되었다.
아직도 하이에크를 무시하는가
하이에크는 불확실성 문제를 사회 현상에 설득력 있게 적용했다. 하이에크에게 진정한 예측이란 명령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하여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기관, 예컨대 중앙의 계획 주체가 지식을 다 끌어모을 수는 없다. 수많은 중요한 정보들이 누락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사회는 이러한 정보들을 모두 통합시켜 작동한다. 전체로서의 사회는 상자 바깥에서 생각한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와 계획경제를 내가 앞에서 가리킨 헛똑똑이 지식, 혹은 플라톤주의의 산물이라고 공격했다. 과학적 지식이 증가힘에 따라 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미묘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고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사회 변화를 초래하는 가중치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자만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현상을 '과학만능주의'라 일컬었다.
이것은 '조직'의 고질적인 병폐다. 내가 정부와 대기업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두 조직은 서로 구분하기도 어렵다. 정부는 예측치를 내놓고, 기업은 전망치를 발표한다. 기업이 살아남는 것은 전망치가 옳아서가 아니다. 그들이 행운아였기 때문이다.
기업은 수시로 파산한다. 기업의 파산은 우리 소비자들의 주머니에 그 자산을 나눠 갖게 한다. 더 많은 기업이 파산할수록, 우리한테는 더욱 좋은 일이 된다. 그러나 정부는 이보다 좀 더 심각한 사업이라 정부의 바보짓에 우리 돈을 대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부의 담당자들이 워낙 무지하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자유시장을 선호한다.
하이에크가 비판받을 점이 있다면 사회과학과 물리학 사이에 경직되고 질적인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는 것뿐이다.
헛똑똑이를 면하는 길
헛똑똑이는 '땅굴 파기'를 하듯 한곳에만 몰두하고 명쾌한 범주에만 눈을 고정하여 불확실성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고매한 권위자가 있어서 무지한 보통 사람들이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언어 규칙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다르다. 언어는 유기적으로 생성된다.
플라톤적인 사고는 하향식이고 공식적이고 폐쇄적이며, 자족적이고 속류화되기 쉽다. 비플라톤적 사고는 이와 반대로 상향식이고 개방적이고 회의론적이며 경험주의적이다.
박테리아가 어떤 것이고 왜 질병을 낳는지를 우리가 알기 전까지만 해도, 의사들은 시술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병원 내 사망의 상당 비율이 이 때문이라는 증거가 있는데도 말이다. 수술 전에 손을 씻을 것을 주장했던 의사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도 그가 사망하고 나서 수십 년 뒤의 일이었다.
강단 자유의지론
이발사에게 이발을 할 때가 되었냐고 묻지 말라. 마찬가지로 학자에게 "당신의 연구가 의미가 있느냐"고 묻지 말라. 이제 하이에크의 자유의지론에 대한 논의를 다음의 관찰 결과로 대신하여 마감하려 한다.
나는 오늘날 자유의지론자들이 종신 교수 자리에 목을 매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기업은 언제든 망할 수 있지만, 정부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정부 조직은 남아 있어도 공무원들은 퇴출 될 수 있으며, 선거에서 지면 의원직을 내놓아야 한다. 대학에서 종신 교수는 영원하다. 지식 장사의 영원한 오너가 되는 것이다. 요컨대 돌팔이는 체계의 부재나 자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통제의 산물이다.
예견과 자유의지
어떤 물리계의 가능한 모든 조건을 알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우리는 그것의 미래의 움직임을 내다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무생물의 경우에만 해당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장애에 부딪히게 된다.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여기는 한, 그러한 인간이 개입된 경우에 미래를 투시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이 특정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할지 모두 예측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환경이 주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자동기계일 뿐이다. 이 사람은 운명의 노예다.
자유의지라는 환상은 결국 분자들끼리의 상호작용의 결과를 기술하는 방정식 따위에 불과하다. 이것은 시계가 움직이는 원리를 연구하는 바와 다를 바 없다. 최초의 상태, 그에 뒤이은 연속적 사건을 훤히 알고 있는 천재가 있다면 미래의 행위까지 자신의 지식 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숨 막히지 않는가?
하지만 자유의지를 믿는다면 사회과학이나 경제 예측 따위를 진심으로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견할 수 없다. 물론 교묘한 술수를 쓴다면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쓰는 수법이 이것이다. 이들은 각 개인이 합리적 존재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의 행동이 예상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합리적 개인은 특정 상황에 고유한 일련의 행동을 수행한다. '합리적인' 사람들이 최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게 된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합리성이란 구속복과 같은 역할을 한다. 플라톤적 사고에 물든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 대신 다른 것을 택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린다. 이리하여 '최대화', '최적화'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여기서 최적화란 경제 주체가 추구할 수 있는, 수학적으로 최적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 최적화 기법이 오히려 사회과학을 지적이고 성찰적인 학문 분야에서 '정밀 과학'을 추구하는 분야로 퇴보시켰다. 여기서 '정밀 과학'이란 이른바 '물리학을 시기하는' 즉 자신이 물리학과 소속인 듯 흉내 내는 사람들을 위한 이류 공학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지적 사기다.
최적화 기법은 아무런 실질적 용도가 없으며 교수직 경쟁을 위한 무기임이 다분하고, 수학적 능력을 경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플라톤적 사고에 사로잡힌 경제학자는 최적화 이론 때문에 밤에도 술집에 가기는커녕 방정식을 푸느라 여념이 없다.
인지편향학파에 속하는 경험주의 심리학자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합리적 행동에 대한 모델이란 부정확한 정도가 아니라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음을 보여 왔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플라톤적 사고에 빠진 경제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비합리성에 이르는 데에도 여러 경로가 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제발 플라톤을 생각해서라도 바라건대, 일반이론 없이 사는 법을 배우시라!
에메랄드의 오싹함
우리는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미래에 대한 규칙을 끌어낸다. 그런데 과거에 입각해서 미래를 예측하다 보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과거의 동일한 자료에서 얻은 이론이 정반대의 결론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내일까지 살아 있다면 그것은 곧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우리가 죽지 않는 존재이거나 둘째, 우리가 그만큼 죽음에 가까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저마다 동일한 자료를 기초로 얻어진 것이다. 오랫동안 먹이를 받아먹고 산 칠면조는 이런 생활이 자신의 안전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좀 더 머리를 쓸 줄 안다면, 인간의 저녁거리로 변해 버릴 위기가 그만큼 가까워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과거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해석하는 데 상당한 정도의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도 한 것이다.
과거의 것에만 기초하여 미래를 내다본다면 일정한 경향성을 찾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과거의 경로에서 일탈할 수 있는 미래의 수는 무한하다. 철학자 넬슨 굿맨은 이를 일컬어 귀납법의 문제라 칭했다. 우리가 직선을 긋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선형 모델만 들어 있는 탓이다. 1000일 동안 꾸준히 숫자가 늘었다는 사실 때문에 미래에도 이 경향이 지속될 것이라고 확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머릿속에 비선형 모델이 들어 있는 사람이면, 1001일째부터는 수치가 하강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다.
귀납법의 문제는 이야기 짓기의 오류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겪은 지난 일을 설명하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굿맨이 말하는 귀납법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가혹한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보고 겪은 일을 '일반화'하여 미지의 일을 추론하게 하는 방법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제 어찌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상식'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극단의 왕국에서는 상식이 제대로 통하는 경우가 많이 않다는 점이 문제다.
거대한 예측 기계
탈레브씨, 도대체 계획이란 것을 왜 세운단 말이오?
우리는 목적 없이도 -자동적으로- 계획을 세운다. 왜 그럴까? 그 답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계획 세우기란 아마도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 것, 즉 의식이란 것과 함께 자라 온 것 같다.
미래를 내다보려는 욕구는 진화론적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대니얼 데닛이 주로 발전시켰는데, 골자는 다음과 같다. 인간 뇌의 가장 효율적인 용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추론을 미래에 투사시켜서 그에 대응되는 결과를 얻는 게임을 행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사고의 장점은 자신의 추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무효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재적소에서 뇌를 활발히 움직여 미래를 추론하는 능력 덕택에 인간은 자연선택 규칙에 따르는 즉흥적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예측은 진화를 속일 수 있게 해준다. 우리 머릿속에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측과 '만약 ... 했더라면' 하는 식의 가상 시나리오들을 통해서 우리는 노상 그렇게 한다.
'예측'이라는 인간의 정신 능력은 인간을 진화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만, 그것 역시 진화의 산물이다. 동물은 환경이라는 짧은 끈에 묶여 살아가지만, 인간은 그보다는 훨씬 긴 끈에 묶여 있다. 데닛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예측 기계'다. 그에게 인간의 마음과 의식은 인간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필요에 의해 최근에 생겨난 특질이다.
우리는 왜 전문가와 그들의 예측에 귀를 기울이는 것일까? 한 가지 유력한 설명은 사회가 전문화, 즉 지식의 분화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큰 질병을 얻고 나서 의대에 진학하는 것은 너무 늦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조력을 받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 의사들은 자동차 정비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정비사는 다시 의사의 말을 들어 준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전문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분야에서도 말이다.
12장. 인식의 왕국, 그것은 꿈인가
지적으로 오만하지 않은 사람은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겸허한 사람, 즉 판단을 유보하려 애쓰는 사람을 존중해 주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천성이다. 이제 인식론적 겸손에 대해 살펴 보자. 아주 내향적인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자신의 무지를 알고 괴로워한다. 그는 "나는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줄 아는 담대함이 있다. 남들의 눈에 바보 멍청이로 보이든 말든 그는 거리낌 없다. 그는 망설이며 행동을 삼가고, 자신의 오류가 빚은 결과에 고뇌한다. 그는 성찰하고 성찰하고 또 성찰하여 마침내 정신적, 육체적으로 탈진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은 의심할 줄 안다는 면에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이런 사람을 인식의 귀족이라 부르겠다. 그리고 인간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규범이 정해지는 나라를 인식의 왕국이라 부르겠다.
몽테뉴, 인식의 귀족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들을 새로 발견해 내는 데 주된 관심을 두었다. 자신의 면모를 새로 바라보면서 그는 전체 인류에 대해 일반화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현대 교육의 난맥상은 몽테뉴의 저작을 새롭게 느끼게 한다. 인간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그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불완전함과 이성의 한계,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결함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어떤 철학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통 사람, 그러니까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사람들과 달랐다. 첫째, 그는 행동가였다. 둘째, 그는 반교조주의자였다. 그는 매력 있는 회위주의자였고, 불완전하되 고정관념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성격이 분명하고 성찰적인 저술가였다. 무엇보다 그는 위대한 고전의 전통에 서서 인간이 되고자 한 사람이었다.
인식의 왕국
많은 사람들은 평균, 보편적 정의, 억압 없는 자유, 노동할 필요 없는 자유 등을 유토피아라고 여긴다.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인식의 왕국, 즉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인식의 귀족이 될 수 있고 대표로 뽑힐 수 있는 사회다. 이런 사회는 지식이 아니라 무지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통치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식에 의해 눈이 멀 필요가 있다. 떼로 몰려 있는 것이 홀로 서 있는 것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서로를 결집시킬 수 있는 지도자를 따르도록 만들어져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라도 여럿이 뭉쳐 있는 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홀로 나가는 편보다 더 이익이 되어 왔다.
검은 백조 불균형성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믿는 바가 옳다고 확신하는 대신 무엇이 틀렸는지를 확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과거의 과거, 과거의 미래
미래를 과거와 '유사한'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과거의 정확한 투사이며, 따라서 예측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우연이 뒤섞인 미래라는 개념은 과거의 인식을 결정론적으로 확장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마음이 수행할 수 없는 정신적 작용이다. 우연은 너무 모호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범주가 될 수 없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하며, 그 비대칭성은 우리가 무리 없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미묘하다.
이 비대칭성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관계를 과거와 그 이전 과거 사이의 관계에 따라 알아낼 수 없다고 믿게 된다. 확실히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우리는 내일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어제와 그제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참조하여 틀을 짜지 않는다. 이처럼 자기 반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에 예측했던 것과 실제 결과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유인원을 보고 웃지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자폐증을 '마음의 맹목'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미래의 관찰자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능력을 '미래에 대한 맹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측, 잘못된 예측, 그리고 행복
행복감을 충족시켜 주는 쪽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고질적 오류에 대한 연구 한 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오류는 다음과 같다. 자동차를 새로 산다고 하자. 새 차 덕분에 삶이 변화하고 지위가 올라가며 통근 시간이 휴가처럼 안락해진다. 이전보다 한 등급 높은 행복의 세계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이전의 차를 샀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는 것이다. 새 차를 산 효과도 결국 쓰러져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이전의 경험을 되새겨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벌어질 유쾌한 사건과 불쾌한 사건의 영향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대니 카이먼은 '예상된 효용'이라 불렀고, 댄 길버트는 '감정적 예견'이라 일컬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우리가 미래의 행복을 잘못 예견한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서 거듭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오류에서 배우기보다는 감정에 쏠려 미래를 투사하는 정신적 장애와 왜곡에 대한 증거가 있다.
