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정치와 정책 : 좌우 대결의 종말
경제 사상은 항상 정치와 연계되어, 역사적으로 보면 경제 이론의 패러다임이 바뀌면 정치 지형도 변하여 왔다. 애덤 스미스의 아이디어 덕분에 19세기 자유 무역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카를 마르크스 이론은 20세기 지각 변동의 동인이 되었다. 신고전학파 이론은 서구 정통 자본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고, 케인스학파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정통 이론에 수정을 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구 경제에서 국가의 개입이 점점 늘어나 1970년대 말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1980년대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같은 경제학자의 영향을 받은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의 등장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복잡계 경제학이 시장에 긍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어떤 이는 우파라고 할 것이고, 시장은 전통 경제학이 주장하는 만큼 효율적이지 않다는 복잡계 경제학의 논리 때문에 어떤 이는 좌파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이 장에서 복잡계 경제학은 좌도 우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정치 구조를 무력화할 수 있는 이론적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좌-우 둘 사이 갈등의 핵심에는 두 가지 뿌리 깊은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다. 그 하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양측의 시각 차이이며, 다른 하나는 시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한 견해 차이이다.
퇴물이 된 구조
<제3의 길>이라는 저서를 출간. 이로 인해 그들은 미국의 '신민주당', 영국의 '신노동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들 주장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부를 창출하는 제도적 강점과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목적을 결합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수단을 사회주의적 목적을 위해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클린턴은 미국의 복지 제도를 개혁하였고, 블레어는 운영난을 겪고 있던 영국 국가보건청 운영에 시장 원리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부시의 온정적 보수주의는 기껏 부유층을 위한 대대적인 감세 정책으로 나타났다. 좌우 간격은 좁혀졌을지 몰라도 해소되지는 않았다.
'제3의 길'은 새로운 경제 이론이 아니라 실용적인 정치적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가가 만들어 준다던 유토피아는 악몽 같은 경험에 지나지 않았고 시장 경제 체제가 약속한 낙원은 기능 장애증에 걸린 사회에 불과하였다. 아직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 체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지적 공백을 메울 잠재력을 가진 이론적 대안이 바로 복잡계 경제학이다.
인간 본성과 강한 상호주의
좌우 대결의 철학적, 역사적 내용을 심층적으로 보면 인간 본성의 두 가지 모순된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좌는 인간을 원초적으로 이타적이라고 보고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은 본성이 아니라 계급 사회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은 정의로운 사회를 통해 개조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은 장 자크 루소에서 시작되어 카를 마르크스로 계승되었다.
우는 인간이란 원래 이기적이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고치려 하기보다는 이를 수용하는 정부 체제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말하였듯이 "정부 체제를 고안하는데.,... 모든 사람은 악당이라서 그 행동이 사적 이득을 취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고 간주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파는 만약 사람들이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의 이익 증진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철학은 흄에서 존 로크 그리고 토머스 홉스로 이어지며 발전하였다.
여기에 애덤 스미스의 이름이 없어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스미스의 시각은 이들과 다소 다르다.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어떻게 이기심이 시장의 역할을 통해 사회적 편익에 기여하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 그러나 <도덕감정론>에서 그는 "사람이 아무리 이기주의적이라고 할지라도 남의 재산에 관심을 갖게 하는 본성에도 분명히 원칙은 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스미스는 인간 행태에 대하여 좀 더 중도적 시각을 가졌으며 인간 본성에 이기적인 면과 이타적인 면이 공존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킨티스는 최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좌우의 역사적인 시각은 너무 단순하다고 비판하였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냐 아니면 이타적이냐 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의견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실증 연구와 실험, 인류학의 현장 연구 그리고 게임 이론을 통한 분석에 의하면 스미스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맞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타적이지도 이기적이지도 않다. 인간이란 '조건부 협력자'이자 '이타적인 응징자'라고 할 수 있다. 긴티스는 이러한 인간의 행태를 '강한 상호주의'라고 하며 "타인과 협력하고자 하는 성향과 협력의 규범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응징하려는 성향(개인적인 희생을 치르더라도)"이라고 정의하였다.
강한 상호주의에 바탕을 둔 인간의 행태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 행태가 어느 정도 유전적인 것인지, 어느 정도 문화적인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유전적인 것이라는 세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강한 상호주의 행태는 여러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상호주의는 순전히 문화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다른 영장류에서도 비슷한 행태가 관찰되었다. 셋째, 이러한 행태와 관련된 생물학적 증거도 있다. 뇌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은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느끼게 하고 협력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한 상호주의가 보편적 현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본성을 촉발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사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것은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강한 상호주의에 대한 진화론적 논리는 간단하다. 제로섬 게임이 아닌 세계에서 조건부 협력자가 순전히 이타적 혹은 이기적 전략을 따르는 사람보다 좋은 성과를 낸다. 마치구엥가족의 문화적 규범은 다른 사회처럼 강한 상호주의를 강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마치구엥가 문화는 이기주의, 상호 불신, 낮은 협동 정신 등이 특징이다. 그들 사회의 조직은 가족 단위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실험 대상 중 가장 가난한 사회였다.
전통 경제학자는 강한 상호주의가 또 다른 형태의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른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것이다. 제로섬이 아닌 사회에서는 협력이 유리하다. 그러나 강한 상호주의와 전통 경제학의 이기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전통 경제학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적 상호 작용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실험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의 정당성도 매우 중시한다. 둘째, 최후통첩 게임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해가 되더라도 부당한 행동을 응징한다. 다시 말해, 정말 속았다고 생각되면 사람들은 어떤짓을 할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이기주의적 합리성과 다른 점이다.
