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의 글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적인 정치,경제 제도가 발전과 번영을 불러오고 지배계층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낳는다.
국가 실패의 뿌리에는 이런 유인을 말살하는 수탈적 제도가 있다.
엄청난 격차는 지리나 문화가 아니라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탈적 제도를 고집하는 것은 경제발전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포용적 제도가 불러올 창조적 파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는 부와 소득뿐만 아니라 정치권력도 재분배한다. 인민을 통제하기 어렵게 된다.
수탈적 체제의 지배자들은 인민의 힘을 키워줄 어떤 변화에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노예나 농노는 혁신에 애쓸 유인이 없었다. 혁신으로 늘어난 산출을 모두 빼앗아가는 수탈적 체제 때문이었다.
왕권이 약한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 일어나고 어느 한 집단의 권력 독점을 허옹하지 않는 다원적인 정치제도가 뿌리내렸다. 영국은 혁신과 투자의 유인을 제공하는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갔기 때문에 산업혁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신대륙의 황금과 수지맞는 교역의 기회를 왕가가 독점한 스페인은 결국 패권 경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저자들은 시장경제체제 자체가 반드시 포용적 제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공정한 경쟁의 장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시장을 지배하는 독과점기업이 혁신적인 경쟁자의 진입을 방해할 수 있다.
머리말
왜 이집트는 미국보다 가난할까?
이집트가 가난한 것은 소수 엘리트층이 대다수 인민을 희생시켜가며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사회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미국이 부유해진 것은 시민이 권력을 쥔 엘리트층을 무너뜨려 정치권력을 한층 고르게 분배했고, 시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과 의무가 강조되며 일반 대중이 경제적 기회를 균등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든 덕분이다.
영국이 이집트보다 잘사는 이유는 정치를 뒤바꾸고 내처 나라의 경제 환경마저 탈바꿈시킨 혁명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민이 투쟁을 통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획득했고, 그런 권리를 사용해 경제적 기회를 확대한 것이다.
1장 가깝지만 너무 다른 두 도시
신세계에서는 정착민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수두룩했다. 따라서 규제를 가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일할 의욕이 생기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했다.
머지않아 이들은 더 많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 의회는 구성원을 결정할 권리와 과세에 대한 권리 또한 가지고 있다 믿었다. 그러다 보니 잉글랜드 식민정부로서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미국이 민주주의 원칙을 옹호하고, 정치권력에 대한 제한 수단을 마련했으며, 그 권력을 사회에 골고루 분산시키는 헌법을 채택하고 강제한 반면 메깃코는 왜 그러지 못했는지 분명해진다.
미국이 독립한 이후 머지않아 멕시코도 독립하게 되지만 양국의 입헌 과정은 사뭇 달랐다.
특허로 돈을 버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은 스스로 사업을 벌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창업을 하려면 자본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또 돈을 대출받을 은행이 있어야 했다.
금융 중개업과 은행업의 발전
멕시코 은행 간에는 사실 경쟁이랄 게 없었다. 엘리트층과 이미 부를 축적한 이들에게만 대출을 해주었다.
실제로 미국 헌법이 시행된 직후인 18세기 후반에는 멕시코와 별반 다름없는 은행체제가 슬슬 시동을 걸었다. 정치인들은 국가가 독점하는 은행체제를 시도했다. 측근 및 후원자에게 독점권을 부여하고 그 대가로 독점에서 얻는 이윤을 나누어 갖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시민이 정치인을 견제하고, 자신의 직위를 남용해 축재하거나 측근에게 독점권을 챙겨주는 이들을 제거해버릴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점적 은행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미국에서는 정치적 권리가 워낙 광범위하게 분배되어 있어 누구나 동등하게 금융 서비스 및 대출을 활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라틴아메리카 디아스 역시 국제무역을 방해하는 식민지 시절의 제도적 잔재를 대거 척결하기 시작했으나 이는 자신과 측근이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엘리트층만 큰돈을 벌고 나머지는 배제되는 불공정한 모형에 가까웠다.
라틴아메리카는 이런 제도적 패턴 때문에 지속적인 권력 투쟁으로 경제는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고, 정치는 늘 불안했으며, 내전과 쿠데타가 빈번했다.
빌 게이츠도 궁극적으로 인센티브에 반응한 것이었다. 게이츠 등은 미국 경제제도 덕분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만한 독보적인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손쉽게 회사를 차릴 수 있었던 것도 경제제도 덕분이었다. 그런 제도 덕분에 사업자금을 조달하는 데도 무리가 없었다. 미국 노동시장은 유능한 인재를 공급해주었고 비교적 경쟁적인 시장 환경은 사세를 확장하고 제품을 널리 판매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기업가들은 애초부터 자신이 꿈꾸는 사업이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제도와 그 제도가 만들어놓은 법질서를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권이 침해될지 모른다는 걱정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안정과 계속성을 보장해준 것은 정치제도였다. 사회 특정 이익집단이 정부를 경제적 재앙으로 몰고 가지 못하도록 막아주었다.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라는 사실이다.
세계 불평등을 제거하고 가난한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그런 관성과 그 관성을 유발하는 힘 때문이다.
카를로스 슬림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다. 반면 빌 게이츠의 권력은 자신의 사유재산에 해당하는 회사나 개인자산에 관해서가 아니라면 이보다 극히 제한적이다.
2장 맞지 않는 이론들
가난한 나라는 무지나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 때문에 잘못된다.
오늘날 세계 불평등은 대체로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18세기 후반 태동한 것이다.
지리적 위치 가설
문화적 요인 가설
사람들이 서로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고 얼마나 협력할 수 있는지 등 다른 문화적 측면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는 대부분 제대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지 독립적인 원인이라 할 수 없다.
콩고가 탁월한 기술을 채택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그럴 만한 인센티브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립 이후에도 기존 식민지 시대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하고 엄격한 계층 분화가 이루어진 권위주의 정권이 속속 들어섰다. 그 바람에 경제적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정치, 경제적 제도는 거의 수립되지 못했다.
무지가설
시장경제란 모든 개인가 기업이 원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자유롭게 생산하고, 사고팔 수 있는 추상적인 환경이다.
디아스는 무지해서 엘리트층의 배만 불리고 나머지 서민은 희생시키는 경제제도를 선택했고, 미국 대통령은 지적수준이 높아 그 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가난한 나라가 잘못되는 이유는 무지해서나 문화적 요인 때문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의도적이라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정치를 외면해왔지만,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면 정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번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일부 기본적인 정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장 번영과 빈곤의 기원
경제성장에는 포용적 시장의 잠재력을 활용하고,
기술혁신을 장려하며, 인재 육성에 투자하고,
개인이 재능과 능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제도가 필요하다.
왜 그토록 많은 경제제도가 이런 간단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가.
사유재산이 없다는 것은 투자하거나 생산성을 높이기는 커녕 현상 유지를 해야 할 인센티브를 느끼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다.
경제제도가 포용적이라는 것은 사유재산이 확고히 보장되고, 법체제가 공평무사하게 시행되며, 누구나 교환 및 계약이 가능한 공평한 경쟁 환경을 보장하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또한 새로운 기업의 참여를 허용하고 개인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사유재산권 보장이다. 사유재산권을 가진 자만이 기꺼이 투자하고 생산성을 높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하는 족족 도둑맞거나 몰수당하거나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업가는 투자와 혁신을 도모할 인센티브는커녕 이랗고자 하는 인센티브조차 가지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사유 재산권은 사회 대다수 구성원에게 공평무사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바베이도스의 엘리트층은 꼼꼼히 규정된 확고한 재산권과 계약을 보장받았지만, 포용적 경제제도가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포용적 경제제도가 자리 잡으려면 엘리트층뿐 아니라 사회계층 전반에 공평하게 재산권과 경제적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확고한 사유 재산권, 법질서, 공공서비스, 계약 및 교환의 자유는 모두 정부에 의존한다.
법질서와 사유재산권, 계약을 강제 집행하고 때로 핵심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정부가 경제제도에 깊숙이 관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포용적인 경제제도는 정부가 필요할 뿐 아니라 정부를 이용한다는 뜻이다.
두 사회 모두 사회 구성원 대다수를 차지하던 민중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경제적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공정한 경쟁의 장이나 공평무사한 법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북한에서 법체제란 집권 공산당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민중을 차별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착취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한 계층의 소득과 부를 착취해 다른 계층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포용적인 시장을 만들어낸다. 포용적 시장에서는 자신의 재능에 가장 걸맞은 직업과 소명을 추구할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장을 통해 그럴 만한 기회를 잡게 된다.
포용적 시장은 단순히 자유시장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기술과 교육이라는 번영의 또 다른 두 원동력을 마련해준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에는 으레 기술적 진보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기술적 진보는 사람(노동력), 토지, 기존 자본(건물이나 기계 등)의 생산성을 높여준다.
기술적 진보는 사유재산을 장려하고, 계약을 집행하며,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고, 신기술을 도입해줄 새로운 기업의 참여를 부추기고 허용하는 경제적 제도가 있어야 이런 혁신의 과정이 전개될 수 있다.
기술혁신은 학교는 물론 집이나 직장에서 쌓는 교육, 업무 능력, 숙련도, 근로자의 노하우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더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게 된 것은 기술 발전으로 기계가 좋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로자도 뛰어난 노하우를 갖추게 된 덕분이다.
근로자의 교육과 기능 향상으로 과학적 지식이 쌓이고 그 토대 위에서 인류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마련해주는 경제제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미국에 사는 대부분 청소년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인재는 끊임없이 공급된다.
가난한 나라의 교육수준이 낮은 것은 부모가 아이를 교육하고 싶게 만드는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제제도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포용적 시장의 잠재력을 적극 활용하고, 기술 혁신을 장려하며, 인재 육성에 투자하고, 수많은 개인이 재능과 업무 능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치란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사회를 다스릴 규율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북한 공산당 엘리트층이나 식민지 시절 베베이도스의 사탕수수 농장주처럼 일부 개인이나 집단은 착취적 제도를 통해 더 큰 이익을 챙길 수 있다.
이런 게임의 결과를 결정하는 열쇠가 바로 그 사회의 정치제도라는 뜻이다. 정치에서 인센티브를 좌우하는 규칙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누가 권력을 쥐며 그 권력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역시 정치제도가 결정한다.
다원적인 정치제도는 한 개인이나 편협한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광범위한 연합이나 복수의 집단이 정치권력을 고루 나누어 갖는 형태를 말한다.
한국과 미국이 포용적 경제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다원적 정치제도뿐 아니라 중앙집권체제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
소말리아의 정치권력은 언뜻 다원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오래전부터 고루 분배되어 있었다.
한 부족의 힘은 다른 부족의 무력으로만 제약을 받는다. 이런 식의 권력 분배는 포용적 제도를 낳는 게 아니라 혼란만 불러일으킨다. 이런 혼란의 근본적인 이유는 소말리아에 정치의 중앙집중화 또는 중앙집권체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보니 최소한의 법질서도 강제하지 못해 경제활동이나 교역은 물론 심지어 시민의 기본적인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정치제도를 포용적 정치제도라고 부를 것이다.
착취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 간의 시너지 관계는 강력한 순환 고리를 만들어낸다. 착취적 정치제도 덕분에 정치권력을 쥔 엘리트층은 제약이나 반대 세력이 거의 없는 경제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또 향후 정치제도와 그 발전 방향도 멋대로 선택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착취적 경제제도 역시 동일한 엘리트층의 배를 불려주고, 그렇게 축적한 부와 권력으로 정치 지배력을 강화하는 순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착취적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는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꿋꿋이 살아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 기존 엘리트층이 신흥 세력의 도전을 받아 몰락하게 되더라도, 그 신흥 세력 역시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신흥 세력도 기존 정치제도를 유지하고 유사한 경제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
반면 포용적 경제제도는 포용적 정치제도가 닦아놓은 토대 위에 형성된다. 포용적 정치제도는 사회 전반에 고루 권력을 분배하고 자의적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구조다. 그런 정치제도하에서는 다른 세력이 권력을 찬탈해 포용적 제도의 기반을 훼손시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착취적 경제제도를 수립하기도 어렵다. 이어 포용적 경제제도는 더욱 공정하게 자원을 분배해 포용적 정치제도가 지속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준다.
결국 제도의 선택, 즉 제도의 정치가 국가의 성패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라는 것이다. 읿 사히의 정치는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포용적 제도로 이어진 반면 역사를 통틀어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대다수 사회의 정치가 경제성장의 숨통을 죄는 착취적 제도로 이어진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는 인센티브를 마련해주는 경제제도는 동시에 소득과 권력을 고루 분배하게 되고 착취를 일삼는 독재자 등 정치권력을 가진 엘리트층은 오히려 형편이 나빠지게 된다.
제도가 달라지면 한 국가의 번영에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번영의 결실이 어떻게 분배되고 누가 분배할 힘을 갖는지도 달라진다.
산업혁명은 기계화를 통해 총소득이 급격히 증가했고 궁극적으로 현대 산업사회의 토대가 되었지만 이에 극력 반대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다. 무지하거나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경제성장을 반대하는 이들은 안타깝지만 나름대로 일관적인 논리를 폈다.
경제성장과 기술 변화에는 '창조적 파괴'가 수반된다.
새로운 분야가 낡은 분야에서 자원을 빼앗아오고, 신생기업이 기성기업의 시장을 잠식하며, 신기술이 기존 업무 능력과 기계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 등이 바로 창조적 파괴의 예다.
포용적 제도는 정치 현장은 물론 경제시장에서도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 포용적 경제제도 및 정치제도를 반대하는 이면에는 창조적 파괴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창조적 파괴 논리에 맞게 산업과 공장, 도시가 확산되면서 토지로부터 자원을 빼앗아갔고 지대는 감소한 반면, 지주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던 임금은 껑충 뛰었다. 누가 보아도 산업화의 패자로 전락한 것이다. 도시화와 사회의식을 가진 중산층 및 노동계급의 등장은 토지를 장악한 귀족계급의 정치적 독점마저 위태롭게 했다.
경제는 물론 정치권력마저 위태로워지자 이들 엘리트층은 산업화를 완강하게 반대하곤 했다.