우리는 불행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한껏 과대평가한다. 재산이나 지위를 잃으면 우리는 충격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과거의 불행에도 그러했듯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적응해 낼 것이다. 쓰리긴 하지만 생각보다 최악은 아닐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예측 오류에는 의도가 있다. 즉 중요한 행동을 유도하려는 동기를 부여하거나 불필요한 위험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측 오류는 또한 좀더 일반적인 문제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자기기만에 관한 트라이버스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성향은 우리를 미래로 쉽게 이끌어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기만이란 일정 영역을 넘어서면 바람직스럽지 않은 성질을 드러낸다. 자기기만은 불필요한 위험을 피할 수 없게 한다. 투자 위험, 환경 위협, 장기적 안전 등 현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향.
현대에 사는 우리의 문제는 미래를 모를 뿐 아니라 과거 역시 모른다는 사실이다.
다시 불완전한 정보에 대하여
역사가는 세계의 일반적 특징을 논하거나 자신들도 알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알아내겠다는 욕심으로 카오스이론을 끌어들여서도 안 되며, 후진 과정의 사고를 시도해서도 안 된다.
가끔은 수학자들까지도 짜증스러운 질문을 던지곤 한다. 예컨대 내가 말하는 무작위성이 '진정한 무작위성'이냐 아니면 무작위성을 가장한 '결정론적 혼돈'이냐 하는 식이다. 진정한 무작위적 계는 실제에서도 무작위로 나타날 뿐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특질을 갖는다. 반면에 혼돈계는 예측 가능하다는 특질을 갖긴 하지만 파악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나는 이들에게 답을 두 가지로 해줄 수밖에 없다.
답1. 실제 상황에서는 둘 사이에 기능적 차이가 없다. 우리는 둘의 차이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무작위성이란 근본적으로 불완전 정보인 것이다.
답2. 무작위성이란 궁극적으로는 비지식이다. 세계는 불투명하다. 우리는 그 겉모습에 현혹당한다.
지식이라는 것
역사란 이론이나 일반 지식을 끌어내는 분야가 아니며 엄중한 경계심 없이 미래에 도움을 얻기 위해 읽는 것도 아니다. 역사에서 얻는 것은 부정적인 확증이다. 부정적 확증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하지만, 그와 함께 지식에 대한 환상도 적지 않게 갖게 된다.
어떻게 과거의 경험에만 의존하는 실패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메노도투스는 귀납법의 문제를 극복하려면 역사를 알되, 이론을 만들지 말고 알라고 했다. 역사책을 읽으라. 거기 실린 온갖 지식을 습득하라. 그러나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려 하지 말며 사건을 거슬러 사고하는 후진 과정의 사고도 피하라. 관습을 당연히 주어진 기본값으로 받아들여 행동의 준칙으로 삼되,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와 달리 생각한다. 역사에 대한 성찰로 인과관계를 서술하는 것을 중심 과업으로 제시하고 있다.
수많은 사건을 기술하는 데에서 벗어나 자잘한 이론을 만들어 내는 데 도취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곤경에 빠진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야기 짓기에 물든 것인가? 칼 포퍼는 역사가들의 미래 예측 작업에 대해 비판했지만, 나는 과거에 대한 역사가들의 접근 방법에 결함이 있음을 지적했다.
13장. 화가 아펠레스, 또는 예견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충고는 언제나 값이 싸다
버트런드 러셀의 생각이 다른 대목은 '철학'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분야로 기능해 왔다는 주장이다. 덕목들이 손쉽게 함양될 수 있다는 데에도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어째서? 그것은 우리가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판단을 유보하는 능력을 가르칠 수 없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이미 어떤 판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것은 그냥 '나무'가 아니다. 내가 보는 것은 멋진 나무이거나 못생긴 나무인 것이다. 작은 가치판단까지도 제거하고 사물을 보겠다고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을 머리에 떠올릴 때 편견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자신이 믿고 싶은 바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철학자들은 인간이 깊이 사고할 줄 아는 동물이며 추론을 통해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쳐 왔다. 인간의 사고 능력이 효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이와 동시에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는 환상을 자신에게 심어 주기 위해, 그리고 지난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소급하여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인식되었다. 이 점을 망각한 순간, 이번에는 이른바 '계몽'이라는 것이 우리의 머릿속 깊이 들어앉게 되었다.
예견에 관한 두 가지 교휸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 인간답다는 것에는 자기 일에 지적으로 어느 정도 자만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자. 자기 견해를 갖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예견을 피하지도 말라. 이제까지 내가 늘어놓았지만, 나는 더 이상은 바보가 되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거창하고 위험천만한 예측에 쓸데없이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협할지 모르는 거창한 주제도 멀리하라.
이야기가 그럴듯한가가 아니라 잘못되었을 경우의 해악이 얼마만한가를 기준으로 믿음을 분류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을 것
미래를 완전히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그 한계를 인식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많다. 미래를 예견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 곧 예견 불가능성으로부터 우리가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여기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을 것! 사소한 것에 대한 예측은 진통과 치료 효과 정도로 그칠 것이다. 그러나 거창한 예측치는 판단을 마비 시키니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대비하고 있으라.
긍정적 사건이라는 개념
그리스의 경험주의 의학파들은 의학적 진단을 내릴 때 고정 관념을 버리면 행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어떤 음식을 먹은 결과 뜻하지 않게 치료 효과를 발휘해서 운 좋게 병이 나을 수도 있다. 이것은 또 다른 환자들의 치료법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혈압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개발된 비아그라) 긍정적 사건은 경험주의 의학파가 의학적 발견을 이루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이치를 우리의 삶 전반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즉 행운이 물어다 준 발견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이다.
시행착오란 몇 번이고 거듭함을 의미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세계가 어떤 거창한 설계도 없이 만들어진 것임을 멋지게 서술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무작위적 변화가 조금씩 누적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그의 주장의 맥락에는 동의하되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고자 한다. 세계는 대규모의 무작위적 변화가 누적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의 심리나 지적인 판단은 시행착오를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워 한다. 거듭되는 작은 실패가 오히려 삶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존재다. "실패를 사랑하라."
실패가 곧 고통과 낭패를 몰고 오는 유럽이나 아시아와는 달리 작은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만드는 미국 문화의 특성이 각종 혁신에서 미국이 압도적 비율을 점하게 했다. 어떤 아이디어나 제품도 실패를 거친 결과 확립되고, 마침내 '완벽히' 다듬어질 수 있는 것이다.
검은 백조의 폭발성과 위험성
사람들은 실패를 부끄러워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변화의 비율이 적은 쪽으로 행동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실패를 대규모로 만들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것은 마치 증기 롤러가 굴러오는 길에서 동전을 줍고 있는 꼴이다.
무작위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화가 지배하는 일본에서는 나쁜 결과가 고약한 우연의 장난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실패란 곧 불명예가 된다. 일본인들은 가변적 상황을 몹시 꺼리기 때문에 오히려 파국의 가능성이 높은 전략을 선택한다. 파국이 일어날 때마다 자살로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90년대 IBM의 경우 대량 해고 사태로 이 회사의 직원들은 완전히 망연자실했다.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국가의 보호 조치에 안주하던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컨설턴트들의 상황은 이와 반대다. 고객이 수입이 오르락내리락함에 따라 컨설턴트들의 수입도 부침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굶어 죽을 염려가 없다. 이들은 수요에 맞춰 움직이는 요령이 있기 때문이다. 즉 흔들리지만 침몰하지는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리아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독재 정권은 겉으로는 이탈리아보다 불안정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리아나 사우디아라비아가 이탈리아보다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금융 분야에서 이른바 '보수적' 은행가들은 실상 다이너마이트 더미에 올라앉아 있지만 자신들의 사업이 단조롭고 폭발성이 없어 보인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바벨 전략
바벨 전략이란 예견에는 오류가 따르며 대부분의 '위험관리 기법'이란 것도 검은 백조 때문에 결함이 있음을 알았다면, 우리의 전략은 적당히 공격적이거나 적당히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보수적이거나 초공격적일 필요가 있다.
극히 안정적인 대상에 갖고 있는 자금의 85~90 퍼센트를 넣어야 한다. 그리고 남은 10~15퍼센트는 가장 투기적인 곳에 투입한다. 이런 투자 전략에는 위험관리라는 것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15퍼센트 이상에만 투기를 벌이기 때문에(혹시 손실이 있다 해도) 그 이상의 손실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해로운 위험을 '잘라 내는' 셈이다. 어중간한 위험도의 상품에 맡기는 대신 우리는 한쪽으로는 위험도가 높고 한쪽으로는 위험도가 거의 없는 전략을 택했다. 이런 전략이 그 밖의 인생 전반에도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아무도 모른다
작가 윌리엄 골드먼은 영화 흥행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외쳤다. 골드먼 같은 사람이 흥행 예측도 하지 않고 작품을 썼다는 것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는 영화 하나하나의 흥행을 예측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예측 불가능성 덕택에 어떤 영화 하나가 대박을 터뜨리기만 해도 엄청난 수익을 몰아줄 수 있음도 알고 있었다.
다른 교훈은 우리는 이 예견의 문제와 인식론적 오만을 역이용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성공을 거둔 대부분의 사업이 이 예견 불가능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잘 활용했다는 주장이 옳은지 의심스럽다.
간단한 요령일수록 결실은 더 커진다.
1. 먼저 긍정적 우연과 부정적 우연의 차이를 구분하라. 불확실성이란 이처럼 이따금 보상을 물어다 준다. 이런 분야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차라리 행운을 가져다준다. 특히 다른 사람 역시 아무것도 모를 때 효과가 발휘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차리는 사람이라면, 즉 '아직 읽지 않고 남아 있는' 책들에 주목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면 이득은 최고에 달한다. 이것은 부정적 검은 백조를 두려워하면서도 긍정적 검은 백조에는 최대한 노출되고자 하는 바벨 전략과도 일치한다.
긍정적 검은 백조에 노출될 경우 그 불확실성에 대해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 손실이 극히 적을 경우에는 최대한 공격적이고 투기적이며 때로는 '상식을 벗어난' 자세를 취해야 하지만,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나로서도 알기 어렵다.
어떤 사상가들은 이런 전략을 '복권' 모으기로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틀린 비유다. 첫째, 복권은 보상이 규모가변적이지 않다. 복권의 당첨금에 상한선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오히려 루딕 오류가 들어맞는다. 현실의 보상은 복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 둘째, 복권에는 규칙이 있으며 학자들이 고안한 것과 같은 확률이 있다. 이와 반대로 현실 세계에서는 규칙을 알 수 없으며 불확실성이 늘어날 때마다 이득도 늘어난다. 새로운 불확실성이 해악을 미치기보다는 이득만을 안겨 줄 것이기 때문이다.
2. 지엽적 정확성을 추구하지 말라. 간단히 말하면 시야를 넓혀라. 특별한 발견이란 하루아침에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을 함으로써 그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에야말로 주의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검은 백조를 너무 세밀하게 예측하려 하지 말라. 예측하지 못한 일들 때문에 타격을 입기 쉽기 때문이다.
한가지 명심할 점은 완벽한 대비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3. 기회를 놓치지 말라. 혹은 기회로 보이는 것을 놓치지 말라. 기회는 드물게, 생각보다 드물게 찾아온다. 명심할 점은, 긍정적 검은 백조는 항상 사전에 한 번쯤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출현 단계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
기회란 나무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으의 모습에 나는 몇 번씩 놀라곤 했다. 그러니 복권은 아니어도 공짜표(그렇지만 보상은 무한히 가능한)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사라. 그리고 이 표가 결실을 맺기 시작하면 절대 버리지 말라. 열심히 일하되, 기꺼운 마음으로 일하라. 그리고 기회를 찾고 그 기회에 최대한 노출되도록 하라. 대도시에 산다는 것은 뜻밖의 발견과 마주칠 기회가 높아지기 때문에 큰 이점이 있다. 여기에서는 의외의 기회에 자주 노출될 수 있다. 칵테일 파티에서 자주 만나 잡담을 주고받노라면 큰 성과를 올리기 십상인 것이다.