사회 보장 제도도 지난 70여 년간 범정파적 지지를 받아왔다. 이 또한 상호주의의 원칙에 바탕을 둔 정책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스미스의 견해가 옳았다. 복잡계 경제학이 강한 상호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좌파도 모든 죄악의 근원은 사회라는 루소의 견해를 벗어나 개인의 책임성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우파 또한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다는 가정을 전제로 사회 제도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흄의 견해에서 벗어나 인간 본성의 너그러운 측면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계 경제학에 의하면 개개인의 행동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결국 개개인의 행동이 통합되고 그것이 제도적 구조와 연계되어 한 시스템의 창발적 행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좌파의 유토피아와 자유 시장에 대한 환상
인류는 모르는 사람들 간의 대규모 경제 협력을 위해 두 가지 메커니즘을 개발하였다. 즉, 시장과 계층 구조이다. 이 두 메커니즘 속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실행 수단과 방법이 포함되어 있으나 결국은 모두 이 둘로 나누어질 수 있다. 수평적인 조직으로 알려진 집단 농장이나 협동조합 같은 경우에도 계층 조직적 권력 구조가 어느 정도 존재한다. 복잡계 경제학적 관점에서 본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의 차이점은 경제적 적합도를 판단하는 것이 '시장이냐 계층 구조냐'이다.
자본주의 경제, 사회주의 경제를 막론하고 사업 계획의 차별화, 선택, 확산은 계층 구조의 틀 속에서 일어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그러한 과정이 민간 기업에서 일어나고, 이에 반해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직접, 간접으로 국가가 통제하는 조직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 진화의 과정은 결국 시장이라는 거름 장치를 거치게 되어 있고, 이 과정에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사업 계획의 선택과 확산을 최종 결정한다. 사회주의 경제에는 이러한 시장이라는 거름 장치는 존재하지 않으며(국가가 이를 관장), 사업 계획의 선택과 확산 같은 진화 과정에서의 결정은 정부라는 계층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좌파에 대한 비판
복잡계 경제학의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비판은 경제란 너무 복잡해서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것처럼 중앙 계획 당국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 되어 있다.
첫째는 하이에크가 말한 '지식의 조정 문제'이다.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지식은 사회 전반에 산재해 있다. 그러한 지식은 사람들의 취향에 대한 정보, 비용, 기술 등에 대한 정보를 포함한다.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이 없다면 이러한 정보를 모은다는 것이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조사가 끝나는 순간 조사의 내용은 아무 쓸모 없는 과거의 데이터가 되고 말 것이다(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얘기다). 그리고 비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문제는 하이에크는 이를 사회주의의 '결정적 자만심'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연역적 합리성도 경제와 같은 비선형적이고 동태적인 시스템에서 사안을 이해하고, 예측하며, 계획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통제할 수 없다.)
세 번째 문제는 우리가 완벽한 합리성을 버리고 연역적 추론에 의존한다면 추론의 성공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잣대가 필요하며, 무엇이 좋은 사업 계획이며 무엇이 나쁜 사업 계획인지 피드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피드백을 할 시장 메커니즘이 없다면 우리는 하이에크의 '지식의 조정 문제'에 빠지고 만다. 사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그리고 사회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없다면, 국가라는 계층 구조가 마음대로 생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통치자의 계층 구조는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순수한 계획 경제에서의 적합도 함수는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는 권력의 이익을 반영하게 된다.
따라서 복잡계 경제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장은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역할과 함께 사업 계획의 선택을 위한 적합도 함수를 제공함으로써 권력의 계층 구조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계획된 유토피아라는 깔끔한 비전은 복잡 적응 시스템인 번잡한 현실 세계에는 맞지 않다.
우파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신고전학파 이론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에 관한 우익의 환상에 대한 비판이다. 논점은 두 가지다.
첫째, 복잡계 경제학은 시장이 유용하고 필요하지만 완벽하게 효율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는 시장이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는 일부 우파의 가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다.
작은 예로 50년간 영국은 전화번호 안내를 위해 단일 번호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독점적 사업은 국영 회사였던 브리티시 텔레콤이 운영하였으며 정부가 통화료 및 서비스의 질을 감시, 통제하였다. 서비스는 간단한데다, 비교적 잘 운영되었으며, 소비자의 불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그 서비스를 자유화하기로 하고 경쟁 시장으로 개방하였다. 시장 경쟁으로 가격을 내리고 서비스 혁신을 촉진시키기 위해서였다.
많은 회사가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2004년에는 무려 120개사가 시장에서 경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종전의 체계에서는 전화번호 안내 번호가 192 하나밖에 없어서 모두가 이를 잘 기억하였다. 그러나 120개사가 경쟁하게 되자 사람들이 몇 개의 번호 외에는 기억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 운 좋은 회사는 기억하기 쉬운 '118'과 같은 번호를 받아, 시장에서 독점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화 번호 안내 서비스 비용은 적은 금액으로 여겨져 굳이 시간을 들여 가며 가격이 낮은 회사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제도하에서 좋은 번호를 가진 회사들이 더 높은 가격으로 과점적 전화번호 안내 서비스를 하면서 소비자의 불만은 과거 독점 시보다 더 늘어났다. 인간 인지 능력과 제도 및 이론 사이의 현실적 괴리로 인하여 전통 이론은 당초의 효과를 내지 못하였고, 결국 시장 경쟁의 편익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비슷한 예로서 캘리포니아주의 전력 시장 자유화는 2001년 심각한 전력 공급 부족을 초래. 영국 철도 산업의 민영화는 서비스 질을 크게 떨어뜨렸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 경쟁이 나쁘고 독점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파는 모든 사회 문제를 시장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두 번째 비판은 우파가 가지고 있는 반정부적 입장은 복잡계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순진한' 측면이 있다. 신고전학파 이론은 정부의 간섭이 없는 원초적인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경제를 만들어 놓는다.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에서 바로 파레토의 최적 상태가 형성되며 사회의 부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여기에 세금이니 규제가 개입되면 경제는 이상적 상태에서 멀어지고 사회적 부의 창출도 줄어들게 된다. 그러므로 세금을 억제하고 정부 지출도 최소화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 이와 같이 우파는 시장이 기능을 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규제는 필요하지만 일반적으로 세금과 같은 규제는 시장을 왜곡시키고 가격 신호를 오도하며 경제를 이상적인 상태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정부적 시장론자들은 경제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경제적 진화 시스템은 수없이 많은 사회적 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회적 기술은 대개 정보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진화는 협력과 경쟁의 균형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균형을 이루는 데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계약법, 소비자 보호법, 근로자 안전법, 증권법과 같은 사회적 기술은 모두 협력과 신뢰를 강화하기 위한 것인 반면, 반독점 규제는 건강한 수준의 시장 경쟁을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정부의 영향력이 약한 개발도상국에 가보면 정부의 개입이 없을 때 국민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가 알 수 있다. 정부가 이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경제는 협력도 경쟁도 약한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개입이 모두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바보 같은 낭비적 규제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문제가 될 뿐 해결책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경제 시스템의 진화를 효과적으로 떠받치는 정부 제도의 역할을 훼손하는 것이다.