장인 역시 마찬가지로 산업의 확산에 저항했다.
잉글랜드에서는 러다이트 운동에도 불구하고 산업화가 착착 진행되었다. 귀족의 반대가 있긴 했지만 결국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군주와 귀족이 훨씬 잃을 게 많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러시아제국에서는 산업화가 봉쇄되었다. 그 결과 경제는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고 19세기 경제 성장이 탄력을 받았던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권력집단이 종종 경제 발전과 번영의 원동력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단순히 효율적인 기계를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을 더 잘 교육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창조적 파괴 효과가 고루 미치는 과도기적이고 불안정한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제적 특혜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는 경제적 패자와 정치권력이 침해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정치적 패자가 가로 막는다면 경제성장은 지속되기 어렵다.
희소한 자원, 소득과 권력을 둘러싼 갈등은 게임의 규칙인 경제제도를 둘러싼 갈등이나 다름없다. 경제활동은 물론 그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결정하는 것도 경제제도이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반드시 경제적 성공을 촉진할 만한 경제제도를 수립하라는 법은 없다는 논리는 이들의 정치제도 선택에도 어렵지 않게 적용할 수 있다.
이들이 다원적 제도를 도입하면 자신들의 정치권력만 희석되고, 원하는 대로 경제제도의 틀을 짜기도 어려워지거나 아예 불가능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제도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엘리트층이 한층 더 다원적인 제도를 수립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뿐이다.
중앙집권화의 가장 큰 장벽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반대 세력과 폭력적 대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중앙집권화를 꿈꾸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소말리아는 권력이 고루 분배되어 있다. 그 어떤 부족도 다른 부족을 제압하지 못한다. 이후 벌어질 참상이 두려워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소말리아의 중앙집권화는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역사를 돌이켜 봐도 착취적 제도하에서 경제가 번영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며 착취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는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낸다.
콩고가 이처럼 극도로 가난하고, 콩고 농민이 더 나은 기술을 접하고도 수용하길 꺼렸던 이유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국가의 경제제도가 착취적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더 잘살려면 콩고 사람은 저축과 투자를 해야 했다. 가령 쟁기를 샀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더 나은 기술을 사용해 쥐꼬리만큼의 잉여 생산분이라도 있었다면 왕과 엘리트층이 죄다 빼앗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성을 높이고 생산품을 시장에 대다 팔기보다 오히려 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마을을 옮겨버렸다. 도로에서도 가급적 멀리 떨어지려 애썼다. 수탈을 당할 빌미를 줄이고 노예 사냥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엘리트층은 이내 글을 읽게 되었지만, 왕은 일반 백성에게 글을 가르치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민중봉기의 위협 말고는 왕이 백성의 소유물이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경제제도를 개선하는 변화가 일어난다면 결국 왕과 귀족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콩코민주공화국이 여전히 궁핍한 이유는 아직도 시민이 사회 번영에 필요한 기본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제도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착취적 경제제도다.
이들은 국민의 사유재산을 보장하거나, 삶이 질을 높여줄 기본적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경제 발전을 장려할 아무런 인센티브를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오로지 국민의 소득을 착취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착취적 정치제도하의 성장
대다수의 권리가 무시되는 한편 농장을 경영하는 엘리트층의 재산과 자산은 철저한 보호를 받았다. 대다수 인구를 잔혹하게 수탈하는 착취적 경제제도에도 불구하고 카리브 해 섬들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부를 누렸다.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 어느 정도 포용적 경제제도의 발달을 허용하는 상황이 목격된다.
엘리트층의 입지가 워낙 확고해 자신들의 정치권력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면 어느 정도 포용적 경제제도를 수용할 수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이 급속도로 산업화한 것이 그런 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고 경제 또한 본질적으로 포용적이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아마도 그가 정권을 지탱하기 위해 반드시 착취적 경제제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례와 달리 한국은 1980년대 들어 착취적 정치제도 역시 포용적 정치제도로 변모한다.
요즘 중국의 경제성장도 소련이나 한국의 경험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적지 않다. 중국 경제성장의 초기 단계는 농업 부문의 급진적 시장 개혁이 주도했지만, 이후 공업 부문의 계혁은 한층 조용히 진행됐다. 심지어 요즘도 어떤 부문과 기업이 추가적인 자본을 수혈받아 성장 기회를 잡을지 결정하는 것은 주로 정부와 공산당이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고속 성장을 경험하고 있지만, 여전히 착취적 제도하에서 포용적 정치제도로 이양할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는 정부의 통제를 받아가며 이루어지는 성장이다.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 성장이 가능한 두 가지 경우 모두 중앙집권화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착취적 제도하에서 그런대로 성장이 가능하다 해도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며 창조적 파괴가 수반되는 본격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
소련은 잠시나마 미국을 앞서기도 했지만, 경제 전반적으로 기술적 변화는 거의 없었다. 창조적 파괴와 광범위한 기술혁신이 수반되지 않는 성장은 지속될수 없으므로 급제동이 걸리고 만 것이다.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는 그런 내부 분쟁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짙다.
정치제도가 착취적 성향에서 포용적 성향으로 바뀌지 않는 한 권력을 분배하고 행사할 능력은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훼손할 수 있다는 뜻이다.
4장 작은 차이와 결정적 분기점
결정적 분기점에서 전개되는 사건의 결과는 역사의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 당대의 힘의 균형은 물론 정치적 실현 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은 기존의 정치, 경제 제도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사적으로 미리 정해진 필연이 아니라 우발적인 것이다.
흑사병의 창궐로 삽시간에 잉글랜드 인구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재앙은 사회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봉건제도는 다수 소작농으로부터 극 소수 영주로 부가 흘러가는 극도로 착취적인 체제였다.
1351년 노동자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사실상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임금을 동결시키려는 의되였다.
흑사병의 여파로 시작된 제도와 임금의 격변을 막아보려던 잉글랜드 정부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노동력은 희소해졌고 사람들은 더 많은 자유를 요구했다.
충분한 힘을 얻게 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동유럽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더 많은 토지를 장악해 규모가 컸던 동유럽 영주는 사유지를 더 확대해나갔다. 노동자는 자유로워지기는커녕 그나마 있던 자유마저 침해당하는 꼴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한층 가혹한 착취제도가 자리 잡은 것이다.
동서유럽 간 제도적 차이는 언뜻 아주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포용적 제도의 형성
제도를 둘러싼 투쟁이 절정에 달한 16세기와 17세기 두 가지 획기적인 사건이 터졌다. 잉글랜드 내전과 명예혁명
명예혁명으로 왕과 가신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경제제도를 결정할 권한은 의회에 귀속되었다. 동시에 사회 각계각층이 폭넓게 참여하는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다. 사회 전반이 정부의 기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다원적 사회를 만드는 발판을 마련했고 더 나아가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예혁명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정부는 투자와 거래, 혁신을 꾀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제도를 채택했다. 아이디어에 대한 재산권인 특허권을 부여해 혁신을 추구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등 사유재산권도 단호하게 집행했다. 법질서도 수호했다. 자의적 과세는 중단되었고 독점은 거의 철폐되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상업 활동을 적극 장려했고 국내 산업 육성에 힘썼다. 이를 위해 산업 활동 확대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한편 잉글랜드 해군을 총동원해 상인의 상업 활동을 보호했다. 사유재산권을 완연히 합리화함으로써 잉글랜드 정부는 도로망, 운하에 이어 훗날 철도에 이르기까지 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사회 기간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토대 덕분에 사람들이 느끼는 인센티브가 완전히 바뀐 것은 물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 산업혁명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시장의 포용적 성격 덕분에 사람들은 적절한 사업 부문에 자신의 재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교육과 업무 능력도 한몫 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아진 덕분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일꾼을 찾아낼 만한 비전을 가진 사업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대한 발명가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창출해준 경제적 기회를 살릴 수 있었고, 사유재산권이 보장될 것이라 믿었으며, 자신의 혁신이 이윤을 남기며 팔리고 사용되는 시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시장 기회 덕분에 일할 의욕을 느꼈다.
잉글랜드가 포용적 정치제도를 발달시킨 것은 두 가지 요인 덕분이었다. 먼저, 중앙집권화를 비롯해 정치적 제도가 명예혁명의 결과로 포용적 제도라는 대단히 급진적이고 사실상 유례가 없는 단계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요인으로, 명예혁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미 군주와 귀족의 권한에 항구적인 제한을 가할 수 있는 광범위하고 막강한 연합세력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층은 어쩔 수 없이 이 연합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다원적 정치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이어 경제제도의 발달이 가능했으며, 종국에는 첫 번째 산업혁명에 불을 당긴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세계 불평등은 급격히 심화되었다.
에스파냐 왕실은 막대한 금과 은을 챙기고 있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사정은 달랐다. 넉넉지 못해 세금을 더 구두게 해달라고 의회에 사정하다시피 했다. 그 대가로 의회는 양보를 요구했다. 군주와 갈등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의회였다. 에스파냐는 유사한 분쟁에서 코르테스가 패하고 만다. 그 결과 무역은 독점당했고, 그 독점권을 수중에 넣은 것은 다름 아닌 에스퍄냐 왕실이었다.
잉글랜드, 에스파냐, 프랑스의 제도에 저마다 사뭇 다른 영향을 주었다. 바로 초기의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아메리카 대륙과 통상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유럽 군주들은 독점권을 휘둘렀다. 따라서 잉글랜드에서는 왕실과 연분이 거의 없으면서도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무역상인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잉글랜드 상인은 왕실의 통제에 반발해 정치제도의 변화와 왕실 특권의 제한을 요구했다.
17세기 잉글랜드와 프랑스, 에스파냐 사회가 사뭇 다른 길을 걸은 것만 보아도 결정적 분기점에서 발견되는 작은 제도적 차이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대체 이런 갈림길로 이어지는 작은 제도적 차이는 애초에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런 차이들이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차이가 쌓이다 보면 제도적 부동 과정이 시작된다.
1346년 서유럽 소작농은 동유럽보다 비교적 많은 권리와 자율성을 누렸다. 그 결과 흑사병은 서유럽에서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이어진 반면 동유럽에서는 재판농노제라는 상이한 결과를 낳았다.
1600년 잉글랜드 왕실의 힘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비해 약했기 때문에, 대서양을 통한 무역은 잉글랜드에 더 폭넓은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는 길을 열어주었지만,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왕실의 힘만 강화되었을 뿐이다.
당대의 힘의 균형을 결정하는 것은 기존의 정치, 경제 제도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사적으로 미리 정해진 필연아 아니라 우발적인 것이다.
대서양을 통한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왕실에 반대하는 상인이 큰돈을 거머쥐고 대담해진 덕분에 결정적 분기점이 만들어졌고, 정치혁명 세력의 승리와 그 분기점 간에는 분명한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에스파냐 무적함대는 일글랜드를 물리치고 대서양 해양 독점권을 굳힐 것이며, 더 나아가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시키고, 심지어 브리튼제도 전체를 손에 넣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잉글랜드 승리가 아니었다면 1688년 이후 결정적 분기점과 맞물려 잉글랜드에서 확연한 다원주의적 정치제도를 낳은 사건들은 아예 싹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나면 일대 정치혁명으로 이어질 결정적 분기점을 생성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본 이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과두제의 철칙 :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정당 등 대규모 조직은 원칙적으로 민주제를 지향한다 해도 수뇌부가 그 조직을 지배하려는 권력욕을 버리지 못해 실질적인 권한이 소수에 집중되는 과두제가 불가피하다는 이론
잉글랜드는 광활한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잉글랜드의 경제와 정치 제도까지 저절로 전파된 것은 아니었다. 잉글랜드는 다원적 정치제도를 갖춘 중앙집권국가였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포용적 제도가 발달했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착취적 제도가 고개를 들었다.
유럽 상인이 도착하자 콩고왕국에는 새로운 경제적 기회가 찾아왔다. 유럽을 변모시킨 장거리 무역은 콩고왕국 역시 탈바꿈시켰지만, 이번에도 제도적 차이가 문제였다. 콩고의 절대왕정은 애초부터 사회를 완전히 틀어쥐고 착취적 경제제도를 통해 시민의 모든 농업 생산물을 몰수하는 형태였다. 이제 한발 더 나아가 엘리트 지배층이 사용할 총과 사치품을 얻으려고 백성을 대거 노예로 전락시켜 포르투갈인에게 팔아넘기는 나라로 전락했다.
새로운 장거리 무역의 기회가 만들어준 결정적 분기점이 잉글랜드에서는 다원적 정치제도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콩고에서는 오히려 절대왕정이 무너질 희망의 불씨를 아예 파묻어버렸다. 노예무역이 심화되었고 사유재산권이 극도로 불안정해졌을 뿐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이 터지고 기존의 많은 제도가 붕괴되었다.
산업혁명이 아프리카에 확산되지 못한 것도 착취적인 정치, 경제 제도가 끈질기게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기나긴 악순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들이 뿌리 깊은 영향력 때문에 생기는 불가피한 결과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정치, 경제 제도의 역사가 악순환과 선순환을 만든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우발성 역시 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명왕조 황제들은 장거리 무역이 늘면서 창조적 파괴로 자신들의 정권이 위협받을 것으로 판단했다.
중국과 인도 등의 나라가 상공업적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면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은 서유럽이 대약진에 성공할 때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정치 혁명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정치혁명은 한층 포용적인 정치제도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더 포용적인 경제제도 역시 발달할 수 있었다.
착취적 제도하에서는 혁신과 창조적 파괴의 부재로 지속 가능한 성장에 한계가 있다.
오스만 제국의 개혁 세력은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도입하겠다고 말했지만, 정치적 통제와 조세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5장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포용적 제도가 가져다주는 성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차이점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기술적 변화를 필요로 하는 지속적인 성장이 아니라 기존 기술에 바탕을 둔 성장이라는 점이다. 착취적 제도하에서 정부가 권위와 인센티브를 내세우며 고속 경제성장을 주도할 수 있을지라도 이런 성장은 머지않아 제동이 걸리고 결국 무너지고 만다.
