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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으로 보는 사회 1편

 

 

물리학, 임계 질량, 책디자인을 보면 정말 읽고 싶지 않아 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복잡계를 알아 가는데는 정말 좋은 책입니다. 

 

서론 - 정치 산술

 

1690년 즉위식을 마친 영국의 윌리엄 3세에게 책 한 권이 전달되었다.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튼튼하고 안전한 나라임을 밝히겠다는 내용의 책이다. 내용은 영국은 위대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페티는 어떤 근거로 그런 과감한 주장을 했을까? <정치 산술>이라고 부르는 그의 책은 정치학의 효시였다.

 

페티는 영국 사회의 건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숫자를 사용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상대적이고 과장된 언어와 학문적 추론에만 의존하는 대신, 내 생각을 숫자, 무게, 또는 측정치로 표현하고, 상식을 근거로 하는 추론만을 이용하며,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근거만을 고려하는 길을 선택했다. 

 

페티는 변덕스러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에 대해서는 측정하거나 정량화할 수 있는 정도까지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치 산술의 과학을 이용하면 국가의 지도자들이 인간의 비합리성에서 벗어나서 건전하고 검증할 수 있는 통치 원칙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정치학자들이 인간사는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변덕과 편견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한탄하는 사실을 안다면 페티는 정말 실망할 것이다.

 

케네스 월츠는 <개인, 국가, 전쟁>(1954)에서 언젠가는 국가들이 독선이나 논쟁이 아니라 합리적인 이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밝혔다.

 

월츠는 페티가 생각했던 일종의 뉴턴적 물리학과 같은 단순함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페티의 그런 시도가 오늘날에는 놀라울 정도로 순진해 보이지만 현대 물리학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는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물리학에서는 정말 특별한 일이 진행되어 왔다. 

 

본래 우주의 맹목적인 물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개발했던 도구와 방법과 아이디어들이 이제는 전혀 뜻하지도 않았고, 언뜻 보기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는 분야에서 응용되기 시작했다. 물리학이 사회의 과학에서 유용해 진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고, 왜 그런 사실을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그런 노력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상당히 잘못 응용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의 물리학의 한계와 위험성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1980년대에 무르익었던 카오스 이론은 지금까지는 비교적 견고해 보인다. 카오스 이론은 시장경제의 모델로 알려지게 되었고, 유인자라고 부르는 안정적인 동력학적 상태의 개념을 이용해서 어떤 사회적 거동이나 조직이 작은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조차도 사회의 과학과 비슷한 수준으로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이제는 복잡성이 유행이다. 여기서의 전문어는 "창발"과 "자기 조직화"이다. 복잡성 이론은 여러 부분들의 상호작용에서 몇 가지 간단한 규칙에 따라 질서와 안정성이 나타나는 이유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복잡성 이론이 설명하려는 주제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면서 개념과 기법들이 개발되었다. 복잡성 과학이 사회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할 이야기가 있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복잡성 과학은 "집단적 거동"에 대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무감각한 입자들의 거시적 성질들이 많은 사람들의 거동과 무엇이 닮았는지가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물리학자들은 계(system)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부분들이 서로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반복되는 특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새로운 사회의 과학이 페티가 무시해도 좋을것이라고 여겼던 "특정한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사고방식, 의견, 욕구, 열정"과 같은 인간의 특성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인간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더라도 여전히 그들이 집단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사회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자유의지의 "한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페티와 같은 시대의 토머스 홉스도 사회의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상당히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홉스는 그것이 단순한 숫자 이상의 것으로 메커니즘에 대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를 물어보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우리는 홉스의 메커니즘적 접근과 페티의 산술적 접근이 사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런 접근들이 19세기의 물리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재미 있는 문제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물리학에서 동시에 서로 상호작용하는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계를 어떻게 취급하고, 겉보기에는 혼돈스럽게 보이는 것에서 규칙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거동이 어떻게 "통계적" 인 형식으로 창발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사람을 무감각한 물질(또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물리학을 근거로 사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우선 "생명" 자체가 통계물리학의 응용 범위를 넘어설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박테리아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다.

 

그렇다고 이 책이 "사회의 이론"을 자세히 설명해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만약 사회의 물리학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숫자를 넣어주면 사회의 거동에 대한 결정론적인 설명을 쏟아내는 보편적인 방정식의 형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열린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여 다니는가, 어떻게 결정을 하고, 투표를 하고, 연합과 집단과 조직을 형성하는가에 대해서 물리학이 어떤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경제시장의 거동 중 일부를 설명하고, 사회적, 상업적 접촉의 네트워크에 감춰진 구조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데에 사용되는 물리학을 살펴볼 것이다. 갈등과 협동의 정치학에서 일종의 물리학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의 바탕에는 훨씬 더 어려운 의문이 자리잡고 있다. 물리학이 단순히 우리의 설명과 이해를 도와주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물리학을 이용해서 어려움을 미리 회피하고, 우리의 사회를 발전시키고, 더 안전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또는 과거 유토피아를 꿈꾸던 다른 주장들처럼 또 하나의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1. 리바이어던의 출현 - 토머스 홉스의 잔인한 세상

크롬웰 당시 일반 백성들이 안정보다 더 원했던 것이 또 있었을까? 20년에 걸친 전쟁과 흥망성쇠를 지켜본 사람들은 왕정만이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8년 전 철기군의 손아귀에서 겨우 도망쳤던 찰스 2세가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는 충성스러운 군대와 기쁨에 찬 백성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토머스 홉스가 추구했던 아주 특별한 목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수백 년에 걸친 계급사회에 대한 왕권 지배는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으로 확실하게 무너져버렸다. 신성하고 윤리적인 법으로 유지되었다고 믿었던 과거의 지배체제가 이제는 무작위적이고 불확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사회가 그런 체제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했을까? 그런 주제는 뜨거운 논쟁거리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다른 나라와의 전쟁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국민들에게도 새로운 세금이나 징병의 부담이 주어지는 정도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어나는 내란은 달랐다. 영국의 내란은 대체로 백성들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었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홉스를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에게 사회적 평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부유한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중세의 봉건제도는 힘을 잃었다. 의회와 성실청으로 구성된 지배체제는 중세 엘리자베스 시대로 돌아갔지만, 시대정신은 훨씬 더 민주화되었다. 종교개혁이 유럽을 두 동강이로 분리시켜버렸다. 하나의 교회가 기독교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공격은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반종교개혁, 예수회, 무자비한 종교재판을 탄생시켰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도 그런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세상의 본질은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뉴턴이 케임브리지에 입학했던 17세기 중엽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기계론적 과학으로 마술과 미신을 추방하는 것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홉스의 걸작인 <리바이어던>은 그런 기계론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정치학(정치과학) 이론을 정립하려던 시도였다. 홉스는 갈릴레오가 운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수준의 논리와 이성으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자명하다고 믿는 공리로부터 인간의 상호작용, 정치, 사회에 대한 과학을 정립하려고 했다.

 

홉스는 기본적인 법칙들을 먼저 밝혀낸 후에 그런 법칙들이 어떤 결과를 뜻하는지를 살펴보는 이론과학자의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론에서는 어떤 결론도 가능하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가장 안정한 사회는 오늘날 우리가 공산주의, 민주주의, 또는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리바이어던>은 편견이 없는 명백한 논리에만 의존했다는 주장 때문에 정치학 이론의 역사에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성과는 그 이상의 것이다. 오늘날 홉스의 업적은 역사적, 철학적으로도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그렇지만 정치학은 전혀 다른 괴물로 변해버렸다. 이제 정치학에서는 아무도 홉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데 <리바이어던>은 현대 물리학의 첨단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혁명적인 발전에 대한 직접적이고 놀라운 선견지명을 담고 있다. 과학자들도 현대 물리학의 이론적 구조가 교통량의 변화에서 경기의 변화와 기업의 구조에 이르는 사회의 구조와 행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홉스는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인간의 행동을 몇 가지 간단한 가정이나 우리가 "자연의 힘"이라고 생각한 것의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 점은 오늘날 물리학자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국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지켜보던 홉스에게 핵심적인 힘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권력에 대한 힘이 그것이었다.

 

 

리바이어던의 출현

헌신적인 고전학자였던 홉스가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논리의 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그가 마흔 살이던 1629년부터였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보고는..

 

홉스는 기하학자들이 기본적인 정리에서 시작하는 "연역적 추리"를 통해서 정직하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확실성을 보장하는 처방이었다.

 

사회의 불안정성을 경험했던 홉스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처럼 절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신뢰할 만한 통치 이론을 찾아내고 싶었다. 갈릴레오를 만나기 위해 피렌체로 떠났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밝혀낸 관성 법칙을 이용해서, 물체의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지지 않게 만들려면 물체를 계속 밀어주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잘못된 '상식'임을 밝혀냈다. 갈릴레오는 물체는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직선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무한히 움직이게 된다고 주장했다.

 

홉스는 이것이 바로 자신이 찾고 있던 공리가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일정한 운동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의 자연적인 상태였다. 그는 인간의 모든 감각과 감정이 운동의 결과라는 결론을 내렸다. 홉스는 그런 기본적인 원리에서 시작하면 사회의 이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홉스는 인간의 의지를, 계속 움직이는 방법을 찾으려는 욕구인 "기호"와 움직임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욕구인 "혐오"로 구분했다. 기호에는 배고픔처럼 본능적인 것도 있지만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있다. 우리는 기호와 혐오를 적절하게 저울질하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의 과정을 결정하고 움직인다.

 

홉스의 움직임은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일종의 자유에 해당한다.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곧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정신의 메커니즘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수 있다. 생각하는 자유도 역시 본능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계적 설명에 자유의지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을까? 홉스의 입장에서는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는 엄격한 결정론자였다.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하다. 그러나 홉스는 그런 삭막한 설명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본성을 살펴보는 "자기반성"을 통해서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적이고 확실한 가정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기계론적 철학

만약 우주가 시계와 같은 메커니즘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를 조각으로 분해해서 과학의 환원주의적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 그것이 정확하게 홉스가 사회의 작동을 분석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이상주의자들

과학적 이론을 근거로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인물은 홉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등장하는 지배층의 철학자들도 검소한 생활을 하고 사유 재산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병사와 서민을 비롯한 하층계급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귀족들만의 유토피아에 대한 것이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이상적이다. 소유권도 없다. 모두가 똑같은 집에서 살고, 개인이 집을 소유한다는 인식을 막기 위해서 10년마다 서로 집을 교환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소박한 옷을 입었고, 모두가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일을 하고,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여러 종교들이 모두 허용되고, 사람들은 모두 소박하고 절제된 생활을 한다. 한편으로는 상쾌할 정도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공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맥빠지고, 풀이 죽은 생활이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후고 그로티우스(1583-1645)는 <전쟁과 평화의 법>을 통해서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로티우스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과학적 또는 수학적 법칙이 아니라 천부적 권리라고 여기는 것에서 더 나은 "자연법칙"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너그러움이 좋은것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이 동료와 함께 있으면서 행사할 수 있는 천부적 권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신이 부당하게 공격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와, 공격을 당하는 경우에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보존에 만족하고 아무 이유 없이 남을 해치지 않으려고만 한다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상태에 해당하는 "자연 국가"이다. 일반적으로 문명은 그보다는 조금 나아서, 예절, 우정, 배움, 예술 등을 강조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선택적이다. 사회는 그런 것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그로티우스의 "최소 사회"는 잔인한 것이고, 천부적 권리에 대한 그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진보주의 전제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공격은 보장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고 누가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식량이 부족할 경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이웃을 죽이는 것은 정당화되겠는가? 내년에 닥쳐올지도 모를 기아에 대비하기 위해서 미리 그렇게 한다면 정당화되겠는가? 모두가 동료의 천부적 권리를 인정하기로 동의하더라도, 그런 권리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없다. 그래서 사회의 안정이 반드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의 계급사회 사람들은 상관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서 그런 확실성은 무너져버렸다. 사람들이 인도주의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접하게 되고,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사회의 엄청난 다양성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된 것도 그 이유가 되었다. 갑자기 사회의 기본 법칙이나 합의된 행동규범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홉스는 천부적 권리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에서 나타나는 그런 상대주의가 결국 "자연 국가"가 권리 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화국을 건설하는 방법

자유가 없는 사람은 권리도 없다. 홉스는 권리를 개인의 안녕이나 이익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래의 명백한 이익"을 얻기 위한 힘으로 정의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도록 해주는 일종의 "천부적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육체적인 힘, 설득력, 분별력과 같은 천부적인 품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산, 명성, 영향력 있는 친구를 비롯해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해당하는 "수단적 권리"를 얻기 위해서 그런 품성을 이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홉스의 사회 모델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권리를 축적하려고 노력한다는 가정을 근거로 했다. 그 수준은 개인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스코틀랜드 정치학자 로버트 맥키버는 인간의 좋은 점과 가치 있는 점은 모두 무시되었다고 비판했다.  "홉스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퍼져나가는 모든 것,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모든 전통과 가르침, 인간 본성의 사회화 경향을 보여주는 모든 관습과 수많은 조화를 무시해버렸다."

 

"삶은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19세기의 낭만주의자 랠프 월도 에머슨도 인간 본성에 대한 홉스의 해석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홉스의 견해에 동의하거나 반대하거나에 상관없이 그런 가정을 전제로 한다면 어떤 결론이 얻어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성립된다. 만약 인간이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어떤 사회가 등장하고 유지될 것인가?

 

권리는 상대적이다. 한 사람의 권리가 주변의 다른 사람의 권리를 "넘어서는"정도가 진정한 규모가 된다. 그래서 홉스는,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 사실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어떻게 지배할까? 자본주의 시장 사회에서는 그 답이 간단했다. 구매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했다.

 

"그 사람의 권리를 사용하는 것만큼에 대해서 값을 치르면 된다"는 그의 주장은 인간을 기계로 보는 것만큼이나 냉혹하다. 경쟁을 구매해버리는 것은 자유시장의 윤리이다.

 

권리에 대한 욕구가 다양한 사회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적당한 수준의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강한 욕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홉스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입장이다. 권력에 굶주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조화롭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보호의 본능 때문에 착취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서로 협력할 준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연 국가의 평화와 안정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협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권력에 대해서 끝없는 욕구를 가진 인간은 이익을 얻을 가능성만 있으면 그런 계약을 파기해버리기 때문이다. 홉스는 300년이나 앞서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행동 딜레마 중의 하나를 알아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위해서 단순히 자신의 천부적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그 권리를 권력에 "넘겨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력은 필요하다면 강제로 그런 계약을 부과할 의무를 가진다.

 

누가 그런 권력을 가져야 할 것인가?

 

홉스의 선출된 군주의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절대적이다. 사회계약을 유지하기 위해서 각자의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양보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선출된 군주의 몫이다. 홉스는 시민들이 폭군에게도 세금 납부와 복종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런 전제주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화국, 즉 리바이어던으로 단결시킨다. 

홉스에 따르면, 리바이어던은 "편리함 또는 평화와 안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 때문에 정당화된다.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제안한 방법을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그 목표 자체는 현대의 모든 민주주의에서 숭배되고 있다. 홉스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집단이 어떻게 통합되어 독립국가를 이루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국가에 대한 현대적 개념을 제시했다. "홉스는 사회를 발견했다."

 

따라서 토머스 홉스는 자신이 과학과 논거만을 이용해서 왕정이 가장 좋은 지배제도라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믿었다.

 

사회의 계산법

왕이 최고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책을 보고 찰스 2세가 반가워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왕도 평민 중에서 나오고, 하원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선거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 때문에 찰스 2세는 <리바이어던>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왕은 성스러운 법에 의해서 다스리고, 그 권력은 어떤 사회계약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왕당파의 입장에서 그 책은 반역적이었다.

 

홉스의 주장은 의회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홉스의 최고 권력은 누가 그런 권력을 이어받게 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도 가지게 된다. 민주주의가 한번 적용되고 나서 사라져버리는 셈이다.

 

<리바이어던>의 내용을 실천에 옮긴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홉스의 주장은 영원성과 혁명을 모두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확실한 힘과 정확성을 가진 것이어서 후세의 정치철학자들 모두에게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리바이어던>은 정치학에서도 논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홉스가 제안했던 사회계약은 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의 주장의 전주곡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로크와 루소에게도 국가의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권력은 서민의 이익을 지켜주어야 하는 의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홉스의 경우에는 서민들이 지배자를 위해서 봉사하도록 계약을 맺는다. 홉스에게는 무정부 상태가 두려웠지만, 로크에게는 권력의 남용이 문제였다. 로크가 독재를 막기 위한 보호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홉스는 왕정의 지지자였지만 부르주아 자본주의와 진보주의를 지지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논리도 제공했다. 그는 부유해지는 목표를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장에게 맡겨버렸다. "계약을 하는 모든 것의 가치는 계약자의 욕구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정당한 가격은 사람들이 지불하기로 계약한 것이다. 그런 자유시장 철학은 한 세기 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다시 등장한다.

 

인간과 메커니즘

이론정치학자들은 사물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사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새로 등장하는 사회의 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관찰된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간단한 가정으로 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 모델을 가지고 있어야만, 다른 결과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을 수 있다. 무엇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결정은 공개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더 이상 과학적 의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사회의 물리학"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제와 지배의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도 아니고, 과학적 논리를 이용해서 사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들을 맹목적인 수학에 따라 이리저리 뒤섞어야 하는 영혼이 없는 균일한 인형으로 상상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은 많은 개인들이 서로 돕거나 속이고, 협력하거나 다툼을 벌이고, 사람들을 따라가거나 홀로 길을 걷는 것처럼 자신들의 개성에 따라 행동하는 통계적 혼란 속에서 어떻게 행동의 유형이 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유형은 실제로 창발된다. 그런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소수의 설계자, 정치가, 또는 도시 설계자들이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방식이 아니라 사물이 그래야 하는 방식에 맞는 우리 사회의 구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에 꼭 맞는 조직의 형식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이웃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좁게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집단적으로 일관적이고 전반적인 결과를 알아낼 수 있다. 

 

과학은 처방이 아니라 설명을 제공한다. 그런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명백한 비전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 더 작은 힘 - 물질에 대한 기계론적 철학

 

법은 삶을 훨씬 단순하게 만들어주고, 그런 사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 법에만 복종해야 한다면 자유로워진다"고 했던 이마누엘 칸트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기계론적 철학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생각이 순진해 보이지만, 그런 철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학자들은 모든 물질의 핵심이 되는 지배 원리와, 올바른 역학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찾아냈다.

 

모든 것의 조각들

미시 세계 원자들도 역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역학을 이용하면 사물의 일상적인 성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런 주장은 수학자 다니엘 베르누이에 의해서 처음 제기되었다. 그는 기체가 빠르게 돌아다니면서 서로 충돌하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안했다. 

 

뉴턴이 알아낸 운동 법칙의 중요한 특징은 예측 능력이다.

라플라스에 따르면 그런 위대한 지적 존재에게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눈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역학이 자유의지를 내몰아버린 셈이다.

 

무산과 죽음

19세기 초 산업혁명이 정점에 이르렀을 즈음 니콜라 레오나르 사디 카르노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증기기관의 연료 효율을 최적화시키는 문제였다.

 

카르노 시대에도 동력 생산 방법은 지금과 거의 같았다. 팽창한 기체가 터빈의 회전 날개를 움직이게 만들고 그런 회전 운동이 자석을 돌려서 코일에 전류가 흐르게 한다. 

 

그런데 열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카로느는 "열은 운동의 결과이다"라고 주장했다.

카르노는 열을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렇게 흘러가는 열 중에서 어느 정도를 유용한 일로 바꿀 수 있는지를 계산하는 일반 이론을 찾아냈다. 그의 분석은 "열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바탕이 되었다. 열역학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열운동"에 대한 물리학이다.

 

열역학은 변화에 대한 과학이고, 변화가 없으면 아무것도 설명할 것이 없다.

에너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변환될 뿐이라는 제1법칙이 가장 쉽다.

제2법칙은 더욱 놀라운 것으로 열은 언제나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른다.

 

설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정말 주장하려던 것은,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다시 말해서 "비가역적"인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그런 사실이 실제로는 모든 변화의 비밀이다. 비가역적 과정이 존재한다면, 시간은 그런 과정에 의해서 정의되는 한 가지 방향만을 가진 화살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제2법칙은 우리가 언제나 시간이 흐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그 반대로는 절대 움직이지 못한다는 우리의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클라우지우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변화와 비가역성에 대한 수학적 이론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찾아냈다.  열역학에서 엔트로피는 상당히 추상적인 양으로 소개되지만, 사실은 화학반응에서 방출되는 열을 측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접 측정할 수 있는 양이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엔트로피는 계(system)가 가지고 있는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낸다. 제2법칙은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열이 흐르느 것과 같은) 자발적인 변화의 모든 과정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1852년에 톰프슨은 에너지가 변환되는 과정에서 특별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자연에는 역학적 에너지를 무산시키는 보편적인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일부 에너지가 언제나 열로 "낭비"된다는 것이다.