정부는 적합도 함수를 설정한다
복잡계 경제학은 정부의 경제적 역할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우파의 입장은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파레토 최적이 도덕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해결이며, 그러한 파레토 최적을 달성하는 가장 효율적인 메커니즘은 시장이므로(유일한 메커니즘), 도덕적으로 올바른 정부의 역할은 시장 효율을 확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에 개입하는 어떠한 정부의 행위도 그러 인해 발생하는 시장 효율의 손실을 기준으로 비용 편익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우파 사람들은 시장 효율을 이유로 환경 규제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복잡계 이론의 시각은 정부의 개입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본다. 한 가지는 사업 계획의 차별화, 선택 그리고 확산과 관련된 정부 행위는 경제적 진화 과정에 대한 개입으로서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비판에서 본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로서, 특정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보호하는 일본의 산업 정책, 자국 은행을 위해 유럽의 은행 간 합병에 개입하는 프랑스 정부 정책 등을 들 수 있다.
반대로 다른 한 가지는 사업 계획의 차별화, 선택, 확산 등은 시장 매커니즘에 맡겨 두고 경제적 '적합도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 개입은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대로 진화 시스템에서 효율의 의미는 제한적이다. 복잡계 이론의 시각에서 본다면 정부 규제는 기업 경쟁 환경의 일부분이다. 시장 메커니즘이 사업 계획을 차별화하고 선택하고 확산하는 역할을 해준다면 경제적 진화 과정은 정부의 규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혁신하고 적응해 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유권자들이 자기들이 선출한 의원에게 환경 보호가 사회적 우선 과제라고 말한다면 정부는 환경 친화적 사업 계획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유리하도록 경제적 적합도 함수를 설정할 것이다. 탄소세, 배출량 거래 제도, 재활용 의무화 등이 좋은 예이다. 이 경우 정부는 사업 계획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즉, 연료 전지, 에탄올, 풍력 발전, 혹은 다른 물리적 기술 중 어느 것이 배출량을 줄이는 데 가장 좋은지) 선택된 사업 계획이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 있는 적합도 환경을 조성한다(즉, 탄소세가 있는 곳에서는 저배출 사업 계획이 고배출 사업보다 유리할 것이다).
정부를 적합도 함수의 설정자로 보는 시각은 좌우 어느 쪽과도 맞지 않는다. 우파는 효율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대로 이들이 말하는 효율은 정태적 상태의 것을 말한다. 만약 탄소세가 도입되어 기술 혁신을 촉진하고 결과적으로 태양열 발전 비용이 급격히 줄어들었다면 경제는 더 효율화될 것 아닌가?
반면에 좌파 사람들은 시장의 창의적인 힘보다 관료의 합리성을 더 신뢰하고 지시형의 접근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즉, 배출량 거래 제도보다는 발전소의 의무 배출량 절감 목표를 설정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정부를 적합도 함수의 설정자로 보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하이에크가 지적한 여러 가지 이유를 고려할 때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 정부가 적합도 함수를 설정함에 따른 영향, 그리고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 등을 우리의 능력으로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정치적으로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논점은 시장 효율이 중요한가, 사회적 목적이 중요한가 하는 고루한 이념적 논쟁에서 벗어나 어떻게 시장의 진화 과정이 우리 사회의 필요에 맞게 잘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토론으로 바뀌어야 한다.
복잡계 경제학은 국가와 시장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있다. 국가의 경제적 역할은 시장의 진화를 촉진하고, 협력과 경쟁 간의 효과적 균형을 이루게 하며, 사회의 요구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경제적 적합도 함수를 설정하도록 하는 제도적 틀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강력한 상호주의 규범에 따라 국가는 모든 국민이 경제 시스템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러한 시스템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기초적인 지원을 해 줄 책무가 있다,.
시장의 경제적 역할은 사업 계획을 발굴하고 차별화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소비자 수요, 기술 그리고 국가가 설정한 적합도 함수를 고려하여 사업 계획을 선정하며 선정된 계획이 확산되도록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시장은 대립 관계가 아니다. 문제는 효과적인 진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하여 국가와 시장을 어떻게 결합하느냐이다.
이제 복잡계 이론을 이용해 오랜 사회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세 가지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세 가지 사례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미시적 행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대로 '복잡 적응 시스템'에서는 개별 주체의 행동 규칙이 시스템 전체의 거시적 성과에 심대하고도 예상 밖의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슈거스케이프' 모형에서 간단한 개별 주체의 행동 규칙이 어떻게 부의 편재 현상을 초래하는지 보았다. 그리고 진화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어떻게 개별 주체의 전략이 창조적 파괴라는 슘페터적 바람을 일으키며, 맥주 게임에서 실제 사람들의 행동이 어떻게 호경기와 불경기를 초래하는지도 살펴보았다.
전통 경제학은 역사적으로 미시적 행태를 매우 좁은, 협의로 보았다. 즉,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합리적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각기 다른 개인의 행동이 거시적 수준의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지 탐색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인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보겠지만 문화적 규범, 어디에 살고, TV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등과 같은 개인의 취향, 그리고 부모의 행동 등은 거시 경제적 문제의 근원일 수도 있다.