1931년 자서전에서 "소련은 점진적 계획을 갖춘 혁명정부였다. 그들의 계획은 가난과 부, 뇌물, 특혜, 압제, 전쟁 등의 패악을 직접 칼로 도려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원인을 찾아내 뿌리 뽑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잘 훈련된 소수 집단이 이끄는 독재정부를 수립해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경쟁력을 과학적으로 재편하고, 그 결과로 먼저 경제 민주주의를 세운 다음 나중에 정치 민주주의를 확립하겠다는 의도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방에는 소련에서 미래를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스탈린식 경제성장은 단순했다. 정부 통제하에서 공업을 발전시키고, 이에 필요한 자원은 높은 세율로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거두어 조달했다.
집단농장은 인간이 열심히 일하고 싶은 욕구를 완전히 빼앗았기 때문에 생산성은 곤두박질쳤다. 워낙 많은 생산물을 착취당해 먹을 것조차 모자랐다.
이런 빠른 경제성장은 기술적 변화로 가능했던 게 아니라 노동력을 재할당하고 새로운 도구와 공장을 만들어 자본을 축적한 덕분이었다.
완전 고용과 가격 안정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타적인 동기를 지닌 사람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엾은 구닥다리 서방 자본주의는 기껏해야 정치적 자유를 준다는 면에서 나아 보였을 뿐이다.
착취적 제도의 한계
경제적 인센티브가 결여되어 있고 엘리트층의 반발이 심하기 때문이다. 혁신의 결여와 부족한 경제적 인센티브로 더는 젅ㄴ이 불가능해졌고 소비에트 체제는 결국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스탈린은 정치적으로 충성하는 이들에게 보상을 해주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응징할 수 있는 자신의 재량을 극대화하길 바랐다. 고스팔란의 주 역할은 스탈린에게 피아를 구분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새롭게 도입된 시스테은 부작용을 낳아 인센티블ㄹ 오히려 약화시켰다. 가령 혁신을 추구하면 현재 생산수단에서 자원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목표 생산량 달성이 어려워져 상여금을 못 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생산량을 확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엄청난 인센티브만 만드는 꼴이었다. 결국 적당히 생산하는 것이 늘 목표를 달성하고 상여금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1940년대 들어 소련의 지도자들은 삐뚤어진 인센티브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윤 일부를 상여금 지급 목적으로 비축할 수 있게 허용하는 쪽으로 수정했다. 하지만 '이윤 동기' 역시 목표 생산량 기준처럼 혁신을 장려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윤을 계산하는 데 사용하는 가격 체계가 새로운 혁신이나 기술의 가치와는 거의 무관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와 달리 소련의 가격은 정부가 책정했으므로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강압적인 방법으로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에서 설탕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근대 산업경제에서 인센티브의 부재를 해소할 만한 해법은 되지 못했다.
소련의 지배층은 착취적 경제제도를 포기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1987년 이래 착취적 경제제도에서 벗어나자 공산당 권력이 흔들렸고 소련도 맥을 못 추기 시작했다.
카사이 강기슭의 두 부족
렐레 부족은 가난하지만 부숑 부족은 부유하다. 렐레 부족이 무언가를 가지거나 또 할 수 있다면, 부숑 부족은 더 많이 가지거나 더 잘할 수 있다.
렐레 부족은 생계를 위해 생산하는 데 반해 부숑 부족은 시장에서 교환하려고 생산을 한다는 것이 한 가지 차이점이다.
정착집단은 갈등 해소가 한층 어려워질 수 있다. 이동생활을 하면 불화가 생겨도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이 떠나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구 주거 건물을 짓고,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자산을 쌓아두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냥 떠나버릴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취락은 더 효과적인 갈등 해소 방법과 더 정교한 재산 개념이 필요했다.
온갖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고 규칙도 마련하고, 그 규칙을 집행할 제도를 만들어 다듬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혁신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제도적 혁신으로 권력을 쥔 정치 엘리트가 사유재산권을 집행하고, 질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나머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자원을 착취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나투프문화 유적은 농경으로 이양하기 이전에 이미 제도적 변화가 생겨났고, 정착생활로 옮아간 것도 이 때문일 가능성이 크며(정착생활은 제도적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더불어 뒤이은 신석기혁명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농경사회의 이양으로 직업의 전문성이 심화되고 기술이 급격히 진보한 데 이어 한층 복잡하지만, 한층 평등하지 못한 정치제도의 발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나투프의 초기 성장이 지속되지 못한 것은 소련의 성장이 흐지부지된 이유와 다르지 않다. 대단히 중요하고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착취적 제도하에서 이룬 성장이었다.
역사 속에서 착취적 제도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이면의 논리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이 극심한 제한을 받는 것은 창조적 파괴와 혁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제도를 통해 엘리트층은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으므로 다른 이들이 현재 엘리트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기를 들 강력한 인센티브가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내부 분쟁과 불안정은 착취적 제도에 반드시 수반되는 태생적 특성이며, 비효율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을 와해시키기 일쑤이며, 심하면 법과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려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6장 제도적 부동
역시는 제도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제도적 부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은 차이일지라도 결정적 분기점과 상호작용을 통해 역사의 큰 물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워낙 작아 반드시 단순한 축적 과정의 산물이라 할 수도 없다.
베네치아는 당시 움트고 있던 포용적인 정치 분위기를 기반으로 어느 곳보다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마련된 덕분에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베네치아의 경제가 확대될 수 있었던 토대 중 하나는 경제제도를 한층 포용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던 잇따른 계약 혁신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코멘다라는 초기 형태의 합자회사로 단 한 번의 무역 거래를 위해 수립되는 위탁계약이었다.
코멘다는 두 명의 파트너가 참여하는데 그중 하나는 머물러 있고 다른 한명은 무역하러 여행을 떠나야 했다. 자본 대부분을 투자하는 것은 으레 머물러 있는 파트너였다. 돈이 없는 젊은 사업가라면 상품을 위탁받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무역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이는 신분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주요 수단 중 하나였다.
코멘다가 신분 상승을 위한 엄청난 동력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런 경제적 포용성과 무역을 통한 신흥 가문의 등장으로 정치체제 역시 한층 개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포용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가 한데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베네치아의 경제 확장은 정치적 변화에 대한 압력을 한층 가중시켰다. 첫 번째 중요한 혁신은 대평의회의 창설이었다.
두 번째 혁신은 도제를 지명하기 위한 위원회의 창설이었으며 이 또한 대평의회가 제비뽑기를 통해 구성했다.
세 번째 혁신은 도제로 하여금 권력을 제한하는 내용의 취임 선서를 하게 한 것이다.
베네치아에 새로운 경제제도가 도입되면서 새로운 법인 사업체와 계약 유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금융 혁신도 급속도로 진행되어 이 무렵 베네치아는 근대적 은행 업무의 효시가 되었다.
신흥 부자들은 기존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에도 도전했다. 따라서 대평의회에 참여하는 기성 엘리트층은 늘 말썽만 생기지 않는다면 새로운 인물이 이 체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1286년 10월 3일, 엘리트 가문이 틀어쥐고 있던 40인 평의회에서 지명된 후보를 다수결로 승인하도록 규정을 수정하자는 안건이 제기되었다. 이 안건이 통과되면 예전과 달리 엘리트층이 대평의회 지명 후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베네치아 폐쇄의 전주곡이었다.
대평의회는 이제 사실상 외부인에게 문을 닫아걸었고 초기 의원은 세습귀족으로 변모했다.
정치적 '폐쇄'를 단행한 대평의회는 이내 경제적 폐쇄 정책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장거리 무역은 이제 귀족의 전유물이 되었다. 베네치아 번영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베네치아는 경제 대국에서 박물관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는 대체로 작은 제도적 차이의 결과였다.
포용적 제도가 후진할 수 있다는 것은 제도적 개선이 단순하게 축적 과정을 거쳐 차곡차곡 쌓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초기 로마의 경제적 성공은 포용적 제도에 기반을 두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의 제도도 확연히 착취적인 양상을 띠었다. 공화정 시절에도 로마는 감탄할 만한 수준의 제국을 건설했고 장거리 무역과 운송이 번성했지만, 로마 경제 대부분은 착취를 바탕으로 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양하면서 착취는 더 심해졌고 이내 마야 도시국가에서 목격했던 내분과 불안정, 몰락으로 이어졌다.
로마의 정치제도아 로마 시민 병사의 미덕이 로마 공화국 성공의 토대였다.
로마공화국의 제도는 꽤 폭넓게 권력을 분배하는 견제와 균형 체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보호를 받은 덕분에 로마 시민은 경제적 기회를 누렸고 경제제도 역시 그런대로 포용성을 띨 수 있었다.
하지만 포용적 성향과 착취적 성향이 병존하는 제도하에서 로마의 성장은 지속되기 어려웠다.
토지 분배는 대단히 불공평했고 기원전 2세기 들어 더 심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전리품은 원로원 계급의 소수 유력 가문이 독차지 했으므로 빈부격차는 한층 더 벌어졌다.
전쟁에 동원된 병사의 가족은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거나 아사 직전까지 내몰리곤 했다. 따라서 이들이 소유한 토지의 상당 부분은 점차 버려져 원로원 계층의 사유지로 흡수되었다.
그토록 짭잘한 체제를 바꾸고자 하는 귀족은 당연히 드물었다.
티베리우스는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토지 개혁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하던 또 다른 호민관을 몰아낼 수 있었고 마침내 그가 제안한 토지 개혁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자금줄을 틀어쥐어 위원회의 활동을 막았다.
원로원의 박해를 두려워한 티베리우스는 호민관 재선에 도전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빌미로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고 몰아붙였다. 결국 티베리우스는 물론 여러 추종자가 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공화정에서 원수정, 이내 노골적인 제정으로 이양하면서 로마 몰락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성공의 토대를 마련한 정치제도의 부분적 포용성이 점차 훼손된 것이다.
처음에는 정치적인 영향에 그쳤으나 나중에는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변화의 결과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고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예 민회를 없애버렸고 그 권한을 원로원에 이양했다. 정치적 목소리를 빼앗은 대신 로마 시민에게 밀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올리브유, 돼지고기까지 공짜로 나누어주었고 서커스와 검투사 대회 등 꾸준한 오락거리를 제공했다.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다 보니 로마 평민의 사유재산권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도망칠 위험이 있는 소작농을 사슬로 묶어놓을 권리를 지주에게 부여했고 기원후 365년부터는 소작농이 지주의 허락 없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할 수도 없었다.
혁신이 없어도 기존 기술에 의존해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은 가능했지만, 창조적 파괴가 수반되지 않는 성장에 불과했으며 또 오래가지도 못했다. 사유재산권이 갈수록 불안해지고 시민의 경제적 권리가 정치적 권리와 더불어 움츠러들면서 경제성장 역시 퇴보하고 말았다.
로마시대 신기술에 대해 놀라운 점은 기술의 개발과 확산을 정부가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정부가 기술 개발에 냉담해지면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면 으레 벌어지는 일이다.
언덕으로 기둥을 운반할 수 있는 기구를 개발했다며 황제를 찾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발명품 사용을 거부했다. "그럼 백성을 어떻게 먹여 살리란 말인가?"
이번에도 창조적 파괴의 위협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발명품도 거절했다. 경제적인 면이 아닌 정치적인 면에서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것이다.
기술혁신이 결여된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노예제도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이 일해야 할 필요성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정부가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물자로 먹고살면 그만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혁신이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혁신이란 새로운 인물이 기존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해야 가능한 일이다.
노예제도나 농노제도처럼 억압적인 노동환경에 기반을 둔 경제는 혁신과 거리가 멀기로 악명이 높다. 물론 노예를 소유하고 농노를 틀어쥔 계층은 노예제도와 농노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사회 전체를 위한 기술혁신이나 번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자유가 없는 강제노동(농노)에 의존하는 봉건제도는 노골적으로 착취적이었고 오랜 세월 중세시대 유럽이 저성장에 무무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흑사병 이후 힘의 균형이 바뀌자 서유럽에서 농노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노예가 전혀 없던 터라 한층 다원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봉건질서로 이어진 분권화된 정치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도 로마의 몰락 때문이었다. 이 과정의 부수 효과로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독립도시가 탄생한 바 있다. 이는 흑사병이 봉건사회를 뒤흔들고 있을 때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의 잿더미 속에서 더 강력한 도시가 부상했고 농민은 더 이상 땅에 예속되지 않아 봉건적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7장 전환점
산업혁명이 유독 잉글랜드에서 싹이 터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포용적인 경제제도 덕분이었다. 물론 이런 경제제도도 명예혁명이 가져다준 포용적 정치제도의 기반 위에 마련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경제적 필요성과 사회의 열망에 한층 더 민감한 개방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주었다.
"편물기계를 만들면 백성이 일거리를 모조리 빼앗기고 거지가 될 게 불을 보듯 뻔하지 않소"
양말 짜는 틀은 엄청난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만한 혁신이었지만 창조적 파괴 역시 불가피했던 것이다.
기술혁신은 인류사회에 번영을 가져다주지만, 옛것을 새것으로 갈아치우고 특정 계층의 경제적 특권과 정치권력을 파괴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업무 방식이 필요하고, 새로운 주역과 함께 등장한다.
이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창조적 파괴 과정에서 잃을 게 많은 세력은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혁신에 저항하고 막아보려 애쓰기 일쑤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제도와 자원 분배를 둘러싼 갈등은 늘 존재해왔다.
정치 갈등은 결국 엘리트층에 유리하게 해소되었고, 이들은 더 확고하게 권력을 틀어쥘 수 있었다.
하지만 늘 권력을 가진 자의 힘만 키워주는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마그나카르타(대헌장)은 과세하려면 국왕이 귀족의 자문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존 왕은 마그나카르타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귀족이 해산하자마자 교황에게 무효화를 부탁했다. 하지만 효력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잉글랜드는 마침내 다원주의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잉글랜드 의회는 두 가지 특징을 보이게 된다.
첫째, 의회는 왕과 가까운 엘리트층만이 아니라 다른 이해관계를 폭넓게 대변했다.
두 번째 특징은 상당수 의원이 힘을 키우려는 왕실의 노력에 한사코 반기를 들었다.
