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말의 지속성
마음에는 사전이 없다
오디세우스는 음유시인이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널리 노래하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노래가 된 이야기는 더 이상 그만의 것이 아니라
그 노래를 들은 모든 사람의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워드 저스트(2004)
역사는 기록과 함께 시작했다. 과거는 기록을 통해 비로소 과거로 남는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문어라는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문어는 우리의 생각을 정리한다. 문해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역사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와 논리 자체는 문자적 사유의 산물이다.
기록은 도구의 산물이며, 하나의 도구이다. 그리고 이후 나타난 많은 기술들처럼 기록은 즉각적인 반발을 불렀다. 의외로 기록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반대했던 사람은 기록의 수혜를 누린 첫 인물이었던 플라톤이었다. 어떤 글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플라톤은 이 기술(기록)이 궁핍화를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이것은 기억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하게 함으로써 배운 사람들의 혼에 망각을 제공할 것이니, 이들은 글쓰기를 믿은 나머지 외부로부터 남의 것인 표시에 의해 기억을 떠올리지. 내부로부터 자신들에의해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 환기의 약을 그대가 발견한 것입니다. 아울러 그대는 배우는 자들에게 지혜로워 보이는 의견을 주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를 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외부의 글자로 만들어진다.' 이것이 문제였다. 기록된 말은 진실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기록은 사람으로부터 지식을 빼내고, 기억을 저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기록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화자와 청자를 단절시켰다. 기록이 개인적, 문화적 차원에서 가져올 근본적인 변화는 거의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플라톤조차 이 단절의 힘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다수에게,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산 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 말한다.
이 최초의 인공 기억이 지닌 힘은 계량할 수 없다. 기록은 생각을 재구성하고 역사를 낳았다.
우리는 단어들을 통해 빵부스러기 같은 흔적을 남긴다. 기호 안에 있는 기억을 타인들이 뒤따른다. 정보의 자취를 남긴다. 이제 사람들은 종이 위에 길을 남긴다. 기록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정보를 보존한다.
버틀러는 말과 글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기록된 기호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범위를 시공간적으로 무한히 확장한다. 다시 말해 글은 작가의 정신에 육신의 삶에 대비되는 생명, 즉 잉크와 종이 그리고 독자들에 의해 지속되는 생명을 부여한다."
그러나 새로운 채널은 이전이 채널을 확장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새로운 채널은 재사용과 '재-구성'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완전히 새로운 정보의 구조가 생기는 것이다. 거기에는 역사, 법률, 상업, 수학, 논리학이 포함된다. 이 범주들은 내용과는 별개로 새로운 기술로 나타낸다. 기록의 힘은 단지 보존되고 전승되는 지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것도 중요하다) 방법론에도 있다. 코드화된 시각적인 말, 전달하는 행위, 대상을 기호로 대체하는 방법론에도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중에는 기호가 기호를 대체하게 된다.
표시, 이미지, 상형문자, 암각화는 점차 양식화되거나 상투화되고 그에 따라 더욱 추상적으로 변하면서 우리가 글로 이해하는 형태에 접근했다. 그러나 글이 되려면 사물을 표상하는 단계에서 구어를 표상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변환을 거쳐야 했다. 즉, 두 번의 표상 단계가 빠져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그림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에서 '뜻을 나타내는' 표의문자를 거쳐 '말을 나타내는' 표어문자로 나아가야 한다.
알파벳은 전염되듯 퍼져나갔다. 그 누구도 알파벳을 독점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구전 서사시를 연구하던 밀런 패리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기록 없이 지어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록 없이 지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위대한 작품들의 시적 틀질이자 형식적 잉여성인 운율은 무엇보다 기억을 돕는 역할을 했다. 주문과도 같은 운율의 힘은 시를, 수 세대에 걸쳐 문화의 가상 백과사전을 전달할 수 있는 타임캡슐로 만들었다. "필사는 문화 속으로 침투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구전적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무너뜨리는 기초를 놓았다."
필사는 호메로스의 위대한 서시사를 새로운 미디어로 전환시켰고 예기치 않은 것을 만들어냈다. 음유시인에 의해 매번 새롭게 창조되고 청중의 귀에 울리는 순간 사라지는 덧없는 말들이었던 서사시는 필사를 함으로써 고정되었지만 파피루스에 새겨진 시구라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구술문화의 언어는 새로운 형태로 비틀려야 했다. 따라서 새로운 어휘가 출현했다. 시는 '주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주제라는 단어는 이전에 '장소'를 뜻했다). 또한 시는 건물처럼 '구조'를 가졌으며, '플롯plot'과 '화법diction'으로 구성되었다.