문화가 중요하다
부의 격차의 원인은 좌우에 따라 다르게 설명된다. 좌파의 설명은 식민주의, 인종주의, 자본가 수탈, 그리고 부자 나라들의 빈약한 지원 등이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반면, 우파는 이러한 격차가 나쁜 정부, 부패, 자유 시장의 부재, 외국 원조에 대한 의존, 그리고 다소 미묘한 것이기는 하지만(꼭 그렇지만도 않은) 인종적 열등감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지리적 여건, 기후, 그리고 특히 아프리카의 경우 끊임없는 전쟁 등도 중요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6장에서 문화를 개인들이 준수하는 미시적 규칙들의 결과로 나타나는 창발적 현상이라고 정의하였고, 조직의 경제적 성과에 있어서 문화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하버드 심포지엄 참석자들은 문화는 국가 경제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국가 경제의 경우 수천 명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주어진 행동 규범 혹은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문화와 거시 경제 성과 간의 관계를 처음 관찰한 사람은 20세기 초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이다. 그러나 1950년대와 1960년대 경제적 성과에 대한 문화적 설명은 두 가지 이유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첫째는 정치적인 합당성의 문제였다. 렌즈가 말한 대로 "문화는 ... 학자들에게 겁을 준다. 문화는 인종과 유산이라는 유황과 같은 향과 변치 않는 자태를 지니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높은 벽이다. 완벽한 합리성의 세계에서 문화가 설 자리는 매우 좁고, 있다 하더라도 그 문화적 규칙은 이기적인 최적화의 전략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는 경우 사람들이 그 규칙을 활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정치적 합당성 문제는 많이 해소되었다. 과학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적 토론이 가능해졌다. 이제 상대주의적 함정에서 벗어나 어떠한 문화적 규범이 경제 발전을 더 촉진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를 성공으로 이끄는 문화적 공식이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경제적 성공을 위한 완벽한 공식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어떤 규범은 경제 발전을 받쳐 주고, 또 어떤 규범은 그렇지 못한가? 문화적 규칙의 유형을 제시한 바 있다. 대략 세 가지의 범주로 나누어 진다.이러한 유사성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직적 규범이든 사회적 규범이든 그것이 부의 창출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진화의 과정을 촉진하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범주는 개인의 행동과 관련된 규범이다. 여기에는 노동 윤리, 개인의 책임성,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주역이며 신이나 통치자의 뜻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신념 등과 관련된 규범이 포함된다. 운명주의는 개인의 동기를 훼손한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 내세 뿐 아니라 금세에도 반드시 보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끝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려면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다는 낙천주의와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현실주의를 균형 있게 고려하는 문화를 가져야 한다.
둘째 범주는 협력과 관련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이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협력하면 보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부의 파이가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사회는 협력을 유도하기 어려우며 구성원 간의 상호 신뢰도가 낮은 경향이 있다. 강력한 상호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보았듯이 우리 문화가 관용과 공정성을 중히 여기는 규범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위도식하거나 남을 속이는 일을 응징하는 규범도 있어야 한다.
셋째 범주는 혁신과 관련된 규범을 포함한다. 연역적 부분이 강할수록 연역적 추론은 더욱 효과적이게 된다. 따라서 현상을 종교적 혹은 마술적으로 설명하는 문화보다 합리적,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문화가 훨씬 더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통만을 고집하는 것은 혁신을 억제하는 것이므로, 문화는 이론이나 실험에 대해 참을성을 가져야 한다. 끝으로 과도한 평등주의는 위험 부담에 대한 동기를 감퇴시키므로 경쟁을 촉진하고 성과를 높이 사는 그런 문화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세 범주 모두와 관련된 중요한 규범이 있다. 즉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시각이다. 오늘을 위해 사는 문화는 낮은 노동 윤리, 협력의 결핍, 낮은 혁신 투자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많다. 내일이 중요하지 않다면 왜 일을 열심히 하고 왜 협력과 혁신에 투자해야 하는가? 이와 반대로 내일을 위해 투자하는 윤리를 가진 문화에서는 노동을 중히 여기고, 세대 간 저축률이 높으며, 장기적인 이득을 위해 단기적인 쾌락쯤은 희생할 줄 알 뿐 아니라 서로 협력하기를 즐겨 한다.
조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하고, 협력하며, 혁신하는 문화를 가진 사회에서는 복잡한 사업 계획의 발굴, 실행 및 진화가 쉽게 일어난다. 이와 같이 앞에서 본 문화적 규범 중 무엇이든지 결핍되면 경제적 진화가 늦어지거나 중단될 가능성이 높다.