4. 정부가 내놓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라. 그러나 정부의 주장에 연연하지 말라. 명심할 것은 정부에서 일하는 공복들의 목표란 그들 자신의 생존과 지위 보장에 있는 것이지 진실을 밝히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정부가 하는 일의 부작용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희귀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기업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기업 간 경쟁이 보장될 경우 부정적 검은 백조에 가장 많이 노출된 기업이 살아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이다.
5. 일기예보관들, 애널리스트들, 경제학자들, 사회과학자들과는 농담을 주고받을지언정 그들의 주장과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어리석게도 인간이란 끊임없이 예견하려는 존재다. 이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야 더할 나위가 없을니, 전망치의 시한을 늘릴수록 오류가 급속히 늘어난다는 사실을 명심해 두자.
평형상태, 정규분포 따위의 용어를 구사하는 '저명한' 경제학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말라. 이 사람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셔츠에 쥐 한마리를 넣어 주자.
거대한 비대칭성
지금까지 말한 충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비대칭성'이 그것이다. 비대칭적 결과는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생각이다.
파스칼은 나는 신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무신론자가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안다. 한편 나는 신이 존재한다면 무신론자들이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나의 믿음은 정당하다. : 파스칼의 내기
신학적으로 파스칼의 논리는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릇된 신앙을 신이 벌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만큼 우리가 순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스칼의 내기'라는 발상은 신학의 영역을 넘어서 적용할 수 있다. 이 논리는 지식의 개념을 완전히 거꾸로 세워 놓는 것이다. 이 논리는 희귀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탐구할 필요성을 우리에게서 제거해 버린다. 그 대신 인간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생기는 이득에만 시야를 한정한다. 희귀 사건의 확률은 계산해 낼 수 없다. 반대로 어떤 사건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입증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사건이 희귀할수록 확률은 더욱 불투명해진다)
인간은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는 파악할 수 없어도 그 사건의 결과를 분명히 그려 낼 수는 있다. 예컨대 지진의 발생 확률은 알 수 없지만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일어날 경우 어떤 결과가 생겨나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의 (알 수 없는) 확률을 계산하는 것보다는 (알아낼 수 있는) 그 결과에 집중함으로써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불확실성에 대한 중심적인 개념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이에 기반하고 있다.
이제 이 생각에 기초해서 의사 결정에 관한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과를 완화하는 것뿐이다.
사실상 자유시장이 성공적으로 작동해 왔다면, 그것은 자유시장이 내가 '확률 땜질'이라고 부르는 시행착오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에서 경쟁하는 개별 행위자들은 이야기 짓기의 오류에 빠지기도 하지만 효율적, 집단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자유시장 체제가 만들어 낸 과도한 자신감에 넘치는 기업가들, 순진한 투자자들, 탐욕스러운 투자은행들, 공격적인 벤처자본가들 덕택에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확률 땜질을 실행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인간은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믿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사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다.
요약해보면 우선 우리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인식론적 오만과 그에 따르는 미래에 대한 맹목. 2) 플라톤식의 범주 관념. 사람들은 쉽게 환원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하는데, 특히 진정한 전문가가 없는 분야에서 대학에서 받은 학위라도 있을라치면 더욱 쉽게 그러한 경향을 보인다. 3) 추론에 사용하는 허점 투성이의 도구들, 이러한 도구들은 검은 백조로부터 자유로운 평범의 왕국에서나 통할 만한 것들이다.
3부. 극단의 왕국의 회색 백조
검은 백조에 관해 좀더 깊이 있는 주제 네 가지가 남았다.
첫째, 나는 앞서 세계가 극단의 왕국으로 점점 변모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이런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세계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다양한 시각에서 논하고자 한다. 둘째, 나는 앞서 가우스식의 정규분포곡선 이론이 해악스럽고 고약한 망상이라고 비판한 데 있는데 이를 좀 더 깊이 파고들고자 한다. 셋째, 만델브로적인 것, 즉 프랙털 혹은 무작위적인 것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어떤 사건이 검은 백조에 해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희귀하거나 극히 비정상적인 양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자. 검은 백조란 예상 밖의 사건, 그러니까 우리의 계산한 확률 밖에 존재하던 사건을 의미한다.
희귀한 사건은 일단 발생하고 나면 그 특성을 우리에게 다 내보이기 때문에 이들의 발생 확률을 계산해 낼 수는 없어도 발생 확률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형성해 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검은 백조를 회색 백조로 만들 수 있다. 즉 이들이 몰고 오는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아나면 적응에 성공한 사람의 반열에 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짝퉁' 불확실성에 초점을 맞췄던 철학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14장. 평범의 왕국에서 극단의 왕국으로, 그리고 되돌아오기
세계는 불공평하다
세계가 그렇게 불공평하다고? 매일 아침마다 나는 세계가 전날보다 더 무작위적이 되었음을 느끼며, 우리 인간이 어제보다 더 무작위성에 휘둘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내가 보기에, 세계는 지금 반란을 일으키는 중이다.
두 명의 인문사회학자가 이 불공평함의 변모와 발전에 대한 직관적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한 사람은 주류 경제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회과학자다. 두 사람이 문제를 다소 과도하게 단순화시키긴 했다. 이들의 견해가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다거나 상당한 발견을 했더가나 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견해가 비교적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들보다 설명력이 더 뛰어난 자연과학자들의 주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경제학자 셔윈 로센의 주장. 1980년대 초에 그는 '슈퍼스타의 경제학'이라는 주제로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로센에 따르면 이와 같은 불평등은 토너먼트 효과에서 생겨난다. 즉 남보다 약간 '나은' 사람이 전체 몫을 다 가져가기 때문이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토너먼트처럼 보이지 않는가, 게다가 토너먼트에서는 큰 차이로 이길 필요도 없다. 그러나 로센의 세련된 주장에는 행운의 역할이 빠졌다. 여기서 문제는 '더낫다'는 개념인데, 로센은 이를 성공에 이르게 하는 기술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무작위적 결과, 즉 우연한 상황이 성공의 요인이기도 하며, 승자 독식의 출발점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완전히 무작위적인 이유로 한 사람이 근소하게 앞서 있을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서로 모방하려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을 좇아 그 주변에 몰려 있게 된다. 이처럼 서로 모방하고 옮고 옮기는 성향을 로센은 과소평가한것이다!
마태 효과
로버트 K. 머턴은 빈곤층의 몫을 빼앗아 부자의 배를 불린다는 '마태 효과'를 제기했다. 그는 학자들의 연구 실적에 주목하면서 출발점의 차이가 평생 지속되는 양상을 밝혀냈다.
누군가가 학술논문을 쓰고 있다고 하자. 그는 논문에서 그 주제를 연구해온 50여명의 연구자들을 인용했으며, 문제를 간단히 하기 위하여 50명의 비중은 동일하다고 가정하자. 똑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제3의 연구자가 앞의 참고문헌 목록에서 무작위로 세 명만을 인용한다. 이렇게 되면 두 번째 논문을 읽은 세 번째 연구자는 거기에 제시된 세 사람을 선택하여 인용 하게 된다. 이 세사람의 이름은 해당 주제와 점점 더 강하게 엮이게 되고, 따라서 그들의 이름은 누적적으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끌게 된다.
자, 이때 선택된 세 사람의 연구자와 나머지 47명의 연구자들 사이의 차이는 운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들이 처음에 선택된 것은 그들의 업적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선행 연구의 참고문헌에 먼저 실렸기 때문이다. 그 명성 덕분에 이 성공한 학자들은 더 많은 논문을 계속해서 쓸 수 있으며 발표 지면도 쉽게 열린다. 그러므로 학술적 성공도 부분적으로는(그렇지만 상당히) 복권과 같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학자에 대한 평가가 주로 논문 인용도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학계에는 서로 인용하는 폐쇄적 집단이 존재한다(그것은 "내가 당신을 인용하면, 당신도 나를 인용해준다"는 식의 거래다)
이리하여 인용도가 떨어지는 저자는 학계에서 밀려날 것이다. 여구 경력 초기에 유리한 발판에 발을 디디는 사람은 평생 그 유리한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부자는 가난해지는 것보다 더 부자가 되는 일이 더 쉽고 유명한 사람은 명성을 잃는 것보다 더 유명해지는 일이 더 쉽다.
사회학에서는 마태 효과를 '누적 이득'이라 부른다. 이런 이치는 기업 조직, 사업, 배우, 작가 등 이전의 성공 경력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편집자 눈에 들어 <뉴요커>에 원고가 실렸다고 하자. 이 게재된 원고는 평생 유리한 출발점으로 작용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실패 역시 성공과 마찬가지로 누적된다.
예술 분야는 입소문에 의존하기 때문에 누적 이득 효과에 절대적인 영햐을 받는다. 예술 작품의 질적 수준에 대한 평가는 자의적인 견해가 여러 사람 사이에 퍼져 형성된 결과물이며, 이것은 정치적 견해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하다.
현대 미디어의 출현은 누적 이득 효과를 가속시켰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문화 및 경제 생활의 세계화와 소수자들의 성공의 관련성에 주목했다. 나는 사회학자가 아니니 현대 사회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에 예상치 못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이고자 한다.
머턴의 누적 이득 개념은 이른바 '선호적 연결'이라는 효과의(논리적인 순서는 아니지만) 시간적 순서를 뒤집어 놓은 것이기도 하다. 머턴은 지식의 사회적 성격에 관심을 가졌을 뿐 사회적 무작위성의 역학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연구는 무작위성의 역학에 대한 연구로부터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좀 더 수학적인 과학으로부터 끌어낸 것이다.
링구아 프랑카
선호적 연결 이론은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도시의 크기가 극단의 왕국에 속하고, 어휘들이 소수의 단어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박테리아의 개체 수가 큰 편차를 보이는 이유를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식물 및 동물의 진화와 지리적 분포에 관한 통계학 그리고 그 의미>라는 논문으로, 생물학에 '지수 법칙'이 존재함을 밝혔다. 이 지수 법칙은 규모가변적인 무작위성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종이 일정한 속도에 따라 두 개로 분열함으로써 새로운 종이 생겨나는데, 그중 어떤 속이 개체 수가 많으면, 그 속은 그 후로도 계속 개체 수가 많아진다. 이것은 마태 효과와 같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율의 분석틀에서는 종들이 멸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학자 조지 지프는 언어의 특성을 연구한 결과 오늘날 '지프의 법칙'이라 불리는 경험적 규칙성을 찾아냈다. 지프의 법칙은 불균형이 형성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시각이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그 단어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 그것을 찾는 데 힘이 덜 들고, 따라서 언어 사용자가 자기 사전에서 단어를 고르는 것은 이전에 사용한 빈도에 의존한다. 큰것은 더 커지고 작은 것은 계속 작은 상태로 남거나 더 작아지는 것이다.
사상의 접촉과 전파
사상 혹은 사고방식이 서로 접촉하고 집중되는 과정도 위와 같은 분석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유행에도 몇 가지 제약이 있다. 사상은 일정한 체계를 이루어 전파된다. 우리가 아무 문제나 일반화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것을 신념으로까지 이끌기 위해서는 우리를 '잡아끄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고방식은 쉽게 전파되지만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밈'이라 불리는 문화 구성요소는 인간을 매개체로 하여 서로 경쟁하며 전파되지만 유전자와는 다르다. 어떤 사상이 전파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매개자가 될 뿐 아니라 이것을 변형시켜 전파하는 데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케이크를 만들 때 이미 있는 요리법을 단순히 훙내 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법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려 사용하되 자기만의 케이크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단순한 복사기가 아니다. 우리가 믿으려 하는, 아니 어쩌면 믿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정신적 범주들은 이런 점에서 전파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가기 위해서는 그 정신적 특성이 인간의 본성과 부합해야 한다.
극단의 왕국, 거기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지금까지 설명한 집중의 역학에 관한 모든 분석틀, 특히 사회경제적 분석틀에는 뭔가 극히 순진한 면이 있다. 예컨대 머턴은 행운이라는 요인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무작위성이라는 층위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모든 이론틀에서는 한 번 승자가 되면 영원히 승자로 남는다. 그러나 실패자는 끝까지 실패자로 남는다 해도 승자는 어디선가 튀어나온 새로운 존재에 의해 밀려날 수 있다.