 

1854년 물리학자 헬름홀츠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무산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우주는 결국 균일하게 식어버린 열 저장고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열이 흘러갈 수 있는 더 차가운 곳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변화는 불가능해진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궁극적으로 그런 "열적 죽음"에 도달하게 된단. 증기기관의 움직임에서 모든 생물의 운명을 읽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확률의 춤

이제 과학자들은 열역학 법칙의 근원을 밝혀내고 싶어졌다. 만약 세상이 움직이는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런 원자들이 모든 뉴턴 법칙을 따를 경우, 눈에 보이지 않는 충돌을 모두 고려하면 열역학 법칙의 유래를 알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기체의 압력은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부피가 일정하도록 밀폐된 용기에 담긴 기체를 뜨겁게 만들면 압력이 높아진다. 카르노 기관의 피스톤이 움직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온도, 압력, 부피와 같은 기체의 세 가지 성질은 엔지니어링이나 사업에서 고려해야 하는 세 가지 골치 아픈 요소인 비용, 속도, 품질과 같은 것이다. 즉 그중의 두 가지가 결정되면 나머지 하나는 자동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간섭을 할 수 없다. 

 

세 가지 변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두 변수 사이에는 수학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같은 뜻이다. 부피가 일정하면, 기체의 압력은 온도에 비례한다.

 

"기체 운동론"은 맥스웰 혼자의 노력으로 완성되었다. 맥스웰의 핵심적인 통찰력은 우리가 세부적인 사실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기체 입자의 정확한 궤적이 아니라 "평균"이라는 것이다. 평균 속력은 평균 운동 에너지를 결정한다. 맥스웰은 종 모양의 곡선이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분자들의 에너지는 사람들의 돈과 같다. 부자는 적고, 가난한 사람은 많다."

입자의 평균 속력은 기체의 운동 에너지에 따라 달라진다. 기체를 가열해서 에너지를 넣어주면 평균 값이 증가하고, 맥스웰 분포의 피크가 높은 속력 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다른 일도 일어난다. 종 모양의 곡선이 납작하고, 넓어지다. 높고 가파른 산 모양이 낮고 부드러운 언덕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서, 속력의 분포가 훨씬 넓어진다. (경제에 더 많은 "에너지"를 주입시키면 부의 분포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날 것인지는 다른 문제이다.)

 

입자들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맥스웰의 수학적 분석을 이용하면 입자들이 확산에 의해서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 

 

(원자 또는 분자와 같은) 기체 입자들이 무작위 걷기를 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브라운 운동이라는 신비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논문이 발표(아인슈타인)

 

꽃가루가 활발하게 춤을 추고 있는 현상을 최초로 관찰한 브라운은 처음에 그는 그런 움직임이 고대 생기론의 근본적인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죽은" 것이 분명한 입자에서도 똑같은 움직임을 관찰했다.

 

아인슈타인의 논문은 확산에 대한 최초의 완벽한 이론이었다.

 

숫자에 대한 믿음

맥스웰이 정립한 기체 운동론은 이 책에서 다루게 될 물리학의 핵심이다. 그는 물리학을 "통계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움직이고 있는 엄청난 수의 거의 똑같은 대상을 이해하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아니라 평균 움직임과 평균으로부터 벗어나는 정도라는 뜻이다.

 

통계적 특성에 대한 실험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높은 재현성을 보여준다.

맥스웰은 자신의 이론이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체 운동론의 핵심은 맥스웰이 제안했던 기체 입자의 속력에 대한 "확률 분포"였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정교한 수학에서 유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추측한 결과였다. 그런 연구는 볼츠만에 의해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볼츠만은 "기체 분자의 열적 평형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라는 표현으로 맥스웰의 주장을 완벽하게 완성 시켰다. 더욱이 그는 열역학 제2법칙 비가역 과정이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증명했다.

 

맥스웰은 일단 맥스웰 분포에 도달한 기체는 그 상태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기체 입자들이 어떻게 그런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볼츠만은 확률 분포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냄으로써 그 일을 해냈다. 그는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입자의 경우에는 "초기의 운동 에너지 분포에 상관없이 충분히 오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맥스웰 분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결국 볼츠만은 운동론에 "변화"를 포함시켰고, 그 결과 사람들이 열역학 제2법칙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클라우지우스는 비가역 과정에서는 언제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제안했었다. 볼츠만은 그런 사실이 분자 운동의 확률에서는 무엇을 뜻하는지 밝혀냈다. 그는 엔트로피를 일상적인 수준에서 똑같은 것으로 보이는 분자들을 배열하는 방법의 수를 이용해서 해석하는 방법을 정립했다.

 

결국 풍선이 팽팽하게 부푼 상태로 있는 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이 그래야 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입자들이 그런 상태로 배열될 가능성이 다른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어떤 계에서나 변화가 일어나면, 구성 입자의 새로운 배열이 과거의 배열보다 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화의 방향, 즉 시간의 화살은 확률에 의해서 결정된다.

 

열역학 제2법칙의 설명에서 핵심은 시간에 대해서 아무 선호가 없는 역학 법칙도 시간에 대한 비가역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엔트로피는 우주적 법칙에 의해서 "반드시" 증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엔트로피가 늘어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통계역학은 현대 물리학의 핵심적인 틀을 제공했다. 뉴턴의 결정론에서 통계적 과학으로의 변화가 사회 물리학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그런 변화가 쉽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사회현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통계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3. 큰 수의 법칙 - 무작위성에서 시작되는 규칙성

우리가 자랑하는 자유는 집단 속에 흡수되어 사라져버린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리적, 도덕적 법과 관련되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일생동안의 어떤 행동도 그 용도나 풍습이나 필요성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 존 허셜(1850)

 

볼츠만의 과학적 업적은 '고뇌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시간의 화살에 대한 그의 설명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제기했던 중요한 의문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19세기 말의 빈은 프로이트, 쇤베르크, 비트겐슈타인, 무질 등을 중심으로 치열한 지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질이 지적했듯이, 시민들은 관습에 얽매여서 생기를 잃어버리고 입을 굳게 다문 군중일 뿐이었다.

 

그렇게 경직되고 유물적인 사회에서는 자살이 놀라울 정도로 많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분명해 보이는 것들 중에는 19세기 이전까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사건을 평균 발생률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일은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었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세상은 마술과 미신과 기적과 음모로 가득 차버릴 것이다.

 

오늘날에도 위험과 우연의 일치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에서는 통계의 가치가 쉽게 무시된다.

원자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집단의 거동에 대한 의미 있는 설명에는 통계가 필수적이다. 오늘날에는 그런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러나 19세기 과학에서 통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사회의 측정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스승이었던 베이컨이 제시했던 "자연 집단"과 "정치 집단" 사이의 비유를 논리적 결론으로 발전시켰다. 결국 정치학도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탐구로 해부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 일종의 자연과학이라는 뜻이다. 홉스는 과학적 정치학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역학을 기본적인 틀로 선택했다.

 

1660년대 존 그란트는 정책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사회적 수"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출생하고 사망하는 사람의 수를 모르면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법을 만들고, 통치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란트의 통계학을 정교한 방법론적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기록을 맡았던 소박한 사람들은 "한 잔의 에일과 더 많은 뇌물"에 쉽게 매수되어 사망의 원인을 (매독처럼) 수치스러운 것 대신 (폐결핵) 정상적인 것으로 기록해주었다. 그렇지만 그가 만든 사망 원인과 연령 표는 사회의 인구 증감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그란트의 제자 페티는 사회통계학을 이용해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방법이 정책을 수립하는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홉스의 경우처럼 개인의 기본적인 심리에 대한 가정을 근거로 이론을 유도하는 대신 사회 집단에 대한 관찰의 결과를 활용하려고 했던 경험주의자였다.

 

그러나 그가 제안했던 정책들은 대부분 무시되어버렸다. 사실 그렇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사회정책에 대한 페티의 분석적인 접근은 사람들의 희생을 무시한 지나친 합리주의의 대표적인 예였다.

 

당시 국가의 입장에서는 국민의 수를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정복 전쟁이 인구를 늘리기 위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그랬듯이 인구 감소의 원인이었다.

 

경제학자 맬서스가 <인구론>을 썼던 1826년에 이르러서야 유럽과 미국의 정부는 국민의 수를 세는 지혜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의 노력은 정복한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한 행정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았다.

 

18세기에 이르면서 그런 사회통계에 사회가 작동하는 방법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쥐스밀히는 남녀의 출생률과 사망률 차이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모두가 결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인간 생활의 혼란 속에서 사회를 안정화시켜주는 일종의 집단 법칙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1784년 칸트가 주장한 다음과 같은 "보편적 법칙"으로 이어졌다.

 

원인이 불확실하더라도, 우리가 인간 의지의 자유를 대폭적으로 허용한다면 그 속에서 규칙적인 움직임을 구별하고, 개인의 경우에는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이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는 규칙적이고, 느리기는 하지만 발전하는 것으로 보일것을 기대하게 된다.

 

한편으로,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사회의 "법칙"에 대한 믿음은 우주의 규칙성에 대한 계몽주의적 믿음의 산물이었다. 19세기 이전에는 그란트의 "사회적 수"에 적용되는 법칙이 성스러운 지혜와 설계의 증거로 여겨졌지만, 후세의 비평가들에게는 재앙과 혁명의 징조였다.

 

사회적 수에 대한 연구에는 이름이 필요했다. 1749년 독일의 학자 고트프리트 아헨발은 그런 "과학"이 사회의 자연적 "상태"를 취급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통계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턴 교회

18세기는 정말 극단적인 시대였다. (공포정치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믿음은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다. 많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그런 원리가 이성의 힘을 통해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자유의 시대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콩도르세는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살릴 수단이 없더라도 인구가 지수함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믿었다. 결국 모든 국가는 과밀, 빈곤, 위생 불량, 사회적 불안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억압과 혁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인간 사회의 내부 구조"라는 어쩔 수 없는 법칙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의 거동과 진화를 결정하는 법칙으로 구성된 내부 구조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맬서스의 의견에 사람들은 동의했다. 그런 법칙과 사회의 관계는 뉴턴 역학과 물체의 운동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런 생각은 특히 프랑스에서 유행했다.

 

데이비드 흄은 <인성론>에서 데카르트적 공리보다 경험주의를 통해서 인성을 근본 원리로 환원시킴으로써 정신과학에서의 뉴턴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표현했다. 1741년에 흄이 "정치학을 과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

 

케네는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뉴턴의 물리학적 힘에 대응하는 법칙과 "사회적 힘"을 찾아내기 위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케네의 <경제표>(1758)는 최초의 경제학 이론서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처음으로 "경제학자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업적은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흔히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진 버크는 그런 주장(물질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것처럼 행복도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몹시 싫어해서 정부의 법과 제도는 근본 원리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역사적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창발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기존의 법은 경험과 전통에 의해서 가다듬어지고, 이미 시험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합리적" 이론으로 주물러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버크의 주장에 따르면 어쨌든 국민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역사에 대한 어떠한 "과학적" 분석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버크마저도 자신의 주장을 뉴턴의 역학과 광학 용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인상적인가!

 

그런 계몽주의적 입장은 인류의 발전과 복지를 추구하는 합리적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7)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간섭이 아니라, 사회의 자연법칙을 밝혀냄으로써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콩트는 비록 정량화에 대한 통계학자의 맹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문명의 과학에 대한 꿈과 믿음을 담은 "사회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홉스의 역학적 정치학, 통계적 정량화의 의미, 사회의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을 비롯해서 당시에 등장했던 사회적 탐구의 모든 가닥들이 케틀레의 노력에 의해서 통합되었다. 격동의 반세기 동안에 물리학, 수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사이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홉스와 마찬가지로 케틀레도 역시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사회의 안정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케틀레는 천문학자들이 사회에서 질서를 찾아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람에게 관련된 법칙과 사회의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은 언제나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우주의 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물질세계의 법칙을 생각하고,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놀라운 조화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은 생명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오차의 모양

당시의 사람들은 천체의 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측정이 뉴턴 법칙이 요구하는 수학적 규칙성을 정확하게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든 측정은 오차 때문에 역학 법칙으로 예상되는 관계에서 분명하게 벗어났다.

 

특별한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을 알아내려면 많은 수의 대표적인 측정에서 그런 오차가 얼마 "자주" 발생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오차에 대한 통계를 수집해야 한다.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오차의 분포가 언제나 같은 모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언제나 작은 오차가 큰 오차보다 많이 발생하고, 오차의 크기에 따른 빈도의 감소를 예측할 수도 있었다. 오차의 통계를 그래프에 그리면 오차 곡선이라고 알려지게 된 특별한 곡선이 만들어진다. 그런 곡선과 일치하는 측정은 오늘날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우스" 통계를 따른다고 한다. 이 오차 곡선은 근본적으로 "무작위적" 과정의 결과에서 나타나는 확률 분포에 해당한다.

 

그런 곡선은 확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수학자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동전 던지기 결과의 분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우연에 의한 사건에서 그런 예측 가능한 결과가 얻어진다는 사실은, 어느 쪽으로든 벗어날 가능성이 같아서 서로 상쇄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놀라운 것은 아니다. 

 

자코브 베르누이는 사상의 결과가 고정된 확률 비율에 의해서 지배되는 경우에 충분히 반복해서 얻어지는 실제 결과의 분포는 언제나 똑같은 비율로 수렴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푸아송은 1835년에 그런 결과를 "큰 수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무작위적인 사상의 수가 충분히 큰 경우에는 순수한 무작위성이 결정론을 따르게 된다. 무작위성 자체가 예측 가능하게 일어나는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파리에서 라플라스의 결과에 감명을 받았던 케틀레는 오차 곡선이 인간에 대한 인구통계학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질서정연한 행동

케틀레는 프랑스의 과학자들로부터 변이가 오차와 관계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 키의 차이가 자연의 독특한 특징이 아니라 우리 몸이 이상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가 "존재하고 보존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평균적인 행동이 "정당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결국 케틀레의 사회물리학은 "평균인"의 개념을 근거로 했다.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평균이 되어야 했다.

 

균일성에 대한 지나친 숭배는 자연히 모든 변이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평균으로부터 심하게 벗어나는 것은 ... 육체적인 추함은 물론이고, 도덕적결함과 성격적인 면에서의 병으로 보인다."

 

케틀레 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결과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가 사람에 대한 통계에서 찾아낸 규칙성에 열광했다. 마르크스도 케틀레의 통계법칙을 이용해서 노동가치설을 만들었다. 벤담의 공리주의를 이어받았던 존 슈튜어트 밀은 케틀레의 업적이 사회와 역사가 (밝혀내기는 어렵지만) 자연과학과 같은 수준의 절대 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했다. 

 

밀은 <논리학 체계>에서 보편적인 오차 곡선을 생각하면서 "근본적으로 가장 변하기 쉽고 가장 불확실한 것처럼 보이며, 개별적으로는 우리가 예측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의 경우에도 상당한 수의 사건을 고려하면 수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규칙성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과학

케틀러의 성과를 영국에 널리 알린 버클도 국민을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지키고 싶어했다. 케틀레는 인간의 간섭을 초월하는 자신의 통계적 법칙에는 정부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믿었다. 버클은 아무도 그런 법칙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유방임주의의 원칙을 강하게 주장했고, 국민들이 스스로를 지배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버클은 사회를 국민에게 맡겨두면 자동적으로 "질서, 대칭, 법" 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고, "정치인은 거의 언제나 사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했다.

버클은 역사 자체도 과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단의 거동이 개인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을 숨겨버린다고 생각했던 칸트도 우리가 "역사적 법칙"을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세계주의 관점에서 본 보편적 역사의 개념>이라는 글에서 "개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국가까지도 스스로의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 자신들이 모르는 자연의 목적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이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버클도 그런 주장에 동의했다. 그의 입장에서 역사는 "위대한 진리"에 의해서 지배된다. "사람들의 행동은 ... 실제로는 결코 모순될 수가 없고, 아무리 변덕스러워 보이더라도 ... 현대 세계의 숨겨진 규칙성이라는 보편적 질서로 이루어진 거대한 체계의 일부일 뿐이다."

 

버클은 사회통계학적 규칙성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케틀레와 마찬가지로 출산, 사망, 범죄, 자살, 결혼의 빈도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 문명의 역사>는 19세기 중엽의 정부는 불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자유방임주의의 사상을 영국의 지식 사회에 확산시켜주었다. 

 

사람들은 점차 사회 환경에 대한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법을 만들어서 시행하려는 모든 시도가 가장 거창하고 위험한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 옛날의 입법가들이 변덕스럽게 다루었던 주제들은 가장 위대한 것에서부터 가장 형편없는 것까지 모두에 대해서 완벽하고 논쟁의 가능성이 없는 법을 만들 수 있었다.

 

랠프 월도 에머슨은 역사통계 법칙의 확실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그는 1860년에 쓴 <운명>이라는 글에서 "통계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핵심 주장을 "인구의 폭이 충분히 넓기만 하면 가장 우발적이고 특별한 사건들이 고정된 계산의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라고 소개했다.

 

니체는 "역사에 법칙이 있다면, 법도 아무 의미가 없고, 역사도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비판했다.

 

사람에서 원자까지

겉으로는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규칙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사회의 통계적 법칙이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에게 그런 법칙을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무작위적인 현상에 적용해보도록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그런 과학자였다.

 

끊임없이 충돌하는 구성 입자들의 움직임 때문에 아무도 추적할 수 없는 기체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던 맥스웰은 그것이 개인 행동의 직접적인 동기를 밝혀낼수 없는 사회에 대해서 버클이 씨름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우리가 실험을 할 수 있는 물질의 가장 작은 부분은 수백만 개의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는 그런 분자들을 결코 개별적으로 느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분자들 중 어느 하나의 실제 움직임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격한 역사적 (뉴턴적) 방법을 포기하고, 많은 수의 분자들을 취급하기 위한 통계적 방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종류의 양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때 우리는 평균의 규칙성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규칙성을 만나게 된다. 그런 규칙성은 우리가 모든 실용적인 목적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수백만 개의 분자들이 들어 있는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 관찰되는 균일성은 라플라스가 설명했다. 버클이 궁금하게 여겼듯이 결코 다른 것과 똑같지 않은 수많은 원인들이 서로 뭉쳐졌을 때 나타나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균일성이다.

 

볼츠만 역시 그의 입자와 버클의 통계학을 뒷받침해주었던 사회통계 조사에 등장하는 개인과의 닮은 점을 알아차렸다. "분자들은 운동 상태가 대단히 다양하다는 점에서 많은 수의 개인과 마찬가지이고, 기체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은 평균적으로 주어진 운동 상태에 있는 분자들의 수가 일정하기 때문이다.

 

맥스웰의 친구 테이트는 기체 운동론의 통계적 방법을 "인구가 많은 국가에서 자살, 쌍둥이나 세쌍둥이 출산, 배달되지 않은 편지 처럼 드물지는 않지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의 수가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되는 특별한 일관성"에 비교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통계역학을 사회현상에 적용하는 것을 새롭고 위험한 일이라고 여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기계론적 철학의 쌍둥이 자식이고, 사람들의 습관을 무생물적인 입자들의 습관으로 설명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일이었던 시절이였다.

 

다윈의 사촌인 골턴은 자연선택이 근본적으로 통계 이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종 안에서의 자연변이도 케틀레의 오차 곡선을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전학에서 통계를 이용해야 한다고 고집했던 골턴은 생물학적 변이를 측정하는 생물통계학의 핵심이 되는 수학적 근거를 확립시켰지만, 오늘날에는 우생학의 선구자라는 고약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케틀레가 주장했던 자유방임주의를 근거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자연선택이 결함이 있는 변이를 제거시켜주어서 "완벽한 종"만 살아남게 된다는 이상한 이론을 주장했다.

 

 

의지와 운명

통계학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영국인 j.j.폭스였다.

 

통계학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사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굳이 통계학을 과학이라고 한다면 수학의 영역에 속한다. 통계학의 위대하고 무한한 가치는 그것이 다른 과학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방법" 이라는 사실에 있다. 통계학은 추상적 과학의 법칙, 확률의 수학적 이론, "큰 수의 법칙" 이라고 가볍게 이름 붙여진 것에 근거를 둔 "탐구 방법"이다.

 

그런 지적은 도구는 집어서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정반대가 사실이라는 점은 우리에게 19세기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성과에 대한 철학적 배경을 어떻게 이해했고, 종교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웠는지를 확인시켜준다.

 

사회과학에 대한 통계학적 접근은 처음부터 논란거리였다. 통계학이 사회의 가상적인 자연법칙을 밝혀낼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것이 사람들의 "개인적 행동"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첫 번째 논쟁은 인과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되돌아봄으로써 결과로부터 원인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결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많은 통계자들이 해석할 목적이 없다면 처음부터 숫자를 모을 이유가 없다고 믿었던 것은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해석은 곧바로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숫자들 사이의 상관관계가 반드시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경고.

 

두 번째 논쟁은 미래 확률에 대한 통계학적 예측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미래"를 바라보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이라는 뜻이다. 사회에 대한 숫자가 단순한 사건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면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숫자가 예측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면 통계학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1790년 초에 영국에 살고 있던 사람 100명 중에서 6명이 그해 말에 사망했고, 1791년과 1792년에도 같은 비율이 계속되었다면 1793년이 시작될 때 6퍼센트의 사람이 크리스마스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겠는가? 그런 예측은 매우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심각한 논란거리가 된다.