남을 속이는 행위에 대한 응징은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오늘만을 위해 사는' 사회와 '내일을 위해 투자하는' 사회를 두고 도덕적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다르다. 끝으로 우리가 경제적 성공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그것만이 건강한 사회의 척도라고는 할 수 없다. 인내와 용서를 중요한 규범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사기가 판을 치고, 그래서 대규모 협력이 불가능해지며, 그 결과 경제적 성과도 악화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범은 사회를 따뜻하고 친절하며 평화롭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서를 전제로 할 때, 개별 사회의 문화를 분석하고 그 사회 규범의 경제적 효과를 평가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데퉁가 망겔은 아프리카 문화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사하라 사막 이남의 국가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가치, 태도, 그리고 제도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 공통된 규범의 대부분이 문화적 유형상 경제적으로 부활한 것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특히 두 가지 예를 들었다. 즉, 개인 통치자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과 미래가 아닌 과거와 현재를 중시하는 시간에 대한 시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미래에 대한 동태적 인식 없이는 계획도, 통찰도, 시나리오도, 사회 발전을 위한 정책도 있을 수 없다"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규범의 영향은 사회 구성원 전체로 볼 때 단순히 추가적이거나 선형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개별 주체들이 문화적 규범을 따르는 가운데 상호 작용하면서 복잡한 동태적 변화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세계는 제로섬 게임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논제로섬 게임이라고 믿는 사람들 간의 상호 작용을 보자. 만약 세상이 제로섬 게임이라고 믿는 편이라면 당신의 목적은 당신 몫의 파이를 차지하는 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더 가져가면 당신 몫은 줄어들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고자 하는 마음도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 복잡한 협력을 새로이 추구하기보다 지금 있는 부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더 쓸것이다. 그러한 제로섬 사회에서는 절도, 부정, 부패가 창궐할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부도덕, 불법에 대한 사람의 태도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절도에 대해서 절도범은 단지 '정당한 내 몫'을 원래의 몫보다 더 많이 가져간 사람으로부터 찾아가는 것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제 경제적 파이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사회는 논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혼재해 있는 집단이 있다고 하자. 시간이 지나면서 논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부를 창출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만들어 낸 부에 대한 자기들의 몫을 공격적인 방법으로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협력으로부터의 편익을 감소시키고, 논제로섬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조차 협력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제로섬론자가 되고 말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동태적 현상을 모형화하면서 일종의 티핑 포인트가 존재한다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즉, 사회에서 협력자와 비협력자의 구성비가 어떤 한계치를 넘어서면 그 사회에서 대규모 협력 행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고 결국 빈곤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적은 엉뚱한 역사적 사건이 한 사회를 비협력의 길로 이끌고 결국 빈곤의 함정으로 몰아가는 반면에, 같은 협력 성향을 가진 사회라 할지라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그 사회를 부의 길로 연결시켜 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협력자와 배반자간의 상호 작용은 사회의 규범과 신뢰성의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 문화는 불변의 힘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들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와 같이 공진화한다. 문화는 역사의 산물이며 역사는 문화의 산물이다.
문화에 따라 신뢰도는 크게 차이가 난다. 신뢰와 경제적 성과 간에는 중요한 상관관계가 있다. 높은 신뢰는 경제적 협력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경제적 번영으로 연결되며 결국은 신뢰를 제고시키는 선순환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순환은 악순환이 될 수도 있다. 신뢰도가 낮으면 협력이 낮아지고 이는 빈곤으로 연결되며 또다시 신뢰를 잠식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과 관계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뢰라는 것이 협력의 수준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국인과 인도인들은 미국인에 비해서 스스로 신뢰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미국인들이 신뢰도가 낮음에도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강한 사회적 기술, 특히 전통적으로 법치주의 중시 사상 때문이다. 또 다른 설명은 미국은 과거의 사회적 자본을 먹고 산다는 것이다. 사회적 자본이 다시 재건되지 않으면 신뢰는 계속 잠식될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왜 어떤 문화에서는 사회적 신뢰도가 높은 반면에 어떤 문화는 낮은 신뢰의 함정에 빠져 있는가에 대해서 연구한 바 있다. 그의 결론 하나는 아주 강한 가족 가치를 갖고 있는 사회는 광범위한 형태의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가족 중심의 문화는 가족 간의 신뢰는 강화 시키는 반면에 가족 밖의 신뢰 범위는 좁아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경제적 네트워크가 대개 가족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네트워크가 확장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된다.
가족 전통이 약한 사회에서는 가족 밖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사회적 기술은 법치주의 정착으로부터 자발적인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므로 가족 내의 신뢰 관계는 다른 문화에 비해서 약할지 모르지만 신뢰의 범위는 훨씬 넓다.
세계은행의 칼라 호프와 인도통계연구원의 아리지트 센은 과도하게 강한 가족 관계는 사회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였다. 대가족 사회는 가족 구성원 간에 경제적 부를 공유하는 데 아주 엄격한 규범이 있다. 부자인 가족 구성원은 가난한 가족 구성원을 도와주도록 되어 있다. 가족 상호 간에 나눔을 바탕으로 한 따뜻한 대가족의 이미지가 매우 좋아 보이기도 하고 경제적 관점에서는 심리적 혹은 그 외의 이점도 있을 수 있으나 문제도 많다. 도덕적 해이가 일어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광의의 해석은 무위도식과 근로와 저축에 대한 낮은 보상 등 경제적 동기를 약화시킨다. 호프와 센은 대가족 제도가 개인적 수준에서 문제를 일으킬 뿐 아니라 기업과 정부에 가족주의를 개입시킴으로써 사회 발전을 지체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 발전 정책에 대한 문화의 의미는 아직 연구 단계에 있지만 발전이라는 방정식에 있어서 문화가 필수의 변수라는 것은 분명하다. 극심한 빈곤을 없애기 위한 원조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한 빈곤의 원인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문화적 요소가 유일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빈곤의 문화적 근원을 고려하지 않는 원조 프로그램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 자본과 대붕괴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 교수는 <나 홀로 볼링>이라는 책에서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를 대중의 의식 속에 각인시켰다.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을 "개인 간의 유대-사회적 네트워크, 그리고 그로부터 초래되는 상호주의와 신뢰의 규범"이라고 규정한다. 복잡계 경제학의 용어로는 문화적 규범이 개별 주체(행위자)들의 미시적 행동 규칙을 제공한다면, 사회적 자본은 협력 네트워크를 창출하는, 개별 주체들이 만들어 낸 창발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협력 활동이 사회적 자본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거래하는 익명의 협력은 사회적 자본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사회적 자본을 가진 네트워크의 특성은 그 속의 사람들이 반복적인 상호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자본은 접촉의 스포츠와 같다. 자선 단체, 종교 단체, 스포츠 팀, 사교 클럽, 시민 단체, 등이 있다. 회사와 직장 역시 중요한 사회적 자본의 원천이다.
사회적 자본이 매우 친근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저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조직 범죄, 테러리스트 단체도 그 조직원 간에 아주 높은 신뢰를 갖고 있으며, 효과적인 네트워크와 아주 강력한 행동 규범(간혹 잔혹하게 적용되는)을 갖고 있다. 그들 내부의 종교적 혹은 민족적 구성원, 그리고 다른 동료에 국한되고, 따라서 그러한 신뢰 관계가 외부로 확산되지 않는다.