우리의 직관에서는 선호적 연결 이론이 매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선호적 연결 이론은 신참자에 의한 변화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것이야말로 학교에서 인류 문명의 쇠망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이 아닌가.
브루클린의 프랑스인
"금융거래에도 왕자가 있을 수 있지만 아무도 왕좌에 앉을 수는 없다." 그리고 "오르막길에 만난 사람은 내리막길에서도 다시 만나는 법."
내가 어렸을 때는 계급투쟁 이론이 풍미하고 있었다. 세계를 괴물처럼 집어 삼키는 막강한 기업에 맞서서 순수한 개인들이 싸운다는 이론이다. 착취 수단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강자는 더욱 강해짐으로써 체제의 불공평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계승한 이 이론은 지적 갈증을 느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괴물 같다는 이 거대한 기업들이 파리처럼 추락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 거대 기업은 거의 모두가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화한 나라, 즉 미국에 자리 잡은 회사들이다. 오히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일수록 대기업이 살아남기가 더 쉬운 환경이었다. 어째서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이 덩치 큰 괴물을 없애 버리는 것일까?
기업 하나하나의 시각으로 보면 이들은 잡아먹힌 것이다. 경제적 자유를 신봉하는 이들은 야비하고 탐욕스러운 기업이 큰 위협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경쟁을 통해 견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을 견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운이라는 것을 나는 와튼스쿨에서 배웠다.
대박 상품이 터지면 운 좋게 성공할 수도 있고, 최근의 승자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세계가 항상 새롭게 바뀌어 나가는 데에는 우연한 행운의 덕이 큰데, 자본주의 역시 그렇다. 운이야말로 최고의 균형추다. 운덕택에 모든 사람들이 덕을 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대기업을 보호함으로써 자궁 속에서 움트는 새싹을 죽여 버린다.
모든 것은 변한다. 카르타고를 흥하게 했다가 망하게 한 것도 운이요, 로마를 융성시켰다 쇠망하게 한 것도 운이었다.
앞에서 나는 무작위성이 나쁜 것이라고 말했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지적 능력보다 훨씬 평등한 것이 바로 운이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만 보상받는다면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기 능력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작위성은 인간사의 카드를 뒤섞어 버리고 거인을 무릎 꿇리는 이로운 역할을 한다.
예술에서는 유행이 이런 역할을 한다. 신참자도 유행으로부터 이익을 볼 수 있는데, '선호적 연결'과 유사한 유행 덕에 추종자들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이 신참자 역시 과거의 인물이 될 때가 오는 것이다.
긴 꼬리
나는 극단의 왕국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 역도 성립한다. 즉 누구도 완전한 절멸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 오늘날의 환경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삶이 있고 희망이 있는 한, 성공의 대기실에서 때를 기다리게 한다.
크리스 앤더슨은 프랙털이 집적되는 동학적 과정이 또 다른 층위의 무작위성을 낳는다는 것을 간파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긴 꼬리'라는 용어로 잠정적으로 표현했다.
웹은 엄청난 규모의 집적을 만들어 낸다. 수없이 많은 접속자가 몇몇 웹사이트에 몰려든다. 구글은 전 세계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것이야말로 승자 독식 연구의 전형적 대상이다. 그러나 구글 이전에 알타비스타가 시장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앤더슨에 따르면 웹에는 이와 같은 집적 말고도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 웹에는 미래의 구글이 될 것들이 모여 있는 저수지도 있다는 것이다. 웹은 또한 역구글, 즉 특정 분야의 전문 기술 소지자들이 작고 안정적인 사용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도 키워 준다.
예브게니아는 인터넷 덕분에 판에 박힌 출판업자를 우회할 수 있었다. 13만 권의 보유 서적을 자랑하는 반즈앤노블과 같은 대형 서점도 독자가 드문 이 책을 새로 들여놓는 일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결국 우리의 원고는 여전히 원고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웹상의 판매상은 사정이 다르다. 인터넷 서점 하나가 거래할 수 있는 품목은 거의 무한하다. 이 책을 물리적 공간에서 재고로 쌓아 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문적인 책들이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면서 지난 몇 년간 독자들의 수준이 매우 향상되었다. 다양성이라는 풍성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나는 규모가변성에 의한 집적 효과와 정반대인 '긴 꼬리'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숱아헥 받았다. 긴 꼬리라는 말에는 작은 것들이 한데 뭉쳐 문화 및 경제의 상당 부분을 움직여 낼 수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인터넷 덕분에 작고 특별한 주제와 틈새의 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긴 꼬리라는 말에는 불평등하다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거대한 기반을 이루는 작은 것들과, 극소수의 초거인들이 함께 세계 문화의 일정 부분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것 중에서 일부가 이따금 강자를 쓰러뜨리고 위로 올라가는 일이 생긴다. (이것은 '이중의 꼬리'다. 즉 작은 것들의 큰 꼬리, 혹은 큰 것들의 작은 꼬리다.)
긴꼬리는 왕좌를 차지한 승리자들의 지위를 흔들고 새로운 승자를 불러들임으로써, 성공의 역학을 변화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포착된 단면은 언제나 극단의 왕국에 해당한다. 즉 제2유형 무작위성의 집적에 좌우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극단의 왕국이기도 하다.
긴 꼬리가 미치는 영향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긴 꼬리 효과가 미래의 문화, 정보, 정치 생활에 얼마나 더 큰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라. 긴 꼬리 효과는 기득권 정치 집단, 학문 체제, 언론 집단 등 경직되고 기만적이며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권위적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긴 꼬리 효과는 인지적 다양성을 함양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스콧 페이지의 <인지적 다양성 : 개인의 차이가 어떻게 집단의 이익을 낳는가>는 인지적 다양성이 문제 해결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하고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견해가 문제를 해결하는 엔진과 같이 작동함을 입증해 보였다. 거대한 구조를 전복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만 제시하는 플라톤적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론에 얽매이지 않는 상향식 경험주의가 주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긴 꼬리 효과는 세계를 덜 불공평하게 만드는 극단의 왕국의 부산물이다. 세계는 작은 존재들에게는 덜 불평등해지지만, 큰 존재에게는 극심하게 불평등해진다. 그 누구도 기득권층이 될 수 없다. 작은 것들은 매우 전복적인 존재들이다.
순진화 세계화
우리는 무질서, 그렇지만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은 무질서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거의 모든 문제가 소수의 검은 백조에 집중되면서 우리가 좀 더 평온하고 안정적인 시대를 보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20세기는 새로운 것을 가져왔다. 극단의 왕국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일단 발생하면 인류의 거의 10분의 1을 사상시킬 만큼 위험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세계화가 일어 나고 있다. 그러나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에 폭발성이 감소하고 안정성이 늘어나는 듯 보이지만 취약성이 서로 얽혀 결합된다. 다시 말해 세계화는 파괴적인 검은 백조를 만들어 낸다.(더 많이)
우리는 이전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전 지구적 붕괴라는 위협에 처해 있다. 금융기관들이 합병되어 더 적은 수의 거대 은행들만 남는다. 세계의 거의 모든 은행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금융 생태계는 서로 갉아먹고 관료적이며 (그나마 위험관리라는 것도 가우스 정규분포곡선 사고에 의존하는) 덩치만 큰 은행의 시대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가 무너지면 전부 무너지게 되어 있다.
은행의 집중은 금융 위기의 가능성을 줄이는 효과를 낳지만 일단 위기가 발생하면 전 세계적 규모로 심각한 사태를 일으킬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는 작은 은행들이 다양한 여신 상품을 취급하던 다양성의 시대를 지나 서로 비슷비슷한 사업을 벌이는 은행들만 남아 있는 획일적 시대로 접어들었다. (바벨탑의 저주가 생각 나는군, 필연적으로 나타날 검은 백조)
그러나 일단 위기가 발생하면...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리지 않는가? 사태는 적게 일어나지만 위기는 더욱 치명적이 될 것이다. 희귀한 사건일수록 우리는 그 가능성을 더욱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위기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네트워크란 서로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연결된 '노드'라 불리는 요소들의 집합이다. 전 세계의 공항들, 사회적 연결망, 격자 모양의 전선 연결망, 월드와이드웹 등이 모두 네트워크를 이룬다. 네트워크의 구성과 노드들 사이의 링크를 연구하는 분야를 '네트워크이론'이라 한다.
네트워크이론 연구자들은 모두 극단의 왕국에 통용되는 수학이 있음을 인정하며,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의 부적합성을 지적한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네트워크는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갖는다.
네트워크에서는 중심 연결망으로 기능하는 소수의 노드에 연결이 집중된다. 극도로 집중된 부분에 연결망이 형성되는 경향이 네트워크의 본성이다. 따라서 몇 개의 노드에 극도의 집중이 생기는 반면에 그 나머지에는 거의 연결망이 형성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결망의 분포는 일종의 규모가변적인 구조를 이룬다.
이러한 연결 집중 현상은 인터넷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생활(소수의 사람들에 연결망이 집중된다), 전력 공급망, 통신망 등에서도 나타난다. 네트워크가 튼튼한 것은 이런 특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네트워크의 특정 부분을 무작위로 설정하여 차단시켜도 극히 일부분의 범위에 그쳐 버리기 때문에 전체에는 이런 현상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네트워크는 검은 백조 효과에 취약해진다. 즉 연결이 집중된 주요 노드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 파국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파국은 오늘날 대은행 중 하나에만 문제가 발생해도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웅변해 주는 완벽한 사례다.
저자는 네트워크이론에 대해 조금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은행은 인터넷보다 훨씬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 금융 산업에는 이렇다할 긴 꼬리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와 다른 환경, 즉 금융기관이 이따금 붕괴해도 마치 인터넷 분야나 인터넷 경제에서 보이는 탄력성이 발휘되듯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세계는 더 나아질 것이다. 정부 분야에도 긴 꼬리 효과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관료들을 대신해서 시민들이 그 자리를 채워 봉사함으로써 관료 제도를 되살릴 수 있다면 말이다.
네트워크 이론에서 탈중앙화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은행권들은 중앙화된 상태를 못벗어난 상태에서 연결성을 높이기 때문에 반드시 문제가 발생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고 검은 백조는 계속 나올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극단의 왕국에서 물러나오기
사회는 점점 집중도가 높아 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평범의 왕국에서나 통용되던 고답적 관념을 중용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도 사회 현실과 사람들의 사고 사이에 긴장이 점점 높아 간다. 그리하여 집중도를 역전시키려는 노력도 생겨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1인 1표 시대에는 진보적 세금 제도가 승자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된다.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진정 승자들의 집중을 견제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사회적 규칙을 손쉽게 바꿀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까지 많은 사회에서는 강자가 아내를 여럿 거느림으로써 하층민들이 자식을 낳을 기회를 가로막았다.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를 도입함으로써 이 관계를 역전시켰다. 이는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성공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짝을 찾을 기회를 박탈당해 분노하며 혁명을 꿈꾸는 남자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가지 불평등 중에서도 경제적 불평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공평함은 경제적 영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기초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는 오늘날 경제적 불평등은 오히려 적어지고 있다. 문제는 서열이다!
평균적인 것이 인류의 지적 생산에 기여할 수 없다는 사실은 거의 인정되지 않거나 부정된다. 부의 불평등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지적으로 우월한 극소수가 사회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지적인 불평등은 소득 격차와 달리 어떤 사회적 정책으로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소득의 차이를 숨기거나 줄일 수는 있었어도 지적 생활에서 슈퍼스타 시스템을 없앨 수는 없었다.
마이클 마멋의 '화이트홀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서열의 상층에 있는 사람이 병에 덜 걸리고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이다. 마멋의 연구는 사회계층의 차이 하나로도 사람의 수명이 달라짐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서열 차이가 크지 않은 사회에 사는 사람이 더 오래 산다. 서열 차이가 심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경제적 조건과 관계없이 더 일찍 죽기 때문에 승자는 동료를 죽이는 셈이다.
이런 문제를 (종교를 통한 방법 이외에) 어떻게 해결할지 나는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극단의 왕국이 지금 여기에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극단의 왕국을 좀 더 입맛에 맞게 만들 방책을 찾아야 한다.