 

통계는 수를 세는 좋은 방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확실하지만, 확률은 알 수 없는 것을 취급한다. 일부 철학자와 과학자에게 통계와 확률은 백묵과 치즈만큼이나 다른 것이어서 절대 서로 섞일 수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수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잘못이고, 자유의지 대신 운명론을 앞세우는 것처럼 이단적이다.

 

칸트는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쥐스밀히의 출생과 사망률 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규칙성이 일종의 결정론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지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통계에서 나타나는 규칙성 중에는 그렇게 가볍게 합리화시킬 수 없는 것도 있다. 자살이나 살인이나 다른 범죄율을 해마다 일정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어떠 신일까? 그러나 자살과 범죄율은 지극히 자의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자연의 "메커니즘"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케틀레의 입장에서는 범죄와 같은 고의적인 행동에서 나타나는 통계적 규칙성은 그런 행동이 개인의 책임 범위 바깥에 있다는 뜻이었다. 케틀레는 범죄가 사악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범죄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이라고 부르는 현실적인 존재의 관습 때문에 일어나고, 우리는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스스로의 의지와 관습을 부여받았다고 여긴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사회가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케틀레의 표현에 따르면, 범죄는 "놀라운 규칙성으로 지양해야 할 비용"이었다. 결정론의 시대에서 그런 사실은 사회의 조건이 일정한 비율의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할당량이 채워질 때까지 법을 어기도록 만드는 "힘"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철학에서 보면, 세상은 완전히 결정론적이고 자유의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을 통해 통계학 때문에 위협받고 있는 결정론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그런 식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버클이 주장했듯이 그렇게 된다면 미래는 정말 명백할 것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자신이 "자유의지와 필요성의 관계"라고 부른 역사에 대한 버클의 결정론적 견해에서 제기되는 의문과 씨름을 했다. 그는 그런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개념" 이 "국가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라는 외교의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힘이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의문이 남는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는 우리에게 인력과 반발력의 법칙을 인식하지 못하고, 법칙이 진리가 아니라고 알려줄 수 없다. 그러나 역사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나는 자유롭고, 그래서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톨스토이는 우리의 그런 과감성은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역사에서 자유의지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사회가 일정하고 변화하지 않는 상태가 유지되는 "평형"을 믿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을 하고, 그런 선택에 따른 갑작스러운 변화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고집스러운 악령

사회통계학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처럼, 열역학 제2법칙도 마찬가지로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한다. 열이 언제나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흐른다는 냉엄한 엔트로피의 증가는 창조된 모든 것들이 생명이 필요로 하는 조직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쓸모없는 열로 바뀌어버리는 우주적 "열적 죽음"을 의미했다. 

 

맥스웰도 뉴턴의 운동 법칙을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라플라스만큼이나 결정론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이 인간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빼앗아버리는 우주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자유의지가 어떻게 열역학에 위배되지 않고 작동할 수 있을까?

 

맥스웰의 답은 제2법칙이 "큰 수의 법칙"에 해당하는 통계적 법칙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1940년대에 전기통신 기술자인 클로드 새넌이 제안했던 정보 이론과 열역학의 관계가 정립되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과학자들은 맥스웰의 주장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그는 악령이 수행해야만 하는 정보처리 과정과 관련된 열역학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악령은 입자를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절약"되는 것만큼의 엔트로피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문을 열어줄 것인가 닫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맥스웰의 악령마저도 제2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흔히 양자역학이 확률을 문제의 핵심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뉴턴 역학의 결정론적 세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물리학자 스몰루코스프키는 확률이 현대 물리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로렌츠 방정식, 전자 이론, 에너지 법칙, 상대성 원리가 이런 경향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지만,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그런 정확한 법칙들까지도 통계적 규칙성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19세기 사회통계학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과학자들이 각각의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원인을 모르거나 또는 의미 있는 추측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자연에서 큰 규모의 질서와 규칙성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통계적 과학에 이르는 길은 훨씬 더 험난했을 것이다. 이제는 큰 수 안에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다.

 

 

4. 거대한 이변 - 어떤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유

갑자기 일어난다는 점이 바로 어는 현상의 특징이다. 

기체에서 고체를 만들려면 냉각시켜야 한다는 사실은 19세기 과학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체 운동론에서 온도가 낮아지면 분자들이 더 천천히 움직일 뿐이다. 분자들을 얼음과 같은 결정성 고체처럼 규칙적으로 줄을 세우는 이론적인 처방은 없다. 그리고 실제 고체는 절대 온도 0도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다. 그보다 먼저 만들어지는 액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사회물리학의 기본적인 핵심 개념의 하나로 밝혀진 상전이에 대해서 살펴본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변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또는 은유적인 방법으로 상전이를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티핑 포인트", "깨진 대칭성", "조직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해당하는 상전이로 진화하는 우주의 창조성과 놀라움" 쿤의 "패러다임 전이" 도 역시 애매하기는 하지만 상전이에 대한 비유로 알려졌다.

 

그러나 상전이가 행동이나 사상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단순히 편리한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사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개발된 물리학 이론이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는데도 사용될 수 있다.

 

통계물리학에서 상전이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그런 현상이 존재하고, 갑작스러우며, 입자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는 상태를 연결시켜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물리학의 핵심을 이해하려면 상전이가 일어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야만 한다. 그런 면은 신기하게 보이는 변화의 갑작스러움과 관계가 있다. 나름대로의 움직임에 만족하고 있던 입자들이 어떻게 갑자기 힘을 합쳐서 거대한 이변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일까?

 

연속성의 문제

"보통의 기체와 액체 상태는 간단히 말해서 물질의 똑같은 조건이 멀리 떨어져 있는 형태일 뿐이고, 연속성이 깨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는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일은 유체에 따라서 다른 어떤 온도 이상에서만 가능했다. 그런 온도 이하에서는 언제나 갑작스러운 상전이가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전환점을 "임계 온도" 또는 더 느슨하게는 임계점이라고 부른다.

 

벤데르 발스는 기체 운동론을 액체의 존재에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그런 모든 것을 설명하는 엄청난 업적을 이룩했다. 그는 모세관 이론을 설명하려는 보다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고체 표면 부근에서 액체의 거동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데르 발스는 1870년대에 훨씬 더 풍요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기름진 땅을 파들어갔다.

 

운동론은 기체 분자의 움직임으로부터 어떻게 기체의 압력이 나타나게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반데르 발스는 액체도 역시 접촉하고 있는 표면에 압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런 압력이 매우 크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었다. 기체보다 밀도가 훨씬 더 큰 액체의 경우에는 주어진 표면에 충돌하는 분자의 수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액체의 알려진 성질을 이용해서 그런 압력을 계산하는 방법은 아무도 몰랐다.

 

입자들의 미시적 움직임으로부터 압력을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 바로 기체 운동론이었고, 그것이 반데르 발스의 출발점이었다.

 

반데르 발스는 액체를 일종의 끈적끈적한 기체라고 생각해서 기체의 거동의 거동에 인력에 의한 영향을 보정해주었다.

표준 운동론에서는 분자들이 질량을 가지고 있지만, 크기는 없는 무한히 작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데르 발스는 기체보다 밀도가 훨씬 큰 액체에서는 분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력의 특징과 입자 크기 효과에 대한 가정을 도입함으로써 반데르 발스는 어떤 범위의 온도와 압력에서는 유체가 두 가지 서로 다른 밀도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더욱이 기체가 압축되거나 냉각되는 과정에서 불안정해져서 액체 상태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상전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예측했다.

 

그런 변화의 핵심은 갑작스러움이다. (기체의 경우처럼) 작은 값을 가지거나 (액체의 경우처럼) 상당히 큰 값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중간의 값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입자들의 집단에는 두 가지 "안정한 상태"가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핵심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온도가 높아지면 액체와 기체 상태의 밀도 차이가 줄어든다. 어떤 온도에 도달하면 밀도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되면 유체는 액체도 아니고 기체도 아닌 그 중간의 상태로 존재한다. 결국 반데르 발스는 임계점의 존재를 예측했던 것이다.

 

입자들의 "집단적" 상태는 결정적이고 갑작스럽게 달라진다. 한순간에는 옅은 기체였다가 다음 순간에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되어버린다. 모든 입자들이 같은 순간에 같은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처럼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날 뿐이다.

 

반데르 발스는 그런 거동에 필요한 요인들을 밝혀냈다. 겉보기에는 그가 입자들 사이의 인력이 기체의 액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인력"과 "반발력"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 필요하다. 반데르 발스는 분자들이 열, 다시 말해서 빠르게 움직인다는 사실 때문에 일종의 반발력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분자의 크기에 대한 고려가 바로 반발력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입자들이 서로 맞닿으면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입자들이 접촉하게 되면 서로 밀쳐내는 반발력이 작용하는 셈이다. 그런 사실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입자의 크기를 무시하고 무한히 작은 점으로 생각하면 두 입자가 무한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 이유가 없어져버린다.

 

결국 상전이는 타협의 결과이다. 인력과 반발력의 균형이 안정한 액체를 만든다는 뜻이다. 무질서(열)의 힘이 너무 커지면 기체가 더 안정한 상태가 된다. 더욱이 그런 요인들 사이의 긴장이 점진적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운 갑작스러운 변화를 일으키게 만든다. 어느 한 요인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산사태가 바로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통일 원칙

반데르 발스의 이론 덕분에 물질의 액체 상태도 통계역학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0년 노벨상 수상) 그러나 그의 이론이 물질의 행동방식에 대해서 더 일반적인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이론은 액체와 고체를 구분해주는 얼거나 녹는 상전이에는 적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전이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도 등장한다. 자석을 가열하면 자성을 잃어버리고 냉각시키면 다시 자성을 회복한다는 사실은 수백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월리엄 바렛은 열에 의해서 유도되는 "탈자기화" 현상이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라 특별한 온도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상전이 현상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존 홉킨슨은 자기력을 잃어버리는 현상을 정량적으로 살펴보면, 유체가 임계점에서 액체 상태와 기체 상태의 분명한 구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수학적으로 매우 비슷하다는 놀라운 결론을 얻었다. "퀴리 점"이라 불렀다.

 

고체의 철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상자에 담긴 달걀들처럼 질서정연하게 고정, 배열되어 있다. 그런 배열은 액체나 기체 입자들의 혼란스러운 상태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스의 이론에서는 반데르 발스가 유체의 상전이와 임계점을 설명할 때와 똑같은 개념을 사용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 했을까?

 

철 덩어리는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작은 자석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자력을 가지게 된다. 그런 원자들은 서로 평행으로 배열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자기화된 바늘이 달린 작은 나침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원자 바늘"이라는 뜻으로 "스핀"이라고 부른다.

 

철의 경우에 각각의 스핀이 배열되는 방향은 주변에 있는 모든 스핀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자기장에 의해서 결정된다. 각 원자들의 스핀은 격자 모양으로 늘어선 주변 원자들의 모든 스핀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그런 자기적 상호작용은 인접한 스핀들이 서로 평행으로 배열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원자들의 배열에서 가장 안정한 상태는 모든 "바늘"들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배열에서는 각 원자의 작은 자기장들이 서로 합쳐져서 하나의 큰 자기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철 덩어리는 자석이 된다.

 

그러나 열의 파괴적인 영향이 액체에서 분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핀의 배열도 무너뜨리게 된다. 열은 원자 나침반 하나하나를 흔들어서 서로 평행으로 배열되지 못하게 만든다. 밀집된 배열을 유지하고 있는 원자에 충분한 양의 열이 가해지면 스핀의 정열된 상태가 흐트러져서 무작위적인 방향을 향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평균적으로 작은 자기장들이 서로 상쇄되고, 철은 자기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퀴리 점은 진정한 상전이 현상이다. 퀴리 점 이상에서의 비자석과 그 아래에서의 자석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증발, 응축, 녹음, 얼음과는 다른 "종류"의 상전이이다.

 

[이징 모델 설명]

 

지금까지는 액체와 기체 사이의 임계 상전이와 자석에서의 임계 상전이가 왜 닮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한 설명이 없었다. 서로 상호작용하는 입자들에 대한 원자 수준의 모델에서 어느 정도의 닮은 점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도 있다.

 

놀라운 사실은 퍼센트로 표시할 경우, 유체와 자석의 속도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실험적으로 자석의 자화력과 유체에서의 밀도 차이가 정확하게 똑같은 속도로 줄어든다는 뜻이다.

 

물리학자들은 그런 현상을 "보편성"이라고 부른다. 전혀 다른 임계 온도를 가지고 있는 이산화탄소와 메탄 같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유체가 상대적(다시 말해서 퍼센트)으로 보면 똑같은 속도로 임계점에 접근해간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두 가지 전혀 다른 "종류"의 계가 그런 보편성을 나타낸다는 것은 정말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런 사실은 상전이가 겉으로는 전혀 다른 광범위한 계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뜻이다.

 

0도 근처

반데르 발스의 이론은 임계점보다 낮은 온도에서 기체와 액체가 "일반적"으로 상전이에 의해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해준다. 과학자들이 그러한 이론에서 원하는 것은 그런 상태 변화가 "특별한" 물질의 경우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이다. 

 

이산화탄소는 질소보다 훨씬 더 높은 온도에서 액화된다. 서로 다른 분자들은 크기와 인력이 다르기 때문에 전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반데르 발스는 임계점이 그런 특징들을 담고 있는 기준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데르 발스는 액체와 기체의 곡선에 대해서 똑같은 "재규격화" 작업을 했다. 그는 서로 다른 물질의 압력, 온도, 밀도를 임계점에서의 값을 기준으로 하는 상대적인 값으로 나타내면 모두가 똑같은 "주곡선"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상대 온도는 온도를 임계 온도로 나눈 값이다. 이와 같은 소위 대응 상태 법칙은 모든 액체와 기체가 임계점과 관련된 어떤 인자에 의해서 재규격화된 똑같은 "주유체"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재규격화는 물질을 구성하는 각각의 입자(분자)의 성질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임계 온도, 압력, 밀도는 입자의 크기와 인력이 미치는 범위나 크기와 같은 입자의 특징으로부터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곡선"을 규격화함으로써 액체가 안정하게 존재하는 모든 범위에서 압력, 온도, 밀도 사이의 관계를 알아낼 수 있게 된다. 오네스는 얼마나 차가워져야 기체가 액화되는지 알고 싶었다.

 

임계점 이상의 온도에서 실험적으로 관찰한 헬륨의 거동을 반데르 발스의 방정식에 적용함으로써 카메를링오네스는 절대 온도 0도보다 섭씨 5-6도 정도 높은 온도가 되어야만 헬륨이 액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로 대기압에서 헬륨은 절대 온도 4.2도에서 액화된다.

 

액체 헬륨을 가지게 된 카메를링 오네스는 그것을 냉매로 이용해서 극한 온도에서 다른 물질이 어떤 거동을 보이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당시의 물리학자들은 열에 의한 금속 원자들의 진동이 금속을 통해서 흐르는 전류를 방해하기 때문에 금속은 온도가 낮을수록 좋은 전도체가 되고, 절대 온도 0도에서는 "완변한"(저항이 없는) 전도성을 나타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11년 수은으로 실험해본 결과는 놀라웠다. 온도가 낮아지면서 수은의 저항은 완만하게 줄어드는 대신 헬륨의 끓는점 부근에서 갑자기 0으로 떨어져버렸다. 그런 온도에서 수은은 전류가 전기저항에 의해서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 "초전도체"가 된 것이다.

 

표트르 카피차는 액체 헬륨을 끓는점 이하인 절대 온도 2도까지 냉각시키면 극단적으로 이상한 성질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점성도가 모두 사라져서, 액체 헬륨이 일단 흐르기 시작하면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런 형태의 액체 헬륨은 용기의 벽을 타고 올라가서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한다. 소위 초유체가 된다.

 

이런 현상은 모두 아주 낮은 온도에서 양자역학의 법칙이 높은 온도에서 지배적인 "고전" 물리학 법칙을 대체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 가지 현상은 모두 진정한 상전이 현상처럼 보인다. 모두가 원자 수준에서 물질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집단적" 거동의 결과이다.

 

많은 우주론 학자들은 상전이가 대폭발(빅뱅)이 일어난 후 놀라울 정도로 아주 짧은 기간에 전체 우주의 모양을 바꿔놓았다고 믿고 있다. 

 

변화의 시대

이제 모든 갑작스러운 변화가 상전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상전이의 핵심은 계 전체를 통해서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것은 수많은 구성 입자들 사이의 협력 때문이다.

 

상전이는 수많은 구성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거동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이다. 대표적으로 그런 상호작용은 단거리의 "국부적" 인 것이다. 각 입자들은 바로 인접한 이웃의 영향을 받을 뿐이고, 그 바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그런 정보에는 관심도 없다.

 

상전이는 입자에 작용하는 어떤 전반적인 영향이 어떤 문턱값을 넘어설 때 일어난다.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처럼 "정상적"으로 행동하던 입자들이 한순간에 아무런 조짐도 없이 (앞으로 살펴보게 되듯이 거의 그렇게 보인다) 전혀 다른 형태의 거동으로 전환된다.

 

19세기의 열역학은 "평형"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새로운 것이 더해지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으며, 평균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는 성장과 붕괴의 과정으로 가득한 오늘날의 통계물리학이 훨씬 더 생동적이라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5. 성장과 모양에 대하여 - 모양과 조직의 창발

전통적인 통계역학이 현대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라는 미국의 과학자의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통계역학의 기본 원리>(1902)는 클라우지우스, 맥스웰, 볼츠만, 반데르 발스의 결과를 바탕으로 기브스는 열역학을 완벽한 일관성을 갖추도록 만들어서 열역학 법칙이 계에 대한 미시적 설명으로부터 어떻게 출현하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밝혀냈다.

 

기브스는 변화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최소화"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물은 방해받지 않으면 가능한 한 낮은 곳으로 움직여서 그 에너지를 최소화한다. 그것은 모든 자발적 변화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눈송이의 경우에는 수증기에서 시작해서 얼음으로 끝난다. 두 평형 상태는 상전이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이, 열역학이 설명하려고 하는 플라톤식의 평형 상태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는 언덕 사이를 굽이치며 흘러가면서 멋지게 생긴 바닥을 채우고, 빗물에 의해서 끊임없이 채워지는 강물처럼 진행중인 과정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런 과정은 평형 상태에 있지도 않고, 적어도 우리의 평생 동안에는 영원히 평형 상태에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열역학이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쓸모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반대로, 열역학은 놀라울 정도로 유용하다. 예를 들면, 열역학은 변화의 방향은 물론이고 어떤 조건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해수면의 높이에서는 물이 섭씨 0도에서 어는 이유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평형 상태에 대한 열역학을 이용하면, 살아 있는 세포나 발전소에서 에너지가 생산되는 과정과 땅속에서 광물이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컴퓨터에서 열이 방출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정하고 변화하지 않는 평형 상태에서 멀리 떨어진 변화와 성장의 과정과 모양을 설명하려면 다른 것이 필요하다.

 

역사가 중요하다

 톰프슨의 <성장과 모양에 대하여>는 분명한 과학 분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대신 여러 세대의 과학자들에게 우리가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심오한 아름다움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톰프슨은 자연선택을 도입할 필요 없이 기하학, 수학, 물리학, 공학만을 근거로 자연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장과 모양에 대하여>는 시대를 너무 앞선 책이었다. 그 책의 많은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비평형" 성장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자연적인 모양을 다루고 있다. 1917년에는 동물학자는 물론이고 열역학의 창시자들까지도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변화에 대한 개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스 온사거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기본적인 열역학의 단점을 알아낸 최초의 과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열역학은 스스로를 평형 상태에만 한정함으로써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평형이 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열역학은 물이 어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해줄 수 없다.