해블록은 이를 새로운 의식 및 언어가 과거의 의식 및 언어와 벌이는 문화전쟁이라고 일컬었다. "이들의 투쟁은 모든 추상적 사고를 표현하는 어휘들을 만드는 데 본질적이고 영구적으로 기여했다. 육체와 공간, 물질과 운동, 영원과 변화, 양과 질, 조합과 분리 같은 대립어는 지금도 널리 사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체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록의 지속성은 우리가 아는 세계 그리고 앎에 대해 알려진 것들에 체계를 부여했다. 글을 쓰고, 검토하고, 다음 날 새롭게 바라보고, 그 의미를 살피자마자 우리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철학자는 백지 상태에서 출발해 (세상을) 정의하는 방대한 프로젝트를 떠맡았다. 지식은 혼자의 힘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함은 필연적으로 다른 무엇을 뒤따르지 않지만, 본성적으로 그 뒤에 다른 어떤 것이 있거나 생기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끝'은 필연성이나 또는 개연성에 따라 본성적으로 그 전의 어떤 것 다음에 생기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뜻한다. '중간'은 어떤 것 이후에 오고 또 그 이후에 다른 어떤 것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이는 경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경험을 체계화하기 위한 언어의 사용법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동물, 곤충, 어류의 종을 분류하기 위해 '범주category'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관념을 범주화할 수 있었다. 급진적이고 낯선 사고방식이었다. 플라톤은 이런 사고방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멀어지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중들은 아름다움이라는 관념 그 자체 대신 수많은 아름다운 사물ㅇ르 받아들인다. 또한 본질로 여겨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구체적 사물들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대중은 철학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여기서 '대중'은 '문맹'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플라톤은 구술문화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문맹들은 온갖 사물들의 다양성 속에서 넋을 잃고 헤맨다. 이들의 영혼에는 선명한 문양이 없다."
플라톤이 말한 선명한 문양은 무엇일까? 해블록은 추상화의 원칙에 따라 사건이 아닌 범주를 기준으로 경험을 정리하면서 "이야기의 산문"에서 "관념의 산문"으로 전환하는 정신적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이 과정에 대해 해블록이 염두에 둔 단어는 '사유'였다. 이는 단순한 자아의 발견이 아니라 '사유하는' 자아, 사실상 의식의 진정한 기원에 대한 발견이었다.
기록된 말(지속성을 얻은 말)은 의식적 사고의 전제 조건이다. 글은 인간의 영혼에 대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촉발시켰다.
플라톤은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적인 정신의 특질들을 파악하고 단일 유형으로 만족스럽게 명명할 수 있는 용어를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그는 정신의 징후를 묘사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이었다. 이를 통해 플라톤은 말하자면 이전 세대가 추측하던 것들, 즉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을 향해 가는 것으로 느껴왔던 것들을 확정하고 매듭지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사유는 아주 특별한 정신적 활동이며, 매우 불편한 것이긴 하지만 또한 매우 흥미롭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그리스어를 아주 새롭게 사용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추상화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론이라는 상징, 즉 논리를 발전시키기 위해 엄격한 체계 안에 범주와 관계를 배치했다. 논리는 '말', '이유', '이야기' 혹은 근본적으론 그저 '단어'를 의미하는 등 딱히 번역하기 힘든 단어인 로고스에서 나온 말이다.
논리는 기록과 별개로 존재하며, 가령 삼단논법은 글뿐만 아니라 말로도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말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분석이 가능하지 않다. 논리는 그리스와 인도 그리고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글을 통해 전승됐다. 논리는 추상화라는 행위를 참과 거짓을 가리는 도구로 바꾼다.
즉, 확고한 경험과 별개로 글만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논리는 연쇄적인 형식을 지니며, 연쇄를 통해 각 요소들이 서로 연결된다. 결론은 전제를 통해 도출된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일관성(불변성)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분석하고 평가하지 못하면 결론은 아무 힘을 지니지 못한다.
반면 구전되는 이야기는 계속 살이 붙으면서 진행되며, 기억과 연상을 통해 서로 상호작용 하면서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호메로스의 서시시에는 삼단논법이 없다. 경험은 범주가 아니라 사건을 기준으로 나열된다. 이갸기 구조는 기록을 통해서만 일관되고 합리적 논증을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논증에 대한 연구를 하나의 도구로 여김으로써 또 다른 수준에 이르렀다. 그의 논리는 말들에 대한 자기의식이 진행되고 있음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펼치는 전제와 결론을 보자. "어떤 사람도 말이 될 수 없다면, 어떤 말도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인정할 수 있다. 또한 어떤 옷이 하얗지 않다면 하연 것도 옷이 될 수 없다고 인정할 수 있다. 하얀 것이 옷이 되려면 어떤 옷은 반드시 하얀색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이나 옷 혹은 색깔에 대한 개인적 경험은 필요하지 않다. 개인적 경험의 영역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어들을 다룸으로써 여하튼 지식을 창조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월한 유형의 지식을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형식논리학은 그리스 문화가 알파벳으로 기록하는 기술을 체득한 후에 발명됐다(인도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인들은 기록술 덕분에 가능해진 사고를 영구적인 지적 자산의 일부로 삼았다.
