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아아, 종종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종종 스스로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
그러나 너무나도 호기심이 강해서 언제나 거듭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존재."
<선악의 저편>
얼음같이 차갑고 싸늘해서 그에게 손을 대면 불에 덴 듯이 뜨겁다.
그를 건드리는 사람마다 놀라서 손을 뗀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가 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선악의 저편>
12 선악의 저편
"니체의 위험한 책 ...
그는 하나의 길을 찾아낸 최초의 사람이다."
"만인을 위한 책은 항상 좋지 않은 냄새를 피운다.
거기에는 하찮은 인간들의 체취가 배어 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숭배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악취가 풍긴다."
<선악의 저편>
"독립이란 극소수의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며 강자의 특권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아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강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무모하리만큼 대담한 인간일 것이다."
<선악의 저편>
<선악의 저편>이 다이너마이트 구실을 한 사유는 무엇이었는가. 내용 전체를 요약하면 '이 세계를 둘로 나누어 본다'는 커다란 이분법이 불거져 나온다.
선과 악의 이분법은 가짜 이분법이고, 노예의 이분법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 저편에서 전체를 보면 이 세계를 규정하는 진짜 이분법이 드러난다. 귀족이냐 노예냐. 고귀한 것이냐 비천한 것이냐의 이분법이 그것이다.
권력의지를 구현하려면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노예적 이분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선한 것은 긍정하고 악한 것은 부정한다는 사고, 우리는 선하고 너희는 악하다는 사고야말로 노예의 사고다. 귀족의 권력의지는 선악을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선악의 저편에 있다.
이 책에서 니체는 다시 한 번 권력의지가 무엇인지, 권력의지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규명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먼저 철학자들의 진리 의지를 추적한다. 철학자들이 목숨 걸고 매달리는 진지 의지, 곧 참된 것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찬찬히 해부해보면 거기서 더 본질적인 것, 곧 권력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 의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모험에 투신하도록 하는 유혹하는 힘을 지녔다. 이제까지 모든 철학자들은 이 명제의 참됨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존경심을 품고 이야기해왔다. 이런 진리 의지가 이제까지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을 제기해 왔던가! <선악의 저편>
이것이 니체의 출발점이다. 진지를 알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모든 철학자들의 근본적인 의지다. 그리고 그런 의지의 참됨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런데 철학자는 정말로 진리를 원하는가?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철학자들을 충분히 관찰하고 난 뒤에 나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의식적인 사고의 상당 부분, 심지어는 철학적 사고의 상당 부분까지도 본능적 행위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철학자의 본능은 그의 사고의 대부분이 일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도록 비밀리에 인도하고 강제한다. 겉보기에는 독자적으로 성립한 듯한 모든 논리도 그 배후에는 가치 판단, 좀 더 명확히 말해 일정한 형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생리적 요구가 도사리고 있다." <선악의 저편>
요약하자면, 삶의 유지를 위한 생리적 요구가 철학자들의 진리 의지 밑바닥에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삶이다. 다른 말로 하면 힘이다. 철학자들이 원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진리가 아니라 힘이다. 철학은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힘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니체는 이런 주장을 고대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의 경우를 들어 입증한다. 고대 스토아주의자들은 삶의 역경 속에서 '자연을 따라 배우며 살기'를 원했다. 그런데 니체는 스토아주의자들이 상상한 자연이 정말 자연 그 자체의 모습인가 하고 묻는다.
"그대들은 자연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가? 오, 그대들 고상한 스토아 철학자들이여, 이것은 말의 기만이 아닌가! 자연이란 존재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한없이 낭비하고, 한없이 냉담하며, 의도와 배려가 없으며, 자비와 공정함도 없고, 풍요로운가 하면 동시에 황량하고 불확실하다. 자연의 초연함 자체를 하나의 초월적인 힘이라고 가정해보라. 어떻게 그대들은 이러한 초연함을 좇아서 살 수 있겠는가? 삶이란 이런 자연을 넘어선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선악의 저편>
요컨대, 슽아주의자들은 삶을 자연으로 환원하여 그 자연의 법칙 혹은 본성에 맞춰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생각하는 자연을 자연 그 자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이 생각하는 자연이란 오히려 삶의 모습 아닌가? 니체는 이렇게 묻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을 삶의 모습에 억지로 끼어 맞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과 이상으로 자연을 재단한다.
"그대들은 자연에서 그들의 법칙을 판독하는 데 열중하는 척하지만, 실상 정반대의 것을 의도하는 것이 아닌가? .. 그대들의 자만심은 그대들의 도덕과 이상을 자연에게 강요하고 그것들을 자연 속에 집어넣고 싶어한다. 그대들은 자연이 '스토아철학에 따른' 자연이기를 원하며, 모든 존재를 오직 그대들 자신의 모습에 맞춰 존재하게 하고 싶어 한다." <선악의 저편>
스토아주의자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스토아주의적 관점을 자연에 강요한 결과로 자연을 다른 관점에서는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해 스스로 가한 압박 속에서 그 자신의 관점이 하나로 고정되어버렸다.
"스토아주의는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행이다." <선악의 저편>
스토아주의자들이 자연이라는 말로 삶에 대한 어떤 집요한 의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에 맞춰 살라는 말은 마치 진리에 따라 살라는 명령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말일 뿐이며, 그 삶의 의지를 자연에 새겨 넣으려는 것일 뿐이다.
"결국 철학이란 이런 폭군 같은 충동 자체이며, 힘에 대한 가장 정신적인 의지다." <선악의 저편>
그렇다면 철학은 진리 의지, 곧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의지를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닌 셈이다. 철학의 진리 의지는 그보다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의지인 권력의지의 수단인 셈이다.
마침내 우리가 우리의 본능적 삶 전체를 의지의 근본 형식(권력의지)이 발전하고 분화한 것으로 설명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리고 모든 유기적 기능들을 권력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때 우리는 작용하는 힘 전체를 명백히 권력의지로 규정할 권리를 얻게 될 것이다. 내부에서 바라본 이 세계는 권력의지일 뿐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선악의 저편>
이로써 니체는 유기체 세계의 본질이 권력의지임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유기체의 본질은 권력의지, 곧 힘을 향한 본능적 의지이기 이전에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능적 의지 아닐까? 니체는 이런 의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답한다.
"생리학자들은 자기보존 본능을 유기체의 기본적 본능으로 단정하기에 앞서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이란 무엇보다도 자기 힘을 발산하고자 한다. 생명 그 자체는 권력의지다. 자기보존은 이러한 의지의 간접적이고 아주 자주 나타나는 결과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선악의 저편>
니체는 스피노자의 '자기보존충동(코나투스)'을 직접 가리켜 '논리의 불철저함에서 기인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자기 보존 본능이 원인인 것이 아니라 권력의지가 원인이고 그 원인의 결과가 자기 보존 본능 곧 코나투스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학자의 출신 성분에 대하여. 힘의 확장을 지향하고, 이 의지 안에서 때로는 자기 보존조차도 ... 희생시키는 삶의 근본적 충동이 위기에 처하거나 위축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자기 보존 의지다. 예를 들어 폐결핵을 앓았던 스피노자의 경우처럼 철학자가 자기 보존 충동을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여길 때,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증상으로 보아야 한다. 즉 그는 위기에 처한 인간인 것이다. .... 생존을 위한 투쟁은 예외에 속하며 삶의 의지가 일시적으로 제한된 것에 불과하다. 크고 작은 투쟁들은 언제나 우월, 성장, 확산, 힘을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권력의지를 따르고 있으며, 이 권력의지가 바로 삶의 의지다. <즐거운 학문>
그렇다면 이 권력의지가 말하는 의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니체가 보기에 의지란 ''복합적인 것"이다. 니체가 의지의 여러 측면 가운데 주목하는 것이 "하나의 정서, 특히 명령하려는 정서"로서 의지다.
'의지의 자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복종해야 할 것에 대한 우월한 정서다. '나는 자유이며 그는 복종해야 한다'라는 의식이 모든 의지 속에 잠재돼 있다. ... 의지하는 인간은 복종을 하거나 아니면 그러리라고 믿어지는 자기 내부의 어떤 것에 대해 명령을 내린다. <선악의 저편>
이제 의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을 고찰해보자. 우리는 일정한 상황에서 명령하는 자이자 동시에 복종하는 자이다. ..... '의지의 자유' 이것은 의지를 행하는 사람이 느끼는 기쁨의 복합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는 명령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명령 수행자와 일치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저항을 극복하는 기쁨을 맛본다. 그는 참으로 그 저항을 극복한 것은 자신의 의지 자체라고 생각한다. 의지하는 자는 이와 같이 명령하는 자로서의 기쁨의 감정에 더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 즉 유용한 '하위 의지' 또는 '하위 영혼'의 즐거움을 덧보탠다. 그 결과, 그것이 바로 '나'란 존재다. <선악의 저편>
여기서 주목할 것이 니체가 인간 개체의 몸을 "많은 영혼의 집합체"라고 본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은 그 자체로 여러 영혼으로 구성된 집합체, 곧 사회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의지를 제압하는 의지, 다른 의지에 명령을 내리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하나 분간해서 느끼지 못하고, 하나의 의지가 다른 의지에 대해 성공적으로 자기 의지를 관철할 때 뭉뚱그려 그것을 '의지의 자유'로 느낀다. 더 나아가 니체는 하나의 인격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공동체 차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여기(하나의 인격체)에서 일어나는 일이 잘 조직된 모든 행복한 사회 공동체에서도 일어난다. 즉 지배 계급은 자기 자신과 사회 공동체의 성취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모든 의지 작용에서 중요한 문제는 이미 말한바 있듯이 오로지 많은 영혼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토대로 한 명령하기와 복종하기다. <선악의 저편>
개인이든 사회든 결국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 속에서 관철되는 권력의지가 본질인 셈이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이 '자아', '이드', '초자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힘들의 각축장이 우리의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자아가 초자아의 무조건적 힘을 제압하고 이드에게 명령해 충동을 억제시킴으로써 정신의 균형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우리 의지의 승리를, 그 승리에 뒤따르는 기쁨을 느낄 것이다. '여러 영혼으로 이루어진 집합체'라는 니체의 말은 이렇게 이해할 때 그 의미가 한층 분명해 진다.
니체는 권력의지를 집합체 내부의 권력관계 속에서 발휘되는 확장과 지배의 의지로 이해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그 권력의지가 악, 폭력, 잔인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우리가 흔히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악한 것들이 선의 기원에 자리 잡고 있다고 강조한다. 선의 뿌리에 악이 있는 것이다. 니체는 그 기원을 향해 나아가는 인식의 모험을 완수한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심리학은 도덕적 편견과 공포에 사로잡혀왔으며 더 깊은 곳까지 파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직 그 누구도 내가 한 것처럼 심리학을 권력의지의 발전 이론이나 권력의지의 형태론으로 파악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올바른 생리, 심리학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린 무의식적인 저항과 싸워야 하고 항상 그런 저항에 맞설 용기를 지녀야 한다.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이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이론조차도 아직 건강하고 건전한 양심을 지닌 사람에게는 당혹과 혐오감을 ...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 나아가 선한 충동이 악한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이론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만일 누군가가 증오, 질투, 탐욕, 지배욕과 같은 정념을 삶의 조건으로 보고 또 전반적인 생명 현상에서 근본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로 간주한다면, 그는 자신의 그러한 견해로 말미암아 마치 뱃멀미를 하듯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설조차도 위험스런 통찰력으로 가득 찬 미지의 광대한 영역 안에서는 별로 낯선 것도 고통스러운 것도 되지 못한다. ... 이제까지 아무리 대담한 여행가, 모험가들일지라도 이보다 더 깊은 통찰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선악의 저편>
니체는 뒤로 가면서 권력의지와 폭력성의 관계를 더욱 집요하게 추적해 밝힌다.
생명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이고 더 약한 존재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위해를 가하고 제압하고 억압하는 것이고 냉혹한 것이고 자신의 방식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고, 동화시키는 것이며, 가장 온건하게 말해서 착취하는 것이다. ... 개인들이 서로 동등하게 대하고 있는 조직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소멸되어가는 조직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조직체라면 그 안의 개개인들이 서로 자제하고 있는 일을 다른 조직체들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행해야 한다. 그 조직체는 육화된 권력의지가 디어야 할 것이고 성장하고 확장하고 강탈하고 지배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 부도덕을 떠나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며 생명은 단지 권력의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 착취란 부패하고 불완전하고 원시적인 사회에 속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유기적 기능으로서 살아 있는 것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권력의지의 소산이다. <선악의 저편>
이 권력의지의 잔인한 본성을 풀어놓으면 어떤 긍정적인 결과가 빚어지는가. 니체는 "놀라울 정도로 불가해하고 설명 불가능한 인간", '수수께끼와 같은 인간'이 거기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초인의 현실적인 출현, 창발 현상)
그의 본성 안에 들어 있는 대립과 싸움이 삶을 더욱 촉진하고 북돋는 구실을 한다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을 조정해나갈 수 있는 능숙하고 교묘한 자기 지배력이 유전되고 육성된다면, 저 놀라울 정도로 불가해하고 설명 불가능한 인간, 승리를 거두고 사람을 유혹하도록 미리 운명 지워진 수수께끼와 같은 인간이 출현하게 된다. <선악의 저편>
니체는 이렇게 규정된 권력의지의 냉혹한 원칙에 입각해 근대 세계의 가치를 비판해 들어간다. 니체의 사상에서 기독교는 위대한 인간이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한 노예의 가치다. 또 기독교 가치에서 자라나온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니체는 기독교적 가치를 창안한 민족으로서 유대인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결국 유대인을 비판한다.