 

고전 열역학은 천재적인 속임수로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 변화가 아주 느리게, 엄밀하게 말해서 무한히 느리게 일어나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면 모두 안정한 평형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평형 상태에서는 계가 어떤 거동을 보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바로 다음과 같은 기브스 조건이다. 계는 에너지를 최소화하도록 구성 성분을 배열시킨다는 것이다. 강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강이 평형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양쪽의 둑 사이에 비교적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는 곳의 물은 정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살아 있는 세포 역시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비하고 폐기물을 만들어내면서도 정체성과 기능을 유지하는 "동적" 정류 상태에 있다. 비평형 정류 상태는 소용돌이, 달리는 자동차,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비롯하여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온거사는 평형에 가까운 경우의 추진력을 계의 엔트로피 생성 속도와 관련짓는 일반적인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1968년 노벨상 수상) 그러나 비평형 열역학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브스 형 원리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런 법칙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질서를 가진 비평형 정류 상태의 고전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앙리 베르나가 1900년에 발견한 것이다. 구리 접시에 담긴 얇은 액체층을 가열하면 대류가 일어난다. 바닥에서 가열되어 밀도가 낮은 액체는 위로 올라가서 차갑고 밀도가 큰 액체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경우, 액체는 위치에 따라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비평형 계가 된다. 평형 상태에서는 모든 곳의 온도가 같아져서 대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계는 아래쪽에서 공급되는 열 때문에 평형에서 멀어지고, 열이 공급되는 동안에는 (위쪽의 표면을 통해서 열이 방출되기 때문에) 평형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아주 느린 속도로 가열하면 대류가 생기지 않는다. 유체를 통한 전도를 통해서 열이 재분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름은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질서정연한 대류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왜" 그런 모양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른 대류 패턴에 대한 더 좋은 이론적인 설명은 1960년대에 등장 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주어진 조건의 실험에서 어떤 패턴이 나타나게 될 것인지를 확실하게 예측해주는 이론은 없다. 비평형 패턴 형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기브스 형의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조건이라도 준비하는 방법이 바뀌면 레일리-베나르 대류 패턴도 달라지기 때문에 선험적인 예측 방법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헛수고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가열 속도나 젓는 방법이 달라지면 똑같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패턴도 달라진다. 비정형 정류 상태는 "역사"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레일리-베나르 대류 패턴은 "무산 구조"의 예들이다. 무산 구조는 비평형 계에서 에너지를 흩뜨림으로써 (예를 들면 대류 패턴은 일정한 속도로 열을 공급해주어야 유지된다) 엔트로피를 생성하는 조직화된 배열을 뜻한다. 프리고진과 그의 동료들은 비평형 계를 "가지치기 점"이락 부르는 위기 상황에 이르게 하면 무산 구조가 만들어진다고 제안했다.

 

평형에 가까운 계에서는 별로 특별한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베나르 접시에 담긴 유체는 열을 전달할 뿐이고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지치기 점에서는 계의 상태가 갑자기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가지치기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이 주어진다. 동일한 두 가지의 "전체적"인 상태가 존재하는 셈이다. 두 가지 중의 어느 하나가 어떤 근거로 선택될까?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물리학자들이 흔히 "잡음"이라고 부르는 "요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잡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절대 온도 0도보다 높은 온도에서는 열 에너지에 의해서 원자들이 흔들린다. 그런 움직임은 모든 물질에 존재하는 무작위적인 배경 "잡음"을 만들어낸다. 온도가 올라가면 잡음은 "더욱 커진다." 무질서의 힘이 끊임없이 작용하게 된다. 원자 운동에 포함된 그런 우연함 때문에 모든 과정에는 무질서한 작은 변이 또는 요동이 들어 있다. 

 

초정밀 측정을 일상적으로 하는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그런 양이 언제나 평균 값을 중심으로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일반적으로 그런 요동의 영향은 크기가 작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지치기 점에 있는 비평형 계는 면도날 위에 세워진 것과 같다. 어느 쪽 길을 선택할까? 우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극도로 작은 요동이 균형을 깨뜨려서 계의 미래 운명을 돌이킬 수 없도록 결정해버린다.

 

프리고진은 "가지치기 점 부근에서는 요동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서 계가 따라가게 될 '가지'를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비평형 과정의 추진력을 가지치기 점을 넘어서 더욱 증가시키면 다른 정류 상태, 즉 두 번째 가지에 해당하는 다른 패턴으로 바뀌게 된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비평형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가지치기 점들이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각각의 가지치기 점에서 주어지는 선택 가능성은 분명하지만, 선택은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시작할 때는 완전히 똑같았던 두 개의 계가 똑같은 추진력을 경험하더라도 각각의 가지치기 점에서 다른 경로를 따라가기 때문에 전혀 다른 가지에 도달한다.  "시간은 무한히 많은 미래를 향해 영원히 갈라진다."

 

실제 계들은 앞에 놓인 여러 가지 가능성들 중에서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없이 많은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가지치기 점은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다루는 과학 분야에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여겨지던 '역사'의 개념을 물리학과 화학에도 도입시켰다."

 

기브스의 결정론은 평형에서 멀리 떨어지면 역사적인 우연에 밀려나게 된다.어쩌면 비평형 열역학에 대한 최소화 원리를 찾으려던 프리고진의 시도를 방해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평형에서 떨어진 "어떤" 정류 상태에서는 계의 구성 요소에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인 조건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조건에 도달하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비평형 가지치기와 평형 상전이 사이에는 놀라우면서도 중요한 닮은 점이 있다. 가지치기는 새로운 정류 상태를 향한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이다. 사실 가지치기 점은 자석에서의 퀴리 점 같은 임계점과 많이 닮았다.

 

금속을 퀴리 점을 통해서 냉각시키면 비자석에서 자석으로 바뀐다. 비자기 상태에서는 모든 원자 "나침반 바늘"이 무작위적인 방향을 향하고 있고, 자기 상태에서는 규칙적으로 배열된다. 따라서 그런 임계 상전이는 "규칙화" 과정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접시에 담긴 액체를 대류가 일어나는 온도 이상으로 가열하면, 그런 비평형 가지치기가 유체를 두루마리 단위 구조로 규칙화시킨다. 물리학자들은 두 가지 경우에서 모두 "대칭성 파괴"가 일어난다고 한다.

 

왜 대칭성 "파괴"라고 할까? 질서와 패턴이 대칭성과 관계되고, 무작위성은 대칭성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만, 무작위성도 특유의 대칭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구성 요소들이 무작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계는 평균적으로 볼 때 구성 요소들이 어떤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는 계보다 훨씬 "더" 대칭적이다. 

 

무작위적인 상태에서는 어느 한 방향이 다른 방향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류가 일어나고 있는 두루마리 단위 구조 상태에서 두루마리 방향과 평행인 방향은 두루마리와 수직인 방향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두루마리는 공간에서 특별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균일한 유체를 두루마리 단위 구조로 대류하도록 변환시키면 일부 대칭성이 사라진다. 즉 대칭성이 파괴된다. 자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늘어선 스핀은 공간에서 특별한 방향을 향하게 되고, 비자석의 경우에는 그런 방향이 없다.

 

임계 상전이에서의 그런 선택은 가지치기 점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요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자석이 한쪽보다 다른 쪽을 더 좋아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계의 한 부분에서, 우연에 의해서 한 가지 스핀이 조금 더 많아지면 균형이 깨진다. 그래서 임계 상전이를 일으키는 계는 요동에 지극히 민감하게 된다. 나중에 우리는 그런 사실 때문에 임계점에서 매우 특별하면서도 기막힌 거동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대응이 평형계의 통계역학과 비슷한 비평형 통계역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 진실은 훨씬 더 단순하면서도 심오하다. 상전이와 비평형 가지치기의 변환은 근본적으로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현상은 모두 많은 수의 개별 요소들이 서로 국부적으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집단적" 현상이다. 평형 상태에 있든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그런 상호작용이 계의 한 부분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민감하게 만들어주는 조건이 있다. 갑자기 모든 입자들이 서로 연결된 정교한 네트워크를 통해서 다른 모든 입자들과 연결된다. 그렇게 되면 느닷없이 새로운 정류 상태가 창발된다.

 

문화의 모양

사회의 물리학을 정립하려면 터무니없는 이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과감한 발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입자가 사람이 될 것이다. 

 

박테리아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박테리아가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원시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가지고 있을 뿐인 박테리아 세포도 비평형 성장 과정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집단적 거동의 패턴을 보여준다. 마츠시다도 비평형 성장의 통계물리학을 배경으로 생명과학 분야에서 성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라고 있는 바실루스 수브틸리스 박테리아 군체의 복잡한 가지 모양을 본 그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큰 규모에서 나타난 구조가 점점 더 작은 규모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프랙탈이었다. 마츠시다는 그것이 확산 한계 응집(DLA)이라고 부르는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종류의 프랙탈 가지치기 패턴이라는 사실도 인식했다.

 

예를 들면, 그런 패턴은 소금물에 넣은 음으로 하전된 전극에 금속이 모이는 전해 석출에서도 볼 수 있다. 전해 석출과 같은 비생물학적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프랙탈 모양을 처음 연구하던 1980년대 초에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런 패턴들이 자연의 "유기적" 형태와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바위에 광물질이 석출되어 가지가 달린 프랙탈 구조를 이루고 있는 모양을 양치류 화석으로 잘못 인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츠시다의 연구실에서 발견된 것은 진짜 생물학적 프랙탈이었다.

 

DLA 석출의 프랙탈 모양은 지극히 혼돈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똑같은 모양으로 석출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서 가지들이 매우 높은 효율로 허용된 공간을 채운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구조가 아무리 크게 자라더라도, 언제나 가지 달린 구조의 내부까지 깊숙하게 파고들어간 빈 공간의 "피요르드"가 존재한다. 

 

공간을 채우는 효율을 수학적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프랙탈 차원"이다. 모든 DLA 성장 패턴은 똑같은 프랙탈 차원을 가진다. 프랙탈 차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는 성장 구조들을 구별해주는 이름표와 같다.

 

1984년에 마츠시다는 그런 DLA 모델에서 나타나는 뭉치들이 편평한 그릇에서 전해 석출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과 정확하게 똑같은 모양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바실루스 수브틸리스 군체는 DLA 뭉치와 비슷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똑같은 프랙탈 차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실은 두 경우의 형성 과정이 동일한 핵심적 특징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뭉치의 가장자리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무작위적인 요동 때문에 끝이 일정하게 갈라진다는 사실이다.

 

 DLA는 비평형 과정이고 프랙탈 패턴은 비평형 성장의 주제곡 중 하나이다. 자라나고 있는 뭉치의 어느 곳에 충돌하든 상관없이 입자들이 곧바로 비가역적으로 달라붙으면 가장 안정한 평형 구조를 찾아갈 여유가 없게 된다. DLA 뭉치는 역사의 사건들이 얼어붙어서 만들어진 지도인 셈이다. 

 

연구자들은 만약 프랙탈 박테리아 군체를 평형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추진력을 변화시키면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했다. 그래서 성장 과정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요인들을 변화시켰다. 물의 비율을 변화시킴으로써 세포의 이동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양분을 변화시킴으로써 군체가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인 "건강 상태"도 조절할 수 있었다.

 

마츠시다 연구진은 두 가지 조절 인자를 변화시키면 군체의 성장 모양이 가지가 달린 DLA 구조와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양분이 많을 때는 군체의 밀도가 높아지고, 가장자리에만 살찐 손가락 모양의 가지가 만들어졌다. 그런 모양은 수학자 에덴이 1961년에 암 종양의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했던 이론적 성장 모델에서만 만들어지는 것과 닮았다.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세포들이 만들어지면서 군체가 커진다. 그러나 겔이 더 부드러워서 세포가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다른 패턴이 나타난다. 영양분이 부족할 경우에는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얇은 가지가 만들어지고, 영양분이 풍부하면 에덴 형의 동심원 고리가 나타난다. 박테리아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영양분이 충분히 공급되면 대략 원형으로 빠르게 자라나서 군체의 밀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눈으로 겨우 볼 수 있을 정도가 된다.

 

결국(조절 인자인) 겔의 단단한 정도를 수평축으로 하고, 영양분의 양을 수직축으로 하는 "공간"은 각각의 특징적인 성장 패턴을 가진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한 패턴에서 다른 패턴으로의 변화는 비교적 갑자기 나타난다. 즉 조절 인자 중의 어느 하나를 아주 조금만 바꾸어주면 된다. 연구진에게는 그런 특징이 온도와 압력을 두 축으로 하는 공간에서 물질의 기체, 액체, 고체 상태를 구분해주는 "상 경계"와 비슷한 것으로 보였다. 상 경계를 넘어가는 것은 상전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군체 모양의 변화를 "엄밀한" 의미에서 상전이와 비교할 수는 없다. 우선, 계가 평형에 있지 않다.

 

다른 종류의 박테리아는 복잡한 다른 성장 패턴을 보여주고, 역시 성장 조건을 바꾸어주면 한 패턴에서 다른 패턴으로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난다. 이제 그런 패턴들도 세포들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인자들에 대한 간단한 가정을 도입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각각의 세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결정하는 간단한 "규칙"으로부터 나타나게 될 전체적인 패턴을 유추할 수 있다.

 

얼음 꽃

연구자들은 공기 온도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변하면 눈송이의 모양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겔의 굳기와 영양분의 양이 박테리아의 모양에 영향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온도와 습도가 눈송이의 "형태 공간"을 그려주는 조절 인자가 된다.

 

박테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눈송이는 없지만, 눈송이들을 성장 패턴에 따라 분명한 "클래스"로 정의할 수가 있고, 서로 다른 클래스는 형태 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구분된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는 다양하게 보이는 모양에 일종의 질서가 숨겨져 있다. 각각의 성장 패턴은 독특하게 장식이 되더라도 주어진 성장 조건에서는 우리가 플라톤적 형식이라고 볼 수 있는 필연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눈송이의 성장에 대한 실험이 재현 가능하다는 것도 바로 그런 뜻이다. 즉 세부적인 사실은 다를 수 있지만, 형식은 동일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그런 개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개성은 비평형 성장의 우연성을 보여준다. 성장 과정에서 어떤 요동이 바로 그 단계에서 새로운 가지가 만들어지도록 해주기 때문에 눈송이의 가지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생기게 된다. 눈송이는 무작위적으로 생기는 작은 혹을 새로운 가지로 증폭시켜주는 소위 성장 불안정성을 경험한다.

 

DLA 과정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서 마츠시다의 박테리아 군체에서 볼 수 있는 가지가 달린 프랙탈 패턴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눈송이는 그렇게 무작위적이 아니다. 눈송이에 나타나는 육각형 대칭성 때문이다. 그런 육각형 대칭성은 얼음을 구성하는 물 분자의 규칙적인 배열에 의한 것이다. 결정 격자가 공간에서 6개의 "특별한" 방향을 선택한다. 결정형 얼음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지들이 그런 방향으로 자라난다. 결국 결정의 성장은 바탕이 되는 육각형 격자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

 

분자 수준에서의 기하학적 규칙성이 훨씬 더 큰 규모의 눈송이 전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규칙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눈송이 성장에서의 우연성과 규칙성의 그런 상호 관계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세부적인 사실들을 이해하기 시작한 미묘한 문제이다.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성장 과정에 숨겨져 있는 대칭성의 영향은 육각형 격자 무늬가 새겨진 겔 위에서 자라나는 프랙탈 박테리아 군체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 나타난다. 격자가 가지 형성 과정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군체는 눈송이처럼 보이게 된다.

 

평형에서 떨어진 계에서 만들어지는 구조와 패턴은 대부분 복잡하고 매우 미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형 통계물리학에서 개발된 도구와 개념을 비평형 상태에도 적용하거나 변형해서 사용할 수 있다. 비평형 상태라고 해서 거동의 예측 가능성과 규칙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회물리학이 이해하려고 하는 과정들의 대부분이 비평형 현상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은 우리에게 긍정적이다.

 

 

6. 이성의 행진 - 집단적 거동에서의 우연과 필연

1990년대에 박테리아 패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물리학자 에셀 벤-야콥은 다세포 군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목적을 알아내고 싶었다. 벤-야콥은 박테리아의 정교한 장식 격자가 무기물 세계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과정의 지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이 멀고 아무 감각도 없으면서 기체 입자처럼 움직이는 살아 있는 세포가 있다. 그들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도 실제로 그렇게 단순할까?

 

벤-야콥 연구진은 바실루스 세포의 성장 패턴을 결정하는 요인을 찾아내는 일에 착수 했고, 곧 형태 그림이라는 모양의 지도에서 새 영역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레벤후크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발견했다. 덩어리들이 소용돌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소용돌이 형태형이라 이름 붙인 박테라아들은 본래 균주의 돌연변이로 유전적으로 원 모양으로 굽어지며서 자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몇 개의 세포를 분리해서 새로운 군체로 배양하면 역시 소용돌이 모양의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연구진을 놀라게 만든 것은 세포의 움직임이 마치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기로 합의한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체 입자들이 공간에서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는 것처럼 세포들이 우뭇가사리 겔 위에서 무작위 걸음을 걷고 있다고 가정하면 마츠시다가 보았던 가지 패턴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휘어지거나 소용돌이 모양으로 자라는 성장 패턴에는 일종의 조직화된 "집단"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과학자들은 그런 종류의 복잡한 행동 패턴이 복잡한 동기와 계획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뇌가 없는 박테리아는 복잡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도 없다. 그들의 움직임을 결정해주는 대장 박테리아도 없다. 그런데도 회전하는 움직임의 조화는 놀라운 수준이다. 그런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런 의지가 없어도 움직임의 패턴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사람들도 언젠가는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 의하지 않고 비슷한 패턴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집단의 안무

미생물 세계에서 바실루스 박테리아가 특별한 그룹 활동의 성향을 가진 이단자는 아니다. 자연에서 집단적인 거동은 일상적인 현상이고, 그런 협동의 곡예가 때로는 단순히 둥글게 모여 수영하는 정도를 넘어서기도 한다. 미생물 세계의 홉스는 자신의 리바이어던, 즉 "여럿이 합쳐진 사람"을 찾아내는 데에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딕티오스테릴움 디스코이데움이라는 단세포 유기체는 환경이 좋아서 먹이와 물이 풍부하고 날씨가 따뜻할 때는 각자의 길을 간다. 그러나 점균 세포들은 가뭄, 기아, 또는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면 서로 의자히게 된다.

 

점균류들이 세포 덩어리로 뭉쳐지고, 각각의 세포들은 굶주린 농부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것처럼 머리를 안으로 들이민다. 수만에서 수십만 개의 세포들이 뭉쳐지고 나면, 하나의 다세포 유기체인 민달팽이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민달팽이는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인다. 그리고 결국에는 뿌리를 내리고 모양이 바뀐다. 이제 민달팽이는 가는 줄기와 과실체라고 부르는 솜사탕 모양의 머리를 가진 기괴한 식물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과실체에는 영양분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좋은 환경이 돌아올 때까지 견딜 수 있는 포자로 변해버린 세포가 들어 있다. 

 

그것은 홉스가 "공화국의 핵심" 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똑같다. "서로 간의 상호 계약에 따라 한 사람의 엄청나게 다양한 행동들이 모든 사람들을 스스로 창조자로 만들어주고, 결국에는 한 사람이 평화와 공동이 방어를 위해서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모두의 힘과 부를 이용하게 된다."

 

말을 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세포들이 어떻게 그런 "상호 계약"을 맺게 될까? 딕티오스텔리움의 경우에도 일종의 후각을 통해서 의사 전달이 이루어진다. 고등동물이 짝을 유인하기 위해서 페로몬을 분비하는 것처럼 다른 세포들을 "유인" 하는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어떤 텍티오스텔리움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유인물질을 분비하는 "심장 박동 조절장치"가 되고, 근처의 세포들은 그런 파동이 일어나는 곳을 향해 움직인다. 화학적으로 유도되는 그런 세포의 움직임을 화학주성이라고 부른다.

 

딕티오스텔리움 세포들은 자신들의 요새로 모여드는 단계에 이르면 바실루스의 소용돌이 형태형과 비슷한 회전하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조직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종류의 움직임은 물고기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물고기는 화학주성을 통해서 서로의 의사를 교환하지는 않는다. 물고기는 서로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물고기는 작기는 하지만 뇌를 가지고 있어서 환경에 대해서 훨씬 더 크고 정교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점균류와 물고기에서 똑같은 집단 거동의 형식이 발견되는 것은 단순히 우연일까?

 

많은 종류의 동물이 구체적이고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함께 움직이는 그룹으로 뭉친다. 그룹을 형성하면 공격당하기 쉬운 새끼를 보호할 수 있고, 숫자 덕분에 포식자의 공격을 피할 수가 있다. 벌 떼는 체온을 이용해서 벌집의 온도를 조절한다. 개미는 대규모로 움직여야만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모든 동물 집단이 기능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 패턴과 구조가 ... 개체들이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 상관없이 비선형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동물 집단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패턴과 집단성에 대한 "생물학적"(적응적) 설명에서는 그런 상황의 "물리학"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우연에 의한 것으로 주장할 위험이 있다.

 

목적에 대한 의문을 제쳐두더라도 동물들이 "어떻게" 거동과 움직임의 조화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모든 새들이 동시에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벌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 과학이 자연의 심오하고 신비로운 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할 일이 많은 문제이다.

 

이런 설명에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는 결국 생물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가 밝혀내게 되었다.

 

 

뉴턴의 꼭지두각시

쥐빠귀 떼 새들이 무슨 법칙을 따르고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훗날 그의 기록에 따르면 "새 떼들의 움직임이 각각의 새들이 세상에 대한 국부적인 인식만을 근거로 하는 개별적인 행동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는 "국부적 인식"이 핵심이라고 느꼈다.

 

한 마리의 새가 새 떼의 다른 모든 동료들이 하는 일을 미리 예상하거나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자신의 근처에 있는 새들의 움직임에는 아주 빠르게 반응할 수 있다.

 

"의식이 있는" 대상을 "입자"라고 부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레이놀즈는 "보이드"라는 말을 만들었다. 각각의 보이드는 자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 안에 있는 다른 모든 보이드의 움직임에 반응하게 된다. 그런 공간을 지역 구라고 불렀다. 