루리야는 문맹과 조금이라도 문해력이 있는 사람들 간에는 아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에도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논리가 기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사물은 분류하는 범주에 속해 있으며, 범주는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속성을 지닌다. 구술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기록문화에 속한 문맹들조차 거의 본능적으로 습득하는 기하학적 형태와 같은 범주들을 모른다. 가령 원을 보여주면 "접시, 체, 양동이, 시계, 달"을 말하고, 사각형을 보여주면 "거울, 문, 집, 살구 건조대"를 말한다. 이들은 논리적 연역을 이해하지도, 수긍하지도 못한다.
눈이 내리는 먼 북쪽 지방에는 모든 곰이 하얗습니다.
노바 젬블라는 먼 북쪽 지방에 있는데요, 거긴 항상 눈이 내립니다.
이곳에 사는 곰들은 무슨 색일까요?
되돌아온 대답은 보통 이랬다. "몰라요. 검은 곰은 봤지만 다른 곰들은 본 적이 없어요. 지방마다 사는 동물들이 달라요." 반면 이제 막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사람의 대답은 달랐다. "말한 대로라면 그 곰들은 흰색이겠네요." '말한 대로라면'이라는 구절에서 한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정보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화자의 경험으로부터 분리되어버린다. 이제 정보는 조그만 생명 유지 장치인 말 속에서 살아간다. 말도 정보를 전달하지만 글처럼 자의식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문자를 해득할 줄 아는 사람들은 분류, 참조, 정의 같은 문자와 관련된 지적 활동들을 함으로써 글에 대한 인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문해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기술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루리야가 나무가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하자 한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나무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기본적으로 농부의 말이 옳습니다. 1차적 구술성의 세계를 논박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1차 구술성의 세계에서 걸어 나와 문자를 해득하는 세계로 가는 것뿐입니다."
사물에서 글로, 글에서 범주로, 범주에서 상징과 논리로 가는 길은 꾸불꾸불하다. '나무'를 정의하는 일이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처럼 '말'을 정의하는 일은 더욱 까다로웠다. 처음에는 '정의'라는 유용한 보조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것이다.
"논리의 유아기에는 내용을 채우기 전에 사고의 형식을 먼저 발명해야 했다." 구어에 추가적인 진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언어와 추론은 너무나 잘 맞아서 사용자들이 항상 결함과 간극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문화가 논리를 발명하자마자 역설이 등장했다.
역설은 언어로 되어 있거나 언어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역설을 없애는 한 가지 방법은 매개체를 정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호한 단어와 헝클어진 구문을 없애고 엄밀하고 순수한 기호를 쓰면 된다. 즉, 수학에 기대는 것이다. 20세기 초에는 특별히 만들어진 기호체계만이 오류나 역설 없이 논리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꿈은 착각으로 판명이 났다. 역설이 다시 천천히 파고들었지만 논리학과 수학의 길이 만나기 전까지 누구도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학 역시 기록의 발명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기록은 국가를 운영하는 새로운 수단이었으며, 이 모델은 공문을 통해 의사소통하는 우리의 정부까지 이어졌다.
바빌로니아 점토판에는 등비수열과 지수표 그리고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구하는 공식까지 확인이 되었다. 이들은 피타고라스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1차 방정식, 2차 방정식, 피타고라스 수를 계산해냈다. 우르크에서 발굴된 점토판들은 50년이 지난 후에야 천문학의 초기 방법론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른 점토판에서는 알고리즘과 같은 '절차'를 발견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수를 특정한 자리에 놓아서 수의 '사본'을 만들고, 수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방법을 기록했다. 추상적 자리를 차지하는 추상적양이라는 개념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다시 등장했다.
기호는 어디에 있을까? 기호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던지는 것조차 저절로는 생기지 않는 자기의식이 필요했다. 이 질문들은 한번 제기된 후에는 계속 남았다. '이 기호들을 좀 보라.' 철학자들은 호소했다. '이것들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문자는 음성을 나타내는 형태이다. 따라서 문자는 눈이라는 창을 통해 머리로 들어오는 사물을 표상한다." 요하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원칙들을 제시하는 동시에 마치 새로운 종교처럼 당대인들에게 개종을 촉구했다. ("논리를 따르지 않는 자는 끊임없고 영원한 부패에 고통받을 것이다.") 또한 문자를 해득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던 시대에 요하네스는 펜을 들어 기록하는 행위와 글의 영향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글은 종종 소리 없이 부재자의 말을 전했다." 기록이라는 관념은 여전히 말이라는 관념과 얽혀 있었다. 시각과 청각의 혼합은 계속 수수께끼들을 만들어냈으며, 부재자의 말인 과거와 미래의 혼합도 마찬가지였다. 기록은 이런 단계들을 가로질렀다.
