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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릭 부테린 지분증명 책 서문

2022년 9월 27일 출간된 책 서문입니다.

 

19세에 이더리움을 만들어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 친구 집 소파 신세를 지기도 하는 비탈릭 부테린은 원래는 글을 쓰고 싶어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아버지의 권유로 비트코인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비트코인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코인을 돈 주고 사거나, 빌리거나, 채굴하는 대신 온라인 포럼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비트코인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대가로 제게 비트코인을 고료로 지급해주실 분이 있을까요?"

 

그가 이런 제안을 했던 2011년, 일부 사람들이 그에게 응답했다. 이후 부테린은 계속 글을 써나갔다. 디지털 잡지인 <비트코인 매거진>을 공동 창립할 때까지 말이다. 당시 크립토는 규모가 작은 비주류 서브컬처 중 하나에 불과햇지만, 그가 만든 <비트코인 매거진>은 이업계를 대표하는 잡지였다. 부테린은 대학 신입생 시절보다 이 새롭고 까다로운 인터넷 머니에 더 관심을 보였다.

 

부테린은 잡지 기자로 활약하던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과 자주 대화를 나눴고, 대화를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지난 몇년 동안 블로그, 포럼,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는데, 이는 이더리움에 대한 열광적인 팬덤을 만들어내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다. 만약 이더리움이 지금의 수준을 넘어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사회 기반 장치로 자리 잡는다면 부테린의 아이디어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논쟁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작가인 비탈릭 부테린에 대한 이야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졌을 당시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인물이 비트코인의 원형 모델을 공개했다. 그의 목표는 정부나 은행을 만드는 게 아니라 암호학적 컴퓨터 네트워크를 활용한 체계적인 화폐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추후에 암호화폐라고 불리게 되었다. 자유 지상주의와 금본위제를 선호하는 사람들과 사이버펑크 지지자들은 디지털 채굴, 제한된 공급, 현금과 유사하게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이 시스템에 빠져들었다. 부테린 역시 이 시스템에 매력을 느낀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13년 말쯤 비트코인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면서 부테린은 블록체인 기술이 단순한 화폐의 기능을 넘어 더 큰 무언가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이 아이디어는 지금까지는 없었던 인터넷 기반 조직, 회사 또는 경제 전체를 구축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테린은 이에 대해 글을 썼다. 그가 내놓은 초기 <이더리움백서>는 출시와 동시에 암호화폐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백서를 통해 전통적인 기업, 투자자, 법률에 대한 의존도는 낮추고, 플랫폼 사용자들의 비중을 높인 시스템을 소개했다. 이더리움은 비트코인과 철학적 기반이 달랐기 때문에 문화도 색달랐다. 이더리움 문화는 금과 광산, 채굴 같은 상징을 소비하던 비트코인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로봇, 유니콘, 무지개 등 부테린이 좋아하던 티셔츠 디자인을 플랫폼 마스코트로 사용했다.

 

2015년에 이더리움 메인넷이 가동된 이후, 비슷한 목표를 지향하는 많은 경쟁 블록체인들이 이더리움을 이기고자 하는 '이더리움 킬러'를 자처하며 등장했지만 아무도 꿈을 이루지 못했다. 코인 시가 총액은 아직 비트코인에 비해 작지만 이더리움을 기반으로 구축된 모든 제품들과 커뮤니티 토큰의 가치를 합친다면, 이더리움은 크립토라는 새롭고 특이한 경제에서 가장 큰 덩치를 차지하는 프로젝트에 해당한다. 부테린은 지금까지 이더리움이 보여줬던 여러 실험을 이끌었고, 역설적이게도 탈중앙화 가치를 추구하는 이더리움 커뮤니티에서 '자비로운 독재자'가 되었다. 공식적인 직책보다 그가 심어주는 신뢰가 이를 가능케 했다. 이 책에 수록한 그의 글들은 그가 신뢰를 쌓는 데 핵심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더리움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테린은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 문제들과 씨름해야 했다. 가령 그는 자신이 만든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학습해 시스템을 개조시키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를 아주 급진적인 수준까지 재해석할 수 있게끔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조직화를 선택하는지에 대해서는 끼어들지 않고 엄격하게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 책에도 잠깐 등장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중립성' 개념은 이더리움 시스템 설계를 위한 원칙 중 하나였다. 아울러 부테린이 이더리움의 리더로서 실제로 수행했던 역할이기도 하다. 사실 크립토 업계에서 부테린이 가진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이런 철학은 구현하기 쉽지가 않았다. 이더리움 초기 시절 이더리움재단의 인사 결정에서부터 대규모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까지 부테린이 보인 리더십은 대중에서 이더리움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부테린 본인은 이런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노력했다. 이더리움 류의 암호화폐 시스템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익을 좇는 존재라고 가정하고 있는데, 정작 이더리움을 만든 부테린은 크립토 기반의 미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바라는 게 없는 금욕주의자에 가깝다.