 

움직임을 결정하는 법칙은 다음과 같았다. 각각의 보이드는 지역 구 인에 있는 다른 보이드의 평균 속력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속한 그룹의 중심을 향해 움직이려고 하며, 다른 보이드와 충돌하지 않으려고 한다. 속도와 방향에 대한 조건은 보이드들을 서로 뭉치게 만들어준다. 즉 보이드들이 움직이는 동안에 서로 가까이 붙어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무리의 전체적인 거동을 결정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룹의 한쪽에 있는 보이드들이 다른 쪽에 있는 보이드들의 움직임에 직접 영향을 줄 수도 없다. 그런 법칙에는 무리가 일관되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내재된 경향이 담겨 있지 않다.

 

그렇지만 보이드들의 움직임은 진짜 새들의 움직임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레이놀즈는 영구적인 장애물이나 (새로운 보금자리나 먹이가 있는 곳처럼) 어떤 특정한 위치로 가도록 만드는 경향을 포함시켜서 새들의 움직임에 추가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그는 그런 방법으로 진짜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무리의 움직임을 흉내낼 수 있었다.

 

폰 노이만은 복잡을 복사하고 증가시킬 수 있는 사고력을 가진 기계의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 수학자 울림이 그에게 추적이 가능할 정도로 간단한 과정을 소개해주었다. 

 

각각의 사각형(세포)에 자동장치가 설치된 장기판 우주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세포 자동장치들은 각각 몇 가지 다른 상태 가운데 하나로 존재할 수가 있고, 그중의 어느 상태를 선택하는지는 인접한 세포를 차지하고 있는 자동장치의 상태에 의해서 결정된다. 실질적으로 각각의 자동장치들은 정보를 담고 있는 일종의 기억 소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컴퓨터 기억 소자는 "온"과 "오프"가 있는 스위치와 마찬가지로 1과 0의 두 가지 이진법 상태 중의 하나로 존재할 수 있다. 폰 노이만과 울람은 정보의 패턴이 격자 위에서 어떻게 복사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세포 자동장치에서 한 세포가 인접한 다른 세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정하는 규칙에 따라 여러 가지 놀이를 할 수 있다. 1960년대 말 케임브리지 수학자였던 존 호턴 콘웨이가 생명 놀이라는 일종의 장기판 모양의 세포 자동장치 놀이를 고안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세포나 유기체가 번성하는 방법에 대한 초보적인 모델이었다. 혼자 있으면 죽고, 공동체 속에서는 자라서 증식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너무 과밀해지면 식량과 자원 부족으로 죽어버린다. 생명 놀이에서 각각의 세포는 살아 있거나 죽은 상태가 될 수 있다. 살아 있는 세포는 살아있는 세포 둘 또는 세 개와 인접해 있으면 살고, 인접한 세포가 그보다 적거나 많으면 죽는다. 정확하게 살아 있는 세포 세 개와 인접하게 되면 죽어 있던 세포가 되살아난다.(빈칸이 다시 채워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콘웨이의 생명 놀이는 "인공 생명" 연구의 원형이다. 생명 놀이가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세포 뭉치의 모양과 거동의 엄청난 다양성은 전설적이다. 뭉치가 격자를 통해서 뱀처럼 꿈틀거리거나 새처럼 활강하면서 전파되기도 한다. 다른 뭉치를 잡아먹기도 하고, 새로운 뭉치를 연속적으로 쏟아내기도 한다. 풍요와 놀라움이 가득한 이상한 세상이다. 세포들 사이의 국부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몇 개의 간단한 규칙으로부터 그런 모든 것이 생겨난다.

 

크레이그 레이놀즈의 보이드는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고, 격자에 한정되어 있지 않은 자동장치였지만 역시 규칙에 의해서 견고하게 한정된 똑같은 자동장치들이다. 보이드는 살아 있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현상을 재현해주는 최초의 인공 생명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드는 "창발"을 핵심 개념으로 하는 "복잡성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연구 목록의 대표적인 상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떼를 짓는 행동은 보이드의 거동에서 저절로 창발된다. 처음부터 그렇게 프로그램된 것이 아니다. 규칙은 개체의 움직임만을 결정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개체들이 상호작용하는 방법에 관련된 무엇인지가 일종의 일관된 그룹 거동을 만들어낸다. 창발적 성질은 전체가 부분의 합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복잡성"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하버드의 생물학자 윌슨은 "창발성 그 자체는 계의 역학에 대한 통찰력이 없으면 도무지 아무 설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보이드를 비롯하여 개미 군락에서 초원의 소 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적 동물의 거동을 대상으로 하는 훌륭한 컴퓨터 모델들 전부가 물리학자들이 비평형 통계물리학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첨단 기술을 이용한 거실용 놀이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집단행동에 대한 물리학

비첵도 확산에 의해서 지배되는 응집으로 만들어지는 가지 달린 뭉치의 경우처럼 비평형계의 성장과 형태에 대한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소용돌이 박테리아를 지배하는 법칙은 반드시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테리아는 기체 입자와 비슷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박테리아가 특유의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박테리아는 영양분을 태워서 얻은 에너지를 이용해 단백질로 만들어진 프로펠러 모양의 편모를 움직여서 주변의 세포들을 함께 끌고 간다. 서로 충돌하는 기체 입자들은 뉴턴 법칙을 따르고 (대체로) 모멘텀이 보존된다. 그러나 박테리아는 그런 조건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멈추거나 더 빨리 움직인다. 그런 자체 추진력 때문에 박테리아 군체는 비평형 계가 된다. 연료를 연소시키는 세포는 평형 상태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에 있게 된다.

 

1994년에 비첵은 박테리아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었다. 각각의 박테리아 세포를 맥스웰의 춤추는 기체 입자의 하나와 같으면서도 스스로의 자체 추진력과 움직임을 조절하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갖춘 "자체 추진 입자"로 취급했다. 프로그램에서는 모든 세포가 똑같은 속력으로 움직이고, 각각의 세포는 일정한 거리에 있는 다른 세포들이 움직이는 평균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런 규칙은 레이놀즈의 보이드를 지배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비첵과 치록은 박테리아의 움직임에는 무작위적인 요소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도 가정했다. 

 

그런 무작위성은 질이 나쁜 음향 녹음에서 신호음을 방해하는 백색 잡음과 같은 일종의 바탕 잡음이 된다. 잡음이 너무 크면, 신호가 망가져버린다. 그런 경우에는 세포 움직임의 무작위적 요소가 세포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려는 경향을 압도하게 된다.

 

연구자들은 컴퓨터를 통해서 박테리아 자동장치의 움직임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곧바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잡음이 충분히 작으면 세포들은 집단적인 거동을 나타낸다. 즉 모든 세포들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각각의 세포들은 지역 구에 속한 입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도록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룹 전체가 하나인 듯 움직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잡음이 커지면 조화의 정도가 줄어든다. 어떤 결정적인 잡음 수준에서는 일관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비첵과 치록은 우연히 온도 변화에 따른 자석의 거동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낮은 온도에서는 모든 자기 스핀이 같은 방향을 향하게 되고, 원자들의 자기장이 합쳐져서 전체 자기장이 만들어진다. 높은 온도에서는 바늘이 무작위적인 방향을 향하게 되고, 자기장은 서로 상쇄되어버린다. 임계 온도에 도달하면 자기서 상태와 비자기성 상태 사이의 중간에서 상전이가 일어난다. 스스로 추진하는 입자에서는 배열된 상태에서 배열되지 않은 상태로 비정상적인 상전이가 일어난다. 평균 속력은 자기장의 역할을 하고, 잡음은 온도의 역할을 한다. 연구자들은 박테리아의 움직임을 이런 현상과 대응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스스로 추진하는 입자들의 배열이 "비평형" 전이라는 사실과 관계된 몇 가지 중요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과정 사이의 수학적 동등성을 증명할 수 있다. 모두가 "보편적" 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집단 법칙

토머스 홉스는 "사회적 동물"의 협동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사람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의 행동을 수학적인 모델로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각각 독특한 형식의 수천 가지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면 인간의 활동을 이상화할 필요가 있겠는가?

 

복잡한 궤적을 가지고 있는 모델을 개발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모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내가 입력한 것과 거의 같을 것이다.

 

1971년 헨더슨은 그런 고약한 개별성을 넘어서더라도 사람들이 움직이는 그룹에서 하는 행동에서 정량화할 수 있는 "통계적"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복잡한 거리를 걸어가는 행인들에게는 어떤 일반적인 규칙, 어떤 제한 조건, 어떤 경향이나 평균이 있다. 그는 그런 성질이 맥스웰-볼츠만의 기체 운동론을 따르는지 알고 싶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보도를 따라 걷는 사람의 속도 분포가 맥스웰이 도입했고 볼츠만이 증명했던 종 모양의 곡선에 맞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는 움직이는 집단을 살펴보녀서 자신의 생각을 확인했다. 모든 경우에 속도가 맥스웰-볼츠만 곡선에 아주 잘 들어맞았지만, 이상한 차이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의 속도를 나타내는 곡선에는 조금 다른 평균 속력을 가진 두 개의 맥스웰-볼츠만 입자들의 분포가 서로 겹쳐진 것처럼 두 개의 분명한 피크가 있었다. 헨더슨은 두 개의 피크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남자와 여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핸더슨은 집단의 움직임을 흩뜨리면 집단의 "전반적" 인 상태에 변화가 생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체를 압축했을 때 액화가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집단에게도 상전이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지만 그는 실제로 그런 종류의 상전이를 관탈했다는 보고를 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말 집단 모델을 개발하기 시작했던 헬빙은 그런 설명이 실제 보행자들의 동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행자들의 의도가 무엇이었고, 그들이 주위의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요인들이 포함된 모델이 있어야만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복잡한 행동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헬빙은 개인의 움직임은 "개인적인 목표나 관심" 같은 내적 영향과 "상황과 환경에 대한 인식" 같은 외적 영향의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행동에 대한 외부적 영향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1945년에 심리학자 카렌 호니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에는 "다가가기", "멀어지기", "대항하기" 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칵테일 파티에 참석한 유명인사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매력 덕분에 팬이나 추종자들을 불러모으게 된다. 그러나 집단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움직이면서 뭉치게 될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낯선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상호작용은 인력이나 반발력과 비슷하다. (호니의 "대항하기"는 좀 특별한 경우이다. 공격이나 충돌에 의해서 발생하는 의도적인 방해를 뜻한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쿠르트 레빈은 호니가 묘사했던 일종의 잡아당기거나 밀치는 상호작용을 사회과학에서 광범위하게 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빈에 따르면, 개인은 생각, 믿음, 습관, 개념 등으로 만들어지는 추상적인 힘 장 속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힘 장은 개인이 경험하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어떤 경향을 가지게 된다.

 

그런 주장은 대체로 인성에 대한 홉스의 기계론적 인식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본 헬빙과 몰나르는 일종의 그룹 동역학적 특성이 자발적으로 창발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도로의 중심을 따라 설치된 기둥이나 나무와 같은 장애물이 그런 흐름을 만들도록 촉진시킨다. 사람들이 어느 쪽으로 걸어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하지 않아도 그렇다. 보행로는 자발적으로 조직화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행로를 차지하게 되는지는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다.

 

선도자가 문을 통과하고 나면 몇 사람이 뒤를 따르게 된다. 다른 그룹은 뒤로 물러나서 이들이 통과하도록 기다린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예절은 사실 서로 가까이 접촉하는 것을 피하려는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이 모델은 보행로의 불편과 혼잡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기둥을 세워서 복도에 구획을 만드는 것도 흐름을 개선하는 방법이 된다. 문 때문에 생기는 혼잡을 줄이려면 문을 넓게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문이 넓어지면 반대 방향의 흐름이 번갈아 나타나는 일이 잦아질 뿐이다. 두 개의 문을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어느 방향의 문인지를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더라도 집단은 자동적으로 두 개의 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지나가는 두 개의 흐름으로 조직화된다. 따라서 두 개의 문은 두 문의 폭을 합친 것과 같은 폭을 가지 ㄴ하나의 문보다 더 효율적이다.

 

이 보행자 모델로부터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열린 공간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길이 만들어지게 되는지를 알아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런 길이 처음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풀은 일정한 속도로 자라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길은 결국 사라져 버린다.

처음에는 피플로이드들이 여러 목적지 사이의 최단 경로를 비교적 잘 따라갔다. 그러나 상당한 정도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최단 경로가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 최단 경로를 따라가려는 경향과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려는 경향이 조화를 이룬 길이 만들어진다.

 

설계자가 당초에 만들었던 본래의 길을 사용하도록 노력했지만 실패한 경우를 보았다. 보행자들이 모두 그런 의도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드링 좋아하는 길을 다시 만들어버렸다.

 

 

공간의 언어

공원의 열린 공간에서는 보행자들이 공식적인 보행로를 무시하고 집단적으로 만든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도시나 건물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 도시와 건물의 공간도 사람의 필요와 요구에 맞도록 설계할 수 있을까?

 

방문자들은 중앙에서 고전 작품과 영국 작품이 전시된 왼쪽 방을 현대 작품이 전시된 오른쪽 방보다 더 선호했다. 방문자들이 현대 작품보다 고전이나 영국 작품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을까? 연구자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술관의 모든 방이 방문자들에게 똑같이 "매력적" 인 경우에도 시뮬레이션의 결과는 똑같은 좌-우 비대칭을 보여주었다. 방문자들은 방이 배열된 방식에 따라 결정되는 선호도를 따르고, 현대 작품이 전시된 방의 구조가 더 복잡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미술관 관람자의 행동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술관이 작품을 어떻게 배열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모델을 이용하면 기존의 길이나 건물 설계에서 나타날 만한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과제는 보행자들이 주어진 공간을 사용하는 "규칙", 즉 힐리어의 공간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힐리어는 공간의 시각적 언어에서는 시각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그런 언어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ㅕㄴ 힐리어의 피플로이드들이 공간에서 이동하는 더욱 현실적인 길을 보여주도록 프로그램할 수가 있다.

 

산업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도시 개발 모델이 도입되기까지는 도시화가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강화하고 다양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왔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도시 개발 모델은 집단행동을 방해하고 사람들이 권력에 순종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사회적 접촉을 줄이고, 지역을 분화시키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면, 고층 빌딩 지역은 생활 공간을 밀집시키는 동시에 사회적 연대감을 만들어내는 접촉의 빈도를 줄이도록 만들었다. "고층 건물들이 실패였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지역사회의 규모를 줄이려는 감추어진 목적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힐리어와 핸슨의 주장이 옳다면, 멋진 도시 계획에서의 장애물은 단순히 사람들이 공간을 어덯게 사용하는지를 몰라서 설치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어진 환경에서 본능적으로 어떻게 돌아다니고 싶어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며 예측할 수 있고, 공간이 수용해야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모델화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더 긴장을 풀고, 편안하고,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곳을 만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빠른 출구

비첵 연구자들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산만해지면 (너무 "잡음이 심하면") 복도에서 혼잡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리학의 문제로 생각하면 이런 상황은 직관과 반대되는 결과이다. 피플로이드의 움직임을 더 산만하게 만드는 것은 입자들로 구성된 집단의 온도를 높여서 더 심하게 흔들리게 만드는 것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결과는 군중이 "얼어붙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유체"는 "가열하면" 얼어붙어버린다. 물과 같은 정상적인 유체는 냉각시켜야 얼게 된다.

 

비첵은 지나치게 흥분한 군중에 의한 혼잡이 공황의 효과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들은 공황이 일반적인 움직임과 다른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경향이 더 이상 움직임을 지배하지 못하게 될 뿐이다.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게 되면, 움직임이 제한을 받는다. 지나치게 밀집된 군중 속에서는 다른 사람을 지나쳐갈 수도 없고 몸을 돌릴 수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 움직임을 방해하는 일종의 마찰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사포가 붙여진 당구 공처럼 피플로이드에게 마찰 특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가하는 압력이 너무 커지면 그 사람은 부상을 입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고 가정했다. 연구자들은 부상을 당하게 되는 압력의 수준을 추정함으로써 밀집된 군중에서 언제 어떤 방법으로 희생자가 생기는지의 기준을 얻고 싶어했다.

 

실험에서 반대쪽 벽에서 불이 지속적으로 번지게 했다. 피플로이드들이 두려움을 억누르고 초속 1.5미터 이하의 차분한 속도로 움직이면, 질서정연하게 방을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피플로이드들이 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려고 하면, 결과는 놀랍게 달라진다. 쉽게 빠져나갈 수 없고 군중은 공황에 빠지고, 혼잡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 막힘 효과는 익숙하다. 소금병의 구멍보다 작은 소금 알갱이가 구멍을 막아버리는 것도 같은 경우이다. 알갱이들은 상호 마찰 때문에 구멍에 아치를 형성해서 스스로의 무게를 지탱하게 된다.

 

더 빨리 움직이는 것이 더 느리게 되는 셈이다. 평상의 상태와 공황 상태 사이에 일종의 비평형 상전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빠른 속도가 더 느린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더 위험하기도 하다.

 

작은 무리는 좋은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작은 무리는 성공 가능성을 높여준다. 누군가가 출구를 찾아내면 다른 사람들도 따를 가능성이 높다. 그런 효과는 한번 나타나면 스스로 강화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무리 짓기는 거의 모든 사람을 하나의 출구로 모여들게 하고, 다른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다른 출구를 찾으려는 생각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무리짓기는 처음에는 더 효율적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무리 짓기 수준을 넘어서면 역효과가 빠르게 확신된다. 한곳의 출구는 무리를 따라온 사람들에 의해서 막혀버리고, 다른 출구들은 전혀 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출구의 가장 효율적인 활용은 적당한 수준의 무리 짓기에서 이루어진다. 무리 짓기 수준이 너무 높거나 너무 낮으면 출구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다.

 

군중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전체 계획 수립 과정이 훨씬 더 유연해진다. 연구진에 따르면, 예측은 처방과 함께 혼합될 수가 있다. 계획은 위에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쌍방향적인 방법으로 결과와 서로 엮이게 된다. 보행자의 움직임에 대한 이런 모델에서는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그들이 접하는 제약 조건에 대한 간단한 몇 가지 가정을 근거로 사람들이 무엇을 "하게 될 것" 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물리학의 진정한 정신이다.

 

집단 움직임의 변화는 개인적인 의도가 점진적으로 변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창발될 수 있다. 뜻하지 않은 결함도 있다. "여러 규칙들이 실제와 같은 그룹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시각적으로는 그럴듯한 결과가 실제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경우도 있다. 창발적 성질로부터 개인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도시의 한계

 현대의 도시는 결국 살아 있다.

1990년 대에 마이클 배티는 도시의 꼴사납고 불규칙적인 외곽선이 마츠시다 미츠구가 박테리아의 성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확산 한계 응집(DLA)으로 만들어지는 입자 뭉치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DLA로 만들어지는 뭉치로 보면, 도시는 합리적인 설계가 불가능한 스스로의 생명을 가지고 자라는 진정한 유기체로 보이기 시작한다. 멈퍼드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혼돈의 결정화"가 바로 그것이다.

 

배티와 그의 연구원 폴 롱리는 도시의 모양을 설명하기 위해서 유전체 붕괴 모델이라는 DLA 형 성장 이론을 이용했다. DLA 뭉치들은 분명하지 않은 가장자리에 입자들이 달라붙으면서 성장하지만, DBM에서는 울퉁불퉁한 모서리들이 주변의 매질 속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전진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모델이 도시 팽창에 대한 더 현실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스 연구진은 "상관 스며들기" 모델을 도시의 성장에 적용했다. 개발 지역들도 역시 서로 상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주택이나 상업 지역이 있는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운 주택이나 상업 지역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들은 도시의 성장을 DLA와 같은 형식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즉 도시의 성장은 일반적으로 가장자리에 새로운 입자("개발 단위")가 달라붙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DLA 입자들은 무작위적으로 달라붙지만, 상관 스며들기 모델에서는 다른 입자들이 있는 곳에 달라붙을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이 모델에서는 주된 뭉치에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도 새로운 개발 중심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했다.(물론 상관을 통한 영향은 미친다)

 

결과적으로 얻는 모양은 그런 상관관계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범위의 상관 강도에서는 자라나는 뭉치들이 실제 도시와 많이 닮았다. 더욱 정확한 정량적인 비교를 하는 방법은 주된 도시 부근에 얼마나 많은 작은 마을이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정부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게 된다." 그런 집단적인 과정은 모양과 형태에 대한 스스로의 물리적 법칙을 만들어낸다.

 

도시 구조에 두 가지 구별되는 종류가 있다. 한 종류는 비교적 "열린" 구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많은 축선들이 전체 도시 공간을 가로지른다. 방콕, 에인트호벤, 시애틀, 바르셀로나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다른 그룹은 짧은 축선들이 밀집된 것으로 런던, 홍콩, 아테네, 다카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연구진은 첫 그룹에 속하는 도시들의 성장은 대규모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전반적" 도시 계획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도시들은 "국부적" 도시 계획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긴 도로와 같은 "도시적 규모"의 특징이 적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경제학자 사이먼은 핵심적인 도시 계획이 없다고 해서 도시가 나쁘게 "설계"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상품의 운반이나 주거, 상업, 공업 지역의 분포, 그리고 작은 지역에 알맞은 활동이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인 (또는 과거에 그랬던 적이 있는) 곳들도 있다.