헨리 7세는 귀족을 무장 해제시켰다. 사실상 무력을 빼앗고 중앙정부의 힘을 대폭 확대한 것이다.
크롬웰은 기초적인 수준의 관료주의 정부를 도입했다. 독립된 제도로서 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교회의 무력화는 중앙집권정부 강화 노력의 일환이었다.
정부제도를 중앙에 집중함으로써 처음으로 포용적 정치제도가 가능해졌다. 헨리 7세와 헨리 8세가 주도한 이 과정은 정부제도를 중앙으로 집중시켰을 뿐 아니라 폭넓은 대의정치에 대한 요구가 한층 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치권력의 중앙집권화 과정은 사실 절대왕정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정치권력이 갈수록 중앙으로 쏠리고 그런 과정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귀족과 지방 엘리트층은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발언권을 요구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
따라서 튜더왕조의 정책은 포용적 제도의 한 축인 중앙집권화만 성공시킨 것이 아니다. 포용적 제도의 또 다른 축인 다원주의에도 간접적으로 이바지 한 것이다.
튜더왕조가 물려받아 유지한 정치,경제 제도는 분명 착취적 성향을 띄었다. 제임스는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길 바랐다. 한없이 이어진 독점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국외는 물론 브리튼제도 내의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누가 갖느냐였다. 독점권을 부여할 수 있는 왕실의 권한은 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신규 참여자의 진입을 막고 시장 기능을 저해하는 이런 착취적인 제도는 경제활동에 큰 해를 끼쳤다. 1623년 의회는 독점법을 통과 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찰스의 절대주의적 형태와 착취적 정책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전국적으로 반발과 저항이 거세졌다.
찰스와 의회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의회는 절대주의적 정치제도를 척결해주길 바랐지만, 왕은 오히려 이를 강화하길 원했다. 이런 갈등의 뿌리에는 경제 논리가 숨어 있었다. 왕실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던 이유는 짭짤한 독점권을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찰스의 처형과 왕정 폐지가 포용적 제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정이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정권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크롬웰이 죽자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월리엄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왕위를 요구했지만 절대군주가 아닌 의회가 마련한 입헌군주제하에서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명예혁명에서 승리한 이후 의회와 윌리엄은 새로운 헌법을 협의했다.
인권선언은 또 국왕이 법을 함부로 중단하거나 폐지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는 불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의회의 동의 없이는 잉글랜드에 상비군을 둘 수 없다고 규정했다.
1688년 이후 정부의 권위와 의사결정 권한은 의회에 있었다. 월리엄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이전 왕들이 누렸던 관행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버렸다.
이런 변화는 국왕에 대한 의회의 승리를 의미했다.
의회 귀족 중에는 무역과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확고한 사유재산권을 집행해야 할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다.
스튜어트왕조가 정부 지출을 통제했을 때만 해도 의회는 세금 인상에 반대하고 국가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에 늘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의회가 직접 지출을 통제하게 되자 기꺼이 세금을 올리고,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활동에는 무엇이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가장 많이 투자가 단행된 분야 중 하나가 해군력이었는데, 해외무역에 관여하는 상당수 의원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의회파의 이해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제도의 다원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잉글랜드 인민은 이제 의회는 물론 의회가 만든 정책과 경제제도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왕이 정책을 주도하던 시절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17세기 착취적 경제제도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이 독점이다.
홀트는 독점 특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정부뿐이며 이는 의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독점궈을 의회의 손에 쥐여준 것이다.
이제 의회가 나서서 독점을 처리해야 할 상황이었고, 청원서도 빗발쳤다.
힘겨루기가 계속되다가 1698년 마침내 왕립아프리카회사의 독점이 폐지되었다.
명예혁명이 잉글랜드의 정치제도를 한층 다원적으로 변화시켰으며 포용적 경제제도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의회는 튜더왕조가 불을 지핀 중앙집권화 과정을 지속해나갔다. 모든 편에서 정부의 기능과 역량이 확대되었다.
1688년 이전만 해도 의회가 정부에 자원을 몰아주고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반대한 것은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688년 이후에는 상황이 사뭇 달라졌다.
정부 기능의 질은 물론 정부를 통제하고 그 안에서 일하는 이들의 행태 역시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볼드윈은 "의회의 동의하에 사들인 권리를 의회의 동의 없이 빼앗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결국 새로운 법은 폐기되었고 볼드윈 가문의 권리도 보호를 받았다.
정치제도가 훨씬 더 다원주의적으로 변모했고 잉글랜드 내에서 비교적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운송혁명에 이어 더 넓게는 18세기 토지 재편까지 가능했던 것은 의회가 사유재산권의 성격을 뒤바꾸어놓은 법안을 잇따라 통과시킨 덕분이었다.
다원주의 정치제도의 도입은 이해관계가 다른 이 모든 집단이 투표는 물론 더 의미가 큰 청원을 통해 의회의 정책입안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맨체스터법은 "그레이트브리튼왕국 내에서 생산되었다면 어떤 염료로 날염하고 무늬를 넣었든 아마사나 원면으로 만들어진 어떤 품목도 의류, 가정용품, 가구 등에 사용하거나 착용하는 일을 금지할 목적으로 기존의 법을 확대하거나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맨체스터법은 신흥 면직물업자에게 의미가 큰 승리였다. 하지만 이 법의 역사적, 경제적 의미는 그보다 훨씬 크다. 첫째, 잉글랜드 의회의 다원주의적 정치제도가 허용할 수 있는 진입 장벽에 한계가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둘째, 다음 반세기 동안 면직물 업계의 기술혁신이 산업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공장제 생산 방법을 도입해 사회를 송두리째 바꾸어놓게 된다.
1688년 이후 국내에서는 공평한 경쟁 환경이 조성되었지만 해외에서만큼은 의회도 편파적인 입장을 취했다.
종합해보면 잉글랜드는 사유재산권을 새로 만들거나 개선했고, 사회 간접자본을 확충했으며, 재정정책을 바꾸었고, 금융시장을 확대했으며, 무역상과 수공업자를 적극 보호했다. 1706년에 이르자 이 모든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1705년 최초의 증기선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뱃사공들은 파팽의 배에 올라가 난동을 부렸고 증기기관을 산산조각 냈다. 파팽은 빈털터리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름 없는 묘지에 묻혔다.
제철 분야 헨리코트, 방적 부문에서 리처드 아크라이트아 제임스 하그리브스의 혁신.
잉글랜드의 직물산업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경제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창조적 파괴는 단순히 소득과 부만 재분배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권력 또한 재분배한다.
이미 정치와 경제 제도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터라 잉글랜드에서 장기적인 탄압은 해법이 될 수 없었다.
1846년에는 그토록 증오하던 곡물법을 철폐시켜 창조적 파괴가 단순히 소득만이 아닌 정치권력마저 재분배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당연히 정치권력의 재분배는 시간이 흐르면서 소득의 재분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이 이어질 수 었었던 것은 잉그랜드의 제도가 포용적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거나 실제로 그로부터 타격을 입는 이들도 더 이상 막아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왜 하필 잉글랜드였을까?
산업혁명이 유독 잉글랜드에서 싹이 터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독보적이라 할 만큼 포용적인 경제제도 덕분이었다. 물론 포용적인 경제제도는 명예혁명이 가져다준 포용적인 경제제도 덕분이었다. 물론 포용적인 경제제도는 명예혁명이 가져다준 포용적 정치제도의 기반 위에 마련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사유재산권을 합리적으로 강화하고, 금융시장을 개선했으며, 해외무역에서 정부가 허용한 독점을 와해시키고 산업 확장을 가로막는 진입 장벽을 제거해주었다. 경제적 필요성과 사회의 열망에 한층 더 민감한 개방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준 것도 명예혁명이였다.
명예혁명은 헌정 질서와 다원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권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에서는 결정적 분기점과 상호작용을 통해 제도적 부동 과정이 전개되며 여러 정치, 경제적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반드시 불가피하게 포용적 제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포용적 제도가 태동하려면 그 과정에서 한층 더 중요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다 해서 진정한 다원주의 정권이 반드시 들어서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런 정권의 태동은 부분적으로 역사의 우발적 경로를 따른 결과였다.
다원주의 및 포용적 제도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사적 우발성과 광범위한 연합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8장 발달을 가로막는 장벽
중앙집권정부의 부재 또는 미약한 중앙집권화는 절대주의 체제만큼이나 산업화의 확산을 저해한다. 이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해서 비롯되는 현상인 데다 중앙집권화 과정이 흔히 절대주의 체제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발명 덕분에 문맹률이 급격히 줄고 대중교육이 널리 확대될 수 있었다.
우리가 금속활자는 먼저 만들었지만 사회 혁신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왜일까? 바로 국가 주도의 혁신과 개인 이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혁신의 차이로 보인다. 인센티브 부재의 차이가 결과론적인 거대한 차이가 된듯 하다.
인쇄술에 대한 저항은 문맹률, 교육, 경제적 성공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1800년도에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오스만제국 시민은 고작 2~3%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도로 절대주의적이고 착취적인 오스만제국의 제도를 고려하면 인쇄술에 대한 술탄의 적대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은 사고를 전파시키고 그만큼 백성을 통제하기 어렵게 한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종교 집단이 두려워한 것은 인쇄술이 초래할 창조적 파괴였다. 이들의 해법은 인쇄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오스만제국과 중국등 여러 절대주의 정권은 산업의 확산을 아예 막거나 장려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나라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절대주의 체제가 산업화를 방해한 유일한 정치제도는 아니었다. 절대주의 정권이 다원적이지 않고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앙집권호된 정부가 많았으며, 적어도 인쇄술 같은 혁신에 금지령을 내릴 수 있을 정도의 중앙집권화를 이룬 정부들이었다.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고 사유재산권을 집행할 만한 중앙집권정부가 없다면 포용적 제도가 싹틀 수 없다.
절대주의 체제만큼이나 산업화의 확산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중앙집권정부의 부재 또는 미약한 중앙집권화다.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해서 비롯되는 현상인 데다 중앙집권화 과정이 흔히 절대주의 체제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화를 꺼리는 이유는 포용적 제도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 집권세력이 중앙집권정부와 그 정부를 통제하는 세력에 의해 정치권력을 박탈당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정치권력의 상실을 막기 위해 정치제도를 수립할 때 다양한 지역 엘리트층이 더 크 발언권과 대표성을 요구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더 강력한 의회가 만들어졌고 궁극적으로 포용적 정치제도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과정이 더 극심한 절대주의 체제를 불러오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는 사례가 많다.
표트르대제는 중앙집권화에 성공하고 반대 세력도 물리쳤지만,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해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이내 승기를 잡고 그 결과 중앙집권정부가 들어서지 못해, 종류만 다를 뿐 착취적 정치제도가 지속된 사례가 수두룩하다.
이것이 수많은 나라가 산업 발전의 기회를 놓치고 만 이유.
17세기 들어 잉글랜드에서는 절대왕정이 무너졌지만, 에스파냐에서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에스파냐는 절대주의 정치체제가 확립된 이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경제력이 기우는가 싶더니 1600년 이후에는 완연한 하락 추세로 접어들었다.
첫 번째 행보는 유대인 토지 몰수였다. 사유재산권이 불안정한 결과.
잉글랜드는 후발주자였지만 무역과 식민지 관련 사업에 비교적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신흥 상인계급도 수혜를 입었다. 이 상인 계층이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정치연합의 보루 역할을 하였다.
에스파냐는 무역을 워낙 편협하게 독점한터라 식민지와 무역 기회를 통해 광범위한 상인 계층이 부상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극심한 규제에 시달렸다.
정치제도가 잉글랜드와는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에서는 절대왕정 붕괴가 다원적 정치제도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더 효율적인 중앙집권정부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에스파냐 왕실은 기업가의 사유재산권을 안정시키는 데 실패하고 무역을 독점했을 뿐 아니라 관직과 세금징수권을 매매해 세습시키기 일쑤였고, 한술 더 떠 면책특권까지 사고팔았다.
잉글랜드에서는 비교적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만들어져 전례 없는 경제성장을 구가하며 산업혁명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에스파냐 경제는 왕실과 지주 엘리트층이 산업화를 막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사유재산권이 불안정하고 어딜가나 경제가 바닥을 기는 처지여서 근본적으로 경제성장에 필요한 투자나 희생을 감수할 만한 인센티브를 느끼지 못했다.
프란츠 1세의 기본 전략은 어떤 변화에도 반대하는 것이었다. "짐이 원하는 것은 박식한 학자가 아니라 선량하고 정직한 시민이다."
요제프 2세는 강력한 중앙집권정부와 더 효율적인 행정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애쓴 주역들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동에는 실질적인 제한이 가해질 수 없는 정치체제를 만들고자 했으며 다원주의적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군주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견제할 수 있는 전국 차원의 의회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권력은 극소수 인물에 편중되어 있었다.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갈수록 경제제도가 착취적인 성향을 띠었듯이 신성로마제국 역시 동쪽으로 갈수록 봉건질서가 두드러졌다. 노동계급 간 이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일반 대중이 모두 자립해 잘사는 걸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통치할 수 있겠는가?"
도시 경제를 주도한 길드는 신규 참여자의 진입을 차단했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혁신을 이루거나 신기술을 채택하려는 개인의 인센티브를 꺾는 데 그치지 않았다.
프란츠 황제가 산업화와 증기기관차 철도에 반대한 것은 근대 경제 발달에 수반되는 창조적 파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체제를 유지해주던 착취적 제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기존 엘리트층의 이권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대출을 받으려는 지주는 농노를 담보, 즉 '안전장치'로 내걸어야 했기 때문에 봉건 지주만이 그런 대출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니콜라이는 경제 근대화가 초래할 사회 변화를 두려워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주인의 끊임없는 감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면직과 방적 역시 법으로 금지, 철도에 대한 반대도 이어졌다.
그는 사회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유동성이 초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철도는 늘 자연스러운 필요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필요성과 사치의 대상인 경우가 더 많다. 요즘 으레 그렇듯이 이곳저곳으로 불필요한 여행만 부추길 따름이다."