유대인들, 타키투스나 고대 세계 전체가 말한 바로는 '노예로 태어난' 민족, 그들 스스로 믿기로는 '모든 민족 가운데 선택된 민족.' 이 유대인들이 가치의 전도라는 기적적인 일을 해냈다. 그 덕분에 지상에서의 삶은 몇천 년 동안 새롭고 위험한 자극을 받아왔다. 그들의 선지자들은 '부', '불경', '악', '폭력', '관능'을 하나의 의미로 결합해 처음으로 '세상'이라는 말을 더럽고 욕된 것을 뜻하는 말로 주조했다. 이러한 가치의 전도('가난'을 '성스러움'이나 '친구')에 유대 민족의 의의가 있다. 그들과 더불어 도독에서 노예 반란이 시작된다. <선악의 저편>
이렇게 유대인은 도덕적 가치를 뒤집어엎는 기적적인 일을 해냈고 도덕상의 노예 반란을 이루어낸 민족이다. 그 노예 도덕이 귀족적 가치에 반란을 일으켜 승리한 결과가 기독교의 지배이며 지배자 자리에 오른 기독교는 2,000년 가까이 유럽에 노예 도덕을 진리로 가르쳤다. 니체는 기독교가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인간을 낮은 단계에 묶어두는 구실을 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정상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수많은 인간적인 약점에 대해 기독교와 불교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 종교들은 보호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나 그대로 보호하려고 한다. 실제로 그 종교들은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한 종교로서 원칙적으로 그런 약점을 그엊ㅇ한다. 그 종교들은 삶을 질병처럼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으며 삶에 대한 다른 방식의 관점은 그릇된 것이고 또 있을 수도 없다고 단정하고 싶어 한다. ... 전체적으로 보아서 '인간'을 낮은 단계에 묶어놓은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제까지 우리가 지켜온 그 독자적인 종교들 탓이다. 그것들은 없어져야 마땅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호해 왔다. <선악의 저편>
일체의 가치 평가를 전도시키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한 일이었다. 강자를 넘어뜨리고, 위대한 희망을 병들게 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쁨에 의혹을 던지고, 당당하고 남성적이고 지배적이고 오만한 모든 것, 다시 말해 가장 고귀하고 가장 훌륭한 '인간' 유형의 고유한 본능을 불안과 양심의 가책과 자기 파괴로 이끄는 것, 현세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지배욕을 현세와 현세적인 모든 것에 대한 증오로 뒤바꾸어놓는 것, 이 모든 것을 교회는 자기의 과제로 삼았고 또 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선악의 저편>
니체는 분노 어린 목소리로 기독교를 유럽 정신의 타락의 원흉으로 탄핵한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교만 중에서도 가장 파멸적인 교만이었다. 인간을 예술가로 조형하려고 나설 만큼 비범하거나 굳세지도 못하고, ... 수많은 실패와 파멸이 삶의 필연적 법칙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인식시킬 만큼 강하지도 시야가 넓지도 못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아득하게 차이 나는 계급적 질서와 위계의 간격을 깨달을 만큼 고귀하지도 못한 인간들, 그러한 인간들이 '신 앞의 평등'을 내세우면서 지금까지 유럽의 운명을 지배함으로써 결국 더 왜소하고 어리석은 인간, 무리 짐승, 선량하고 병약하고 범용한 존재가 육성되어 왔으니 오늘날의 유럽인이 바로 그들이다. <선악의 저편>
기독교가 약자에 대한 동정과 '신 앞에서 만인의 평등'을 내세워 결국 무리 짐승의 세상, 다시 말해 가축 떼 같은 범용한 인간들의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니체의 기독교 비판의 핵심이다. 니체의 비판은 이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향한다.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기독교 가치가 정치적으로 구현된 것, 다시 말해 기독교의 정치적 변형이다.
기독교의 핵심 가치가 정치적으로 구현되는 데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 프랑스대혁명이었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 혁명에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이념적 동력을 제공한 것이 '신 앞의 평등'을 주장하는 기독교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고귀한 자들의 지배, 고귀한 인간의 창출이라는 자신의 근본 과제를 가로막는 최악의 이념이 근대 민주주의 이념이라고 보기 때문에 민주주의, 그것의 급진적 실현인 사회주의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방치하면 유럽은 하루 종일 풀이나 뜯으며 세월을 보내는 무리 짐승의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모든 나라와 미국에는 자유정신을 사칭한 매우 편협하고 억압적인 정신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의도, 우리의 본능과 완전히 상반된 것을 요구하고 있다. ... 간단히 말해 그러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유감스럽게도 말주변 좋고 무책임한 글을 남발하는, 민주주의적 취향과 '근대 이념'의 노예들이며 평등주의를 ...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용기 있고 예의 바르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다. ... 그러나 인간의 모든 불행과 실패의 원인을 지금까지의 낡은 사회 형태 탓으로 돌리려는 근본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 그들은 정신이 왜곡돼 있고 어리석고 피상적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푸른 초원을 노니는 가축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행복과 안전과 안락과 평온을, 그리고 좀 더 편안한 삶을 향유하도록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들이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두 가지 노래와 구호는 '권리의 평등'과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다. <선악의 저편>
만일 어떤 사람이 일반적으로 인간을 비유도 사용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동물로 간주한다면, 얼마나 모욕적으로 들릴 것인지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끊임없이 '무리', '무리 본능'이니 하는 표현을 '근대 이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우리가 마치 범죄라도 짓은 것처럼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우리는 그들을 달리 부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새로운 통찰이 바로 거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선악을 안다고 믿는것, 선을 찬양하고 악을 비난함으로써 스스로를 미화하는 것, 스스로를 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무리 짐승, 즉 무리 짐승과 같은 인간들의 본능이다. 그 본능은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 밖의 다른 본능을 압도할 만큼 우세해졌다. ... 오늘날 유럽의 도덕은 무리 짐승의 도덕이다. <선악의 저편>
그러나 조급한 병자들에게는 그 운동(민주주의 운동)의 템포가 너무나 느리고 너무나 완만하게 느껴지는 것이 분명하다. 그 증거로 유럽 문화의 뒷골목을 배회하면서 이빨을 드러내며 점점 더 사납게 미친 듯이 짖어대는 아나키즘의 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얼핏 보면 그들은 평화적이고 근면한 민주주의자나 혁명 이데올로기 주창자들과 상반되며, 더 나아가서 바보 같은 사이비 철학자들이나 사회주의를 자처하며 '자유 사회'의 도래를 바라는 광적인 박애주의자들과도 상반되는 자들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 그들 모두는 무리들의 자치적인 사회 형태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형태의 사횡에 대해서도 근본적이고 본능적인 적개심을 품는다는 점에서 ... 모조리 한통속이다. 그들 모두는 모두 특별한 요구, 특권, 특전에 완강하게 저항한다.(결국은 일체의 권리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위치에 서게 되면 더는 아무도 '권리'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 모두는 동정으로 흐느끼고 동정으로 어쩔 줄 모르고, 고통을 맹렬히 증오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거나 방관할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는 거의 여자나 다름 없다. ... 그들은 모두 고통의 분담이라는 도덕이 가장 본질적인 도덕이며 가장 높은 차원의 도덕이며 인간이 도달한 정점이며, 미래의 유일한 희망, 현재 살고 있는 인간의 위안, 과거의 모든 죄악의 사면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런 도덕을 신앙처럼 떠받든다. <선악의 저편>
그들의 운동이 인간을 무리 짐승으로 떨어뜨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인간의 왜소화를 이상으로 삼은 자들이다.
니체는 민주주의 이념이 귀족적 가치를 파괴하고 인간의 고양과 상승에 발목을 거는 이념이라고 확신한다.
대중에 대한 고귀한 인간의 선전포고야말로 필요하다! 그 자신들이 주인이 되고자 하여 도처에서 평범한 자들이 서로 제휴하고 있다! 유약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만들며 '민중' 혹은 '나약한 자'의 목적에 봉사하는 모든 것이 보통 선거에, 바꿔 말하면 저급한 인간의 지배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항 수단을 단련하고 이러한 소동을 전부 백일하에 드러내어 심판대로 끌어내야 한다. <권력의지>
퇴락하고 있는 종족의 절멸, ... 보통 선거의 절멸, 다시 말해 가장 저열한 본성의 소유자들이 고귀한 본성의 소유자들에게 자신들을 법으로 제시하는 체제의 절멸. <권력의지>
니체는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착취 없는 세상'이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착취는 유기체의 본능이며 권력의지의 표출이다.
니체를 반시대적 급진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실향민들. .... 우리는 아무런 '보수적 가치'도 지키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주의'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진보'를 위해 일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장에서 노래하는 미래의 세이렌들에게 귀를 틀어막을 필요가 없다. "평등한 권리", "자유로운 사회", "주인도 없고 하인도 없다"라는 그들의 노래는 우리를 유혹하지 못한다. 우리는 정의와 일치의 제국이 지상에 건설되는 것을 결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우리는 우리처럼 위험과 전쟁과 모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타협하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화해하지 않고, 거세된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느낀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형을 강화하고 고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예제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인류를 사랑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단어가 지닌 일반적인 의미에서 '독일적'이지도 않다. 민족주의와 인종적 증오를 선동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설교하고, 민족 감정에 의한 심장과 격분과 피의 중독에서 기쁨을 느낄 정도로 충분히 독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 우리는 산 위에서 사는 것, 멀리 떨어져서 '비시대적으로' 사는 것, 과거나 미래의 세기에서 사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한다. ... 우리는 기독교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것을 혐오한다. <즐거운 학문>
니체는 민주주의의 자기 전복의 때가 오리라고 본다. 민주주의 속에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압제자가 출현하리라는 전망이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를 정치적 차원, 권력적 차원을 배제한 정신적 차원의 강자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니체의 사상을 반쪽만 본 것이거나 진실을 외면한 것이다.
독이냐 약이냐는 그것을 먹는 사람의 소화력에 달렸다. "높은 수준의 인간에게는 즐거움이 되고 자양분이 되는 것도 이들과 전혀 성질을 달리하는 저열한 인간에게는 독이 된다. 평범한 인간의 미덕이 철학자에게는 악덕과 결점이 될 수도 있다. 높은 수준의 인간이 타락하고 전락하게 될 경우, 그는 바로 그러한 전락 상태로 인해 자신이 새로 끼어들게 된 하층권의 사람들로부터 성자처럼 숭배를 받을 수도 있다." <선악의 저편>
정신과 건강 상태에 따라 상반되는 가치를 띠는 책들이 있다. 즉 그 책들은 저급한 정신과 빈약한 생명력을 지닌 인간이 읽느냐 아니면 높은 정신과 힘찬 생명력을 지닌 인간이 읽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앞의 경우에는 이 책들은 위험한 것이 되고 파괴와 분열로 인도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뒤에 경우에는 용감한 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선도자의 외침이 된다. 만인을 위한 책은 항상 좋지 않은 냄새를 피운다. 거기에는 하찮은 인간들의 체취가 배어 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숭배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악취가 풍긴다. <선악의 저편>
강자를 옹호하는 이 극단적 귀족주의 사상이 <선악의 저편>의 본론을 이루고 있다. 니체는 강자의 본질적 특성으로 '독립'을 든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자기 자신에게만 기대는 존재가 강자다. 그는 위험을 스스로 떠맡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독립이란 극소수의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며 강자의 특권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아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강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무모하리만큼 대담한 인간일 것이다.
니체는 홀로 미궁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며, 미노타우로스에게 잡혀 갈기갈기 찢길 위기에 처한 사람이다. 니체는 강한 인간, 대담한 인간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는지,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는지 알기 위해 적절한 때를 골라 자기 자신을 시험해봐야 한다. 그 시험이 비록 가장 위험한 게임이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 말고는 증인이 되어주고 재판관이 되어줄 사람이 없는 그런 시험일지라도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매여서는 안된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인간은 감옥이며 밀실이다. 조국에 매여서는 안 된다. ... 연민에 매여서는 안 된다. ..... 학문에 매여서는 안 된다. ... 자기 초월에 매여서는 안 된다. 눈 아래로 더 먼 곳을, 좀 더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더 높이 비상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새처럼 비상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미덕에 매여서는 안 된다. 훌륭하고 뛰어난 인간이 겪는 위험 중의 위험은 친절함이라는 부분적인 미덕 때문에 자신의 전체를 희생하는 일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독립성에 대한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 <선악의 저편>
이 미래의 철학자들(강자)은 '진리'의 새 친구들일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 (그러나) 그들의 진리가 만인의 진리가 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들의 긍지를 상하게 할 것이고 또 그들의 취향에도 맞지 않을게 분명하다. "나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나의 판단이다. 나 이외의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그것에 손댈 수 없다." 아마도 미래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다수에 동조하려는 나쁜 취향을 버려야 한다. '선'은 이웃이 그것을 입에 올리게 될 때 더는 '선'이 아니다. 어떻게 '공동선'이란 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보편적인 것은 항상 무가치하다. ... 위대한 것은 위대한 인간을 위해, 심오한 것은 심오한 인간을 위해, 미묘하고 섬세한 것은 세련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간단히 마랳 모든 귀한 것은 귀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선악의 저편>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자이며 입법자다.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선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어떠한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를 결정한다. ... 그들은 창조적인 노력을 통해 미래를 지향한다. 이제까지 존재했던 것과 또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을 위한 수단, 도구, 망치가 된다. 그들의 '지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며, 그들의 진리 의지는 권력의지다. <선악의 저편>
주인의 도덕은 지배자들에게서 나온 것이고, 노예의 도덕은 피지배자들, 예속된 자들, 노예들한테서 생겨났다. 그렇다면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도덕을 어떻게 산출하는가.