 

눈송이의 경우처럼 도시에서 저절로 패턴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도시가 성장할 것이라면, 어떻게 성장을 막을 것인지보다는 어떻게 하면 살기에 더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 것인지에 신경을 쓰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의지만 있다면 훌륭한 대중교통과 서비스, 저공해 차량, 보호된 녹색 공간, 다양한 지역 상점, 매력적인 건물들이 모두 가능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미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곳에 대한 쓸모없는 설계를 하려는 거대한 계획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든다."

 

 

7. 도로에서 - 냉혹한 교통의 동력학

어느 학문 분야의 이론 연구에서든 주된 목표들 중의 하나는 대상이 가장 단순하게 보이는 시각을 찾아내는 것이다. 

 

교통 정체에 의한 자동차 운송의 숨겨진 비용은 엄청나다. "교통 체증을 줄이기 위해서 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혁대를 풀어서 비만을 치료하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추적하기

밀도를 알아내려면, 분당 지나가는 자동차의 수와 함께 속도도 알아내야만 한다.

 

파동과 입자

1950년대 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교통 흐름이 파이프를 따라 흐르는 유체의 흐름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교통 흐름의 임시변통 이론으로 발전. 이 모델에서는 유체 이론이 각 분자들의 변덕스러움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전자의 개성은 평균 운전 습관 속에 완전히 묻혀버린다.

 

모든 자동차에서는 운전자가 기계를 조작하고 있고, 그런 사실이 사람들의 행동에 이상한 영향을 미친다. 보행자들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동차 운전자들의 행동도 결코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1950년대에 제너럴 모터스 연구진은 최초의 소위 차량 추적 모델을 개발했다. 이 모델에서는 자동차의 소통을 연속적인 흐름으로 보는 대신에 자동차를 독립된 대상으로 보고, 각각의 운전자들이 앞차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의 속도를 조절한다는 가정을 도입했다.

 

NaSch 모델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세포 자동장치였다. 고속도로를 작은 세포로 나누고, 각각의 세포는 자동차에 의해서 점유되거나 비어 있게 된다.  모형의 세번째 요소는 무작위성, 즉 "잡음"이다.

 

매시간 모니터 지점을 통과하는 자동차의 수가 늘어난다. 그러나 특정한 "임계" 밀도에서는 그런 깨끗한 패턴("자유 흐름")이 깨어져버린다. "자유" 흐름에서 "혼잡" 흐름으로 바뀐 것이다.

 

위험과 사고

이런 자동 운행장치 모델에서 임계 밀도는 두 가지 가능성이 주어지는 가지치기 점에 해당한다. 하나는 모두가 속도를 줄이는 안전한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가 속도를 유지하는 도박꾼의 선택이다.

 

시뮬레이션 속의 운전자들은 자신이 빨리 움직임으로써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중요한 점은 임계 밀도 이상에서 빨리 움직이는 상태가 가능한 집단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매우 불안정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져버린다. 무작위적인 요동 때문에 거대한 이변이 일어나는 것처럼 혼잡 상태로 변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상태는 안정하지 않다. 물리학자들은 "준안정" 상태라고 부른다. 준안정 상태는 불안정 상태와는 다르다. 빠르게 움직이는 준안정 상태는 임계 밀도 이상에서도 누군가 방해를 하지 않으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준안정 상태의 액체는 어는 현상이 어디에선가 시작될 때까지는 그대로 유지된다. 물은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 얼지 않는다. 처음에는 몇 개의 작은 얼음 결정에서 시작되어 액체 상태로 계속 자란다. 일반적으로 그런 "핵" 결정은 먼지 입자나 용기 벽에 있는 흠집과 같은 불규칙성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무작위적인 요동에 의해서 전이가 시작딜 수밖에 없다.

 

핵이 형성되는 현상을 축구 경기의 관중들 사이에서 집단 응원이 확산되는 경우로 생각할 수도 있다. 때로는 함께 응원을 하는 관중과 떨어져서 일관성 없이 소리를 지르는 관중을 준안정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응원이 어떤 임계 규모의 그룹으로 확산되면, 갑자기 전체 관중이 하나인 듯 소리를 지르게 된다.

 

앞에서 1차 상전이와 임계 상전이를 구분했었다. 어는 현상이나 끓는 현상과 같은 것은 1차 상전이이다. 퀴리 점에서 자기화가 시작되는 것과 임계 온도 이하에서 유체가 얼어서 액체와 기체로 분리되는 현상은 임계 전이다. 일시적으로 전이가 "무시되는" 준안정 상태는 1차 전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달리 임계 전이는 피할 방법이 없다. 임계점에서는 상전이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특별한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NaSch 모델에서 자유 상태와 혼잡 상태 사이의 전환은 일종의 1차 상전이 현상이다. 준안정적인 "자유 흐름" 상태의 존재는 또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워가 가까워지면 도로의 교통 밀도는 점진적으로 증가한다. 혼잡 상태로의 임계 밀도를 넘어서더라도 혼잡 상태가 나타나지 않고, 교통 흐름이 준안정적인 자유 흐름 상태가 계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신경질적인 운전자에 의한 요동 때문에 곧바로 혼잡 상태로 변할 수가 있다. 흐름은 거의 0의 상태로 변하고, 교통 밀도는 치솟게 된다.

 

러시아워가 끝나가면 교통은 회복되어 밀도가 다시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임계 밀도에 도달하기까지는 혼잡 흐름이 더 안정하기 때문에 교통 밀도가 임계 밀도 이하로 떨어지기 전에는 자유 흐름 상태로 되돌아올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준안정성은 일방적인 것이다. 액체를 냉각시켜 과냉각 상태를 만들 수는 있지만, 얼음을 녹는점 이상으로 가열하는 경우에는 그런 상태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교통 흐름의 상태는 밀도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일어났던 밀도 변화의 "역사"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교통 밀도가 늘어났다가 줄어들면, 교통 흐름은 그림 7.2에서와 같이 한쪽 방향으로만 돌아가는 고리를 따라 변화한다. 물리학자들은 그런 거동을 이력 현상이라고 부른다.

 

NaSch 모델은 겉으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교통 혼잡이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준안정적인 자유 흐름 상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한 운전자가 어떤 이유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생각해보자. 지극히 짧은 교란이지만 교통 흐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기울어진 선에서 나타나는 비꼬임은 갑자기 속도를 줄이는 차들을 나타낸다. 많은 차들이 영향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처음 브레이크를 밟았던 자동차가 이 구간에서 완전히 빠져나간 후에 같은 구간에 들어온 자동차들도 영향을 받는다. 검은 선들이 더 많이 뭉쳐질수록 혼잡이 더 심해진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사실도 알 수 있다. 만약 혼잡이 처음 시작된 곳에 남아 있었다면 교란을 나타내는 부분은 수평선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증가하는 오른쪽으로 가면서 교란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혼잡이 교통 흐름의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전파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한곳에서 시작된 혼잡이 교통 흐름 속에서 저절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작고 짧은 요동이 몇 개의 움직이는 혼잡 파동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세 가지 교통 형태

1965년에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자동차의 수를 분석했다. NaSch 모델에서처럼 "아무 이유 없는 혼잡"이 차량의 흐름을 거슬러올라가면서 지속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형식의 혼잡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보다 더 심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과잉 행동의 결과로 나타난다.

 

1996년 케르너와 레보른은 NaSch 모델에서 예측된 거동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교통 밀도가 증가하면 흐름이 좋아지다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갑자기 혼잡 상태로 변해버린다.

 

점 1에 해당하는 시간에는 밀도가 키로미터당 20대 정도인 임계밀도보다 컸지만 자동차들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후에는 흐름이 느려져서 준안정 가지로 떨어졌다. 그런후에 갑자기 정체가 나타나서 자동차들은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점 4, 5, 6에 해당하는 10분 정도 그런 상태가 유지되다가 자동차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해서 다시 자유 흐름 상태로 복원되었다. 임계 교통 밀도 부근에서 자유 흐름 상태가 회복된 것이 특이하다. 다시 말해서, 정체가 풀리는 것은 정체가 시작될 때보다 더 낮은 밀도에서 더 느리게 진행된다.

 

케르너와 레보른에 따르면, 교통 흐름의 상태는 두 가지가 아니라 자유 흐름, 동기화된 흐름, 혼잡의 "세 가지" 상태가 있다. 자유 흐름에서 동기화된 흐름으로 바뀔 때는 자동차들이 계속 움직이고, 흐름도 상당히 좋지만, 밀도는 급격하게 증가한다. 자유 상태나 동기화된 흐름에서 혼잡으로 바뀔 때는 자동차의 속도도 갑자기 거의 0으로 줄어들고, 자동차들은 꼬리를 물어 최대의 밀도가 된다.

 

이런 이야기가 익숙하지 않은가? 기체에서 액체로 상전이가 일어날 때, 입자들은 여전히 움직일 수 있지만 밀도는 큰 값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기체나 액체가 고체로 얼 때는 입자들이 빽빽하게 쌓여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교통 흐름의 세 가지 상태는 물질의 세 가지 상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더욱이 케르너와 레보른에 따르면, 자유 흐름에서 혼잡으로의 전이는 직접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기체에서 고체로 변하는 과정에 보통 액체 상태를 거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기화된 흐름이 중간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교통 밀도가 안정한 자유 흐름의 한계를 넘어서면 혼잡 상태가 아니라 동기화된 흐름 상태인 준안정 상태가 된다. 그런 상태는 요동에 의해서 밀집되고 느리게 움직이는 동기화된 상태로 변할 수가 있다. 자유 흐름에서 동기화된 흐름으로의 급격한 변화는 다차선 도로에서의 추월 가능성을 급격히 떨어뜨린다고 한다. 자유 흐름 상태에서 운전자들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추월할 수 있다. 그러나 동기화된 흐름에서는 모든 차선이 거의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추월이 불가능해진다.

 

흐름의 교란

자유 흐름 상태가 동기화된 흐름으로 바뀌게 되는 정확한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케르너와 레보른은 액체가 물질의 기본적인 상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동기화된 흐름도 교통의 기본적인 상태라고 확신한다. 디르크 헬빙과 같은 사람들은 교통 흐름에서 그런 상태가 나타나는 것은 자유 흐름 상태에 대한 교란과 같은 외부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동기화된 상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곡선 구간, 언덕, 병목, 진출 또는 진입 차선과 같은 교란 요인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교란 요인들이 과냉각된 액체에서 고체가 만들어지도록 해주거나, 과냉각된 기체에서 액체가 생기도록 해주는 먼지 입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모델에서는 운전자들에 대해서 어떤 선호 속도에 도달하고 싶어한다는 것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감속한다는 두 가지 사실만 고려한다. 원칙적으로 그런 가정만으로는 매우 불안정한 운전이 된다.

 

이런 종류의 개선은 교통 모델의 예측 능력을 향상시키지만, 다른 사실들도 알려준다. 그런 집단적인 흐름 형태가 교통 흐름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모형을 심리학적으로 더 복잡하게 만들면 흐름 형태가 나타나는 정확한 조건이 바뀔 수는 있지만, 원자로 구성된 물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통도 실제로 기본적인 상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헬빙과 트라이버는 각각의 자동차들을 없애고 교통을 부드럽게 흐르는 유체로 취급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유체였다 유체 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에서는 각각의 작은 유체 "덩어리"들이 점성을 통해서 주위에 영향을 미친다. 주변에 있는 유체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드는 마찰력이 나타난다. "교통 유체" 덩어리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NaSch 모델에서 입자와 같은 종류의 운전자 반응을 고려할 수 있도록 훨씬 더 복잡한 성질을 가진다. 역시 운전자는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특정한 속도에 도달하도록 가속을 하거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감속을 한다. 스스로의 마음을 가진 유체인 셈이다. 사실은 복잡한 마음을 가진 유체이다.

 

이 모델에서 밀도가 낮을 경우에는 자유 흐름이 만들어진다. 밀도가 증가하면 자유 흐름은 준안정 상태가 되어 작은 요동은 흡수되거나 분산될 수 있지만 큰 요동은 뒤쪽으로 전파되는 국지화된 혼잡을 만들어낸다. 밀도가 더 증가하면, 그런 혼잡들이 그림 7.3에서와 같이 연속적으로 나타나서 자유 흐름으로 분리된 혼잡 지역의 파동이 생긴다. 더욱 높은 밀도에서는 교통이 느리게 움직이는 혼잡 상태로 변한다.

 

교통량이 적을 경우에는 혼잡이 사라져버린다. 교통량이 늘어나면 다양한 결과가 나타난다. 자유 흐름으로 구분되는 국지화된 혼잡의 파동, 간격이 거의 없는 혼잡 파동 ("진동형 혼잡 교통"), 진입로에서의 혼잡, 진입로 뒤쪽의 균일한 혼잡 등이 나타난다.

 

상 그림은 박테리아의 성장 패턴을 나타내는 "형태 그림"과 비슷하다. 결국 박테리아의 성장과 마찬가지로 교통 흐름도 비평형 과정이다. 고속도로의 교통 흐름과 진입로에서의 차량 진입 속도와 같은 "통제 요인"을 변화시키면 서로 다른 흐름 상태 사이의 전이가 갑자기 나타난다. 교통은 일련의 비평형 상전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내일의 혼잡?

그들은 자신들이 예측했던 모든 상태들이 실제로 확인된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상태로 변화할 것인지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심지어 흐름의 패턴이 단순하거나 규칙적이 아닌 경우에도 그랬다.

 

헬빙 연구진은 관찰을 통해서 대부분의 혼잡은 병목, 진입로, 언덕, 또는 한 운전자의 이상한 움직임과 같은 비정상적인 이유 때문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자들은 교통 밀도가 증가하면 자유 흐름 상태에서 완전한 격자 정체에 해당하는 정지 혼잡 상태로 급격한 상전이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이미 댈러스의 도로망 설계에 사용되었다. 설계자들에게는 교차로, 건널목, 차선 감소의 결과에 대한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교통량이 많아지면 일관된 흐름으로 전이가 일어나도록 해주는 방법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적절한 속도와 차선 변경 제한을 도입하는 것이 그런 방법이 될 수 있다.

 

헬빙과 휴버먼의 모델에 따르면, 모든 자동차들이 아무 차선이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미국식 방법이 저속 차선과 고속 차선을 구분하는 유럽 식 방법보다 더 효율적이다. 독일 아우토반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혼잡과 지체는 교통 밀도의 변화를 반영하는 제한속도를 도입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혼잡 시간대에만 속도를 제한하면 혼잡을 예방하고, 모든 자동차의 평균 운행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교통 밀도가 높은 상태에서 혼잡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요동이다.

트라이버와 헬빙의 교통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자동차의 20퍼센트 정도만 교통 흐름에 적절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자동화된 장치를 설치하면 교통량이 많은 지역에서의 혼잡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8. 시장의 리듬 - 경제계의 불확실한 숨겨진 손

교역보다 철학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설명이 필요한 것은 없다.  - 새뮤얼 존슨

 

애덤 스미스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가 없었다. 교역은 철학의 대상이라고 할 수 없는 세속적인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에는 아무도 시장경제가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미스에게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꼭 필요한 책이었다. 안정한 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청사진에서는 교역을 관리하고, 재산과 토지를 분배하는 방법을 절대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스미스가 <국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에서 설명한 세상은 한 세기 전 홉스의 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새로운 사회질서가 있었고, 주권자는 부의 악령 맘몬이었다. 홉스에게 부와 생산은 토지와 농업을 뜻했지만, 애덤 스미스에게는 산업을 뜻했다. 홉스도 상거래가 주권자의 자산일 수 있다고 인정했다. 주권자의 입장에서 국가의 부는 약탈, 정복, 왕실 결혼 등의 모든 방법으로 모아들인 금이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교역이 국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미스는 본래부터 인간은 탐욕적이었다고 생각했다. 홉스의 개인들은 (주로 동료로부터 대가를 지불하고) 권리를 축적하려고 하지만, 스미스의 상인과 교역인들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홉스의 입장에서는 모든 권력이 막강한 주권자에게 맡겨져야만 권리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사회생활은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시장을 지배하지 않는다. 시장은 모두에게 자유로운 곳이다. 그것이 바로 애덤 스미스가 설명하고 싶어했던 수수께끼의 핵심이다. 

 

탐욕이 넘치면서도 시장을 규제하는 집중된 방법이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보통 사람이 파산하지 않을 가격으로 상품을 구할 수 있을까?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상인이 자신의 상품에 마음대로 가격을 매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한마디로 경쟁이다.

 

스미스는 그런 자기 규제적인 시장 때문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공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재단사, 구두 수선공, 제빵사, 우유 장수의 수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중앙정부가 사람들에게 직업을 정해줄 필요는 없다. 수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이익이 생기게 되고, 누군가가 그런 이익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유명한 논문은 계몽시대에 새로 등장한 시장경제의 작동에 대한 최초의 진정한 분석이었다. 그의 논문은 오늘날의 모든 경제 이론을 지배하며, 앞에서 설명한 물리학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시장의 법칙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런 법칙은 상거래 과정에서의 밀고 당기기와 무수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창발된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익과 경쟁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이 일종의 평형 상태인 자기 규제적인 정류 상태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바로 스미스가 이야기했던 시장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숨겨진 손"이다.

 

"이익"은 이기심에서 창발될 수 있다. <국부론>의 메시지는 시장을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면 스스로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자유방임주의이다. 그것은 홉스가 권력에 대한 인류의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서 제안했던 독재적 구속과는 정확하게 반대가 되는 주장이었고,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고 싶어하는 산업자본주의자들에게는 반가운 메시지였다.

 

애덤 스미스의 세계는 우리 세계의 씨앗을 담고 있었지만,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스미스가 생각했던 자본가들은 모두 상점 주인, 상인, 소규모 기업가와 같은 치어들이었다. 대기업도 없었으며, 다국적 기업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장은 심하게 분할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자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경제 이론은 너무 단순해서 전체 이야기를 다룰 수가 없었다. 그저 시작일 뿐이었고, 뉴턴 역학이 물리학에 제공해준 것과 같은 종류의 확실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시대에 글로스터의 주임사제였던 조사이어 터커는 "교역의 순환은 행성계의 원심력이나 구심력과 비슷한 두 가지 분명한 사회의 행동 원칙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경제학에도 기본적이고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그런 믿음은 지금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이어져왔다.

 

스미스의 숨겨진 손은 실업계의 가르침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회가 애써 감춰야 하는 힘으로 인식되었다. 1860년 랠프 월도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부는 견제와 균형과 함께 존재한다. 정치경제학의 기본은 불간섭이다. 유일하게 안전한 규칙은 수요와 공급의 자기 조절 기록계에서 찾을 수 있다. 법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간섭을 하면, 윤리 규제법이 힘줄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다.

 

스미스의 경제 원칙은 시장에 대한 확실한 물리학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 원칙이 매력적으로, 조용하고 안정된 경제를 약속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누군가 간섭을 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은 장난감 배터리가 전기 효과를 나타내는 것처럼 교역을 통해서 나타난다. 사회에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은 해수면의 높이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유지된다. 인위적인 간섭이나 입법은 반발과 공급 과잉과 파산을 만들어낼 뿐이다. 숭고한 법칙은 원자와 은하를 통해서 무차별적으로 작용한다. (에머슨의 주장)

 

문제는 지금까지도 그 법칙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에머슨의 말이 멋지기는 하지만, 수요와 공급만으로는 가끔씩 나타나는 시장의 사나운 거동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경제학 모델은 과학 이론이 일상적으로 해내는 정확한 예측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물리학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기본 법칙에 익숙해져 있다. 경제학 법칙은 거의 확실히 그렇지 않다.

 

실험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는 자연과학자들의 본능은 경제학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해하려는 가장 기본적인 경제 현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경제학에서 이론을 비교해볼 수 있는 실험은 단 하나뿐이다. 실제 시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철칙

스미스의 시장 모델은 완전한 서술식이다. 그러나 과학이 신뢰를 받던 19세기에는 세상에 대한 역학적 설명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경제학자들도 수학의 엄밀성을 추구했다. 제러미 벤담은 교역과 생산의 파도와 물결을 수학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아일랜드의 프랜시스 에지워스는 1881년 인간이 "쾌락 기계"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수학적인 접근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이론은 실제 세계와 거리가 멀었지만, 그는 복잡한 계산을 근거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강력한 이론의 선구자였다.

 

적어도 정치적으로 볼 때 19세기의 "과학적" 경제학 이론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이론은 카를 마르크스이었다. 스미스의 세계관에서 노동은 시장의 상품에 불과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거래하는 상인이었다. 노동의 상품화는 중세의 훈련된 기술자의 경우와는 달리 단순한 노동력이 전 재산인 노동자 계급을 등장시킨 산업혁명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기계를 움직이거나, 석탄을 퍼나르거나, 공장에서 필요한 단순 작업의 수를 증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는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았다.