중국에서는 상인의 지위 역시 늘 불안했고, 송왕조의 위대한 발명품들이 탄생한 것도 시장의 인센티브가 아닌 정부의 장려 또는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상용화된 발명품도 거의 없었다.
홍무제는 조공 사절을 이용해 상업적 이윤을 챙기려 했다는 이유로 수백 명을 참수하기도 했다.
불안을 초래한다고 간주되는 경제활동에 수도 없이 제동을 건 착취적 빙산의 일각일 뿐이지만 이런 사건들은 중국 경제 발전의 뿌리를 흔들어놓았다.
명,청왕조가 해외무역을 반대한 이유도 쉽사리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역시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지도층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적 안정이었다.
송왕조는 기술혁신을 후원하고 한층 더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장려했지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명,청왕조 시절에도 분명 시장과 무역이 존재했고 국내 경제활동에 대한 세금도 꽤 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혁신을 장려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정치 안정을 위해 상업 및 산업적 번영의 기회를 희생한 꼴이었다. 경제를 절대주의적 정부가 틀어쥐고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자명하다.
이런 절대주의 체제하에서 황제의 정치 전략에 따라 사유재산권은 극도로 불안했다.
왕으로서는 백성이 그만큼 자신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뜻이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다.
포용적 경제제도의 등장을 방해한 것은 절대주의 체제만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최소한의 법과 질서를 유지할 만한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 수두룩했다.
소말리아 사회에는 정치권력이 언뜻 다원주의적으로 비칠 정도로 폭넓게 분배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유재산권은 고사하고 질서 유지를 강제할 중앙집권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권력 분산이 포용적 제도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앙집권정부의 결여로 소말리아는 산업혁명으로부터 어떤 수혜도 입지 못했다.
경제제도가 그런 신기술을 채택하고자 하는 인센티브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이유다.
전통적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문자가 만들어진 연원은 정보를 기록하고 백성을 통제하며 세금을 거두기 위해 정부가 직접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그에 따라 기본적 사유재산권마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말리아는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에 투자할 만한 인센티브를 단 한번도 창출해내지 못한 것이다.
시민의 신기술 투자를 허용하고 그럴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했던 나라는 획기적으로 성장했다.
9장 발전의 퇴보
그전까지만 해도 향신료는 오스만제국이 통제하고 있던 서아시아 무역로를 거처야 살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는 작업에 착수 했다. 믈라카 시장을 장악했다. 물라카는 전략적 요충지인 말레시아 반도 서부에 자리 잡고 있던 시장으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온 상인이 향신료를 팔았고, 인도, 중국, 아랍 등지의 상인은 사들인 향신료를 서방으로 실어 날랐다.
유럽의 절대주의처럼 동남아시아 역시 이런 체제하에서 그런대로 경제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번영을 위한 이상적인 경제제도 구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만큼 진입 장벽도 높았고 무엇보다 사유재산권이 불안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잉글랜드 동인도회사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유럽의 합자회사다. 두 회사는 근대 기업 발달의 이정표였을 뿐 아니라 훗날 유럽의 산업 성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내친김에 반다제도 역시 손에 놓으려 들었다. 하지만 반다제도는 암봇과는 사뭇 다른 그조로 되어 있었다. 독점조약 조인을 강요할 중앙당국도 없었고 메이스와 육두구의 공급을 완전히 장악할 만한 공물체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안으로 대학살을 마무리한 쿤은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정치, 경제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아닌 대농장 사회였다.
네덜란드 식민정책은 이들의 정치, 경제적 발달 방향을 근원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동남아시아인들은 교역을 중단하고 내부로 움츠러들었으며 한층 더 절대주의적으로 변모했다.
유럽의 팽창정책은 세계 도처에서 기존 착취적 제도를 강요하고, 더 나아가 한층 더 강화하면서 해당 지역에 저개발의 씨앗을 뿌렸다. 그 결과 유럽 식민제국 지배 아래 있던 지역은 이런 신기술로부터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두 가지 부정적인 정치 과정을 촉발했다. 첫째, 초반에는 한층 더 절대주의적으로 변모하는 정권이 많았다. 오로지 남들을 노예로 전락시켜 유럽인에 팔아넘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전쟁과 노예무역은 그나마 유지되던 질서와 정통성 있는 정부당국을 파괴해버렸다. 노예를 만들기 위해 법까지 동원하는 지경이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는 노예무역을 폐지하자는 강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는 이미 노예제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정권이 수두룩했고 영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했다고 해서 이런 현실이 바뀔 리 없었다. 내부에서는 노예제도가 한층 더 만연해 졌다.
무역에서 노예의 자리를 메운 것은 이른바 '합법적 상업활동이었다.
유럽인에게 팔지 못한 노예는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해답은 간단했다. 합법적 상업활동으로 거래되는 새로운 품목을 생산하도록 아프리카에서 강압적으로 일을 시켜 이윤을 남기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예무역의 철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제도를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노예의 재배치로 이어졌을 뿐이다.
노예무역에 기반을 둔 착취적 정치, 경제 제도 때문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던 세계의 여타 지역과 달리 경제가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다.
남아프리카 백인 엘리트층이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고 흑인의 경쟁을 저지하기 위해 고의로 만드렁낸 이중 경제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저개발 사례이다.
농업 경제가 발전하면서 엄격한 부족제도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토지에 대한 소유권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토지를 소유하려는 원주민의 욕구가 날로 강해지고 있다."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은 추장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새로운 인물이 토지를 사고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착취적 제도와 절대주의 통제체제가 약화되면 매우 빨리 경제가 몰라보게 활성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땅을 산다고? 어떻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모든 땅이 신의 것이고 오로지 추장에게만 땅을 준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러니?"
유례가 없는 경제적 활력을 전통적인 추장이 당연히 달가워했을 리 없다. 지금까지 사례만 보아도 이미 우리 모두 익숙해진 패턴이지만,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침해할 만한 위협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추장은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면 촌장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눈치였다.
추장은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도랑을 파거나 울타리를 쌓는 등 토지를 개간하는 것조차 반대했다. 이런 개선이 토지에 대한 개인 사유재산권의 서곡이며, 곧 자신들에게는 종말의 시작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포용적 제도가 도입된 데 이어 추장의 권력과 제약이 잠식당하는 것만으로도 역동적인 아프리카 경제 호황을 촉발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이것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아프리카 원주민과 경쟁하던 유럽 농민의 반목이었다. 성공한 아프리카 농민은 유럽인도 생산하던 작물의 가격을 끌어내렸다. 유럽인의 해법은 아프리카 농민을 시장에서 쫓아내는 것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값싼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으려면 아프리카인을 궁핍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인 농민과 경쟁하는 원주민 농민을 쫓아내고 저임금 노동력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게 해준 것은 '원주민 토지법'이었다.
소수백인이 정치뿐 아니라 경제적 권리까지 독차지하고 다수 흑인은 철저히 괄시하는 남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발판을 마련한것도 원주민 토지법이었다.
이중 경제는 자연 발생적인 것도, 불가피한 필연도 아닌 유럽 식민 지배 정책의 산물이었다. 유럽인이 장악한 광산이나 토지에 값싸고 무지한 아프리카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 정책의 소산이다.
정부가 의도했던 대로 원주민은 백인 경제권에서 생계유지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게 된 것이다. 경제적 인센티브가 바닥이 나자 이전 50년간 이루었던 성과 역시 모조리 원점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경제적 인센티브만 무너진 게 아니었다 이제 막 움트는가 싶던 정치적 변화 역시 뒷걸음질 쳤다. 추장 등 전통적 지배층의 권력이 다시 강화되었다. 값싼 노동력을 창출하려고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을 제거한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오늘날 세계 불평등이 존재하는 이유는 19세기와 20세기, 산업혁명과 그에 수반된 신기술 및 조직화 방법을 적극 활용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나라도 있기 때문이다. 기술 변화는 번영을 위한 여러 가지 동력의 하나일 뿐이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다. 신기술을 활용하지 못한 나라는 번영의 여타 동력 역시 활용하지 못했다.
이런 실패의 원인은 착취적 제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절대주의 정권이 지속된 결과이거나 중앙집권정부가 결여된 탓이다.
10장 번영의 확산
죄수에게 경제적 자유를
호주는 자유 정착민은 드물었고 죄수가 다수였다.
죄수는 '의무 근로'를 해야 했는데 사실상 강제노역이나 다름없었고 간수는 이를 통해 돈을 벌려고 했다. 처음에는 죄수에게 임금도 주지 않았다. 노동의 대가로 얻는 것이라고는 식량뿐이었다. 이런 체제가 원할하게 돌아갈 리 없었다. 죄수가 열심히 일하거나 더 잘해보려는 인센티브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질이나 추방으로도 효과가 없자 대안이라고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군인인 간수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죄수는 죄수일 뿐, 노동력을 팔거나 재산을 가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뉴사우스웨일스에는 이들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일으킬 만큼 충분한 수의 원주민이 살지 않았다. 호주에서는 라틴아메리카 방식이 통할 리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간수들은 궁극적으로 영국에서보다 한층 더 포용적인 제도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했다.
죄수가 경제적 자유를 얻자 간수도 이득을 보긴 마찬가지였다.
엘리트층은 한층 더 포용적인 경제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수가 유일한 노동력이었고 이들에게 일할 의욕을 불어넣으려면 일한 만큼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맥아더와 무단점거자들도 언젠가 독립을 선언할지 모른다고 염려하면서도 영국정부는 이번에도 엘리트층의 편을 들었다.
영국정부에서 존 비그를 파견했다. 그는 급진적인 개혁을 제안했다. 죄수는 땅을 가질 수 없고, 누구도 죄수에게 임금을 지급할 수 없으며, 사면을 제한하고, 출소자에게는 토지를 주어서는 안 되며, 처벌을 한층 더 엄격하게 강화하자는 내용이었다.
비그는 시간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출소자와 그 아들, 딸들은 더 많은 권리를 부르짖었다. 이들은 정치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선거는 물론 자신들도 직책을 얻을 수 있는 대의제도 및 의회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3세기 동안 절대왕정 치하에 있었다.
18세기 프랑스 도시의 삶은 고되고 불결했다. 수공업은 막강한 길드의 규제를 받았다. 길드는 일원에게는 두둑한 수입을 보장했지만, 외부인의 진입이나 창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농민이 땅에 예속되어 영주를 위해 일하거나 소작을 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농노제는 이 무렵 프랑스에서 내리막길로 들어선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이동성에 제약이 심했고 프랑스 농민이 군주와 귀족, 교회에 바쳐야 할 봉건적 의무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런 배경에서 프랑스혁명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봉건제도 및 그와 관련된 의무와 세금을 단숨에 혁파했고, 사제와 귀족이 누리던 면세 혜택 역시 모조리 철폐해버렸다.
따라서 이제 일상생활과 경제생활은 물론, 정치에서도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특별세를 부과할 수 있는 교회당국의 특권도 철폐했고 사제는 국가에 고용된 공직자로 전락시켰다. 개혁의 칼날은 엄격한 정치, 사회적 신분을 베어버림과 동시에 경제활동을 방해하던 가장 큰 암초 역시 부숴버렸다. 길드 등 직업적인 걸림돌이 모조리 척결되어 도시에서는 한층 더 공정한 경쟁 환경이 조성되었다.
혁명이후 수십 년 동안 불안정한 세월이 계속되었고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주의 체제와 착취적 제도에서 벗어나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로 향하려는 행보는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런 변화는 경제와 정치 분야의 다른 계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은 인접한 영국이 급속도로 산업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774년 루이 16세 집권 무렵 영국을 상대로 계속된 7년 전쟁에서 프랑스는 캐나다를 잃는 등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789년 국민제헌의회는 봉건제도는 물론 제1신분과 제2신분의 특권을 철폐하는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 행보는 제헌의회의 분열을 초래했다. 그만큼 이견 충돌이 많았다. 맨 먼저 주목할 것은 지역 파벌의 형성이었다. 국왕에게 의회를 무시하고 행동에 나서라고 부추기는 귀족도 많았다.
해외 열강의 힘을 빌려서라도 상황을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리의 시민 중에서도 혁명적 성과가 위협받는 지경이라는 위기감을 느끼는 이들이 늘면서 사태는 한층 더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
1791년 국민제헌의회는 최종적으로 헌법을 통과시켜 프랑스를 입헌군주국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만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봉건적 의무와 세금을 철폐 했으며, 길드가 강요하던 상거래 제약 역시 전면 폐지했다.
1799년 이후 통령정부는 머지않아 나폴레옹 독주체제로 변모했다.
프랑스혁명군은 곧장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에 급진적인 개혁을 도입했다. 농노제 및 봉건 토지 관계의 잔재를 혁파하고 법 앞에 만인의 평등사상을 시행한 것이다.
종합해보면 프랑스군이 유럽 대륙에 큰 고통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이들이 유럽의 형세를 획기적으로 뒤바꿔놓은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봉건질서가 자취를 감추었고 길드가 무너졌으며 군주와 제후의 절대권력 역시 송두리째 흔들렸고 경제, 사회, 정치 등 모든 면에서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교회마저 맥을 못 추게 되었다.
이런 변화 덕분에 해당 지역에서 훗날 산업화가 뿌리내릴 수 있게 해준 포용적 경제제도가 수립되었다.
아시아 및 유럽과 통상을 확대하고 구시대적 봉건 경제제도를 철폐해 일본에 근대 국가를 수립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치, 경제 제도를 완전히 뜯어고치자는 것이었다.
11장 선순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포용적 정치제도가 포용적 경제제도를 뒷받침해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포용적 정치제도 덕분에 포용적 경제제도가 마련되면 소득이 더 공평하게 분배되고 힘을 얻는 사회계층이 한층 더 넓어지며 정치면에서도 더 공평한 경쟁의 장이 펼쳐지게 된다.
명예혁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의회의 다원주의적 성격이었다.
명예혁명의 구심점이었던 휘그당은 권력을 잡고나자 새로 얻은 지위를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는 것은 물론 남의 권리까지 침탈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스튜어트왕조와 다를 게 없었지만 분명 절대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권력은 그만큼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법치주의의 탄생
주민이 사슴 절도를 방조하고 블랙들을 사주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유죄판결은 떼어놓은 당상인 듯 보였지만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다. 배심원단은 무죄 평결을 내렸다. 증거 수집 방식에 부정이 있었다는 절차상의 문제도 한 가지 이유였다.