이탈리아 관공서 방문 경험...
퍼트넘은 이탈리아 지역 간에 존재하는 차이의 근원을 대규모 협력을 실행할 수 없는 낮은 신뢰성에서 찾는다. 퍼트넘은 신뢰성의 차이는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두 지역 간의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이 두 지역에 상이한 사회적 자본을 상속으로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남부는 전통적으로 교회 중심의 군주주의적 계층 구조를 가진 폐쇄적 사회였다. 그러한 계층 구조는 민간 단체나 기업 네트워크를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이를 억압하였다. 반면에 북부 지역은 비교적 평등주의적 지역 공동체로 개방 무역 등을 통해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여건하에서 사회적 네트워크는 확대되고 번창하였다.
퍼트넘이 말한 대로 역사는 경로 의존적이어서 북부의 지역 공화국들은 그러한 역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수세기에 걸쳐 사회적 자본을 키워 갈 수 있었다. 반면에 남부 군주주의 공화국들은 사회적 자본 형성을 위한 선순환의 고리를 확립할 수 없었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둘 사이의 차이는 경제적 성과에서 큰 격차로 연결되었다. 북부 이탈리아는 가장 부유하고 급성장하는 지역이 된 반면 남부 지역은 가장 가난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사회적 신뢰와 거시 경제적 성과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관련성이 있다.
후쿠야마의 연구에 의하면 사회적 자본의 감소를 나타내는 몇 개의 지표가 1960년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력 범죄율이 7배나 늘어났으며, 비슷한 수준의 이혼율 증가, 비슷한 수준의 미혼모 증가 등이 나타났다. 1960~2000년 사이의 기간을 대붕괴라고 명명하였으며, 사회적 자본의 붕괴는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선진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일어난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하였다. 그 원인은 복합적이며 따라서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
후쿠야마와 퍼트넘은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난 가족 구조의 급격한 변화, 특히 이혼율의 증가, 그리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들었다. 이혼이 쉬워졌다는 것은 많은 불행한 결혼을 자유롭게 하였지만, 어린아이들과 그들의 사회 발전에 부인할 수 없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여성에 대한 일자리 개방은 여성으로 하여금 개인적인 잠재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동인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퍼트넘이 말했듯이 여성은 역사적으로 한 사회의 사회적 망을 창출하는데 남자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여성은 또한 역사적으로 친구와 이웃으로 구성된 가족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관리해 왔다. 이러한 미시적 차원의 변화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의 여성들 사이로 확산됨으로써 매우 중요한 거시적 차원의 영향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사회의 물리적 배치도, 특히 도시 외곽의 확장이다. 그래서 이웃 간에 만날 기회가 줄어드는 반면 차 안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퇴근 시간이 길어지고, 그에 따라 직장에서 교류의 시간이 줄어들었다.
또 다른 요인으로서 매스미디어의 격리 효과이다. 단체 놀이에서 개인 놀이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인간은 언제나 섹스와 폭력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간단한 리모트 컨트롤이나 마우스를 갖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살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끊임없이 읽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살인은 일반적인 현상이고, 자기도 살인당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미디어에 의해 전달되는 일종의 공포심은 사회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사람을 서로 격리시킨다.
이러한 개인적 선택의 거시적 효과는 전혀 예측되지 못한, 걱정스러운 사회적 자본의 저하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적 자본의 감소가 경제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은 아직 확실치 않지만 긍정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대붕괴의 원인들이 갖는 구조적 불가역적 특성을 고려할 때(즉, 아무도 이제 여성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사람들도 자동차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질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퍼트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안했다.
- 사회적 활동에 대한 개인의 실천(TV 덜 보기)
- 차세대의 신뢰 규범과 사회적 자본 구축을 위한 학교 프로그램 개발
- 직장을 가족 친화적으로 개혁
- 공공 교통수단 개선 및 도시 계획법 개정
- 시민의 선거 참여와 정치 참여 확대 노력
후쿠야마는 이것이 처음의 붕괴도 아닐뿐더러 인간이 처한 마지막 대붕괴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적 관점을 빌려서 그는 인간 사회 시스템은 적응에 매우 강하다고 말한다. 과거 사회적 자본의 붕괴는 다시 사회적 자본의 재규범화 과정과 재건 과정으로 이어져 왔다고 한다.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새로운 사회 질서와 규범이 형성되었다.
사회적 자본과 신뢰를 둘러싼 이슈는 경제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며 사실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러한 이슈들은 변화무쌍한 복잡 적응 시스템과 관련이 있다. 사회적 자본은 전통 경제학이라는 레이더에는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통 경제학 이론은 합리적인 개인의 이기적인 선택과 관련된 것이고 모든 개인이 자신을 위해 최적의 선택을 하는 한 그러한 선택이 사회적으로도 최족이기 때문이다. 복잡계 경제학은 이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사회의 복잡한 상호 작용으로 인하여 개인의 선의에 의한 선택도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후쿠야마의 이러한 진화론적 견해에 찬동하며, 적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믿지만, 진화 이론이 더 나은 사회 질서와 부를 달성할 수 있는 하나의 왕도를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진화 시스템은 붕괴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더 적극적인 접근 방법, 즉 개인의 행동, 학교, 정부, 민간 기구, 그리고 미디어 전체를 포함하는 적극적인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퍼트넘과 의견을 같이 한다.