 

그러나 부테린이 꿈꾸는 크립토 기반의 미래가 반드시 도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더리움 메인넷이 공개되기 1년쯤 전인 2014년 초, 미국에서 열린 <마이애미 비트코인 콘퍼런스>에서 부테린은 이더리움을 처음 소개하면서 이 플랫폼으로 만들 수 있는 놀라운 것들에 대해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영화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인간을 공격하는 인공지능 스카이넷을 언급하며 소개를 마쳤다. 부테린은 모종의 경고를 담은 이 농담을 이후에도 자주 사용했다.

 

이더리움은 양면적이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유토피아부터 디스토피아까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더리움 기반으로 만든 토큰들은 자체적으로 총 공급량을 설정할 수 있다. 토큰 공급자들은 이런 설정을 통해 인위적인 희소성을 만든다. 동시에 이런 특성들을 이용해 토큰을 사용하는 커뮤니티들은 대규모 자본 투자를 유치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위험한 인터넷 화폐를 사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이나 살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이더리움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시스템인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시스템은 사용자들에게는 전례 없는 포용성을 제공한다. 아울러 사용자와 권력을 공유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시스템의 발명을 촉진한다. 이더리움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에너지가 소비된다. 이는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탄소배출과 오염에 대한 비용을 측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정작 많은 정부가 이런 작업을 거부하고 있는 사이에 말이다. 이더리움은 많은 졸부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조세회피처에 모여 현지 주민들이 물건을 살 수 없을 만큼 물가를 높여놓는 사치스러운 행동으로 악명 높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더리움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든 국경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이더리움은 사용자가 최종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금융시스템이기도 하다.

 

이더리움은 기술을 잘 알고 있고 빠르게 새로운 시장으로 진입하는 엘리트들에게 높은 이익을 제공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시장을 지배하는 기술 기업들을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더리움은 뭔가 쓸모있는 것들로 구성된 실질적인 경제 생태계를 만들기도 전에 투기적인 투자 환경부터 만들어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더리움은 주식시장보다는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소유권을 부여한다.

 

이더리움은 거의 가치를 매길 수 없었던 디지털 수집품들에 대해 막대한 비용을 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결과 오픈 액세스 문화를 만들었고 공유를 지원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탄생했다. 이더리움은 결과적으로 미래 세대에 비용을 떠넘기면서 당대의 얼리어답터에게는 부유함을 약속한다. 그러나 미래 세대에 비용만 남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전 세대가 갖지 못했던 도구와 플랫폼을 일찌감치 활용할 수 있다. 거기서 가치를 만들어내는지 여부는 그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이런 모순점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본인과 봉인이 몸담은 커뮤니티를 위해 어떤 선택이 유리할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모순들은 때로는 성가시고 짜증을 유발할 수 있지만 동시에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어느 쪽이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블록체인 기반 시스템의 핵심에는 합의 메커니즘이 있다 합의 메커니즘이란 블록체인의 블록 생성 작업을 하는 컴퓨터들이 상대의 데이터 처리를 신뢰할 수 있도록 미리 정해놓은 합의 방법을 말한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뿐 아니라 모든 암호화폐는 데이터 조작으로부터 블록체인을 보호하기 위해 합의 메커니즘 설계에 심혈을 기울인다.