더 이상 성실법원이 스튜어트왕조의 구미에 맞게 노골적으로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며 왕이 재판관을 쫓아내기 일쑤던 17세기가 아니었다. 이제는 휘그당 역시, 법이 선택적으로나 자의적으로 적용되어선 안 되며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법치주의를 따라야 했다.
이 같은 사건들은 명예혁명이 법치주의를 탄생시켰고, 잉글랜드는 이에 대한 의식이 어디보다 더 강했으며, 그에 따라 엘리트층은 자신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제약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법치는 법에 의한 통치와 다르다.
명예혁명 및 혁명이 가져다준 정치제도의 변화는 신성한 왕권과 엘리트층의 특권을 무너뜨렸다.
법치주의는 다원주의 정치제도 및 그러한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광범위한 연합 세력의 산물이다. 많은 개인과 무리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권력을 가질 때만이 비로소 그들 모두가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이치에 맞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럼 왜 휘그파와 의원들은 그런 제약을 순순히 따랐던 것일까? 그들은 왜 의회와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을 이용해 블랙법을 강행하고, 원하는 판결이 나오지 않으면 법관을 갈아 치우지 않았을까? 그 해답은 명예혁명의 본질에 있다. 명예혁명은 왜 낡은 절대주의 체제를 새로운 절대주의 체제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았을까? 다원주의와 법치주의 간에 분명한 연결 고리가 있고 선순환이 되풀이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명예혁명은 한 엘리트 집단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젠트리와 상이, 수공업자는 물론 휘그파와 토리당 파벌까지 가세한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절대왕정에 반기를 들고 일으킨 혁명이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왕실의 특권이.. 재차 밀물처럼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을 덮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본질적으로 자기 계층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포용적 제도가 시간이 흘러도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긍정적 피드백 고리가 만들어져 그런 제도를 훼손하려는 시도를 물리치는 것은 물론 한층 더 포용적인 성향을 띠도록 힘을 보태는 강력한 과정을 가리킨다. 포용적 제도가 보전되려면 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하고 법치주의의 근본이념에 따라 사회의 정치권력이 다원주의적으로 분산되어 있어야 한다. 선순환 논리는 포용적 제도의 이런 전제조건에도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사회의 일부 계층이 아무런 제약 없이 타인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할 수 있게 되면, 평범한 시민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균형은 위협받게 된다. 이해관계가 같은 소수가 광범위한 연합세력을 밀어낼 수도 어쩌면 다원주의 기반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체제는 이런 모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다원주의 및 이에 함축된 법치주의가 두고두고 영국 정치제도의 특징이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또 일단 다원주의와 법치주의가 확립되고 나면 다원주의를 더 크게 확대하고 정치 과정 참여 기회도 더 늘려달라는 요구가 커지기 마련이다.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이유가 다원주의의 근원적인 논리와 법치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포용적 정치제도가 포용적 경제제도를 뒷받침해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용적 정치제도 덕분에 포용적 경제제도가 마련되면 소득이 더 공평하게 분배되고 힘을 얻는 사회계층이 한층 더 넓어지며 정치면에서도 더 공평한 경쟁의 장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권력을 찬탈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이 낮아지고, 착취적 정치제도를 재창출할 동기 역시 약화시킨다. 바로 이러한 요인들이 영국에서 진정한 민주적 정치제도가 출현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다원주의는 또한 더 개방된 체제를 만들어 독립언론이 번성할 수 있게 해준다.
잉글랜드 정부가 1688년 이후 언론 검열을 중단했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다. 미국에서도 언론은 국민 전반에 힘을 실어주고 제도 발전의 선순환 고리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순환이 포용적 제도가 지속되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경향이 필연적이거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체제를 더 개방해야 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탄압도 불사하려던 영국의 정치 엘리트는 막판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 역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의 포용적 제도가 살아남아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내실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선순환뿐 아니라 역사의 우발적인 흐름 때문이기도 했다.
블랙법에 대한 대응을 계기로 일반 영국민은 자신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청원과 로비를 통해 법원과 의회에서 자신들의 전통적인 권리와 경제적 이해를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다원주의로는 아직 효율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었다. 기존 민주주의 구조에는 불평등 요소도 수두룩했다.(여성 투표권 등)
포용적인 요소들이 도입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18세기 영국 엘리트층이 심각한 도전 없이 정치권력을 유지할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졌다. 이 엘리트층은 왕의 신성한 권리에 도전하고 민중이 정치에 참여할 길을 터줌으로써 권력을 얻었지만, 이후에는 그 권리를 소수의 손에 쥐여주었다. 참정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9세기 들어 초반 30여 년 동안 영국에서는 사회불안이 고조되었다. 경제적 불평등 심화와 선거권이 없는 대중의 참정권 요구가 주된 원인이었다.
폭발 일보 직전의 상황과 사회불안을 해소하고 혁명을 잠재울 유일한 방법은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고 의회 개혁을 수행하는 것뿐이라는 합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휘그당은 이제 평민의 바람을 훨씬 더 귀담아들었고 투표권을 확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휘그당이 개혁을 추진한 이유는 광범위한 투표권 부여가 더 당연하다고 믿거나 권력 분점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대중이 힘을 키워 쟁취한 것이었다. 대중은 명예혁명으로 정치제도의성격 자체가 바뀌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엘리트층이 개혁을 허락한 것은 비록 다소 약화된 형태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통치가 계속되려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참정권 확대 요구가 거세지며 사회불안이 커졌고, 이에 따라 추가 개혁이 뒤따랐다.
영국 엘리트층은 왜 대중의 요구에 무릎을 꿇었을까? 개혁만이 체제 유지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을까? 개혁 없이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카리브해와 인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냥 힘으로 이런 요구를 묵살해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선순환에서 얻을 수 있다.
무력을 사용해 이런 요구를 억압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갈수록 현실성도 떨어지는 대안이었다.
결국 영국 엘리트층은 법치주의라는 공든 탑을 허물고 싶지 않았다.
민중의 요구를 억압하고 포용적 정치제도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이런 소득 또한 파괴하게 될 것이고 민주화 및 포용성 확대를 반대하는 엘리트층은 그런 파괴 과정 속에서 부를 잃고 몰락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긍정적인 피드백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가 정착되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권력에 매달릴 이유가 그만큼 적었다.
선순환의 논리는 그런 억압적인 행보가 갈수록 비현실적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역시 포용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 간의 긍정적 순환 고리 덕분이다. 포용적 경제제도하에서는 자원이 더 공평하게 배분된다. 따라서 일반 시민의 권한이 커지고 더 공평한 경쟁환경이 조성된다. 권력을 쥐기 위한 경쟁이라 해도 다를 게 없다. 이렇게 되면 탄압하기보다 차라리 비위를 맞춰주는 편이 낫게 된다.
비밀투표는 매표행위와 특정후보를 강요하던 공개투표의 관행에 종지부를 찍자는 것이었다.
비밀투표가 도입되었고 이른바 '향응제공'과 같은 부패선거 관행을 근절하려는 조치가 취해졌다.
1918년 여성이 보통선거권을 갖게된 조치들은 전쟁 중에 협상한 것으로 병력과 무기 생산 노동력이 필요했던 정부와 노동계급 사이에 이루어진 주고받기식 대타협이 반영되어 있다. 물론 정부가 급진적인 러시아 혁명에 뜨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우발적 사건)
일반인도 시험을 통해 공무원이 될 수 있는 능력 본위의 공직자 제도가 도입
과세 체제는 누진적인 성향이 한층 더 짙어져 고소득층의 세금 부담이 더 커졌고
1891년 무상교육이 시행, 의무교육으로 확대
선순환으로 발전된 포용적 제도들
영국은 포용적 제도의 선순환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점진적 선순환'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한층 더 포용적인 정치제도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정치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는 힘을 얻은 대중의 목소리가 커진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갑작스레 일어난게 아니라 점진적이었다.
매번 내디딜 때마다 갈등이 있었고 그 결과는 우발적이었다. 하지만 선순환은 권력에 매달려 얻게 되는 이익을 감소시킬 만한 요인을 만들어냈다. 또한, 법치주의를 공고히 해 대중을 힘으로 탄압하기 한층 어려워졌다.
이런 요소로 갈등이 전면적인 혁명으로 비화할 가능성은 많이 줄어든 대신 포용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커졌다.
점진적 변화는 또한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무리수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러시아 제국 처럼 폭력적이고 잔혹하며 사악한 일당독재 사회에서 점진적 개혁이 어렸웠던 이유는 다원주의가 결여되어 있고 고도로 착취적이었기 때문이다. 영국ㅇ서 점진적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명예혁명에서 싹튼 다원주의와 그와 함께 도입된 법치주의 덕분이었다.
미국의 포용적 제도는 식민지 시절 벌어진 투쟁에서 기인한다. 이런 제도는 견제와 균형, 권력분립 이념이 녹아 있는 미국 헌법으로 한층 더 강화되었다. 헌법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포용적 제도의 발달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들 제도는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순환이 되풀이되는 긍정적 순환 과정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미국또한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북부는 고속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철도, 공업, 상업이 확대되면서 소수가 막대한 부를 쌓았다. 경제적인 성공에 눈이 먼 졸부와 이들이 운영하는 기업은 갈수록 파렴치해졌다. 이들은 무자비한 횡포로 독점을 강화하고 경쟁자의 시장 진입이나 공평한 사업 조건을 철저히 차단했다.
이들은 경쟁자를 발 빠르게 제거하고 석유 및 석유 제품의 운송과 유통을 독점하려 했다. 거대한 독점사업을 영위하는 이들을 트러스트라 불렀다.
이 시기에 들어 경쟁은 독점에 자리를 빼앗겼고 빈부격차가 급격히 심화되었다.
다원주의적 미국 정치체제는 이미 광범위한 사회계층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고, 그런 식의 침해를 내버려둘 리 없었다.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운동은 특히 독점규제에서 국가의 역할과 관련해 정치적 태도, 나아가 법률제정에까지 서서히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지금도 미국 반독점규제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셔먼 반트러스트법이 제정되었다.
트러스트라고 알려진 대기업이 국민의 복지를 훼손시키는 특징과 경향이 있다는 확신 미국인들은 가지고 있었다.
이런 확신은 경제활동의 집중과 자본의 결합이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합리적인 감독과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각오라면 정계에서 폭력적 범죄를 뿌리 뽑아야 하듯이 업계에서도 교활한 범죄를 척결해야 합니다."
나는 독점이 알아서 자제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미국 정부를 소유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소유하려들 것이다.
금융 트러스트를 조사한 결과 독점이 금융산업에까지 확산되었음이 분명해지자 윌슨은 금융계에까지 규제의 칼을 들이댔다. 1913년 금융 부문의 독점 행위를 규제할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만들어진 계기였다.
이런 요소는 시장이 있다고 해서 포용적 제도가 보장되지는 않는다느 사실을 증명해준다. 시장이 소수 기업에 지배당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기고 더 효율적인 경쟁자와 신기술의 진입을 막아버릴 수 있다. 시장을 그냥 내버려두면 포용적 색채를 잃고 갈수록 정치,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개인과 기업의 손에 휘둘릴 수 있다.
포용적 경제제도가 뿌리내리려면 단순히 시장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공평한 경쟁 환경과 대다수 참여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조성해주는 포용적 시장이 필요하다.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횡횅하는 독점은 이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지만 독점 트러스트에 대한 대응은 또한, 정치제도가 포용적이라면 포용적 시장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에 대항해 이를 상쇄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포용적 정치제도 -> 포용적 경제제도 -> 포용적 시장
선순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포용적 정치제도가 꽃필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며,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억제한다.
멕시코에는 카를로스 슬림의 독점을 제한할 정치기구가 없는 반면, 미국에서는 시장의 포용성을 지키기 위해 셔먼법과 클레이턴법이 수시로 동원되어 왔다.
20세기 전반 미국의 경험은 선순환을 일으키는 자유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한지도 증명해준다.
강도귀족(트러스트)은 머크레이커에 이를 갈았지만, 미국의 정치제도 때문에 이들을 짓밟거나 입을 틀어막지 못했다. 포용적 정치제도하에서는 자유언론이 번성하고, 자유언론은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에 대한 위협을 널리 알려 저항의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착취적 제도, 절대주의 체제, 독재정권에서는 그런 자유가 불가능하다. 착취적 정권은 애초에 그런 제도와 체제를 이용해 반대 세력이 심각한 위협이 되기 전에 짓밟아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가 없었다면 미국 대중은 강도귀족이 실제로 어느 정도 권력을 휘두르며 힘을 남용하고 있는지 끝내 깨닫지 못해 트러스트에 대항하는 운동이 불타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루스벨트에게 주어진 사명은 대공황을 극복할 야심 찬 정책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상하 양원에서 다수당의 위치를 굳히고 있어 뉴딜법안 통과는 떼어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법안의 일부 내용에 위헌 소지가 제기되어 루스벨트의 사명을 크게 신경 쓸 리 없는 대법원이 딴죽을 걸게 된다.
뉴딜정책의 큰 줄기 중 하나는 전국산업부흥법이었다. 이 법은 2부로 나뉘어 있었는데 제1부는 산업 부흥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업계의 경쟁을 제한하고, 노동자에게 더 큰 노조 결성 권한을 부여하며, 근로기준을 규제하는 것이 산업 부흥에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 제2부에 따라 공공사업청이 신설 해상 고속도로 등 기념비적인 인프라 사업을 주관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이 법의 제1부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해서 초헌법적 권력을 창출하거나 확대할 수 없다.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 전, 루스벨트는 내처 사회보장법에 서명해 퇴직연금, 실업수당, 부양 아동이 있는 가족에 대한 부조, 부분적인 건강보험 및 장애 수당 등 미국에 근대 복지국가 이념을 도입했다. 전국노동관계법도 제정해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고용주를 상대로 한 파업권을 한층 더 강화해주었다.