지배자들이 무엇이 '선(좋음)'인가를 결정할 때, 그 고귀하고 당당한 신분 계층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치 차이를 부여하고 위계질서를 결정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고귀한 이간들은 이처럼 고양되고 긍지에찬 것과는 정반대되는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인간들을 자신들과 구분한다.
고귀한 인간들은 그들을 경멸한다. 이 첫째 유형의 도덕에서는 '선'과 '악'의 대조가 '고귀함'과 '비천함'의 대조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바로 드러날 것이다. 그 고귀한 인간들은 겁 많은 인간, 소심한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인간, 학대를 감수하는 개와 같은 인간, 구걸하는 아첨꾼, 그리고 특히 거짓말쟁이를 경멸한다. .... 고귀한 유형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행위 결정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내게 해로운 것은 본질적으로 해로운 것이다"라고 단정한다. 그는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가치의 창조자다. 그는 자기가 인정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일부로서 존중한다. 이러한 도덕은 자기 찬미의 도덕이다. 충만한 느낌, 힘이 넘쳐흐르는 느낌, 팽팽한 긴장에서 오는 행복감.... 이 그런 도덕의 표면에 드러나 있다. 고귀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강한 자를 존경하며,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이 있는 자,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자, 자기 자신에게 기꺼이 준엄하고 가혹한 태도를 취하는 자, 모든 준엄학 가혹한 것에 경의를 표하는 자를 존경한다. <선악의 저편>
노예의 도덕이란 "박해를 받는 자, 억압을 받는 자, 고통을 받는 자, 자유롭지 못한 자,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 그리고 피로에 지친 자"의 도덕이다.
틀림없이 인간이 처한 상황 전체에 대한 염세주의적인 불신이 표출될 것이며, 아마도 인간과 그가 처한 상황에 유죄를 선고할 것이다. 노예는 강한 자의 덕을 의심한다. 그는 강한 자들 사이에서 존중되는 모든 '선'을 ... 의심하고 불신한다. ... 반면에 고통 받는 자들의 생존을 쉽게 해주는 데 유용한 자질들이 각광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칭송되는 것은 동정, 도움을 주는 호의적인 손길, 따뜻한 마음, 인내, 근면, 겸손, 친절 같은 것들이다. ..... 노예의 도덕은 본질적으로 유용성의 도덕이다. 바로 여기에 '선'과 '악'이라는 저 유명한 대립의 기원이 존재한다.
곧 힘, 위험한 것,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 세련된 것,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함은 모두 악한 것으로 비친다. 그러므로 노예의 도덕에서보면 '악한' 인간이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이다. 그러나 주인의 도덕에서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거나 그러한 의도를 지닌 사람이 바로 '선한' 인간이며 반면에 경멸감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은 '악한' 인간이 된다. <선악의 저편>
이 노예의 도덕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이며 근대적 이념의 도덕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주인의 도덕을 전적으로 긍정한다. 그러므로 '선악의 저편'이 의미하는 것은 노예 도덕이 주장하는 선과 악의 저편을 가리킨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니체는 노예 도덕의 선(착함)과 악(악함)을 부정하고 주인 도덕에서 말하는 선(좋음)과 악(나쁨)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 주인 도덕이 지향하는 정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불완전한 인간이나 노예나 도구로 전락해야 할 무수한 인간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회는 사회 자체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되며 선택된 종족이 자기 자신을 더 높은 직분으로, 더 고귀한 존재 상태로 끌어올리기 위한 토대나 발판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악의 저편>
니체가 주인의 도덕, 귀족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언제나 어떤 거리, 간격, 격차를 마음속에 품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그런 거리를 만들어내려는 심리 상태를 가리켜 '거리의 파토스'라고 부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거리가 평지에 놓인 두 사물 사이의 동등한 차이가 아니라, 위계적 차이, 높고 낮음의 차이, 다시 말해 더 높은 것과 더 낮은 것의 차이라는 사실이다. 차이는 격차를 말한다. 귀족은 높고 평민은 낮은 것이다.
"지배 계급이 노예나 도구를 끊임없이 내려다보고 낮추어보는 데서, 그리고 복종과 명령, 억압과 거리의 끊임없는 연습에서 생겨나는 거리의 파토스" <선악의 저편>
거리의 파토스가 있기 때문에 인간 내면의 성장과 향상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다. "거리의 파토스가 없다면, 또 다른 한층 더 신비한 파토스 역시 자라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즉 거리의 파토스가 없다면) 영혼 그 자체 안에서 점점 더 간격을 넓히려는 끊임없는 갈망, 더 높고 더 희귀하고 더 특이하고 더 넓고 더 포괄적인 상태로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으며, 좀 더 간단히 얘기한다면 '인간'이란 종의 향상, 지속적인 '인간의 자기 극복'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악의 저편>
따라서 거리의 파토스가 없다면 인간의 자기 극복도 있을 수 없다고 니체는 단언한다. 지금까지 인류 문화의 모든 고귀한 것들은 이런 거리의 파토스를 심리적 태반으로 삼아 태어났고 그 파토스를 동력으로 삼아 성장해왔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그런데 근대의 이념들, 곧 휴머니즘, 민주주의, 사회주의 같은 이념들은 이 거리의 파토스 자체를 없앰으로써 인간이 더 뛰어난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내적 열정도 사라지게 만든다고 니체는 비판하는 것이다. 인류의 보편적 행복과 복지, 평화와 화해를 바라는 모든 근대 이념들은 니체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자기 극복과 자기 창조를 향한 적극적 의지를 훼손하고 살해하려는 일종의 반동적 의지인 셈이다.
고통은 어떻게 인간을 훈련시키는가
니체의 정치철학 메시지가 지닌 폭력성은 민주적 가치와 상식으로 훈련된 독자들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다. 니체의 철학은 말기로 가면서 이렇게 극한을 향해 치닫는다. 그 극한 속에서 '사악한 니체'가 몸통을 드러낸다.
니체는 극한의 사상을 통해 인간 삶과 인간 실존의 궁극의 비밀을 폭로하려 한다. 니체 철학의 정치적, 도덕적 진술에서 드러나는 그 극단의 사상이 억눌리거나 파묻혔다면 우리의 나태한 정신을 한없이 자극하는, 니체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유례없는 사유의 세계도 생겨나지 못했을것이다. 그런 점에서 악이야말로 선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선과 부니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다는 니체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악이 악에서 그치지 않듯이 고통도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니체는 고통이야말로 창조의 원천, 성장의 동력이라고 말한다. 거기서 우리는 니체 철학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통이 우리 내부의 근원적 힘이라는 진실을 느낄 수 있다. 고통이 우리를 우리 이상의 존재로 창조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대들은 가능한 한 ... 고통을 근절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실로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키고, 이전보다 더 악화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 고통에 대한 훈련, 거대한 고통에 대한 훈련, 그대들은 바로 이 훈련이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향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불행 속에서 정신이 느끼는 긴장, 거대한 파국에 직면할 때의 정신의 전율, 불행을 짊어지고, 감내하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정신의 독창성의 용기, ... 이 모든 것들이 고통을 통해, 거대한 고통의 훈련을 통해서 정신에 부여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 안에는 피조물과 창조자가 통앨돼 있다. 이간 내부에 재료, 파편, 무절제, 점토, 오물, 광기, 혼돈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또한 창조자, 조각가, 무자비한 망치, 신과 같은 관조자, 그리고 제7일이 들어 있다. 그대들은 이러한 대립을 이해하는가? 그리고 그대들의 동정심이란 것이 '인간 안에 있는 피조물', 곧 형성되고 부서지고 단련되고 찢기고 불태워지고 달구어지고 정련되어야 하는 것, 고통 받을 수밖에 없고, 또 고통 받아야만 하는 것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가? <선악의 저편>
고통이야말로 자기 창조의 원천적 힘이다. 니체는 고통의 크기가 한 인간의 고귀함과 비범함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큰 고통을 겪고 이겨낸 사람들에게 니체의 말은 어떻게 다가올까.
(깊은 고통을 겪은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 덕분에 가장 영리하고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자기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멀고도 무서운 세계에 한때 '거주한' 적도 있으며 따라서 그곳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다. .... 이러한 은밀한 정신적 긍지와 지식의 선민의식을 지닌 고통받은 자, '창조하는 자', 그리고 희생자라고 할 만한 인간은 주제넘은 간섭이나 동정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만큼 고통받지 않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종류의 가장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큰 고통은 고귀함과 비범함을 낳는다. <선악의 저편>
'선악의 저편'은 우리에게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적 도덕이 가르치는 선과 악의 세계를 떠나 저편에서 이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니체는 '자기 안에서 시대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편견에 대한 사상'은 그것이 만일 편견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면 도덕 외부에 서 있을 것을, 우리가 걸어 오르고 기어오르고 날아 올라야만 하는 선악의 저편을 그 전제로 요구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선과 악으로부터의 저편, 그 모든 '유럽'으로부터의 자유, 우리의 피와 살이 되어버린 명령적 가치 평가 전체로부터의 자유를 전제로 요구한다. ... 문제는 인간이 정말로 그곳에 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인식을 향한 의지를 그처럼 멀리 자신의 시대를 넘어 밀고가기 위해서는 수천 년을 조망할 수 있는 눈을 창조해내고, 더 나아가 이 눈 속에 순수한 하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몸이 매우 가벼워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유럽인들을 짓누르고 저지하고 억압하고 무겁게 만드는 많은 것들에서 풀려나야만 한다. 자기 시대의 최고의 가치 척도를 조망하려 하는 이러한 피안의 인간은 자기 안에서 이 시대를 '극복해야' 한다. <즐거운 학문>
헤겔은 '자기 시대를 개념으로 포착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말한다.
니체는 '자기 안에서 자기 시대를 극복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는 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자가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
13 도덕의 계보
"지금까지 쓴 것들 중에서 가장 섬뜩한 책."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인간의 '내면화'라는 것이다. 이 내면화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훨씬 나중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해냈다.
원래는 두 개의 얇은 피부막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빈약했던
저 전체 내면세계는 인간 본능의 발산이 저지됨에 따라
더욱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
<도덕의 계보>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였다."
<도덕의 계보>
각 논문의 서두 부분은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오도한다. 즉 냉정하고 학적이고 심지어는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일부러 강조도 하고 일부러 질질 끌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점차 동요가 커진다. 산발적으로 번개가 치기도 한다. 아주 기분 나쁜 진리들의 둔중한 으르렁거림이 멀리서부터 점차 커지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극도로 긴장시키며 앞으로 내모는 폭풍 같은 거친 속도에 이른다. 마지막에는 매번 전율스런 폭발이 일어나고 두꺼운 구름 사이로 새로운 진리가 하나 눈에 보이게 된다. <이 사람을 보라>
암흑의 신 디오니소스가 쓴 책답게 섬뜩하고 기분 나쁘고 독자를 전율하게 하며 폭풍과 폭발을 일으킨다는 얘기다.
자연적인 사물이 세상으로부터 저절로 생기듯이 이 책도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도덕의 계보>는 빠르고 거친 속도로 기술함으로써 폭주 기관차 속의 승객들처럼 독자들을 엄청난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고, 번개를 내리치듯 섬뜩한 명제들을 독자의 정수리에 내리꽂는다.
첫 번째 논문은 기독교의 탄생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는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그냥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르상티망(원한)의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다. 본성상 기독교는 하나의 반동이며, 고귀한 가치의 지배에 맞선 일대 반역이다.
두 번째 논문은 양심의 심리학을 제공한다. 양심이란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음성'이 아니다. 양심은 더는 외부를 향해 폭발할 수 없게 되자 방향을 정반대로 바꿔 자기를 향하게 된 잔인성이라는 본능이다. 잔인성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떨쳐버릴 수 없는 문화의 토대라는 것이 여기서 최초로 폭로되었다.
세 번째 논문은 금욕주의적 이상, 성직자의 이상이 전형적인 해로운 이상이고 종말 의지이며 퇴폐적인 이상인데도 왜 그 이상이 그렇게 가공할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준다. 대답은 이러하다.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신이 성직자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 이상보다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상이 지금까지 유일한 이상이어서 그것의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허무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사람을 보라>
<도덕의 계보> 제1부는 기독교의 심리학을, 제2부는 양심의 심리학을, 그리고 제3부는 성직자의 심리학을 파헤치고 있다. 선이니 악이니 하는 도덕적 편견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밝힘으로써 '도덕 혹은 가치의 발생사'를 서술하는 셈이다.
"가장 강력한 것은 '서문'이네. 최소한 그 안에는 내가 전념하던 가장 강한 문제가 가장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하는 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히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도덕의 계보> '서문'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인가? 우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도덕 가치의 근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도덕적 가치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왜 우리 위에 군림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가치를 그냥 본래부터 있는 것으로, 변경할 수 없는 사실로, 모든 문제 제기를 넘어선 것으로 받아들일 뿐, 그 가치 자체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인류의 복지와 진보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심해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가 진리라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 <도덕의 계보>
니체의 책은 바로 사람들의 보편적인 믿음을 도덕적 편견의 소산으로 돌리고, 그런 믿음의 반대편에 있는 명제가 오히려 진리에 가까움을 입증해간다.
