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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발의 시대

서론

1527년 5월 6일

사실상 그들 모두는 돈을 위해서 싸우는 전문가이자 앞선 전투의 참전용사로서, 전쟁이라는 사업을 매우 잘 아는 병사들이었다. 문제는 몇 달 동안 아무도 급료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로마의 재화에 대한 약탈의 기대만이 지금까지 용병들을 지탱한 힘이었다.

모두가 경쟁이 치열하고 수익성이 높은 시장에서 모집된 병사들이었다.

 

군대를 모으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생존을 위한 약탈과 더불어 자격 없는 성직자들이 부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그들과 분리할 기회를 즐길 것이었다. 그들의 장창 위에서 까딱거리는 임시 사다리가 부의 공정한 재분배로 가는 길을 열 것이다.

 

공작의 병사들은 전문가였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들을 멈추려면 사랑하는 지휘관의 죽음보다 더한 것이 필요했다. 방어망은 무너졌다. 로마는 몇 시간 만에 함락되었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부가 이제 더럽고, 굶주리고, 만족할 줄 모르는 강력한 용병 집단의 손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이토록 가차 없는 공포의 홍수가 일어났을까?

 

로마의 약탈은 극도로 파괴적인 여러 과정이 융합에 따라 몰아친 격변의 해일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포르투갈 대사는 탐사 항해에 힘입어 부유한 왕의 대리인이 되었고, 카를 5세는 신세계에서 얻은 수입으로 군대를 모을 수 있었다. 국가 역량의 확대가 전쟁으로 이어졌고, 돈과 화약의 확산에 따라 전쟁의 잠재력, 규모, 기간이 훨신 더 파괴적으로 바뀌었다. 인쇄술은 정보의 세계를 뒤집었고, 공교롭게도 그토록 많은 독일 병사를 자극한 루터교 사상을 전파했다.

 

그동안 유럽은 유라시아의 변두리에 있는 전초기지로 떨어져 있었다. 역동적으로 팽창하는 오스만 제국이나 중국의 안정된 명 왕조와 비교할 수 없는 낙오자였다. 그렇지만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유럽과 유럽의 직계 후손 미국은 이전에 다른 어떤 지역도 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1527년에, 제국의 병사들이 약탈을 위하여 로마에 진입하면서, 그러한 미래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대분기

이 현상은 서부 유럽을 변방의 전초 기지에서 세계 질서의 절대적 중심지로 바꿔 놓았다. 네덜란드와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은 기술적 성취, 정치적 파워, 그리고 경제적 산출물에서 처음에는 서서히 고통스럽게, 나중에는 매우 급격하게 공격적인 경쟁자들 대부분을 뛰어넘었다.

식민주의와 유럽의 지배가 남긴 유산은, 교역의 패턴과 경제 개발에서 스포츠와 엔터테이먼트에 이르기까지, 21세기 삶의 모든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군대는 점점 더 커지고 정교해졌고, 훨씬 더 비싸졌다. 이에 대응하여, 군대를 고용하는 국가는 자원을 조달하기 위한 더욱 복잡하고 효과적인 도구를 개발했다.

 

산업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발전에는 더 깊은 뿌리가 있어야 했고, 문제는 그 뿌리가 역사 속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가다.

 

 

경제적 관행

이러한 이질적 추세들 -인쇄술의 확산과 용병 군대의 활용같이 다양한-을 결합한 것은 신용, 부채, 대출, 그리고 투자에 관한 특별한 사고방식이었다. 그 사고방식은 유럽인이 자본과 자산을 이용하는 방식을 지배했다. 우리는 이를 경제적 관행으로 생각할 수 있다.