 

그보다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제외되어버리는 생계 임금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산업자본주의자는 언제나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으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그런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 전망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의 결론은 억압받은 노동자에게는 희망적이고 고용주에게는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스스로 멸망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 전복될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예측을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증명했다고 믿었다. 이상화와 단순화와 부적절한 부분을 제거하는 마르크스의 접근은 과학적인 모델을 만드는 과정과 같았다. 그의 경제적 전망은 (임금을 받기 위해서 노동을 파는) 노동자와 (노동을 사고 상품을 파는) 자본주의적 공장주의 합의에 의해서 유지되는 두 계급의 사회였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추구한다. 그러나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임금 상승과 상품의 시장 가격을 생산원가 수준으로 끊임없이 끌어내리는 경쟁 때문에 이윤은 언제나 줄어들기 마련이다. 기업이 이윤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확장뿐이다. 그래서 더 많은 노동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노동에 대한 수요의 증가는 노동자가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고, 그것은 다시 자본가의 이윤을 잠식해버린다. 

 

마르크스는 공장주들이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주변에서 흔히 보듯이 노동 수요를 줄여주는 기계를 도입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경제학 모델에는 기술 혁신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현대 경제학 이론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노동 시간 동안에 노동자는 생계 임금보다 더 높은 가치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런 "잉여 노동" 이 바로 자본가에게 돌아가는 이윤의 원천이다. 그러나 기계는 잉여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기업가는 기계를 그것이 생산할 수 있는 제품의 가치에 맞는 가격에 구입하게 된다. 결국 기계화는 노동자의 실업을 가져올 뿐이고, 자본가의 이윤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결국 임금은 낮아지고 실업률은 높아지는 경기 후퇴가 나타나게 된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시장이 불경기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불경기는 "일상적인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외부적 요인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시장을 그대로 놓아두면 스미스가 주장한 방법에 따라 균형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반대로 불경기를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불경기는 일시적이다. 임금이 떨어지면 이윤 마진은 다시 늘어나게 된다. 자본가들은 다시 노동자를 고용하고 사업을 확장하게 되고, 경제는 다시 활성화된다. 불경기는 스스로 치유된다. 그런 경기의 활성화는 다시 임금을 끌어올려서 이윤을 잠식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결국 시장은 다시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시장은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안정적이고 균형적인 것이 아니다. 경기 회복과 침체의 순환으로 오염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찾아낸 것이 바로 변화가 그 원인을 조절하는 상쇄 되먹임의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상쇄 되먹임은 요동 때문에 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난 시스템을 다시 안정한 상태로 돌아오게 만들기 때문에 시스템의 안정성을 증진시킨다. 따라서 과학자라면 누구나 마르크스의 처방이 실제로 회복-침체 순환을 보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반대한다.

 

상쇄 되먹임이 변화에 대해서 과도한 보상을 해주어서 균형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경우에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 마르크스의 처방에는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마르크스의 경제적 비전에는 시장이 불안정할 가능성이 높고, 회복과 침체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된다는 시장에 대한 중요한 개념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 이론에서 그런 요동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고유하고, 기약적인 요소이다. 

 

그렇다면 요동하는 시장이 영원히 요동하는 대신 붕괴되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정치적인 편견이 분석적 사고를 압도해버렸다는 인상을 받는다. 불경기에는 큰 기업들이 파산하기 때문에 사태가 더욱 심각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결국 심각한 불경기 동안에 나타나는 생산 부족, 실업, 낮은 임금에 의한 궁핍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이라고 말했다.

 

혁명이 일어나면 개인적인 소유권은 사라지고 생산수단은 공동의 통제를 받게 된다.

 

시장이 안정될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역사적인 예측은 옳지 않았지만, 그가 자본주의 경제의 맥박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불규칙적인 맥박이었다. 시장의 심한 변동은 무역과 상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모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제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호황과 불황의 혼돈적인 변동은 경제학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다른 어떤 것보다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경기 순환. 그런 변화에서 리듬을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그래프는 제대로 맞추어지지 않은 라디오에서 나는 잡음을 오실로스코프에 나타낸것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잡음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경기 순환은 표준 경제 이론의 일부이고, 바로 그런 용어 때문에 혼돈에서 질서를 찾으려는 욕심을 가지게 된다. 다음 불경기가 언제 닥쳐올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으면, 투자금을 날려버리고,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망쳐버린 1929년의 재앙과 같은 것을 미리 알아내어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7년, 11년, 50년 주기이론, 슈퍼 순환 이론, 일리엇의 파동, 황금비율 등 수 많은 이론들

 

주기성에 숨겨져 있는 고약한 불규칙성을 설명하지 못한 경제학자들은 그런 아이디어를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에서 빼버리려고 노력했다. 호황과 불황에 대한 마르크스의 선구적인 분석은 경제학에서도 인과적 요인을 고려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내생 이론), 그 목표는 안정될 수 있는 시장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외부적 요인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놀라운 안정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경제 지표들이 이상적인 균형 상태에 있는 안정한 상태를 뜻하는 시장 균형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런 시장에서는 공급이 수요에 따라 정확하게 조절되기 때문에 언제나 "완전한" 상태가 유지된다. 낭비는 있을 수가 없고, 상품은 사회에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분배된다.

 

전통적인 경제 모델에서는 그런 불안 요인 없는 상태에서 파레토 최적에 도달하려면 실제 세상과는 거의 아무관련이 없는 가정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레옹 발라는 수학적 성과를 통해서 시장 균형의 근거를 마련했고, 그의 업적은 20세기 대부분의 경제학 사상을 지배한 "일반 균형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문제는 이 이론이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방법과 상인들의 행동이 특허를 받아야 할 정도로 고약한 가정을 근거로 하고 있고, 만약 그런 구속 조건들이 성립되지 않으면 이론 자체가 무너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균형이라는 성배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경제학을 물들이고 있다.

 

최근 미국 경제정책 자문위원들이 시장으로부터 모든 법률적 장애와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규제 완화가 경제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성장을 통해서 부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는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다.

 

변화(요동)가 경기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주장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을 되풀이한 유명한 경제학자가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였다. 1930년대에 그는 수입의 흐름을 분석해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케인스는 경기의 활력은 부의 규모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돈이 주인을 바꾸게 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돈이 흐르기만 해도 경기는 유지될 수 있다. 투자가 있어야만 기업이 확장되고, 취업률과 임금이 유지된다. 그것이 다시 더 많은 저축과 투자와 성장을 유도하게 된다.

 

케인스는 사람들이 수입의 일부를 투자하지 않고 가지고 있음으로써 "고정시켜버리면" 돈이 순환 과정에서 빠져나가므로 결국 경기는 후퇴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의 이론에서는, 돈이 계속 흘러 건전한 경기를 유지하려면 생산과 소비가 늘어냐야 하기 때문에 기업은 끊임없이 돈을 빌려서 확장해야만 한다. 그런 입장에서 경기의 안정성은 역동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붉은 여왕처럼 같은 장소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다.

 

무작위 걸음

어빙 피셔가 소위 경기 순환에 혼돈(카오스)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최초의 사람은 아니었다. 1900년에 루이 바슐리에는 주식과 지분의 가격 변동과 시장 경기의 바탕이 되는 구조가 근본적으로 무작위적이라고 주장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이상했기 때문에 결국 바슐리에는 과학이나 경제학 중 어느 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무작위적인 요동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무작위 걸음에 대한 이론을 고안했다.

 

무작위 걸음을 걷고 있는 입자가 움직이는 방향은 예측이 불가능하게 요동을 친다. 바슐레이는 주식가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요동은 일종의 "잡음"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변덕스러운 입자의 운동에 의한 무작위적인 잡음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고, 그 잡음의 크기가 바로 온도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기체가 뜨거울수록 구성 입자의 요동은 더욱 커진다. 다시 말해서, 무작위 걸음을 걷고 있는 입자의 요동에는 독특한 "규모"가 있다. 변이의 대표적인 크기가 있다는 뜻이다.

 

바슐리에는 주식가격이 가우스 통계학에 따라 변한다고 가정했다. 그는 그런 가정으로부터 가격에 무작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경제 모델을 만들었다. 바슐리에는 그런 변동이 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자료의 내재된 특징으로 받아들였다.

 

바슐리에 시대에는 잡음과 요동의 개념이 물리학에서도 새로운 것이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배경 잡음의 수준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벽에 끊임없이 충돌하는 분자 수의 아주 작은 차이에 의해서 나타나는 미세 시간 단위의 작은 압력 요동이 아니라 기체가 벽에 미치는 압력만 알아내면 충분했다. 사실 맥스웰이 자신의 운동론에서 인정했듯이, 그런 요동은 일반적으로 당시의 기술로 알아내기에는 너무 작았다.

 

오늘날에는 잡음과 요동이 통계물리학의 가장 미묘하고 중요한 특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 연구에서 얻어지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모든 잡음이 가우스 형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자료의 변화가 매우 심하고 예측할 수 없다고 해서 반드시 가우스 통계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바슐리에가 주식시장의 요동을 정확하게 측정했더라면 자신의 가정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시장 변이가 가우스 형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비가우스 형 시장 변이의 경우에는 작은 요동이 큰 요동보다 훨씬 더 자주 나타난다.

이 통계는 작은 요동의 경우에도 가우스 형 분포와 비슷하지 않다. 그리고 큰 요동의 경우에는 그 차이가 더욱 심하다. 가우스 형 분포에서는 요동의 가능성이 심하게 과소평가되기 때문이다. 바슐리에의 가우스 형 모델에서는 주식시장이 폭락하거나, 갑자기 호황에 이르는 큰 요동은 일어날 가능성이 너무 작아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폭락이 일어나기도 한다. "극단적" 인 경우는 확률이 0으로 줄어드는 확률 분포함수의 "꼬리"에 해당된다.

 

그렇게 멀리 떨어진 부분에까지 이론이 일치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바로 경기 예측가들이 가장 걱정하는 시장 붕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붕괴를 설명할 수 없는 모델을 근거로 경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수위가 조금씩 변화하는 정상적인 경우만 고려하고 가끔씩 일어나지만 치명적인 홍수의 원인이 되는 큰 수위 변화를 무시한 채로 하천을 관리하려는 것과 같다.

 

경기 요동에서 중간 규모의 "돌출(스파이크)"에 대한 통계도 가우스 형 분포에서 상당히 벗어난다. 시장의 거동이 무작위적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살찐 꼬리

만델브로트는 그런 변동의 확률 분포가 "살찐 꼬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변동이 작을 경우에는 가우스 형에 가깝지만, 변동이 클 경우에는 확률이 가우스 형보다 훨씬 더 커진다는 뜻이다.

 

그런 지적은 시장의 동력학을 분석해서 모델을 만드는 방법을 크게 바꿔버렸다. 1964년 MIT 경영대학의 폴 쿠트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만델브로트 덕분에 ...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몰래 감춰왔던 것이 분명한 잊을 수 없는 경험적 관찰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는 경제의 세계에 대해서 경제학자들이 지금까지 인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난처한 시각을 강요했다.

 

만델브로트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무작위 걸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가격 변동이 레비 비행 모형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레비 비행은 무작위 걸음에 가끔씩 상당한 크기의 변화가 포함된 것이다. 동물들 중에는 그런 방법으로 먹을 것을 찾는 경우도 있다. 먼저 작은 지역을 무작위적으로 돌아다닌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하면 빠르게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렇게 하면 가능성이 없는 지역에서 더 효과적으로 벗어 날 수 있기 때문에 전체 지역을 무작위적으로 찾아 헤매는 것보다 더 효율적일 수가 있다. 그런 종류의 동력학적 거동을 나타내는 시스템을 "레비-안정" 과정이라고 부른다.

 

만델브로트는 시장경제의 변동이 그런 과정이고, 가끔씩 나타나는 큰 변동이 확률 분포함수의 꼬리가 살찌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서술적"이라는 사실이다. 변동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밝혀내려고 하는 대신 단순히 변동 자체를 설명하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그렇게 순수한 서술적 모델은 낯선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가정을 근거로 모델을 만든 후에, 그런 모델의 예측을 분석한다. 모델의 예측을 실제 자료와 직접 비교하는 경우는 드물다. 경제학자 폴 오메로드는 경제학에서 이론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자료를 수집하는 과학적 전통을 받아들인 것은 기껏해야 수십 년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많은 경제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실제 자료를 취급하는 것이 낯선 일이었고, 그런 자료에서 "시작하는 것"은 정말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변화의 모양

1960년대 중반부터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시장 변동에 대한 만델브로트의 레비-안정 설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 예측에 경제학 모델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런 변동이 가우스 형이라는 주장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부분적으로는 실용성의 문제 때문이었다.

 

순수한 무작위적 가우스 형 잡음은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수학적으로 경제 모델로 처리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레비 비행은 그렇지 않았다. 실용적인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계산에서 시장 변동의 정확한 본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레비 비행도 실제 시장 변동에 대한 설명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가장 작은 변동은 레비-안정 과정의 확률 분포에 비교적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변동이 커지면 곡선에서 벗어나 가우스 형과 레비 과정의 중간에 해당하는 모양이 된다. 다시 말해서, 변동에 대한 바슐리에의 설명은 큰 변동의 빈도를 너무 적게 추정했고, 만델브로트의 살찐 꼬리 설명은 너무 지나치게 추정했던 것이다.

 

만테냐와 스탠리는 S&P 500 지수에서 분당 수익률의 통계가 시간당이나 하루당 수익률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시장의 거동은 시간 "배율"에 상관없이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물론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한계는 있다.) 그것은 변동에는 특별한 규모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대표적인 규모를 가지고 있는 가우스 형 변동과는 달리 "무규모"라는 뜻이다.

 

1주일 동안의 변동에서 어느 하루를 확대하든, 하루 중의 1시간을 확대하든, 1시간 중에서 1분을 확대하든 상관없이 모든 경우에 똑같은 특징을 가진 그래프를 보게 된다.

 

배율이 달라도 형태나 모양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프랙탈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만델브로트는 시장경제의 시간에 따른 상승과 하락이 프랙탈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레비-안정 분포를 제기함으로써 정확한 수학적 모양을 지나치게 단순화해 버렸다.

 

그렇다면 그 모양은 무엇일까? 한 종류의 곡선으로는 시장 변동의 전체 통계 분포를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분포는 얼마나 큰(퍼센트로 표현한) 변이를 어떤 시간 규모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분포가 긴 시간 규모에서는 그런 주장이 성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몇 달의 경우처럼) 시간 간격이 매우 길게 늘어날 경우에는 분포가 가우스 형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어느 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보게 되는 이유이다.)

 

S&P 500 지수는 일본의 니케이 지수나 홍콩의 항셍 지수와 똑같은 거동을 나타낸다. 자본주의 시장이 움직이는 보편적인 통계적 특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논란으로 남아 있는 것은 대규모 폭락이 시장 변동의 대표적인 현상인지의 문제이다. 문제는 그런 폭락들이 작은 변동과 함게 같은 곡선으로 나타나느냐는 것이다. 폭락도 "더 작은 변동을 일으키는 기본적인 과정에 의해서 나타나는" 시장 거동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장 변동의 정확한 통계가 무엇인지는 모라도 그것이 완전히 무작위적(가우스 형)인 것은 아니고, 큰 값이 나타날 가능성이 비교적 크다는 사실에는 논란의 가능성이 없다. 경제학 이론에서 그런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정상적인 요동

시장의 변동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이론을 개발하는 것은 기업경제학자의 꿈이다. 적어도 시장의 동력학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실제 상인들은 오래 전부터 그런 꿈을 포기했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완전히 정확한 예측의 불가능성은 "효율적 시장 가설"이라는 경제학의 핵심 이론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시장 변동에 대한 통계 분석은 경험적으로 효율적 시장 가설이 성립된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예측 가능성의 문제는 "상관성"의 개념을 근거로 한다. 이전의 가격을 근거로 주식가격을 정확하게 예측하려면 두 가격 사이에 어떤 수학적인 관계가 성립해야만 한다. 기술적으로 말해서, 서로 상관되어 있어야만 한다.

 

물리학자들에게는 상관 정도를 측정하는 상관함수라는 수학적인 도구가 있다. 상관함수는 유체에서 입자의 움직임을 다른 입자의 움직임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예측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데 사용한다. 두 입자 사이의 상관함수 값이 크면 두 입자의 궤적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서로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엄마와 아이의 움직임은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엄마가 가는 곳을 추적하면 아이가 가는 곳도 예측할 수 있다.

 

입자의 "자기 상관함수"는 어느 한순간에 입자의 움직임이 과거 "자신"의 움직임과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지를 나타낸다. 액체에서는 입자가 과거의 궤적을 따라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에는 자기 상관함수가 큰 값을 가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충돌 때문에 입자의 움직임이 무작위적으로 되면서 과거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그 값은 빠르게 0으로 줄어든다. 따라서 그보다 긴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 성립되는 셈이다.

 

상관관계가 남아 있는 몇 분 동안에 사고팔면 과거의 정보로부터 바로 앞의 미래를 예측해서 확실하게 이익을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도 그런 일도 불가능하다. 예측한 후에 거래를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도 문제이고, 거래에 부과되는 비용은 아무리 금액이 적다고 해도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의 상관관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상쇄시켜버린다. 따라서 위험 부담 없이 시장을 주무를 수 있는 마술 같은 방법은 없다.

 

옵션은 기본적으로 시장이나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해서 행위자를 지켜주는 일종의 보험계약과도 같다. 옵션은 위험을 분산시키거나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방법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옵션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보험으로 사용될 수 있다. 기후의 변동, 환율의 변동, 또는 불행이나 신의 간섭 때문에 구매자에게 미래의 손실을 가져다줄 모든 것에 대한 보험이 될 수 있다.

 

옵션은 다른 것의 가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파생상품이라고 알려진 재화의 일종이다. 선물이라고 부르는 파생상품은 주어진 시간이 지난 후에 상품을 지금 합의한 가격으로 사거나 팔기로 한 합의를 말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도박이다.

 

그러나 옵션은 비교적 괜찮은 파생상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재정 분야만이 아니라 경제학 전체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론" 으로 알려진 블랙-숄스 모델 덕분이다. 블랙과 숄스는 구매자에게 가장 좋은 가격은 무엇이고, 어떻게 구매자와 판매자가 모두 위험을 최소화하는지의 전략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런데 그 모델에는 쉽게 정할 수 없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시장의 휘발성, 즉 시장이 얼마나 쉽게 변할 것인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계산하기 위해서 블랙과 숄스는 변동이 가우스 형이라고 가정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고 잘못된 확신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재앙에 가까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경제학자들은 블랙-숄스 이론의 결함을 알고 있지만,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1997년 파생상품 거래에서 발생한 손실의 최대 40퍼센트가 그런 모델의 결함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옵션 가격 예측은 시장의 통계학에 대한 이해가 경제학 이론을 탈바꿈시켜줄 것으로 보이는 많은 분야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의 방법을 이용해서 서로 다른 주식가격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후에 투자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예를 들면, 상관관계가 높은 주식에 투자를 하는 경우에는 그중 하나의 가격이 떨어지면 큰 손실을 입게 된다. 그런 목적이라면 시장의 변동에 대한 보다 더 정확한 설명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경기 변동에 대한 모델을 개발하는 경우에는 도대체 그런 변동이 나타나는 이유를 알아내야만 한다. 이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자.

 

 

9. 행운의 행위자 - 경제에서 상호작용이 중요한 이유

 

경제학이 정말 물리학의 정확성과 확실성을 따라갈 수 있을까?

 

에지워스에 따르면, "쾌락"은 쾌락주의적 "꽃마차"를 움직여주는 힘이고, (그의 독특하게 화려한 상상력에 따라)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원자처럼 서로 상호작용하는 사회의 행위자(에이전트)이다. 그는 사람을 "물리학의 균일성을 뒷받침해주는 원자의 집단"으로 취급하는 경제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케인스를 가르쳤던 마셜이 경제학에서 이룩한 업적은 확대경을 들이대고 미시적인 규모에서 입자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밝혀내려고 시도했던 맥스웰과 볼츠만이 열역학에서 이룩했던 것과 같았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의 바탕이 되는 미시경제학의 시작이었다.

 

물리학자들은 평형 상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자들도 안정된 시장이 무작위적인 잡음에 의해서 가볍게 흔들릴 뿐이라고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다루는 계는 평형에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경제학자들은 움직이는 입자의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은연중에 자신들도 물리학에서처럼 대상을 바닥으로부터 설명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합리적 행위자

20세기의 과학계는 물리학 이외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들은 자기 분야도 물리학과 같은 수준의 지적 깊이와 수학적 능력과 확고한 기초를 갖추게 되기를 바랐다.

 

경제학에 대한 마셜의 접근 방법 역시 기본적인 가설에서 이론이 개발된다는 점에서는 자연과학과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경제학은 끊임 없이 변화하는 미묘한 인간 본성을 다루기 때문에 엄밀한 자연과학과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는 욕심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의 구성 요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즉 물리학자의 입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선택"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물론 인간은 선택을 하지만, 입자는 그렇지 않다는 하일브로너의 주장은 옳다. (양자물리학자들은 입자도 선택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사회과학에서 집단의 거동에 대한 모델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런 비결정성 때문이 아니다. 초기의 통계자들은 개인적인 동기가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충분히 크 집단에서는 규칙성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일브로너는,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범위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은 아주 자유롭게 선택을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예측이 가능한 패턴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인간 오솔길" 시뮬레이션에 등장하는 보행자가 열린 공간의 어느 지점에 무작위적으로 도착한 후에 다른 무작위적인 점으로 건너간다면 아무런 패턴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질서가 나타나려면 입구와 출구에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의 행위자들은 자유의지를 행사하지만, 한정된 범위의 상품을 사거나 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다.