사회적 자본을 둘러싼 이슈들은 전통적인 좌, 우파 논리로 간단히 분류될 수 없다. 한편, 협력이 경제적 번영의 핵심이라는 점은 좌파의 논리와 더 맞는 듯하고,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우파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좌파 쪽 사람들은 사회적 자본의 감소가 서구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된 문제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따라서 시장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자본의 감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옛날의 가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이웃에 대한 신뢰, 자원 봉사, 시민의 책무, 종교적인 참여, 강한 가족 관계 등 이 모두가 보수적 우파의 대표적인 가치이다. 이러한 주장이 약간의 공동체 의식, 약간의 전통 가치를 지지하는 중도적 입장으로 가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공동체 의식과 더 많은 전통 가치, 정부 지도력의 핵심적 역할 등 좌와 우, 양 쪽에서 동시에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불평등, 사회적 이동성, 그리고 빈곤의 문화
불평등은 끝없이 확산되어 왔지만, "과연 불평등은 도덕적으로 옳은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우파는, 사람들이 의사 결정을 할 자유를 가지며 시장은 경쟁적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과 경쟁적인 시장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는 도덕적으로 건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밀러가 말했듯이 시장이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 예를 들어 노동, 책임, 절약, 혁신, 위험 감수 등을 보상한다. 사람이 불운한 사람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질 수도 있고, 온정을 표할 수도 있지만 자원을 배분하는 데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은 없다. 시장이 경제를 조직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시장의 결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는 인간이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만든 사회적 기술의 산물이 곧 시장이라고 주장한다. 시장 경제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면, 시장이 만들어 낸 결과에 대해서 사회 구성원인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출생이라는 복권 제도, 특히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지적 능력,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부, 외모, 인종, 출생지 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요소들의 영향을 감안할 때 밀러가 말했듯이 "시장의 결과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양극단은 강한 상호주의의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대략 말하자면 한 사람이 부자가 되거나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 자신의 행위의 결과라면(우파의 주장) 사람들은 자기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운 혹은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요소에 의한 것이라면(좌파의 주장) 그러한 결과를 사람들은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결론은 좌도, 우도 완벽하게 옳지 않다.
사회적 이동의 결핍
우파의 주장이 맞으려면 높은 사회적 이동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끈질긴 근성, 결단력, 그리고 근면을 통하여 이 세계의 '난관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가난으로부터 일어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전반적인 사회적 이동성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높지 않다. 연구에 의하면 사회적 이동성이 아주 가난하거나 아주 부자인 계층에서는 특히 낮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이동성의 부재는 흑인의 경우에 더욱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걸 보면 좌파는 "아하!" 하고 환호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불공평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며 가난한 자와 소수 계층에게는 경제적 성취를 막는 장애가 존재한다는 증거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다. 이동성이 없는 이유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며,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양파 껍질을 까듯이 하나하나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다.
첫째,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준 돈의 영향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소득 간 상관관계의 약 12%. 둘째, 본성(선청성) 대 교육(후천성)에 관한 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12%는 유전자, 28%는 환경에 의해 설명된다.
다른 연구에 의하면 소득 상관관계의 5%만이 IQ에 의해서 설명되는데, 이는 유전자에 의해서 설명되는 12% 중 타고난 지능 외에 다른 유전적 특성, 예를 들어 성격 등의 요소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유전자가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연구는 교육, 인종 등 환경적 요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교육은 부모 자녀 간 소득 상관관계의 10%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다른 환경적인 요소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미스터리를 하나 갖게 되었다. 부모와 자녀의 소득 간에는 높은 상관관계가 있으며, 사실상 부는 대물림되고 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받는 유산, 즉 현금과 유전자는 그러한 상관관계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설명할 뿐이다. 한편 학교의 질이나 인종 차별 같은 환경적인 요소도 나머지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요소들이 전체 상관관계의 약 30%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방정식에서 빠진 부분이 바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행동과 앞의 두 절에서 논의한 바 있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믿고 있다.
빈곤의 문화
중요한 것은 자녀를 기르는 방식이 아니라 부모가 보여 주는 행동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부모의 행동이 자식의 행동에 아주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부모의 행동은 자녀의 미래 소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체로 유전적 요소들은 장래 소득을 예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행동의 또 다른 원천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전해 주는 문화적인 규범과 가치관이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물려받은 문화가 개인의 경제적인 성과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문화적 행동에 대한 미시적 규칙이 조직이나 사회의 경제적 성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그러한 요소들이 개인의 경제적 성과에도 똑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문화를 부모나 혹은 동료 네트워크, 그리고 사회 공동체로부터 물려받는다고 하는 사실은 사회적 이동성의 결핍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보여 주고 있다.
상위 소득 계층의 사람이 개인의 성취, 협력, 그리고 혁신을 장려하는 규범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규범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유전되고, 그런 자손들은 그러한 규범을 경제적 성공을 성취하는 데 사용할 뿐 아니라 다시 그들의 자손에게 물려줄 것이다. 저소득 계층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논리를 연장한다면 반사회적 문화 규범이 빈약한 사회적 자본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로 연결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역기능적 문화 속에서 자란 개인들은 그들의 친구, 이웃, 동료들로부터 수혜를 적게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협력을 위한 기회도 적을 것이고 지식의 교류도 적을 것이며, 위험을 분담할 기회도 적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 닮고자 하는 역할 모델도 적을 것이고, 젊은이에게 투자하고자 하는 멘토도 적을 것이다.
친사회적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은 전혀 반대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풍부한 사회적 자본 네트워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예컨대, 거기서는 역할 모델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자기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하며, 성공은 축하받고 어려움에 처하면 도움을 받는다.
롤스 지지자들의 논리와 정책
우파는 개인의 책임이 중요하며 긍정적인 행동이 긍정적인 결과로 연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옳다. 문화적 규범은 특정한 행동의 유전 가능성과 영속성을 설명해 줄 수 있으나 반사회적 행동을 도덕적으로 변명해 주지 못한다. 미국은 아직도 비교적 이동성이 높은 사회이다. 중산층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나 좌파도 옳은 점이 있다. 부와 천부의 재능, 그리고 인종과 같은 출생이라는 복권은 경제적인 성과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복권에 문화적인 요소를 더 추가하면 출생 복권론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개인은 그가 어떤 문화 속에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책적 관점에서 보면 좌파도 우파도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소득 재분배는 행동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방임주의 시장도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빈곤에 허덕이는 것을 볼 때 전적으로 옳다고만은 할 수 없다.