 

누가 누군지 모르는 컴퓨터들이 모여 있는 플랫폼에서 중앙에서 조정해주는 권력자 없이 합의를 도출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트코인은 많은 컴퓨터가 시스템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작업증명(PoW)이라고 불리는 합의 메커니즘을 사용한다. 블록마다 매우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고, 이 문제를 푸는 컴퓨터가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데이터를 등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많은 컴퓨터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경쟁하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이들을 '채굴자'라고 부른다. 채굴자들은 비트코인 네트워크와 보안성 유지에 이바지하고 보수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국가 규모의 전기를 소비하고 상당한 탄소를 배출한다.

 

작업증명은 가장 오래된 합의 메커니즘 중 하나다. 이더리움 역시 메인넷을 공개하던 당시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작업증명 방식의 합의 메커니즘을 도입했다. 그러나 부테린은 이미 이더리움 메인넷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전부터 새로운 합의 알고리즘을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이더리움 개발팀이 개발 중이던 새로운 메커니즘의 이름은 지분증명(PoS)이었다. 지분증명에서는 컴퓨터의 연산력 경쟁이 아니라 토큰 보유량으로 해당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한다. 

 

지분증명에서는 토큰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블록체인 생성 권한이 커진다. 만약 대량의 토큰을 보유한 이가 조작, 해킹 등 시스템에 악의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된다. 어느 정도 악의적인 행동이냐에 따라서 그가 보유하고 있는 토큰을 대부분 잃게 될 수도 있다. 작업증명과 비교했을 때는 채굴에 필요한 에너지가 매우 적다는게 장점이다.

 

합의 메커니즘은 시스템 설계에 대한 기술적인 설명에 가깝다. 다만 부테린은 이 책을 통해 합의 메커니즘을 노동, 헌신, 신념, 협조, 혁신, 낭비, 민주주의, 금권정치, 커뮤니티, 불신 등의 개념과 엮어 일종의 은유처럼 표현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현실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테린의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를 경계하고 있고, 그가 쓴 은유들 역시 이런 취지에서 사용되었다.

 

나는 이 책의 원고를 부테린과 상의해 선정했다. 그는 사회이론가나 활동가 같은 면모가 있다. 그는 행동하면서 생각하고, 진행하면서 결과를 파악하는 사람이다. 지금의 크립토 문화는 대부분 젊고 부유한 특권 계층 남성을 주축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부자에게 유리하게 짜여진 지금의 금융시스템 문제를 크립토를 통해 해결한다는 사실이 종종 못 미덥게 보이기도 한다. 부테린은 이런 문화를 반영한다. 부테린은 기술적으로 전문적인 글을 쓰기도 했지만 일반인을 위해 쓴 글도 많다. 그럼에도 간혹 이해하기 어려운 기술적인 내용들이 등장하는데 이해하기 힘든 만큼 깨달았을 때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부테린은 복잡한 수식으로 구성된 공식을 상냥하고 명쾌하면서 재미있게 설명한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문체의 일관성을 위해 최소한의 편집만을 겨쳤다. 그가 처음에 썼던 글들은 크립토에 어느 정도 친숙한 사람들을 위해 작성된 것이기에 전문용어에는 편집자 메모와 주석을 남겼다.

 

크립토가 주류 경제 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블록체인이라는 램프의 요정을 다시 램프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논쟁이 다시 점화되는 분위기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부테린과 함께 어떻게 크립토 기반의 인프라를 구현할지를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이게 정말 새로운 사회적 인프라의 시작이라면 지금 크립토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 정치적, 문화적 습관들은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부테린의 고찰에 따르면 아직 여러 가능성이 열린 상태다.