니체는 서문에서 동정심 혹은 연민이라는 도덕을 사례로 들어 그 가치를 따져본다. 약한 것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이야말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도덕적 가치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동정심이라는 도덕적 가치에서 인류의 커다란 위험을 본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동정심)에서 나는 종말의 시작을, .... 삶에 반항하는 의지를, 궁극적인 병의 연약하고 우울한 증표를 보았다." <독덕의 계보>
니체는 철학자들마저 휩쓸어 병들게 하는 그 동정심이라는 도덕을 "유럽 문화의 무서운 징후"로, 나아가 "허무주의에 이르는 우회로"로 규정한다.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도덕적 가치가 어떻게 하여 허무주의로 가는 우회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도덕적 상식을 해체하는 니체 사유의 전복성이 이 도발적인 물음에 들어 있다.
약한 자들을 돌보고 약한 자들과 함께하고 약한 자들의 편이 되는 것이야말로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약한 자 위에 군림하고 약한 것을 착취하는 강한 자들은 도덕적으로 거부해야 할 대상이 된다. 약한자를 위하고 강한 자를 부정하는 태도가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다고 해보자. 강한 자는 그 문화의 압박에 눌려 차츰 줄어들다가 소멸하고 말 것이다. 니체는 강한 자들이 강한자들과 맞붙어 더 강한 자를 산출할 때만 인간의 상승과 고양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강자를 부정하고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가치의 중심을 이룬다면 인류에게 남는 것은 쇠락과 종말뿐이다. 허무만 남는 것이다.
니체는 약자가 승리하고 강자가 소멸해가는 이 역사 전체와 오직 혼자 힘으로 맞붙어 싸운다. 이 '불가항력'의 혈투 속에서 니체의 언어는 한없이 격렬해지고 과격해진다.
니체가 주목하는 것은 '선(Gut)'이라는 말이 어떻게 '선함(착함)'과 '좋음'이라는 비슷하지만 다른 뜻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 그리고 그 두 가지 뜻에 대응하여 '선함'에는 '악함'이, '좋음'에는 '나쁨'이 결부되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니체는 '선함'과 '좋음'이라는 두 가지 뜻의 기원이 명확하게 계급적으로 다르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좋음과 나쁨'은 귀족의 평가 방식이고 '선함과 악함'은 노예의 평가 방식이라는 게 니체의 설명이다.
여러 가지 언어로 표현된 '좋음'이라는 명칭이 어원학적인 관점에서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었다. 여기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이 동일한 개념 변화에서 기인함을 발견했다. 즉 어느 언어에서나 '좋음'은 '고귀한', '귀족적인'이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가 기본이며, 여기에서 '정신적으로 고귀한', '귀족적인',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질의',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가 필연적으로 발전해 나오는 것이다. <도덕의 계보>
좋음은 자신을 먼저 긍정하고 나서 상대방을 자신과 견주어 그보다 못한 것, 저급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요컨대 귀족은 먼저 자기를 긍정하고 그다음에 자기와 다른 것을 부정한다.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았다고 표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판단은 '좋은 인간들' 자신들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즉 저급한 모든 사람, 저급한 뜻을 지닌 사람, 비속한 사람, 천민적인 사람들과 대비해서 자기 자신과 자기 행위를 좋은 것으로, 즉 제1급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사람, 강한 사람, 높은 사람, 높은 뜻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 더 높은 지배 종족이 더 낮은 종족, 즉 '하층민'에게 품고 있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전체 감정과 근본 감정, 이것이야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 <도덕의 계보>
'선과 악함'이라는 쌍개념은 르상티망(원한)을 품은 사람에게서 기원한다. 다시 말해,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 '선함과 악함'이라는 말로 나타난다. "모든 귀족 도덕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기양양한 긍정에서 발전되는 반면에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외부적인 것, 자기 아닌 것, 다른 것을 부정한다. 이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에서 창조적 행위인 것이다. 가치 설정의 시선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는 것이 르상티망의 본질이다." <도덕의 계보>
자기 자신을 고통에 빠뜨리는 외부의 어떤 힘을 부정하여 그것을 '악함'이라고 규정한 뒤, 그 반대 모습에서 '선함'을 찾는다. "원한의 인간이 생각하는 적을 상상해보자. 바로 여기에서 그의 행위, 그의 창조가 드러난다. 그는 우선 '사악한 적'을, 즉 악인을 마음속에 품고, 이것을 사실상 기본 개념으로 해서 그다음 바로 거기에서 그것의 반대, 대조되는 상으로서 '선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해내는데, 그 선한 인간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도덕의 계보> 이것이 바로 노예의 평가 방식이다.
"귀족은 '좋음'이라는 근본 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내고, 거기에서 비로소 '나쁨'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내게 된다!" <도덕의 계보>
니체는 노예 정신이 르상티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정신을 경멸한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지니고 솔직하게 생활하는 데 반해서 ..... 르상티망의 인간은 결코 솔직하거나 순진하지 않으며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정직하거나 순진하지 않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을 한다. 그의 정신은 은닉처를, 은밀한 길을, 뒷문을 사랑한다. ... 그는 침묵을 지키는 법, 잊어버리지 않는 법, 기다리는 법, 잠정적으로 자기를 낮추고 비굴해지는 법을 안다." <도덕의 계보> 이 원한의 인간들은 원한 속에서 머리를 쥐어짜기 때문에 결국엔 고귀한 종족보다 더 영리해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귀족적 인간은 르상티망에 짓눌리지 않는 인간이다. 원한에 붙들려 질질 끌려가느냐 원한을 깨끗이 잊어버릴 줄 아느냐가 귀족적 인간이냐 아니냐를 판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원한 그 자체가 설령 귀족적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일이 있다 해도, 뒤따라오는 반작용으로 깨끗하게 지워져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해독을 끼치지 않는다. ... 자기의 적, 자기의 재산, 심지어 자기의 비행까지도 그렇게 오래도록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 강하고 충실한 인간의 표시인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때 웅변가로 활약했던 미라보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한 모욕과 비열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했고, 벌써 잊어버렸기 때문에 용서할 수도 없었다.
니체는 원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약자의 정신을 단 한순간도 긍정하지 않는다. 약자는 원한의 정신을 지녔고, 강자는 약자와는 정반대의 정신을 지녔다.
어린양들이 커다란 맹금을 몹시도 싫어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이 커다란 맹금이 어린양을 채어가는 것을 비난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린양들이 저희들끼리 "맹금은 사악하다. 따라서 맹금과는 될수록 먼 것, 오히려 그 반대, 즉 어린양이야말로 '선한' 것이 아닌가?" 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이 이상을 수립하는 데는 조금도 비난할 점이 없다. 더군다나 맹금들은 이것을 약간 비웃듯이 바라보며 "우리는 그들을, 이 선량한 양들을 조금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연한 어린양만큼 맛있는 것은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도덕의 계보>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니체가 긍정하는 귀족은 자기를 긍정하는 고귀한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귀족적 인간은 이 어린양을 잡아먹는 맹금과 같은 존재, 다시 말해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고, 상대의 뜻과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써먹는 자를 함께 뜻하낟. 니체의 귀족은 자기 긍정으로 충만한 고귀한 인간의 모습과 정복욕으로 가득 찬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반면에 원한의 인간은 한편으로는 어린양처럼 순하고 선한 인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천하고 비굴한 인간이다. 원한의 인간은 집요한 복수 의지로 귀족을 넘어뜨리는 영리함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또 그런 점에서 강자에 맞서는 약자의 권력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결코 니체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철학자 들뢰즈는 강자의 권력의지는 긍정적 권력의지이며 약자의 권력의지는 부정적 권력의지다. 강자의 권력의지는 삶을 창조하고 확장하는 권력의지인 데 반해 약자의 권력의지는 삶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권력의지다. 또 들뢰즈는 강자가 지닌 힘을 능동적 힘이라고 부르고 약자가 지닌 힘을 반응적 힘이라고 부른다.
강자의 힘은 먼저 작용하는 힘이고, 반대로 약자의 힘은 그 작용하는 힘에 맞서 반작용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우아함, 고귀함,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때로는 능동적 힘이고 때로는 긍정적 의지(권력의지)다. 그가 저속함, 비루함, 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때로는 반응적 힘이고 때로는 부정적 의지(권력의지)다."
유대인이야말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정연한 논리로 귀족적 가치 등식(좋은=고귀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의 역전을 감행했으며, 가장 깊은 증오의 이빨을 갈며 이 반란을 끈질기게 계속했던 것이다. 즉 "가련한 자만이 오직 선한 자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선한 자다.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만이 경건한 자이며 신에게 귀의한 자이고, 축복은 오직 그들에게만 있다. 그리고 너희, 강하고 고귀한 자는 이와 반대로 영원히 사악한 자, 잔인하 자, 음란한 자, 탐욕스러운 자, 신을 거스르는 자다. 그뿐만이 아니라 너희들이야말로 영원히 축복받지 못할 자, 저주받을 자, 멸망할 자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도덕의 계보>
'로마 대 유대'의 싸움. 두 도덕의 싸움은 이제까지 지상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하고 거대한 싸움이었다.
"로마인은 확실히 강하고 고귀한 자였다. 그들보다 더 강하고 고귀한 자는 이 지상에 존재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그 존재를 꿈꾸어본 적도 없다 .... 반대로 유대인들은 탁월한, 저 원한의 성직자 민족이며 민중 도덕에 관해서 비할 바 없이 창의성을 발휘한 민족이다." <도덕의 계보>
르네상스 때 일시적으로 기독교의 가치를 뚫고 로마의 가치가 부흥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로마를 누르고 우위에 선 것이다. 이어 18세기 말에 프랑스혁명을 통해 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니체는 나폴레옹의 등장을 왜 열광하는가.
"다수의 특권이라는 원한의 낡아 빠진 허위적 구호에 대항해서, 인간을 저열하고 비굴하게 만들며 평균화시키고 하강과 몰락으로 가져가는 의지에 대항해서, 소수의 특권이라는 무섭고도 매혹적인 반대 구호가 예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 단순하고 진지하게 우려 퍼졌기 때문이다." <도덕의 계보>
니체가 찬양하는 귀족은 야수성 혹은 잔인성과 고귀함 혹은 위대함을 함께 지닌 존재다. 그런 귀족의 모습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 '금발의 야수'다.
그 전사 귀족은 바로 노예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악한' 사람이고, 반대로 귀족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좋은' 사람, 곧 "고귀한 자, 강한 자, 지배자"다.
거기서 그들은 모든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음미하며, 사회의 평화 속에 오랫동안 감금되고 폐쇄되어 생긴 긴장을 황야에서 풀며 보상받고자 한다. 그들은 소름끼치는 일련의 살인, 방화, 강간, 고문으로 유쾌해지고 영혼의 평정을 찾는 의기양양한 괴물처럼 순전한 맹수의 심성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마치 학생들의 장난질처럼 저질러지며, 그들은 자신들이 시인들에게 훨씬 더 많은 노래와 칭송거리를 선사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모든 고귀한 종족의 밑바닥에서 맹수, 즉 먹잇감과 승리를 갈구하며 어슬렁대는 눈부신 '금발의 야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숨겨진 본성은 때때로 분출될 필요가 있으며, 짐승은 다시 풀려나 황야로 되돌아간다. 로마, 아라비아, 게르만, 일본의 귀족 계급, 호메로스의 영웅들,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 그들은 모두 이런 욕구를 지니고 있다. <도덕의 계보>
귀족적 종족은 그들의 발자취가 지나간 곳에는 어디든지 '야만인'이라는 개념을 남겨놓았다. 심지어 그들의 최고의 문화 속에서조차 이런 사실에 대한 의식이나,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한 자랑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페리클레스는 그 유명한 추도 연설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대담한 모험으로 모든 대륙과 바다에 길을 열어, 모든 곳에다 좋은 모습으로든 나쁜 모습으로든 불멸의 기념비를 세웠다." 미치광이 같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급작스럽기도 한 귀족적 종족들의 이러한 '대담함',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예상하기 어려운 그들의 모험의 예측 불가능성, ... 안전, 육체, 생명, 쾌적함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과 경시, 모든 파괴 속에서, 승리와 잔인함에 대한 모든 탐닉 속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오싹할 정도의 명랑함과 즐거움의 깊이, 이 모든 것은 그것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들에게는 '야만인'의 이미지로, '사악한 적'의 이미지로, 아마도 '고트족', '반달족'과도 같은 이미지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이 권력을 장악할 때마다 일어나는 저 깊고도 얼음처럼 차가운 불신은 몇 세기 동안이나 금발의 게르만 야수의 광포함을 보아왔던 유럽인들에게는 지울수 없는 공포의 여운인 것이다. <도덕의 계보>
니체를 위험한 철학자로 만드는 것은 그가 일관성 있게 보여준 반민주적이고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적 귀족주의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든 귀족적 종족의 근저에 숨어 있는 금발의 야수를 무서워하고 그것을 경계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서워하지는 않지만 그 대신, 이제 불구자, 난쟁이처럼 위축된 자, 여윈자, 중독된 자들의 구역질 나는 환경에 영원히 함몰되어버린다면, 오히려 무서워하면서 경탄하는 쪽을 몇백 배나 더 기꺼이 선택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공포가 아니다. 혐오감을 품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이젠 우리들이 인간에 대해 무서워해야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며, '인간'이라는 구더기가 날뛰고 우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며, '길들여진 인간', 어찌하지도 못할 정도로 범용하고 생기 없는 인간이 벌써 자신을 목표와 정점으로, 역사의 의미로, '더 높은 인간'으로 여기게 됐다는 사실이다. <도덕의 계보>
이 구절에서 니체는 금발의 야수가 패배함으로써 오늘의 유럽에는 혐오스러운 인간만 남게 되었다고 단언하면서, 그런 혐오스러운 인간을 보느니 무서운 금발의 야수를 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금발의 야수를 패배시켜 온순한 동물, 곧 가축으로 만드는 것이 유럽의 수천 년 역사였다는 이야기다. 이 역사는 흔히 우리가 '문화' 혹은 '문명화 과정'이라고 부르는 그 과정과 일치하는 것인데, 니체는 인류가 거친 야만인에서 온건한 문명인으로 진화했다는 '문명화 통념'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더 나은 인간으로 진화해온것이 아니라 야수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한갓 가축으로 전락해버렸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맹수를 온순하고 개화된 동물, 즉 가축으로 길들이는데 모든 문화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 오늘날 진리로 믿어지고 있는데,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고귀한 종족과 그들의 이상을 결국 모욕하고 제압하게 된 저 반동 본능과 원한 본능이야말로 의심할 여지없이 실질적인 '문화의 도구'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도덕의 계보>
니체가 우리 현대인의 내면 저 깊은 곳에 감춰진 야수의 본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문화는 인간의 야수적 본능을 내리눌러 의식의 지하실로 몰아넣음으로써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내면의 야수성을 결코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는데, 이렇게 저 바닥 밑을 억눌린 야수성이 그 내면의 저층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도덕의 계보>의 두 번째 논문의 내용을 이룬다.