 

관행은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시스템의 규칙, 신념, 규범, 그리고 조직 너머로 확장된다. 관행은 사람들이 게임의 규칙을 따르도록 하고, 규칙을 영속화하며,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 규칙을 조정한다. 관행은 결과에 따라 좋거나 나쁠 수 있고, 도움이 되거나 해로울 수도 있다. 정치적 충성심이 후원으로 보상받으리라는 기대는 지속적인 유대관계 또는 무분별한 부패를 낳을 수 있다. 사람들이 시장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거래할 때 무슨 가정을 하는지, 사업과 가족의 역학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관행이 그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 시기의 초기에 서유럽은 특별히 부유한 지역이 아니었다. 흑사병과 춥고 예측하기 어려운 기후가 결합한 재앙으로 인하여 인구는 절반까지 줄어들었다. 금괴의 공급도 부족했다. 파괴적인 분쟁은 한 번에 수십 년씩 대륙을 황폐화했다. 모든 주요 왕국이 내부적 분쟁에 시달렸다. 이 모든 요소가 100년 넘게 계속된 심각한 경제적 불안에 힘을 보탰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으나 변화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교역도 다시 확대되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미래의 세계적 지배력을 가리키기는 고사하고, 경제적 이점이 실현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탐험, 국가의 팽창, 화약과 전쟁, 인쇄술 같이 다가오는 시대를 정의하는 중요한 과정과 그들이 결합한 결과를 발전시키기에 매우 적합한 경제적 관행의 집합이었다. 이 모두는 값비싸고 자본 집약적인 과정과 기술이었다. 초기 자금을 조달하는 데만 상당한 금액이 필요했고, 계속해서 유지하는 데는 더 많은 돈이 들었다.

 

대서양으로 항해하는 선박이나 선단에는 선박, 공급 물자, 승선할 선원의 노동력에 대한 대규모 선행투자가 필요했다. 당시 시의 국가들은 야망을 실현할 자금 전부를 국민에게서 짜낼 역량이 부족했으므로 미래의 수익에 의존하는 대출과 선수금이 필요했다 그러한 대출의 주된 목적은 점점 더 거대해지는 규모의 전쟁을 위한 화약 값을 치르는 것이었다. 전쟁은 신용에 의존하는 민간업자가 모병과 군수지원에 필요한 선행비용 대부분을 부담하는 사업이었다. 인쇄기 운영을 위한 대규모 자본 지출도 필요했다.

 

모든 상황이 동일한 메커니즘과 가정에 지배되었다. 채권자는 거래의 유형에 따라 투자에 대한 수익이나 대출금의 이자를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돈을 내주었다.

 

여기에는 실제로 돈과 신용에 관한 일련의 맞물린 가정, 거래 당사자 모두의 확고한 믿음, 그리고 계약조건이 유지될 수 있는 더 넓은 틀이 요구되었다. 공식적 계약이나 비공식적 합의를 실행할 수 있는, 채권자와 채무자 또는 투자자 사이의 신뢰성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값비싼 프로세스에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이는 보장된 이익을 믿는 것과 같지 않다. 

 

투기적 투자는 항상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충분한 수의 사람이 공유된 가정을 신뢰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믿었으며, 자본이 흐르는 수도꼭지의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그토록 중요했던 경제적 관행은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하는 관행과 같지 않았다. 신용은 대체로 개인적이었고, 신용도의 객관적 또는 산술적 평가보다는, 평판에 훨씬 더 크게 의존했다.  몇 가지만 말하자면, 혈연관계, 결혼, 민족, 같은 출신지 같은 요인이 신용에 대한 개인적 접근을 결정했다. 

 

공식적 제도와 공권력의 강제적 집행방식이, 훨씬 더 친밀하고 사적인 의무의 개념과 깊이 얽혀 있었고 돈은 그중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한 관행은 개인, 기업, 심지어 공동체 전체의 가치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마찬가지였다. 그 역도 사실이었다. 돈을 지불하는 능력이 도덕적,사회적 가치를 대변했다.

 

 

왜 그때인가?

이러한 관행은 15세기 말의 유럽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혁신이 아니었다.  실제로 상업적으로 더 발전한 지역과 도시의 대규모 교역 센터 같은 곳에는, 바로 이러한 토대에 기초한, 신용과 투자에 관한 세련된 이해가 있었다. 유럽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본을 분담하고, 비즈니스를 위하여 복잡한 조직 형태를 이용하고,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첫째로, 이러한 경제적 관행이 사실상 서유럽 전역에 존재했다. 다수의 잘 다듬어진 통신, 이동성, 교역의 축이 지역을 하나로 묶었다. 상품, 사람, 그리고 아이디어 -신용의 가용성을 결정하는 경제적 관행을 포함하여-가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따라 이동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동했다.