밀러는 이러한 이슈에 대한 좌파 및 우파적 논리를 이제 버리고 철학자 존 롤스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한다. "우리가 만약 출생 복권에서 무엇을 뽑았는지 알지 못했다면 우리가 어떤 체제를 원할 것인가?" 다시 말해 부유한 투자 은행 집안에 태어날 것인지, 아니면 마약 중독자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날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 시스템을 디자인한다고 해보자.
이러한 '사고 실험'에 대한 답으로서 기회의 균등과 사회 안전망을 결합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밀러는 주장한다. 첫째, 우리는 가능한 한 브롱크스로부터 탈출할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은행가의 집안에 태어날 운을 가졌다고 처벌해서도 안 된다. 초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부자가 되게 도와주는 것이지, 부자들을 경제적으로 응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브롱크스에 있는 학교가 은행가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처럼 질적으로 개선되도록 해야한다. 또한 인종주의와 같은 불공정한 장벽이 제거되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약자들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밀러는 롤스의 논리를 네 가지 구체적인 정책 제안으로 전환하였다. 첫째, 사람들이 민간 건강 보험에 들 수 있도록 세제 지원을 해줌으로써 모든 국민이 건강보험 혜택을 받도록 해주어야 한다. 둘째, 교사의 급여를 획기적으로 인상함으로써 공교육, 특히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의 질을 제고시켜야 한다. 셋째, 교육 예산 지출과 재산세를 분리시키고 전반적인 교육 투자를 늘리는 대신 바우처 시스템(등록금 대신 정부에서 발행한 공적 지불 증서를 제출하는 제도)을 통한 교육의 경쟁을 허용한다는 데 진보와 보수가 대합의를 이룸으로써 교육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넷째, 연방 정부는 저소득층을 위해 '최저 생활 임금'을 보장하여야 한다. GDP의 2%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밀러가 말하는 롤스의 도덕적 논리는 공정성에 대한 우리의 강한 상호주의 원칙에도 부합된다. 근면과 도덕적 청렴성은 이러한 제안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되겠지만 나태함은 보상받지 못할 것이며, 불운한자는 관대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문화를 바꾸고 공통의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
밀러의 제안은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보다 더 깊은 빈곤과 불평등의 문화적 기반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종과 문화 간에는 불변의 관계가 없지만 문화와 역사 간에는 그 관계가 긴밀하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한편 문화적 빈곤의 함정을 탈출하기 위한 열쇠로서 규범과 개인의 행동을 바꾸고자 노력할 수 있다. 긍정적인 메시지는 문화가 한두 세대 내에 바뀔 수 있고 또 바뀐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는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긍정적인 규범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도 경제적 진보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바뀔 수 있다.
빈곤의 문화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규범을 바꿔야 하지만 미국 문화와의 총체적인 동질화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광범위한 공통적 규범이 있을 때 모든 사회는 더 효율적으로 기능한다. 동질적인 사회에서는 신뢰가 높아지고 협력도 쉬워진다.
이러한 공통적 문화 규범에는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 정치 과정 참여의 중요성)와 경제적 성취(근면과 혁신에 대한 보상, 교육과 자기계발의 중요성 등)를 촉진하는 규범이 포함된다.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빈곤의 문화를 퇴치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의 공통적 규범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적 규범 아래에는 다문화 사회를 동태적으로 만드는 다양한 규범과 전통, 그리고 신념이 공존할 것이다.
그러나 공통의 규범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정치, 교육 체제, 그리고 미디어에 걸쳐 엄청난 과제이다. 미국은 그러한 공통의 규범을 만들어 내는 데 가장 성공한 나라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역사적으로 배제한 것을 제외하면 미국은 이민을 사회의 일원으로 융화시키고, 경제 성장과 기회를 창출하는 데 유례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준비한 문서들은 단순한 법률적 자료가 아니라 가치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러한 가치는 두 세기 동안 국가를 지탱하엿다. 그러나 대붕괴라는 사회적 격변 기간 동안 이 나라의 가정과 학교, 미디어 및 정치적인 조직에서 그러한 가치를 확산하고, 새롭게 하며, 강화하는 메커니즘이 그 기능을 잃고 말았다.
"중도 보수주의의 진실은 한 사회의 성공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가 아니라 문화라는 것이다. 중도 진보주의의 진실은 정치는 문화를 바꿀 수 있고, 정치로부터 문화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의 방향
복잡계 경제학은 인플레이션을 예측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앞서 본 대로 경기 변동의 역동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바탕으로 거시 경제 정책을 더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완벽하게 합리적인 사회라면 사람을 대량 해고하기보다 임금을 낮춰 경제의 하강 움직임을 흡수할 수 있을 텐데 왜 임금은 떨어지지 않는 현상은 바로 강한 상호주의에 바탕을 둔 행동, 다시 말해 피고용인들은 임금 삭감을 불공정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경제와 환경의 공진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경제학과 열역학을 다시 연계함과 동시에(모든 생산 과정은 환경 비용을 발생시키기 때문), 인간이 왜 이러한 지구적 차원의 문제에 대해 제때 대응하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수백만 사람 간의 상호 작용, 의사 결정, 강한 상호주의적 행동, 문화적 규범의 작동, 협력, 경쟁,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현상은 소용돌이가 만들어 내는 창발적 패턴만큼이나 실제적이다.
복잡계 경제학은 전혀 새로운 이론적 시각이며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차원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시장과 과학이라는 두 가지 제도가 경제적 진화의 기반을 제공한다고 주장하였다. 거기에 세 번째 요소를 가미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정책 아이디어의 진화 시스템이다. 민주주의가 인정하는 다양성과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비판을 위해 축배를 들자. 우리 사회에 가장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선택하고 확산하는 것은 민주적 절차의 진회적 역할에 달려 있다.
맺음말
우리의 사회적 기술이 물리적 기술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면 세계적 재앙의 위험성은 계속 커질 것이다. 우리는 진화 시스템에서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진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이며 진화의 알고리즘은 주어진 적합도 함수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사회란 "살아 있는 사람 간의 연대일 뿐 아니라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 간의 연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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