두 번째 논문은 '양심의 가책'이라는 심리 현상이 어떤 경로로 생겨났는지 추적한다. 아마도 니체의 이 책에서 처음으로 양심의 가책이라는 자기 처벌의 심리가 규명됐을 것이다. 핵심은 양심의 가책이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선 공격성의 산물'이라는 새로운 설명에 있다. 공격성이 방향을 바꿔 자기 자신을 향할 때 그곳에서 양심의 가책이 생겨난다는 것이 니체 주장의 요지이다.
나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인간이 일찍이 체험한 모든 변화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저 변화의 압력 때문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던 심각한 병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란, 인간이 결국은 사회와 평화의 방벽 안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일어난 변화를 말한다. 육지동물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사멸해버리든가 하는 강요된 선택에 직면한 바다 동물의 상황과 똑같은 것이 황무지, 전쟁, 방랑, 모험에 잘 적응했던 이 이간이라는 반동물에게도 닥쳤던 것이다.
이 불행한 반동물들, 그들은 단지 사유, 추리, 계산, 인과적 결합에만 의존하게 되었고, 가장 빈약하고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관인 저 '의식'에만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이처럼 비참한 느낌, 이처럼 무거운 불쾌감은 일찍이 지상에 없었던 것이다. <도덕의 계보>
니체는 양심의 가책이 적극적인 의욕의 산물이 아니라 삶의 궁지에 몰린 인간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자유의 본능으로 황야를 마음껏 질주하던 반동물이 사회라는 제도를 만들어 평화로운 공존의 삶을 살아야 하는 상황, 다시 말해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하는 그 상황에 맞딱뜨려 그 황야의 본능을 자유롭게 표출할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본능을 어찌할 것인가.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인간의 '내면화'라는 것이다. 이 내면화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훨씬 나중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해냈다. 원래는 두 개의 얇은 피부막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빈약했던 저 전체 내면세계는 인간 본능의 발산이 저지됨에 따라 더욱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 낡은 자유의 본능에 대해서 정치 조직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구축해놓은 저 무서운 방벽 -특히 형벌이 이러한 방벽에 속한다- 은 거칠고, 자유롭고, 방랑적인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이 인간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적의, 잔학, 박해, 공격, 파괴의 쾌락, 이 모든 것이 이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인 것이다. <도덕의 계보>
바깥세상을 향해 마음껏 풀어놓았던 본능들이 공격성을 금지하는 사회 제도에 막힐 때 그 본능의 힘들이 갈 곳은 자기 내면밖에 없다. 공격적 힘의 벡터가 내면을 치받을 때마다 그 세계가 넓어지고 높아지고 깊어졌다고 니체는 말한다. 조그만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 커다란 공이 만들어지듯, 석회암에 구멍이 뚫려 거대한 동굴이 되듯 내면의 세계가 공격 본능의 침탈을 받아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내면세계에서 떠오른 것이 영혼이며, 방향을 돌린 공격 본능이 그 영혼을 반복해서 타격할 때 거기서 비로소 '양심의 가책'이라는 기이한 자기 응징의 심리가 형성된다는 것이 니체의 관점이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없어지고, 관습의 억누르는 듯한 협소함과 규칙성 속에 처박힌 인간은 참을 길이 없어 자기 자신을 찢고 책망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길들이기' 위한 감옥의 창살에다 몸을 부딪혀 상처투성이가 된 이 동물, 야상에 대한 향수에 지쳐 스스로 모험과 고문대와 불확실하고 위험한 황야에 몸을 내던져야 했던 이 박탈당한 동물, 이 바보, 그리움에 시달려 절망해버린 이 죄수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인류가 오늘날에도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저 가장 무겁고 위험한 병도 비롯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병이다. 이것은 인간이 그의 동물적인 과거로부터 억지로 분리된 결과이며, 이제까지 그의 힘과 기쁨과 공포의 근거였던 오랜 본능에 대한 선전 포고의 결과였다. <도덕의 계보>
니체의 이 첫 번째 밑그림을 받아 내면에 갇힌 공격 본능에 관한 좀 더 뚜렷한 심층심리학적 그림을 그려낸 사람이 지크문트 프로이트다.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이라는 방벽 안의 인간이 해소되지 못한 공격 본능으로 겪는 불만과 불안과 고통을 추적한다. 공격 본능은 틈만 나면 방벽을 뚫고 뛰쳐나온다.
인간은 강력한 공격 본능을 타고난 존재로 추정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하여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상대로 하여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인생 경험과 역사에 대한 지식 앞에서 누가 감히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 우리 자신 속에서도 감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한테도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할 이런 공격 성향은 이웃과 우리의 관계를 저해하고, 문명에 많은 에너지 소모를 강요하는 요인이다. ... 문명이 인간의 공격 본능을 제한하고 정신적 반응 형성을 통해 공격 본능의 표출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어 몇 쪽 뒤에서 프로이트는 니체와 거의 같은 목소리로 공격 본능의 내면화로 양심이 발생하는 과정에 주모한다.
문명은 자신을 적대하는 공격성을 억제하거나 해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거나 아예 제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쓰고 있는가? ..... 우리는 개인의 발달사를 통해 이것을 연구할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공격 본능을 무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가? 그것은 너무나 놀랄 만한 수단이어서 짐작조차 못했을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지극히 명백하다. 개인의 공격 본능은 안으로 돌려져 내면화하다. 아니, 실제로는 공격 본능이 나온 곳으로 돌려보내진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자아로 돌려지는 것이다. 그러면 초자아로서 나머지 자아 위에 적대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아의 일부가 그것을 인수하여, 이번에는 '양심의 형태로 자아에 대해 가혹한 공격성을 발휘할 준비를 갖춘다. 자아는 원래 외부의 다른 개체에서 그 공격성을 발산하여 본능을 충족시키고 싶었겠지만, 이제 거꾸로 공격 대상이 된 셈이다. 우리는 엄격한 초자아와 그것의 지배를 받는 자아 사이의 긴장을 죄책감이라고 부른다. 죄책감은 자기 징벌의 욕구로 나타난다. 따라서 문명은 개인의 공격성을 약화시키고 무장을 해제시키는 한편, 마치 정복한 도시에 점령군을 주둔시키듯 개인의 내부에 공격성을 감시하는 주둔군을 둠으로써 개인의 위험한 공격 욕구를 통제한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니체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초자아의 역할을 강조한다. 방향을 반대로 바꾼 공격 본능의 에너지를 받는 주체로 초자아를 상정하고 초자아가 그 에너지로 자아를 공격할 때 거기서 죄책감 곧 양심의 가책이 생겨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때 초자아는 정복한 도시를 감시하는 주둔군처럼 공격성을 감시하는 구실을 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니체는 단도직입적으로 그 국가가 곧 '금발의 맹수'라고 말한다.
나는 '국가'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것은 어떤 금발의 맹수 무리, 지배자 종족, 정복자 종족을 일컫는다. 이들은 전투적 체제로 편성되어 있고 조직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수적으로는 아마도 압도적으로 우세하면서도 아직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유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저 없이 그 무서운 발톱을 들이댔다. 실로 이렇게 해서 지상에 '국가'가 비롯되었던 것이다. <도덕의 계보>
니체의 설명으로는 이 금발의 맹수 무리가 국가라는 형식을 만들어 유목하는 사람들을 그 국가에 가둔 결과로 양심의 가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이 발생한 것은 그들(금발의 맹수)에게서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은 ... 그들이 없었다면 생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덕의 계보>
"폭력에 눌려 잠재적인 것이 되고 만 이 자유의 본능, 밀쳐지고 억압당하고 속으로 감금되어 마침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발산되고 폭발하게끔 된 이 자유의 본능, 오로지 이것이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건설되고 나면 결국엔 금발의 야수도 이 방벽에 갇히고 마는 것이 아닐까? 일단 법이 만들어지면 그 법은 결국엔 그 법을 만든 자들조차도 지배하게 된다.
어쨌든 금발의 야수가 국가를 만들 듯이, 국가에 갇힌 반동물은 내면세계 안에 작은 규모로 양심의 가책을 창조한다. "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똑같은 대규모의 능동적 힘이 여기서는 내면에서 더욱 작고 옹색한 규모로 방향을 뒤로 돌려, 괴테의 표현을 빌리면 '가슴의 미궁' 속에서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창조하고 부정적인 이상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힘이 바로 자유의 본능(권력의지)이다. 단지 여기서는 조형적인, 그리고 폭압적인 본성을 지닌 이 힘이 작용하는 대상은 인간 그 자신, 인간의 오랜 동물적 자아 전체이지, 규모가 더 크고 한층 명백한 저 현상(국가)의 경우에서처럼 다른 인간, 다른 인간들이 아닌 것이다." <도덕의 계보>
니체가 설명하는 양심의 가책에는 일종의 르상티망이 배어 있다. 국가라는 제도의 창살에 갇혀 자유 본능을 제압당한 인간은 원한의 인간일 수밖에 없다. 양심의 가책은 이 원한을 에너지로 삼아 자기 무시, 자기 부정, 자기 학대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그 안에서 자학의 쾌감을 느끼고 그 기쁨 속에서 자기 부정이나 자기 학대와 유사한 어떤 가치를, '이기적이지 않음'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니체는 양심의 가책을 병은 병이되 무언가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임신과 유사한 병이라고 말한다.
"양심의 가책은 하나의 병이다. 이것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임신이 하나의 병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병이다." <도덕의 계보>
양심의 가책이 산출한 가장 결정적인 작품이 무엇일까? 니체는 그것이 바로 죄의식이며, 죄의식을 심어주는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니체는 다시 한 번 공격 본능에서 양심의 가책이, 양심의 가책에서 죄의식이 발생하는 과정을 요약한다.
내면화되어 자기 자신 속으로 몰린 동물적 인간, '국가' 속에 감금돼 길들여진 동물적 인간 ... 이 동물적 인간은 남을 괴롭히려는 갈망의 자연적인 출구가 막혀버린 탓에 양심의 가책을 발명해냈다. 양심의 가책을 지닌 이 인간은 그 자기 처벌을 냉혹성과 준엄성의 무시무시한 극한까지 말고 가기 위해 '종교의 추정'을 붙잡고 거기에 매달렸다. 신 앞의 죄, 이 생각이 인간에게는 자기 고문의 수단이 된다. '신'이야말로 그 자신의 벗어날 길 없는 동물적 본능에 대한 궁극적 안티테제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이 동물적 본능 자체를 '신 앞의 죄'의 한 형태로, 다시 말해 '주님', '아버지', 최초의 조상, 세계의 기원에 대한 적대이자 반란이자 봉기라고 재해석한다. <도덕의 계보>
양심의 가책을 일으키는 그 공격 본능을 인간은 신에 대한 반역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데 더욱더 매달린다. 이러한 정신적인 잔인성 속에는 비길 데 없이 강력한 의지의 착란이 놓여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받을 수 없는 죄 많은 존재, 신성한 신 앞에서 절대적ㅇ로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하려는 의지다. 이런 거대한 뒤집힘을 보면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오오, 이 미쳐버린 애처로운 짐승, 인간이여! 그가 행동의 야수성을 방해받자마자, 곧바로 얼마나 반자연적인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발작이, 얼마나 짐승 같은 추악한 생각이 분출하는 것일까!" <도덕의 계보>
이렇게 하여 니체는 인간이 신성한 신과 그 신에 대한 죄위식에 사로잡히게 된 역사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국가라는 장벽에 갇혀 자유의 본능이 억압당한 것이 발단이었다. 금발의 야수에게 잡혀 노예가 된 이 인간들이 모든 자기 부정적이고 자기 학대적인 종교적 관념을 만들어낸 주체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 시점에 지배자들을 제압하고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내면을 채우고 있던 죄의식 관념이 마침내 세상 전체를 지배하게 됐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세 번째 논문에서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검토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말하자면 성직자적 이상이다. 성직자란 어떤 존재인가.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는 사람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성직자들의 권력 추구의 가장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권력에 대한 최상의 면허증이 되기도 한다." <도덕의 계보> 말하자면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뒤집힌 형태의 권력의지다. 금욕적인 성직자는 사제복을 입은 권력의 인간인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이렇게 분석해가다 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무언가를 향한 의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이 드러난다. "인간의 의지는 목표를 요구한다. 이 의지는 아무것도 욕구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허무를 욕구한다.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도덕의 계보> 이 결론을 찾아 가는 것이 이 논문의 본문이다.