 

시장이 얼마나 심하게 요동치는지를 경험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경제학이 진정한 과학인지에 대한 하일브로너의 경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경제학은 정반대의 극단을 선택했다. 이론학자들은 절망에 빠져서 인간 행동의 변덕스러움을 모델에 포함시키는 일을 포기하는 대신 사람들이 완벽하게 예측 가능한 합리적인 자동 기계처럼 행동한다는 가정을 도입했다. 

 

도대체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인간을 자동 기계장치로 여기게 되었을까? 그것이 경제학 모델을 만드는 유일한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극히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인간 행동의 불확실성을 취급할 만한 분명한 방법이 없었다.

 

초기의 경제학자들은 스스로를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철학자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에지워스를 비롯한 주류 경제학자들은 더욱 정교하고 추상적인 수학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모델에는 실제 세계의 지저분함이나 시끄러움을 고려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모델에 잡음을 포함시키는 것은 시장의 지적 능력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주식시장에서 거래할 이유가 무엇일까? 행위자들은 각자 정해진 목적을 가지고 완벽하게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행위자들은 완벽한 정보를 가진 "합리적 극대화자"이다.

 

그런 가정은 행위자의 다음 행동을 이해하기 쉽도록 해준다. 그런 행위자의 행동은 정해진 규칙에 의해서 예정되어 있다.

 

가격이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변한다고 해서, (전통적인 이론의 범위에서는)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산가격의 변화는 가격을 결정하는 "기본 가치"의 (예츠할 수 없는)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기업의 기본 가치는 기업이 지급할 미래의 배당금 총액이 된다. 기업의 주식가격은 그런 가치를 반영한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실은 좀 이상하지 않을까? 기업의 부와 그에 따른 배당금이 미래에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도대체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당연히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전통적인 미시경제학 이론을 수학적으로 취급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허용했던 믿음의 비약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기본 가치에 대한 정보가 시장의 모든 행위자들에게 동시에 제공되면서 순식간에 자산 가치에 포함된다는 것이 두 번째 비약이다.

 

그런 믿음은 자산 가치가 기본 요인들이 변화해서 새로운 정보가 제공될 때만 변화한다는 "효율적 시장 가설"의 근거가 된다. 그런 정보는 모든 행위자들에게 제공된다. 모든 행위자들은 자신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정보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칠 수가 없다. 결국 시장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없는 셈이다.

 

그런 가정이 지나치게 단순하다. 다만 그런 단순함이 문제가 되는지가 의문이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훌륭한 과학의 상징이다.

 

합리적 개인이 효용성과 이익을 극대화하고, 완벽한 통찰력으로 움직인다는 개념이 신고전주의 미시경제학이라는 전통적인 미시경제학을 지배한다. 그런 개념은 시장의 상승과 하락을 설명하려는 소위 실물 경기 변동 이론(RBC)에서 빛을 발휘한다. 경기 변동의 원인은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요인은 시장의 외부로부터 기술 발전에 의한 무작위적인 충격의 형태로 나타난다. 시장은 단순히 그런 충격에 반응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론의 가장 심각한 단점은 우리가 공급한 것에 대해서만 다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격 변동의 통계적 성질은 충격의 무작위성에 대한 우리의 가정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자세히 살펴보면 통계가 잘못된 것이다.

 

1980년대에 경제학자 로버트 실러가 자산 가치는 반드시 RBC 이론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균형 상태의 시장에서 가지게 되는 가상적인 "진짜" 가치에 해당하는) "기본" 가치외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그런 이론은 더욱 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가격은 기본 가치보다 훨씬 더 심하게 변화한다.  기본 가치는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산 가치가 변한다면 그런 변화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바탕이 되는 가치가 변하지 않았는데도 행위자들이 다른 가격을 지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사실은 행위자가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생각과는 맞지 않는다.

 

사실 가격이 기본 가치가 따라갈 수 없는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서 "과대평가" 되는 것은 구매를 하지 말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구매를 한다. 그런 구매가 순간적으로 평형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비합리성이 전파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경제학자들에게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완벽하지 않고, 사람들이 합리적이 아니기 때문에 놀라운 결정을 하고,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서로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무지와 믿음

사람은 정보를 근거로 합리적이고 완벽하게 결정한다는 조건 그것부터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비평가도 있었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것의 본성에 대한 확률을 저울질함으로써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최선의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 

 

행위자와 기업이 직면해야 하는 불확실성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최적"의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대신 어떤 기준을 근거로 "충분히 좋은" 결정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제학자들도 있다. 이제 결정은 극대화가 아니라 "만족화"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시 결정은 비록 현실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합리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케인스는 사람에게 최적이나 또는 특별히 합리적인 선택을 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긍정적인 활동 중에서 많은 부분은 수학적인 기대가 아니라 자발적인 최적화에 의해서 결정된다. ..... 대부분의 결정은 가만히 있기보다는 행동하려는 자발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고, 정량적인 이익에 정량적인 확률을 곱한 가중 평균의 결과는 아니다.

 

결국 행위자를 포함한 우리는 대부분 케인스가 동물적 영감이라고 불렀던 본능과 직감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채용, 투자, 다각화, 또는 특성화와 같은 기업의 정책에 대한 최고위 경영정책의 결정은 상당 부분이 그런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다. 경제학적 합리성의 수학보다는 최고 경영자의 오랜 경험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제학에 대한 이런 입장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미국의 소스타인 베블런이다. 그는 기업의 세계를 야만적이라고 할 만큼 비합리적이라고 보았다. 그런 세계에서 사람들의 행동은 계획과 논리보다는 관습과 어리석음에 의해서 지배된다. 그는 기업가들이 시장의 불예측성을 긍정적으로 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런 불예측성이 안정된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행위자에게 요구되는 과감성이 냉정한 계산을 무시하는 충동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거래 행위에서 나타나는 비합리적 요소를 설명하는 가장 생산적인 방법은 사람들이 똑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비합리성은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믿음"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시장에는 "불균일성"이 있다. 모든 행위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무엇이 최선의 길인지에 대한 합의는 없다. 몇몇 경제학자들이 그런 면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산 선택 이론"에서는 행위자들이 각자 정해진 확률을 가지고 있는 몇 가지 가능한 행동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시장의 행위자들은 누구나 예상하지 못했던 이익이 가득한 길을 찾게 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나름대로의 꾀와 술수를 부리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시장도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키르망은 미시경제학에 불균일성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행위자들의 비합리적인 성향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이 필요했다. 우리는 몇 가지 가능성이 주어지는 경우에 우리의 선택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가 없다. 기존의 신고전주의 이론에서 가장 확실하게 제외시켰던 요인을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그런 요인을 고려하면 경제학은 통계물리학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 요인이 바로 "상호작용"이다.

 

이웃을 따라 하라

경제 시스템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상호작용이 심하다. 행위자들은 직접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상호작용을 무시하는 미시경제학은 폭락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변동에 의해서 일어나거나, 또는 행위자들이 동시에 독립적으로 똑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행위자들은 간접적으로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선택은 가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그것은 다시 다른 행위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공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강한 "피드백"이 작용한다. 

 

존케이는 "시장 구성원들의 행동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을 자세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물리학이 미시경제학 모델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시장을 통제하는 요인에 대한 통찰력이 아니라, 그런 요인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다. 물리학자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는 입자들로 이루어진 계를 한 세기 이상 연구해왔다. 그런 수단이 경제학 용어로 곧바로 옮겨질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물리학에서 잘 이해되고 있는 현상이 경제학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놀라운 일이다.

 

미시경제학에 상호작용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물리학과 경제학 이론에 익숙한 수학자였다. 한스 푈머는 자석에 대한 이징 모형의 원리를 이용해서 "상호작용 행위자" 모형을 개발했다. 자성 원자들은 모두 규칙적인 격자에 위치하고, 자신의 스핀이 향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그런 선택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원자들의 자기장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 원자의 선택은 이웃의 선택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푈머의 모형에서 원자는 거래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 행위자를 나타낸다. 모형의 예측은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규칙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브록과 스티븐 더라우프는 자기 현상 모형과 같은 방법으로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을 가진 상호작용 행위자 모형을 만들었다. 퀴리-바이스 모델은 원자가 바로 이웃한 원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원자가 만들어내는 평균 효과의 영향을 받는다는 평균장 근사법을 이용했다. 물리학에서 그런 가정은 너무 지나친 단순화이기 때문에 임계점 근처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경제학에서는 "전반적" 상호작용이 훨씬 더 가능성이 높다.

 

통신기술 덕분에 뉴욕이나 도쿄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영향도 받는다. 결국 경제학 모델에서 평균장 이론은 지극히 현실적인 근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평균장 가정은 경제학에서도 완전하지 못하다. 시장의 전반적인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행위자는 없다.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국지화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알랑 키르망은 거래소에서 정보가 어떻게 전파되는지에 대한 문제에 집중했다. 그에 따르면, 핵심 문제는 정보 네트워크 구조이다. "시장이 어떻게 조직화되는지를 이해하려면 경제 네트워크가 어떻게 진화하는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상호작용 행위자에 대한 몇 가지 미ㅣㅅ경제 모델에서는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를 무작위적인 것으로 가정한다. 개인들은 자신과 연결된 다른 사람들의 영향만 받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각 행위자가 거래 집단의 다른 무작위적인 구성원과 "연결"될 확률은 동일하다. 키르망은 1983년에 그런 종류의 네트워크를 제시했다. 상호작용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는 대부분의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외부와는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는 집단을 형성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앞으로 그런 네트워크 구조에 대해서 살펴 볼 것이다.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단순한 집단화만이 아니라 행위자들이 서로 흉내내는 무리 짓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가격 처럼.

 

여기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다시 등장한다. 1930년대에 그는 시장을 당시 대중 언론에 자주 등장하던 미인 대회에 비유했다. 독자들에게 선택된 "미인"을 소개한 후, 그중에서 다른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얻을 후보를 짐작하도록 요구한다. 그런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투표할 것인지에 대한 직관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순히 "최고의 미인"을 선정하는 것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케인스는 그런 종류의 경쟁이 무리 짓기를  촉진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찾아내지 못했다.

 

1980년대에 로버트 실러는 무리 짓기가 시장의 동력학에 미치는 영향을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바탕에 깔려 있는 의문은 여전히 남게 된다. 변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무것도 근본적이 아니다

수천 명의 행위자들의 활동에 의한 경제지표의 변동은 단순히 행위자들 각자가 느끼는 무작위적인 힘이 증폭된 결과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물리학자 미켈레 마르체시는 1998년에 원리주의자와 헌장주의자들에 대한 알랑 키르망의 모델을 이용해서 자산 가치가 변화하는 원인을 분석했다. 헌장주의자들은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서 자산을 추가로 구입하는 낙관주의자와, 가격 하락을 예상하고 헌장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산을 팔아버리는 회의주의자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헌장주의자의 두 그룹은 모두 계산을 할 때 다른 행위자의 행동을 고려한다. 헌장주의자들은 낙관적인 전망과 회의적인 전망 사이를 오가면서 다수의 의견에 의해서 결정되는 무리 짓기 경향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헌장주의자들이 낙관적일 때에는 회의적인 사람들도 태도를 바꾸는 경향이 나타난다. 더욱이 어느 그룹에 속하거나 상관없이 헌장주의자들은 경우에 따라 원리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반대가 될 수도 있다. 행위자들은 그 시점에서 가장 이익이 많은 전략이 무엇인지를 고려해서 집단을 선택한다. 다른 집단이 더 성공적일 경우에는 그런 집단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모델에서 자산 가격의 변화는 보통의 거래에서 나타나는 공급과 소비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그런 변화의 원동력은 기본 가치의 변화이다. 룩스와 마르체시는 그런 변화가 가우스 형이라고 가정했다. 여기서 실제로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시험하려던 것은 가격의 변동이 기본 가치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라는 기존의 미시경제학 이론의 핵심 개념이었다. 그런 개념이 성립된다면, 모델에서 얻어지는 가격 변화도 역시 가우스 형이어야만 한다.

 

그런 모델은 거시경제학 용어로 아주 좋은 거동을 보여주었다. 장기간에 걸쳐 시장은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단기간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가격 변동을 반영하는 수익은 결정적으로 비가우스 형으로 변했다. 다시 말해서,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가우스 형 "입력"을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극단적인 변화가 훨씬 자주 나타나는 전혀 다른 통계적 특성을 가진 "출력"(가격 또는 수익)으로 변환시켜버렸다. 더욱이 단기간에 대한 비가우스 형 통계 분포가 장기간에서는 실제 시장 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가우스 형으로 변한다.

 

룩스와 마르체시는 일종의 휘발성 무리 짓기가 실제로 나타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헌장주의적 전략이 지배하는 경우에는 시작이 불안정해져서 거래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모형에는 안정을 되찾는 보상 메커니즘이 포함되어 있다. 변동이 클 경우에는 가격이 기본 가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보다 크게 다를 수 있다. 헌장주의자는 당시의 지배적인 경향을 그대로 믿어버리지만, 원리주의자들은 그런 차이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내는 전략을 구사한다. 따라서 원리주의자의 전략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고, 실제로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헌장주의자들은 마음을 바꾸게 된다. 그런 변화가 시장이 마구잡이로 바뀌는 것을 제한한다.

 

룩스와 마르체시는 시장의 내부적 요인에 의해서 시장의 독특한 변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폴 오메로드는 "상호작용 행위자" 모델을 만들었다. 이 모델에서 독립적인 행위자는 개인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기업이다. 시장의 행위자들이 서로의 활동을 주시하듯이 기업도 그렇게 한다.

 

앞에서 우리는 기존의 실물 경기 변동 이론이 그런 변동에 대해서 잘못된 통계적 성질을 예측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만약 오메로드의 모델에서 기업 규모의 분포를 바꾸어주면, 변동의 통계적 특성은 바뀌지 않고 크기만 달라진다. "산악 지방"은 더 밋밋하지만 굴곡이 심해진다. 몇 개의 대기업이 지배적일 경우에는 진폭이 더 커지고, 중소 기업의 비중이 늘어나면 변동이 덜 심해진다. 그런 결과는 작은 회사들이 몇 개의 큰 기업에 의해서 압도되어버리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런 경제에서는 경기 후퇴가 더욱 깊고 심각할 것으로 예상해야만 한다. 적어도 그런 뜻에서는 "건강한" 시장은 다양성을 갖춘 것이다.

 

쉽게 변하고 때로는 비합리적이기도 한 시장 행위자나 기업의 믿음을 고려해서 모델을 만드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맹목적인 믿음, 희망적인 기대, 조심스러운 자료 분석, 과거의 경험 등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것이 분명한 그런 믿음에 숨겨진 심리학은 아마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적어도 수학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경제학에서의 "복잡성"에 대한 워크숍을 조직했던 경제학자 브라이언 아서는 "각 행위자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행동하는 과정에서의 상호작용 구조에 더 크게 의존한다. 누가 누구와 어떤 규칙에 따라 의존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상호작용 행위자 모델이 보여주는 것은, 일단 합리적 최대화자라는 개념이 사라지면 균형 경제에 대한 미신도 역시 사라지면서 실제 세상과 훨씬 가까운 것으로 대체된다. 실제 시장은 훨씬 심하게 변동하고 붕괴될 가능성도 높다. 

 

예를 들면, 아서와 그의 동료들은 불균일한 행위자들이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광범위한 전략과 기대를 바탕으로 거래를 하는 모델을 개발했다. 성공적인 전략은 유지되고, 성과가 나쁜 전략은 폐기된다. 행위자들이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경제는 합리적인 신고전주의 이론이 예측하는 것과 비슷해진다. 그러나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현실에 가까울 정도로 자주 바꾸면 시장은 실제의 경우처럼 산만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예측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서, 경제는 그렇게 합리적인 방법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

 

그대로 놓아두어라?

행위자들이나 기업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시장의 급격한 상승과 폭락을 설명해줄 수 있다면, 변동을 인위적으로 오나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조작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믿는 정부도 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경제에 해롭지는 않더라도 아까운 자원의 낭비만 초래할 것이다.

 

케인스는 심각한 장기 침체기에는 시장을 다시 성장세로 되돌리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정부가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케인스는 그대로 놓아두면 경기가 더욱 침체되고, 결국에는 완전히 얼어붙어버려서 정상적인 경기 순환 주기로 회복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정부의 개입이 경기 후퇴를 막아주는 해독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케인스 식의 개입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아니면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자금 공급의 증가와 그것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 사이의 시간차, 통화 공급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의 문제, 개입주의적 정책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기대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경기 후퇴는 극단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극단적인 일이다. 그런 변동은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다. 가장 효과적인 대책은 경제를 미시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실업자의 일시적인 불행을 오나화시켜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런 변동은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더 잘 이해한다면 정부는 일시적인 경기 후퇴로부터 이익을 챙기려는 야당의 기회주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패배주의가 아니라 자원의 효과적인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부가 자신들의 정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단기적인 경기 회복을 자신들의 공로라고 자랑하는 것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어떠한 간섭도 배척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믿음에도 심각한 위험이 있다.

 

자유방임적인 경제정책의 매력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찰스 데브넌트는 "거래는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것이어서 스스로의 길을 찾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했다. 유체역학적인 은유를 통해서 가격이 스스로의 수준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주장한 것이다.

 

스미스는 거래가 기본적인 정의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정의의 모든 규칙을 만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자유방임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보수적인 에드먼드 버크에게 거래에 대한 모든 규제는 "무의미하고, 미개적이고, 실제로 사악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우익 경제학자들의 입장보다 결코 더 극단적이지 않다.

 

이제 우리는 균형 시장의 개념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제멋대로 변동하는 과정이나 시스템이 균형과 같은 상태에 도달할 수는 없다. 미시경제학자의 상호작용 행위자 모델은 경제가 근원적으로 불안정한 것임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시장은 유연하고, 빨리 반응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중에도 순간적으로 최적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다시말해서, 시장은 순간적으로 효율이 가장 높은 방법으로 상품을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의 "효율적 시장"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박도 있다.

 

슈거스케이프라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상호작용 행위자 모델은 무한한 지식과 다른 모든 행위자들과의 접촉이 불가능한(전능하지도 않고, 어디에나 있지도 못하며,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하는) 현실적인 행위자들만으로 한정될 경우에는 상품의 분배가 어쩔 수 없이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필요하면서 부담할수 있는 상품을 조달하지 못하는 행위자가 생긴다는 뜻이다.

 

더욱이 슈거스케이프 모델에 따르면, 거래가 상품의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서 더 많은 인구를 지탱해줌으로써 지역의 "환경 용량"을 증가시키지만, 부의 분배에서는 더 심한 불평등을 가져오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거래는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부를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어버린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일 수도 있다.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소련처럼) 경직된 방법으로 규제된 경제는 국민의 복지와 효율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물리학의 결과이다. 세계적 수준에서 부의 평등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전체적으로 부를 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상호작용 행위자 모델에 따르면, 거래를 심하게 제한하는 "사회주의적" 경제는 대부분의 부가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버리는 상태로 붕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서, 그런 경제는 부패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부패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실패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경제 시스템에 따라서 부패가 쉽게 확산되는 조건을 간단하게 만들어낼 수도 있을 듯하다.

 

극단적인 자본주의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시장이 세계화되면 모든 부가 한곳으로 집중될 위험이 커진다. 그런 상태는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장에도 위험하다. "부의 집중"이 부가 여러 곳으로 분산되는 것보다 훨씬 더 재앙적으로 붕괴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들에 따르면,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극단적인 사회주의는 모두 비생산적이고 재앙적일 수도 있다."

 

조금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보자. 모든 정부의 간섭이 시장의 자기 조절 능력을 비롯한 긍정적인 기능을 실현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고집하는 "일부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거의 기적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제는 그런 주장이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정부와 과세와 입법의 역할에 대한 선입견을 근거로 만들어진 믿음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오늘날 미국의 경제학 이론에는 자유시장 철학이 너무 깊이 파고들어서 지금도 빠르게 진행되는 재앙적인 주식시장의 폭락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들은 몇 사람의 부패한 기업가와 정부의 정책, 변덕스러운 소액 투자자, 노동조합,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는 좌익 비평가, 그리고 시장 자체를 비난한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그런 사람들이 제대로 행동한다면 주식가격은 영원히 올라갈 것이라고 믿는다.

 

호황기에는 그렇게 명백한 엉터리 주장도 설득력을 발휘한다. 경기가 탄력을 받을 때는 극단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믿는다. 불황은 다음 거품이 터질 때까지는 과거의 일로 돌려버린다. 

 

그러나 진실은, 경기의 호황과 불황은 자본주의 게임의 고유한 특성으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경제의 자연적인 규칙의 일부이며, 아직 우리가 모든 것을 밝혀내고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규칙은 분명히 존재한다.

 

 

2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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