15장. 정규분포곡선, 그 거대한 지적 사기
카우스 수학과 만델브로 수학
유로화가 출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수많은 국가의 통화가 있었기에 인쇄업자, 환전상은 물론이고 나처럼 (비교적) 가난한 외환 딜러들이 덕을 보고 살았다. 10마르크 지폐에 가우스의 초상과 그가 창안한 정규분포곡선이 인쇄되어 있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규제 담당자와 중앙은행 사람들이 위험관리 기법으로 여전히 정규분포곡선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속 속도의 급속 증가
가우스 이론의 요점은 대부분의 관측값이 범용값, 즉 평균값 주변에 모인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은 곧 극단값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만델브로적 수학
유럽에서는 부가 규모가 변성을 갖는다. 즉 만델브로적 원리를 따른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확률이 줄어드는 속도는 항상 일정하다.(혹은 줄어들지 않는다)! 수입이 두 배로 늘면 분모는 8억 유로든 16억 유로든 4를 인수로 하여 곱해진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평범의 왕국과 극단의 왕국 사이의 차이다.
6억 4000만 유로 이상 : 1/40,000 vs 1/ .......컴퓨터로 계산 불가능할 정도로 큰 수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두 경우의 패러다임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뒤의 경우는 규모가변적인 것이다. 속도를 줄여 줄 요소가 전혀 없다. 수학에서 말하는 지수 법칙이 규모가변성을 표현하는 또 다른 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수 법칙이 지배하는 환경에 놓여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생활에서 계사한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정밀한 해법을 제시하기보다는 세계의 대략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데에만 주력했다.
기억해야 할 것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의 점들은 평균에서 멀어질수록 확률을 급속도로 떨어뜨리는 맞바람에 부딪히게 되지만 규모가변적인 만델브로의 점들은 그러한 제약을 받지 않는다.
불평등
가우스적 설명틀에서는 편차가 커질수록 불평등은 감소한다. 그러나 규모가변성을 갖는 것은 그렇지 않아서 불평등이 어디서든 똑같다. 갑부들 사이의 불평등은 보통 부자들 사이의 불평등과 같다. 즉 불평등은 감소하지 않는다.
총규모가 어떠하든 불균등한 정도는 더 심해진다.
극단의 왕국과 20 대 80 법칙
20 대 80 법칙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지수 법칙의 가장 흔한 예로, 이탈리아 토지의 80퍼센트가 인구 중 20퍼센트의 소유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을 계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법칙은 세계를 그만큼 불평등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 오로지 불확실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 구성에도 상당히 예견 가능하고 다루기 쉬운 속성이 있어서 의사 결정을 분명히 내릴 수 있다. 즉 중요한 20이 어디에 있는가를 사전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상황을 제어하는 것은 매우 손쉽다.
나무 보기와 숲 보기
요점을 다시 말하자면, 정규분포곡선에 기초하여 불확실성을 평가하는 것은 불연속적이고 급격한 비약이 일어날 가능성과 그 충격을 무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극단의 왕국에서는 적용할 수도 없는 방식이다.
비록 예견하지 못할 만큼의 대규모 편차가 발생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지만 그 충격이 누적될 경우 엄청난 결과가 나타날 것이므로, 극단점이라고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된다.
전통적인 가우스적 방법은 세계를 바라볼 때 일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 후 예외적이거나 이른바 극단점에 해당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두 번째 방법도 있다. 예외적인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일상적인 것은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나는 무작위성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첫 번째 무작위성은 극단적인 것과는 무관하고, 두 번째 무작위성은 극단적인 존재로 인하여 심대한 충격을 받는다. 첫 번째 무작위성은 검은 백조를 낳지 않지만 두 번째 무작위성은 검은 백조를 만들어 낸다. 비유하자면 기체를 다루는 기술을 액체를 다루는 데 쓸 수는 없다.
최대값이 평균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변수를 다룰 때에는 가우스적 접근법을 충분히 채택할 수 있다. 큰 폭의 변동을 낮추는 요인이 있다거나 큰 관측값을 막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면 그 환경은 평범의 왕국에 속한다. 평형상태에서 벗어나더라도 곧바로 이를 되돌리는 강력한 복원력이 존재한다면 역시 가우스적 접근법을 채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가우스적 접근법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대부분의 경제학이 평형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평형 개념은 여러 이점을 갖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경제 현상을 가우스적으로 간주하게 한다.
나는 평범의 왕국형 무작위성이 극단적인 경우의 발생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극단적 사건이 몹시 희귀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비중 있는 역할을 하지 않음을 뜻한다.
희귀한 사건일수록 그 사건에 대한 확률기대값의 오류는 더 커진다.
이제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무작위성을 삼켜버리는지 살펴보자. 가우스 분포 곡선이 인기있는 이유도 그래서이겠지만, 우리가 정규분포곡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확실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가? 평균치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커피잔이 저절로 넘어지지 않는 이유
우리는 제3장에서 평범의 왕국에 대해 검토하면서 한 번 관찰된 사건으로는 전체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살펴본 바 있다. 평범의 왕국의 이런 특성은 모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위력을 발휘한다. 모집단이 커지면 평균값은 그만큼 안정되어 결국에는 모든 표본이 똑같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현실 세계에서는 커피잔이 스스로 뛰어오르는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물리적 세계에서는 극히 희박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커피잔의 이야기는 가우스적 무작위성이 평균 개념 덕택에 미미해짐을 잘 보여준다. 만일 내 커피잔이 커다란 분자 하나로 이루어졌거나 혹은 분자 한개처럼 움직인다면 커피잔이 뛰어오를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커피잔은 몇 조 개나 되는 아주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카지노 업자들이 돈을 잃지 않는 것은 이런 원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도박꾼 한 사람이 거액의 승부를 걸지 않도록 하되 수많은 사람들이 적은 돈을 제각기 걸도록 한다. 도박꾼 전체가 2000만 달러를 건다 해도 카지노는 염려할 것이 없다. 한 판당 평균 20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에 카지노 소유주는 안심하고 잠자리에 든다. 따라서 전체 상황이 어덯게 되든 카지노의 수입은 희한할 만큼 변동이 크지 ㅇ낳다.
이것은 평범의 왕국을 지배하는 제1법칙이 적용된 결과다. 즉 도박꾼이 많을수록 한 사람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적어진다.
그리하여 정규분포곡선에서 평균 주변 값들의 변동폭, 일명 '오차' 는 염려할 것이 못 된다. 이 오차는 미미하므로 전체에 휩쓸려 무시된다. 여기서 오차는 평균값 주변에 얌전히 통제되어 있다.
확실성에 대한 애착
표준편차라는 개념은 평범의 왕국을 벗어나는 순간 무의미 해진다. 가우스 분포 바깥에서는 표준편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존재하더라도 의미가 없으며 설명력도 떨어진다. 정규분포곡선은 단순화라는 환상을 충족시켜 준다.
상관계수 혹은 회귀라는 개념들도 가우스 수학 바깥에서는 의미를 거의 혹은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우리의 방법론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경제 분야에서는 상관계수라는 말을 빼놓고는 대화를 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평범의 왕국 바깥에서 어떻게 상관계수가 무의미해지는지를 알려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두 가지 변수를 찾으면 된다. 예컨대 채권시장과 주식시장,
1994년, 1995년, 1996년별로 두 변수들의 상관계수를 측정해 보라. 이때 측정된 상관계수는 극심한 불안정성을 보일 것이다. 측정치는 선택된 기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상관계수가 현실로 존재하는 양 말하며 형태와 물리적 특성을 부여하여 구현해낸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거의 자료를 수집하여 거기에서 하나의 상관계수나 표준편차를 찾으려 한다면 그 속에 숨은 불안정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파국은 어떻게 초래되는가
그러므로 '통계적으로 의미 있다'는 말을 입에 올릴 때에는 확실성이라는 환상을 경계할 일이다.
포스너는 공무원들이 무작위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한탄하고는 그 처방안을 내놓았다. 예컨대 그는 하필이면 그것도 경제학자들에게서 통계학을 배우라고 정부 정책 담당자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대재앙을 만들어 내도록 부추기는 셈이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의 왕국과 극단의 왕국을 혼동하고 있다. 그는 통계학이 사기가 아니라 '과학'이라 믿고 있다.
케틀레의 평균적 괴물
아돌프 케틀레는 정규분포곡선에서 조화의 원리를 찾아내려 했다. 문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존재한다. 첫째, 케틀레는 자신이 생각하는 평균값, 그 자신의 개념으로는 '표준'에 세계를 뜯어 맞추려는 규범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비일상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 즉 검은 백조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유토피아 꿈꾸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케틀레는 정규분포곡선을 경험 세계 이곳저곳에 적용하려 했다. 그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규분포곡선을 찾을 수 있노라 했다. 그는 이 곡선에 눈이 멀었으니, 일단 머릿속에 정규분포곡선이 자리를 잡으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배울 수 있다.
평범의 왕국, 그 진부한 황금률
후기 계몽시대의 사람들은 저마다 부와 신장, 체중 등에서 황금의 평균치 혹은 중용을 동경했다. 이 동경에는 조화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꿈, 즉 플라톤주의가 담겨 있다.
나는 "중용 속에 가치가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 이 말은 오랜 시간 동안 이상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평범함이란 말 그대로 황금률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평범함이여.
케틀러는 이 개념을 다른 차원으로까지 밀고 갔다. '평균;이라는 표준 개념을 창안하기 시작했으며 거의 모든 것에 그의 표준이 적용되었다. 이렇게 평균 인간의 신체적 특성이라는 개념을 완성한 후 그는 사회 문제로 눈을 돌렸다. 평균 인간은 자신의 습관과 소비 성향과 자신만의 체계를 갖는다.
신체 평균 인간과 도덕 평균 인간, 즉 육체와 도덕에서 평균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케틀레는 평균에서 벗어난 인간들을 평균값 좌우에 배치시켰으며, 정규 분포 통계 곡선의 좌우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을 홀대하였다. 즉 이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에서도 케틀레의 '평균' 혹은 '정상' 개념의 영향이 엿보인다. "부의 분포에 나타나는 사회적 편차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당대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수학자, 경제학자인 외귀스탱 쿠르노는 순수하게 계량적인 자료만을 토대로 표준 인간상을 확립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어떤 속성에 관심을 갖는가에 따라서 표준의 내용도 달라질 수 있으며, 지방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것을 표준의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평균 인간은 괴물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평균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에 뭔가 바람직한 면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특정 분야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빼어나야 한다. 모든 면에서 평균적이어서는 곤란하니까 말이다. 예컨대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연주에서 평균 이상이어야 하되 다른 분야, 이를테면 승마에서는 평균 이하일 수 있다. 제도공은 제도에 관한 한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 즉 어떤 사람이 평균적이라는 것은 이 사람이 모든 분야에서 평균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사실 정확히 평균적이기만 한 사람은 반은 남자, 반은 여자가 되어야 한다. 케틀레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신의 오류
당시에는 평균(중앙값도 같이 취급된다)에서 벗어나는 값은 곧 오류로 취급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케틀레의 개념을 받아들인 것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이 개념은 급속히 인기를 얻었다. 즉 '어떠어떠하다'는 것을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와 혼동하였으며 과학이 이를 보증했다.
평균 인간이라는 개념은 중산층 문화로 스며들었다. 즉 부와 지적 능력을 과시하기 꺼려하는, 막 시작된 포스트 나폴레옹시대의 상인 문화가 이 중산층 문화의 특징이다. 사실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얼마나 좋은 유전자를 타고날지 알 수 없는 합리적 인간이라면 그런 사회를 바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다음 생애에 어느 계층으로 태어날지 선택할 수는 있으나 실제 조건은 미리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아마 모험을 피하려는 쪽을 선택할 것이라는, 즉 구성원의 차이가 적은 사회를 선택하리라는 것이다.
푸앵카레에게 구원을 요청한다면
푸앵카레는 가우스 분포를 좀처럼 믿지 않았다. 가우스 분포는 본래 천체 관측 오차를 측정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되었지만, 푸앵카레는 불확실성을 철저히 감안한 천체역학을 정립하려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푸앵카레는 물리학자들은 수학자들이 가우스 분포 곡선을 필수로 여기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수학자들은 오히려 물리학자들이 가우스 분포 곡선을 경험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우스 분포 곡선을 이용하고 있다는 한탄이었다.
불평등한 영향 제거하기
식료품 상인들의 정신세계를 제외한다면, 나는 사실 중도적이고 평범한 것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다.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줄인다는 데 반대할 인문주의자가 누가 있겠는가? 초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개념처럼 불쾌한 것은 없다! 내가 진정으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인식론적인 것이다. 현실 세계는 평범의 왕국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현실 세계와 어울려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스인들이라면 신으로 모셨을 것이다!