국민의 지지가 하늘을 찌르는 상황에서 루스벨트는 대법원이 자신의 정책 현안에 차질을 빚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 네 명의 법관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사적 계약의 권리가, 지속 가능한 국가를 확립하기 위한 헌법의 근본이념보다 훨씬 더 신성하다는 판결을 내린 것과 같습니다."
루스벨트는 능숙하게 이 조치에 대한 국민의 호응을 얻기 위해 애썼지만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지지도는 40퍼센트가량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법관 개혁과 관련된 요소는 모조리 삭제되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권력을 옥죄는 대법원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게 된 것이다. 대통령 권한에 대한 제약은 변함이 없었지만, 타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법원이 사회보장법과 전국노동관계법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두 법안의 운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일화에서 배워야 할 전반적인 교훈이다.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에서 벗어나려는 큰 움직임을 견제할 뿐 아니라 정치제도 자체의 지속성을 훼손하는 시도 역시 제동을 건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상,하원 역시 대통령이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면 정부체제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져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할지 모르며 다원적 정치제도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로 두었으면 루스벨트는 입법부에서 과반수를 확보하려면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하고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고 판단해, 대통령령에 의한 통치를 시도하며 다원주의 및 미국 정치체제의 토대 자체를 흔들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루스벨트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조치를 의회가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하며 대국민 호소에 나섰을 수도 있다. 내처 경찰력을 동원해 의사당을 봉쇄했을지도 모른다.
억측이라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페루와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후지모리 대통령과 차베스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를 빌미로 말을 듣지 않는 의회를 폐쇄한 것은 물론 헌법까지 뜯어고쳐 대통령의 손에 막대한 권력을 몰아주었다.
다원주의적 정치제도하에서 권력을 공유하는 이들이 그런 파행이 거듭되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에 영국의 월폴도 법원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이며, 미 의회가 루스벨트의 법원 개혁안에 반기를 든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루스벨트에 제동을 건 것은 다름 아닌 선순환의 힘이었다.
아르헨티나 페론은 사실상 독재자로 군림하게 된다. 페론이 내키는 대로 대법원을 물갈이하고 나자 아르헨티나에서는 신임 대통령이 대법관을 직접 발탁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나마 행정부의 권력에 제재를 가하던 정치제도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1990년, 아르헨티나는 마침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 간에 권력 이양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대법원에 관한 한 민주정부라고 해서 군사정권과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선순환이 아닌 악순환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경제성장 및 정치 변화를 거부하는 엘리트층과 기존 엘리트층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제한하려는 계층 간의 첨예한 갈등의 산물인 때가 많다. 포용적 제도는 잉글랜드의 명예혁명이나 북아메리카의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 등 여러 가지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 집권 엘리트층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반대 세력에 힘을 실어주며, 다원주의적 사회 건립을 향한 인센티브가 만들어지면서 태동하는 것이다.
선순환은 여러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 첫째, 다원주의 정치제도의 논리는 독재자, 정부 내 파벌, 심지어 선의의 대통령이라 해도 권력 찬탈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는 대법원의 굴레를 벗어던지려 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블랙법을 곧장 시행하려 했던 로버트 월폴 경이 깨달은 바였다. 한 개인이나 소수 무리에 권력을 몰아주면 다원주의적 정치제도의 기반을 훼손할 위험이 따르며 다원주의의 진정한 잣대는 그런 시도를 얼마나 잘 제압하느냐에 달려 있다.
또 다원주의에는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법치주의 이념이 깃들어 있는데 당연히 절대왕정하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법치주의는 한무리가 단순히 다른 무리의 권리를 침해할 목적으로 법을 악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포용적 정치제도와 포용적 경제제도는 서로 의지하며 확대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미국에서 강도귀족의 경제 독점이 심화되어 포용적 경제제도의 본질이 훼손될 위험에 처했을 때도 자유언론의 활약이 대단했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12장 악순환
악순환은 착취적 정치제도에서 비롯된다.
스티븐스 또한 자신의 정치권력이 도전받는 것을 걱정했고, 그런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경제성장을 기꺼이 희생했다.
시장위원회는 농민이 아닌 자신들이 가격 변동성을 흡수한다며 이런 상황을 정당화했다. 세계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위원회는 시에라리온 농민에게 세계 시가보다 낮은 가격을 쳐주었고, 반대로 세계 시가가 낮으면 농민에게 높은 가격을 쳐준다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그럴듯해 보였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머지않아 조금 덜 준다는 건 훨씬 덜 준다는 의미가 되었다. 식민 정부는 농민으로부터 엄청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수단으로 시장기구를 이용한 것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대한 악랄한 식민통치 관행이 독립 이후 중단될 것이며, 시장기구를 이용해 농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매기는 관행도 막을 내릴 것이라 기대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둘 다 말 그대로 기대에 불과했다. 오히려 시장기구를 이용한 농민 착취는 한층 더 심해졌다.
이런 점만 봐도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농업 생산성이 왜 그토록 낮은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장기구의 가격 정책으로 농민이 투자하거나 비료를 사용하거나 비료를 사용하거나 땅을 기름지게 유지할 인센티브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시장기구의 정책이 농민에게 이토록 불리한 이유는 이들에게 정치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기구의 가격 정책만큼이나 토지 사용권을 불안하게 하는 다른 근본적인 요인도 농민의 투자 의욕을 갉아먹긴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동일한 왕가 출신이어서 추장과 줄이 닿아 있지 않은 한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토지는 매매하거나 대출을 위한 담보로 사용될 수 없었고 추장령 밖에서 태어난 사람은 '사실상' 사유재산권 확보라 할지 모를 커피, 코코아, 야자수 등 다년생 작물을 재배하지 못했다.
호주에는 황금 광산 지역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싶은 이들이 많았다. 결국 포용적 모형이 승리했고 독점을 수립하는 대신 호주 당국은 연간 채굴 면허세를 내는 누구라도 황금을 캘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시에라리온 독립 이후에도 식민통치 시절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이다. 식민통치 시절보다 세율이 더 가혹했다.
악순환이 거듭되는 데는 당연한 이유가 있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로 이어져 다수를 희생시키면서 소수의 배만 불려준다. 따라서 착취적 제도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사병과 용병을 킹고, 판사를 매수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를 충분한 자원을 가지게 된다. 또한 체제를 수호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다. 따라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가 꾸준히 살아남을 토대를 다져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드르며 경제적 부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무리 사회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제약을 받지 않고 대통령의 권한을 사용하기를 바랐을 때, 포용적 미국 정치제도는 권력에 대한 견제 수단을 벗어던지려는 그의 시도를 묵과하지 않았다.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는 아무리 왜곡되고 반사회적이라 해도 집행에 대한 견제 수단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국가 권력을 찬탈하고 악용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방어기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착취적 정치제도는 악순환을 만들어낼 소지가 크다.
악순환의 또 다른 메커니즘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창출하고 막대한 소득 불균형을 조장해 권력 투쟁의 전리품을 그만큼 키운다는 사실이다. 내분 가능성이 한층 더 커진다.
정치제도를 바꾸거나, 권력 집행에 대한 견제 수단을 도입하거나, 다원주의를 창출하려는 투쟁이 아니라, 권력을 쟁취해 나머지 다수를 희생시키더라도 소수의 배만 불리려는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국가의 실패를 조장한 것이다.
악순환 때문에 착취적 제도가 유지되고 동일한 엘리트 계층이 권력을 유지하며 그에 따라 저개발 상태도 유지되는 것이다.
정복자 및 원주민 엘리트층의 후예는 식민통치 시절 착취적 경제제도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원래부터 크게 득을 보고 있던 착취적 경제제도를 당연하게 유지했던 것뿐이다. 독립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콘술라도는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고 국익은 안중에도 없었다. 창조적 파괴 과정을 체제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협으로 여겼다. 따라서 사회간접자본이 개발되기는커녕 오히려 거부되기 일쑤였다.
이처럼 엘리트층이 독차지한 결과 나머지 세계가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콰테말라는 여전히 19세기에 갇혀 있는 시대착오적 현상이 지속되었다.
1871년 오랜 세월 독재를 자행하던 카레라 정권이 마침내 당시 시류를 따라 자칭 자유주의자라 부르짖는 무리의 손에 전복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주의의 의미는 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미국과 유럽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자유지상주의라 부르는 것에 가까워서 개인의 자유와 작은 정부, 자유무역을 상징했다.
콰테말라 자유당은 대개 자유주의적 사상을 지닌 새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이들은 착취적 제도를 고수하며 커피를 착취할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경제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민영화된 땅은 토지 강탈이나 다름 없었고 전통적인 엘리트나 그 측근에게 경매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자유당 정권은 강압적 권력을 이용해 다양한 강제노역 수단을 채택했고 대지주는 손쉽게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부역에 해당하는 레파르티미엔토는 독립 이후에 단 한 번도 철폐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대상이 확대되고 기간도 늘었다.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레파르티미엔토나 도로 건설 등 다른 형태의 강제노역에 동원되거나 지정 농장에 고용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 정보자는 거리낌 없이 착취적 정치, 경제 제도를 수립했다.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신세계를 찾은 이유였기 때문이다.
남북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미국 남부의 제도 역시 착취적 색채가 강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착취적 정치, 경제 제도 때문에 남부는 북부와 비교해 대단히 초라한 형편이었다. 난부는 산업이랄 게 없었고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남북전쟁 이후 강압적으로 근본적인 정치, 경제적 개혁이 이어져 노예제도가 철폐되고 흑인에게 참정권도 부여되었다.
이런 획기적인 변화는 남부의 착취적인 제도가 포용적으로 바뀌는 급진적 전이 과정으로 이어져 남부 역시 경제 번영의 길로 들어섰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악순환의 효과라 할 수 있다. 남부의 착취적 제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노예제도가 아닌 흑인차별정책의 형태로 나타났다.
"의회가 노예제도를 전면 철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수구 귀족 세력의 농업 기반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전쟁이 끝나자 토지를 장악하고 있던 엘리트 농장주는 재차 노동력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노예라는 경제제도는 철페되었지만 값싼 노동력을 사용한 농장 위주의 남부 농업 경제체제가 유지되었다는 증거가 분명하게 남아 있다.
남부는 소수 농장주 엘리트층이 정치 권력을 틀어쥐는 민주당 일당독재체제가 구축되었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남부 정치인 역시 남부의 착취적 제도가 유지될 수 있도록 애를 썼다.
그 결과 남부는 20세기를 맞아서도 대체로 낮은 교육수준과 낙후된 기술에 의지하는 농촌 경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이런 제도가 사라지고 나서야 남부가 북부에 빠르게 융합될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는 극도로 착취적인 제도를 관장하여 온 나라를 자신의 사유재산인 양 다스렸다. 입안의 혀처럼 구는 자에게는 특혜와 후원을 아끼지 않고 불충은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솔로몬왕조하에서는 에티오피아에서 딱히 경제 발전이랄 게 없었다.
독립 이후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몰아낸 식민정권 및 황제가 지내던 거처에서 살며 동일한 인적 후원 관계를 활용했고, 시장을 조작하고 자원을 착취하는 방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종전보다 한 술 더 떴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군인이었던 멩기스투는 호사스런 궁전 생활을 하며 자신을 황제로 여겼고, 하일ㄹ 세랄시에와 그전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과 측근의 배만 불렸다. 이 모든 것이 마르크스가 지적한 역사적 희극이 아니고 무엇이랴.
악순환의 이런 면모에서 과두제의 철칙을 정의할 만한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급진적인 변화를 약속하며 기존의 지도자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새로운 지도자라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면에서는 과두제의 철칙이 악순환의 다른 형태보다 한층 더 이해하기 어렵다.
급진적 변화가 모조리 실패할 운명인 것은 아니다.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 한결 포용적인 정치제도가 태동했는데, 세 가지 요인이 크게 이바지했다. 첫째, 신흥 상인 및 사업가 계층은 자신들에게도 이로운 창조적 파괴의 효과가 파급되길 바랐다. 둘째,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 모두 광범위한 연합이 손을 잡았다. 셋째 요인은 잉글랜드 및 프랑스의 정치제도 역사와 맞물려 있다. 양국 모두 의회와 권력 분점의 전통이 있었다.
명예혁명이든 프랑스혁명이든 이런 정치제도 덕분에 새로운 지배층 또는 소수 집단이 정부를 장악하고 기존 경제 기반을 무너뜨려 지속 가능한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을 수립하기 어렸웠다.
아프리카의 다른 식민지들은 어떤 사회에서도 새로운 정권을 지지하고 사유재산권 안정 및 기존 착취적 제도의 종식을 요구할 만한 신흥 상인, 사업가, 기업인이 등장하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식민통치를 벗어나 독립을 이루면 아프리카도 국가 계획 과정과 민간 부문 육성을 통해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새로운 정부에서 농촌을 대변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첫 번째 먹잇감이 되었을 뿐이다.
잉글랜드는 명예혁명 직후 곧바로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원적 성향을 띠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원주의적 성향이 깃들자 제도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포용성을 띠려는 경향이 생겼다.
포용적 경제제도하에서는 부가 소수 집단의 손에 편중되지 않는다. 포용적 경제제도하에서는 정치권력을 획득해 얻을 수 있는 소득에 한계가 있으므로 정권을 노릴 만한 인센티브가 약해지기 마련이다.
포용적 제도가 자리를 잡으려면 여전히 상당부분 우발성에 의존하는 게 사실이지만, 선순환의 과정을 통해 포용적 제도가 유지되고 한층 더 강한 포용적 성향을 향해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선순환이 포용적 제도에 생명력을 불어넣듯, 악순환은 착취적 제도의 강력한 조력자라 할 수 있다.
착취적 제도는 엘리트층의 배를 불려준다. 엘리트층은 그렇게 축적한 부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한다.