 

가치가 낮은 동전이 다른 곳보다 대량으로 유통되는 지역도 있었다. 이는 신용이 덜 사용되었음을 의미했다. 중세 피렌체 미디치가의 은행업자들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조직했다. 왕관의 보석을 담보로 카스티야 여왕에게 돈을 빌려준 제노바의 금융업자 집단은 신용을 기반으로 소박한 창병대를 창설하려는 독일의 귀족과 같은 규모로 운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대출과 투자에 관한 원칙을 이해했다. 안정성, 담보물, 위험, 그리고 보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가정이 일치했고, 관행의 틀이 서부 유럽 전역에서 비슷하게 작동했다 그런 관행이 여러 세기 동안 지역을 가로지르고 사회 계층을 오르내리는 경로를 따라 소리 없이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그러한 관행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한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폭발적인 발전이 시작되기 전인 14세기 말과 15세기의 유럽에는 화폐가 크게 부족했다. 조폐국이 문을 닫고, 환전상이 사업을 접었으며, 단지 동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상품이 팔리지 못했다. 

 

유럽의 상거래 대부분의 매개체였던 은이 부족했다. 광산의 고갈과 동방과의 무역에서 발생한 막대한 적자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돈과 신용에 관한 유럽인의 생각은 화폐의 부족에 대응하여 진화했다. 경제의 흐름이 흐르도록 더 많은 신용을 창출하면서, 새롭게 풍부해진 금과 은의 효과를 증폭했다.

 

셋째로, 타이밍이 중요했다. 당시의 특별한 시기에 매우 적합했고 다양한 자본 집약적 과정에 효과적으로 자본이 투입되도록 했다. 국가의 재정이 채권자들에게 수익성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면서 통치자는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었고, 다른 통치자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 야심 찬 모험에 더 많은 돈이 퍼부어졌다. 인쇄업이 수익을 내는 길을 찾았을 때, 더 많은 자금이 인쇄업으로 유입되었다.

 

 

특별한 시기

40년 동안에 이러한 경제적 관행의 틀을 통해서 점점 더 많은 자본이 유입되었다. 인쇄술의 출현은 정보 유통의 본격적인 혁명으로, 루터의 사상은 몇 년 만에 유럽의 변두리까지 종교개혁을 전파했다. 전쟁은 어디에나 있었다. 신세계의 발견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보화가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그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발전은 매우 집중된 기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 동일한 메커니즘에 기초하여 추진되고 서로를 강화하는 과정이었으며, 일련의 우발적이고 예기치 못한 사건 -출생과 사망의 우연성, 결정의 타이밍 등-과 충돌하여 전례 없는 세계적 반작용을 초래했다.

 

이런 큰 변화는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불안하고,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주변의 세계가 돌이킬 수 없이 변화하는 동안에 싸우고, 고통받고, 물건을 사고팔고, 쟁기질하고, 물레를 돌리고, 성공하고 실패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킨 이들은 자본, 국가, 전쟁, 인쇄술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일상생활에서 구현하면서 능동적으로 추진하거나 수동적으로 경험한 실존 인물이다. 콜럼버스, 이사벨라여왕, 술탄 쉴레이만 대제, 괴츠 폰 베를리힝엔, 존 헤리티지 같은 사람들.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세계를 이끌었다. 탐사 항해는 대규모의 노예화, 대량 학살을 수반한 정복, 대륙 전체의 약탈을 초래했다. 국가는 세금으로 국민을 쥐어짜서 수많은 사람을 궁핍 상태에 빠뜨렸다. 인쇄술은 정보 혁명을 유발했지만, 인쇄술의 도움을 입은 종교개혁은 여러 세대에 걸친 격렬한 종교 전쟁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으로 이어졌다. 설사 혁신과 진보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파괴가 필요함을 인정하더라도, 파괴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비용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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