플라톤적 순수 관념론에 매달려 정규분포곡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물론 골턴이 정규분포곡선을 적용한 분야는 유전과 유전학 등 정규분포곡선을 이용해도 될 만한 분야였다. 그러나 신생 통계기법들이 사회적 주제로까지 적용되게 된 데에는 골턴의 열렬한 신념 덕분이었다.
'예, 아니오' 로만 답하시오
심리학이나 의학과 같이 정성적 추론을 수행하는 분야에서는 규모가 중요하지 않고 '예/아니오' 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평범의 왕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말로??) 이곳에서는 개연성 없는 것이 발생할 때의 충격이 그리 크지 않다. 암이거나 아니거나, 임신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전염병을 다루는 경우가 아니라면) 죽음의 정도나 임신의 정도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소득, 부, 투자 부분별 수익, 책의 판매고 등과 같이 규모가 중요한 총량을 다루는 경우 가우스 곡선을 사용하면 분포를 잘못 파악할 수 있다. 가우스 기법은 여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숫자에 문제가 발생해도 전체 평균 계산을 망칠 수 있다. 단 한 번의 손실만으로도 1세기 동안 쌓인 수익이 날라갈 수 있다.
경험주의 심리학이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데 정규분포곡선을 오용하지 않는 데에도 이런 까닭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표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편향이나 오류를 갖고 있는지 연구할 때 경험주의 심리학에서는 '예, 아니오' 형의 결과만을 요구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관측값이 전체 관측값을 무너뜨리는 일은 발생할 까닭이 없다.
정규분포곡선에 관한 사고실험
동전 던지기 사고실험 설명
가우스 분포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많은 경우가 가운데 쪽에 쏠리므로 중간점이 이길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작위성을 분석하는 규모불변적인 분석틀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여기서는 극단적 편차를 얻을 확률이 가속도를 갖고 줄어든다.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은 한 번의 판돈을 극미량으로 하여 동전 던지기를 무한하게 시행했을 때 얻어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간단한 내기에서 완전히 추상적인 어떤 것 앞에까지 도달했다. 관찰의 영역에서 수학의 영역으로 옮겨 온 것이다. 수학에서는 사물이 순수성만을 갖게 된다.
그런데 완전히 추상적인 어떤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표준편차란 사물을 측정하기 위한 숫자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어떤 현상이 가우스적일 경우에 우연히 일치될 수 있을 뿐이다.
눈여겨볼 점은 정규분포곡선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가정
핵심 가정 1. 동전 던지기는 매 회마다 서로 독립되어 있다.
핵심 가정 2. '급격한' 비약이란 없다.
명심할 점은 위의 두 핵심 가정이 충족되지 않으면 무작위적 걷기, 혹은 동전 던지기는 정규분포곡선을 산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강력한 만델브로식의 척도 불변의 무작위성과 만나게 된다.
정규분포곡선의 편재성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이 현실 세계의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계학자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나는 정규분포곡선이 아닌 다른 곡선을 개발하는 쪽으로 연구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정규분포곡선을 충분히 이해하되, 이것이 성립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분명히 구분하려 한다.
가우스 분포 곡선의 편재성은 세계의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 즉 인간의 머릿속에서 기인하는 문제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검은 백조론을 수긍하면서도 이 주장의 논리적 귀결, 즉 표준편차라는 단 한 가지 척도로 무작위성을 (그리고 그것을 '위험'이라고 칭하며) 포착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순한 답만을 추구해서 불확실성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한 발 더 나아간다는 것은 용기와 헌신을 요구할 뿐 아니라, 점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연결해서 볼 수 있는 능력, 무작위성을 철저히 이해하겠다는 욕구 등을 필요로 한다.
물리학자 중에는 가우스 이론을 배격하는 대신 정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설명틀을 개발하겠다면서 역시 또 다른 잘모을 범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선호적 연결이라는 개념 등을 정교하게 다듬느라 주로 정력을 허비하지만, 이 역시 플라톤적 관념론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 과학에 대한 이해와 전문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세계의 무작위성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며, 계산이란 목적이 아니라 보조적 수단일 뿐임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나는 찾지 못했다.
이런 사상가를 찾아 15년을 보낸 끝에 내가 만난 사람이 있다. 그 이름도 위대한 베누아 만델브로가 바로 그 사람이다.
16장. 무작위성의 미학
무작위성의 시인
유명한 어떤 과학자에 대해 묻자 만델브로는 이렇게 평했다. "전형적인 '모범생'이지. 점수 좋고, 깊이 없고, 꿈도 없는 학생이야." 이 과학자는 노벨상 수상자였다.
삼각형의 플라톤주의적 성격
만델브로야말로 (1) 점들을 연결해 냈고 (2) 무작위성을 기하학과 (그리고 기하학의 특정 분야와) 연관 지었으며 (3) 이 주제에 대한 필연적 결론까지 끌어냈다.
자연의 기하학
삼각형, 사각형, 원, 그 밖의 기하학적 개념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개념들은 자연 속에 존재한다고 하기보다는 건축가, 응용미술가, 교사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우리의 천성이 플라톤적인 것을 선호하며 물질 그대로가 아니라 사유에 의해 처리된 것에 끌린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장님이거나 문맹이거나, 아니면 둘 모두에 해당한다. 자연의 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다르다는 것이 명명백백한데도 누구도, 거의 누구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
프랙털
프랙털이란 만델브로가 만들어 낸 용어로, 거칠게 조각난 모양의 기하학을 서술하기 위해 '조각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프락투스'에서 가져왔다. 프랙털은 기하학적 패턴이 다양한 크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양상을 뜻한다. 패턴의 반복은 극히 미세한 차원까지 되풀이된다.
이 장에서는 프랙털 원리가 불확실성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하며, 이때의 불확실성을 나는 만델브로적 무작위성이라 부를 것이다.
식물의 잎맥은 가지의 모양과 같고, 가지는 나무 모양을 닮는다. 또 바위는 작은 산과 같은 모양이다. 대상의 크기를 변화시켜도 질적인 변화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유사성'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극히 간단한 반복 규칙이 작용하고 있다. 컴퓨터 혹은 자연은 이 규칙을 이용하여 엄청나게 복잡해보이는 형태를 만들어낸다.
만델브로의 집합은 놀랍도록 간단한 회귀 규칙을 이용하여, 끝없이 증가하는 복잡성의 세계를 그림으로 구현해 냄으로써 카오스 이론 추종자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희귀적이란 어떤 것이 무한하게 되풀이하여 적용됨을 말한다. 만델브로 집합은 한없이 작은 규모까지 해상도를 높여서 볼 수 있으며 그 때마다 익숙한 형태가 계속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형상은 점점 또렷해진다. 이들 형상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상호 유사성, 즉 강한 유적 닮음을 보인다.
프랙털 개체들은 미학에서도 다루어진다.
시각 미술 분야, 음악, 시
온갖 예술가들이 만델브로의 말을 인용한 덕에 상아탑에서 외면받던 만델브로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수학자 반열에 올랐다. 만델브로의 프랙털 원리는 보편성을 갖는다는 특성 이외에도 독특한 속성을 하나 더 갖고 있다. 바로 매우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두 가지 역할을 해냈다. 첫째, 프랙털 개체는 간단한 규칙 재귀적으로 적용하여 생성되기 때문에 컴퓨터(혼은 어머니 자연)가 자동으로 수행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둘째, 시각적 직관의 생성작용을 통해 수학자와 그에 의해 생성된 대상 사이에 소통이 생겨났다.
이제 이런 점들이 어떻게 무작위성과 연관되는지 생각해 볼 차례다.
눈으로 보는 극단의 왕국과 평범의 왕국
서서 내려다본 양탄자는 평범의 왕국이자 대수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계다. 나의 육안으로는 기복의 합만 보이므로 그 과정에서 기복은 사라진다. 이것은 가우스 분포의 무작위성과 같다. 작은 규모의 가우스 불확실성은 합산됨으로써 확실성을 얻는다. 이것이 대수의 법칙이다.
가우스 분포 원리에는 자기 유사성이 없다. 책상 위 커피잔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것의 표면은 평범의 왕국에 속하지 않아서 해상도를 달리해도 매끈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그렇지만 우주에서 보면 지구 표면은 매끈해 보인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프랙털 기하학이 부의 분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또 도시의 규모, 금융시장의 수익,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수, 행성의 크기 따위와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자, 이제 점들을 연결해 보자.
그 핵심은 이것이다. 규모의 변화와 무관하게 (어느 정도) 보존되는 대수적 혹은 통계적 측정값을 갖는 것이 프랙털의 속성이다. 가우스 수학과 다른 것은 비율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극한의 부자도 전체 부자와 유사하다. 다만 더 부자일 뿐이다. 부라는 것은 규모와 무관하다. 아니 정밀하게 말하자면, 그 정도가 미지이긴 해도 규모 의존적이다.
오늘날에도 경제학과 사회과학 통계에서는 -적당한 수준의 무작위성만 문제가 되는 것처럼 포장하는 기술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프랙털 원리를 인정하기보다는 배겨하기가 더 어렵다. 어째서 그런가? 그거은 단 하나의 사건으로도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을 옹호하는 주장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랙털은 기본 속성이며 근사값이며 기본틀이어야 한다. 프랙털은 검은 백조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을뿐더러 모든 검은 백조를 예측 가능한 사건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프랙털은 커다란 사건을 예상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검은 백조의 효과를 상당 부분 누그러뜨릴 수 있다.
프랙털 무작위성의 논리
부의 규모가 100만 달러에서 200만 달러로 커지면 그 이상의 부를 소유할 사람의 숫자는 4분의 1로 줄어든다. 이 때 지수값은 2이다. 만일 지수가 1이면 2분의 1로 줄어든다.
제곱지수가 낮을수록 상위 부분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문제는 그 비율이 결과에 미치는 영향의 강도다. 불과 0.2의 지수 차이가 결과에서는 극심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금융 자료 2000만 점을 조사한 바 있다. 우리는 똑같은 표본 집합 수를 가지고 계산했지만 각자 내놓은 지수값은 일치하지 않았다. 분명히 자료 속에 프랙털 지수 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정확한 값을 알아낼 수는 없다는 점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포가 규모가변적이고 프랙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의사 결정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정밀함을 경계하라
경험을 통해 깨달은 몇 가지 요령이 있다. 제곱지수를 어림잡을 때마다 지나치게 크게 잡는 경향이 있다.(지수값이 클수록 큰 편차의 역할이 작아진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보지 않는 것보다 우리가 보는 것이 검은 백조가 될 확률이 적어진다. 나는 이것을 가면무도회 효과라 부른다.
때로는 프랙털을 가우스 분포라고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이것은 상당히 높은 값 이상에서만 프랙털 특성이 나타나는 경우 특히 그렇다. 프랙털 분포에서는 그렇게 큰 수치의 극단적 분포가 존재해도 쉽게 감지될 수 없을 만큼 드물다. 그것이 프랙털 분포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이다.
또 하나의 물웅덩이 문제
세계를 어떤 분석틀로 보든 그 변수값을 알아내기는 어렵다. 만약 메커니즘이 프랙털적이라면 큰 값을 낳을 수 있고, 따라서 큰 편차의 발생이 가능하다. 그러나 어떻게 가능한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는 정밀하게 알아내기 어렵다. 이것은 이른바 '얼음이 녹은 자리의 물웅덩이를 보고 얼음 모양 알아맞히기' 문제와 유사하다.
최근 나는 복잡계 연구를 개괄한 세 권의 '대중과학서'를 읽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임계 질량>, <어째서 대부분이 실패하는가> 다. 저자들은 사회과학의 세계가 지수 법칙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이런 현상에는 보편성이 존재하며, 자연 세계의 다양한 과정과 사회 조직의 행동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네트워크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이른바 자연과학의 임계 현상과 사회 조직의 자기 조직화 현상이 놀랍도록 서로 일치함을 보인다. 이들은 눈사태와 사회적 유행 현상, 그리고 그들이 이른바 '정보 폭포'라고 부르는 것을 발생시키는 과정을 연관시켰다.
물리학자들이 임계점 연구와 관련하여 거듭제곱 법칙에 특히 흥미를 느끼는 이유도 그 법칙이 갖는 보편성 때문이다. 동역학계 이론이나 통계역학에서 임계점 주변의 동역학적 특성이 그것의 기저 시스템의 구체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경우는 매우 많다. 같은 유형에 속하는 계끼리는 계의 여타 측면이 달라도 임계점에서의 지수값이 동일한 경우도 많다.