니체는 먼저 금욕적 성직자, 다시 말해 위장한 권력의지의 인간이 모든 시기, 모든 계층에 걸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금욕적 성직자는 하나의 종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곳에서 번성하며, 사회 모든 계층에서 나타난다." <도덕의 계보>
니체는 금욕적인 인간은 하나의 자기모순이라고 말한다. 삶에 적대적이면서 동시에 어떤 의지로 가득 찬 인간이기 때문이다. 삶 그 자체에 대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들에 대한 지배자가 되려는 탐욕스런 본능과 권력의지의 원한이 이 금욕적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다시 말해 삶 자체를 부정하는 어떤 의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생리적 행복 그 자체는 눈총을 받게 된다. ... 반면에 즐거움은 ... 자발적인 궁핍과 고행, 자기 채찍질, 자기 희생에서 느껴지고 추구된다. 이 모든 것이 아주 지극히 역설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내적인 불화를 바라는, 고통 속에서 고통 자체를 향락하려는, 그리고 심지어는 삶을 위한 생리적 능력이 감퇴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만만해하고 의기양양해하는 불화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도덕의 계보>
니체는 금욕적 인간은 병든 인간이고,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간을, 인간의 삶을 병들게 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이 금욕주의적 이상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고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병든 사람이다. 니체는 병든 사람이 건강한 사람에게 가장 큰 위험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병든 자는 건강한 자에게 가장 큰 이험이다. 강자에게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가장 강한자들이 아니라 가장 약한 자들이다. .... 인간의 가장 커다란 위험은 병자다. 악인이나 '맹수'가 아니다. 처음부터 실패한 자, 유린당한 자, 좌저란 자, 가장 약한 자들인 이 사람들을 인간 삶의 토대를 허물어버리고 삶과 인간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심 속으로 몰아넣고 그 신뢰에 아주 위험하게 독을 타는 자들이다." <도덕의 계보>
여기서 병자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사로잡힌 자다. 비유의 의미 (아픈 약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는 병든 자들, 약한 자들이 권력의지를 행사한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생명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성격이 문제다. 강자의 권력의지는 삶을 찬양하고 삶을 증진시키는 건강한 권력의지지만, 약자들의 권력의지는 강자들을 거꾸러뜨리고 삶에 독을 타려는 불건강한 권력의지라고 니체는 말한다.
그 약자들은 건강한 자들가 어떻게 싸우는가. "실로 가장 약한 자들의 권력의지가 발견되지 않는 곳이 있단 말인가! ... 모든 가족, 모든 단체, 모든 공동체의 배경을 살펴보라. 그 어느 곳에서든 저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병자들의 싸움이 있다. 독으로, 아프게 찌르는 말로, 교활한 안내자의 무언극으로, 그리고 또 때때로 '고상한 분노'를 가장 잘 연출하고자 하는 저 병자의 바리새주의로 보통은 조용하게 싸운다." <도덕의 계보>
"이 생리적으로 실패한 자들이자 벌레 먹은 자들, 이들은 모두 원한의 인간들이며, 무시무시할 정도로 지하의 복수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이들은 운 좋고 행복한 자들에 대해 복수의 감정을 터뜨리는 일에도, 복수의 가면무도회나 복수의 구실을 만드는 일에도 전혀 싫증을 낼 줄 모르는 자들이다." <도덕의 계보>
니체는 이 약자들이 강자들에 대항해 승리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들은 도대체 언제 최후의 가장 세련되고 섬세한 복수의 승리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 자신의 불행을, 모든 불행 일반을 행복한 자들의 양심에 밀어 넣는 데 성공할 때가 그때다. 그러면 이 행복한 자들은 어느 날엔가는 자신들의 행복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시작할 것이고, 아마 서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이다. "행복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너무 많은 불행이 있다!" <도덕의 계보>
니체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약자들이 가자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방식이다. 이것은 또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승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행복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행보하다면 그것은 약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행복에 대한 권리는 없고 행복을 버릴 의무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생각이 일반화된 세계야말로 '가치가 거꾸로 뒤집힌 세계'다. 그리하여 니체는 외친다.
"이런 '전도된 세계'는 꺼져버려라! 이러한 치욕적인 감정 거세는 사라져버려라! 병자가 건강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일이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상에서 최고의 관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도덕의 계보>
"절대적으로 성실한 무신론은 겉보기처럼 저 이상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최후의 진화 국면의 하나이며 이 이상의 최종적 형태, 내면적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거짓을 스스로 금지하는 것(무신론)은 바로 2,000년에 걸친 진리 훈련의 무서운 파국인 것이다." <도덕의 계보>
그런 점에서 금욕주의적 이상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리를 알고야 말겠다는 진리 의지로 나타나고 이 의지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자기 부정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동안 진리로 간주되었던 것 하나하나를 모두 따져보면 결국 신도 저세상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있는 것은 이 대지와 이 세상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건의 문턱에 서 있다. 기독교적 성실성이 하나씩하나씩 결론을 이끌어낸뒤, 최후에는 가장 두드러진 결론, 즉 자신에 반대되는 결론을 이끌어냄으로써 몰락할 수밖에 없다." <도덕의 계보>
그렇다면 어디에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이토록 고통스럽게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지상에서 인간의 생존은 어떠한 목적도 품지 못했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해답이 없는 물음이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빠져 있다. 모든 커다란 인간 운명의 배후에는, 더 커다랗게 '헛되다'라는 후렴이 울려 퍼지고 있다. ....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였다. <도덕의 계보>
니체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용감하고 괴로움에 익수간 존재여서 괴로움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괴로움의 목적, 괴로움의 이유가 제시되기만 한다면 사람은 괴로움을 바라고 괴로움을 찾기까지 한다고 단언한다. "괴로움 그 자체가 아니라, 괴로움의 무의미가 바로 이제까지 인류에게 내린 저주였다." 그런데 금욕주의적 이상이 인간에게 하나의 의미를 주었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류에게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통해 괴로움이 해석되었으며, 가공할 공허가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자살과도 같은 허무주의의 문이 닫혔다. ... 이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은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더는 바람에 휘날리는 가련한 나뭇잎이 아니었으며, 무의미의 놀잇감이 아니었다. 이제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지하게 되었다. 어디를 향해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의욕했던가는 아무래도 좋다.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도덕의 계보>
니체는 인간이란 존재는 무언가를 의지하고 의욕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인데, 금욕주의적 이상이 그 인간에게 의지의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주었다고 말한다. 만약 그 의지가 없었다면 인간은 무의미에 갇혀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의지의 내용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의지는 구출해주었을지 몰라도 삶 그 자체를 구출해주지는 못했다. 무슨 이야기인가?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의욕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증오와 부정과 비방을 의욕했던 것이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도덕의 계보>
니체는 삶에 대한 이 모든 부정의 의지를 가리켜 "허무를 향한 의지"라고 부르고, 그것이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한 반역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지한다." <도덕의 계보>
이제까지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었던 금욕주의적 이상이 허무 의지에 불과하다면, 왜 그런 이상이 이제껏 인간의 삶을 지배해왔던가?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그 이상에 맞서는 반대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도덕의 계보>는 그 반대 이상을 다루지는 않는다. 단지, 반대 이상이 등장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근원적으로 허무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름의 방식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렇다면 반대 이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반대 이상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구상 중이던 <권력의지>에서 그 반대 이상을 본격적으로 펼쳐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끝내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14 우상의 황혼
"나는 지난 천년과 앞으로
올 천년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저인 사건이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우상의 황혼>
널리 읽힘으로써 승리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무도 읽지 못하는 책을 씀으로써 독창성의 승리를 거두겠다는 오만에 찬 저항의 외침인 것이다.
작품이 힘을 얻어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그 작품의 존재 의의는 퇴색할 수밖에 ㅇ벗다.
나는 지난 쳔년과 앞으로 올 천년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이고 운명적인 사건일걸것이네."
들뢰즈는 이 시기 니체가 보여준 놀라운 창조성에 대해 말한다.
"위대한 해인 1888년이 온다. <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이 모든 것은 니체의 창조적 능력이 고양되고, 붕괴에 선행하는 최후의 비약을 감행하는 것처럼 진행된다."
"어떤 사람도 나보다 더 위험하게 바그너적인 것과 하나가 되어 있지는 않았고, 어느 누구도 그것에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보다 더 기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긴 실제의 이야기다! 이 실화에 명칭을 원하는가? 내가 모랄리스트였다면, 어떤 이름을 붙였을지 아는가? '자기 극복'이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바그너의 경우> '서문'
이 구절은 니체가 바그너 극복을 일종의 자기 극복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니체 내부에는 너무나 많은 바그너가 있어서 그것들을 떨쳐내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한 철학자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에도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기가 사는 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를 그 시대의 아들이게끔 만드는 것이다. 자, 나는 바그너만큼이나 이 시대의 아들이다. 내가 한 사람의 데카당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파악했던 것이고, 바로 이것이 내가 저항했다. 내 안에 있는 철학자가 이것에 저항했다. <바그너의 경우>
니체에게 데카당스란 강한 인간에게서 힘을 빼앗고, 약한 인간을 승리하게 만드는 모든 경향이다. 강자의 권력의지를 부식시키고 부패시키는 약자의 도덕, 약자의 사상이 바로 데카당스의 핵심이다. 퇴폐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문란하고 비도덕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선한 삶이 데카당스의 핵심에 들어 있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기독교의 최고 덕목인 '연민', 곧 약한 자들을 껴안는 마음이다.
"내가 데카당이라는 사실은 별도로 하고, 나는 데카당의 반대이기도 하다. .... 나는 총체로서는 건강했으나, 특정 한 각도, 특수한 면에서는 데카당이었다. ... 나는 나 자신을 떠맡아, 나를 스스로 다시 건강하게 만들었다. ... 나의 건강에 대한 의지와 삶에 대한 의지를 나는 내 철학으로 만들었다." <이 사람을 보라>
<파르지팔>의 서곡을 처음으로 듣고 그 감흥을 페터 가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털어놓았다.
"바그너가 이보다 더 나은 것을 작곡한 적이 있었던가? 최고 수준의 심리적 지성과 여기서 발언되고 표현되고 소통되어야 하는 것들의 정의가 가장 간략하고 직설적인 형태로 표출되고 전달되었으며, 감정의 모든 뉘앙스들이 하나의 경구만 한 크기로 응축되었네. ... 마지막으로 그것은 숭고하고 아주 특별한 느낌이고 경험이며 음악의 기저에서 영혼이 일으키는 사건으로서 바그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네."
"심리학적으로도 내 고유한 본성의 결정적인 모든 특징이 바그너의 것으로 이 에세이에서는 기재되어 있다. 가장 밝고도 가장 숙명적인 힘들의 병렬, 어떤 인간도 갖지 못했던 권력의지, 정신적인 면에서의 과감한 용기, 배우고자 하는 무제한의 힘, 하지만 행동하려는 의지를 압살하지는 않는다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바그너에 대한 모든 투쟁은 니체가 자기 자신과 벌인 투쟁이었다.
바그너를 극복하고 나서도 바그너 내부의 본질적인 것, 곧 '어떤 인간도 갖지 못했던 권력의지'와 그것을 실현하려는 '과감한 용기'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니체 자신의 본질로 남게 된다.
'우상의 황혼'은 바그너의 4부작 <니벨룽의 반지> 마지막 작품 <신들의 황혼>을 비튼 제목이었다. 이 책의 부제는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법'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우상'을 가리켜 "이상을 표현하는 내 단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니체는 사람들이 '이상'을 여기는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상이 우상일 뿐임을 폭로하는 작업은 어찌 보면 전 생애를 관통하여 니체가 했던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작은 책은 중대한 선전 포고다. 그리고 캐내는 대상이 되는 우상들은 한 시대의 우상들이 아니라 영원한 우상들이다." <우상의 황혼>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불려나오는 우상이 소크라테스다. 왜 소크라테스는 데카당인가. 삶을 비방하고 죽음을 찬미한 자이기 때문이다. 삶을 혐오하고 죽음을 숭배하는 것, 그것이 서구 정신의 시원에서부터 시작된 일이라는 것이다.
논리적 대화를 통해 '참'을 찾아 가는 것이 변증법인데, 니체는 이 변증법이 고귀한 취향에 반하는 천민들의 정복 수단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변증법의 발명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였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그리스 취향은 변증법에 유리하게 돌변했다. 그때 진정 무슨일이 벌어진 것일까? 무엇보다 고귀한 취향이 정복되었다. 천민이 변증법을 수단으로 삼아 상부로 올라섰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변증법적인 수법이란 건 건전한 사회에서는 거부되었다. 이것은 나쁜 수법으로 간주되었고 조롱받았다. <우상의 황혼>
우리는 논리라는 것이 배운 사람들의 수단이고, 변증법이라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훌륭한 도구라고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믿음이다. 그런데 지금 니체는 그 오래된 믿음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변증법적 논리가 천민의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품위 있는 사람이 그러하듯 품위 있는 것들은 자신의 근거를 그런 식으로 내세우지 않는 법이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보여주는 것은 점잖지 못한 일이다. 스스로를 먼저 입증시켜야만 하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권위가 미풍양속에 속하는 곳, '근거를 들어 정당화하지' 않고 명령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변증론자는 일종의 어릿광대에 불과하다. ... 소크라테스는 어릿광대였지만,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어릿광대였다. <우상의 황혼>
진정한 주인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그는 명령학 자기 뜻을 권위로써 관철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수단이 없을 경우에만 변증법이 선택된다. ... 그것은 단지 다른 무기를 전혀 갖추지 못한 자들이 정당방위일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권리를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런 이유에서 유대인은 변증론자였던 것이다." <우상의 황혼>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불러내 니체 당대의 문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변증법으로 대변되는 논리주의는 평민이 사용할 수 있는 저항과 투쟁의 무기, 민주주의의 가장 요긴한 무기다.