남북전쟁으로 농장주 엘리트층들은 다른 명분을 내새웠지만, 여전히 지역 정치를 장악할 수 있도록 체제를 손질해 전과 다름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농장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현실적이고 고약한 부정적 순환 고리가 수많은 나라의 정치,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인물이 착취적 제도를 틀어쥐고 있던 정권을 전복한다 해도, 그들 또한 여전히 사악한 착취적 제도를 이용해 착취를 일삼으며 주인 노릇을 할 뿐이다. 권력 집행에 대한 견제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용적 제도를 향항 행보에서 발견되는 핵심적 요인은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고 절대주의적 제도를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제도로 갈아치우겠다는 각오를 한 광범위한 연합이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광범위한 연합이 혁명을 일으키면 그만큼 다원주의적인 정치제도가 태동할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13장 오늘날 국가가 실패하는 이유
오늘날 국가가 실패하는 원인은 착취적 경제제도가 국민이 저축이나 투자, 혁신을 하겠다는 인센티브를 마련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APC 정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러 왔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사람을 골라내지 않고 마구 쏴 죽였다.
콜롬비아는 짧은 기간 군사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이후 주기적으로 선거가 치러졌다. 국민은 국민투표를 통해 지지를 표명했으니 이 모든 것이 민주적으로 비치는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오랫동안 민주적 선거가 치러졌다고는 하지만 포용적 제도가 뿌리내리고 있지는 않다. 내전도 극식했고 많은 무장 단체들이 난립했다. 지주들은 민병대를 이용해 게릴라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지주 역시 마약 밀매, 강탈, 주민 납치 및 살해를 일삼기는 마찬가지였다.
콜롬비아의 정치, 경제 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모로 한층 더 포용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주요 착취적 요소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법질서와 사유재산권이 불안한 지역이 많은데 아직도 강력한 중앙집권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콜롬비아 특유의 중앙집권화 실패 사례라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법적으로 1페소를 1달러에 묶어 버렸다.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 정책일지는 몰라도 커다란 허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수출품은 엄청나게 비싸진 반면 수입품은 헐값이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50년 정도 경제성장을 경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형적인 착취적 제도하의 경제성장 사례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선거를 치르고 정부도 민중이 선출했지만, 정부는 사유재산권을 무시하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시민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 아프헨티나 대통령과 정치 엘리트에 대한 견제 수단이 없고 다원주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리오하의 군벌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지금처럼 돈을 벌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로 합의했다. 대신 부에노스아이레스 엘리트층은 내륙의 제도 개혁을 포기했다.
아프헨티나가 실패한 이유는 첫째, 착취적 정권하에서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불평등 때문에 신생 민주주의 국가의 유권자들은 극단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정치인에게 표를 몰아주게 된다. 다른 모든 정치인과 정당이 여태껏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도로와 교육 등 가장 기본적인 공공서비스마저 제공해주지 못했으며, 지역 엘리트의 수탈도 막아주지 못했다는 사실. 둘째, 효율적인 정당체제를 통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대안을 만들어내기보다 페론이나 차베스 등 독재자로 기울게 되고 또 그런 인물이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역시 기저에 깔린 착취적 제도 때문이다.
공산주의 경제제도를 지탱하는 것은 착취적 정치제도다. 소수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권력 집행에 대한 견제 수단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즈베키스탄은 다른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처럼 소련의 몰락 이후 독립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수립했어야 하지 않을까? 카리모프 정권하에서 우즈베키스탄은 대단히 착취적인 정치, 경제 제도로 가득하며, 가난에 찌들어 있다.
이집트는 여러 경제 부문에서 기업인은 정부 규제를 통해 진입 장벽을 세워달라고 정부를 설득했다.
국제금융기구 및 경제학자들이 주창한 1990년대 경제개혁은 시장을 개방하고 경제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역할을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어딜 가나 그런 개혁의 주축은 국영 자산의 민영화였다. 멕시코의 민영화는 경쟁을 확대하기는 커녕 국영 독점을 민간 독점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아랍의 봄으로 사회 전반에 소요와 시위가 확산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착취적 정치제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경제제도의 포용성만 강화될 수는 없다는 교훈만 남겼을 뿐이다.
실패한 나라들의 공통점은 착취적 제도다.
서로 다른 역사와 구조로 엘리트층의 성격과 착취적 정치제도의 구체적 내용이 달라지듯이, 그런 엘리트층이 수립하는 착취적 경제제도 역시 그 내용이 달라진다.
이집트 경제가 북한보다 나은 성과를 보인 것은 이집트 제도의 착취성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헌정 질서와 민주 선거가 다원주의 증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콜롬비아보다는 제법 제 기능을 하는 편이다.
백인 정착민이 없었던 시에라리온에서는 식민정권이 식민 지배 이전의 전통적인 착취적 정치권력 구조를 폭넓게 활용하고 한층 더 강화했다. 그런 구조 또한 중앙집권화 실패와 노예무역의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 오랜 악순환의 산물이었다.
오늘날 국가의 정치, 경제적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은 착취적 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제도 내에 포용적 요소가 이미 어느 정도 존재한다거나, 기존 정권에 대한 투쟁을 이끌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있다거나, 아니면 역사의 우발성만으로도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질 수 있다.
잉글랜드 내전 당시 크롬웰이 그러했듯이 자신들을 새로운 절대주의 체제의 주역으로 여겼다. 하지만 의회가 이미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다양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관점을 가진 광범위한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두제의 철칙이 적용될 가능성은 한층 작아졌다.
14장 기존 틀을 깬 나라들
결정적 분기점이 마련되어야 한다.
로즈의 밥이 되느니 영국의 통치를 강화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추장들
크고틀라(부족협의회) 같은 츠와나의 정치제도 역시 정치 참여를 장려하고 추장의 권한을 제한했다.
부족회읭서 추장의 바람이 기각되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누구나 발언권이 있었으므로 부족회의는 추장에게 부족원의 전반적인 감정을 확인하는 기회였고, 부족원에게는 불만을 토로할 기회였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추장과 그 자문들이 진지하게 책임을 추궁당하기도 했다. 크고틀라뿐만이 아니었다. 츠와나의 추장 자리는 엄격한 세습제가 아니라 상당한 재능과 능력을 증명하는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었다. 추장은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자리이고, 그 도전에 성공한 자라면 정당한 후계자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츠와나 부족의 중앙집권화 덕분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다른 부족 지도자들과 비교해 이례적이라 할 정도의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부족의 전통적 제도에 깃든 얼마간의 다원주의적 요소 덕분에 남다른 수준의 정통성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츠와나는 누가 보아도 성공하긴 힘든 나라였다. 하지만 이후 45년 동안 보츠와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중 하나로 발전했다.
보츠와나는 어떻게 구시대의 틀을 깨고 나올 수 있었을까? 독립 이후 신속히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를 발전시킨 덕분이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식민 지배 말기에 마련된 결정적 분기점이 보츠와나의 기존 제도와 어떤 상호작용을 했는지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튜더왕조하에서 잉글랜드는 급속도로 중앙집권화를 이룩했고, 최소한 군주에 제동을 걸고 어느 정도 다원주의를 확보하려는 열망이 깃든 마그나카르타와 의회의 전통을 뿌리 내렸다.
보츠와나 역시 그런대로 중앙집권화를 이루었고 식민 지배를 넘어서까지 비교적 다원주의적인 부족제도를 보전했다.
츠와나 부족은 토지는 공동으로 소유했지만 가축은 사유재산이었고, 엘리트층 역시 엄격한 사유재산권 집행을 선호했다.
역사적 우발적 선택의 영향또한 있었다. 운 좋게도 독립 이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의 수많은 지도자와 달리 선거제도를 뒤흔들기보다 선거를 통해 권력 경합을 벌이도록 한 세레체 카마나 퀘트 마시르 등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다면 보츠와나의 역사 역시 매우 다른 양상으로 펼쳐쳤을 것이다.
카마는 모든 지하 광물에 대한 권리가 부족이 아닌 국가에 귀속되도록 법을 바꾸었다. 보츠와나에서 다이아몬드 때문에 엄청난 부의 불평등이 초래되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보츠와나는 다이아몬드 수입을 국익을 위해 사용했다.
보츠와나가 기존의 틀을 깰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해방이라는 결정적 분기점을 놓치지 않고 포용적 제도를 수립한 덕분이었다.
미국 남부 착취의 종말
전미유색인종발전협회 몽고메리 지부 간사가 체포되자 대규모 운동에 불이 붙었다.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한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마침내 미국 대법원에서 앨라배마와 몽고메리의 인종차별적 버스 운행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지는 획기적 성과로 이어진다.
남부의 기존 틀이 깨지고 근본적인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이 운동과 더불어 여러 가지 사건과 변화가 잇따른 덕분이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 대법원과 연방 정부도 남부의 착취적 제도 개혁에 체계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남부의 제도 개혁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연방법체제였다.
15장 번영과 빈곤의 이해
우리 이론의 요체는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와 번영의 관계다.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는 포용적
경제제도는 경제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하는
착취적 경제제도에 비해 경제성장에 훨씬 더 유리하다.
우리는 첫째, 착취적 정치, 경제 제도와 포용적 제도의 차이를 밝혔다. 둘째, 일부 지역에서만 포용적 제도가 태동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 이론의 요체는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와 번영의 관계다.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마련하며, 신기술과 기능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는 포용적 경제제도는 소수가 다수로부터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고안되고, 사유재산권을 보장해주지 못하거나 경제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하는 착취적 경제제도에 비해 경제성장에 훨씬 더 유리하다.
중요한 것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두 가지 이유에서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첫째, 지속적 성장은 혁신이 있어야 하는데, 혁신은 반드시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기성 권력 기반을 뒤흔들기 마련이다.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엘리트층은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착취적 제도하의성장은 어쩔 수 없이 단기에 그치고 만다. 둘째,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이들이 사회 전체를 희생시켜가며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으므로 착취적 제도하의 정치 권력을 탐내는 이들이 많아져 수많은 집단과 개인이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착취적 제도하의 사회에는 정치 불안을 초래할 만한 강력한 요인이 많아진다.
중대한 경제 변화의 필수 조건인 중대한 제도적 변화는 기존 제도와 결정적 분기점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현실화된다.
흑사병, 대서양 무역항로 발견, 산업혁명 등이 그런 예이다.
각기 다른 사회의 현존하는 제도적 차이는 과거 제도 변화의 결과다. 사회마다 제도적 변화의 길이 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제도적 부동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격리된 두 생명체의 개체군이 이른바 진화적 부동 또는 유전적 부동 과정을 통한 임의적 변이에 따라 서서히 멀어지듯이, 다른 모든 면이 유사한 사회라 하더라도 제도적인 면에서 서서히 멀어져가는 것이다. 부와 권력, 간접적으로는 제도를 둘러싼 갈등은 모든 사회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진다. 이런 갈등은 설령 그런 갈등이 펼쳐지는 경쟁의 장이 공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흔히 우발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런 갈등의 결과는 제도적 부동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차곡차곡 쌓이는 축적 과정은 아니다.
잉글랜드 왕실은 모든 해외무역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이런 무역을 왕실이 독점하고 있었다.
열쇠는 역사가 쥐고 있다. 제도적 부동을 통해 결정적 분기점이 찾아왔을 때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결정적 분기점 자체가 역사적 전환점이 된다. 또 악순환과 선순환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제도적 차이를 이해하려면 역사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작은 차이와 우발성은 우리 이론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한 것이다.
작은 차이는 초기값의 예민성과 우발성은 찰발성을 이야기한 카오스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착취적 제도에서 벗어나 포용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달성하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첫째, 악순환의 고리 때문에 생각보다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둘째, 역사적 우발성을 고려하면 결정적 분기점과 기존 제도적 차이가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든 반드시 포용적 또는 착취적 제도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으므로 포용적 제도를 향한 변화를 촉진할 만한 보편적 정책 제안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현재 중국 경제제도는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포용적이지만, 중국의 경험은 착취적 정치제도하의 성장 사례에 불과하다. 최근 혀긴과 기술을 강조하지만, 중국의 성장은 기존 기술의 채택과 신속한 투자에 의존하는 것이지 창조적 파괴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이런 성장 모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중국에서 사유재산권이 완전히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당이 경제제도를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의 범위가 극도로 제한되며 정치제도에서 급진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런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방위산업이나 중공업에 의존하지 않으며 중국 기업인의 창의성 또한 대단하다. 그렇다고 해도 착취적 제도가 포용적 제도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한 중국의 성장은 언젠가 김이 빠질 수밖에 없다.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보다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경제성장이 지속될 수 있다는 대안을 중국이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근대화이론은 모든 사회가 성장할수록 한층 더 근대적으로 발전한 문명화된 체제를 지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근대화이론의 변형으로 노동자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민주주의 및 더 나은 제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다. 모두 순진하기 그지없는 낙관론일 뿐이다.
근대화이론이 맞는다면 이들의 소득 및 교육수준이 계속 높아지면서 어떤 식으로든 민주주의와 인권, 시민의 권리, 안정된 사유재산권 등 다른 유익한 것들도 죄다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중국과 자유롭게 무역을 하면 시간은 우리 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이 서방과 자유무역을 계속하면 성장이 이어질 것이고, 그런 성장이 중국에 민주주의와 더 나은 제도를 가져다줄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중국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은 미비했다.
미국이 주도한 침공 이후 이라크 사회와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들이 낙관적이었던 것도 근대화이론 탓이었다.
근대화이론이 주장하는 바와 대조적으로 권위주의적 성장이 민주주의 또는 포용적 정치제도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권위주의적 성장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시장실패를 줄이고 경제성장을 촉진할 만한 정책의 채택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정치인의 무지가 아니라 각 사회의 정치인이 정치, 경제 제도 속에서 당면하는 인센티브와 한계다.
해외원조 유입은 아프가니스탄의 기간시설을 구축하기는커녕 굳건히 다지고 강화하려 했던 정부를 오히려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같은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착취적 제도 때문이다. 착취적 제도하에서는 사유재산권, 법질서, 온전한 사업체제 등이 뿌리내릴 수가 없고, 전국적인 엘리트층 또는 흔히 지역 엘리트층이 정치, 경제적인 삶을 모조리 틀어쥐게 된다. 그런 제도에서는 해외원조마저 약탈당하고 의도했던 곳에 제대로 전달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포용적 제도 구축을 위한 해법은 없다는 것이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기존 정권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이 무법천지로 전락하지 않도록 일정 수준의 중앙집권화된 질서
법치 질서를 의미하는듯
정보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형태의 언론도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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