마지막으로 세 저자 모두 통계물리학적 기법의 사용을 권장하고 계량경제학과 가우스 정규 분포식의 규모불변적인 분포는 전염병 대하듯 피한다.
그러나 이들 세 저자는 정밀한 값을 계산해 내려다가, 과정의 전후(문제와 문제의 역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는데, 내게 이것은 과학적 인식론적으로 가장 큰 잘못이다. 이들만이 아니다. 자료를 다루면서도 그 자료로 의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똑같은 죄, 즉 이야기 짓기의 오류를 다양한 형태로 범하고 있다. 피드백 과정이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설명틀만 보고 이것이 현실을 확증해 준다고 여긴다. 나는 앞의 세 책의 기본 발상이 옳다고 믿지만 그 발상을 이용하는 방식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 방식을 정밀한 값을 이용하여 추구하겠다는 저자들의 시도도 당연히 틀렸다고 생각한다. 사실 복잡계 이론에 따르면 현실을 설명하겠다는 과학적 설명틀은 더욱 의심스러워진다. 이런 방식은 모든 백조를 흰색으로 만들지 못한다. 흰 백조는 예견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흰 백조를 모두 회색 백조로 만든다.
인식론적 측면에서 볼 때 상향적 지식을 추구하는 경험주의자에게 세계는 말 그대로 전혀 다른 세상이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세계를 지배하는 방정식을 읽는 호사를 부릴 수 없다. 우리는 자료를 관찰하고 거기서 실제 과정이 어떠하리라는 가설을 세운 후, 추가된 정보에 맞게 방정식을 조정함으로써 '가늠자를 수정해' 나갈 뿐이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앞서 예상한 것과 새로 발생한 것을 비교한다. 역사는 뒷걸음질 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이처럼 고단한 일이다. 특히 이야기 짓기의 오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고역스러운 작업이다. 기업인들이 자존심이 세다고만 생각하지만, 이들은 의사 결정과 그 이후 발생한 결과를 바라보며 초라함을 느끼며, 설명틀과 실제 현실 사이의 차이 앞에서 새삼 겸허함을 절감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보의 불투명성과 불완전성, 세계 작동 원리의 파악 불가능성이다. 역사는 그 속내를 우리 앞에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추측만 할 뿐이다.
표상에서 실재로
방금 내가 말한 내용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이다. 심리학, 수학, 진화론을 공부하여 이를 돈이 되는 일에 적용함으로써 그 가치를 확인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정반대의 해법을 권한다. 격렬하고 힘겨운 미지의 시장 불확실성을 연구함으로써 자연의 무작위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어라. 그리고 이를 심리학, 확률론, 수학, 의사결정론, 통계물리학에 적용시켜라. 그리하면 이야기 짓기의 오류, 루딕 오류, 플라톤적 관념이라는 거대 오류 그리고 표상에서 실제로 접근하려는 거대 오류 등이 눈에 보일 것이다.
만델브로에게 물었다. 과학자들이 왜 금융 분야처럼 천박한 분야에서 일하느냐고?
"자료, 자료가 황금맥일세."
엄청난 자료를 다루는 일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대량의 자료를 연구하는 일은 표상과 실제 사이의 통행료를 잘못된 방향으로 주행하는 것이 왜 잘못인지 깨닫게 하는 직관을 길러준다.
그런데 어떤 분포가 가우스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물론 자료를 통해서다. 그러므로 확률 분포의 속성을 알려면 자료가 필요하고, 확률 분포는 얼마나 많은 자료가 필요한지를 말해 준다. 이것은 심각한 순환 논증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분석 이전에 그 대상의 분포가 가우스적이라고 미리 가정을 해놓으면 이런 회귀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가우스적 분포는 몇 가지 이유로 그 속성을 생각보다 쉽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극단의 왕국의 분포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일반적 법칙을 밝히는 과정에서 가우스적 분포를 선택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가우스적 분포가 기본 사양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정규분포를 전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범죄 통계, 사망률처럼 평범의 왕국에 속하는 몇 되지 않는 영역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미지의 속성들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자료나 극단의 왕국에 속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역사적 자료를 다루는 통계학자들이 이런 점을 모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그들은 귀납법의 문제 때문에 자신들의 작업 전체가 무위로 돌아가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둘째, 그들은 자신들의 예측이 빚어낸 결과를 냉정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측 전문가를 경계하라
극단의 왕국의 탄생을 설명하는 멋진 설명틀이 많이 제출되었다. 첫 번째 부류는 단순한 '부익부' 설명틀로 시장을 장악하고, 학술적 명성이 소수에 집중되는 등의 현상을 설명한다. 두 번째 부류는 '삼투 효과 모델'이라 불리는 것으로, 개인의 행위보다는 개인의 행동 범위를 주로 다루는 설명틀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대부분의 설명틀은 현상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정밀한 예측도 해내려 한다. 나는 여기에 분개한다. 이들 설명틀은 극단의 왕국의 발생을 훌륭하게 보여 주는 도구이지만 현실이라는 '생성자'는 이런 설명틀이 정밀한 예측을 내놓도록 고분고분하게 따라 주지 않는다. 적어도 극단의 왕국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최근의 논문에서는 이런 경향이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척도 조정이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비선형적 과정에서 흔히 나오는 오류를 피하겠다는 발상은 훌륭하다. 그런데 비선형 과정은 선형 과정보다 자유변이의 정도가 훨씬 크며 잘못된 설명틀이 낳는 위험도 크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필립 볼의 저작과 같은 책들은 풍부한 설명과 정보를 담고 있지만 정밀한 계량적 설명틀이 되겠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 그렇지만 이런 설명틀에서도 뭔가 배울 바가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행복한 결말을 찾아
첫째, 규모가변성을 가정함에 있어서 나는 그 어떤 큰 값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즉 이미 알려진 최대값 이상에서도 불균등성이 사라질 이유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확보한 자료에 나오지 않은 것은 추론할 수 있되, 그것의 존재 가느엉은 여전히 확률이 영역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책이나 신약에 대한 투자나 과거 자료의 통계로 예상한 결과보다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주식투자의 손실은 과거 자료가 보인 것보다 클 수 있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프랙털적이다.
둘째, '정밀함'의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연 현상에서 예를 찾아 보기로 한다. 산은 돌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다. 이러한 유사성은 정밀한 수준의 '자기 동일성'이 아니라 자기 친연성이다. 그런데 만델브로가 '친연성'의 개념을 정확히 구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그 대신 '자기 동일성'이라는 용어가 퍼지면서 '유적 닮음' 대신 '정밀한 닮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산과 돌의 관계처럼, 10억 달러 이상의 부의 분포와 10억 달러 이하의 부의 분포는 완전히 똑같지 않고 '친연성'을 갖는 것이다.
셋째, 나는 앞서 경제물리학(통계적 물리학을 사회경제에 적용하는 학문)에서 나온 많은 논문들이 현실 세계의 현상에서 숫자를 조정하는 '척도 조정'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연구는 예견을 시도한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위기나 확산 현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예견할 수 없다. 나는 이 설명틀이 멋지다고 느끼지만 실제 예견 도구로 택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의 의도대로 이 설명틀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열려 있는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해 주면 된다.
회색 백조는 어디에?
나는 검은 백조를 싫어한다. 나는 불평등을 싫어하고, 불평등이 일으키는 해악을 싫어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검은 백조를 제거하고 싶다. 최소한 이들의 해악을 누그러뜨려서 우리가 안전해지기를 원한다. 프랙털적 무작위성은 검은 백조의 습격을 줄이는 길의 하나다. 프랙털적 무작위성은 어떤 백조들을 볼 수 있게 한다. 즉 그 결과를 알게 함으로써 백조의 색깔을 회색으로 바꾸어 준다. 그러나 프랙털적 무작위성은 정밀한 처방을 내놓지 않는다.
만델브로의 프랙털 모델은 검은 백조 (전체가 아니라) 몇 마리를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이미 말했듯이 어떤 검은 백조는 우리가 무작위성의 원천을 무시하기 때문에 출현한다. 그 밖의 다른 검은 백조는 우리가 프랙털 지수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회색 백조는 모델화할 수 있는 극단적 사건과 관련된 것이고, 검은 백조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것과 관련된다.
프랑스어에서는 'hasard'와 'fortuit'의 차이가 뚜렷하다. 전자는 추적 가능한 무작위성을 뜻한다. 후자는 철저히 우연적이고 내다보기 어려운 것을 뜻하는데, 이것이 내가 말하는 검은 백조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만델브로가 다룬 것은 회색 백조였지만 나는 검은 백조를 다룬다. 그러나 만델브로의 방법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그의 방법은 불확실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야생의 동물이 어디 있는가를 알면 우리는 그만큼 안전해지는 것 아닌가.
17장. 로크의 미치광이, 혹은 엉뚱하게 사용되는 정규분포곡선
내가 가진 책 중에는 극단의 왕국을 다룬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아, 몇 권 있긴 했지만 통계학자가 아니라 통계물리학자의 책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범의 왕국에 통용되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는 그들을 극단의 왕국에 내보내는 셈이다. 그러니 온갖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극단의 왕국에 속하는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것이 평범의 왕국에 속한 것인 양 다룬다. 즉 '근삿값'으로 처리하고 있다.
50년 대 10일
지난 50년간 금융시장에서 가장 극단적이었던 10일간의 가격변동이 수익의 절반을 차지한다. 50년 대 10일의 비율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가한 것에만 매달려 있다. 전통적 금융 이론은 일일가격의 이런 급당락을 비정상적인 것으로만 취급한다.
이러한 사실은 경제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에 대체로 동이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가우스의 연장을 다시 집어 들고 자신의 습관 속에 참호를 파고 들어간다. 게다가 가우스의 연장은 그들에게 수치를 제공해 준다. 이 수치는 '없는 것보다는 나은' 무기로 여겨진다. 그 결과 무엇이든 단순하게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미래 -불확실성 측정 도구가 나온다. 간단히 서술하기에는 너무도 풍부한 현실도 이 도구 앞에서는 한 개의 단순한 문제로 전락하고 만다.
영역 의존적인 은행원의 배반
금융계가 가우스 수학을 따른다면 (표준편차 20을 넘는) 위기가 일어날 확률은 우주 나이로 볼 때 수십 억년에 한 번 일어나는 꼴이다. 이들은 정규분포수식을 중심적 도구로 산는 일을 포기하기를 주저할 뿐이다. "아니, 그러고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갖고 있는 게 없잖습니까?" 사람들 어떤 수치를 갖고 거기에 기대고 싶어 한다.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주식시장 붕괴 이후 위원회는 두 사람의 이론가에게 상을 수여했다. 수상자는 해리 카코위치와 윌리엄 샤프였다. 이들은 가우스 곡선에 입각한 플라톤적 설명틀을 아릅답게 구축해 냈고, 이것이 이른바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이라 불리는 것에 기여 했다. 그러나 여기서 정규분포라는 가정을 제거하고 가격을 규모가변적인 것으로 처리하면 남는 것은 허풍뿐이다.
"이 두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 세상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식이면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나는 목이 쉬도록 다음과 같은 말을 그치지 않으련다. "사회과학의 어떤 이론의 운명은 그 이론이 옳고 그름이 아니라 접촉성 유행에 따라 결정된다."
헤지펀드의 자료를 펼치면 '위험' 측정치라 주장하며 계량적 수치를 곁들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의 측정 기법은 정규분포곡선과 비슷한 것에 기초한 자기네 용어에 따라 얻어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연기금과 펀드의 투자는 '포트폴리오' 이론에 의존하는 '컨설턴트'들이 자문해 준 결과에 따라 이루어진다. 만일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들은 표준적인 과학기법에 의거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설명틀이란 반드시 현실성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기이한 주장을 다시 들고 나오는 경제학자들도 있었다. 이 정규분포곡선 신봉자들이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신뢰할만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다.
즉 사람들은 20년에 한번과 같이 확률이 적은 사건을 일정한 주기마다 일어나는 사건으로 나타난다고 착각했다. 아직 10년이니 별 탈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평범의 왕국과 극단의 왕국은 서로 다르다는 점을 납득시키는 일은 참으로 힘들다. 그들은 이런 논리도 편다. "지금까지 정규분포곡선만 갖고도 잘 대처해 오지 않았고? 신용평가기관도 이 곡선을 이용하지 않소?