기록은 그 자체로 인간의 의식을 바꿔놓아야 했다. 기록문화를 통해 얻은 많은 능력 중에서 중요한 것이 기록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능력이었다. 저술가들은 음유시인들이 말에 대해 논의하기를 즐긴 것보다 훨씬 더 글에 대해 논의하기를 즐겼다. 이들은 매체와 메시지를 '볼' 수 있었고, 마음의 눈으로 연구하고 분석할 수 있었다. 아울러 비판도 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능력들은 처음부터 사라지지 않는 상실감을 껴안고 있었다. 상실감이란 일종의 향수와 같았다.
글은 움직이지 않는다. 안정적이며 변하지 않는다. 순수한 구술성은 위대한 서사시가 지어지기는 했으나 많은 비용이 들었고, 대단히 드물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만들고, 들려주고, 시대와 장소를 넘어 유지하려면 상당한 문화적 에너지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사라진 1차적 구술성의 세계를 그다지 그리워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서 의사소통을 위한 새로운 미디어가 생겨나기 전까지 염려와 향수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구술문화의 대변인인 매클루언은 새로운 '전자시대'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창의성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찬양했다. 매클루언은 오랜 구술성의 부활을 보았던 것이다.
매클루언의 비판에 따르면 활자는 좁은 의사 소통 채널일 따름이다. 이 채널은 단선적이며 심지어 파편화되어 있다. 반면 말은 원시적인 경우로, 몸짓과 접촉을 수반하여 생생하게 이뤄지는 대면 의사소통이다. 청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끌어들인다. 의사소통의 이상이 영혼의 만남이라면 글은 그 이상의 슬픈 그림자일 뿐이다.
조너선 밀러는 매클루언의 주장을 유사 기술적 정보용어들로 바꾸어 말했다. "관여하는 감각이 많을수록 발신자의 심리 상태를 충실하게 대변하는 복제본을 전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는 귀나 눈을 지나는 말의 흐름에서 개별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그 리듬과 어조, 말하자면 음악을 감지한다. 청자 혹은 독자인 우리는 한 번에 한 단어씩 듣거나 읽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단위로 묶인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인간이 지닌 기억의 속성상 큰 패턴은 음성보다 글에서 더 잘 파악될 수 있다. 눈은 되돌아볼 수 있다. 매클루언은 이러한 훼손을, 혹은 적어도 손실을 고려했다. "모든 감각의 동시적 상호작용을 통해 인식하는 청각적 공간은 유기적이고 통합적입니다. 반면 '이성적' 혹은 시각적 공간은 단일하고 순차적이고 연속적이며, 부족적 공명세계의 풍부한 반향이 울리지 않는 닫힌 세계를 만듭니다."
구어를 통해 정보를 얻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 부족적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 구어는 문어보다 더 감정적으로 충만합니다. ... 청각과 촉각을 풍부하게 경험하는 부족민은 신성한 가치를 지닌 신화와 의식을 통해 마술적으로 통합된 세계에 살면서 집단무의식을 공유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토머스 홉스는 조금은 비관적으로 보았다. 문자문화가 발달하기 전의 문화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조야한 경험을 하며 살았다. 아무 체계가 없었다. 다시 말해 잡초나 흔한 식물 같은 오류와 추측만 있었지, 스스로 지식의 씨를 뿌리고 길러내지 못했다."
현대 새로운 미디어들로 인해 지식을 얻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그것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해 보는것도 꽤 중요해 보인다.
매클루언이 옳았을까, 아니면 홉스가 옳았을까? 글쓰기의 부상을 목격한 플라톤은 글의 힘을 설파하면서도 글의 무생명성을 두려워했다. 정보기술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힘과 두려움을 가지고 나타날 때마다 동일한 역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플라톤이 우려했던 '망각'은 나타나지 않았다. 플라톤 자신이 스승인 소크라테스 그리고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개념들을 만들고 이것들을 범주로 나누고, 논리의 규칙을 정하면서 기록하는 기술의 잠재력을 살렸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들은 지식의 내구성을 유례없이 강화시켰다.
옹은 이렇게 말했다. "글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단어를 떠올려보라'라고 하면 모호하기는 하지만 최소한 어떤 대상을 머릿속에 그린다. 거기에 실제 단어는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단어를 찾아야 할까? 물론 사전 속이다. "마음에는 사전이 없다." 사전 편찬은 언어가 만들어지고 한참 후에 이뤄졌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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