논리학이 민주주의의 무기, 약자의 무기임을 니체는 다른 책에서 유대인들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믿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못하다. 유대인 출신 학자들은 모두 논리를, 다시 말해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동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자신들에 대한 인종적, 계급적 반감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믿으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논리로 승리를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논리학보다 더 민주적인 것은 없다. 논리학은 개인을 고려하지 않으며 매부리코(유대인)와 곧은 코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즐거운 학문>
'존재의 철학'에서 '생성의 철학'으로
이제 니체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띄워 올린 '이성'이라는 우상을 향해 망치를 들고 나아간다.
철학자들한테서 나타나는 특이 성질이 전부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가? 그들의 역사적 감각의 결여, 생성이라는 생각 자체에 대한 증오, 그들의 이집트주의가 그 예다. 어떤 것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탈역사화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영예롭게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미라로 만들면서 말이다.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이용했던 모든 것은 죄다 개념의 미라들이었다. 실제의 것은 어느 것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개념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이런 철학자 제씨들, 이들은 숭배하면서 죽여버렸고, 박제로 만들어버렸다. <우상의 황혼>
플라톤의 '이성'은 영원한 것, 변치 않는 것을 찾는다. '생성'이 아니라 '존재'를 찾는다.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들, 생성 속에 있는 것들은 영원한 불변의 것, 곧 존재가 아니다. 이성은 그 영원한 불변의 존재를 불러내 개념을 붙인다. 진리라는 개념, 선이라는 개념, 아름다움이라는 개념 ... 그러나 니체는 이렇게 만들어진 개념을 '개념의 미라', 다시 말해 죽어서 박제된 개념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있는 것은 끝없이 생성 변화하는 이 가변의 세계일 뿐, 그 세계 너머의 불변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같은 것은 없다. '이데아'란 이 생성의 세계에서 개념을 끄집어내 그것에 고귀함을 입힌 가공의 것일 뿐이다. 아름다움의 이데아라는 것은 없고 조금씩 차이 나고 서로 모습이 다른, 수없이 다양한 아름다운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여기서 '존재의 철학'에서 '생성의 철학'으로 철학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꾼 가장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니체는 '어떻게 해서 신이라는 절대 개념이 탄생했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려 한다.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존재들을 존재하게 하는 제1의 원인, 제1의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절대자 곧 신이라는 것, 그것이 신학과 철학의 일반적인 추론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놓은 것이다. 신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순간마다 변화하고 흘러가는 이 눈앞의 현상 세계가 먼저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신은 이 세계의 존재 원인을 해명하기 위해 차후에 도입된 개념일 뿐인 것이다. 말하자면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사유의 마지막에 창조한 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니체는 신이라는 가공의 절대자가 등장하는 이런 사태를 두고 "병든 망상가의 미친 짓"이라고 말한다. 왜 미친 짓인가. 공허한 절대자 개념을 신으로 숭배함으로써 눈앞에 펼쳐진 이 지상 세계의 삶 자체를 부정하고 비방하고 능멸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절대 신이라는 관념을 뒷받침해준 것이 그리스 철학이었음을 밝힌다. 현상 세계와 참된 세계를 갈라 현상 세계는 부질없는 것이고 현상 저 너머의 참된 세계만이 진정한 세계라고 주장한 플라톤의 철학을 통해 기독교 신이 성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코르테스의 죽음 찬양에 벌써 플라톤의 이데아 관념, 즉 완전한 참 세상의 관념이 싹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삶 너머의 참된 삶을 상정하는 모든 것은 이 지상의 삶을 비방하고 부정하는 것, 다시 말해 데카당스의 징후, 하강하는 삶의 징후라고 니체는 말한다.
1. 참된 세계에 지혜로운 자, 경건한 자, 덕 있는 자는 이를 수 있다. 그는 그 세계 안에 살고 있으며, 그가 그 세계다.
플라톤이 말한 참된 세계. 이데아의 세계다.
2. 참된 세계에 지금 이를 수 없다. 그렇지만 지혜로운 자, 경건한 자, 덕 있는 자에게는,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약속되어 있다.
플라톤의 관념이 기독교적 관념으로 옮겨가는 과정.
3. 참된 세계는 이를 수 없고 증명할 수 없으며 약속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미 위안으로서, 의무로서, 명령으로서 생각되고 있다.
칸트에 이르러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려면 틀림없이 조재한다고 믿어야 하는 세계로 바뀌었다.
4. 참된 세계, 도달할 수 없다? 어쨌든 도달하지 않았다. 도달하지 않았기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위로하지도 구원하지도 못한다. 의무의 대상도 아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의무를 진단 말인가?
실증주의의 탄생. 왜 우리가 거기에 얽매여야 한단 말인가?
5. '참된 세계'. 더는 아무 쓸모없는 관념. 더는 의무도 아니다. 불필요하고 쓸모없어진 관념. 그래서 반박된 관념. 이것을 없애버리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뿐이다. 그렇게 저 세계를 제거해버리고 나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가.
6. 우리는 참된 세계를 없애버렸다. 어떤 세계가 남는가? 아마도 가상 세계? 천만에! 참된 세계와 함께 우리는 가상 세계도 없애버린 것이다!
이 단계가 니체의 단계이다.
참된 세계는 없고 존재하는 것이 이 세계뿐이니 이 세계를 전부로 알고 받아들이자. 이 세계를 즐겁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다. 자유정신들은 여기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를 없애버리면 '가상 세계', 곧 이 현실, 이 현상 세계만 남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도 사라져버린다는 것, 이것이 니체의 통찰이다.
참된 세계, 신의 세계, 절대자의 존재를 통해 우리는 이제껏 이 현실 세계의 삶에 의미를 구했고 이 삶에 가치를 부여했는데, 그 참된 세계가 사라지면, 이 세계의 의미도 가치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앙이고 공포이고 저주다.
니체의 철학은 바로 여기서 다시 출발하는 철학이다. 이때를 니체는 '정오'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그림자 없이 투명하게 세상의 진실과 대면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니체가 말하는 정오다. 이 정오에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한다.
우리 스스로 그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세우고 실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다. 니체의 철학은 그 가치를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두고 분투한다.
이 짦은 여섯 문단으로 니체는 서구 정신사를 요약했다.
이렇게 논리적 이성이라는 우상을 깨뜨리고, 다시 참된 세계라는 우상을 깨뜨린 니체는 이제 도덕이라는 우상을 깨부스러 달려든다. 니체의 주장은 "도덕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내가 철학자들에게 선악의 저편에 서고, 도덕 판단이라는 환상을 뒤로 넘겨버려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요구는 나에 의해 최초로 정식화된 통찰, 도덕적 사실이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에서 비롯된다." <우상의 황혼>
그렇다면 도덕 혹은 도덕 판단이란 무엇인가? "도덕 판단은 존재하지도 않는 실재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종교적 판단과 공통된다. 도덕은 단지 특정 현상들에 대한 해석이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릇된 해석에 불과하다." <우상의 황혼>
우리가 아주 익숙한 인간적 관점에 서지 않고 자연 세계를 보듯 인간 세계를 보면 이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자연 세계에서는 동물이 식물을 뜯어먹고, 작은 짐승을 큰 짐승이 잡아먹는다. 물이 없으면 말라죽고 못 먹으면 굶어죽는다. 그렇게 먹고 먹히고 태어나고 죽는 그 현상은 어떤 도덕적 의미도 품고 있지 않다.
그렇게 도덕과 무관한 눈으로 인류의 삶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태어나고 살고 고통 받고 괴로워하고 병들고 죽는 그 모든 삶의 파노라마가 그 자체로 자연적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약탈하는 범죄적 행위조차도 자연의 눈으로 보면 자기 생명을 확장하거나 연장하기 위한 지극히 당연한 행위, 마치 사자가 어린양을 잡아먹는 것과 똑같은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관점에 서면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적 관점에서 만들어낸 것, 다시 말해 사태를 도덕적으로 해석한 결과일뿐, 그 자체로 도덕인 것은 아니게 된다. 우리는 도덕규범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 도덕규범은 인간이 나중에 만들어낸 것일뿐,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통찰이다.
그렇다면 도덕 판단이라는 것은 애초에 아무 쓸모없는 것이란 말인가.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증후학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 판단은 증후학으로서는 대단히 가치 있다. 그것은 적어도 자기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해서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 문화나 내면세계의 가장 귀중한 실상을 알려준다. 도덕은 단지 기호 언어일 뿐이며 증후학일 뿐이다." <우상의 황혼>
도덕 판단은 왜 어떤 문화권에서는 어떤 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다른 어떤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지 그 근거를, 그 내적 이유를 드러내 보여주는 일종의 증후 구실을 한다는 이야기다. 도덕 판단은 감춰진 진실을 가리키기 때문에 기호 언어이고, 증상을 통해 질병을 진단하게 해주기 때문에 증후학인 것이다. 요컨대, 도덕 판단을 통해 시대의 질병을 적발해낼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통찰이다. '인간을 개선시키는 도덕'의 사례를 거론.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인간을 '개선시키기'를 원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바로 도덕이 의미하는 바다. ... 어떤 짐슴의 길들임을 그 짐승의 '개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귀에는 거의 농담처럼 들린다. 동물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곳에서 야수들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에 의심을 품는다. 그 야수들은 유약해지고 덜 위험스러워지며, 침울한 공포심과 고통과 상처와 배고픔으로 병든 야수가 되어버린다. <우상의 황혼>
성직자가 '개선시켜' 길들인 인간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실제로 교회가 동물원이었던 중세 초기에 사람들은 어디서나 '금발의 야수'의 가장 그럴 듯한 표본을 찾아 사냥을 했다. ..... 교회는 인간을 망쳐버렸고 약화시켰다. 하지만 교회는 인간을 '개선시켰다'고 주장한다. <우상의 황혼>
니체의 주장은 기독교가 금발의 야수를 도덕의 우리에 가두고 길들여 그 야수성을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력은 그 야수성에 있는데, 야수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생명력도 같이 잃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병들어 누운 존재가 되었다.
니체는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미학적 판단도 하나의 우상으로 제시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것, 추함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어떤 현상도 그 자체로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냥 그 자체로 있을 뿐이다. 인간의 마음이 개입되고 난 뒤에야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판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은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것은 추하다고 느끼게 하는 근거인 것이다. 니체는 여기서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르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생리적으로 고찰해보면 추한 모든 것은 인간을 약화시키고 슬프게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쇠퇴, 위험, 무력을 상기시킨다. 이러면서 인간은 실제로 힘을 상실한다. 추한 것의 효력은 동력계를 가지고 측정해볼 수 있다. 대체로 인간이 풀 죽고 우울해질 때, 그는 '추한 것'이 근접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힘에 대한 그 느낌, 그의 권력의지, 그의 용기, 그의 긍지, 이런 것이 추한 것과 함께 사라지며, 아름다움과 함께 상승한다. 어느 경우이든 우리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의 전제들은 우리의 본능 안에 엄청나게 쌓여 있다. 추함은 퇴화에 대한 암시이자 징후로 이해된다. 아주 어렴풋하게라도 퇴화를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추하다'는 판단을 불러일으킨다. <우상의 황혼>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르는 기준은 힘, 다시 말해 생명력, 그리고 그 생명력을 고양시키려는 권력의지인 것이다. 우리의 권력의지를 자극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권력의지를 지치게 하는 것은 추한 것이다. 이런 통찰을 근거로 삼아 니체는 아름다움가 추함이라는 미학의 영역도 권력의지의 한 발현 영역으로 포섭한다. 미추의 문제는 권력의지의 문제, 힘과 생명력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의 독자성은 근원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예술이 죄다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예술은 칭찬하지 않는단 말인가? 예술은 찬미하지 않는단 말인가? 예술은 골라내지 않는단 말인가? 예술은 두드러지게 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실 예술은 이 모든 일을 하면서 특정한 가치 평가들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키거나 하는 것인데, 이것이 단순히 부수적인 일에 불과하단 말인가? .... 그(예술가)의 가장 심층적인 본능은 예술을 향하고 있는가? 오히려 예술의 의미인 삶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 '삶이 소망할 만한 것들'로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상의 황혼>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그런데도 예술이 목적이 없다거나 목표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우상의 황혼>
예술이란 결국에 삶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삶을 고양시키는 것을 찬미하고 삶을 약화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예술을 위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삶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닌가? 니체는 이 질문을 비극 예술의 경우에 적용한다. " '비극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그는 다름 아닌 끔찍하고 의심스러운 것에 대면해 두려움 없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상태(두려움 없는 상태)를 알고 있는 자는 이 상태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가 예술가라면, 그가 전달의 천재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할 수 있고,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강력한 적수 앞에서, 커다란 재난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문제 앞에서 느끼는 용기와 자유, 이런 승리의 상태가 바로 비극적 예술가가 선택하는 상태이며, 그가 찬미하는 상태다. 비극 앞에서 우리 영혼 내부의 전사가 자신의 사티로스의 제의를 거행한다. 고통에 익숙한 자, 고통을 찾는 자, 영웅적인 인간은 비극과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찬양한다. 오직 그에게만 비극 시인은 그런 가장 달콤한 잔혹의 술을 권한다. <우상의 황혼>
예술이 추한 것, 끔찍한 것, 괴로운 것, 무시무시한 것, 다시 말해 겉보기에 삶의 기운을 꺾고, 생명력을 죽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묘사할 때조차,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을 묘사할 때에야 진정으로 생명력을 자극하는 참된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비극이란 그렇게 재난과 공포를 불러오는 문제 앞에서 꺾이지 않고 용기와 자유를 느끼며 잔혹한 의지로 삶의 환희를 이끌어내는 것, 생명력의 충만 때문에 고통을 찾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 삶의 고난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으로 승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미학의 문제를 권력의지의 문제, 힘의 문제로 환원시키듯이, 니체는 각각의 '시대'도 힘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적극적인 힘들에 의거해 측정될 수 있다. 이럴때 르네상스라는 그토록 풍요롭고 그토록 숙명적인 시대는 위대했던 최후의 시대로 드러난다. 반면에 우리 현대는 자기를 소심하게 염려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시대, 노동과 겸손과 공정성과 과학성이라는 덕을 지닌 시대, 끌어모으고 절약하고 기계처럼 사는 허약한 시대로 드러난다. 우리의 덕은 약함에 의해 제약되고, 약함에 의해 요청된다. <우상의 황혼>
이렇게 한 시대는 힘의 성격을 통해 해석될 수 있다. 니체는 그 시대가 강한 시대인가 아닌가를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서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하는 의지, 내가 거리의 파토스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강한 시대의 특징이다." <우상의 황혼>
니체는 평등이 "본질적으로 쇠퇴에 속한다"고 말했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평등화야말로 인류의 하강이고 부패이고 퇴락이다.