내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가우스 분포 곡선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우리도 인정한다고 말씀드리겠소.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자고 아이까지 버릴 수는 없는 겁니다."
20년 동안 계속된 논쟁에서 이 포트폴리오 이론 신봉자들은 큰 편차를 낳는 약점을 가진 정규분포 이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다. 단 한 사람도 하지 못했다.
확인 편향
통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유죄 증거가 없다는 것과 무죄의 증거를 혼동하고 있다.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은 큰 편차를 혀용하지 않지만 그 반대의 세계인 극단의 왕국에서는 길고 매끈한 분포, 즉 장기간 평온한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검은 백조의 출몰
롱텀캐피털메지먼트의 인재들은 모두 천재로 인정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교한 '계산기'를 이용하여 포트폴리오 이론을 적용하면 자신들의 주 업종인 위험관리 분야의 수지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루딕 오류를 산업적 규모로까지 확대하고 만 것이다.
1988년 여름 러시아 금융 위기로 검은 백조가 출몰한 거이다.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는 파산했다. 피해가 커지면서 금융 시스템 전체가 붕괴했다. 손실 규모가 워낙 엄청났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은 담배 회사들이 겪은 운명을 포트폴리오 이론가들도 당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MBA마다 포트폴리오 이론을 가르치는 데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이론에 포함된 옵션 투자 공식에는 '블랙-숄스-머턴' 공식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어떻게 '증명'을 할 것인가
머튼의 방법론은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 에서 도출된 이론들은 마침내 사람들이 소비하고, 저축하고,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지출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양상을 설명하는 거대 이론으로 구축된다. 그는 우리가 사건들의 발생 가능성을 모두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지긋지긋한 평형상태라는 용어가 전가의 보도와 같이 사용된다. 그러나 그가 쌓아 올린 지적 구조물은 마치 모노폴리 게임처럼 규칙은 잔뜩 있지만 출구는 없는 놀음판과 같다.
로크는 미치광이란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정확하게 추론을 하겠다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머턴식의 방법론을 채택하는 학자에게도 이 개념이 들어맞지 않을까.
세계가 수학에 들어맞기를 원한다면, 안됐지만 다른 세상을 찾아봐야 한다.
머턴과 같은 사람이 현실 분석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수학적 완벽성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군이나 안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와 전혀 다르다. 그들은 루딕 추리의 '완벽함'에는 흥미가 없는 대신 현실에 적합한 가정을 수립하려 한다. 요컨대 그들은 삶에 관심을 둔다.
케인스 이론을 형식화하려 함으로써 케인스 이론을 오히려 망쳐 놓았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수학에 맞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는 힐난을 받을 만하다 통찰력 있는 학자인 마틴 슈빅은 위 네 경제학자들의 설명틀이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추상적이기 때문에 전혀 쓸모 없다고 비판한 탓에 여느 비판자들처럼 학계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머턴 주니어에게 내가 물었을 때 그러했듯이, 이 학자들은 비판을 받을 때마다 '엄밀한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자신들이 게임의 규칙을 정해 놓고는 우리에게 그 규칙을 따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과학'을 가장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확실한 것을 찾아내겠다는 '실패한 과학' 보다는 세부에 밝은 세련된 기능을 개발하는 쪽을 택하련다. 아니, 저 신고전주의 이론가들이 저지르는 일은 훨씬 심각하지 않을까? 이들은 혹시 있지도 않은 확실성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아닌가?
회의적 경험주의는 정반대의 방법론을 취한다. 나는 이론보다는 그 이론이 전제하는 것에 주목한다. 나는 이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내 발길에 직접 불을 밝힘으로써 뜻밖의 사태에 놀라는 일이 없도록 대비한다. 나는 정밀함을 추구하다 오류를 빚기보다는 폭넓은 측면에서 대체로 옳은 쪽을 추구한다.
이론의 우아함은 종종 플라톤주의가 유도한 결과물이자 약점이 된다. 이론의 우아함은 우아함 자체를 추구하는 쪽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론은 약물(혹은 정부)과 같은 것이다. 이론은 이따금 쓸모없고, 가끔만 필요하며, 언제나 그 자체의 완벽성에만 몰입되는 경향이 있으며, 또 이따금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이론을 다룰 때에는 경계하는 마음과 적당한 균형과 면밀한 감독이 필요하다.
18장. 짝퉁의 불확실성
이곳에서 나는 루딕 오류의 중요 결과로 생각될 것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불확실성을 우리에게 예보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 왜 실패를 범하고 우리를 엉뚱하게 뒷문으로 인도해서 사이비 확실성에 맞닥뜨리게 하는지 등등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살펴보는 루딕 오류
조건을 극도로 단순화한 게임에서의 무작위는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무작위를 닮지 않은 것이다. 주사위 점수는 평균에 빠르게 근접해가기 때문에 고객이 아무리 기교를 부리더라도 예외적인 일들은 점점 사라지므로 아주 장기적으로 카지노가 고객을 이기게 된다고 나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카지노 게임에서는 베팅 횟수를 늘리면 늘릴수록(혹은 판돈을 줄이면 줄일수록) 평균이라는 것의 작용 때문에 무작위성이 점점 배제된다.
루딕 오류는 다음과 같은 경우의 확률 상황에 나타난다. 주가의 변동, 주사위 던지기, 동전 던지기, 0 또는 1의 값을 갖는 악명 높은 디지털 게임, 브라운 운동, 혹은 이들과 비슷한 사례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위성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작위성이 발생하기 때문에 '원무작위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루딕 이론에 빠진 모든 이론들은 어떤 층위에서든 불확실성을 무시한다는 데에 핵심적 문제가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 이론의 주창자들조차 이런 문제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큰 줄기가 아니라 작은 부분에 집착하는 노력은 흔히 더 큰 불확정성 원리라 부르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사이비 전문가 판별하기
더 큰 불확정성 원리란 양자물리학에서 특정한 쌍의 값을 임의 정밀도에서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극소 세계에 나타나는 이러한 불확정성은 1937년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불확정성 원리를 불확실성 일반의 대표자로 여긴다면 우습기 짝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첫째, 이 불확정성은 가우스 정규분포적이다. 평균에 근접하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정성은 우리가 살펴본 대수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다른 유형의 무작위성은 대부분 평균값에 귀착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사건이나 기상 사건은 이런 속성이 없기 때문에 예견할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떤 '전문가'가 소립자라는 용어를 동원하며 불확실성의 문제를 말한다면 그 전문가는 사이비일 확률이 높다.
철학자는 사회에 위험한 존재인가?
제8장에서 바스티아의 주장을 상기한다면 이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무의미한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불확실성에 대한 연구를 소모시킨다. 우리의 (인지적이며 과학적인)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 생각보다 더 한정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사람은 검은 백조가 출현할 위험성을 높이는 셈이다. 불확실성의 개념을 희석시킴으로써 검은 백조에 대한 맹목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금융과 경제 분야의 사람들은 가우스 정규분포 곡선에 깊이 빠지다 못해 숭배할 정도다.수 많은 개론서들은 학생들의 머리를 정규분포 방법론에만 맞추도록 할 뿐이었다.
실행의 문제
우리의 마음을 폐쇄적으로 만드는데 정부 관료 빰치기 때문이다.
몇 명의 비트겐슈타인이 바늘귀 위에서 춤출 수 있는가
철학자들은 보통 사람이 당연히 여기는 것을 의문시하는 일을 직업으로 한다 이들은 신의 존재에 대하여, 진리의 정의에 대하여, 빨간 것의 빨간 속성에 대하여, 의미의 의미에 대하여, 진리에 대한 의미론적 이론이나 개념적 혹은 비개념적 표상에 대하여 논쟁을 벌일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그런데 이들은 주식시장과 연금 관리자의 능력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즉 '전문가들이' 그렇게 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서, 그들은 사회적 사건이 예견 가능하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연방준비회 의장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을지 모른다. 낡아 빠진 주제에만 시선이 고정된 이런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숨이 막히도록 고통스럽다.
칼 포퍼, 필요할 때 그는 어디에 있는가?
책에서 현실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현실에서 책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접근법을 취하면 말만 요란한 화려한 경력자들을 무력화할 수 있다.
철학 바깥에 있는 문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철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철학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철학 유파들이 후퇴하고 있다. ..... 지정한 철학은 언제나 철학 외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가 부패하면 철학도 죽는다. (칼 포퍼)
나는 수학이 현실의 객관적 구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전체적인 요점은, 인식론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짐차를 말 앞에 붙들어 매는 격이며, 수학이 통용되는 영역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잘못된 수학을 채택하고 거기에 눈이 먼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현실에서 작동하는 수학도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수학 역시 신념을 합리화하는 증거만 찾아 주는 장치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교와 애널리스트
이제 우리는 교황 무오류설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노벨상 무오류설은 신봉하는 것 같다.
생각보다 쉽다 : 회의론에 입각한 의사 결정의 문제
사이비 회의론
1) (어떤 노력을 하든) 내일 해가 뜨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
2) 사후 세계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3) 화성인 혹은 악마가 내 머리를 조종할 수 있는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나는 실패자가 되지 않는 방법을 여럿 갖고 있다.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검은 백조 이야기는 실패를 면하는 정도를 넘어서 행동의 준칙을 마련해 준다. 검은 백조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지식을 어떻게 행동으로 만들고 어떻게 가치 있는 지식을 판별하는가를 알려 준다. 결론에서는 우리가 검은 백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살펴보기로 한다.
4부. 결론
19장. 절반 더하기 절반, 혹은 검은 백조와 맞붙어 지지 않는 방법
나는 삶의 일상, 긍정적 사건, 화가 아펠레스의 성공처럼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는 잠재적 선물을 만들어 내는 무작위성을 좋아한다. 남들이 위험을 무릅쓰는 곳에서는 보수적이며, 남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분야에서는 공격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나는 사소한 실패에는 괘념하지 않는 대신 커다란 실패, 혹은 치명적일 수 있는 실패에는 크게 우려한다.
벤처 투자는 어차리 위험성이 있음을 아는 것이고, 적은 자금만 투자하기 때문에 손실이 제한된다.
나는 익히 알려지고 관심을 끌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별로 우려하지 않는 대신 숨어 있는 더 나쁜 위험을 우려한다. 나는 테러리즘보다는 당뇨병을 우려한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우려하는 것들에는 근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위험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터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대신 기회를 놓친 것을 안타까워한다.
나는 긍정적 검은 백조에 노출될 수 있을 때에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긍정적 검은 백조는 피해가 적다. 반면에 부정적 검은 백조의 위협을 받을 때에는 아주 보수적이 된다.
놓친 기차가 아쉽게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기차를 타겠다고 뛰지는 않아."
운명을 무시하라. 그 이후 나는 시간표에 맞춰 살겠다고 달음박질하지 않으려 애썼다. 떠나는 기차를 쫓아가지 않게 되면서 나는 우아하고 미학적인 행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고, 자기의 시간표와 시간, 자기 인생의 주인됨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놓친 기차가 아쉬운 것은 애써 좇아가려 했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남들의 생각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할 수만 있다면, 경쟁의 질서 바깥이 아니라 그 위에 서도록 하라.
인생의 기준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면 이미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신이 설계한 게임에서는 쉽게 패배자가 되지 않는 법이다.
검은 백조식으로 말한다면, 개연성 없는 일이 당신을 지배하는 것을 방치할때, 당신은 그 극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항상 당신이 하는 일을 장악하라. 그리하여 이것을 당신의 목표로 삼아라.
결론
귀납법의 철학, 지식의 문제, 온갖 기회, 우리를 두렵게 하는 실패의 가능성 등이 모든 것보다 다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사고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음식이 형편없거나 커피가 식었거나 퉁명스런 반응을 얻거나 불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면 하루를 망쳤다고 화를 내기 일쑤다. 나는 이런 모습이 당황스럽다. 나는 인생을 좌우할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행운이며 희귀 사건이며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의 사건이다.
지구보다 수십억 배 큰 행성에 묻어 있는 한 점 먼지를 생각해 보라. 이 먼지 한 점이 우리가 태어난 확률과 같다. 거대한 행성은 그 반대의 확률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사소한 일에 성내기를 그칠 일이다. 성을 선물로 받았는데도 기꺼워하기는 커녕 욕실에 곰팡이가 낄지 모른다고 전전긍긍하는 배은망덕자가 되지 말라. 선물로 받은 말의 입을 열어 흠을 찾으려 애쓰지 말라. 기억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검은 백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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