"내가 천민이면 너 역시 천민이어야 한다." 이 논리에 의거해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불평은 어떤 경우에든 쓸모가 없다. 이것은 약하기 때문에 생긴다. 자신의 열악한 처지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든, 자기 자신 탓으로 돌리든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첫번째의 경우는 사회주의자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기독교인이다. 두 경우의 공통적인 것, 즉 무가치한 것은 자기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 고통 받는 자는 어디서든 자신의 조그만 복수심을 식혀주는 위안들을 찾아낸다.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는 그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는다. ... 그런데 기독교인이 '세상'을 유죄라고 판결하고 비방하고 더럽힌다면, 그것은 사회를 유죄 판결하고 비방하고 더럽히는 사호주의 노동자의 본능과 같은 본능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우상의 황혼>
니체는 기독교인과 사회주의자에게 공통되는 본능이 바로 복수심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들보다 위에 있는 것들을 흔들어 아래로 떨어뜨리고 세상을 평등하게 만든다. 그러나 니체와 반대로 볼 수는 없을까. 삶의 조건이 평등해지면 오히려 개인들 사이의 진정한 차이가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 니체는 차이를 오직 위계의 차이, 서열의 차이로만 생각하는데 그 차이를 평등한 지평 위에서의 차이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민주주의 혹은 평등주의 안에서 다름을, 차이를, 다시 말해 삶의 획일성이 아니라 다채로움을 산출하려는 노력어었던 것이다.
니체는 이어지는 절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자유 개념'을 밝히면서,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개념을 정면으로 공박한다. 니체는 자유주의 제도보다 더 철저하게 자유를 손상시키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권력의지의 토대를 허물어버린다. 그것은 도덕 원리로까지 높여진, '봉우리와 골짜기 평준화' 작업이다. 매번 그것과 더불어 무리 짐승이 개가를 올린다. 자유주의, 이것은 솔직히 말하면 '무리 짐승으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우상의 황혼>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자기 책임에 대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 우리를 분리시키는 거리를 지키는 것, 노고와 난관과 궁핍에 냉담해지고 심지어는 삶 자체에 대해서조차 냉담해지는 것, 자신의 문제를 위해 자기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언제라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 자유는 남성적 본능, 싸움과 승리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본능이 다른 본능들, 이를테면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상의 황혼>
니체가 머릿속에 그리는 자유로운 인간은 자유롭게 삶을 음미하고 즐기는 단순하고 소박한 자유인이 아니다. 니체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인간은 잔인한 전사다.
"개인이든 대중이든 자유는 무엇으로 측정되는가? 극복되어야 할 저항에 의해서, 위에 머무르기 위해서 치르는 노력에 의해서, 최고로 자유로운 인간 유형은 최고의 저항이 끊임없이 극복되는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우상의 황혼>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우상의 황혼>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새 힘이 솟는다."
15 이 사람을 보라
"나를 이해했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에게 대항하는 디오니소스."
"니힐리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의 가치들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목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권력의지>
이 작품<우상의 황혼>을 끝낸 후 하루도 허비하지 않고 나는 '가치의 전도'라는 거대한 과제에 즉시 덤벼들었다.
<안티크리스트>를 쓰던 무렵 '가치의 전도'라고 불린 이 계획이 바로 <권력의지> 구상이다.
<바그너의 경우>에서 "음악가가 이제는 배우가 되고, 그의 기술은 점점 더 속이는 재능으로 전개됩니다.
거대한 구상이였던 <권력의지>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만약 니체가 체계를 세워 자기 사상을 건축물로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의 철학은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모순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풍요롭게 사유를 자극하는 사상의 숲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개적으로 거대한 목표들을 세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대개 그 목표를 다시 공개적으로 철회하기에도 너무 약하다. 따라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힐리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의 가치들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목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권력의지>
니힐리즘이란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신이라는 절대자가 죽어버림으로써 절대자가 떠받치던 가치들이 그 근거를 잃어버렸는데도, 그 절대자가 보장하던 가치의 세속화된 형태, 곧 평등, 박애, 구원 같은 것에 기대고 있는 상태가 말하자면 불완전한 니힐리즘이다.
저세상의 구원도 이 세상의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사람은 그 완전한 부정에서 오히려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 정립할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니체의 사유 구조도 루소와 다르지 않다. 신이 우리를 이끌어주던 행복한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의미도 가치도 없는, 신을 잃어버린 삶을 계속 살 수도 없기 때문에 어떤 능동적 결단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니체가 니힐리즘을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바다.
니체에게는 기독교가 현대 세계의 모든 가치, 다시 말해 현대의 도덕과 철학,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같은 현대의 주요 정치 이념의 직접적 뿌리다. 따라서 기독교를 뒤엎는 것이 결국엔 '모든 가치의 전도'가 되는 것이다.
선과 악은 도덕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힘과 관련된 문제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선이란 무엇인가? 힘의 느낌, 권력의지, 힘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 시키는 모든 것, 악이란 무엇인가? 혀약함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힘이 증가한다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만족이 아니고 더 강한 힘을, 평온이 아니고 싸움을, 덕이 아니고 유능함, 다시 말해 도덕이라는 부식제가 없는 덕을 추구할 것 <안티크리스트>
왜 약질과 병골을 멸망시켜야 하는가. 그들이 우리의 힘을 빼앗고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약한 자들에 대한 연민이 문제다. 니체는 단적으로 말한다. "어떠한 악덕보다 더 해로운 것은 무엇인가? 병골과 약질들에 대한 적극적인 동정, 즉 기독교다." <안티크리스트>
니체는 병골과 약질에 정반대되는 인간형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인간형, "더욱 가치 있고 더욱 삶에 적합하며 더욱 확실한 미래를 가진" 예외적인 자는 일찍이 존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인류는 그런 인간이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니체는 말한다. "오히려 그런 존재는 그지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지금까지도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두려움 때문에 정반대 유형을 원했고 그 유형을 양육했으며, 결국 그 유형이 하나의 유형으로 완성되었다." <안티크리스트>
그렇게 완성된 유형이 "길들여진 동물, 무리 짐승, 병든 동물 같은 인간" 즉 "기독교인"이라고 니체는 단언한다.
니체는 기독교라는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그의 삶이 승리할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이런 가혹한 책을 쓴 것이다.
니체는 파스칼의 타락 바로 그것이 데카당스라고 말한다. "하나의 동물이, 하나의 종이, 한 개체가 자신의 본능을 상실하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선호할 때 나는 그것을 타락했다라고 부른다." <안티크리스트> 그러면서 니체는 이 타락이라는 데카당스의 반대 되는 것으로 힘을 향한 본능 곧 권력의지를 제시한다.
"나는 삶 자체가 바로 성장과 존속과 힘의 축적과 힘을 향한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권력의지가 결여된 곳에는 쇠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의지가 인류의 모든 최고 가치들 가운데 결여돼 있다는 것이며, 쇠퇴의 가치들이, 니힐리즘의 가치들이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안티크리스트>
권력의지야말로 기독교의 허무주의적 가치들을 뚫고 나아가게 해주는 능동적인 가치다.
기독교는 연민의 종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연민은 생명감의 원기를 북돋아주는 고무적 정서와는 대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억압적인 작용을 한다. 사람은 연민을 느낄 때 힘을 잃는다. 괴로움을 겪느라고 이미 삶이 받은 힘의 손실은 연민 때문에 더더욱 커지고 늘어난다. <안티크리스트>
왜 니체는 연민에 반대하는가. 연민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슬픔에 빠뜨리고 괴로움에 빠뜨리고 힘을 빼앗기 때문이다.
대체로 연민은 도태의 법칙인 진화의 법칙을 방해한다. 그것은 몰락에 이르러 있는 것을 보존하고, 삶의 상속권을 박탈당한 것과 삶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것을 변호한다. 그리고 연민은 아주 많은 종류의 실패자들을 삶 속에 엄청나게 많이 살려둠으로써 삶 자체에 암울하고 의심스러운 모습을 부여한다. <안티크리스트>
사람들은 연민을 미덕으로 세웠고, 더 나아가 그것을 으뜸가는 미덕, 모든 미덕의 바탕과 근원으로 만들어놓았다. "삶의 부정을 기치로 내건 니힐리즘 철학의 관점"이 연민을 최고 도덕으로 올려놓았다. 연민은 삶의 부정이며 그 자체로 니힐리즘이다.
니체는 기독교의 도덕이 만들어낸 현대 이념을 공격한다. 그는 대놓고 사회주의를 지목해 증오한다고 고백한다.
"오늘날 천민 중에서 내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노동자의 본능과 기쁨과 자신의 보잘것없는 상태에 대해 느끼는 만족감을 뒤집어놓고, 그에게 시기심을 심어주고 그에게 원한을 가르쳐주는 찬달라적 사도들인 사회주의자 천민이다." <안티크리스트>
평등이라는 근대의 보편 이념 자체를 거부한다. 사회주의 이념은 평등 이념을 보편적으로 실현하려고 등장한 이념이기 때문에 니체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니체는 불평등한 권리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부당하다. 그래서 니체는 악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놓는다. "악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미 그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했다. 약함에서, 시기심에서, 원한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라고." <안티크리스트>
"기독교인과 아나키스트, 그들은 둘 다 데타당들이며 둘 다 해체시키고 오염시키고 쇠약하게 하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둘 다 흡혈귀이며, 둘 다 똑바로 서 있거나 웅장하게 치솟아 있거나, 지속적이고 삶에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면 그 어느 것이나 아주 격렬하게 증오하는 본능이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흡혈귀였다." <안티크리스트>
마르크스는 종료를 없애려면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니체는 현실을 바꾸려면 종교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 앞에서의 영혼의 평등'이라는 그 허위, 그 모든 저열한 자들의 원한을 위한 그 구실, 결국 혁명으로, 현대적 이념으로, 사회 질서 전체의 쇠퇴 원리로 되고 만 그 폭발성 개념, 그것이 기독교의 다이너마이트다. 기독교의 '인도주의적' 축복이다. 인간성으로부터 자기모슨을, 자기 모독 기술을, 그리고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거짓을 향한 의지를, 선하고 솔직한 모든 본능에 대한 반감을, 경멸을 길러내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안티크리스트>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홀로 가겠다! 너희도 각각 홀로 길을 떠나라!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게 맞서라! <이 사람을 보라>
니체는 공격성 또는 호전성과 복수심 또는 원한 감정(르상티망)을 구분한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공격성은 강함에서, 복수심은 약함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복수심과 원한이 필연적으로 약함에 속하듯이 공격적 파토스는 필연적으로 강함에 속한다." <이 사람을 보라>
투쟁은 결코 힘들의 적극적인 표현이 아니고 긍정하는 권력의지의 표명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결과는 주인이나 강자의 승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투쟁은 강자들을 이기는 수단이다. ... 니체는 자신이 투쟁하기에는 너무 예의 바르다고 말한다. 그는 또 '투쟁을 배제한' 권력의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두 가지 전형, 곧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 비극적 인간은 가장 가혹한 고뇌도 여전히 긍정한다. 그는 그렇게 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고 풍만하여 신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 십자가에 달린 신은 삶의 저주이며 스스로를 이 삶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표시이다. 갈기갈기 찢긴 디오니소스는 삶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영원히 되살아날 것이고 영원히 파괴로부터 돌아올 것이다. <권력의지>
16 정신붕괴
"나는 원합니다. 광기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어주면서,
존중되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은 광기다.
어떤 윤리의 질곡을 부수면서
새로운 법을 부여하려는 저항하기 어려운 유혹에 사로잡혔던
저 탁월한 모든 인간들에게는 '그들이 실제로 미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을 미치게 하거나 미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침놀>
정신분석학이나 분석심리학뿐만이 아니다. 20세기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니체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도 니체의 시대 안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조만간 끝날 것 같지도 않다.
그의 삶만큼이나 그의 사상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뜨겁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차갑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정신이 화상을 입거나 동상에 걸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사상의 미궁을 끝까지 탐험해보는것은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아득한 공포와 흥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학의 시간 (0) | 2022.10.19 |
---|---|
비탈릭 부테린 지분증명 책 서문 (0) | 2022.10.13 |
니체극장 PART3 차라투스트라의 탄생 (0) | 2022.09.11 |
니체극장 07 즐거운 학문 & 08 루 살로메 (0) | 2022.09.08 |
니체극장 06 아침놀 (0) | 2022.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